파타고니아 이야기 - 자연에게 배운, 영원히 지켜내야 할 것들
이본 쉬나드 지음, 추선영 옮김 / 한빛비즈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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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My Review MDCCLXXXIII / 한빛비즈 149번째 리뷰] 지구환경을 생각하는 기업이 있다면, 그 기업의 제품을 소비하는 것은 지구환경을 위해 '좋은 일'일까? 이런 고민에 빠진 기업이 있다. 바로 '파타고니아'다. 기업에서 만든 제품은 어쩔 수 없이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 '값싼 원재료'를 이용해서 '온갖 화공약품'을 첨가해서 '대량생산'을 해서 전세계에 많이 팔아재낀다. 이는 거의 모든 기업들의 숙명이다. 그래야 임직원을 비롯해서 기업에 고용된 '노동자'들에게 안정된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고, 정부에 세금을 납부해서 국가를 경영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이런 경제적인 효과가 있기에 어쩔 수 없이 기업들은 '지구환경'보다는 '자신들의 이윤'을 위해 마구잡이로 제품을 생산하고, 그 제품을 '대량'으로 소비하도록 갖은 애를 쓰기 마련이고, 이런 일련의 활동으로 인한 '환경파괴'나 '질 낮은 나쁜 제품' 따위가 지구환경과 인간의 건강을 해치더라도 살짜쿵 눈감아주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이렇게 당연시 되던 관례에 제동을 걸며 "지구환경을 위해 우리가 만든 제품을 사지 말라"는 캠페인을 벌이는 기업이 등장했다. 바로 '파타고니아'다. 파타고니아는 "최고의 제품 생산, 불필요한 환경 피해의 최소화, 환경보호를 위한 활동"을 기업이념이자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여러 차례의 경제위기와 금융위기를 겪으면서도 꾸준한 환경보호에 앞장 서 온 기업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파타고니아는 어떻게 기업을 운영할 수 있는 걸까? 바로 '제품의 라이프 사이클'에서 비결을 찾는다. DON'T BUY THIS JACKET(이 재킷을 사지 마세요)라고 광고를 내면서, 제품 소비를 줄이고 의류 수선 및 재사용을 해서 궁극적으로 의류를 '재활용'한다는 개념을 선보였다. 그렇게 재활용하면서도 '제품의 기능'이 떨어지면 안 되는 등산용품을 만드는 기업이기에 재료의 품질만큼은 보장되어야 한다. 왜냐면 등산용품은 제품의 기능이 곧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석유 원료'로 네오프렌 같은 걸을 만들지 않고 '천연고무'를 사용해서 제품의 질이 떨어지지 않고 성능도 최고로 높이며, 최종적으로 지구환경에 해악을 끼치지 않으려 최선을 다해 제품을 만든다. 그리고 또 다시 이 제품들을 '재활용'하고 손수 수선하면서 불필요한 환경 파괴를 일으키지 않으려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이런 믿음을 바탕으로 소비자들은 '파타고니아' 제품을 선호하는 것이다.

  사실 '파타고니아' 제품이라고 해서 환경파괴를 전혀 일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재활용'을 기반으로 삼는다고 해도 결국엔 제품생산과정에서 지구환경에 해악을 끼치는 '석유원료'와 '화공약품'을 쓰지 않을 수 없고, 제품을 유통하는 과정에서도 물류창고에서 전세계 매장까지 '탄소배출'을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파타고니아'는 가급적 자사의 제품을 사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하는 것이다. 안 사면 안 만들고, 안 만들면 지구환경은 더욱 좋아질테니 말이다. 그러나 '파타고니아'에 취직한 일꾼들은 안정된 고용이 보장되지 않은가 말이다. 기업 경영이 침체되면 일자리 보장은커녕 기업이 망할지도 모르는데, 이렇게나 무책임한 경영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데 파타고니아는 이미 1990년대 최고의 성장을 이룬 터라 이런 고민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는 모양이다. 90년대까지는 기업 성장을 위해서 '환경 파괴'를 일삼던(?) 기업 가운데 하나였지만, 자신들의 성장이 지구환경에 해악을 끼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르자 '기업 성장 0%'로 못을 박고 제품 생산에 제동을 걸고 '재활용'을 하는 것으로 우선 순위를 바꾸었다.

  어떻게 기업 경영주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그건 바로 '손주의 탄생' 때문이다. 자신은 자연을 너무 사랑해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스포티한 삶을 살았지만, 손주가 성장했을 때에도 지구가 그런 아름다운 환경을 보존하고 있을지 장담할 수 없게 되자 '경영 마인드'를 바꾼 것이다. 물론 이로 인해서 '파타고니아'가 망할 수도 있다. 신제품을 선보이고 매출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기후변화를 해결할 방법이 있는데도 이를 실천으로 옮기지 않는 '책임감' 없는 기업이 많아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면, 자신의 기업만이라도 그 책임감의 무게를 무겁게 받아들이고 실천에 옮기고자 한 것이다. 파타고니아는 말한다. "지구가 죽어버리면 기업도 존재할 수 없다"고 말이다.

  물론, 고작 하나의 기업이 실천에 옮기고 참여해서 '기후위기'를 극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소비자는 다르다. 기업은 어쩔 수 없이 먹고 살기 위해 '이윤추구'를 멈출 수 없다고 해도 소비자는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고 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쓰는 '아나바다 운동'으로 충분히 실천할 수 있다. 우리는 쓸데없이 소비를 많이 하고 있다. 소비가 활성화되는 경제가 살아나고 풍요로운 삶을 통해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그렇게 풍족하다 못해 헤프게 산 대가로 지구는 병들었고 '기후위기'가 찾아왔다. 그런데도 여전히 풍요로운 삶을 추구한다며 소비를 부추길 셈인가. 이젠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말도 거짓으로 판명이 났다. 발전을 하며 파괴된 자연환경만큼 훼손된 자연환경을 '복구'하며 되살리는 일을 실천한다면 우리는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다는 장밋빛 미래를 그려왔지만, '지속적인 발전'은 '끝없는 자연환경 파괴'를 일삼는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지난 2~30년 동안 경험할 뿐이었다. 그 결과, 2035년이면 기후위기는 상상을 초월하는 자연적인 재앙으로 우리 눈앞에 현실이 되어 펼쳐질 것이다. 2~3개의 태풍이 동시에 불어닥칠 것이고, 그로 인한 홍수와 해일이 전세계 주요도시들을 집어 삼킬 것이며, 화산폭발과 지진은 일상이 되어 하루가 멀다하고 뉴스를 장식할 것이다. 거기에다 사계절이 실종되고 50도가 넘는 불볕더위와 영하40의 맹추위가 반복되는 기상이변으로 인간은 살아남기 힘든 지구환경으로 바뀌고 말 것이다. 멀지 않았다. 과학자들이 예측한 시기는 2035년이고, 이제 불과 10년 남짓 남았지만, 이상기후의 도래는 점점 앞당겨지고 있다는 사실만을 해가 거듭할수록 '재확인'하고 있으니 그 시기가 앞당겨질 가능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지금도 '탄소중립'이니 '탄소제로'니 전세계가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긴 하다. 허나 완전한 중립을 약속한 날짜는 빠르면 2035년, 늦어도 2050년에는 중립을 이루겠다는 노력일 뿐이다. 이 정도 노력을 가지고 기후위기가 해결될 것 같진 않다. '파타고니아'도 이런 문제가 그 정도 노력 가지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정도로 과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혁명의 시작은 '농업'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화학비료와 살충제를 남발하는 기존의 농법이 아닌 '땅의 힘'을 되살리는 과거의 농법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땅을 되살리는 방법을 '농부들'은 아주 잘 알고 있다고도 말한다. 화학비료와 농약 대신 퇴비 주기, 윤작, 방목 기법 등으로 농부들은 2년 만에 다시 건강한 토양으로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으며, 그런 건강한 토양에서 생산된 작물이 더 건강하고 더 영양가 높은 작물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이미 증명되었다면서 말이다. 더구나 이런 농법은 가뭄에도 물을 더 적게 쓰고,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이렇게 건강해진 토양은 '더 많은 양의 탄소'도 격리시킬 수 있기에 지구온난화를 막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런 방법으로 되돌아간다면 일손이 더 많이 필요하게 되어 '농작물의 가격'이 올라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높아진 곡물가격에 '가공식품의 가격'도 덩달아 오르고 소비자들은 더욱더 허리띠를 졸라매야하는 상황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전세계의 농법 변화가 일자리의 양상을 달라지게 만들 것이다. 도시로 쏠리던 인구가 농촌으로 되돌아가는 현상이 벌어질 것이다. 왜냐면 '일자리'가 농촌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곡물의 유통망을 좁혀서 '로컬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방법으로 유도하면 하릴없는 '탄소발자국 낭비'도 현저히 줄어들게 될 것이다. 그렇게 그렇게 '지구환경'이 회복단계로 접어들면 우리 모두는 더 살기좋은 세상에서 과거처럼 살게 될 것이다. 파타고니아가 꿈꾸는 세상은 바로 이런 것이다.

  이 책에는 새로운 지혜가 없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만 담고 있다. 파타고니아가 이룩하려는 혁명적인 일들은 사실 우리 모두가 이미 '해왔던 방식'일 뿐이다. 단지 그것을 '잊고' 살아왔을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잊은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터전, 지구를 되살리기 위해 사업을 합니다"라는 파타고니아의 사업마인드는 별난 것이 아니라 희망찬 것이다. 이런 파타고니아가 망한다면 지구도 이미 사람이 살기 어려워졌을 것이 분명하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면, 그건 '파타고니아'가 아니라 '소비자'다. 소비자가 파타고니아와 같은 기업의 제품만 구입하려고 들면 온세상의 기업들은 '파타고니아'처럼 사업하려 들 것이다. 그러니 소비자가 달라져야 한다. 이런 멋진 기업을 살려내지 못한다면 여러분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의 대부분의 내용은 '등반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회사 창업주가 이산을 오르고 저산을 올랐다는 내용만 한가득이다. 그런데도 이 책은 '등반 이야기'가 아닌 '파타고니아 이야기'다. 파타고니아의 기업가들이 젊은 시절에 경험했던 '아름다운 자연'를 선보이며, 이렇게 아름다운 지구를 지키기 위해 '환경보호'에 앞장서는 기업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는 것을 강조한 셈이다. 산악등반과 같은 스포츠를 즐기면서, 그 즐거움을 자신만 즐기는 것이 아닌 자신의 손주도 즐길 수 있도록 '지구환경'에 더욱 관심을 갖고 반드시 '환경보호'를 해내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지구에 흠뻑 빠지는 경험이 없었다면 그런 '사업마인드'도 갖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독자분들께도 이 아름다운 지구를 지키기 위해서 먼저 충분히 감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정말 멋진 생각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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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4-06-22 2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정말 멋진 생각입니다! 감동이네요.
다 알고 있지만 실천하기 힘든...
각성해야겠습니다. 소비자로서.
잘 읽었습니다^^
 
나를 채우는 하루지식습관 2 : 나아가기 - 1일 10분, 술술 읽히는 이야기 교양 나를 채우는 하루지식습관 2
박선영 외 지음 / 한빛비즈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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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XXII / 한빛비즈 148번째 리뷰] 독서는 꾸준해야 한다. 말이 나온 김에 한 사람이 평생동안 읽을 수 있는 책의 수를 생각해보자. 요즘 '100세 시대'라고 외쳐대고 있으니 100살까지 산다고 계산해보겠다. 하루에 1권씩 독파하는 독자가 있다고 치자. 1년이 365일이니 1년동안 365권의 책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100을 곱하면 36500권을 읽을 수 있다. 4년마다 윤달이 낑겨 있으니 25권의 책을 더하면, 모두 36525권의 책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태어나자마자부터 읽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 시력과 체력이 감퇴되어 책읽기가 힘들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10살 전후부터 시작해서 70세까지 꾸준한 독서를 할 수 있다고치면 한 사람은 대략 60년 정도 읽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럼 40년치가 깎여서 365권X40년+10권(윤달)=14610권을 빼야 한다. 그럼 대략 22000권 정도다. 하지만 어찌 사람이 매일 한 권씩 읽을 수 있겠는가. 이틀에 한 권꼴이면 절반인 11000권이고, 일주일에 한 궐꼴이면 약 3000권 정도, 한 달에 한 궐꼴이면 약 700권 정도밖에 읽을 수 없다.

  그럼 이제 거꾸로 생각을 해보자. 한 사람이 몇 권의 책을 독파해야 '지적인 담론'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지혜로워질 수 있겠는가 말이다. 책 한 권 읽어가지고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을 것이다. 물론 처음으로 '완독'한 기쁨은 하늘을 찌를 정도로 기쁠 테지만, 안타깝게도 담론을 나눌 만큼 똑똑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10권쯤 읽으면 굉장히 뿌듯해질 것이다. 어디가서 취미가 고상하게도 '독서'라고 자랑하고 싶어질테니 말이다. 하지만 고작 10권의 지식을 쌓았다고 해박한 지적교양을 뽐내기 힘들 것이다. 100권쯤 읽으면 어떤가? 자랑할 만한 수에 도달하긴 했지만, 여전히 지적교양으론 어딘가 부족한 수임에 틀림없다. 그럼 200권, 300권쯤 읽으면 지적담론을 논할 수 있을까? 오, 가능해진다. 해볼만 하다. 하지만 세상은 넓고 대단한 사람들은 차고 넘친다. 자신이 2~300권의 책을 읽었다고 자랑할 즈음에 이미 1000권을 독파한 지식인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하는 말과 글에 귀를 기울이고 눈을 씻고 다시 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렇게 1000권의 책을 독파하는 순간 '지적담론'을 나눌 만큼 자신감이 붙게 될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이미 많이 늙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루에 한 권씩 읽었다면 3년 정도면 돌파할 수이건만 일주일에 한 권씩 읽으니 어느새 30대에 접어든 자신을 발견할 것이고, 한 달에 한 권씩이면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물론 책읽은 숫자과 지적교양과의 직접적인 상관관계는 증명된 바가 없음을 밝힌다.

  문제는 '속도'다. 교양을 쌓았어도 자신이 충분히 젊지 못하다면 그 지적교양을 얻은 것을 온전히 '자신'을 위해서 써먹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적어도 20대에는 1000권을 독파할 정도로 지적교양을 쌓아야 남은 여생을 지적교양으로 온전히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셈이다. 그렇다. 10대에서 20대로 접어드는 십 몇년 사이에 1000권 이상의 책을 독파할 정도로 '지적교양'을 쌓아야만 한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그렇다면 10년 동안 1000권의 책을 읽으려면 적어도 1년에 100권 정도를 책읽는 습관으로 길들여야 한다. 1년은 52주이므로 '일주일에 2권 정도'의 책을 읽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다시 말해, 학창시절에 엄청난 학업 분량을 충분히 소화시키면서 책읽는 습관까지 너끈히 해내야만 한다는 '또 하나의 결론'에 다다른다. 시험기간이고, 가족여행이고, 쉴틈없이 부지런하게 읽어대야 한다.

  반가운 소식은 대한민국 학생들의 '독서력'이 예전에 비해 상당히 높아졌다는 사실이다. 학창시절에 '참고서'를 제외한 서적을 연평균 90권 이상을 읽는다고 한다. 위에 열거한 수치가 '불가능'은 아니라는 얘기다. 굉장히 고무적인 소식인데 안타까운 것은 초등에서 중등으로 올라오면 절반으로 줄어들고, 중등에서 고등으로 진학하면 거기에 또 절반으로 줄어들며, 대학생 이후 성인들의 독서력은 고작해야 한 달에 1~2권꼴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그마저 대한민국 성인의 '독서력 편차'는 심각한 수준이어서 많이 읽는 사람이 한 달에 30권을 읽고, 안 읽는 사람들을 견인해서 전체 평균이 1~2권 정도라는 것이다. 다른 선진국들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많은 책을 읽는 경향이 뚜렷한데, 대한민국은 여전히 '거꾸로'다. 성인이 되면 책을 거의 읽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민국은 '지적담론'을 나눌 수 있겠는가? 날로 심각해지는 사회문제와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빈부격차, 국내외를 막론하고 대한민국을 위기로 내몰고 있는 현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해결방법을 온국민이 함께 고민하고 결정해야 할텐데, 제대로 된 논의조차 할 수 있는 지적능력들을 갖고 있냔 말이다. 대통령 하나 잘 뽑았냐 못 뽑았냐를 따지는 것으론 아무런 해결방법을 내놓을 수 없다. 국민들 개개인이 뛰어난 지적담론 실력을 뽐내야 권력자들과 엘리트들이 국민들이 무서워서라도 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겠느냔 말이다. 속여 먹기 딱 좋은 지적수준을 갖고 있으니 되도 않는 헛소리를 지껄이며 국민들을 윽박지르고 말을 듣지 않으면 법적조치를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 아니냔 말이다. 서당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개소리 삼 년동안 국민들은 뭘 배웠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똑같은 300만 원이라도 권력자가 받으면 뇌물이고, 배우자가 받으면 선물이란다. 공직자윤리법에 적용해도 마누라는 공직자가 아니니 처벌할 수 없단다. 부부는 일심동체 아니었던가? 그럼 그동안 본인이 아닌 자식이 받아먹고 형제가 받아먹고 친인척이 받아먹고, 그래서 '처벌' 받은 사람들은 억울한 사람들이었단 말인가? 이걸 '권력비리'가 아니니 수사선상에 올리지 못한다고 못을 박는 사람들은 도대체 머리에 ㄸ...쿨럭쿨럭

  이 책 <나를 채우는 하루지식습관>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는 걸 밝혀두는 바다. 그보다는 더 심오한 내용을 다루며 하루 10분이면 머리에 쏙쏙 담을 수 있는 '하루지식습관'을 기를 수 있는 유용한 책이라는 사실을 꼭 알아두셨으면 좋겠다. 다시 원론으로 되돌아가서, 교양 많은 책을 꾸준히 읽는 습관이 매우 중요하며, 그 습관에 '속도'를 붙여 20대에 지적담론을 나눌 수 있는 수준까지 끌어올려야만 한다는 사실을 몇 자 적어보았다. 그리고 이 책 <나를 채우는 하루지식습관 2>에서는 '나아가기'라는 부제를 달았다. 1권이 '홀로서기'였다면, 2권에서는 '나아가기'다. 마치 어린아이가 두 발로 우뚝 서는 기쁨을 1권에서 채웠다면, 2권에서는 위풍당당하게 발을 내딛으며 걸어가는 즐거움을 맛보라는 것처럼 말이다. 그에 걸맞게 2권에서는 '인류의 발자취'에 관한 내용을 주로 담았다. 호모 사피엔스가 두 발로 걸어서 전세계로 뻗어나가는 내용부터 교통의 발달로 세계를 누비다 드디어 우주까지 누비게는 되는 교양지식들을 말이다. 어찌보면 '서고', '걷고', '달리고', '날으는' 단계별로 시리즈가 차곡차곡 진행될 것 같은데 벌써 우주까지 지적영역을 확장시켰으니 너무 앞서간 것처럼 느껴질 법 하다. 하지만 각 단계별로 '또 다른 지적향연'이 마련되어 있을테니 그런 걱정을 하덜 말아야 할 것이다.

  인간은 지식을 통해서 '기쁨'과 '즐거움'을 누려왔다. 하지만 동시에 알면 알수록 고뇌와 고통에 빠지는 경험도 했더랬다. 그래서 '아는 것이 힘'이지만 '모르는 게 약'이라는 푸념도 즐겨 쓰곤 한다. 하지만 모르는 게 정말 약이 될까? 내 남편, 내 아내가 불륜을 저질렀더라도 '나만 모르면 행복'이라는 말이 나오는 까닭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나만 모르면 바보'가 정답이 아닐까?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부정한 사실'인데, 나만 모르고서 허허하며 웃고 지내는 것이 어찌 행복이란 말인가. 그렇게 행복한 나를 향해 주변 사람들은 뭐라 생각하겠느냔 말이다. 그럼 주변 사람들까지 '완벽하게 비밀스런 불륜'을 저지르면 되겠다는 생각에 다다른 멍청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언제까지 '속이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완벽이란 것은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꼭 직접적으로 체험을 해봐야 깨닫는 멍청이는 없을 것으로 믿는다. 그러니 나쁜 짓은 할 생각도 말고 도덕적, 윤리적으로 살아가야 한다. 지적교양을 쌓은 사람들이 부정, 부패, 비리 따위를 싫어하는 까닭도 그런 것이다. 단순히 똑똑한 머리를 가지고 '단순지식'을 많이 쌓았다고 해서 교양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지적교양이란 결코 부도덕할 수 없는 법이다.

  예를 들어보자. 요즘 대한민국에서 가장 첨예한 대립을 보여주는 '전공의 파업' 사태 말이다. 대한민국 의료시스템이 망가진 탓이 과연 누구에게 있단 말인가? 파업에 동참한 의사들 탓인가? 아님 '의대정원 확대정책'을 밀어붙이는 정부탓인가? 지적교양을 가진 사람이라면 둘 모두에게 있다고 탓할 것이다. 왜냐면 두 집단(?)이 모두 파렴치하게 부도덕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외과, 소와과 같은 필수의료를 행하는 의사수가 부족하다며 의대생을 더 많이 뽑겠다고 하지만, 의사들이 왜 '필수의료과'에 지원하지 않는지 잘 알면서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의대생을 많이 뽑으면 해결될 것이라 낙관하고 있고, 이에 발끈한 '전공의들'은 파업도 불사하면서 자기 밥그릇을 지키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돈벌이에 비해 힘들고 고된 일이라며 외과나 소아과에 가지도 않으면서, 늘어나는 의대생 때문에 자기몫(의사 평균 연봉 3억원)이 줄어들까봐 환자들의 생명까지 내팽개치고서 거리로 나섰다. 이런 파렴치한 짓거리를 일삼는 무식쟁이들에게 생명을 맡기고 나라를 맡겼다. 그러니 선량한 국민들이 무식한 탓이라도 해야 하는가? 이는 부도덕한 가해자들이 즐겨(?) 써먹는 '피해자 탓'이고 궤변이다. 잘못은 저들이 저질러 놓고서 되레 '억울하게 당한 사람'에게 덤터기를 씌우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적교양을 가진 이들은 누구 탓을 해야 옳을까? 당연히 '무능한 정부탓'을 해야 하고, '이기적인 전공의 탓'을 해야 한다. 응급실 뺑뺑이로 죽은 환자들에게 미안하지도 않느냔 말이다. 생명이 위독한 중환자를 방치하고도 과연 의사 자격을 논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환자 돌보기에도 바쁜 의사들을 거리로 나설 지경으로 만든 '정부의 무능함'은 지적교양을 가진 국민들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책 <나를 채우는 하루지식습관>에서는 '지식'이 곧 '무기'라는 진리를 이야기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적교양으로 '무장'한 선량하고 도덕적인 사람에게 맞서는 무지랭이들이 없어질 것이란 말이다. 맹자는 '인자무적'이라고 했다. 어진 사람에겐 대적할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이토록 어진이가 지혜까지 충만하다면 당해낼 재간이 없게 된다. 다시 말해, 도덕적인 윤리의식을 바탕에 두고 널리 사람에게 이로운 지혜를 발휘한다면 못할 일이 없다는 뜻도 된다. 지적수준을 높게 쌓았어도 '자기이익'만을 위해서 써먹는 사람들은 권력자나 엘리트라고 불릴 수는 있어도 결코 '지적교양'을 쌓았다고 볼 수 없다. 왜냐면 그들에게는 이웃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도 찾아볼 수 없고 영혼은 더더군다나 깃들 수 없는 고깃덩어리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몸에 걸치고 있는 명품이 부럽고 반짝이는 보석들이 아름답다고 여긴다면 지적교양을 더 수련해야 할 것이다. 이 책 <나를 채우는 하루지식습관>으로 올바른 지적교양으로 입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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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XXI / 한빛비즈 147번째 리뷰] 2018년 <퇴근길 인문학 수업>(한빛비즈)이 출간되면서 이른바 '지식쌓기 열풍'이 불었더랬다. 솔직히 책 한 권 읽어서 얼마나 대단한 지식을 쌓겠느냐는 의문도 들었겠지만 '한 꼭지'에 담아 놓은 지식의 내용이 '백과사전적 지식'을 압축한 내용이 아닌 '트랜드'에 딱 맞아떨어지는 어디선가 들어봤음직한 '요즘 이슈'에 관해서 전문석학들의 고뇌로 씨줄과 날줄로 짜서 엮어놓은 책이었기 때문에 퇴근길 지하철에서 무심히 펼쳐 읽다가 목적지를 지나칠 정도로 깊은 몰입감을 던져준 책이었다. 그런데 2020년을 마지막으로 <퇴근길 인문학 수업>을 접할 수가 없었는데, 다시 그 감동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의 제목은 <나를 채우는 하루지식습관>이다. <퇴근길 인문학 수업>은 월화수목금에 맞춰 '다섯 꼭지씩' 읽을 수 있도록 짜여졌지만, 이 책은 그런 틀에서 벗어나 '3~4꼭지'로 묶여져 배열되어 있을 뿐, 읽는 순서와 방식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읽을 수 있도록 짜여졌다. 쉽게 말해, 책의 '아무 쪽'이나 펼쳐서 읽어도 상관이 없는 지식보따리란 말이다. 그야말로 '하루지식'에 해당하는 한 꼭지를 아무런 부담없이 읽을 수 있도록 짜여진 책이다.

  사실, 이런 짜임은 호불호가 갈리긴 한다. 마치 여러 가지 맛을 한꺼번에 담아 놓은 듯하기 때문이다. 어떤 맛이 가장 맛있는지 잘 모를 때에는 '최선의 선택'이지만, 우연히 맛본 '그맛'에 흠뻑 취해 조금만 더, 조금만 더..맛보려다 '그맛'이 딱 품절되어 아쉽지만 '다른 맛'을 맛봐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요즘 트랜드는 '숏폼'과 '릴스'에 중독되다시피 한 독자들이 많은 관계로 이런 짜임이 흡족한 분들도 꽤나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맛'이든 <나를 채우는 하루지식습관>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알맞은 지식'을 담아 나열해놓은 책이니 다양하게 즐기면 된다. 절대로 '부담'없이 말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습관'이다. <퇴근길 인문학 수업>은 딱 12주 분량(12주x5꼭지=60강)이었다. 그래서 책 한 권으로 3달 동안 퇴근길에 한 꼭지씩 읽어나가는 습관을 지향했다. 이 책 <나를 채우는 하루지식습관>도 그런 식으로 읽으면 23강x4꼭지=72강 분량으로 대략 10주 분량이다. 하지만 주5일 습관이 아닌 '매일습관'으로 꽉 채운 10주인 셈이다. 이렇게 쌓은 지식습관 5권, 6권 쌓이게 되면 일년 치 지식을 쌓을 수 있게 된다. 한 꼭지를 읽는 시간은 개인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5분~10분 정도면 누구라도 읽을 수 있는 분량이다. 이걸 습관으로 삼을 수 있으면 대단한 무기가 될 수 있다.

  그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증거가 이 책의 꼭지에도 나와 있다. 불교의 대표경전인 <금강경>에는 지혜를 뜻하는 '반야'라는 말이 나온다. 그 지혜를 쌓아 완전한 상태에 이른 것을 '바라밀'이라 하는데, 피안에 이른다는 '도피안'이라고 풀이하며, 피안의 세계는 바로 '해탈의 경지'에 이렀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불교에서 말하는 '반야바라밀'이라는 것은 지혜를 쌓음으로써 해탈에 이른다는 뜻이다. 또한 '금강'은 보석 중에서 가장 단단한 다이아몬드를 말한다. 그렇게나 찬란한 빛을 발하는 보석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다는 사실, 그리고 지혜를 쌓으면 세상의 온갖 고통을 잊게 해주는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을 담아 '금강경'이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그리고 그 <금강경>을 불교의 대표 경전이자 가장 마지막에 깨달을 수 있다하여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고 부른다.

  그렇다. 지혜를 쌓으면 세상의 모든 이치를 서로 통하게 만드는 경지에 오를 수 있다. 그럼 어떤 지식을 쌓아야 하는지가 관건이다. 요즘에는 온갖 지식을 '문자'보다 '영상'으로 체득하는 추세다. 다시 말해, 책을 읽는 독서로 지식을 쌓기보다는 스마트폰에서 동영상('너튜브' 같은)을 시청하며 지식을 쌓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심지어 책을 읽는 독서도 '전자책'을 이용하여 스마트폰만 있으면 독서도 가능하기 때문에 더욱 그쪽으로 기울어지는 추세다. 그렇다면 '문자지식'과 '영상지식'은 똑같은 지식일까? 그렇지는 않다. 단순한 비교만 해도 '문자지식'이 훨씬 더 유용하고 방대한 지식을 쌓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상상력' 때문이다. 문자가 아닌 영상으로 쌓은 지식은 상상할 수 있는 폭이 대단히 협소해진다. 문자를 읽으면 머릿속에 '이미지'를 상상하게 되는데, 영상을 볼 때는 '이미지'가 굳어져서 영상에 나타난 이미지, 그 이상을 상상할 수 없게 된다. 물론 '상상력 훈련'을 통해서 영상시청으로도 얼마든지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도 있으나, 초심자의 경우에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동화속에 등장하는 잘생긴 왕자님과 아름다운 공주님을 문자로 접한 아이들은 저마다 가장 잘생기고 아름다운 '대상'을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영상으로 접한 아이들은 '딱 그만큼'만으로 한정된 이미지에 갇혀버리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필요한 지식은 그런 '한정된 그릇'이 아니다. 하나의 지식이 열 개의 지식으로 체화하여 활용되려면 말랑말랑한 유연한 지식, 다시 말해 얼마든지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지식으로 쌓아야지, 이미 굳어져서 '정형화된 지식'만 잔뜩 가지고 있으면 애써 쌓은 하나의 지식은 '고~대로' 하나의 지식으로만 남게 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시시각각 변하기 마련이다. 그렇게나 변화무쌍한 세상을 살면서 '상황'에 맞게 지식을 변형시켜 '대처'하는 능력을 키워나가야지, 수만 가지 상황을 일일이 다 외워 수만 가지 지식을 껴맞추는 식으로 활용하게 된다면, 그런 지식쌓기는 별 소용이 없는 셈이다.

  그렇다고 이렇게나 소중한 지식을 쌓기 위해 '방대한 양'을 섭렵할 욕심만 채우는 것도 의미가 없다. 이젠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정보의 양'이 어마어마하기에 백과사전을 통째로 머릿속에 암기하는 무식한(?) 방법으로 지식을 쌓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그런 지식은 '컴퓨터'에 저장했다가 '인터넷'으로 검색하는 것이 더 유용하다. 다시 말해, 필요할 때 꺼내 쓰는 방식이 적당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꺼낸 '정보(지식)'을 상황에 알맞게 펼쳐나가는 일에 주력해야 한다. 2045년에 찾아온다는 '특이점(싱귤레리티)'는 인간보다 더 똑똑한 인공지능의 탄생을 일컫는 말이지만, 그런 '강한 인공지능(Strong AI)'가 대중화된 이후에도 인간의 지식쌓기는 유용해야만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한낱 '인공지능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인공지능이 짜놓은 스케줄에 맞춰서 건강하고 풍족하게 오래 살 수는 있겠지만, 그건 그저 '인공지능에게 사육 당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에라도 지식을 활용하는 능력에서 '인공지능'보다 압도적인 우위에 서야만 한다. 그래서 지식쌓기는 더욱더 필요한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어떤' 지식을 쌓아야 하는지만 남았다. 이는 거두절미하고 '고전지식'이라고 말하고 싶다. 먼 옛날부터 현재까지 수많은 석학들이 머리를 맞대고 담론을 나눈 철학, 과학, 수학, 사회, 정치, 경제, 문화 등의 교양을 다룬 지식을 '상식' 수준으로 깔끔하게 쌓아나가야 한다. 하나의 지식을 쌓기 위해 수백 쪽이 넘는 책을 읽는 것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반드시 필요한 방법'이지만, 나날이 바뀌어가는 세상에는 걸맞지 않는 뒤쳐진 방식이다. 더구나 다가올 미래에는 '속도경쟁'에서도 뒤쳐져선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선 수백 쪽이 넘는 책들에 담긴 '지식'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짤막한 지식'을 쌓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짤막한 지식을 통해서도 몇 시간이고 하나의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담론 수준의 지적교양'을 쌓을 정도로 방대한 지식을 '소유'해야만 한다. 결국엔 수백 쪽의 책을 읽어내는 능력과 그 지식을 짤막하게 요약하는 능력을 동시에 갖춰야만 하는 셈이다. 그래야 제대로 된 지식쌓기를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나를 채우는 하루지식습관>에서 접한 지식꼭지를 지적교양으로 확대시키기 위해서 또 다시 수백 권의 책을 섭렵해야만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요즘 세상에 '스마트폰'으로 할 수 없는 것은 없으니 말이다. 이 책에서 접한 지식에 관해 더 궁금한 것이 있다면 '관련영상'을 검색해서 동영상 강의를 통해서 '지식 단련'을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과거에는 그런 일이 불가능해서 도서관 책꽂이 틈바구니에 책을 벽처럼 쌓아놓으며 밤새 독파하는 수고를 해야만 했지만, 이젠 더 간단한 방법으로 어렵고 복잡한 지식을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는 수고를 '대신'하는 고마운 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교양수업'을 제대로 해주는 분들을 잘 선별하는 능력만 키운다면 단기간에 지적교양 수준을 높일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지식을 꾸준히 쌓으려는 각자의 노력이 없다면 절대로 높은 수준의 지적교양은 쌓을 수 없다. 지식을 쌓는 쉬운 길은 없다. 오직 '습관'만이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이 책 <나를 채우는 하루지식습관>은 그 습관을 도와줄 뛰어난 런닝파트너가 될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1권의 부제가 '홀로서기'라는 점도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지식쌓기는 누가 대신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혼자만의 힘'으로 달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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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 산책 10 - 베트남전쟁과 워터게이트 미국사 산책 10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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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XX / 인물과사상사 17번째 리뷰] 제37대 미국 대통령은 리처드 닉슨이다. 1968년 대선과 1972년 재선에 성공하면서 공화당에서 연이어 대통령을 선출하게 된다. 닉슨 시절에 미국사회를 들썩인 굵직한 두 가지 사건은 '베트남 전쟁'과 '워터게이트 사건'일 것이다. 두 사건 모두 미국의 위상을 실추 시킨 사건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리처드 닉슨에 대한 평가는 그리 나쁘지 않다. 그가 재임하던 시절에 '미국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증명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경제 상황도 그닥 나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지 '베트남 전쟁'에서 발을 빼는 타이밍이 늦어지면서 전쟁으로 이득을 보았던 미국으로써 뼈아픈 실책을 남겼다는 점을 안타까워할 뿐이며,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은 대통령직에서 사임을 하며 불명예를 안게 되지만, 그가 재임하던 시절에 보여준 '닉슨의 행정능력'에 대한 평가는 역대 대통령과 견주어도 그리 나쁜 성적은 아니었다고 평가 내리곤 한다. 다만, 그가 사임하고 수감된 뒤에 곧바로 '대통령 사면'을 받아 석방된 일 때문에 닉슨 개인의 불명예뿐 아닌 '공화당' 전체의 미움을 사는 바람에 미국 대통령은 '민주당 출신'이 상당기간 독차지하는 뼈 아픈 실책을 남겼기 때문이란다. 닉슨이 '보여준' 행정능력을 책속에서 속속들이 밝혀주지 않고 있어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었지만, 그의 시절에 실추된 '미국의 명예'와는 상관없이 '미국의 실리'는 챙길만큼 챙긴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렇다면 '베트남 전쟁'에 대해 정리해보자. 베트남은 청나라의 속국이었다. 당시 '속국'이었던 나라가 청나라에 완전히 '예속'된 상태는 아닌 느슨한 조공(무역) 관계였음 감안하면 놀라울 일도 아니다. 그런데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응우엔'이 프랑스의 식민정책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베트남이 프랑스의 식민지화가 되자, 프랑스와 청나라는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프랑스에게 패배하고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다. 하지만 베트남은 호찌민을 중심으로 독립운동단체 '베트민(월맹)'을 결성하고 프랑스에 저항을 한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면서 프랑스는 베트남에 실력행사를 할 여력이 남지 않았고, 이를 틈타 일본군이 쳐들어오면서 '베트민'은 일제의 통치를 받게 된다. 일제가 무조건 항복으로 베트남에서 물러나자 프랑스는 다시 베트남을 식민통치하기 위해 돌아왔고, 베트민은 프랑스와 다시 싸우게 된다. 하지만 '디엔비에푸 전투'에서 프랑스는 패배하고 물러나게 된다. 베트남이 '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6~1954)'에서 승리한 것이다.

  하지만 베트남에 평화가 찾아오지 않았다. 베트남은 남북으로 갈라져 북베트남은 소련과 중국의 원조를 받고, 남베트남은 미국의 지원을 받게 된다. 이에 '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일명 '베트콩')'은 남베트남을 해방시키기 위해 활약하는데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1960~1975)'이 시작된 것이다. 이에 남베트남을 지원하던 미국은 '통킹만 사건(1964)'을 조작하며 본격적인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미국은 존 F. 케네디가 암살(1963)된 직후여서 어수선한 분위기였는데, 공산주의의 팽창을 막아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서 남베트남을 본격적으로 지원하였고, 통킹만 사건을 통해 미군은 본격적인 참전을 하게 된 것이다. 허나 전황은 여의치 않았다. 계속되는 고전으로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미국은 '압도적인 화력'을 앞세우며 어마어마한 물량공세를 펼쳤지만 '베트콩 섬멸' 대신 '민간인 학살'을 하며 애꿎은 보복전쟁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여기에 '68혁명'이 프랑스 대학가를 중심으로 불이 붙자, 곧이어 전세계 젊은이들이 호응을 하며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과 저항의 물결이 휩쓸고 지나갔다. 마침맞게 '반전시위'와 '민권운동'이 미국사회를 들썩였는데, 그 유명한 '히피문화'와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이 시절을 관통하고 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징집거부운동'이 펼쳐지며 미군은 곤혹을 겪게 된다. 전황은 날로 악화되고, 징집거부로 참전군인은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되고 말이다. 이때 '한국군의 월남전 참전'은 미국으로선 대단히 반길 수밖에 없는 선물이었다. 박정희 한국대통령은 미국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꽉막힌 '베트남 참전' 미군의 숨통을 트여주었다. 이걸 대환영했던 대통령이 린든 존슨 대통령이었는데, 68년 대선에서 닉슨이 미국대통령으로 취임을 하자 박정희는 쩔쩔 매게 된다.

  사연인 즉슨, 닉슨이 '개인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박정희는 케네디와 존슨에게 연이어 패배를 당하고 상원위원선거에서도 낙마를 한 닉슨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면담'조차 허락하지 않으며 홀대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미국대사의 주선으로 어찌어찌 만남을 갖긴 했는데, 마주한 두 사람은 그야말로 서먹하고 냉랭한 분위기로 헤어졌다고 한다. 그런 닉슨이 '화려한 재기'에 성공해서 미국대통령으로 취임했으니, 이제 상황은 거꾸로 반전을 해서 박정희가 닉슨을 만나러 미국 워싱턴으로, 캠프 데이비드로, 심지어 닉슨의 개인별장까지 찾아가서야 겨우 '면담'을 할 수 있었단다. 그런데도 닉슨의 대답은 '닉슨 독트린'이었다. 미국의 대 아시아외교의 원칙을 발표하면서 미국이 다시는 '베트남 참전'과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아시아의 문제는 아시아가 스스로 해결한다'는 골자를 내세우며 주한미군의 철수까지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당장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급습한 일도 발생한 마당에 '미군철수'까지 만지작거리는 미국의 행보에 박정희는 안절부절 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월남전 파병'까지 하고 있는 한국을 마냥 홀대할 수는 없었는지, 어찌어찌 박정희를 달래려 애를 쓰는 닉슨이었지만, 곧이어 펼쳐진 중국과의 '핑퐁외교'로 인해 데탕트가 이루어졌고, 미국과 중국이 손을 잡는 상황까지 펼쳐지자 '한반도에도 평화가' 찾아오게 되었다.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것이다. 그 내용은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대원칙을 밝혔고, 한반도는 '통일'이라는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이산가족찾기'와 같은 일들을 진행시켰다.

  허나 곧바로 평화가 찾아오지는 않았다. 애초에 미국이 중국과 '손을 잡은 이유'는 중국이 '베트남 전쟁'에 참견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기 위한 '선조치'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반전여론이 거세진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철수할 궁리를 하기 시작했는데, 미군이 철수한 뒤에 '중국군'이 참전해서 베트남 전체가 '공산화'가 되어 버리고 만다면 미국으로서는 결코 원하는 그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행여나 '베트남의 공산화' 불똥이 '한반도'까지 영향을 끼치게 되어, 중국과 북한이 '남한'을 베트남과 같은 방식으로 '공산화'를 시킬 우려를 미연에 막고자 미국은 중국과 '외교라인'을 형성하고, 중국의 유엔 상임이사국 가입까지 통과시키며 중국을 추켜세워준 것이다. 그렇게 '한반도 문제'는 미국과 중국의 간섭을 배제한 '자주적, 평화적, 민족적 대단결'을 확인하며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지지 않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은 것이다.

  그렇게 한반도에는 평화의 물결이 휩쓸고 갔으나, 정작 박정희와 김일성은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고 '평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1인 독재 체제'를 구상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남쪽의 '유신', 북쪽의 '유일' 정책이다. 유신정책의 골자가 '박정희 종신대통령' 만들기였고, 유일사상을 더욱 강력하게 만들어 '김일성 일인독재'를 더욱 강화시켰기 때문이다. 행여라도 통일이 된다면 자신들의 '지지기반'을 탄탄히 하여 '통일한국'에서 권력을 쟁취하고 견고히 하겠다는 심보였기 때문이다. 떡(통일)이라도 마련해놓고 '김칫국'을 마셨으면 오죽 좋으련만...

  이렇게 닉슨은 전쟁에선 참패를 면치 못했지만, '하는 일'마다 대체로 성공 이상의 성과를 얻으며 자신만만해 했다. 그러다 터진 사건이 바로 '워터게이트 사건'이다. 자신이 역대 대통령보다 훨씬 잘났다(?)는 기록물을 <워싱턴포스터> 기자가 빼돌려서 기사화 시켜 버린 것이다. 그저 단순히 자신이 잘난 것만 기록에 담았으면 문제될 것도 없었겠지만, 자신의 '정치적 적수들의 약점'을 까발리며 자기자신에게만 유리하게 날조하고 기만하는 따위의 '비윤리적인 내용'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던 터라 닉슨 행정부의 인기는 하루아침에 폭삭 내려앉고 말았던 것이다. '워터게이트 청문회'에서 더는 버티지 못한 닉슨은 끝내 사임한다는 성명을 내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난다. 그리고 수감되었다가 자신이 지목한 '제럴드 포드 부통령'이 대통령이 되어 '대통령 사면권'을 행사받은 뒤에 석방되고, 정치계에서 완전히 물러나 살아갔다.

  '워터게이트 사건(74년)' 이후에 베트남 전쟁도 종전을 맞이한다. 미군 철수가 논의되고 곧바로 실행된다. 베트남 전쟁은 과연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단 말인가? 표면적으로는 '공산국가의 팽창'을 막는데 미국이 선봉에 선 것이다. 반공주의에 열심이던 미국으로선 당연하고 자연스런 참전이었다. 허나 전쟁의 양상이 과거와는 사뭇 달랐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미국은 참으로 빛났다. 미국의 역량은 고스란히 전쟁에 투영되었고, 미국의 힘으로 전쟁은 일단락이 되며, 미국은 '승전국'으로서 온갖 명예를 누렸고, 전쟁 참전으로 인한 이득도 어마무시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에서는 완전 달랐다. 2차 세계대전에 쏟아부은 포탄보다 훨씬 퍼부었는데도 미국은 승리할 수 없었다. 승리는 고사하고 전투에서 사망한 미군과 부상당한 군인들이 속출했다. 부랴부랴 '한국군'을 비롯해서 우방국을 상대로 파병요청을 하면서까지 승리에 대한 목마름이 간절했지만, 미국은 결코 승리할 수 없었다. 승리하지 못한 분풀이로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사실이 발달된 통신기술이 '텔레비젼 혁명'으로 인해 전세계에 즉각적으로 '참혹한 현실'이 알려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69년엔 닐 암스트롱이 아폴로11호를 타고 달에 착륙하는 것을 '생방송'으로 볼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전쟁의 참상도 시시각각 '텔레비젼'을 통해서 전해졌다.

  과연 전쟁으로 얻은 것은 무엇이었나? 물론 미국이 전세계를 대표하는 '초강대국'이라는 사실만큼은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비록 2차 세계대전에서 얻은 막대한 이윤에 비한다면 '베트남 전쟁'은 흑자는 고사하고 적자로 돌아서서 전쟁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미국의 경제는 더욱더 휘청거릴 수밖에 없을 지경이었단다. 그런데도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미국이 얻은 성과는 여전히 '매우 높음'이었다. 미국은 '공산주의의 팽창'을 좌시하지 않았으며 천문학적인 전쟁비용을 쏟아부었는데도 '기축통화'라는 장점을 살려 '달러의 가치'를 손보는 것만으로도 미국은 전쟁에서 잃어버린 비용을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민간인 학살'과 같은 반인륜적인 일도 저지르긴 했지만, 그런 비난을 감내하고서도 '세계적인 존경'을 받을 정도로 미국은 초강력한 국가로 우뚝 서버렸다. 감히 누가 미국을 탓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런 미국을 곱지 않게 보는 시선까지 어찌하진 못한다. 국제관계는 철저히 '힘의 논리'로만 이루어지지만 '도덕'과 '윤리'를 나몰라라하면서 부와 명예를 건사하는 일은 역사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들다. 당장은 떵떵거리며 남 부러울 것 없이 풍족한 삶을 살다가도 하루아침에 패가망신을 당하는 경우를 우리는 역사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순 있을지언정 '그 손바닥'이 하늘을 대신할 수는 없는 법이다. 부도덕적인 일을 저지르고도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지 않는다면 언제고 망하는 날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 배우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정의로움'과 '공정함'이다. 세계사를 배우는 목적이 '서양의 위대함'을 달달 외우기가 아닌 것처럼 '미국사'를 배우는 목적 또한 '미국의 위대함'을 아무런 비판 없이 맹목적으로 믿기 위함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미국사'를 통해 우리가 승승장구할 수 있는 비결을 터득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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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 산책 9 - 뉴 프런티어와 위대한 사회 미국사 산책 9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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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XIX / 인물과사상사 16번째 리뷰] 1960년대 미국의 대통령은 JFK와 LBJ이었다. 다시 말해, 존 F. 케네디와 린든 B. 존슨 말이다. 케네디가 3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 때 존슨은 부통령을 지냈고, 케네디가 암살을 당하자 대통령직을 위임 받았다가 36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진보적 정책을 착실히 실행하였다. 허나 두 대통령은 서로 경쟁 상대였다. 같은 민주당 소속이었지만 말이다. 그만큼 스타일도 달랐는데, 직무적인 능력으로 본다면 젊은 케네디 보다는 연륜 넘치는 존슨이 더 신중하고 착실하게 대통령직을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는단다. 하지만 대중은 케네디를 더 선호했다. 아니 열광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텔레비젼이 널리 보급되던 시절이었기에 '보여주기'에 능했던 케네디가 미국 시민들에게 더 사랑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허나 케네디는 '얼굴과 말만 번지르르한 무능한 대통령'이었다. 그가 하는 일마다 일은 꼬였고 성과는 극히 미미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섣불리 쿠바를 침공했다가 '소련제 미사일'이 미국의 앞마당(쿠바)에 설치되는 위기를 초래하기도 했다.

  이렇게 국가에 위기를 초래하는 젊고 방탕한(?) 대통령이 못마땅한 것이었던지 케네디는 끝내 암살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온갖 미스터리만 남기고 '암살자'로 지목 당한 오스왈드 또한, 괴한의 총에 맞아 사망하고 말았다. 케네디가 수 발의 총탄에 저격 당해 죽었는데, 오스왈드는 단 한 발의 총알만 쏘았을 뿐이고 그가 쏜 방향(5시 방향)과는 전혀 다른 (11시 방향)에서 날아온 총탄에 맞고 사망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케네디의 시신은 '공개부검'도 받지 않고 서둘러 장례식을 치뤘고, 케네디의 부인과 자식들은 장례식장에서 너무도 침착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암살자로 지목된 오스왈드는 제대로 된 변론도 받지 못한 채, 1심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 받았고 재판장을 나오면서 기자들을 향해 무죄를 주장했지만, 그 순간 괴한이 등장해서 오스왈드는 총격을 받았고 그 자리에서 사망을 했다. 오스왈드가 총격을 받을 당시에 괴한을 저지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심지어 괴한은 너무도 순순히 체포되었다. 이렇게 케네디의 암살은 '음모론'이 만들어지기 딱 좋은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JFK>라는 영화가 만들어질 정도였단다.

  하지만 케네디는 미국시민들에게 '전설'로 남았다. 그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발표했던 연설은 미국인들에게 '뉴 프런티어'를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미국은 위대한 사회다...그런 미국의 정부는 해줄 것이 없다. 오히려 국가가 무엇을 해주길 바라기보다는 국가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미국인들의 자부심을 바탕으로 미국인들 자신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는 메시지로 전해지며, 위대한 미국은 미국인들의 '개척정신'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열정적이고 패기 넘치는 젊은 대통령이 이렇게 말을 하니, 뭔가 있어보인 것도 사실이다. 이런 대통령이 젊은 나이에 암살을 당하니, 미국인들의 마음속에는 그가 한 일이 별볼일 없었다는 사실보다 그가 추켜세워준 '미국인의 자긍심'에 더 열렬히 반응했던 것이다.

  이런 '케네디의 전설'을 가장 싫어했던 인물이 바로 '린든 존슨'이다. 그는 말보다는 '행동'이 앞서는 스타일이었고, 자신이 공약한 것은 '해내고 마는 실천가'이기도 했다. 그런데 '텔레비젼 시대'에 걸맞지 않게 카메라 앞에만 서면 어눌한 말솜씨에 긴장한 것이 역력한 굳은 표정을 짓곤 했던 탓에 국민들로부터 그닥 호감을 받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카메라'나 '녹음기'가 없는 곳에서는 누구보다 성실하고 탁월하게 직무를 다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케네디보다 존슨에게 더 후한 점수를 주지만, 호사가들에겐 존슨은 인기 없는 대통령이었을 뿐이다. 그랬던 탓인지 존슨은 '케네디'를 너무 싫어했다고 한다. 심지어 열정적으로 직무를 수행한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 대중 앞에서 활짝 웃기만 해도 "케네디를 따라한다"한다는 언론의 반응을 받게 되면 불같이 화를 냈다고도 전한다. 그는 그렇게 '인기 없는 대통령'이 될 운명이었다. 그가 대통령직을 수행할 때 '베트남 전쟁'에 미국이 발을 담근 것도 그 이유 가운데 하나이고 말이다.

  60년대 미국 사회는 '마틴 루터 킹'과 '베트남 전쟁 참전'으로 시끌벅적했다. 링컨 대통령 시절에 '흑인노예 해방선언'을 했는데도 미국사회는 여전히 흑인을 향한 인종차별이 심했기 때문이다. 한편, 미국은 '한국전쟁'에 이은 또 하나의 '이기지 못하는 전쟁'에 참전했다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더구나 '공산주의 팽창'을 막고 세계 평화를 위해 참전을 한다는 명분에 걸맞지 않게 '사살한 베트콩의 귀를 잘라내는 장면'이 텔레비젼 방송을 통해 전세계에 송출된 것을 지켜본 미국시민들의 '반전시위'는 끝없이 이어지게 된다. 미정부는 서둘러 '참혹한 전쟁 참상'이 널리 퍼지는 것을 막으려 하지만, 베트남 참전용사들의 입까지 막을 순 없었다. 더구나 참전용사들 가운데 '흑인병사들'에게는 더 위험한 전투에 투입하는 '차별'이 자행되자, 인종차별에 반전시위까지 미국사회는 발칵 뒤집어지게 된 것이다.

  이 와중에 1961년 박정희는 5·16 쿠테타를 일으켜 '군사정권'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미정부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 사절단을 보내지만 케네디 행정부는 박정희를 푸대접하고 만다. 하지만 63년에 케네디가 암살 당하고 64년 '통킹만 사건'을 일으켜 본격적인 베트남 전쟁에 뛰어들자 린든 존슨 행정부는 박정희에게 '월남 파병'을 요청하게 된다. 이를 받아들인 박정희는 린든 존슨에게 환대를 받았고, 박정희도 린든 존슨을 격렬하게 대접한다. 이렇게 한미간의 혈맹관계는 더욱 돈독해졌지만, 날로 커져가는 '공산진영의 확장'에 맞서 한미일 공조를 견고하게 쌓고 싶어하는 미국정부는 '한일 국교정상화'를 강력하게 요청한다. 이 소식을 접한 한국국민들은 격렬하게 반일시위를 벌이며 '반성과 사죄 없는' 국교정상화는 있을 수 없다며 결사반대를 외치지만, 미국의 승인을 받아야만 했던 박정희 정부는 '국민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강행하게 된다.

  이런 한국국민들의 반대시위를 무마하기 위해서 미국은 '한국경제의 빠른 성장'이라는 선물(?)을 마련하는데, 이른바 '경제성장 5단계설'이다. 날로 확장되는 '공산진영'과는 상반된 성공 케이스로 한국이 낙점을 받은 셈이다. 그래서 미국은 한국의 경제성장 시나리오를 마련하고, 한국의 수출품을 미국이 대량으로 사들이는 정책을 폈으며, 한국이 원활한 수출을 위해서 필요한 자금은 '일본배상금'이 아닌 '일본차관'으로 충당하는 방식으로 성사시켰다. 당장 배가 고팠던 한국의 경제 상황으로서는 피치 못할 '당근책'이었으며, 이로써 한국경제는 기적과도 같은 성장세로 쑥쑥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경제성장이 달콤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주도로 밀어붙인 '한일 국교정상화'는 일제의 침략과 식민통치에 대한 반성도 없고, 배상금도 한 푼 들지 않은 '면죄부'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가해국에 대한 처벌은커녕 '피해국의 위기'를 이용해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한 것으로도 모자라 '부당한 논리'로 벌어들인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피해국을 '놀림거리'로 삼는 일본의 우익집단들의 행패가 날로 심해지는데도 이에 대한 제지도 하지 않고 '당연한 귀결'로 치부하고, 미국은 이를 그저 방관만 하며 '한국인들의 자존심'을 짓밟는 행태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을, 과연 '무엇'으로 납득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이는 절대적으로 미국의 무지에서 비롯된 처사다. 미국은 고종황제 때부터 지금까지 한국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그 증거는 차고도 넘친다. 미국 사회에 날로 번져가는 '반전시위'로 베트남에 파병할 장병이 절대부족해지자 미국정부는 '우방국(?)'들에게 월남 파병을 요청하는데, 이에 가장 적극적으로 호응한 나라가 바로 '박정희 정부의 대한민국'이었다. 그렇게 비전투병력인 '비둘기 부대'를 시작으로 '청룡, 맹호 부대'에 이어 '백마 부대'까지 수많은 국군장병들이 파병되었지만, 그렇게 파병된 '한국군'이 받는 월급은 미군의 6분의 1, 필리핀이나 태국 군인의 4분의 1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한국군도 미군과 똑같은 수준으로 월급을 올려줄 것을 요청하는 청원과 시위가 있었으나, 미국정부는 난색을 표명했다고 한다. 애초에 '용병 취급'으로 값싼 비용으로 합의한 박정희 정부의 요구와 상반되기 때문이란다. 과연 미국은 '대한민국'을 뭘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런 미국을 '우리'는 어떻게 요리해야 마땅한 것일까?

  '굴욕외교'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우방'이니 '혈맹'이니 떠들기에 앞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냔 말이다. 협상 테이블에 앉기도 전에 '얻는 것'도 없이 '퍼줄 것'만 생각하는 자세가 바로 '굴욕외교의 시작'이다. '우방'끼리 서로 정보를 교환하는 차원에서 '도청'을 허용할 거라면 공평하게 서로 도청하는 것을 '합법화'해야 한다. 미국의 대통령에게 대놓고 욕할 자신은 없으면서, 대한민국 입법부(국회)를 향한 욕지거리였다는 변명은 괜찮다고 생각하는 자세가 '굴욕외교'란 말이다. 외교관계에 '겸손'을 떨 필요는 없다. 서로 '자국의 이익'이 보장되지 않으면 하루아침에 갈라서는 것이 '외교관례'다. 그럴 자신이 없으면 '외교'를 하지 말아야 한다.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원한다면 '미국의 약점'을 파헤쳐서라도 미국을 꼼짝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하다 못해 '대의명분'에서라도 미국보다 우위에 서서 미국 스스로 쪽팔리게 만들어야 '다음 외교'에서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법이다. 이제 대한민국은 '약소국의 비애'라는 변명도 통하지 않을 정도로 명실상부한 '선진국'이다. 그러니 외교에서 절대 물러서는 모습이나 뒤처지는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절대로 '꿀리지 말라!' 국제관계는 '힘의 논리'로 결론이 나는 것 같지만, 그보다는 오랜 역사와 전통에서 비롯된 '대의명분'이 더 크게 작용하는 법이다. '고려거란전쟁'에서 거란이 고려에 참패한 것도 '외교전'에서 기선제압을 당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거란은 고려를 침공할 '명분'이 없었다.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고구려 땅의 대부분을 차지했더라도 진정한 '고구려의 후예'는 고려가 가질 수밖에 없었기에 거란은 압도적인 병력으로 고려침공을 했음에도 실패하고 만 것이다. 반면에 절대적인 약세였던 고려는 '대의명분'에서 꿀릴 것이 없었기에 싸움에 나서서도 우위에 설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명분 위에 '실력'이 더해지니 불리했던 것이 유리하게 작용한 셈이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미국을 상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절대적인 실력에서 미국은 대한민국을 '압도'한다. 하지만 미국은 절대로 한국에서 발을 뺄 수가 없다. 발을 빼는 순간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이어 지금까지 '휴전'하고 있는 한국전쟁까지 패배라는 불명예를 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당장의 이익이 없어 한국에서 발을 뺀다하더라도 그 순간 미국은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과 러시아보다 형편없는 실력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기에 미국은 더욱더 한국과 긴밀히 '협력하는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대한민국이 미국에 설설 기는 굴종외교를 이어가는가? 과연 굴종외교를 통해 한국이 얻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절대로 고개 숙이지 말라. 우리는 미국을 철저히 이용해 먹어야 할 명분이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미국이 일본에게 '면죄부'를 줘서 대한민국이 '대신' 받은 불이익과 불명예를 회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착실히 힘을 키워나가 미국과 일본에게 퍼주다시피 내어준 '국익'을 톡톡히 받아내야만 한다. 그러기 전까지 미국은 절대로 대한민국을 등쳐먹고 내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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