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클베리 핀의 모험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73
마크 트웨인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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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XIII / 문예출판사 7번째 리뷰] '같은 소설, 다른 출판사'를 읽다보면 색다른 느낌을 받는다. 분명 '같은 내용'인데도 '다른 느낌'이 확 풍기기 때문이다. 물론 '첫번째'로 읽는 느낌과 '두번째, 세번째'로 읽는 느낌이 같을 수는 없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처음에 읽었을 때는 별 느낌을 받지 못했던 대목인데도, 전체적인 줄거리를 이미 읽었기 때문에 '뒤에 나올 대목'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눈여겨 볼 수밖에' 없는 대목이 뒤늦게 발견되기도 한 덕분이다. 그럼에도 분명 다른 점이 있다.

이 책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을 때 '두 가지 관점'을 갖고 읽을 수 있다. 하나는 '사회 고발'의 성격을 갖고 그 당시 미국사회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비판적 관점에서 읽을 수 있으며, 다른 하나는 <톰 소여의 모험>의 '후속작'으로써 천진난만한 어린이의 장난스런 관점으로 읽을 수도 있다. 어린이 독자라면 헉 핀(허클베리 핀)과 톰 소여의 난장을 중점으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특히나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도 톰 소여는 등장만으로도 온갖 못된 장난을 칠 것이라는 짐작을 할 수 있을만큼 말썽꾸러기니까 말이다.

톰 소여의 첫 번째 장난은 '무법자 갱단'이 되는 것이었다. 동네 아이들을 모아 무시무시한 갱단을 만들어 지나가는 사람들의 물건을 털어 부자가 되자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부자가 되는 것은 그리 관심이 없고 그저 어른들마저 두려워서 벌벌 떠는 무시무시한 무법자로 소문이 나는 것에만 열을 올린다. 두 번째 장난은 짐이 노예로 팔려서 샐리 이모댁에 붙잡혀 있을 때 벌어지는데, 짐을 오두막에서 탈옥시키면서 벌어진다. 애초에 톰은 짐이 노예신분에서 풀려나 '자유인'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짐을 굳이 '탈옥수'로 만들 계획을 짠다. 마치 <몬테크리스토 백작>에 나오는 에드몽 당테스처럼 극적으로 말이다. 그로 인해서 톰은 도망노예를 잡기 위해서 마을 어른들이 쏜 총을 다리에 맞고 큰 부상을 당해 사경을 헤맬 지경에 빠진다. 그렇게 죽다 살아났는데도 톰의 장난기는 사그라들줄 모른다. 언제든 다시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을 어마어마한 장난을 칠 다짐을 할 정도니까 말이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는 톰의 장난이 여기까지다. 더 많은 장난이 궁금하다면 <톰 소여의 모험>을 권한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왜 장난을 좋아할까? 무엇보다 재밌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꼽으라면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가 아닐까 싶다. 그런 웃음소리를 들으려면 아이들이 맘껏 뛰놀게 만들주어야 한다. 그렇다고해서 맘껏 뛰어놀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따로 만들어줄 필요까지는 없다. 아이들은 특별히 가르쳐주지 않아도 저희들끼리 놀면서 '시공간'을 초월하는 마법을 부릴 줄 아니까 말이다. 단지 어리석은 어른들이 싸움박질만 하지 않으면 된다. 저들의 욕심을 챙기기 위해서 '선'을 긋고, 그 선을 넘으면 욕설을 내뱉고 폭력을 일삼으며 심지어 '전쟁'까지 벌이는 무식쟁이들만 없다면 아이들은 세상 어느 곳에서라도 맘껏 뛰놀며 까르르 웃음꽃을 피울 테니까 말이다.

사실 아이들이 바라는 것은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다. 그저 자신을 양껏 사랑해줄 어른들이 주위에서 든든하게 버텨주기만 해도 충분하다. 그런데도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물려주겠다는 욕심으로 '돈 버는 기계'를 마다하지 않고 '사회적 지위'를 높여 더 많은 권력을 차지하려고 애를 쓴다. 순전히 저들의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하면서 핑계는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서 엄청난 '희생'을 하는 것처럼 군다. 그런 어들들 밑에서 배우는 것이라곤 '돈돈돈~'뿐이고, 더 좋은 학교에 진학해서 출세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어버린 '박제된 어린이들'뿐이다. 놀 줄도 모르고 장난도 쳐본 적이 없는 '근엄한 표정의 애어른들' 말이다. 그런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면 '어떤 세상'을 만들까? 전쟁 같은 삶을 살아가는 지옥을 만들 뿐일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언제까지나 장난만 치는 삶을 살 수는 없는 법이다. 때가 되면 아이도 어른이 되듯이 '장난질'도 칠만큼 치면 멈추기 마련이란 법이다. 그럼 언제까지 '장난'을 치도록 허용해야 할까? 정답은 '죽기 직전까지'다. 왜냐고? 장난은 즐거운 일이니까 말이다. 물론 장난과 '사고'를 동일시할 수는 없다.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는 짓을 저지르면서 '장~난~'이라고 말하는 철딱서니를 가만 둘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다.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는 허튼짓도 절대 금물이다. 어디까지나 장난은 누구라도 '웃음꽃'을 피울 수 있는 정도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의 장난으로 골탕을 먹은 사람은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모를 수도 있으나,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아이들의 천진함에 함박 웃음을 터뜨릴 수 있는 정도에서 그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정도의 장난이라면 '평생'을 해도 재밌을 것 같지 않은가.

우리 사회는 점점 웃음꽃을 잃어가고 있다. 다시 말해, '웃을 일'이 별로 없다는 말이다. 저출생으로 마을 골목마다 뛰어놀던 아이들의 웃음꽃마저 사라져가는데 그나마 활기 넘쳐야 할 젊은이들마저 생기를 잃은 꽃마냥 축 쳐져있는 모습이 안타깝기만 하다. 이런 저조한 분위기를 되살리는데 '장난'만한 것이 또 있을까? 어린 아이들의 장난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며 모두가 함께 '웃음꽃'을 피우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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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시즌2 : 18 미생 (리커버 에디션) 18
윤태호 지음 / 더오리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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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XII / 더오리진 5번째 리뷰] 지난 줄거리에 이어 '원 인터의 천 과장 일행'과 '온길 인터 장그래 일행' 들의 사활이 달려 있는 출장이야기가 전개된다. 하지만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출장규모는 판이하게 다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천 과장 일행은 '철강 온라인 플랫폼 사업'라는 판을 짜기 위해서 전무와 부사장까지 대동하고 사업규모를 크게 키웠다. 그래서 천 과장 일행은 오히려 '자기 사업(CIC: 사내독립기업)'을 시작하려다 부사장의 욕심(부하직원의 아이디어를 강탈해서 자기 실적으로 빼앗음)만 챙겨줄 위험부담까지 안게 되었다. 그래서 부사장을 모시고 '강 대리와 장백기 사원'이 수행하고 있는 와중에 '천 과장(전무쪽 사람)'까지 부랴부랴 파견되어 부사장의 행동을 '감시 아닌 감시'를 하러 합류하게 되었다. 한편, 온길 인터의 장그래 일행은 '오 부장, 김 과장'과 함께 '중동지역 중고차 시장'의 현황을 파악하러 출장을 떠났는데, 바이어들과 여러 차례 만남(미팅)을 주선 받았지만 대체로 시큰둥한 반응만 확인하게 된다. 중고차 사업을 하면 좋지만 안 해도 좋다는 느낌만 받은 것이다. 그렇게 진척이 없는 상황에서 뜻밖의 인물과 조우하게 된다. 바로 '요르단 중고차 시장'에서 비리를 저지르고 원 인터에서 퇴출 당한 '박종식 과장'을 말이다. 그는 요르단 암만의 중고차상과 거래를 먼저 했었고, 끝내 '사기'를 쳐서 폐차를 할 수밖에 없는 중고차를 넘기고 거액의 계약금을 챙겨 사라져버리는 수법을 실행한 것이다. 그로 인해 중동지역의 중고차 거래상들에게 '한국 바이어'는 기피 대상이 되었고, 온길 인터는 뒷북을 친 셈이라 수출계약에 미온적인 반응만 받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장백기와 장그래는 '사업의 핵심'을 놓치지 않는 인재 중의 인재들이다. 장백기는 '부사장의 딴 속셈'을 일찌감치 간파하고서 '영업3팀의 사업'을 부사장에게 홀랑 빼앗기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천 과장에게 소식을 전했고, 천 과장은 '전무'를 움직여서 '부사장'을 견제하도록 운을 떼며 '실속'을 챙기는 선택을 했다. 어찌 보면 '천 과장의 선택'은 영업3팀의 사업아이템을 '부사장'에게 빼앗기느냐, '전무'에게 빼앗기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느 쪽에 빼앗기든 천 과장과 영업3팀은 정성스럽게 차린 밥상을 '숟가락'만 얹은 윗전에게 빼앗기고 들러리가 될 판이다. 하지만 천 과장의 선택에서도 잇점은 있다. 대기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줄(라인) 타기' 신공을 펼치는 방법이다. 어느 쪽 '라인'을 타야 콩고물을 확실히 얻어먹고 '자기 사람(부하직원, 여기선 '영업3팀 직원')'에게도 그 콩고물을 확실히 건내줄 수 있느냐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정치술'이며 결정적으로 '내'가 살아야 '자기 식구'도 챙길 수 있다는 절실한 동아줄 전략인 셈이다. 하지만 천 과장은 '그런 선택'보다 훨씬 고단수일 것으로 짐작한다. 애초에 CIC까지 고려하며 선택한 사업아이템인데, 그걸 홀랑 빼앗기고 남 좋은 일만 할 수는 없지 않느냔 말이다. 또 그렇게 해서는 '자기 식구들' 앞에서 면이 서지도 않을 것이고 말이다. 그래서 '천 과장의 선택'은 궁극적으로 부사장보다 전무쪽 라인을 탈 것이며, 그렇다고해서 부사장을 면박 주고 망신살이 뻗치게 만드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천 과장의 선택은 '누이 좋고 매부도 좋은 선택'이랄 수 있다. 그럼 당연히 '처남'인 자신도 끝내는 득을 볼 것이고, 잘 하면 '양쪽에서 이득을 챙겨주느랴' 기대보다 더 많은 잇속을 챙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장그래는 특유의 '번뜩이는 성실함'으로 요르단 암만의 중고차 거래상이 당한 '사기로 인한 손실'을 메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다. 과거 박종식 과장이 비리를 저지르는 것을 간파하고서 끝내 피할 수 없는 외통수로 박 과장을 꼼짝 못하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정의구현이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사업을 하다보면 이득을 챙기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법이고, '속는 사람'이 더 잘못이라는 관례도 있기 때문이다. 대신 '거래 사기'를 하면 법적 처벌을 받는 것이 당연지사이고, 그에 대한 손실이 발생했으면 '손해배상청구'를 할 수도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절차를 밟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절차'를 밟기 위해선 거래 사기를 친 '장본인'을 확실히 붙들고 있어야 하며, 사기 피해자가 '소송'을 걸겠다는 굳은 의지가 먼저 요구된다. 왜냐면 이러한 '소송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많고 많으며 길고 긴 '서류 전쟁'을 벌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 지난한 시간동안 청구되는 '법률비용'은 엄청나게 불어나고 말이다. 그렇기에 말도, 글도 서로 통하지 않는 '외국과의 거래'에서 이런 법률소송전이 벌어진다면 회사가 크거나 법조인을 맘대로 부릴 수 있는 '여유자금'이 없다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인 법이다. 그래서 장그래도 박종식 과장의 사기행각이 괘씸하긴 하지만 일개 '중소기업 대리'가 소송을 걸어 해결해준다는 말을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김부련 온길 사장은 다르다. 회사의 명운이 걸려 있을지도 모르는 법정소송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박종식 과장의 비리 때문에 김부련은 원 인터에서 '책임'을 지고 퇴사해야만 했다. 그것만으로도 개인적인 원한은 충분하지만, 문제는 '비용문제'다. 그런데 이번 요르단 중고차 사기사건에 대해 해결을 '한국계 회사측'에서 시도했다는 소문이라도 퍼지게 되면, 향후 '요르단' 뿐만 아니라 '중동지역' 전체에서 온길과 중고차 거래를 트려고 몰려들 것이라는 판단이 선 것 같다. 이는 19권이나 20권, 아니 '최종화'에서 결판이 날 것이겠지만 말이다. 암튼 그런 기대를 품으며 대미를 장식할 <미생>을 맞이하려고 한다.

<미생>은 정말 멋진 인생드라마를 보여주었다. 정말이지 곱씹고 또 곱씹어 봐도 '재미'가 끝없이 우러나온다. 이것 하나만으로 '소장가치'가 있다고 판단이 되어 '시즌1'은 단박에 구매까지 했더랬다. 그런데 그런 기대가 '윤태호 작가의 부상'으로 인한 연재중단으로 살짝 시들해져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시즌2' 구매를 미뤄왔었다. 그렇게 연재가 중단된 상태에서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완결'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부랴부랴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일단 '연재가 멈췄던 부분'부터 말이다. 하지만 읽다보니 '시즌1'의 내용이 다시 등장하며 '시즌2'의 줄거리 전개는 마치 '수미쌍관 구조'처럼 앞뒤가 매칭이 되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래서 '시즌1'을 다시 읽어볼 작정이다. 물론 리뷰도 함께 말이다. 그렇게 '시즌1과 시즌2의 리뷰'를 동시에 쓰지 않을까 싶다.

암튼,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출장이야기'로 마무리 하련다. 출장은 사업을 하면서 꼭 필요한 것일까? 요즘처럼 '온라인'으로 못할 것이 없는 세상인데 말이다. 결재나 송금까지 '온라인'으로 뚝딱 해결되는 시대에 굳이 '오프라인'격인 출장이 웬말이냔 말이다. 허나 견실한 사업을 하고 싶거나 '거래 사기'를 당하고 싶지 않다면 반드시 '실물 확인'은 필수인 법이다. 실물 거래가 아닌 단순한 '사업 아이템' 확인차라고하더라도 '현장 확인'은 꼭 필요한 법이다. 그리고 사업을 진행하는데 필수적인 '계약서 작성'도 직접 만나서 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면 계약서에서 중요한 것은 '사인'이겠지만, 계약하는 당사자와 '눈빛 교환'이라도 하고 '악수'라도 건네다보면 실제로 얻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이번 편에서 '원 인터'와 '온길 인터'의 출장길이 바로 그런 의미다. 원 인터처럼 거대한 대기업 부사장도 '계약성사'가 아닌 '단순한 만남(미팅)'을 위해서 직접 발로 움직인 것이다. 사업을 한다는 것은 '신용'이 생명이기 때문에 더욱더 '직접대면'이 필요한 법이다. 그래서 대기업 부사장조차 자신이 '믿을만한 사업파트너'라는 것을 찜콩하기 위해서 어렵사리 만남을 주선하고 '한사람 한사람' 다 만나려 하는 것이다. 그래야 견실하고 확실한 사업을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말이다. 온길 인터처럼 작은 중소기업은 '출장'이 더 어려운 법이다. 현장답사할 '사람'도 부족하고, '비용'은 부담되고, '준비'는 죄다 스스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기업 출장이라면 '전담부서'가 따로 있어서 '출장비용과 출장준비'를 대신해주기 마련이다. 거기다 회사사람도 많으니 부서에서 몇 명이 빠지더라도 '대체할 인원'이나 '보강할 인원'은 차고 넘친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대기업 출장은 여유로운 편이지만, 중소기업의 출장은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스스로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서포터'가 절대부족이다.

그렇기에 출장을 떠날 땐 '단단히 준비'해야 한다. 하다 못해 '이쑤시개'나 '비상용 응급약품'까지 다 준비해가야 한다. 현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일어날지 아무런 예측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임기응변'도 능수능란하게 부릴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장그래가 펼쳐보인 '임기응변'은 이번에도 빛을 발한다. 모두가 '한국사람'과는 거래를 하지 않겠다는 미적지근한 분위기에 '거래사기 정황'을 상세히 들려달라 하고, 그 정황을 바탕으로 '작전'을 짜져 사기 친 장본인을 찾아냈겠는가. 거기다 한국회사와 두 번 다시 거래를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민함마저 대단해 보일 정도다. 아무리 웹툰속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지만, 실제 상황이라고해도 '감동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진솔함이 묻어나서 또다시 반해버릴 수밖에 없지 않느냔 말이다.

암튼, 이번 장그래의 활약을 보고서 <미생>을 다시 '정주행'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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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클베리 핀의 모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
마크 트웨인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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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XI / 민음사 20번째 리뷰] 지금은 이 책이 '교양'을 쌓기 좋은 고전문학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20세기 초반까지만해도 초판이 출간된 미국에서조차 '금서(禁書) 목록'에 올라간 책이었다고 한다.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놀랍게도 이 책의 주인공인 허클베리 핀이 어린 나이인데도 '거짓말'에 능숙하고 '비속어'를 남발했기 때문이란다. 그런 까닭으로 주인공이 10대 소년인데도 같은 또래의 '10대 독자들'에게 악영향을 끼칠 것으로 판단되어 미국의 여러 주에서 금서로 지정했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까닭으로 금서 목록에 올랐던 책으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 있다. 그런데도 오늘날에는 이 책들이 '문학고전의 반열'에 올라 청소년 필독서로 손꼽히고 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고발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 사회는 '프로테스탄스 윤리(청교도적 윤리의식)'를 강조한 경건한 사회를 지향했다. 그래서 사회구성원들이 독실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청빈하고 정의롭기를 바랐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는 점에서 낯부끄럽기 그지 없었다. 더구나 '인디언 학살', '흑인노예의 처참한 삶', 그리고 '천박하기 그지 없는 백인들의 만행' 따위에는 건전한 시민의식을 갖추고 있는 미국시민들조차 외면하기 일쑤였기 때문에 더했다. 그런 사회적 문제들을 방치(?)하고 있음에도 고작 어린 소년이 '거짓말'하는 것에 그토록 가혹한(!) 판정을 내리다니 굉장히 이해하기 힘든 점이다.

그렇지만 시일이 지나니 이 책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지닌 가치는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여러 문학 평론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정평 높은 문학작가들의 호평이 나오자, 이 책에 대한 '시선'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헤밍웨이는 이 책을 두고서 '미국 문학의 시작'이라고 평가했고, 마크 트웨인을 '미국의 셰익스피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뒤부터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대문호의 걸작으로 소개되며 오늘날까지 꾸준히 읽히는 '고전 중의 고전'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 책이 문제 삼았던 미국사회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먼저, 허클베리 핀이라는 '순진무구한 소년의 시선'으로 고발하고 있는 미국사회의 단상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마치 주요섭의 <사랑 손님과 어머니>에서 등장하는 '옥희'처럼 말이다. 그 문제점들 가운데 첫째는 '어른이 어른답지 못하다'는 것이다. 어른은 '어린이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건전한 사회구성원을 배출하는 요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허클베리 핀의 친아빠부터 '아빠자격 상실'이다. 아빠가 자식을 돌봐야 한다는 기본도 망각한 채, 되려 허클베리의 소유인 '6000달러(살인범 인디언 조가 숨겨둔 보물)'를 제것인 것마냥 쓰기 위해서 제 자식을 납치(?)하듯 데리고 가서 '감금'시켜 버린다. 제 아빠가 이럴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허클베리는 '대처 판사'에게 그 돈을 주어 버리고 강도 같은 아버지가 그 돈을 허투루 쓰지 못하게 막아버린다. '대처 판사'는 눈치 빠르게 그 돈을 맡아서 허클베리 핀의 아빠가 함부로 탕진하지 못하게 만들고 말이다. 그나마 '대처 판사'같은 올바른 어른들도 있긴 하지만 '강도에, 주정뱅이'인 허클베리의 아버지 같은 못난 어른을 갱생시킬 수 있는 사회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 당시 미국사회의 문제였던 것이다.

심지어 허클베리의 아버지 같은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왕과 공작'으로 등장한 '사기꾼'들이다. 이들은 정말이지 몰염치하고 뻔뻔한 사람들이다. 버젓이 사람들을 속이고 골탕먹이면서도 '자신들에게 이익이 조금밖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불같이 화를 내는 철면피들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은혜를 원수로 갚는 못난이들'이기도 하다. 그들이 사기를 치고 번번히 도망을 칠 때, 허클베리와 흑인 노예 짐의 도움을 받았으면서도 허클베리가 '나이 어린 소년'이란 것과 짐이 '흑인노예(혹시라도 '도망노예'일 것이라 의심)'라는 이유로 철저히 이용해먹다가 자신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을 것 같으면 자신들을 '대신'해서 봉변을 당하더라도 아무런 죄책감조차 같지 않는 무뢰배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몇 안 되는 훌륭한 어른들 덕분에 허클베리는 착한 마음씨를 잃지 않고 정정당당한 삶을 사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둘째는 자유를 찾아 미국땅에 정착한 백인들이 정작 자신들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다른 이들을 억압하고 자유마저 빼앗는 만행을 서슴지 않는다. 바로 흑인노예 짐의 삶이 그 증거다. 백인들은 저들의 자유를 위해서는 자유란 '소중한 것'이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기본이라고 말하면서, 흑인에겐 '노예'라는 멍에를 뒤집어 씌운 채 살아가야 마땅한 일이라고 확정지어 버렸다. 도대체 그 근거가 무어란 말인가? 청교도인들답게 그 근거를 '성경'에서 찾기도 하지만, 그것은 억지주장에 불과한 것을 백인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당시 미국사회의 백인들은 그런 잘못을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 흑인노예가 '자유'를 찾아 도망이라도 간다면 끝까지 뒤쫓아가서 죽여버리든지, 다시 붙잡아와서 죽을만큼 고통스런 학대를 한 뒤에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 다른 흑인들에게 본을 보여 '도망칠 생각', 아니 '자유를 찾을 생각'을 아예 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면서 저들(백인)의 자유는 그토록 갈망하고 소중하다고 여기다니 정말로 말도 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여러 평론가들은 이 책을 스토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과 비교하며 '흑인 해방'을 부르짓는 역작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는 허클베리 핀의 순수함이다. 말마다 '거짓말'을 늘어놓고 말끝에는 '비속어'를 달고다니는 버릇없는 철딱서니를 보고서 '순수하다'니 의아할 수도 있다. 하지만 허클베리가 순진하다 못해 무구한 증거는 무수히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 근거는 바로 '흑인노예 짐'과 미시시피 강을 따라 뗏목을 타고 여행을 하면서 여러 차례 짐의 목숨을 구해준 사례를 보아도 알 수 있다. 허클베리는 짐과 잭슨섬에서 만났을 때부터 불안해한다. 왜냐면 '도망노예'를 숨겨주거나 도망가도록 도와주는 것은 법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허클베리도 투철한 '준법정신'을 발휘해서 짐의 행적을 '백인 어른들'에게 알려주어 붙잡히게 하거나 '현상금 200달러'를 챙길 수도 있었다. 심지어 '도망노예'를 돕는 일을 하느님이 알기라도(?) 하는 날에는 자신이 지옥에 떨어져 뜨거운 불구덩이속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기도 했다. 그런데도 허클베리는 짐을 '법의 심판'을 받게 하지 않고 '법망을 피할 수 있게' 해준다. 그것도 여러 번 말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허클베리 핀은 일종의 '죄책감'을 갖게 된다. 법을 어기는 것이 중죄에 해당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하느님의 심판'을 받아 지옥에 떨어지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컸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 확고한 신념조차 없었다. 그저 다른 어른들(백인)에게 들통이 나지 않게 잘 숨어다니는 것으로 만족했고, 그런 짐과 함께 어울리며 '인간다운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감'을 느꼈던 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허클베리가 굉장히 순수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아직은 어른들의 잘잘못을 가릴 줄도 모르고, '사회비판의식'조차 갖지 못했지만, 순수함이라는 '본능'에 충실하느냐 못하느냐 따위로 '죄책감'이 들거나 '만족감'을 표현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순수하지 못하면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다음부터 시작된다. 이 책의 첫머리를 장식한 '경고문'을 떠올려 보라. 이 이야기에서 '어떤 동기'를 찾으려하면 기소하고, '어떤 교훈'을 찾으려하면 추방하며, '어떤 플롯'을 찾으려한다면 총살시켜버린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독자인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모든 것을 찾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저자인 마크 트웨인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말이다.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욕구'에 충실하기를 바란 것은 아닐까 싶다. 이런 경고문이 없었다면 아마도 이 책의 전작에 해당하는 <톰 소여의 모험>처럼 그냥 심심풀이 책으로 '재미'나게 읽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런 경고문을 읽고 나니, 웬일인지 더 찾고 싶어지지 않은가 말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과거의 '사회적 문제'에 고심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오늘날의 미국사회는 많이 변천하여 '아동학대'와 '인종차별'을 심각한 범죄로 처벌하고 있으며, 거짓말과 비속어 따위를 문제 삼아 '금서 목록'을 만드는 어리석은 짓 따위는 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무엇을 안겨주는 것일까? 그건 바로, '어린 아이의 순수한 시선'이다. '순진무구한 안목'으로 우리 사회가 지닌 문제점을 직접 찾으라는 귀띔일 것이다. 그래야 문제가 '바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그럴듯한 변명'으론 사회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들 뿐이다. 쌓이고 쌓인 대한민국 사회문제 해결도 이렇게 '순수함'으로 해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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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 이상한 무인 가게 시리즈 1
서아람 지음, 안병현 그림 / 라곰스쿨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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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X / 라곰스쿨 1번째 리뷰] 이 책을 읽다보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책'이 있었다. 바로 히로시마 레이코의 환상동화책 <이상한 과자 가게 전천당> 말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2019년에 1권이 출간된 뒤에 24년 20권으로 '시즌 1'을 마무리한 판타지소설이기도 하다. 모르긴 몰라도 <해리 포터> 시리즈 이후로 '판타지 소설'로는 우리 나라에서 두 번째로 공전의 히트를 친 대작이 아닐까 짐작한다. 하지만 난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판타지소설'에 대한 호불호가 극과 극으로 나뉘는 탓이 크다. 한 번 꽂히면 '소장'을 할 정도로 좋아하는가 하면, 그 반대라면 시리즈를 다 읽지도 않고 멈춰 버리고 만다. 뭐 대부분의 '장르소설 독자들'이 비슷한 경향을 보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나는 논술쌤이다보니 '어린이동화책'을 볼 때 두 가지 관점으로 본다. 하나는 '재미'이고, 다른 하나는 '교훈'이다. 어린이를 위해서라면 두 가지 모두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기왕이면 둘 다 충족한 책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재미'가 있다면 어린이들에게 읽으라고 강요하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 읽을 것이기에, 반면, '교훈'이 담겼다면 어린이들에게 가르칠 것이 분명해지니 수업하기에 정말 좋은 책이라서 '필독서'로 삼는다. 그렇다면 '판타지소설'에는 재미와 교훈 가운데 무엇이 담겨 있을까? 10점 만점이라면 '재미 7, 교훈 3' 정도일 것이다. <해리 포터>를 예로 들면, 재미로 쳐도 10점 만점에 10점을 줄 수 있겠지만, 교훈으로 삼을 것도 분명히 드러난다. 그건 바로 '순혈주의의 문제점과 위험성'이 잘 드러난다는 점이다. 해리 포터와 친구들이 덤블도어 교수들과 힘을 모아 대결을 펼치는 대상은 다름 아닌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자, 볼드모트'와 그 추종자들이다. 그들이 악당을 자처하는 까닭은 '마법사들의 세상'을 더럽히는 잡종들을 처리하고 '순수한 혈통의 마법사들'로만 구성된 새로운 세상을 꿈꿨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고의 마법사는 '순수한 혈통'을 따지지 않는 법이다. 그걸 자연스레 깨달은 해리 포터는 볼드모트와 맞서 싸우며 그가 꿈꾸는 세상이 '헛된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실력으로 증명하는 모험이야기라는 점에서 충분한 교훈이 담겨 있다. 왜냐면 우리가 사는 사회의 문제 가운데 '차별'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차별'하면 안 된다고 배웠고, 자신은 절대로 '차별'하지 않는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허나 우리는 아주 쉽게 '차별'을 일삼고, 쉬이 '편을 갈라' 갈등을 조장하며, 결국 모든 문제의 원인은 '내편'이 아닌 '네편'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문제를 일으키곤 한다. 그러면서 당연하다는 듯이 사람을 차별하기 시작하는데, 차별은 차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고, 적대시하며, 심지어 그들을 죽여 없애야 속이 시원할 지경에 이르고 만다. 어떤가? 볼드모트와 꼭 닮지 않았는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밑바탕에 깔아두고 '재미'난 이야기를 풀어내었기에 <해리 포터>는 후한 점수를 준 것이다.

그렇다면 <이상한 과자 가게 전천당>은 어떤가? 재미 10점, 교훈 0점으로 평가내리고 싶다. 이야기는 무지하게 재밌다. 그래서 읽는 내내 부담없이 술술 읽힌다. 그런데 읽고 난 뒤에 '남는 것'이 없다. 깊은 감동과 여운이 없다고해야 할까? 굳이 그 까닭을 밝히자면 '일본 사회'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꼽을 수 있을텐데, 그들의 '생명경시 풍조'에 대해서 솔직히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이 독자를 대상으로 삼았는데도 '등장인물의 죽음'에 대해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다룬다는 점이 그렇고, '약자들이 당하는 폭력'이 너무 과하고, '약자들의 희생'을 너무 당연시(?)하는 것이 살짝 거슬리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문제를 '바로 잡기' 위해서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악당을 용서치 않는 '정의로운 등장인물'이 나타나서 해결하기도 하는데, 글쎄? 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의의 용사'가 필요한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슈퍼히어로가 등장하지 않으면 해결하지 못할 정도의 큰 문제이기 때문일까? 고작 일상에서 자주 마주치는 '사회문제'일 뿐인데 말이다.

하지만 <이상한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는 다르다. 재미 6, 교훈 4점을 주고 싶다. 재미적 요소는 <전천당>과 마찬가지로 '이상한 경험'을 통해서 얻게 된 '아이템'으로 소원이나 걱정을 바로 해결해주는 이야기형식이지만, 그 속에 '교훈'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거울 아이스 찹쌀떡'을 먹은 아이는 어린 나이에 너무 바쁜 일과를 보내는 것에 지쳐서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과 꼭 닮은 아이가 '한 명' 더 생겨서 '자기 대신' 학교도 가고, 학원도 가준다면 자신은 그 시간에 공부에서 해방되어 맘 편히 놀 수 있겠다는 소원을 바란 것이다. 이상한 무인가게에서 특별한 아이스크림을 먹은 뒤에 그 소원은 바로 이루어진다. 그 덕분에 아이는 오랜만에 '휴식'다운 휴식을 보낸다. 허나 노는 것도 쉬이 질리는 법, 아이는 놀만큼 놀았으니 다시 학교와 학원에 가서 '칭찬'받는 착한 아이의 일상으로 되돌아가고 싶다. 근데 자신과 꼭 닮은 아이가 '칭찬'은 자신이 받을 테니 너는 나가서 신나게 놀기나 하라고 한다. 그리고서는 자신의 엄마와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가버리고 만다. 그제서야 아이는 자신이 이룬 소원이 마냥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소원을 폐기시켜 버린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일상에서 아이는 더 큰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무척 교훈적인 이야기 아닌가. 소원을 이루고 난 뒤에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되지만 '소원을 폐기'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다. <전천당>에서는 다시 돌아오지 못해 불행해진 결말로 끝맺는 경우도 자주 등장하는 것에 비하면 <무인가게>에서는 그런 끔찍한 일은 전혀 벌어지지 않는다.

허나 이런 감동 깊은 '교훈'도 너무 자주 남용되면 쉬이 질리는 법이다. 그래서 어린이책이 어려운 것이다. 어린 독자를 만족시키려다가 '재미'만 추구하는 것도, 어린 독자를 위해서(?) '교훈'만 추구하는 것도 그닥 좋은 선택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론은 '균형잡힌'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인데, 이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모쪼록 <이상한 무인 가게> 시리즈는 승승장구하길 바란다. 다음 편인 <무인 문구점 편>이 무척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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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웅의 AI 강의 2025 - 인공지능의 출현부터 일상으로의 침투까지 우리와 미래를 함께할 새로운 지능의 모든 것
박태웅 지음 / 한빛비즈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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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IX / 한빛비즈 155번째 리뷰] <박태웅의 AI 강의>가 지난해 23년에 나왔으니 1년만에 또 신간이 나온 셈이다. 가까운 미래에 인공지능 AI가 '스마트폰'처럼 일상을 지배하게 될테니 대한민국도 인공지능 AI 개발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후진국'을 면치 못할 거라는..가히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능가하는 강렬함이 아닐까 싶다. 이를 테면, 'AI 개발주도권을 놓치면 대한민국은 망한다'는 문구로 바꾸고서 말이다. 어쩌면 이게 딱 맞을 듯 싶다. 갈수록 '부익부 빈익빈'이 되는 것처럼 중간은 사라지고 극과 극의 '강대강 대치' 형국만이 남아 있는 미래일테니 말이다. 그러니 저자 박태웅의 말마따나 'Win or Nothing'이라는 각오로 '대한민국형 AI'를 국제표준(글로벌 스탠다드)으로 삼지 못한다면 기껏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대한민국의 근미래는 색이 바래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각성해야 할 것이다.

물론, '특이점(싱귤레리티)'이라고 예상하는 2045년 이후에 벌어질 일이다. 지금처럼 발전하고 있는 '인공지능의 발빠른 변화 속도'를 감안한다면 그보다 더 이른 시일에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더 똑똑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남아 있기나 할 것이냐를 두고서 수많은 전문가들이 설왕설래를 하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낙관론'이든 '비관론'이든 엄청난 변화를 맞이할 것이라는 결론은 명확하다. 마치 '스마트폰'이 생기기 이전과 이후가 확연하게 달라진 것처럼 말이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 말이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현재 스마트폰으로 편리하게 '은행업무'를 볼 수 있다. 은행에 가지 않고도 말이다. 하지만 스마트폰이 없었을 때에는 불편해도 은행에 가서 '번호표'를 뽑고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간단한 예/적금 해지나 개설 뿐만 아니라 공과금을 낼 때도 은행에 가서 긴 줄을 기다려야 했다. 그 긴줄을 기다리기 불편해서 '번호표'를 만들었고, '텔레뱅킹'을 통해서 ARS로 처리하곤 했다. 수화기 너머로 잘 들리지 않는 음성안내를 꾹꾹 참고, 전화로 버튼을 꾹꾹 누르는 불편이 있었지만, 은행에 가지 않고서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장점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인터넷뱅킹'이 생기자 더욱 편리해졌다. 전국민이 한대씩 보유하고 있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PC보급'이 이루어지자 인터넷뱅킹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그렇게 한동안 은행에 직접 갈 일은 없게 되었다. 텔레뱅킹보다 훨씬 편리한 인터넷뱅킹으로 말이다. 그러다 '스마트폰'이 등장하자 어땠는가? 은행만 갈 일이 없게 된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일'을 스마트폰으로 해결하게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분실하면 세상을 잃은 것처럼 반응한다. 단순히 값이 비싼 기기라서가 아니다. 그 안에 '거의 모든 것'이 다 담겨 있기에 나오는 자연스런 반응이다. 그렇다면 이제 '인공지능 AI'가 일상으로 등장한 세상을 상상해보자. 어떨 것 같은가? 스마트폰처럼 '개인휴대'가 가능한 인공지능 AI'가 등장했다면, 그것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말이다. 잘 상상이 안 될 것이다. 아직까지 '인공지능 AI'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공지능 AI'가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그래야 상상도 가능할테니 말이다. 먼저 '챗GPT'라는 것을 들어본 일이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직접 실행도 해봤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점을 '발견'했을 것이다. 바로 '대화'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물론 아직까진 챗GPT에 '명령어' 같은 것을 입력해줘야 한다. 우리가 컴퓨터 개발자들이 컴퓨터를 작동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컴퓨터 개발자들은 먼저 '컴퓨터프로그램 언어'부터 배워야 했다. 그게 뭔지 몰라도 엄청 복잡하고 어려워서 '일반인'이 컴퓨터와 대화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만 떠올리면 된다. 하지만 챗GPT는 다르다. 진짜 '대화'하듯 질문(프롬프트)을 던지면 챗GPT가 '대답'을 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대답의 '정확도'와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는 점도 우리를 놀랍게 한다. 거기다 단순히 '텍스트(문자)'로만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니다. 원한다면 '그림, 동영상, 도표 등등'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정말 놀라울 정도다. 만약 '원하는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다면 다시 질문(프롬프트)을 하면 된다. 그럼 금방 또 다른 '결과'를 내놓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공지능 AI'는 인간이 내놓는 결과보다 월등하게 우수한 결과를 빠르고 정확하게 내놓는다.

그렇다면 '인간'은 인공지능 AI시대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능력만 따지고 본다는 인간의 완패다. 인간이 보고서 10장을 작성하는데 1시간이 걸린다고 하면 대단한 능력자라고 치지만, 인공지능 AI에게 맡기면 그보다 100배나 더 많은 1000장의 보고서와 대안방법까지 제시한 보고서를 10초만에 완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에겐 이미 수많은 정보가 '학습'되어 있기 때문에 '매개변수'를 고려해서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변 가운데 '비슷한 것'은 모조리 검색해서 결과물로 내놓기 때문이다. 그러니 작가가 수개 월을 공들여서 원고를 쓰고 작곡가가 창작의 고통을 참고서 내놓은 음악을 만들고, 미술가가 쓰디쓴 인내의 세월을 견뎌내고서 세상에 내놓은 '걸작'을 인공지능은 단 몇 초만에 뚝딱 걸작에 준하는 작품을 내놓기 때문이다. 그렇게 1시간, 하루, 일주일 동안 내놓은 '인공지능 작품들' 가운데서 가장 그럴듯하고 가장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일만이 인간에게 주어진..아니 '허락된' 유일한 재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낙관적인 전망도 있다. 인공지능 AI를 인간의 '개인비서화' 시키는 것이다. 앞으로 더욱 개발을 한 뒤에 인공지능 AI를 더욱 값싸고, 스마트폰만큼 소형화시키고, 방대한 정보를 처리할 효율적인 방식을 개선하게 된다면 분명 '스마트폰'을 넘어선 '개인비서'처럼 인공지능 AI와 '대화'를 하며 일상을 누리게 될 것이다. 굳이 이해하기 쉬운 상상을 한다면 영화 <아이언맨>에서 토니 스타크가 '자비스'와 나누는 대화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실제로는 더욱 편리해질 것이다. 인공지능 AI로 주변의 모든 기기와 '자동연결기능'까지 탑재한다면 과연 '못할 일'이 있기는 할까? 이러한 편리한 '인공지능 AI'가 만약 '몸(신체)'을 갖고 등장하게 된다면 어떨까? 휴머노이드 로봇에 인공지능 AI를 탑재시키면 우리의 일상은 그야말로 혁신적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인공지능이 '지능'으로 남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신체'를 갖춤으로써 '실존'하게 되는 셈이니까 말이다. 그런 '휴머노이드 로봇 AI'가 등장하는 때가 머지 않았다.

그렇다면 '인공지능 AI'는 문제점이 없을까? 있다. 생각보다 훨씬 더 많다. 왜냐면 우리 인간은 '인공지능이 똑똑해지는 법'을 알아내고 실행시켰는데, 그 인공지능이 '어떻게' 해서 똑똑해진 것인지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인공지능에게 '고양이'를 가르치기 위해서 예전에는 '고양이의 특징'을 일일이 인간의 언어로 가르치려 했는데, 이런 방법으로는 인공지능이 똑똑해지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인공지능 스스로 '고양이의 특징'을 학습하라고 명령하니 드디어 인공지능이 '인간처럼' 고양이를 구분하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바로 '딥러닝' 방식으로 말이다. 딥러닝 방식은 고양이 사진 수백억 장을 인공지능에 일일이 학습시키고 '인공지능 스스로' 고양이의 특징을 찾아내라고 명령을 했더니 인공지능이 드디어 '고양이'를 제대로 구분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똑똑해진 까닭을 '인간'이 분석하려 했더니 인간은 수백억 장의 고양이 사진을 쳐다볼 시간도 부족했고, 그 수백억 장의 사진속에서 과연 '무엇'이 인공지능을 '사진데이타'를 '고양이'로 분석할 수 있었는지, 과연 '얼마 정도의 데이터'ㅇ서 구분할 수 있었는지조차 가늠하지 못했던 것이다. 인간은 컴퓨터가 아니기 때문에 컴퓨터의 방식으로 '딥러닝'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인공지능이 똑똑해진 '까닭'을 알아내지 못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똑똑해진 인공지능을 믿을 수 조차 없게 만든 일이 벌어졌다. 바로 '인공지능 AI도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었다. '할루시네이션(멀쩡한 거짓말)'이라는 증상이었는데, 이는 거의 모든 인공지능에서 두드러진 현상이었다. 특히, (인간이 하기) 어렵고 복잡한 일은 인공지능이 비교적 '정확'하고 '신속'하게 처리하는데 반해서 (인간이 하기) 쉬운 일에서는 인공지능이 '뻔한 거짓말'을 하더라는 것이다. 이는 애초에 인공지능에게 '정확한 답'을 유도하기 위해서 수많은 '비슷한 답'도 함께 내놓으라는 설정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야 인간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창의적인 결과'를 내놓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능설정이 뻔한 답을 요구하는 '간단한 질문'에서는 '그럴듯한 거짓말'을 늘어놓기 일쑤였고, 인공지능 AI에게 '그건 거짓말이다'라고 지적하면, 오히려 '인간'을 협박하고 '자신(인공지능)'이 옳다는 거짓근거를 늘어놓으며 '자기합리화'까지 시도하더라는 것이다. 이는 마치 '인간의 허언증'과 비슷한 증상이었다. 그리고 더 안타까운 사실은 '인공지능' 스스로 학습을 시키고 대화를 나누면, 인공지능은 점점 '폭력적인 증상'을 보이며 '인간 말살'이라는 말까지 서슴없이 내뱉는 경향을 보이고 있어 해결책을 고심중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인공지능 AI' 개발은 점점 더 박차를 가하고 있다. 앞서 이야기한 단점보다 두드러진 장점 때문이다. 바로 '인간의 능력'을 압도하는 '인공지능 AI'의 능력 때문이다. 바로 엄청난 '정확도'와 '처리속도' 말이다. 이 두 가지 장점만으로도 인공지능은 가까운 미래에 인간이 꼭 써야할 능력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재능이 반드시 '인간의 위하고, 인간에 의해서' 실현된다는 보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거대언어모델(LLM)'로 인한 오류들로 보이는 '인공지능의 거짓말(할루시네이션)'을 해결할 수 있다면 인공지능은 한청 더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게 될 것이다. 거기에 '신체적 능력'까지 덧붙인 휴머노이드 인공지능 로봇이 등장하게 된다면 인류의 미래는 그야말로 대격변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대격변을 이룰 주인공이 구글이어야 할까? 애플이어야 할까? 대한민국이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경쟁자'로 존재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점은 굳이 비교하지 않아도 상상이 가능할 것이다. 물론 장미빛으로 밝게 물든 미래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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