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과학사
팀 제임스 지음, 김주희 옮김 / 한빛비즈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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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III / 한빛비즈 153번째 리뷰] 모든 학문이 그렇지만 '알면' 참 유용하다. 굳이 '아는 것이 힘'이라는 베이컨의 명언을 끄집어낼 필요도 없이, 우리는 살면서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을 실감하며 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대인에게 가장 필요한 학문을 꼽자면 어느 과목을 가장 중요하게 공부해야 할까? 초등생 시절부터 죽어라 공부했던 '국영수사과'에서 답을 고르자면, 나는 '과학'을 꼽고 싶다. 물론 모국어인 '국어'를 몰라서도 안 되고, 세계화 시대에 걸맞게 '영어'를 등한시해서도 안 되며, 논리적 사고력의 기틀을 잡아줄 '수학'도 꼭 필수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살펴볼 안목을 길러주는 '사회'도 중요한 과목이긴 하지만, '과학'을 콕 짚어서 필수중요 과목이라 꼽은 까닭은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르게 이해하는 척도'가 되는 과목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한 눈에 알고 싶다면 과학공부를 게을리 해선 안 된다는 말이다. 나름 20년째 아이들에게 논술을 가르친 경험을 토대로 드리는 말씀이니 믿어도 좋다.

좀더 부연설명을 드리자면, 과학성적이 우수한 학생과 그렇지 못한 학생의 차이가 엄청나게 크다는 말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과학을 잘하면 '이과', 과학을 못하면 '문과'를 지향하는 선별적인 차이에 불과하다면서 '단순암기 과목'으로 치부하곤 했지만, 7차 교육개정 이후로 '통합교과'에 따른 수시개정이 보편화된 현재의 교육과정에서 '과학'은 명문대를 갈 수 있느냐, 가지 못하느냐를 가름하는 중요한 척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과학과목 뿐만 아니라 '수학'도 중시된 까닭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수학보다는 과학이 더 중시되는 까닭은 현대사회에서 '과학기술'과 관련이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선 '과학지식'이 그 어느 때보다 더 긴요하게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해서 과학을 모르면 살 수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무리 첨단제품이 쏟아져 나온다고해도 '메뉴얼'에 나와있는 '사용설명'을 읽고 '간편조작 버튼'이 어디 있는지만 알면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평범하게 살아가는데에 복잡한 '과학이론'까지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편리하고 안락하게 살아가며 '경제적 윤택함'을 누리면서 살고 싶다면 과학공부는 필수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노동(육체적 힘)'으로 먹고 살아가는 방법으론 택도 없고, '돈(자본)'이 돈을 버는 투자를 하지 않고서는 경제적 여유를 누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망한 기업에 투자를 해야 하고, 어떤 기업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지 한눈에 알아보려면 '과학' 정도는 '상식'이 되어야 한다. 언제까지 남들의 귀띔을 엿듣고서 뒤늦게 투자할 셈인가? 세상이 돌아가는 원천은 '과학기술'에 있고, '과학기술'을 선점한 국가가 선진국인 것이 당연시 되는 세상이다. 하다 못해 침대를 고를 때에도 '과학'을 따지던 세상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과학공부가 맘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맘잡고 과학상식 좀 넓히려고 '과학책'을 꺼내들었다가 몇 장 넘기지도 못하고 다시 덮은 일이 많을 것이다. 실제로 요즘 과학은 너무 어렵다. 어찌어찌 '뉴턴과학'까지는 기초 상식으로 이해가 가능하지만 '플레밍의 오른손 법칙'에 이어 '왼손 법칙'까지 따지다보면 본의 아니게 쌍권총을 들고 춤을 추게 된다. 그러다가 '아인슈타인과학'으로 넘어갈라치면 '특수상대성이론'은 특수하게 어렵고, '일반상대성이론'은 일반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알게되고 '양자물리학'으로 넘어가면 우주가 왜 그렇게 비정상적으로 운용되고 있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된다. 그렇게 까마득한 우주의 끝자락으로 과학이해의 경계를 넓히다보면, 문득 그 넓은 우주속에 자그마한 지구가 '창백한 점' 하나를 찍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겸손해지기 마련이다. 왜냐면 시작은 '과학'이었지만 그 끝에는 '철학적 사유'로 귀결되는 오묘한 진리를 깨우치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렵고 난해한 과학공부를 꼭 해야만 하는가? 라는 질문으로 되돌아올 즈음에야 겨우 '알기 쉽게 풀이된 과학책'을 찾기 마련이다. 그럴 때 딱 좋은 책이 있다. <뜻밖의 과학사>라는 책이다. 이 책은 '팀 제임스'라는 영국의 과학선생님이 직접 쓴 책이다. 이 책 이전에 <원소 이야기>, <양자역학 이야기>, 그리고 <천문학 이야기>까지 줄줄이 히트작을 내놓은 인기만점의 '유명 유튜버'이기도 하다. 제임스는 그렇게 인기를 끈 강의를 필두로 하여 책을 펴냈는데, 이 책 <뜻밖의 과학사>는 그 책들의 '종합편'이라고 해도 좋다. 앞서 펴냈던 책들에서 소개한 내용을 이 책에서 다시 선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는 '과학사'라고 하는 역사적인 이야기꺼리를 조목조목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앞선 책보다는 '부담'은 줄이고 '재미'와 '흥미'는 높이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어쩌면 제임스는 이 책을 통해 과학에 관한 '부담'은 낮추고 과학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공부하는 과정을 지켜보면 항상 '성공'하는 패턴이 있다. 여기서 성공이라함은 '성적향상'을 말한다. 어느 과목일지라도 '재미'를 느끼고 즐기듯 즐겁게 공부하면 반드시 성적이 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없던 과목에서 '재미'를 느끼기 위해선 언제나 '흥미유발'이 필요했다. '흥미'를 유발시키야 재미를 느낄 수 있었고, 이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공식에 따라서 '흥미+지식', 다시 말해 '흥미'에 '지식'을 더해야 성적향상이라는 결실을 맺었던 것이다. 그런데 '흥미'를 느끼기 이전에 더 중요한 것은 '관심'을 가지는 것이었다. 흔한 속담 가운데 '말을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는 것처럼 아무리 교사가 '흥미'를 유발시키고 '지식'을 더해주려 노력해도 아이가 '관심'을 갖지 않고 꺼버리면 말짱도루묵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수업시간 안에 온갖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했지만, 이것만큼은 누구도 해줄 수가 없었고, 오직 '본인'만이 스스로 갖는 방법밖에 없었다. 20년째 그 노력을 해보았지만 '관심사'까지 아이에게 억지로 가지게 만드는 참교육 방법은 없다는 것만을 확인했을 뿐이다. 하지만 일단 '관심'이 생기면 그 뒤부터는 일사천리다. 그 뒤부터는 파죽지세처럼 누구도 말릴 수 없는 것이었고, 오히려 '흥미폭발'을 어디까지 컨트롤 할 수 있는지 걱정해야 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렇게 깨우친 '원리와 이치'는 죽을 때까지 잊혀지지 않으며, 무엇으로도 그 '열의와 열성'을 막을 수도 없게 된다.

이 책에 소개된 '과학사'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쉽사리 얻어낸 결과가 없다는 점에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물론 페니실린처럼 '실수'가 위대한 발견의 시작이 되기도 했고, 고무나 플라스틱처럼 '엉뚱한 결과물'이 위대한 발명을 낳기도 했으며, 빅뱅이론처럼 '남들의 비아냥'을 받던 것이 과학계의 새로운 정설로 탄생되는 일도 흔하지만, 수많은 과학자들의 노고가 없었다면 그러한 실수와 실패, 또는 비웃음을 통해서 얻어낸 것이 아무 것도 없었을 거라는 점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과학의 혜택'을 무궁무진하게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과학이론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했어도 말이다. 그런데 앞으로의 미래에도 그럴까? 그건 아니라고 본다. 왜냐면 첨단과학기술이 '일상생활의 모든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TV가 만들어지면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봐야 할 수고를 덜고, 가정에서 편하게 시청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저 '일방적으로' 시청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OTT를 기반으로 '원하는 것'을 골라서 따로 시청이 가능해졌다. 가까운 미래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모르긴 몰라도 TV를 대체할 새로운 콘텐츠를 '시청자'가 직접 만들어서 유통하는 시장이 만들어질 것이다. 과거에는 전문가의 영역이었던 '제작과정'이 간편해지면서 다채로운 상상력을 발휘한 이들의 데뷔가 관건이 되는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그러니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면 그러한 '창작물'을 직접 제작하지도 못하고 소외되는 계층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어쩌면 완벽한 '양방향 상호소통'이 가능해진 제작환경에서 24시간 라이브(생방송)가 펼쳐지는 세상이 될지도 모른다.

그때에는 무엇이 관건이 될까? 무엇보다 '창작력'이 가장 절실할 것이다. 창작과 창조의 영역은 '무한한 상상의 세계'다. 첨단과학기술은 머릿속에 상상한 것을 그대로 표현해낼 수 있는 세상을 구현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상상력은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이것이 관건이 되는데, 안타깝게도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는 법'이다. 다시 말해, 창조교육의 시작은 '모방'으로부터 비롯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기초교육'은 지식교육이 될 수밖에 없고, 결국 '암기과목'으로부터 시작해서 어느 정도 활용할 수 있는 '데이타'를 쌓고 난 뒤에야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이 '창의력'에 상상의 날개를 달아줄 학문은 단연코 '과학'이 틀림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머나먼 미래를 그린 것에 '공상과학(SF)'이라는 말을 붙인 것이다. 결국은 '상상의 날개를 단 과학'이란 뜻과 상통하게 된다.

이 책에 소개된 '과학사'들은 한결같이 뜬금없다. 나름 '과학의 연대기'에 걸맞게 흐름을 쫓으려 노력했지만, 읽다 보면 중구난방 어지러움을 느낄 뿐이다. 그만큼 과학이 '방대하다'는 것을 짐작케 하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자칫하다간 길을 잃고 헤매기 딱 좋은 서술방식이라는 비판도 감수해야만 할 것이다. 허나 저자의 '의식의 흐름'을 되짚어가다보면 '뜻하지 않게 놀라운 과학사'를 마주하고 있는 독자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물리와 화학, 생물, 지구과학을 넘나드는 과학사의 나열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이치를 헤아리다보면 어느새 '과학에 대한 관심'이 부쩍 달아오른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놀라운 경지에 오른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뿌듯하지 않겠는가. 이 책이 당신도 깨닫지 못했던 '과학적 관심'을 일깨우는데 보탬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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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 외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1
소포클레스 외 지음, 천병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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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My Review MDCCCXII / 문예출판사 6번째 리뷰] 이 책에는 그리스 3대 비극 작가 가운데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의 작품이 모두 4편 실려 있다. 실려있는 순서대로 아이스킬로스의 <아가멤논>, <코에포로이>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다. 모두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비극적인 소재'로 구성되어 있으며, 신이 정해놓은 운명에 맞서 고뇌하고 고통받는 인간의 모습을 아주 잘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희극'이 아니라 '비극'이 그리스에서 유행한 것일까? 이에 대해 많은 문학가들은 '인간의 위대함과 존엄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논한다. 신이 정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고, 또한 그 삶은 '고통의 연속'일 뿐이지만, 그 절망적이고 가망 없는 투쟁 속에서도 인간은 타협을 거부하고 파멸을 자초하면서 스스로 '존재의 가치'를 찾아내는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의 피조물에 불과한 하찮은 인간일지라도 '정해진 운명'에 맞서 싸우는 불굴의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진정한 '인간다움'을 보여준다 하겠다.

그렇다면 뭐가 '인간다움'이란 말인가? 그리스 비극에서 보여주는 내용은 그야말로 '참담함, 그 자체'다. <아가멤논>에서는 아내가 내연남과 짜고서 남편을 독살하고, <코에포로이>에서는 아들이 어머니와 내연남을 죽이며 아버지의 복수를 대신한다. <오이디푸스 왕>에서는 더 심하다. 아들이 아비를 죽이고 어미와 결혼해서 자식까지 낳는 스토리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안티고네>는 비극의 정점을 찍었다하겠다. 꼭 지켜야 마땅할 '국법 vs 도덕'의 갈등을 최고조로 보여주며 무엇이 올바른 것이고, 무엇이 정의인지 고뇌케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느 작품이나 비극적 상황을 묘사하지만 후대로 갈수록 '비극적 주제'가 점점 더 무거워지고 수많은 생각을 하게끔 한다. 이런 까닭에 많은 문학가들은 아이스킬로스를 '비극의 창시자'라고 부르고, 소포클레스를 '비극의 완성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비극의 매력'은 갈등양상을 벌이는 양쪽 모두의 편을 들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느 한 쪽의 편을 쉽사리 들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비극에 푹 빠지게 만드는 이유라고 하겠다. <아가멤논>에서 아내(클리타이메스트라)가 남편(아가멤논)을 죽이기 위해 내연남(아이기스토스)까지 끌어들이는 '부정적인 일면'만 소개하는 일이 많은데, 사실 아내가 마땅히 사랑하고 존경해야할 남편이라는 작자가 '딸(이피게네이아)'을 전쟁 출정식의 산 제물로 갖다 바친 것에 대한 복수였던 것이다. 이는 어머니라면 당연히 가졌다고 보는 '모성애'를 공격한 남편의 천인공로할 만행에 대한 정당한 복수가 아니겠냔 말이다. 그러나 전쟁영웅이기도 한 남편을 죽이기에 힘이 모자랐던 아내는 남편을 죽이기 위해 '내연남'을 꼬드겼고, 이러한 '아내의 불륜(?)'은 예나 지금이나 금기시 되고 동정받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편, <코에포로이>는 <아가멤논>의 뒷이야기에 해당한다. 남편을 살해하고 내연남과 함께 국가를 통치한 클리타이메스트라의 친아들 오레스테스가 '아버지(아가멤논)의 복수'를 위해 고국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들은 부정한 짓(!)을 저지른 어머니와 내연남을 처지하며 복수에 성공한다.

그런데 말이다. 이런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한 국가의 백성들은 행복한가? 아무리 '왕족의 운명'과 공동운명체(?)인 백성들이라고해도 민주정치의 원조라 자랑하던 그리스국가 아니었던가 말이다. 더구나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영웅들이 살아 숨쉬던 시절을 배경으로 삼았는데, 그런 영웅들이 고국으로 되돌아와 통치에 참여한 모습은 전혀 비춰지지 않는다. 이것이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의 한계점이다. 비록 '비극의 창시자'라는 칭송을 아낌없이 받고 있지만, '비극,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고 그냥 '한 가문(왕족)의 몰락'만에만 초점을 맞췄을 뿐이다. 그에 반해 소포클레스는 좀더 심오한 내용을 담았다. 비록 '오이디푸스 왕'이 겪은 불운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은 매한가지지만, 그래도 오이디푸스가 다스리는 '테바이'라는 나라가 겪는 풍파와 테바이 민중들이 겪는 고난까지 작품내용의 전개에 중요한 매개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오이디푸스 왕>은 정신분석학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의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명칭으로 더 유명해졌지만, 오이디푸스가 친부를 살해하고 친모와 결혼을 한 것에만 초점을 맞춰 '성도착증'이라는 성욕구만 해석을 해버리는 편파적인 결과만 부추긴 점이 아쉽다. 사실 오이디푸스 왕은 테바이를 아주 잘 다스리던 훌륭한 군주였는데도 말이다. 이러한 점은 싹 가려지고 그저 비이성적인 성욕구에 대한 그럴듯한(?) 분석만 남겨놓았으니 억울할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렇게 훌륭한 군주로 나라를 잘 다스리고 있었는데, 테바이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역병이 돌면서 테바이는 '판데믹의 위기'로 빠져버리고 만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델포이 신전으로 신탁을 받아 오지만, '도덕적으로 불명예스러운 이'가 테바이에 몰려온 위기의 원인이라는 애매한 말만 돌아왔을 뿐이다. 지혜로운 오이디푸스 왕도 이 수수께끼 같은 신탁을 해석하지 못해 고민하게 된다.

오이디푸스 왕이 지혜로운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가 테바이의 왕이 되기 전에 괴물 '스핑크스'가 테바이를 공포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스핑크스는 '아침엔 네 발, 점심엔 두 발, 저녁엔 세 발로 걷는 동물'이 무엇이냐는 수수께끼를 내고서 풀지 못한 나그네들을 잡아먹기로 유명한 괴물이었는데, 이 괴물이 낸 수수께끼를 이방인이었던 오이디푸스가 답을 맞추고 스핑크스를 처지해서 때마침 테바이의 왕이었던 라이오스가 의문의 죽음(!)을 맞아 자리가 빈 임금자리를 오이디푸스가 차지하게 되었고, 살아있는 왕비 이오카스테와 결혼을 해서 '테바이 왕가의 혈통'을 이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오이디푸스의 등장은 테바이로서는 국난극복을 해낸 영웅의 등장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고, 그런 오이디푸스 왕이 테바이를 다스리는 동안 태평성대를 누렸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평화로운 테바이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역병이 돌면서 테바이를 '죽음의 나라'에 버금갈 정도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받아온 신탁이 '부도덕한 인물을 추방해야 한다'는 내용이니 지혜로운 오이디푸스마저도 풀지 못한 숙제가 되어 버린 셈이다.

이렇게나 어려운 문제를 풀기 위해 오이디푸스는 최선을 다했고, 그 최선이란 것이 '부도덕한 인물'을 색출하여 마땅한 벌을 받게 하고 테바이에서 추방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최고통치자인 자신부터 이를 실천하겠노라고 엄숙한 맹세까지 한다. 그 부도덕한 인물을 추방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두 눈을 찔러' 장님으로 만들겠노라고 말이다. 어찌 이렇게나 무서운 맹세가 자기 자신에게 닥칠 것이라 예상이나 했을까? 그렇게 부도덕한 인물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인해 결국 그 장본인이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두 눈을 찔러 '진실을 보지 못한 죄'를 씻고, '자신의 안위'보다 국가의 안위를 위해서 스스로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 맹인거지가 되어 테바이를 떠난다. 자신이 왕이었을 때 그 '부도덕한 인물'을 아무도 도와주지 말라 명했던 탓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인간에게 내려진 무서운 운명에 벌벌 떠는 나약한 인간이 아닌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불운 앞에서도 당당히 맞서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인간'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이런 멋진 인간에게 아낌없이 박수갈채를 보내지 않느냔 말이다.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면 당당히 벌을 받고 철저히 속죄하는 모습이 얼마나 '인간다운 행동'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다만, 그처럼 '인간다움'을 갖춘 인격이 오늘날에는 찾아보기 힘들 뿐이다. 죄를 짓고도 비겁하게 '무죄'를 받기 위해 꼼수를 부리고, 부도덕한 짓을 저지르고도 '과거의 영예'를 끌어들여 오물을 덮고 고약한 냄새를 감추려 애를 쓰는 비겁자들을 우리는 너무도 많이 보고 있다. 심지어 비윤리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비윤리적인 행동'마저 정상이라고 떠벌리는 비정상적인 세태까지 펼쳐질 지경이다. 어찌 인간의 탈을 쓰고 그리 부끄러운 짓을 떳떳하게 밝히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그런 비정상적인 인간을 방치하고 부도덕한 짓을 저지르는데도 그저 방관만 하고 있는 국민들도 '비정상'인 것은 마찬가지다. 우리가 <오이디푸스 왕>을 통해서 깨달아야 할 것은 '비극'에 맞서 피하거나 굽히거나 굴하지 않는 한 인간의 일거수일투족이다. 오이디푸스의 행보 하나하나를 눈여겨 보아야 할 '시대적 위기'가 우리에게 닥쳤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안티고네>는 무엇을 '지키고 따라야' 우리가 사는 세상을 고귀하게 만들 수 있는지 보여준다. 오이디푸스 왕이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고 테바이를 통치할 자리에 올라야 할 '마땅한 권리'는 당연히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에게 있었다. 바로 장자 폴리네이케스와 차남 에테오클레스다. 하지만 왕의 자리는 하나였기에 두 형제는 '선택'해야만 했다.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합의'를 할 것인지, '싸울' 것인지 말이다. 비극적 운명은 이 둘에게 '싸움'을 종용했고, 둘은 못나게도 싸웠다. 물론 처음엔 장자에게 왕위가 돌아갔다. 하지만 외삼촌인 크레온의 야욕(?)에 의해 둘은 왕위 다툼을 벌이게 되었고, 장자가 내쫓기고 차남이 왕위에 오르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억울했던 장자는 이웃나라에 '구원병'을 청하고 고국 테바이를 향해 창을 꼬나쥐게 된다. 이렇게 벌인 싸움에서 두 사람은 목숨을 잃어버리는 치명상을 당하여 죽고, 비어 있는 왕위는 크레온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왕의 자리에 올라 오랫동안 고난을 겪은 테바이를 바로 잡고자 '국법'을 내세웠으니, 조국을 위해 싸운 자에게는 명예롭게 하고 조국을 배신한 자에게는 불명예를 내리겠다는 모두가 이해할 만한 '합당한 법'을 공표한다. 이처럼 크레온은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줄 아는 '똑똑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비극의 시작은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불명예를 받아 마땅한 테바이의 배신자 '폴리네이케스'는 외국의 군대까지 끌여들여 조국을 공격했으니 그의 시체는 그 누구도 장례를 치루지 말 것이며, 들짐승과 날짐승의 먹잇감으로 방치해 둘 것을 명령한다. 그리고 누구라도 그 명령을 어긴다면 '국법의 이름'으로 엄히 다스릴 것이라 함께 공지한다.

그런데 이를 어기는 사람이 등장하고 만다. 바로 폴리네이케스의 살아남은 혈육인 여동생 '안티고네'와 '이스메네'다. 안티고네는 아무리 국법으로 금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친오빠를 장례도 치르지 못하는 하는 국법을 지킬 순 없다면서 오빠의 죽음을 애도한다. 이는 '도덕적인 행위'이며 누가 탓할 수도 없는 상식이다. 그런데 그런 상식이 '국법'에 위배된다면서 안티고네는 스스로 죽을 운명을 지게 된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현명한 임금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조치를 해야 할까? 스스로 제정한 '국법'의 지엄함을 증명하기 위해 손수 사형을 해야 할까? 아니면, 비록 법을 어겼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지켜야 마땅할 '도덕적 가치'를 위해 한 발 물러서서 '예외'를 두어야 할까? 허나 꼭 지켜야 할 '국법'에 예외를 둔다면 국법이 제대로 지켜질 리 없다. 누구라도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으며 '빠져나갈 구멍'을 찾을 게 뻔하고, 그렇게 흔들린 '사법정의'는 끝내 무너져버릴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정의구현'을 내세운다 한들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은 '꼭 지켜져야할 도덕적 윤리'라는 것이 있다. 아무리 법으로 금한다 하더라도 '핏줄로 이어진 가족'이 지켜야 할 윤리가치가 있지 않느냔 말이다. 그런 가족 간에 치뤄야 할 '윤리규정'이 있다면 그것마저 금하게 만드는 것은 너무나도 '비인간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에 안티고네는 국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일이라 하더라도 목숨을 돌보지 않고 '오빠의 장례'를 치룬 것이다. 세상엔 '국법'보다 더 소중히 지키고 따라야 할 '윤리가치'가 있다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더 중요하고, 우선 되어야 마땅할까? 나라를 바로 세우는 '사법정의'가 중요할까? 인간답게 살아갈 '윤리가치'가 더 우선해야 할까? 쉽지 않은 결정이다.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따지는 듯한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우리가 살아갈 세상을 올바르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선 꼭 따져보고 현명한 대답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소포클레스는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이 안티고네를 사랑하는 것으로 설정하고 '엄격한 국법'을 시행한 대가로 크레온은 아들과 아내를 동시에 잃어버리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한마디로 멋진 나라를 만드는데 성공했으나 사랑하는 가족은 잃어버린 셈이다. 허나 사랑하는 가족마저 죽음을 면치 못하게 만든 '인간'이 만든 세상이 아름다울 수 있겠느냐는 의문은 계속 남는다.

우리네 인생은 '비극'으로 얼룩져 있다. 한마디로 아름답기만 한 인생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리스 비극'은 인간들이 겪고 있는 비극보다 더한 슬픔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카타르시스(눈물의 정화)'라고 표현하며 슬픔을 겪으며 한바탕 울음과 눈물을 쏟고 난 뒤에 '마음의 찌꺼기'를 걸러내어 슬픔을 이겨낼 힘을 얻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극'을 예찬했다. 한편의 비극이 우리네 삶보다 더욱 슬픈데도 '비극적 주인공'이 슬픈 운명에 맞서 당당한 모습을 통해서, 현실에서 맛볼 '평범한 비극' 따위는 가볍게 이겨낼 수 있다고 말이다. 물론 시대가 많이 변한 오늘날에는 '비극'보다 더한 '막장 드라마'가 현실로 펼쳐지고 있어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으나 운명에 맞서는 당당한 주인공의 모습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 그 막장 드라마보다 더한 막장 현실이 우리네 삶을 시험케 하더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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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한중일 세계사 17 - 을미사변과 황해 위기 본격 한중일 세계사 17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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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I / 위즈덤하우스 33번째 리뷰] 고종에 대한 평가는 어찌 해야 할까? 망국의 임금으로서 '나름' 열심히 일한 성군으로 추켜세워야 할까? 아니면, 나라가 망하거나 말거나 '왕권회복'에만 혈안이 된 암군으로 매도해도 될까? 객관적인 평가만 놓고 본다면 '나름' 열심히 일한 왕임에는 틀림없지만 '세계정세'를 볼 수 있는 혜안이 없어서 국가의 운명과 백성의 안위가 바람 앞의 촛불 신세인데도 '제 잇속(왕권)'만은 놓치지 않으려 부던히도 애를 쓰는 모습이 안쓰러울 지경이다. 허나 주관적인 평가를 한다면, 그래도 내 나라 임금인데 미워할 수만 있겠느냔 말이다. 비록 '조선왕조의 백성'이 아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고종을 평가한다면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는 안목을 읽어내지 못해 결국 '망국의 길'을 제 발로 걸어들어간 암군이었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첫 단추는 '흥선대원군'이 잘못 끼웠다. 어린 임금(고종)을 대신해서 '세도정치의 폐단'을 바로 잡고 '왕조의 기틀'을 회복하여 조선왕조의 부흥을 꾀했다는 점에선 높은 점수를 주어야 마땅하겠지만, 서구열강의 야욕과 침탈까지 적절히 읽어내고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점은 뼈 아프다. 더구나 어린 고종이 '어른 고종'이 되었을 때 자연스레 권력을 이양하고 사심 없이 뒷전으로 물러나야 했음에도, 그러지 않고 '임오군란'을 비롯해서 끊임없이 임금과 '권력다툼'을 했다는 것이 조선을 망국으로 이끈 주범이라 할 것이다.

그 다음엔 '민비'의 섣부른 정치 훈수였다. 을미사변 이후에 '명성황후'로 추증되나 살아있을 땐 고종의 아내인 '민씨 성을 가진 왕비'였다. 그리고 조선은 '왕비(여자)의 정치참여'를 용인하지 않았다. 문정왕후의 섭정이 임금(명종)의 권력보다 강할 때도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임금의 어머니'였었다. 왕의 부인인 '왕비'가 권력의 축이 된 적은 조선시대에 없었단 말이다. 그런데도 민비는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권력다툼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민씨의 천하'를 만들 정도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그것이 절대적으로 '고종의 왕권회복'을 위해서만 이루어진 일이었다면 그나마 높이 평가해줄 수 있겠으나, 딴에는 '고종의 권위'보다 우월함을 점거하며 독단적인 전횡을 저지르기도 했다는 점에서 도를 넘었다 하겠다. 더구나 (친미파에서 친일파로, 친일파에서 친러파로 갈아타는) 개화파의 우두머리 역할(?)까지 마다하지 않은 추진력은 고종의 든든한 파트너로 대원군과 '왕권다툼'을 벌일 때도 있었으나, 공공연히 고종보다 더 강력한 리더십으로 '권력행사'를 벌이는 일도 있었다는 점에서 국정농단(외척의 간섭)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럼에도 고종의 줏대를 발휘해서 국정을 원활하게 운영했더라면 조선은 위기 속에서도 살길을 찾는 행보로 나아갔을 것이다. 가장 결정적인 실수는 '청의 개입'을 두 차례나 용인했다는 점이다. 동학농민운동(동학혁명) 때에도, 갑신정변 때에도 스스로 해결방법을 찾지 않고 '청군 원병'을 요청해서 국가의 주권을 크게 훼손시켰다. 더구나 을미사변(민비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과감하게(?) '아관파천(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단행한 것이다. 아무리 일본의 강압적 태도에 놀라고 신변의 위협으로 살기 힘들어졌다고 하더라도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외국공사관에 몸을 의탁하고서 러시아의 보호(?)를 꾀하느냔 말이다. 이 역시 '청군의 개입'과 마찬가지로 '러시아군의 개입'을 종용하는 결과를 낳았고, 결국 '스스로 해결방법'을 찾지 않고 끊임없이 다른 나라를 끌어들여 국가를 어지럽히는 자충수를 둔 셈이다. 그리고 청군의 개입으로 '청일전쟁'이 벌어진 것처럼 러시아군의 개입을 빌미로 '러일전쟁'이 벌어질 참이니 조선은 '다른 나라의 전쟁'에 전쟁터를 제공하는 어리석은 짓을 벌인 셈이다. 물론, 결과가 좋았으면 '신의 한 수'라면서 고종을 칭송하는 이들도 많았으리라. 그런데 결과까지 안 좋았으니 고종은 더욱더 비난만 받게 될 뿐이었다.

딴에는 '약소국의 비애'를 감안하여 다른 열강의 힘을 빌어 '이이제이(오랑캐의 힘으로 오랑캐를 제압한다)'를 하려는 고종의 비극을 충분히 이해할 수도 있을 법하다. 호시탐탐 조선을 넘보는 '일본제국의 야욕' 앞에 청의 힘을 빌어 일제를 제압하려 했고, 미국의 힘을 빌어 일제를 저지하려 했으며, 러시아의 힘을 빌어 일제를 호령하려 하는 것이 슬기로운 지혜라 하지 않을 수 있겠냔 말이다. 허나 조선에게 시급한 것은 '근대화'였다. 그 때문에 뒤늦게나마 '개화파의 손'을 들어주며 조선을 개혁하려 들고 근대화에 앞장 서려 했으나 손발이 맞지 않아 번번히 실패한 탓도 있겠다. 먼저 근대화를 성공시키기 위해선 '국력'이 바탕으로 깔려 있어야 하는데, 국력의 근본이랄 수 있는 '경제력'이 바닥을 치고 있었으니 서구열강 앞의 먹잇감 밖에 될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경제력을 키우기 위해선 '백성들부터 근대교육'을 시켰어야 했는데, 그러기엔 자금도 부족했고, 열의도 없었다. 그저 양반의 자제들 몇몇 만이 소위 '외국물'을 먹고 왔을 뿐이며, 그들이 맛보고 온 '선진문물'에 대해 옥석을 가릴 줄 아는 이가 얼마 없었으니, 그나마도 아무 소용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훗날 서재필이 주도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망해가는 나라에 빛이 될 수도 있었으나, 그 빛마저 고종은 자신의 '전제왕권강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제 발로 차버린 셈이 되었다. 그리고서 꿋꿋하게 밀어붙인 것이 '대한제국 황제가 되는 길'이었으니, 한 치 앞도 살피지 못하는 어리석은 임금의 전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긴 이런 전제왕권의 끝을 잡고 허우적거리던 것이 어디 '고종' 하나 뿐이었겠는가? 청나라 황실이 그랬고, 러시아 로마노프 황제가 그랬으며, 프로이센을 비롯해서 유럽 곳곳의 왕조가 모두 비슷한 운명을 맞이했더랬다. 그럼에도 그네들은 '식민지'를 거느린 제국주의 국가로 거듭난 반면에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수모를 겪은 것이 결정적 차이다. 이렇게 종합적인 평가를 매겨도 고종은 좋은 점수를 받기 힘들다.

이제 조선은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이미 그 역사를 알고 있지만, 제대로 알고 있지는 못하다. 그 까닭은 '한국사'라는 우물 속에서만 굴러가는 역사를 공부한 탓이다. 이 책이 훌륭한 까닭은 '한국사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주변 정세'를 아울러 '세계 정세'까지 역사적 흐름에 발맞춰서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깨알같은 글씨'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아 불편하지만, 그래도 이 책을 놓치 않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제 '러일전쟁'이 펼쳐질 참이다. 그 전쟁이 벌어지기까지 어떤 정세가 숨겨져 있었는지 속시원히 알아보고자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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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 이야기 - 빅뱅부터 블랙홀까지, 외계 생명체부터 쿼크 별까지 형언할 수 없이 신비롭고 흥미로운 우주과학의 세계
팀 제임스 지음, 김주희 옮김 / 한빛비즈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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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 / 한빛비즈 152번째 리뷰] 어릴 적 새벽운동을 나갔다가 동쪽 하늘만 바라보다 그냥 집에 돌아온 적이 있다.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은 이른 아침이었는데 무심코 동쪽 하늘을 바라봤다가 넋을 놓았기 때문이다. 시간은 무려 3~40분 정도였을 텐데, 정확하지는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해가 뜨기 전' 어두운 밤하늘이었고, 새벽 햇살이 밝아오다 '해가 온전히 다 뜬 뒤'까지였으니 그 정도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그런데 난 그 시간동안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동쪽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바로 '금성' 때문이었다. 샛별이라고도 불리는 금성이 동쪽 하늘에서 '열 십(十) 자' 모양으로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두운 하늘이었을 때도 그렇게 밝은 빛이었는데, 해가 동녘에 떠오를 때까지 그 밝음을 잃지 않고 환하기 빛나고 있었다. 경이롭다고 해야 할까? 그 순간 나는 '천문학'에 사로 잡혀버리고 말았다. 아니 진로를 그쪽으로 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천문학과에 진학할 수 있는 성적을 갖추지 못해 결국 '성적'에 맞춰 대학을 가야 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학력고사 세대였던 나는 그렇게 '천문학'과 거리를 두어야만 했다.

그래도 과학책 가운데 천문학과 관련된 것은 수룩하게 읽어재꼈다. 태양계를 비롯해서 광활한 우주와 관련된 책이라면 가리지 않았고, 영화와 독서도 SF장르라면 빠뜨리지 않고 섭렵할 정도였다. 심지어 '신화 이야기'와 '점성술'까지 탐독했으며, 외계인과 UFO에 관한 '미스테리'에도 관심을 놓치지 않았으니 웬만한 '음모론' 정도는 시나리오로 줄줄 써나갈 정도의 경지에 다다랐다고 자부하는 바다. 그래서 우주에 관한 과학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해박하냐고 묻는다면...딱히 대답할 말이 없다. 우주에 대해서 그토록 많이 안다면서 왜 대답할 것이 없냐고 묻는다면, 현재 최고의 '천문학자'라 할지라도 나와 비슷한 처지일 것이 분명하다. 왜냐면 우주는 너무나도 광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부터 하이델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 킵 손의 '양자역학', 그리고 난해하기 짝이 없는 '끈 이론'까지 우주에 대해서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서 천재적인 물리학자들이 수많은 방정식을 통해 분석했고, 위대한 천문학자들이 밤을 낮 삼아 잠을 설쳐가면서도 우주를 연구하고 또 연구했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결론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냐면 우주는 너무 광활했고, 우리는 그렇게나 광활한 우주를 '연구대상'으로 삼았으면서도 '지구밖'으로 한발짝도 나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지구밖'으로 나가 달에 착륙한 인류를 배출하기도 했고,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을 탐사하기 위해 수많은 위성을 쏘아올렸으며, 외계의 생명체가 살고 있음직한 '골디락스 행성들'을 품고 있는 항성계와 은하계에 '지구의 정보'가 가득 담긴 전파를 줄기차게 쏴대기도 했더랬다. 그럼에도 그 가운데 어느 것도 '목표지점'까지 도달한 적이 없으며, 태양계의 행성을 탐사를 마친 위성들도 명왕성 궤도를 넘어 더 먼 곳까지 항해하고 있지만, 아직도 '태양계 안(오르트 구름)'을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 은하에서도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는 (주계열성의 항성들을 기준으로 해도) 조그만 항성에 불과한 '태양계'조차 벗어나지 못한 인류가 어떻게 감히 '우주'를 논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이렇게 비관적인 까닭은 '위대한 천문학자들'의 연구방법이라는 것이 고작해야 '(지구 안에서) 관측'하는 방법 밖에 없기 때문이다. 좀더 관측을 잘하기 위해서, 다시 말해, '오차'를 줄이기 위해서 인공조명이 전혀 없고 공기 맑고 맑은 날이 많은 산꼭대기에 '천문대'를 만들고서 관측을 하던가, 아니면 '관측위성'을 궤도에 쏘아올려 좀더 섬세한 결과치를 얻을 수 있게 하는 것이 고작일 뿐이다. 그래봤자 137억 광년이나 떨어져 있는 '우주의 끝(?)'에 비한다면 그닥 차이가 없는 '창백한 푸른 점'에 불과할 뿐이다. 그럼에도 천문학은 계속해서 우주를 연구해 왔고, 그 성과는 놀라울 따름이며, 우주의 신비를 밝혀냈을 뿐만 아니라 '생명의 비밀'까지 밝혀내는 쾌거를 낳은 것이 바로 '천문학의 위엄'이다.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고작 '관측'을 했을 뿐인데, 그토록 놀라운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니 말이다. 그렇지만 그렇게나 놀라운 비밀을 밝혀냈지만 이를 증명할 방법이 없다. 왜냐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선 '인간'이 직접 가서 '인간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그 사실을 '경험'하고 사실을 판단하고 결과를 내놓아야 할 텐데, 천문학은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우주는 광활하고 너무 커서 인간의 짧은 수명으로는 증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우주에서 가장 빠르다는 '빛의 속도(초속 30만 킬로미터)'로도 수십 억 광년(빛의 속도로 1년 동안 간 거리)이나 멀리 떨어져 있으니 갔다가 '사실'을 확인하고 '지구'로 돌아오면 지구가 사라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태양의 수명이 이제 50억 년 남았을 뿐이고, 40억 년 뒤에는 태양이 '적색거성'이 되어 있을 것이고, 그때 쯤에는 태양이 화성까지 집어삼켜버릴 정도로 커져 있을 것이기 때문에 지구는 태양속에서 불타서 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웜홀'이나 '워프'를 통해서 먼거리를 순식간에 이동하는 기술을 개발해서 휙 갔다가 휘릭 돌아오면 가능하지 않겠느냔 말이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우주는 '시간'과 '공간'이 합쳐진 '시공간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하는데, 그런 시공간을 인간의 맘대로 접거나 구부릴 수 있는 방법이 실제로 가능한 것인지 알 수도 없고, 실제로 '시공간'을 맘대로 구부리고 펴서 인간이 '원하는 장소'에 정확히 안착할 것이라는 보장이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렇게 '시공간'을 움직일 에너지(원동력)는 무엇으로 얻을 것이냔 말이다. 사실 '웜홀'이니 '타임워프'니 하는 것도 결국은 수학과 물리학의 '방정식'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흔히 말하는 '이론물리학적 계산'으로는 명백하게 증명할 수 있으나, 그 방정식에 인간을 탑재한 우주선을 띄워서 원하는 장소로 보내는 일은 전혀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면적이 4제곱미터인 넓이를 구할 수 있는 '한 변의 길이'를 방정식으로 풀이하면 한 변이 2미터라는 간단한 결론을 얻긴 하지만, 방정식으로는 '또 하나의 답'이 있을 수 있다. 바로 '한 변의 -2미터'여도 우리는 면적이 4제곱미터인 넓이를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천문학적인 쾌거가 늘 '한 변이 2미터'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인간을 우주선에 태워 머나먼 우주로 실어 보낼 수 있을 텐데, 때로는 '한 변이 -2미터'인 경우도 흔하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을 우주로 보낼 수 없는 것이다. 사실 '한 변이 -2미터'인 우주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증명할 방법도 없고, '한 변이 -2미터'인 우주선을 만들어 인간을 실어서 보낼 방법도 없기 때문이다.

더욱 곤란한 사실은 우리는 '우주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다보니 '우주여행을 할 수 있는 정확한' 우주지도를 만들 수 없다. 이는 망망대해를 항해하며 세계지도 없이 탐험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우리가 지구에서 바라보는 별빛은 이미 별의 수명이 다해서 '죽은 별'일 가능성이 높다. 밝고 크게 빛나는 별일수록 가까이 다가간다면 이미 빛을 뿜어내지 않는 '블랙홀'일 가능성도 높다. 물론 블랙홀도 '질량'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면 착륙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나도 강력한 '초거대질량'을 갖고 있는 탓에 우리에게 익숙한 '시공간'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이 변수다. 더구나 블랙홀에 접근하는 순간 우리의 눈에는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보일 것이다. 영원히 말이다. 하지만 블랙홀에 도착한 이는 '평범한 시간'이 흐를 것이다. 단지 우리가 관측할 때만 '멈춰 보이는 것'일 뿐이다. 그렇게 시공간조차 멈추게 만들 정도로 엄청난 중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블랙홀에 닿는 순간,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딴에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있으니, 우주의 어딘가에 무엇이라도 뿜어내는 '화이트홀'이 있을 것으로 짐작한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질량보존의 법칙'에 위배되지 않기 위해선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주는 우리의 상식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사실 시공간조차 멈춰진 것처럼 보이는 블랙홀은 질량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빨아들일 정도로 '무거운 질량'을 갖고 있으면서도 방정식 계산상으로는 블랙홀에 질량이 없어야만 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기만 할 것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수많은 방정식을 도입한 결과가 '초끈 이론'이다. 물론, 무식한 비전공자인 까닭에 '초끈 이론'을 알기 쉽게 설명하지 못하지만, 간단히 설명하자면 '차원이 다른 셈'이다. 우리가 2차원에서 '점'으로 보이는 것이 3차원에서는 '끈의 한 단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3차원에 살고 있기 때문에 '점'이 사실은 '끈'일 수 있게 하기 위해선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끌어들여야만 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초끈 이론'을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 하지만 오늘날의 발달된 천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선 '초끈 이론'을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한다. 물론 요즘엔 '초끈 이론'도 시들해진 모양이다. 곧이어 새로운 방정식의 결과로 '색다른 우주'가 펼쳐질 것이란 징조이기도 하다.

물론, 복잡한 방정식을 이해해야만 우주의 신비를 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걸 몰라도 우리는 '천문학'을 쉽고 재미나게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바로 이렇게나 신비로운 우주와 관련된 '음모론'에 빠져들어 잘못된 천문학의 길로 접어드는 것이다. 바로 '외계인의 침공'이나 'UFO에 관한 각국 정부의 음모론'에 심취해서 본질을 흐리는 것이다. 이런 음모론은 왕왕 '사이비 종교'와 결탁해서 잘못된 신앙을 전파하는데 악용되기도 한다. 과거에 '점성술'이 그랬다. 단순히 심심풀이로 운세를 점치는 용도에서 그치지 않고 '한 인간의 운명'이 별자리에 영향을 받아서 '결정된다'는 그릇된 맹신으로 심화되기도 하고, '한 국가의 명운'마저 하늘에 떠 있는 별과 있을 지 없을지 모를 '외계인'까지 연루시켜서 지구의 종말을 꾀하는 일은 결코 외계인의 소행이 아니다. 그런 일은 '사기꾼의 꾐'일 뿐이다. 단언컨대, 한 사람의 운명은 '스스로' 개척할 대상이지 '별자리'가 정해주지 않는다. 광활한 우주공간에 우리만 '존재'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또 다른 존재'가 있다하더라도 지구를 침공할 일은 결단코 없다. 왜냐면 우리가 지닌 고도의 지능으로도 먼 우주를 여행하지 못하는데, 지구까지 도달할 '외계 생명체'가 있다손치더라도 지구는 탐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보잘 것 없는 하찮은 행성에 불과하기 때문에 굳이 지구를 침공까지 할 외계인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다시 말하면, 지구에서 얻을 수 있는 '자원'을 탐내서 침략할 '멍청한 외계인'이라면 지구까지 도달할 우주선을 만들 수도 없을 것이며, 그런 우주선을 만들 정도로 '초초초고도의 지능'을 갖추고 있다면 지구가 아닌 '가까운 곳'에서 필요한 자원을 다 얻을 수 있을 것이기에 결코 지구는 탐나는 행성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외계인의 침공' 따윈 그저 공상과학의 소잿거리일 뿐이니 걱정 붙들어매도 상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더구나 종교와 결탁한 '사이비 과학'은 말할 것도 없다. <성경>에 온갖 만물을 만드신 하느님도 자신의 형상을 본떠서 '인간'을 만들며 온갖 것의 '주인'이 되라 하셨으니, 그 하느님이 만든 세상의 일부에 '외계인'이 있다하더라도 그 존재가 감히 '하느님의 형상'과 닮은 인간을 해치려 할 까닭이 없을 것이고, 설령 그 외계인이 '하느님'을 믿지 않고 몰라서 굳이 지구침공을 결심했다고 한다면 '<성경>, 그 자체'가 헛된 것이니 그런 '거짓 종교'에 심취해서 삶을 망칠 까닭이 없단 말이다. 종교는 인간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고 가르칠 뿐이다. 그런데 그 '사랑하는 마음'으로 누구를 공격하고, 무엇을 배척하라 하며, '특정 인물'에게 절대복종하라고 강요한다면, 그건 절대로 '종교'가 아닌 것이다. 그런 '사이비 종교'에 절대로 발도 들이지 말지어다. 더구나 '천문학'을 더럽히는 '가짜 종교'가 있다면 '과학의 이름'으로 준엄하게 꾸짖어도 좋을 것이다. 우리가 과학 공부에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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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시즌2 : 15 미생 (리커버 에디션) 15
윤태호 지음 / 더오리진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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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IX / 더오리진 2번째 리뷰] 원 인터내셔널 회사에 재직중인 안영이가 '대리'로 승진을 했다. 장그래, 장백기, 한석율과 함께 원 인터 입사동기였는데, 장그래는 계약직 만료와 함께 퇴사한 뒤에 '온길 인터내셔널'이라는 중소기업의 창단멤버로 재취업을 했고, 남아 있던 동기들 가운데 가장 먼저 승진하게 된 것이다. 물론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다른 무역상사에서 경력을 쌓았기에 입사하면서부터 남다른 실력을 뽐내던 터라 그녀의 승진은 오히려 늦은 감이 따를 정도였다. 그러나 거기에도 속사정이 있었는데 안영이의 상사였던 '조명준 대리'가 안영이의 아이디어를 '자기 것'으로 공을 채가는 바람에 승진기회를 날려버렸던 것이다. 그랬던 상사가 음으로, 양으로 후임인 안영이의 '인사고과'를 챙겨주었고, 그 덕분(?)에 안영이가 입사동기들보다 앞서서 대리 승진을 하게 된 사연이다.

그러나 동기들의 축하를 받기도 전에 '장백기(철강팀)'는 인사고과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실적도 챙기지 못하는 일이 벌어진다. 중국발 철강 이슈가 원 인터를 비롯해서 대한민국 철강무역에 차질을 끼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 인터 같은 '대기업'조차 철강수출입에 곤란을 겪게 된 것이다. 중국이 원자재인 '철강수출'을 금지하고 자국의 철강산업을 위해 '(중국)내수용'으로만 원자재를 활용하겠다는 일방적인 발표 때문에 장백기가 속한 철강팀도 결국은 '해체수순'을 밟게 된 셈이다. 장백기는 그간 쌓아온 실적이 날아가버리는 '악재'였고, 인사고과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상사의 진급'을 위해서 희생(?)하고 말았으니, 한마디로 죽 쒀서 개 준 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원 인터조차 '철강팀 해체'를 결정하자 장백기와 '강해준 대리'는 졸지에 다른 부서(영업3팀)로 발령이 나버리고, 그간 쌓아온 커리어조차 싹 날라가버리는 처지에 놓인다.

한편, 장그래가 몸 담고 있는 '온길 인터'도 송일무역과 합병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아 '중국발 리스크'로 인한 철강사업 악재를 겪게 된다. 대기업인 원 인터조차 철강팀을 해체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었는데, 그보다 규모가 훨씬 작은 온길 인터가 어찌 버틸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 바람에 '중국통'으로 온길 인터의 창업멤버로 합류한 '김동수 전무'가 할 일이 없어지게 된다. 그동안 중국과 연관된 사업은 김 전무가 도맡았는데, 중국이 수출금지 조치를 취하자 그가 추진해오던 사업 전체가 '올스톱'이 되고 만 것이다. 그렇게 중국발 악재로 인해 관련 사업을 해오던 한국의 사업장들이 덩달아서 손가락만 빨고 있는 처지가 되었는데, 김 전무는 이런 상황에서도 중국과의 무역을 계속 이어가자고 주장한다. 그동안 중국에 뇌물(꽌시)을 퍼주며 공을 들인 것이 얼마인데, 당장 수익이 나지 않는다고 사업을 접는 것은 앞으로 중국과의 무역, 자체를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 김 전무의 주장이다. 틀린 말도 아니다. '위기는 곧, 기회'라는 것은 사업하는 사람들에게 '바이블'처럼 통용되는 원칙이고, 중국사업의 특징상 '꽌시'로 엮인 사업은 중도하차하는 순간 '배신(?)'을 한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에 '중국사업'에서 손익을 따지며 발을 빼는 것은 영구적으로 사업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꽌시'의 긍정적인 면은 이런 위기상황 속에서도 사업을 끊지 않고 버티면, 호재 상황을 맞아서 상상을 초월하는 이득을 보장하기도 한다. 이를 테면, 중국에 '라면'을 팔겠다고 사업을 벌였는데 중국인들이 '인스턴트 라면'에 익숙하지 않고, '한국의 매운 맛'을 별로 좋아하는 식감이 아니었기 때문에 매출이 바닥을 찍고 있었다. 그렇게 매달 적자를 안고서 사업을 이어가던 중에 중국에 전염병(사스)이 돌면서 외국기업들이 사업을 포기하고 탈출러시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런 위기속에 한국의 한 라면회사가 '중국이 겪는 위기'를 외면하지 않고 어려움을 겪는 중국인들에게 '라면'을 공급하며, 함께 위기극복에 나섰다. 몇 년 뒤, 중국은 전염병을 극복했고, 함께 위기극복에 동참했던 '한국라면 회사'에 고마움을 표하며 '라면 소비'에 앞장 섰다. 그렇게 중국인들이 '한국라면'을 먹기 시작했고, 하루에 1봉씩만 먹어줘도 14억 인구에 비례해서 14억 봉지를 판매하는 호황을 맞게 되었다. 한 달이면 400억 봉지를 판매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이래서 중국에서는 '꽌시'가 통용되는 것이다. 단순히 '뇌물'이 아닌 '믿음에 대한 보답(보은)'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인 것이다. 이렇게나 큰 한 방을 날릴 수 있는 사업이다보니 '중국통'이라면 중국사업을 포기하지 못하는 셈이다.

허나 '온길 인터'의 김부련 사장과 오상식 부장의 스타일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이들은 작아도 '확실한 이익'을 차곡차곡 챙기며 '탄탄한 사업'을 선호한다. 사업상 '신뢰'가 바탕을 이루는 것도 비일비재하지만, 그 신뢰가 회사에 손해를 끼친다면 뒤돌아보지 않고 사업을 접는 것이 옳다고 본다. 그렇게 탄탄한 사업으로 다지게 되면 '온길 인터'가 벌이는 사업마다 결코 망치지 않는 사업을 한다는 신뢰가 쌓이게 되고, 그런 신뢰를 바탕으로 새로운 사업을 키워나간다면 회사는 성장할 수밖에 없고, 무엇보다 '성공하는 사업'을 한다는 짜릿함까지 얻을 수 있기에 일 할 맛이 나는 회사분위기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원 인터 시절의 영업3팀은 바로 그런 팀이었다. 남들이 '하지 않는', '하기 싫어하는' 일에 매달리며, 실적도 형편 없고, 인사고과도 엉망진창이었지만, 오 과장과 김동식 대리, 그리고 장그래 사원은 '하는 일'마다 최선을 다했고, 어렵게 성공한 만큼 기쁨도 몇 배가 더 컸던 것이다. 이런 기쁨은 나중에 합류했던 '천관웅 과장'도 함께 맛보았다.

천 과장은 영업3팀이 앞서 벌였던 '요르단 중고차 사업'에서 비리를 적발한 뒤에 합류한 팀원이었다. 그의 주목적은 '영업3팀의 고과'가 아니라 '영업3팀을 감시'하기 위해서 였던 것이다. 왜냐면 그 요르단 사업 비리를 걷어내니 그 꼭대기에 '최영후 전무'가 함께 엮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도 뛰어난 영업사원으로 실력파였고, 수완 좋게도 '고속 승진'을 하며 전무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다. 하지만 당시 오상식 대리의 직속상사 시절에 '계약직 여사원의 교통사고 사망'과 관련하여 비정한 일처리를 하는 모습을 본 뒤에 최영후 전무와 오상식 과장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 셈이다. 그런 상황에서 '최영후 전무'가 엮어 있는 사업에 '비리연루'가 있다며 사내고발을 한 셈이니 불편했던 것이다. 당시 최영후 전무는 '원 인터 사장'과 힘겨루기를 하던 중이었기에 이 비리 사건은 타격이 컸던 셈이다. 그렇게 천 과장이 '전무의 사람'으로 발탁이 되어 영업3팀을 감시(?)하러 왔는데, 오히려 영업3팀의 일하는 방식에 휩쓸려서 '일할 맛'을 되찾은 셈이기도 하다. 사실 천 과장도 신명나는 일 중독자였지만, 이팀 저팀 떠돌아 다닌 덕분에 '인사고과'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그저 월급쟁이로 버티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토록 신명나게 일하던 영업3팀 멤버들이 '사내고발'을 했다는 이유로 하나둘 짤려 나가자(장그래 계약만료, 오 차장 명예퇴직, 김 대리 퇴사) 다시 재미없는 회사 생활을 이어나가게 된다. 그런 상황에 새로운 '영업3팀 멤버'로 해체된 철강팀의 멤버(강 대리, 장백기 사원)가 합류하게 되었다. 천 과장으로서는 백만 대군을 얻은 장수 같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천 과장은 '온길 인터'와 함께 벌일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다시금 신명나는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젠 오 차장의 부하직원이 아닌 오 부장과 당당한 사업파트너로서 말이다.

그런데 장백기는 고민에 빠진다. 사실 장백기는 장그래를 부러워하면서도 시기와 질투했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은 명문대 출신에, '정사원'인데 반해, 장그래는 고졸 출신에, '계약직'인데 누구나 싫어했던 '영업3팀'에 속해서 규모가 큰 사업도 성공하고, 사내 비리도 척척 밝혀내며, 주위 직원들 사이에서도 '아이디어맨'으로 인정을 받아 '(사업에 관한) 조언'을 구하는 등 여러 모로 자신보다 훨씬 실력을 '인정'을 받는 모습을 봐왔기 때문이다. 그런데다 '철강팀'에 속한 자신은 다른 팀에 비해 실적을 뽐낼 수도 없고, 그저 묵묵히 실수와 차질이 없는 '안정된 사업'만을 하는 스타일로 일을 하는 팀원으로서 제 실력을 제대로 뽐낼 수 없는 처지를 한탄해왔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입사동료인 '안영이'는 대리로 승진했고, '장그래'는 중소기업이지만 여전히 실력을 뽐내는 일을 하며 부러운 삶(!)을 질투하고 있었는데, 자신이 속했던 '철강팀'마저 중국발 악재로 인해 공중분해 되면서 장그래가 일하던 '영업3팀'으로 발령을 받은 것이 못내 속상했던 것이다. 그래서 장백기는 고민 끝에 천 과장과 함께 일하는 것을 포기하고 '다른 팀'으로 재발령을 요청하려고 한다.

한편, 천 과장도 다른 팀으로 가려는 장백기에게 고마움을 먼저 표한다. 왜냐면 그럴 정도로 '깊은 고민'을 했었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 과장으로서는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장백기 같은 뛰어난 인재를 놓치겠느냔 말이다. 그래서 천 과장은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면서 꼭 필요한 인재인 장백기를 잡기 위해 스스로 뛰어들 사업을 재고하며 반드시 성공해 보이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그렇게 진행을 해오던 와중에 천 과장은 아내에게 '새로운 사업'을 할 것이라며 포부(?)를 밝히며, 그로 인해 가정에 닥칠지도 모를 '리스크'가 있으니 자신의 결정에 도움을 청하게 된다. 그때 아내로부터 되돌아온 말은 '오 차장과 함께 남편의 모습'이었다. 그때 남편의 모습은 힘든 일을 하고 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기쁜 모습이었다면서 말이다. 그러다 오 차장이 회사를 떠나자 다시 '고달픈 월급쟁이'로 되돌아가서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그런데 다시 그때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겠다니 굳이 반대하지는 않겠다고 아내는 말한다. 그런데 그때 당신을 신명나게 만들었던 '당신과 전혀 다른 사업 스타일을 갖고 있던 동료'는 찾은 것이냐는 물음에 천 과장은 놀라고 만다. 계약직 신입사원 주제에 사업의 '판'을 흔들던 당차다 못해 건방진 동료가 지금 천 과장, 아니 '천관웅 차장'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과연 장백기에게서 '장그래'와 같은 패기 넘치는 일처리를 기대할 수 있을까? 해답은 '다음 편'에서 밝혀질 것이다.

<미생>의 재미는 에피소드에서 드러난 '전체 맥락'를 조망할 수 있을 때다. 그래서 '전체 줄거리'를 숙지할 필요가 있고, 각각의 캐릭터를 전부 다 완벽히 이해하고 있어야 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마치 바둑에서 벌이는 싸움처럼 말이다. 분명 '각개전투'는 네 개의 귀와 네 개의 변에서 벌어지지만 그 싸움의 끝은 언제나 '중앙의 집'을 얼마나 차지하느냐로 승패가 갈라지곤 한다. 옛날 바둑스타일은 '중앙'에서 싸우면서 '변방'을 어떻게 차지하느냐로 승부가 나곤 했지만, 중앙에서 싸움을 벌이는 것보다는 변방에서 세를 불려가는 것이 더 많은 집을 차지하고, 더 적은 수로 '확실한 집'을 만들 수 있는 이점이 있다보니 '현대 바둑스타일'은 중앙의 싸움을 먼저 거는 것을 기피하게 되었다. 그래서 바둑의 전투는 늘 '귀퉁이'에서 먼저 벌이게 되고, 그 전투는 늘 '따로따로' 벌이다 결국 '바둑판 전체'로 귀결되는 식이다. 그렇기에 <미생>에서 '아직 살아있지 못한 자들'은 모두 각자스타일대로 나름의 전투를 벌이다 결국 '동료'와 함께 싸우게 되고, 끝내는 '회사의 명운'을 걸고 건곤일척을 내던지는 형국으로 이어가게 된다.

하지만 '바둑'은 승패가 분명하지만 '인생'에서 승패는 불분명하다. 누가 성공한 삶인지, 실패한 삶인지는 '죽음 이후'에나 계가(집 계산)하는 법이다. <미생>에서도 어느 캐릭터가 최고로 성공하게 될지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독자들은 계산이 바로 설 것이다. 자기만의 스타일로 살아가는 것이 '정답'이라는 것을 말이다. 극중의 장백기도 장그래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을 멈추고 '정당한 라이벌이자 사업 파트너'로 인정하는 순간부터, 제 실력을 뽐내는 무서운 '실력자'로 거듭나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장백기를 응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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