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하는 기계 질문하는 리더 - AI 시대, 대체 불가능한 리더의 첫 번째 조건
변형균 지음 / 한빛비즈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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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XCVIII / 한빛비즈 150번째 리뷰] 인간보다 더 똑똑한 AI(인공지능)의 등장은 과연 우리 인류에게 축복으로 다가올 것인가? 아니면 악몽보다 더 끔찍한 현실을 초래할 것인가? 전문가들의 견해는 극명하게 둘로 갈린다. 한쪽은 '낙관론'으로, 다른 한쪽은 '파멸론'으로 말이다. 둘의 견해가 극명하게 갈리는 것과는 달리 적당한 타협점을 찾아 '균형'을 이루며 상호보완적으로 장밋빛 미래를 보장할 거라는 '중도론'은 사실상 없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왜냐면 인간보다 뛰어난 AI로 촉발된 사회의 변혁은 매우 빠르고 초현실적으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란다. 이는 우리가 현재 유용하게 쓰고 있는 '스마트폰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스마트폰' 없이도 잘 살아왔지만, 일단 '스마트폰'이 생겨난 이후에는 스마트폰이 없는 삶을 상상하기 힘든 것처럼 말이다. 그런 까닭에 '인간보다 똑똑한 AI의 등장(특이점) 이후의 삶'은 현재로선 전혀 예측불가이지만, 특이점이란 변곡을 겪고 난 뒤에는 다시 'AI가 없는 세상'으로 되돌아 갈 수는 없게 될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보다 똑똑한 AI의 등장을 '어떻게' 대처해 나갈 것인가? 이 책 <통찰하는 기계, 질문하는 리더>가 품고 있는 내용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AI가 초래할 '파멸론'과 '낙관론'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해보자. 인간보다 더 똑똑하다는 '기준'은 AI가 인간과 마찬가지로 '창의성'을 발휘하여 세상에 없던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얘기다. 단순히 '무'에서 '유'를 창출해내는 정도가 아니라 어떤 임무를 맡기더라도 최적의 조건으로 최상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있어 인간보다 훨씬 월등한 재능을 갖추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스웨덴의 철학자 닉 보스트롬이 처음으로 언급한 '종이클립의 역설'인데, AI가 간단한 임무를 수행하더라도 예상치 못한 빙식으로 행동할 수도 있다는 가설이다. 이를 테면, AI는 '종이클립 생산'을 늘리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지구의 모든 자원'을 활용해서 최상의 실적을 달성하게 될 것이다. 인간보다 훨씬 더 뛰어난 실력으로 말이다. 그런데 '종이클립'을 만들려면 나무를 베어서 '펄프'를 먼저 만들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AI에게 최적의 목표달성을 이루라는 명령을 내리는 바람에 전지구의 나무를 모조리 베어다 '종이클립'을 만들어버린다면 지구의 환경을 황폐화할 것이며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절멸해버리는 재앙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AI는 목표달성을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일 뿐이기 때문에 무엇이 '문제'인지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란 말이다. 이는 인간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일이지만, AI는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 왜냐면 AI의 행동을 인간이 절대로 '예측불가'하기 때문이다. 너무도 빠르고 과감하게 처리하며 목적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또 다른 문제발생'이라는 예측가능한 변수를 '값'으로 매겨서 입력해주기 전까지는 절대로 '종이클립 생산'을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뒤늦게 이러한 문제를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AI의 발빠른 행동력으로 인해 지구의 환경을 파괴해버리고도 남을 정도일 것이다. 이러한 '예측불가능한 AI의 행동'을 적절히 통제하지 못한다면 인간 뿐만 아니라 지구생태계를 온전히 보전하지 못할 수도 있다.

반면에 '낙관론'은 완전히 다르다. 이는 AI 기술이 가져올 '긍정적인 변화'와 '무한한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AI가 문명의 진보를 더욱 빠르게 이루고 인간의 삶을 쾌적한 방향으로 대폭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특히 낙관론자들은 AI 기술의 '상업적 성공'과 그로 인한 '사회적 혜택'에 큰 기대를 건단다. 스탠퍼드대학교 교수인 앤드루 응이 대표적인 낙관론자인데, 그는 AI 기술이 인류에게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줄 것이며, '적절하게 활용한다면' AI는 인간의 능력을 확장시키고 수많은 사회문제를 해결하는데에도 큰 도움을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과연 어느 쪽이 미래에 대한 '정확한 예측'일까? 지금까지의 예측 결과는 '파멸론'쪽이 더 우세하다. 하지만 '낙관론'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파멸을 예측한 쪽도 AI가 인류의 미래에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할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는 점도 유념해둘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결론은 단 한 가지다. 결국엔 AI 기술이 '인류의 지능'을 훨씬 넘어서게 될테지만, 그처럼 뛰어난 지능을 갖춘 AI가 '완전 자율'에 맡겨지지 않고 '인간 통제'의 아래에 놓여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AI 기술의 핵심은 '빅데이터'다. 엄청나게 방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인간이 상상하지도 못한 '창의성'을 발휘하고, 문제 해결을 위한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기는 하겠지만, 어찌 되었든 인간이 '입력'하지 않는 정보를 스스로 창조해내거나, 인간이 '생각해본 적도' 없는 해결점을 창의적으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기계일 뿐이라는 점이다. 물론 '특이점 이후의 AI'는 미처 인간이 떠올리지 못한 것들을 순식간에 찾아내 '실행'에 옮기는 무시무시한 재능을 보여줄테지만, 그 재능의 근본이자 원천은 결국 '인간의 지능'을 넘어서지 못할 거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인류에게 도움이 될 AI를 만들기 위해서 '윤리적인 검증 작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인간이 정한 윤리도덕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윤리도덕적인 사고방식조차 인간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갈리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첨예한 갈등 양상을 보이는 사회문제를 '처리'할 AI가 어떠한 결론을 내릴지 여전히 예측불가인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단 하나다. 인간보다 뛰어난 AI에게 현명하고 명철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야 한다고 말이다. 더구나 현재의 스마트폰처럼 'AI 상용화' 과정을 거치게 된다면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 AI를 가지고 사용하게 될 텐데, 이렇게나 뛰어난 '개인비서'를 갖게 된 인류에게 남은 숙제는 바로 '뛰어난 재능을 갖춘 AI'를 훌륭하게 다룰 줄 아는 리더십을 갖춰야 한다는 점이다. 결국엔 AI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먼저 '학습'을 통해서 똑똑해지게 된다. 인간도 학습과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온전한 인간이 되고 성숙한 어른이 되는 것처럼 AI도 마찬가지란 말이다. 그리고 성숙한 어른이 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깊이 생각하고 신중히 행동하는 '질문형 학습'을 하는 것처럼 AI에게도 똑같이 질문을 던져서 '모두가 행복하고 안전한 세상'을 만드는데 방점을 찍어야 할 것이다. 물론 더욱 뛰어난 AI는 '인간의 질문' 없이도 스스로 생각하고 나름의 결론을 도출하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 '엇나가는 AI'가 발생한다면 인간이 직접 관여하여 '조절'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야 할 것이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대단히 위험한 작업이기도 하다. 인간보다 뛰어난 재능을 갖췄는데, 인간의 '통제'를 불가능하게...아니 무력하게 만들 정도로 '예측불가한 AI'가 얼마든지 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예측불가한 일 가운데 '하나 뿐인 지구'를 송두리채 날려버릴 어마어마한 '시작'을 AI는 얼마든지 언제든지 실행에 옮길 수 있다는 점도 무시하지 못할 문제점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통제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지고, AI를 이끌 리더로 거듭나야만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인류의 미래는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제 '특이점(AI가 인간의 지능을 초월하는 시공간적 경계)'을 막을 수는 없다. 현재의 AI 기술 발전 속도로는 2040년을 그 시기로 예측하고 있기 때문이다. 점점 가속화하는 발전속도를 감안하면 그 시기는 더 앞당겨질 것이 뻔하다. 그 '특이'한 AI를 누가 먼저, 어느 국가가 먼저 '선점'할지에 대해서는 중요하지 않다. 결단코 AI를 악용하는 사례가 단 한 번이라도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쁜 쪽으로 사용하게 되면 인류는 심각한 위험에 빠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하고, 좋은 쪽으로 사용하려다가도 '단 한 번의 실수'로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암울한 미래를 막을 유일한 방법은 '예측불가한 미래까지도 예측'하는 현명한 지혜를 모아야 한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또 질문해야 할 것이다. 훌륭한 리더는 '결단력'과 '실행력'을 갖춘 사람이 아니다. 그보다 더 요구되는 것은 '끊임없이 질문하는 리더'여야 한다. 우리 모두의 행복과 안전을 위해 '최소한의 위험'만을 찾아내어 '최상의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신중하게 추진하는 리더말이다. 그런 리더가 AI 기술이 초래한 '예측불가능한 미래'를 낙관하게 만들 수 있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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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2 : 혼세편
이우혁 지음 / 엘릭시르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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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XCVII / 엘릭시르 9번째 리뷰] 돈을 가진 이가 돈을 쓰는 것을 두고 뭐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힘을 가진 이가 힘을 쓰는 것은 어떨까? 조금 달리 표현해보면, 돈 좀 많이 가진 이가 '돈자랑'을 하듯 돈을 펑펑 쓰면 뭐라 하는 사람이 없을까? 그리고 힘이 남달리 쎄서 '힘자랑' 좀 하면 어떻겠느냔 말이다. 이 세상에 돈이 좀 많은 '부자'와 힘이 좀 쎈 '장사'가 제 자랑하듯이 돈과 힘을 저만의 이득을 위해서 쓰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다. 돈 많은 부자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선사업'을 하거나, 남보다 더 쎈 힘으로 '도움이 절실한 사람'을 위해 사고현장이나 화재현장에서 인명구호를 위해 힘쓴다면 얘기가 다르다. 이들에겐 도덕적 윤리의식이 충만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이런 이들이 꼭 필요한 법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런 착한 부자와 선한 장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가진 '능력', 때론 '초능력'에 가까울 정도로 '상위 0.1%의 능력'을 갖춘 이들이 저만을 위해서 횡포를 부리는 경우가 더 흔하다. 심지어 그 능력이 너무도 엄청나서 사회구성원 99.9%의 능력을 모두 합친 것보다 웃도는 차이를 보이는데도, 오직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서 '그 능력'을 발휘하고, 자신들만의 천국을 만들기 위해 '기득권 유지'만을 위해서 능력을 쏟아붓는다면 그 사회는 망했다고 보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흔히 이런 이기적인 초능력을 갖춘 상위 0.1%를 '공공의 적'이라 부르며, 소위 '악마'와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한다. 옛날에도 백성의 피땀을 짜내어 저들의 재산축적에만 모든 역량을 쏟아붓는 지배층을 '흡혈귀'에 비유하지 않았잖은가.

<퇴마록>은 바로 그럼 악마같은 이들을 물리치는 주인공을 등장시켜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도 저들의 행복과 욕망을 위해 쓰지 않고 삐뚫어진 세상을 바로 잡고 이기심으로 가득한 중생들을 위해 '하나 뿐인 목숨'마저 아깝지 않아 하며 저들의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면서도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그저 이 세상이 악에 물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뿐인 '퇴마사 일행들'이 등장하는 소설이다. 그런 까닭으로 이 책이 비록 '장르소설'에 불과하지만, 삐뚫어진 욕망으로 이 세상을 암울하게 만들려는 이들의 잘못을 깨치어 올바른 길로 이끄는 역할을 부여한 소설이기도 하다. 이런 장대한 내용은 이미 '국내편'과 '세계편'에서도 다루었고, 그 이유조차 이미 밝혀놓았지만 '혼세편'에 들어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 담론주제이기도 하다. '혼세편 1권'에서는 <와불이 일어나면>에서 일본이 저지른 과거의 잘못에 대해 분명히 밝히면서도 그 죄값을 일본의 현세대에게 물어 '일본침몰'과 같은 대재앙을 일으키고, 또한 그런 꼴을 보고서 손뼉치며 좋아라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아버지가 저지른 죄값을 아들과 손자에게 물어서는 안 되는 이치와 서로 통한다. 그러나 죄값을 물지 않는다고 해서 '아버지가 저지른 죄'까지 모른 체하고 부정하는 일을 방관할 수는 없다. 준엄하게 과오를 따지고 바로 잡을 것은 바로 잡고, 고칠 것은 고쳐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과거'가 되풀이 되어 '또 다시 만행'을 저지르고 말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해서 조금의 양보도 있을 순 없는 것이다.

'혼세편 2권'에서는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라는 제목으로 일본정계의 거물이 악령에 쫓게 괴로워하는 에피소드가 등장하며, 베네딕트가 쓴 <국화와 칼>이라는 책을 언급하며 '일본인의 사고방식'을 언급하였다. 이렇게 일본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인해서 퇴마사 일행은 죽다 살아나게 되었다. 박 신부는 총알 세례와 다리 부상까지 당하며 '임사체험'을 경험하기도 하였고, 이현암은 일본에 가기 직전에 한빈거사로부터 엄청난 공력을 받았는데도 총까지 쏘아대는 무술고수들과 상대를 하는 도중에 '주화입마' 상태에 처하기도 했다. 장준후는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주술 능력이 한층 높아졌지만 자신은 끝내 '단명할 운명'을 타고 났다는 것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고, 일행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처하자 '악령'이 아닌 사람을 향해선 주술을 쓰지 않겠다는 다짐을 깨버리고 만다. 현승희의 경우엔 자신의 몸안에 '현신'한 애염명왕이 깨어나 퇴마사 일행을 위기에서 구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깨어난 애염명왕은 승희의 몸을 떠나 사라지고 만다. 한편, 언어학 박사이자 퇴마사들과 함께 동행하는 서연희는 '심연의 눈'으로 퇴마일행을 돕는 등 중요한 순간마다 일행을 구하는 기지를 발휘하며 함께 죽을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일들을 겪게 된다.

이렇게나 퇴마사들이 죽을 위기에 처한 까닭은 다름 아니라 '퇴마사들의 선한 의지'를 역이용해서 배신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악의 세력과 혈투를 벌이는 와중에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퇴마사들의 동정심을 사고 절체절명의 위기속에서도 어린 아이를 구하려 '방비'를 갖추지 않고 '방심'하는 순간에 퇴마사들의 등뒤에 총을 쏘거나 칼을 꽂는 따위로 심각한 상해를 입혔기 때문이다. 퇴마사 일행들과 맞상대를 해서는 이길 승산이 없자 이따위 '비겁한 수'를 써가며 퇴마사들을 위기로 내몰았다. 그런데도 퇴마사 일행들은 죄는 '악령'에게 있는 것이지 '빙의'된 이들을 죽일 수 없다면서 되려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기까지 한다. 어떠한 경우라도 '무고한 사람'을 해칠 수는 없다면서 말이다. 또한 자신들이 갖고 있는 엄청난 능력은 '자신의 목숨'을 살리고자 '무고한 희생'을 시킬 수는 없는 일이라면서 말이다.

이럴 때면, 선한 의지와 선한 행동은 참으로 무력하게 느껴질 따름이다. 악당과 악령 들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이렇게나 착한 사람들을 함부로 해치는데 왜 선한 의지를 갖춘 이들은 '엄청난 능력'을 갖추고도 제 목숨을 돌볼 수 없단 말인가? 퇴마사들의 능력으로 본다면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쳐부술 수 있는데 말이다. 왜 그 힘을 써서는 안 된단 말인가? 함부로 쓰겠다는 것도 아니고 '하나 뿐인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한 정당방위인데도 말이다. 한편, '일본인의 사고방식'을 언급한 내용은 악령이 되어버린 리더의 '잘못된 명령'이라도 그저 묵묵히 따르는 일본인로 인해 퇴마 일행은 죽다 살아난다. 고작 '단 한 명의 악인'이 거대한 집단의 우두머리가 되면 그 '집단 전체'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악행을 저지르고 마는 것에 대한 비판도 함께 하고 있다. 이런 맹목적으로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들을 '악인'이라 부를 순 없지 않은가? 그리고 그런 명령에 따르면서도 '일말의 양심'에 거리낌을 느끼고 있는 일본인들도 있을 텐데, 악령의 명령에 따르는 무리 전체를 절멸시킬 순 없는 노릇 아니겠느냔 말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우두머리, 딱 한 명'만 골라서 처단을 하면 공리주의적 논리에 의거하여 가장 합리적인 일이 되겠지만, 그 딱 한 명을 지키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순종하는 그들 모두를 상대해야 하는 어려움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퇴마 일행을 바로 그런 이유로 목숨을 건 퇴마행을 치룬 셈이다. 과연 어찌 하면 좋겠는가?

우리는 '단 한 명의 악인'이 우두머리가 되어 '전체 집단'이 악행을 저지를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이웃나라를 두고 있는 셈이다. 이를 <국화와 칼>에서는 일본인은 평화를 사랑하지만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기꺼이 칼을 자기 배에 꽂고 할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이중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물론 어느 나라 사람이든 '이중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으나, 일본인의 이중성은 남다르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토록 체계적인(?) 이중적 사고방식을 사용하는 일본인을 상대할 때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옳단 말인가? 세상 둘도 없을 정도로 '친절한 일본인'이 등 뒤로 돌린 손에는 항상 칼을 들고 있을 수도 있다는데, 우리는 겉으로 웃지만 속까지 웃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이웃나라와 어찌 해야 한단 말인가? 이에 대한 해답도 역시 <국화와 칼>에 담겨 있다. 일본인들은 '절대복종'을 할 정도로 강한 힘 앞에서 맹종을 하는 습성이 있다고 말이다. 그러니 일본인이 겉과 속을 알 수 없는 전략을 사용할 때, 우리는 강대한 힘을 길러 저들이 꼼짝달싹할 수도 없게 만들어야 속으로 들고 있는 칼을 '영원히 꺼내지 못하게' 할 수 있단다.

하긴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의 맥아더는 이를 잘 활용하여 일본을 '미국의 충직한 개'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일본은 현재까지도 '우방국'이라는 미명 아래 충직한 '미국의 개'로 활약하고 있다. 물론 미국이 빈틈을 보인다면 일본은 언제든 '숨겨둔 칼'을 꺼내 들고 주인(?)인 미국을 단칼에 베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니 <국화와 칼>에 적힌 방식으론 퇴마 일행이 악령이 깃든 우두머리를 제압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제 목숨마저 내놓으면서 '악령집단'을 품에 안는 위험천만한 수법을 썼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퇴마 일행들 앞에 앞으로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책의 말미에 '임사체험'을 하며 하느님과 만나고 말씀까지 전해들은 박 신부는 '그분께서 오실 길'을 미리 준비하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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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1 : 혼세편 퇴마록
이우혁 지음 / 엘릭시르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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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 혼세편 1>  이우혁 / 엘릭시르 (2012)

[My Review MDCCXCVI / 엘릭시르 8번째 리뷰] 세상이 다시 혼란스러워지고 있다. '국내편'에서 퇴마행을 하기 위해 뭉쳤던 박 신부, 이현암, 현승희, 장준후, 4명의 퇴마사들은 언어학 박사 서연희 양과 함께 '세계편'에서 대활약을 펼친 끝에 이 세상을 악으로 물들이려 악마 아스타로트를 불러들이는 '지옥문'을 열려는 블랙서클과 싸워 승리를 거두웠다. 그렇게 세상은 평온해지는 줄 알았으나 여기저기에서 '악을 추종하는 세력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며 퇴마사들을 바쁘게 만든다. '혼세편 1권'에서는 블랙서클 퇴치 뒤에 국내에서 일어나는 혼돈스런 상황을 정리하는 일에 나섰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이야기가 바로 <와불이 일어나면 편>에 잘 나타났다.

<와불이 일어나면>에선 일제 총독부가 앞장 서서 조선의 정기를 끊어놓겠다며 풍수지리에 근거하여 조선팔도 명당이란 명당 자리에 '쇠말뚝'을 박아넣는 만행을 저질렀다. 물론 풍수지리가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산이나 들에 쇠말뚝 몇 개, 아니 수백 수천 개를 박아놓았다고 한들 큰 문제가 될 것도 없다. 만약에 풍수지리가 실제로 큰 힘을 발휘하는 과학적 근거가 있다면 '국내의 건설업'은 물론이거나와 전세계 건설업자들은 모두 풍수지리에 따라 조심스럽게 사업을 펼쳐야 했을 것이다. 다행히 풍수지리는 그럴 만한 힘이 없으니 크게 걱정할 것이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일본 총독부가 '한국땅'에 쇠말뚝을 박아넣은 일이 만행인 까닭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목적이 '조선의 정기'를 끊어 한민족이 절대로 부흥하지 못하고 결국엔 쇠망하게 만들겠다는 의도를 품고 있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런 곱지 못한 의도로 저지른 짓을 철저히 파헤쳐서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겠다는 것이 '혼세편 1권'의 핵심 주제인 셈이다.

<와불이 일어나면>의 배경은 전라남도 화순군에 있는 운주사다. 이 운주사가 유명한 까닭은 이곳에 '천불천탑'이 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천개의 불상과 천개의 석탑'이 있다는 이름인데, 그 옛날 신라 효공왕 때 도선국사가 천상(하늘)의 석공들을 불러 하룻밤만에 만들었다고 전해지는데, 그야말로 엄청난 수의 불상과 석탑이 있는 관계로 장관을 이룬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렇게나 많은 불상과 석탑의 모습이 제각각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실제로 1000개의 숫자보다는 한참 모자란 수로 현존하는 까닭에 그저 '많다'는 뜻을 담아 지었다는 설과 당시엔 '천 개'를 꼭 채웠으나 무수한 세월이 흐른 지금은 수백 개만 남아 있다는 설이 함께 전해진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운주사에 있는 와불(누운 자세의 불상)을 일으켜 세우려는 시도가 '흔적'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당시의 기술로는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크레인이나 기중기도 없었기에 놀라울 따름이고, 굳이 누워 있는 불상을 세우려는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는 그 의도가 '풍수지리'와 깊은 연관이 있으며, '풍수지리'에 입각해서 와불이 일어나면 벌어질 일들에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래서 풍수지리상 한반도의 형세가 어떠한가 살펴보면, '행주형국(行舟形局)'으로 뜻을 풀면, 배가 동쪽 바다로 나아가는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태백산맥이 있는 동쪽 지형이 지대가 높고 서쪽으로 갈수록 지대가 낮아지는 모양을 하고 있으니 한반도의 땅 모양이 배와 같은데, 한 쪽이 무거워서 무거운 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니 배가 똑바로 나아가지 못하고 크게 휘어져 나가는 형세라는 말이다. 그러나 풍수지리라는 것이 '좋은 땅, 나쁜 땅'을 가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애초에 좋은 땅은 더욱 좋게 만들고, 반대로 나쁜 땅이라 할지라도 '부족함'은 채우고 '과함'은 깍아서 좋은 형세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 근본이다. 그렇기에 동쪽 땅이 무거우면 서쪽 땅에도 그에 못지 않은 '무게'를 주어 기울어진 배를 바로 잡으면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행주형국'인 한반도의 서쪽 땅(전라남도)에 운주사를 하루만에 짓고 그곳에 천불천탑을 하룻밤만에 지어 바로 잡아 '한반도의 풍수 기운이 올바르게 차고 넘치도록 보완했다'는 것이 핵심인 것이다.

소설에서는 바로 이런 '사실(史實)'에 근거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여기에 일제시대 총독부의 만행을 기어 넣은 것이다. 다시 말해, 도선국사가 바로 잡은 한반도의 좋은 풍수를 망치려 전국에 '쇠말뚝 테러'를 저질렀고, 와불 또한 일으켜 세우려 했다는 것이다. 우리 민족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만행이다. 명백하게 '나쁜 의도'로 저지른 짓이자, 대한민국의 국보이자 소중한 문화재를 망가뜨리려 한 범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퇴마사와 함께 동행한 풍수지리가와 도가의 고수(도술 고단자)가 부족한 불상과 석탑을 복원하고 와불을 일으켜 세워 과거의 잘못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하지 않은 일본 정부를 향해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 다시 말해, 읿어버렸던 풍수의 기운을 되살리는 것을 넘어 와불을 일으켜 세움으로써 그 기운을 더욱 넘치게 한다면, 우리 나라는 큰 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고, 반대로 일본은 침몰시켜 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식민의 경험'이라는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도 저들의 잘못을 사죄하거나 반성하기는커녕 도리어 '저들 덕분에' 한국이 이만큼이나마 잘 살게 되었다는 허튼 소리를 지꺼리는 일본정치인들에게 혼쭐을 낼 수 있다면, 와불을 일으켜 세우는 것뿐 아니라 더 심한 일도 마땅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지만, '풍수지리'라는 것은 비과학적인 일이다. 천불천탑으로 '기울어진 형세'를 바로 잡았는데, 일제가 이를 훼손시켜 우리에게로 향하던 '기운'이 일본으로 흘러들어가 일제가 부흥할 수 있었으니, 역으로 훼손된 천불천탑을 복원시켜 일본으로 흘러들어가는 '기운'을 흘러가지 못하게 막고, 와불을 일으켜 세워 무거운 태백산맥을 지렛대의 주춧돌로 삼아 일본 열도를 높이 들어올렸다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떨어뜨려서 그대로 '침몰'시켜버린다는 가설이 실제로 일어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일제 총독부가 실제로 효과가 있을 지 없을지 모르지만 '나쁜 의도'로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설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저들처럼' 우리에겐 좋은 기운을 일본에겐 나쁜 기운을 천벌처럼 내려본다면 어떨 것인가? 모르긴 몰라도 통쾌하지 않겠는가? 마치 거대한 태풍이 우리 나라를 비켜서 일도 열도로 곧장 가버리던가, 진도 9가 넘는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고, 그로 인해 지진해일(쓰나미)가 일본 열도를 강타해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면 통쾌한 기분이 드는 것처럼 말이다.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지도 않고, 그에 대한 사죄나 반성 따위는 할 줄도 모르는 '야만인들의 나라'가 그처럼 천벌을 받아 벌벌 떠는 모습이라도 보는 것이 속시원한 일이랄 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우리가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면 그런 마음을 품는 것조차 큰 죄책감을 갖게 될 것이 틀림 없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잖은가. 일제가 저지른 만행은 반드시 죄값을 받게 하고, 그 피해 배상 또한 꼭 받아내야 하며, 다시는 그런 죄악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사죄를 반드시 받아내야 한다. 두 번 다시 이 땅을 넘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도록 처절한 반성까지 얻어내면 개이득이다. 그러나 그것이 '일본인, 모두를 죄인으로 삼겠다'는 것이라면 옳지 못한 일이다. 과거에 저지른 '아빠의 잘못'을, 현재의 '그 아들'과 미래의 '그 손주'가 대신 받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니 현재를 살아가는 '전후 세대의 일본인'에게 과거의 죄값을 물어, 너희들은 죽어 마땅한 족속이라고 매도해버리면 안 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반드시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야 할 '대상'은 다름 아닌 '일본정부'다. 그들의 뻔뻔한 면상을 후두려 패고 굴복시켜야 한단 말이다. 물론 폭력적인 방법이 아닌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그것이 '정상국가'이자 '선진국'의 방식인 것이다. 이를 얻어내기 위해서 우리가 일본정부보다 앞서고 뛰어난 '선도력'을 보여줘야 저들을 굴복시킬 수 있다. 허나 폭력적인 방법으로 저들을 굴복시킨다면 '복수는 복수는 낳는다'는 진리를 통해 저들 또한 '앙갚음'을 하려 들 것이다.

다시 소설로 돌아와서, 일본 침몰을 실현시킬 수 있는 '스위치'를 우리가 손에 쥘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그리고 퇴마사들이 선택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단 한 명의 목숨을 구하고, 고통에 겨워하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라면 하나 뿐인 목숨일망정 기꺼이 내놓을 준비가 된 이들이 바로 퇴마사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능력을 허튼 일에 쓰지 않는다. 다시 말해, 저들에게 주어진 놀라운 능력이 놀라운 까닭은 '능력,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능력을 지녔음에도' 저들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구할 수 있는 목숨과 영혼을 위해서 아낌없이 내놓을 각오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천할 따름이다. 그들이 구할 수 있다면, 그들은 어디라도 갈 것이다. 설령 그곳이 지옥의 끝자락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런 퇴마사들이 일본 침몰을 목적으로 한 '와불'을 일으켜 세우는 일에 어떤 선택을 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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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 산책 16 - 제국의 그늘 미국사 산책 16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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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XCV / 인물과사상사 23번째 리뷰]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까지도 미국인들은 '진화론'보다는 '창조론'을 믿는다고 한다. 심지어 과학을 전공한 박사들조차 '그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기꺼이 이 세상을 조물주이신 하느님이 창조하셨고, 그런 하느님이 가장 사랑하는 곳은 미국인들이 사는 땅이라는 결론을 천연덕스럽게 내놓는다. 오죽하면 신앙의 과학적 접근을 허용하며 '지적 설계론'이라는 것까지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그리고서 미국 공립학교에서 '과학과목'의 내용을 과학선생님이 가르치면서 '진화론'과 함께 '창조론'도 가르쳐야 한다는 법까지 제정하고, 이를 어기면 과학선생님이라도 불법을 저지르게 된단다. 이미 '지적 설계론'으로 인해서 종교적 믿음조차 과학적으로 증빙이 되었으니 과학선생님들은 '빅뱅'이 아닌 '천지창조'로 우주의 탄생을 가르쳐야 한다고 아이들의 학부모들이 강력하게 주장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단다.

하느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과 어둠으로 갈라졌고, 이것이 첫째날이다"라는 성경구절을 과학시간에 가르쳐야 하는 선생님들은 어처구니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미국의 법'이다. 아직까지도 미국 법정에서 증인이 선서를 할 때 손을 올려놓는 책이 있는데, 그 책이 '미국의 헌법책'이 아니라 '성경'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미국은 바로 그런 나라다. 유대인들만 하느님께서 콕 집어 지목하고 영원토록 보살펴 주겠다는 '선민의식'을 가진 게 아니다. 미국민들도 <성경>의 말씀에 따라, 인간이 세상 모든 만물을 다스리라고 했던 것처럼, 인간 가운데 오직 '백인'만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충만하니 '유색인종'을 짐승처럼 다루고 소유할 권리를 지녔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미국인이다. 이런 미국에서 아직까지도 '흑백갈등'이 찬란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처럼 미국에선 신앙심이 깊으면 그만큼 대접을 해주는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다. 다른 책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오직 <성경> 단 한 권의 책만 읽는 조지 W. 부시가 2004년에 재선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강한 미국'을 선호했고, 아들 부시는 이에 부응해 '강경한 대외정책'을 표방하며 미국 이외의 나라들을 선과 악으로 나누어 철저하게 악을 응징하는 자세를 취했기 때문이다. 이런 아들 부시 시절에 '9·11테러'가 일어난 것이 과연 우연일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부시행정부에 속한 측근들의 입을 통한 소문은 거의 대부분이 아들 부시가 대통령이 되어서도 하는 일이라곤 <성경> 공부뿐이었다고 한다. 중대한 정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도 아들 부시는 어김없이 '성경구절'만 달달 인용하였고, 심지어 '이라크 전쟁'을 할지 말지 찬반을 논의할 때에도 아들 부시의 명령은 "이라크 침공이 합당하다는 근거를 <성경>에서 찾아내라"면서 장관과 보좌진들을 닥달했다고 한다. 이러한 대통령인데도 미국민들은 아들 부시를 또 다시 선택했다. 실수가 아니다. 미국민이 원하는 바였던 것이다. 왜냐면 대통령의 입을 통해서 '성경구절'을 들을 때면 애국심이 철철 넘쳐나는 듯한 감성에 푹 빠져드는 유권자들이 차고 넘쳤기 때문이다. 그렇다.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하느님이 미국을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말을 들을 때 가슴 뭉클해지는 무언가가 샘솟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의 신앙심이 이 정도다.

이런 신앙심은 상식적으로, 또는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과학자라면 '검증가능한 것'만을 믿을 수 있다고 해야 하는데, 종교와 신앙에서의 '맹목적인 믿음'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미국의 과학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지적 설계론'을 옹호하면서 '신앙'조차 '검증가능'한 분야로 확장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지적 설계론자들의 논리는 이런 것이다. 온갖 것을 다 갖춘 '쓰레기장'에 우연히 허리케인이 불어닥친다고해서 비행기가 뚝딱 만들어질 수 없다. 그런데도 만약 '비행기'가 만들어졌다면, 이건 '신의 섭리'가 개입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은 존재한다'는 것이 증명가능한 것이다. 왜냐면 전지전능한 신이 이 세상을 만드는 '개입' 없이는 이토록 정교한 시스템을 갖춰서 만들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일부 과학자들이 말하는 '우연'이 개입해서 어떻게 이토록 정교한 것들을, 이렇게나 많이 만들 수 있겠느냔 말이다. 오직 '필연'만이 가능케 한다. 우리는 이런 '필연'을 '지적 설계'라고 말한다. 바로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명백한 과학적 증거다. 그럴 듯한 논법을 전개했지만, 이것을 어찌 '과학'이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우연히 만들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을테니 필연적인 개입이 반드시 있을 수밖에 없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신의 섭리'라는 주장이 어찌 '과학적 검증방법'이란 말인가?

그런데 '교회의 힘'이 막강한 환경속에서는 이런 주장이 통용될 수도 있다. 또한 '과학'처럼 어렵지 않고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무장했다는 점이 '지적 설계론'을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한다. 미국인들이 '역사'에 무지하다는 소문은 거의 대부분 사실로 확인된다. 아니 '무지'하다기보다는 '관심'조차 없다. 자기 조국이 초강대국이 되어서 전세계를 호령하고 있는데, 굳이 뭣하러 역사공부를 하러 골머리를 썩혀야 하겠는가 말이다. 골머리를 썩히기보다 그냥 누리는 것이 훨씬 더 편한데 말이다. 역사공부만 하지 않을까? 다른 공부도 안하긴 마찬가지다. 미국학생들의 기초학력이 우려할 정도로 형편없다고 걱정하면서 '한국의 교육'을 본받으라고 입 아프게 외친 이가 바로 '버락 오바마 미대통령'이다. 그렇게 형편없는 상식으로 뽑아놓은 대통령들이 하나같이 우려할 정도가 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미국이 이처럼 '강한 미국'을 선호하고, 그 강력함에 취해 있으면서 미국에는 점점 더 많은 문제점들이 산적해 가고 있었다. 온갖 매체를 통해서 양산되는 '폭력문화'는 말할 것도 없고, 빈부격차는 초강력한 나라인 만큼 더할 나위 없이 극과 극으로 갈라졌으며, 다인종·다민족·다문화 사회속에서도 소통과 화합보다 우위에 선 '백인우월주의'가 꿋꿋이 자리매김하며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양산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LA한인폭동과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위력 앞에 '빈민들'을 처리(?)하는 미국의 기득권 세력들의 행태가 그 단적이 증거들일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승자독식주의'는 미국 선거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전세계를 상대로 미국은 '승자의 자리'를 놓치지 않으며 모든 것을 독차지하는 횡포를 부렸다. 20세기를 넘어 21세기 초반까지도 미국은 그런 횡포를 저지르더니 지금에 와서는 결코 '승자'가 될 수 없는 처지로 전락하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져만 간다. 그간 미국만의 부려왔던 '권위주의', 또한 러시아나 중국, 그리고 이스라엘 따위가 부리기 시작하자 미국의 위협은 더는 먹히지 않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과연 미국이 자초한 '승자독식주의'가 더는 미국에 이익을 수반하지 못하게 될 때, 과연 미국은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가? 이래저래 미국이 갖고 있는 딜레마가 나의 호기심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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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 산책 15 - '9.11테러 시대'의 미국 미국사 산책 15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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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XCIV / 인물과사상사 22번째 리뷰] 2000년 미국인이 선택한 43대 대통령은 조지 W. 부시, 다시 말해, '아들 부시'였다. 아빠 부시가 '노련한 정치인'이었다면 아들 부시는 '멍청한 정치인'이었다. 왜냐면 그는 맹목적인 신앙심에 기대어 좋고 나쁨을 '구분'만 할 줄 아는 얼뜨기였기 때문이다. 좋게 말하면 '선한 목자'였으나, 기독교에 반하는 세력은 모두 '타자화' 시키고, 그들을 '악의 축'이자 '미국의 적'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렇게나 어설픈 정치인이 미국의 대통령으로 있을 때, 두 가지 큰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하나는 '9·11 테러'이고, 다른 하나는 '이라크 전쟁'이었다. 이런 사태를 맞이한 '아들 부시'가 한 선택은 전쟁이었다. 딴에는 이해가 된다. 역사적으로 독립 이후 미국 본토가 적대세력에게 공격받은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었는데, 공격을 받았으니 크나큰 충격일 수밖에 없었으며, 그로 인해 정당한 보복을 해야 한다는데 미국 국민들의 동의를 구하는 것에는 '명분'이 충분했다. 그러나 그런 차고 넘치는 명분으로 '전쟁'을 해서 미국이 얻는 것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못했다. 왜냐면 '실익'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강대국 미국이 테러를 당했다지만 국가가 휘청거릴 정도로 큰 충격도 아니었다. 다만 테러로 인해 엄청난 사상자와 경제적인 손해, 그리고 미국이 갖고 있던 자부심에 상처를 받았으니, 이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해 미국이 '실리'를 챙기는 것이라면 전세계 그 어떤 나라라도 미국의 의지에 반대할 명분이 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엄청난 강자의 처지에 놓여 있는 미국이 테러를 주동한 '빈 라덴'과 '알 카에다'를 때려 잡는 것을 넘어 '아프가니스탄 침공'까지 계획했던 것이다. 테러 집단을 보호하고 있다는 명목을 내세워 '아프가니스탄'이라는 국가에 본격적인 내정간섭까지 시나리오를 짜놓은 것이다. 이는 테러소탕을 넘어 아프가니스탄에 '친미정권'을 세워 러시아와 중국 등 '반미국가'까지 동시에 견제하겠다는 계산이 선 것이다. 문제는 전쟁을 마무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점이다. 21세기가 되어서도 미국은 '베트남전'에서 얻은 교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셈이다. 명분은 그럴 듯 했지만 실리를 챙기기는커녕 '엄청난 손실'만 보게 되는 나쁜 수를 미국이 또 저지른 것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렇게 '전쟁'을 치루는데 대통령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아들 부시'가 전쟁을 일으켜야 하겠다고 결심을 세웠으나 온 나라가 이에 장단이라도 맞추듯 정계와 제계, 그리고 언론까지 한목소리로 '전쟁'을 외쳤다는 것이다. 그로 인한 후폭풍은 고스란히 '미국민들의 몫'이 되었다. 빈약한 명분으로 엄청난 손해를 얻었는데, 그 손실을 메꿀 수 있는 방법은 '미국민이 책임'을 지는 것이었던 셈이다. 이에 멈추지 않고 아들 부시는 '대량살상무기'라는 카드를 꺼내며 이라크의 독재자 후세인을 다음 목표로 삼았다. 독재자 후세인만 제거하면 '이라크의 모든 문제'는 일거에 해소될 거라고 호언장담을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또다시 정계, 제계, 언론이 삼박자를 맞춰 '이라크 전쟁, 찬성'쪽으로 밀어붙인다. 하지만 이라크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또다시 불명예를 한 몸에 받았다. 특히, 이라크 전쟁이 시작하기 전부터 '반전의 목소리'가 거세게 타올랐는데도 '아들 부시'는 이를 일축해버리고 자신의 선택이 옳다고만 우겼다. 급기야 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할 거라는 예언(?)이 <성경>에 나와 있다는 주장까지 해대며 '대량살상무기'를 가지고 있는 후세인 정권을 몰락시켜야만 한다는 정당성만 앞세운 주장을 매일같이 떠들어댔다. 그렇게 '이라크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이었지만, 이라크 어디에서도 '대량살상무기'는 발견하지 못했다. 오히려 독재자 후세인 아래에서 신음하던 이라크 국민을 해방(?)시킨 미군이었지만, 그 미군이 자행한 '이라크 포로를 학대한 증거'만 잔뜩 쏟아져 나왔을 뿐이다. 후세인만 끌어내리면 이라크는 행복할 수밖에 없다던 아들 부시의 생각이 여지없이 틀렸다는 빼박증거였다. 심지어 이라크 포로를 고문하고 학대해도 좋다는 '명령서'에 아들 부시가 직접 사인까지 했다는 후문이 들리자 미국민들은 이라크 전쟁이 수치스런 전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도대체 미국이 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을까? 미국민들이 '자국의 역사'에 대하 무지하다는 것은 정평이 나 있다. 미국의 독립기념일이 언제인지도 모른다고 답한 미국민들이 70%가 넘는다고 한다. 이토록 무지한 미국민들이 열광하는 것은 바로 '엄청난 상금'이 걸린 리얼리티 프로그램이었다고 한다. 이를 테면 '무인도에서 벌어진 생존 서바이벌'이나 '엄청난 갑부와 결혼하기' 등 돈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다 허용하는 서바이벌 매치를 벌이며 매일, 또는 매주 후보자들을 탈락시키며 최종 1인에게 엄청난 상금을 수여하는 방송이었다. 이런 방송에선 비열한 속임수가 난무할 수밖에 없었고 종종 폭력성과 선정성이 도마 위에 올라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지만, 그조차도 '시청률 대박', '흥행 보증'이라는 방송사의 수익구조에 묻혀서 있는 듯 없는 듯 해결되고 말았다. 이러한 미국민들이 '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이라는 중요한 이슈에 어떻게 반응하였을까?

  물론, 양식과 교양을 갖춘 지식인들 사이에선 수준 높은 토론을 벌이며 '앞으로의 미국'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를 이어나갔지만, 대다수의 미국민들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보수적인 언론매체의 선동'이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미국을 되살리기 위해선 '합당한 보복(전쟁)'을 해야 하고, 그렇게 하는 것만이 '애국'이라는 보수적인 메시지에 미국민들이 환호하게 된 셈이다. 이 메시지의 중심에는 바로 '아들 부시'가 있었고 말이다. 그는 '십자군 전쟁'을 부추긴 교황처럼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면서 강한 미국의 힘을 전세계에 보여주는 것만이 올바른 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광신도들 앞의 교주'처럼 목놓아 외치고 있었다. 미국 안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반전시위'를 벌이고 있는데도, 그들의 목소리는 애써 무시했고, 심지어 그들의 행태를 '반애국적'이라면서 매도하기 십상이었다. 이렇게 미국의 보수주의와 신앙심을 합친 '온정적 보수주의'는 부시 행정부의 모토였으며, 강경한 대외정책을 주장하는 '네오콘'이 급부상하면서 미국은 또다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돌진해 들어간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과연 옳은 일이었을까? 극좌가 위험한 '생각'인 것처럼 극우의 '행동' 또한 매우 위험한 일이다. 공산사회주의가 내세우는 '평등'과 '공동체 우선주의'는 상상속에서만 실현가능한 일이다. 현실은 어쩔 수 없이 '불공정'과 '불공평'하게 돌아간다. 이에 맞서서 할 수 있는 최선은 고작 '매우 불공정'하고 '매우 불공평'한 일이 벌어지지 않게 감시하고 처벌이 필요하다는 벌을 주어서라도 '살짝 불공정'과 '살짝 불공평' 정도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 반면에 모든 것을 '기득권 유지'에 올인하는 극우적 행동도 좌시해선 안 된다. 더 나아가 '그들만의 천국'을 만들려는 시도엔 대변혁으로 맞서야만 한다. 이렇게 극좌와 극우로 치우치지 않고 '중도'로 유지해나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데 부시 행정부는 '극우의 행동'으로 너무나도 치우쳐졌다. 마침 맞게 부시 행정부의 탄생과 더불어 테러를 당한 미국사회는 이러한 '극우적 행동'으로 나아가는데 길을 넓히고 만 것이다. 그로 인해 분명 '미국인'인데도 백인이 아니면 '잠정적 테러리스트'로 간주하여 폭력을 행사하는 것도 당연시하게 되었다. 당시 '아랍계 미국인들' 가운데 가장 흔한 이름인 '무함마드', '모하메드' 등과 같이 테러범의 이름과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구속되어 수년 동안 감옥을 전전했던 무고한 시민들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들은 미국인이 아니란 말인가? 애국을 당연시하면서 왜 '백인'이 아니면 미국을 사랑할 수도 없게 만드냔 말이다. 왜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잠재적 죄수' 취급을 하느냔 말이다. 미국사회는 이때를 계기로 더욱더 '백인'과 '부자'에게만 더할나위 없는 천국이 되어 버렸다.

  진보와 보수의 조화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다양성과 변화를 '중시'하는 생각을 하면서 내 나라를 '사랑'하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는 행동을 일삼는 일이 어찌 상충할 것이냔 말이다. 변화를 중시하는 진보적인 사고는 '그들'만이 아닌 '모두'를 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게 만든다. 그리고 자존심과 자부심으로 가득찬 '나라사랑'으로 온국민을 똘똘 뭉치게 만드는 행동주의는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바탕이 된다. 허나 현실적으로 서로 다른 '개인'이 똘똘 뭉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저마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다양성을 중시하고 변화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매우 중요하다. 나와 다른 너의 생각을 '포용'하고 '공생'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진보적 사고방식과 보수적 행동방식은 조율을 통해 조화를 이룰 수 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서로 '상충하는 개념'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보적인 생각을 하며 보수적인 행동을 일상으로 실행하다 보면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서민적인 마인드를 가진 재벌의 행동양식을 실천한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 박사'처럼 말이다.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 같은 초일류 부자들이 "내게 세금을 더 많이 물려라!"라는 외침이 이러한 실천의 일환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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