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만드는 아이들 - 어린이를 위한 민주 시민 교육 동화 한경 아이들 시리즈
옥효진 지음, 김미연 그림 / 한경키즈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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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XVII / 한경키즈(한국경제신문) 3번째 리뷰] 어린이들에게 가르치면 안 되는 공부가 있을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는 반면에 어린이들에게 '절대 가르쳐서는 안 되는, 커서 어른이 되면 저절로 배우는', 그런 공부가 따로 있느냔 말이다. 딴에는 있을 것도 같다. 이를 테면 '성교육'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은 자연스레 찾아오기 마련이고, '사랑의 열병'을 앓고 나면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 '책임'질 수 있는 능력부터 갖춰야 한다는 것을 저절로 깨닫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현대 사회는 과거와는 달리 '청소년기'라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과도적인 시기를 두고 있기 때문에 '올바른 성교육'이 별도로 필요하게 되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겠다. 그밖에는 뭐가 있을까?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면 질문을 바꿔 보련다. 어른들이 도맡아서 해야할 일이기에 '어른들의 일에 끼지 말고 애들은 가서 놀아라'라고 등을 떠미는 공부가 있느냐고 말이다. 대표적으로 '돈 버는 일(경제)'과 '나랏일(정치)' 따위가 그런 범주에 들 것이다. 이런 전통(?)을 오래도록 이어온 탓에 우리 어린이들은 공교육에서 '경제와 정치'에 관해서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시피 할 지경이다. 하긴 어린이는 '돈 벌 궁리'를 하기보다는 학업성적관리에 충실해서 명문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고, 어차피 만 18세 미만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투표할 권리'도 갖추지 못한 탓에 선거유세에 나온 정치인들조차 '어린이표'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이런 차에 어린이들에게 제대로 된 '경제교육'과 '정치교육'을 할 까닭이 그닥 없어 보인다. 고작해야 '사회과목 시험범위' 안에 있는 교과서만 달달 외우면 그뿐일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어린이가 자라서 '대한민국 성인'이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할 권리가 주어졌으니 신중하게 선거후보를 골라서 대한민국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훌륭한 정치인을 뽑을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현재의 대한민국 20대가 '선택'한 대통령이 누구인지만 봐도 알만 하지 않은가? 그들 나름의 '소신'을 갖고 신중하게 '한 표'를 행사했을텐데, 대한민국은 지금 민주주의적 시련을 겪고 있다. 제대로 '선택'하지 못한 탓이고, '정치'에 무관심한 탓에 누구를 뽑아야 제대로 정치를 할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를 몸소 경험하며 신중하게 한 표를 행사한 '어른들'은 제대로 선택했을까? 어른들도 어린이들보다 '정치'를 제대로 알지 못해 엉망진창인 것은 매한가지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누가 누구를 탓할 수도 없을 정도로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다. 이런 때에 우리가 '정치'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 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 두 말 할 것도 없이 '초등사회 교과서'부터 다시 펼쳐 들길 바란다. 그 교과서에 '정치 기본'이라고 할 것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어른이 되면 죄다 잊어버리고 엉망진창으로 정치를 참여하게 되는 것일까? 그건 암기하고 정답 맞추기만 열심이었고, 그렇게 배운 '정치 기본'을 제대로 실천해보지도 못한 채 '못난 어른들의 엉터리 정치'를 경험하고서 고대로 답습하고 있는 상황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 책의 저자 '옥효진'은 <세금 내는 아이들>을 통해서는 '경제 기본'을 아이들이 직접 실천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교실을 운영해보았고, 그 경험을 고스란히 녹여서 어린이책을 펴내기도 했다. 이번엔 이 책 <법 만드는 아이들> 펴내면서 아이들이 직접 법도 만들어 보고, 어떤 법이 국민(학생)들에게 좋은 법인지, 나쁜 법인지 몸소 겪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이를 바탕으로 직접 책을 펴내기도 했다. 그로 인해서 수많은 상을 탔고, TV 쇼에도 출연을 하는 등 옥효진 선생님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서, 이 책에 나온 줄거리처럼 아이들이 직접 '행정부(대통령과 국무총리)'와 '입법부(국회의장과 국회의원)'를 꾸려서 자기네에게 꼭 맞는 '법'을 손수 제정하고 공포하며 '민주시민의 권리와 의무'를 직접적으로 경험을 6학년 1년 동안 겪게 하였다. 그속에서 아이들은 '부당한 법'을 개정하는 노력도 하고, 대통령이 직접 '법'을 제안하기도 하며, 국회의 동의를 받은 법안을 대통령이 '거부권'도 행사하고, 더 좋은 학급을 만들기 위해서 '정당'을 꾸려서 법안을 통과시키려는 노력도 보이고, 그로 인해 '반대를 위한 반대'라는 정치적 꼼수에 발목이 잡히기도 하지만, 아이들은 '훌륭한 민주시민'이 될 수 있는 기본기를 연마할 수 있었다.

단순히 '초등학교 반장선거'를 연상하는 것과는 다르다. 엄연히 '대통령'을 뽑는 선거였다. 그리고 좋은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서 '소중한 한 표'를 가지고 있는 국민(학생)들은 대통령 후보들의 '공약'을 꼼꼼히 따지면서, 단순한 '인기투표'가 아닌 학급 전체를 위해서 가장 뛰어난 후보를 골라야 한다는 사명감을 경험한 셈이다. 정말 대단한 경험이 아니겠는가. 학교에서 이토록 '생생한 정치 수업'을 들은 어린이들이라면 방과후에 맞닥뜨린 '어른들의 정치'를 지켜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겠는가? 거부권을 남발하는 대통령에 대한 실망감, 반대를 위해 같은 정당끼리 똘똘 뭉쳐서 나랏일을 하는데도 훼방을 놓고 있는 국회의원들에게서 느끼는 무력감을 절실히 느끼지 않겠는가 말이다.

허나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겠다는 사명감에 충실한 어린이들이라면 이런 실망감과 무력감을 뛰어 넘어 '민주적 시민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 해야할 일들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거부권을 남발하는 대통령에게는 '국민들의 지지율이 떨어질 것'이라는 경고를 할 수 있을 것이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는 정당정치인들에게는 '대한민국 국회는 싸움터가 아니라 법을 만드는 곳'이라는 기본적 사실을 상기시켜 줄 수 있을 것이다. 국민들의 지지율이 바닥을 치는 대통령은 결국 '탄핵'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대통령은 그 '국민'들의 동의를 받아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국민들이 현직 대통령에게 등을 돌리는 상황인데도 과연 '대통령직'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한편, 국회는 국민들을 행복하게 해줄 '입법'을 하는 장소이지, 한낱 정당정치인에 불과한 이들의 유치찬란하고 고성방가한 난장판이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도 국민들의 '대표'라는 상징인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서 고작 한다는 짓이 '자기네 정당'에 유리한 법안을 만들려는 꼼수만 한가득이다. 이러니 국회의원들에게 줄 월급조차 아까워하며, 국회의원의 숫자를 늘리는 것이 '국민들의 의견'을 더욱 잘 수렴하는 방법인데도, 국민들은 국회의원 숫자를 오히려 줄이라고 아우성인 상황이다. 정말이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물론, 정치가 쉬운 일은 아니다. 고작 초등학교 한 학급 안에서조차 학생들 저마다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아웅다웅할 정도니 말이다. 그럼에도 정치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다. 그 어려운 일을 해내는 초능력 정치인이 등장할 것이라 믿기 때문이 아니다. 대한민국 정치는 '국민'들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은 세계에서 으뜸가는 '민주시민'이기도 하다. 그 시민들 하나하나가 '더 잘사는 대한민국'을 꿈꾸고, '더 부강한 대한민국'을 바라며,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대한민국'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원대한 목표를 달성시킬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할 뿐이라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중이다. 허나 우리는 안다. 이 어려움 또한 슬기롭게 극복해낼 것이라는 걸 말이다. 우리는 늘 그래왔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희망을 이 책에서 찾았다. 이 책을 감명 깊게 읽었을 수많은 대한민국 어린이들이 어른이 되어 '정치'에 참여하게 된다면 분명 그 바람들이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이다. 이렇게나 멋진 대한민국 미래의 주역들에게 부끄럼을 당하지 않으려면 어른들도 이 책을 한 번 읽어 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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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 내는 아이들 2 - 어린이를 위한 투자 교육 동화 한경 아이들 시리즈
옥효진 지음, 김미연 그림 / 한경키즈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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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XVI / 한경키즈(한국경제신문) 2번째 리뷰] 어린이책 굉장히 많이 출간되고 있다. 성인을 대상으로 한 시장이 좀처럼 활로를 마련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책시장은 점점 과열되는 조짐까지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학부모들이 그만큼 자녀들이 '책을 읽는 어른'으로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이라는 해석도 할 수 있겠지만, 정작 어른인 자신들이 '책 읽는 어른', '독서하는 학부모'가 되질 않으면서 자녀들에게만 책읽기를 강요하는 당연한 풍경(?) 여전하기 때문에, 자녀들이 좀더 나은 학교로 진학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참고서(또는 문제집)+어린이책]을 사주는 풍토가 만연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과연 이렇게 억지로 책을 읽은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독서를 즐기고, 또 자녀들에게도 '즐거운 책읽기'를 선보일 수 있을까? 아마도 힘들지 않을까 싶다. 이대로라면 말이다.

그렇다면 '어린이책'은 누가 먼저 읽어야 하는 책일까? '어린이'라는 유치한 타이틀을 달고 나온 책이니 정말 어린이들이나 읽어야 할 책으로 치부해야 할까? 아니면 우리에게 소중한 '어린이'가 읽어야 할 책이니 어른들(선생님이나 학부모 들)이 먼저 감명 깊게 읽고서 어린이들에게 권해야 할까? 나는 논술쌤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아무래도 '후자'쪽을 편들고 싶다. 왜냐면 어린이를 위해서 나오는 책들이 너무 많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그 많은 책들 가운데 무엇이 '좋은책'이고 어떤 책이 '나쁜책'인지 선별하는 작업이 아무래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요즘 나오는 책들은 거진 대부분 '좋은책'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출판사들끼리의 경쟁도 대단히 치열하고 유명한 '대형 출판사'에서 출간한 어린이책들은 출판사의 명예를 걸고 '좋은책'을 만들려고 기획단계부터 작정을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소중한 어린이들이 광야에서 헤매지 않고 '바른길'로 가길 바라는 어른들이라면 '어린이책들'을 먼저 읽고 선별하는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런 좋은 어린이책을 선택하는데 있어 조금 보태려고 무던한 애를 쓰고 있고 말이다.

이 책 <세금 내는 아이들 2>는 전작에 이어 내놓은 '후속작'이다. 전작에서는 '경제의 개념'을 익힐 수 있는 유익한 내용이었다면, 후속작에서는 '투자의 이해'를 돕는 유용한 내용이 담겨 있다. 여러 가지 투자 가운데 '주식투자'를 올바르게 할 수 있는 기본인 '사업의 운용'에 대한 에피소드가 담뿍 담겨있는데, 책의 줄거리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투자의 기본'을 배울 수 있어서 매우 훌륭한 어린이책이다. 그 가운데 가장 기본인 '좋은 회사'를 알아보기 위해 직접 '사업'을 운영해보는 아이들이 등장한다. 그렇게 직접 사업을 해봄으로써 '좋은 회사'를 선별하는 안목을 키운다면 '뛰어난 투자방식'도 덩달아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배운 '경제(투자)지식'으로 어린이들이 직접 주식투자를 해볼 수도 있을까? 소득이 따로 없는 어린이들이 '직접 투자'를 하기에는 힘들지만 부모님의 명의를 빌어서 '주식계좌'를 만들 수도 있고, 부모님이 준 용돈을 투자금으로 삼아 '직접 투자'를 할 수도 있다고 한다. 실제로 미국과 이스라엘 등 경제강국들의 학부모들 중에는 자녀의 생일선물로 '우량기업의 주식'을 선물하는 경우도 있고, 이스라엘에서는 돌을 맞이한 아이에게 '금반지' 대신 '주식'이나 '정기예금'을 선물해 주었다가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대략 20년 뒤)에 독립자금으로 유용하게 쓸 수 있도록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우리 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보험상품'이 있어서 자녀가 대학등록금(또는 학자금 대출) 걱정 없게 해주는 것이 있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다. 어떤 방식이든 10년 이상의 '장기투자'는 경제기본 상식인 시대다.

기성세대는 '경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어른이 되어 '신용카드'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는 어리석은 짓을 범했고, 자녀의 학원비(유학비)를 대느라 '노후자금'조차 마련하지 못하는 불운을 겪었다. 이는 대한민국 경제가 급성장한 탓도 있지만, 경제성장의 속도만큼 발빠르게 '경제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이 더 크다. 더구나 우리는 전통적으로 '황금을 보길 돌같이 하라'는 청렴한 경제관념을 강요하다시피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대책없는 경제관념으로 '경제대국'이 된 오늘날의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렇기에 기성세대를 위한 국가(정부)의 '기초연금 정책'같은 경제적 지원이 충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로 인해 젊은 세대가 떠안은 '경제부담'이 커져가는 상황이라 대한민국 경제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고 길게 드리우고 있는 형편이다. 지금의 어린이들이 성인이 되어 사회에 첫 발을 내딛을 때에는 더욱더 어두운 터널에 진입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해서 '경제탓', '정부탓', '세대탓'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이렇게나 어려운 시기에도 경제적 풍요로움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부정한 짓을 저지르고 부패한 시스템의 부당한 방법으로 '부'를 쌓았다면 정정당당한 사법체계로 혼쭐을 내주어 두 번 다시 그런 짓을 하지 못하게 만들면 된다. 이쯤 되면 슬슬 눈치 채신 분들도 계실텐데, 저자 옥효진의 책으로 내가 리뷰할 책이 바로 <법 만드는 아이들>이다. 조금만 기다려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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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의 나라 - 한국의 파워 엘리트들은 어떻게 야구를 국민 스포츠로 만들었나
이종성 지음 / 틈새책방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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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XV / 틈새책방 1번째 리뷰] 나는 스포츠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비만'인 체형이라 뛰고 달리는 운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땀도 많이 흘리는 편이라 '땡볕'에서 뛰어노는 걸 아주 극혐한다. 그래서 난 축구도 하기 싫어했고, 야구는 더더군다나 하기 싫었다. 그나마 농구는 '실내코트'에서 하는 경우엔 조금 뛰기는 했는데, 역시나 '풀코트 경기'는 싫어했다. 그런데도 골을 넣는 실력은 좋았기에 주로 '슈팅가드'로 활약했고, 안정적인 3점슛을 작렬해서 한때는 인기를 좀 끌기도 했다. <슬램덩크>로 치면 '정대만'으로 활약했다고 상상하면 거진 맞다. 그런 내게 '스포츠를 통해서 바라본 역사'는 생소할 따름이다. 그 가운데 '야구(베이스볼)'라니 별로 좋은 추억도 없다.

나 어릴 적에 동네 아이들은 '테니스공'이나 '고무공'을 가지고 조막만한 주먹을 방망이 삼아 '찜뽈'이라는 놀이를 했더랬다. 왜냐면 한창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에 '프로야구'가 개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야구는 꿈도 꾸질 못했다. 야구용품은 꽤나 비쌌기 때문이다. 온 동네에서 알루미늄 배트를 가지고 있는 아이는 한 명 있을까 말까 했고, 글러브는 그나마 싼 편이어서 얼추 4~5개를 가지고 있어서 한 명이 던지고 또 한 명이 때리고 나머지 두세 명이 공을 받으러 뛰어댕기는 야구 흉내를 내곤 했지만, 결정적으로 '야구공'을 마련하지 못해 별로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문방구에서 구하기 쉬운 '고무공'이라도 있으면 주먹으로 때리고 맨손으로 받으며 골목야구를 즐겼던 것이다. 하지만 난 그것조차 잘 하지 않았다. 왜냐면 날아오는 공이 무서워서 잘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 차례 직격으로 날아온 공을 얼굴로 받는 충격을 당한 뒤엔 더욱 그랬다. 이런 내가 고등학교와 대학교 때에는 손가락이 부러져가며 농구를 했으니 좀 우스운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암튼, 스포츠를 통해서 대한민국의 근현대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는 생각에 이 책 <야구의 나라>를 손에 펼쳐 들었다.

우리 나라에 '야구'가 소개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였다. 아시다시피 야구 종주국은 '미국'이지만, 웬일인지 '일본'에서 야구가 아주 큰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도 딱히 일본이 왜 야구에 열광하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언급이 없다. 하지만 그런 '일제'가 조선을 강제병탄한 뒤에 스포츠를 통해서 일제를 동경하게 만들 심산으로 조선인들에게 야구를 전파하려 부던히도 노력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물론, 모든 일본인들이 그럴려고 노력한 것은 아니다. 조선총독부도 조선인들에게 야구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에 그닥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제는 '내선융화'를 기치로 삼고 조선에서 '갑자원(고시엔) 대회' 예선전을 벌이며 일본 본토에서 벌이는 본선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선보였다. 여기에 참가한 학교는 대부분 '일본인 학생'들로 구성되었지만, 의외로 '일본+조선 학생'으로 구성된 학교도 꽤나 선전을 했고, 많지는 않지만 '조선인 학생'으로만 구성된 야구팀이 예선 1위로 본선에 진출하는 쾌거도 있었단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의 조선인들은 '야구'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공만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던 축구와 달리 야구는 꽤나 비싼 야구용품이 없으면 제대로 된 경기조차 치를 수 없는 '귀족 스포츠'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인 학생으로 구성된 팀이라 하더라도 크게 반기지 않는 분위기였다. 일제강점 당시에 그 비싼 야구용품을 갖출 수 있을 정도의 여력이 있으려면 '경제적 여유'가 있는 부유한 부모를 두어야 했고, 그런 여유가 있다면 필시 '친일파'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친일파가 '매국노'는 아니었겠지만 '일제의 정책'에 적극 찬성하거나 적어도 '동조'해야만 가능했던 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조선인들의 '야구 외면'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야구를 경험한 어린 학생들은 '야구의 매력'에 흠뻑 빠졌고, 일본인들의 텃새와 조선인들의 사나운 눈총을 견디며 야구를 해왔다. 그리고 조선인으로서 일본을 압도하는 실력을 뽐내며 온갖 설움을 이겨내는 '인고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그러다 해방이 되자 미국에 의해 '베이스볼'이 소개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서럽게 야구를 해왔던 사람들에겐 '또 다른 해방공간'이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야구는 점점 더 우리의 일상을 파고드는 매력을 뿜뿜하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재일교포 선수들'이었다. 이승만 시절에는 '재일교포'들이 국내에서 야구실력을 선보일 수 있었다. 물론 많이는 아니었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었으니 제대로 된 경기장 하나 없이 '고교운동장'에서 벌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허나 일본에서 '선진야구'를 경험했던 재일교포들에겐 '물 만난 고기떼'처럼 씽씽 날아올랐다. 야신으로 불리는 김성근 감독도 이때 한국으로 귀국했고, 처음에는 '쪽발이'라는 욕도 참 많이 들었단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재일교포'란 딱지로 설움을 많이 받았고, 북한은 '만경봉호'라는 북송사업을 시작하던 때라 수많은 재일교포들이 남쪽이냐, 북쪽이냐로 선택을 강요받아야 하는 시점이기도 했단다. 허나 '야구실력'이 되는 재일교포들은 주로 남쪽을 선택해서 국내 야구발전에 큰 공을 세웠단다.

이후에 박정희 시절에도 야구는 발전했다. 특히 1963년에 벌어진 '야구 한일전'에서 승리한 대가로 당시 동대문야구장에 '조명탑'이 건설되며 한국야구는 '야간경기'까지 치를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고, 그 인기도 서서히 물이 오르기 시작했다. 허나 박정희가 야구보다 축구를 좋아했다는 점이 큰 걸림돌이었다. '박스컵'을 걸고 국제경기를 치를 정도로 축구광이었던 박정희 덕분에 한국축구의 실력은 나날이 성장했고, 월드컵과 올림픽에서도 그 실력을 돋보일 수 있었기에 국민들은 축구에 열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야구는 온 국민이 열광할 수 있을 정도의 '국제경기'가 없었기에 인기가 그리 없는 스포츠였단다. 그렇게 박정희 시절에는 '남북대결'이 벌어질 수 있는 스포츠를 주로 집중지원했고, 그 결과 월드컵과 올림픽에 대한 지원은 빵빵한데 반해서 야구는 남북대결이 벌어지질 않으니 외면 받았던 것이다.

허나 '은행 야구단'에 이어 '고교 야구'가 큰 인기를 끌자 상황은 달라졌다. 당시에는 '상고'를 졸업해서 '은행'에 취직하는 것이 최고의 엘리트 코스였던 것이다. 그래서 상고는 '야구부'를 만들기 시작했고, 상고에서 활약한 야구선수출신들은 '은행구단'에 스카우트 되어 최고의 월급을 받으며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상고와 은행에서 야구단을 만든 까닭은 '일제강점기'때부터 그래왔기 때문이다. 일제의 패망 이후 일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야구장'과 '놓고 간 야구용품'으로 명문야구단으로 급성장한 곳도 대부분 '상고'와 '은행'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명문야구단이 성적과 실력을 향상 시키기 위해서 '재일교포 출신 선수들'을 대거 영입하자 야구경기는 볼 만한 수준을 이루게 되었고, 이들의 공헌으로 '고교 야구'가 급성장하게 된 것이다.

고교 야구가 큰 인기를 끈 것은 '재일교포 선수 출신들'의 공험과 '야구 도시 부산'에서만 누릴 수 있었던 '일본야구 TV중계' 덕분이었단다. 당시 부산에서는 안테나를 높이고 TV를 틀면 일본 NTV(니혼TV)를 시청할 수 있었단다. 더구나 1964년에는 동경올림픽이 열리던 때였다. 그렇게 수준 높은 '일본야구'를 공짜로 즐길 수 있었던 부산의 야구팬들의 '관람수준' 또한 상향되었고, 이를 계기로 어린 선수들도 자극을 받아 '야구 실력'을 키울 수 있었으니, 결국 '고교 야구의 붐'이 펼쳐지게 된 것이다.

그렇게 대한민국에도 '야구의 초석'이 다져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프로야구'는 열리지 못했다. 앞서도 얘기했듯이 박정희가 야구에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재미 교포 '홍윤희'와 롯데 사장 '신격호'가 프로야구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는데, 홍윤희가 '프로야구 계획서'를 입안했고, 신격호가 '프로야구 창단'을 위해 재벌들을 움직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허나 결정적 한 방은 박정희가 죽고 전두환이 정권을 잡은 것이다. 야구를 싫어하던 독재자가 죽었으니 '문'이 열린 셈이고, 부당한 정권을 잡았던 또 다른 독재자는 국민들의 관심사를 돌려놓을 '3S(섹스, 스크린, 스포츠) 정책'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거기다 부당한 정권이나마 '충성경쟁'에 뛰어든 재벌기업들이 엄청난 돈을 출자하여 '프로야구단'을 창설하였으니, 1982년 프로야구 개막이 바로 그것이다.

한편, 야구의 인기비결은 바로 '지역주의'에 있단다. 고교야구 때부터 '지역 연고'에 따라 선수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그렇게 '대도시'를 중심으로 야구 명문고와 야구단이 형성된 것이란다. 그러니 '프로야구'에서도 지역에 따라 응원이 갈리는 현상은 자연스러울 정도다. 그렇게 서울의 MBC 청룡, 부산의 롯데 자이언츠, 광주의 해태 타이거즈, 대구의 삼성 라이온즈, 대전의 OB 베어즈, 그리고 인천의 삼미 슈퍼스타즈라는 6개 구단으로 온 국민의 열광적인 응원을 받으며 개막하게 되었단다.

이렇게 대한민국 야구의 역사를 조명해보면, 그 밑바탕에 '엘리트 주의'가 뿌리 깊게 박혀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의 '엘리트'들은 친일파라는 불편한 딱지를 받았지만, 해방 이후에는 그런 딱지를 벗어던지고 여러 차례 국제대회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국위 선양'을 해내고, 야구라는 스포츠의 매력을 온 국민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부던히도 노력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허나 '프로야구'가 개막하면서 새로운 엘리트 집단이 형성되었다. 바로 '재벌 구단'이라는 점이다. 이들에겐 '친일파'라는 딱지보다는 '독재 정권'에 기승해서 이권을 챙긴 '적폐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허나 일제강점기에 부와 권력을 잡은 세력이 해방 이후에도 고스란히 부와 권력을 이어받았고, 그렇게 이어 받은 부와 권력으로 '독재정권'에 기승했으니, 그 오랫동안 쌓여온 폐단을 어이 단박에 해결하고 청산할 수 있었겠냔 말이다.

어쨌든, 그런 폐단이 있다한들 오늘날의 '프로야구 인기'에 찬물을 끼얹을 까닭은 없다. 온 국민이 사랑하는 스포츠에 '친일적폐'란 프레임을 끼워 맞춰서 얻어낼 실익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의 근현대 역사를 망각하고서 무작정 열광하는 행동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생각이다. 마치 나라를 빼앗기자 되찾으려는 노력은커녕 친일매국 행위를 일삼던 부류가 '한국전쟁의 영웅'이 되거나 '멸공의 기수'가 되어 명망 높은 위인 대접을 받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단 말이다. 그러니 '야구 명문'이니 '전통이 오래된 야구단'이라면서 무작정 존경의 대상으로 삼다가는 자칫 '친일적폐의 장본인'을 머리 숙여 존경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독립운동 못한 것은 죄가 아니지만 '독립운동가'를 욕 보이는 행위는 죄를 넘어서 인간으로서 할 짓이 못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위인을 평가하는데 있어 '공과'를 따지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지만, 공이 있다고 해서 과를 '아무런 개념'도 없이 묻어버리는 허튼 수작은 정말이지 진절머리가 난다. 제발 그런 몰염치한 짓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정말 인간적으로 말이다. 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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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 (무삭제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27
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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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XIV / 현대지성 10번째 리뷰] 고전은 왜 오랫동안 읽혔을까? 수 세기에 걸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읽고 또 읽었을텐데,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읽히는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건 바로 '읽을 때마다 새로운 맛을 즐길 수 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걸리버 여행기>를 몇 번이나 읽었을까? 어릴 적 '소인국편'만 따로 있는 책까지 포함하면 꽤나 많이 읽었다. 어린이책으로 여러 출판사의 책이 나왔으며, '영어공부'를 위해서 영문판까지도 읽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다 '대인국편'을 발견했을 때의 놀랍고 반가움이란 이루 말할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최고의 충격은 고등학교때 '완역본'이 출간된 것이다. 그 책에서 처음으로 접한 '천공성 라퓨타 여행기'와 '마인국 휴이넘 여행기'는 놀라자빠질 정도였다. 걸리버 본인뿐 아니라 '인류 전체'를 야후(사람짐승)로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제서야 <걸리버 여행기>가 '어린이동화책'이 아니라 '풍자소설'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그 뒤로도 여러 출판사의 '완역본'을 거듭 읽을 때마다 그 느낌은 사뭇 달랐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개인적으로도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을 받는데, 그간 수 세기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읽을 때의 느낌은 어땠을까? 모르긴 몰라도 정말 다채롭게 읽었을 것이다. 그렇게 다채로운 느낌을 시공간을 초월해서 서로 소통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재밌었을지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고전은 바로 '이런 맛'으로 읽는다는 걸 새삼 느끼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다채로운 느낌을 받는다고해도 고전에 대한 해박한 전문지식이 뒷받침 되지 않는다면 '고전읽기'는 수박 겉핥기로 끝나는 경우가 태반일 것이다. <걸리버 여행기>가 아무리 풍자소설이라고 해도 '300여 년전 영국사회'를 비꼬는 내용을 '문자, 그대로' 읽고서 단박에 깨우칠 현대 독자는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백과사전적 지식'으로 풀어 쓴 친절한 해설서가 필요한 법이다. 그런 책 가운데 '현대지성'에서 출간한 <걸리버 여행기>를 추천한다. 여러 출판사 가운데 '가장 해박한 해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리 친절한 해설이라고 해도 '나의 견해'와 다르다면 그저 '참고사항'일 뿐이다. 다시 말해, '해설'은 해설일 뿐이지 결코 '정답'이나 '모범답안'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니 용감한 독자라면 '권위 있는 해설가'에게 주눅 들지 말고 저만의 느낌 충만하게 읽어나가면 그뿐이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소개한 해설 가운데 한눈에 쏙 들어온 대목이 있어서 소개하려고 한다. 바로 '걸리버'란 이름에 감춰진 뜻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1735년 영문판 <걸리버 여행기>에 걸리버가 그려진 삽화가 있는데, 그 삽화 밑부분에 '레뮤얼 걸리버 선장, 멋진 거짓말쟁이 선생(Hon. Splendide Mendax.)'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단다. 멋진 거짓말쟁이라니 무슨 뜻일까? 그건 'Gull(바보, 또는 잘 속는 사람)'과 'ver(진실, 또는 진리)'의 합성어가 'Gulliver(걸리버, 진실을 말하는 바보)'라는 뜻이 감춰져 있었던 것이다. 진실을 말하는 바보는 앞뒤가 서로 맞지 않는 말이다. '어리숙한 사람이 솔직한 말을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바보가 말하는 것의 대부분이 거짓임에 틀림없다'는 뜻으로 '진실 vs 거짓'이 서로 대립하는 뜻으로 해석하여 '걸리버, 진실을 말하는 거짓말쟁이'로 해석해야 하겠다. 한마디로 <걸리버 여행기>란 '진실과 거짓'이 한데 섞여있는 여행기란 말이니 독자가 알아서 잘 판단하라는 뜻일 것이다. 정말이지 '최고의 풍자소설'답지 않은가.

이렇게 '진실을 말하는 거짓말쟁이'가 전하는 여행기라고 해석을 하니 4편의 여행기가 새롭게 정립이 된다. '소인국 릴리펏 여행기'부터 '대인국 브롭딩낵 여행기', '천공성 라퓨타 및 여러 나라 여행기'와 대미를 장식한 '마인국 후이늠 여행기'가 뜻하는 바가 꽤나 의미심장해졌다. 먼저 '소인국'에서 걸리버는 무슨 진실과 거짓을 말한 것일까? 물론 인간보다 작은 소인들이 사는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거짓'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영국사회'를 비난하고 풍자한 내용이 한가득이다. 바로 이야기 자체는 '거짓'이지만, 이야기가 빗댄 내용은 '진실'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대인(거인)들이 사는 나라는 '거짓'이지만, 그 이야기가 빗댄 내용은 '진실'이며, 천공성도, 마인국도 모두 '거짓 속에 진실'을 감추고 있는 셈이다.

도대체 무슨 진실일까? 소인국에서는 '영국과 프랑스'의 싸움을 빗대며 사소한 원한으로 서로 죽고 죽이는 앙숙이 된 것을 신랄하게 비난한다. 더구나 겨우 '달걀깨는 방식의 차이' 때문에 영국에서 프랑스로 망명을 간 사람을 발본색원하여 처형하고자 하는 소인국 국왕의 째째함을 실컷 비웃어주고 있다. 대인국에서는 정반대로 영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한껏 뽐내는 걸리버가 대인국의 국왕 앞에서 심한 꾸지람을 듣고 크게 반성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여기서 대인국의 국왕이 '세계정복'이라도 꿈꾼다면 대영제국이 전세계를 식민지로 만들어버린 '전쟁'이라는 것을 귀띔해드리겠다고 말했다가 호된 꾸지람을 듣게 된다. 너처럼 작은 사람이 어찌 그리 방법을 알고 있느냐면서 참으로 못된 짓을 일삼는 소인들을 경멸하는 말을 걸리버에게 했기 때문이다. 한편, 천공성에서는 '최고의 지성'을 갖추고 있지만 '하는 일마다 비이성적인 사람들'을 만난다. 그러다 마인국에 도착하면서 걸리버는 최고의 풍자를 남기게 된다. 바로 '후이늠(말)이 완벽한 존재'이며, '야후(인간)가 비참한 존재'라는 거짓을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거짓'이라면 진실은 그 '반대'인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며 '짐승은 말할 것도 없는 비천한 존재'여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감히 그런 말을 할 '자격'이나 있느냔 말이다. 오늘날의 인류는 지구에서 가장 '암(癌)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지 않았느냔 말이다. 오히려 '동물의 인권'이 급상승하면서 여객선이 침몰했을 때, 승객명단에 적혀 있는 구출순서는 '어린이, 여자, 노약자, 강아지, 그리고 나머지(남자 포함)'이라는 농담까지 유행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 점에서 작가인 스위프트는 300년 뒤의 미래를 예측한 대단한 작가였던 셈이다.

하지만 이렇게 파악한 '진실'조차 우리는 다시 한 번 '거짓'으로 판명할 수밖에 없게 된다. <걸리버 여행기>는 단순히 '풍자소설'이 아닌 '인간 혐오'에 입각해서 쓰여진 비정상적인 소설인 까닭이다. 이 책에서 '마인국 후이늠 여행기'를 중점적으로 보았을 때 작가는 모든 인류를 '야후(짐승)'으로 빗대고 말았다. 이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에게 경종을 울리면서 '개과천선'하라는 갱생의 기회마저 박탈한 채, 야후를 맹비난하며 걸리버 스스로 야후라는 것을 인정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아니, 스스로 짐승 같은 어리석음을 깨닫고 '후이늠'처럼 거듭날 수도 있지 않았느냔 말이다. 그런데 걸리버는 '마인국'에서 추방 당하고서 '인간'이길 포기하고 고국으로 되돌아와 헛간에서 짐승처럼 변해버린 '말'과 대화를 나누며 여생을 보낸다. 스스로 인간으로 남길 포기한 것이다. 이렇게 따지다보면 이 책의 곳곳에 '인간 혐오'와 함께 '여성 혐오'가 아주 빈번하게 등장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를 두고서 수많은 평론가들은 스위프트가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도 사이가 별로 안 좋았던데다가 스위프트가 사랑했던 여인들마저 번번히 실패로 끝맺고, 영국 여왕에게서 심한 홀대까지 받은 영양 탓으로 돌리기도 하지만, 아무리 그런 경험을 했더라도 '성직자'이기도 했던 그가 '신의 섭리'에 따라 따뜻한 인간애를 앞장 서서 실천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냔 말이다. 그런데도 지독한 염세주의로 가득찬 소설을 써내려갔다니 다시 한 번 놀랐던 까닭이다.

그럼에도 <걸리버 여행기>는 재밌다. 재밌는 소설은 언제든 다시 읽기 마련이다. 그리고 '고전'답게 읽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 다음에 다시 읽을 땐 어떤 느낌을 받게 될지 벌써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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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클베리 핀의 모험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73
마크 트웨인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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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My Review MDCCCXXIII / 문예출판사 7번째 리뷰] '같은 소설, 다른 출판사'를 읽다보면 색다른 느낌을 받는다. 분명 '같은 내용'인데도 '다른 느낌'이 확 풍기기 때문이다. 물론 '첫번째'로 읽는 느낌과 '두번째, 세번째'로 읽는 느낌이 같을 수는 없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처음에 읽었을 때는 별 느낌을 받지 못했던 대목인데도, 전체적인 줄거리를 이미 읽었기 때문에 '뒤에 나올 대목'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눈여겨 볼 수밖에' 없는 대목이 뒤늦게 발견되기도 한 덕분이다. 그럼에도 분명 다른 점이 있다.

이 책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을 때 '두 가지 관점'을 갖고 읽을 수 있다. 하나는 '사회 고발'의 성격을 갖고 그 당시 미국사회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비판적 관점에서 읽을 수 있으며, 다른 하나는 <톰 소여의 모험>의 '후속작'으로써 천진난만한 어린이의 장난스런 관점으로 읽을 수도 있다. 어린이 독자라면 헉 핀(허클베리 핀)과 톰 소여의 난장을 중점으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특히나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도 톰 소여는 등장만으로도 온갖 못된 장난을 칠 것이라는 짐작을 할 수 있을만큼 말썽꾸러기니까 말이다.

톰 소여의 첫 번째 장난은 '무법자 갱단'이 되는 것이었다. 동네 아이들을 모아 무시무시한 갱단을 만들어 지나가는 사람들의 물건을 털어 부자가 되자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부자가 되는 것은 그리 관심이 없고 그저 어른들마저 두려워서 벌벌 떠는 무시무시한 무법자로 소문이 나는 것에만 열을 올린다. 두 번째 장난은 짐이 노예로 팔려서 샐리 이모댁에 붙잡혀 있을 때 벌어지는데, 짐을 오두막에서 탈옥시키면서 벌어진다. 애초에 톰은 짐이 노예신분에서 풀려나 '자유인'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짐을 굳이 '탈옥수'로 만들 계획을 짠다. 마치 <몬테크리스토 백작>에 나오는 에드몽 당테스처럼 극적으로 말이다. 그로 인해서 톰은 도망노예를 잡기 위해서 마을 어른들이 쏜 총을 다리에 맞고 큰 부상을 당해 사경을 헤맬 지경에 빠진다. 그렇게 죽다 살아났는데도 톰의 장난기는 사그라들줄 모른다. 언제든 다시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을 어마어마한 장난을 칠 다짐을 할 정도니까 말이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는 톰의 장난이 여기까지다. 더 많은 장난이 궁금하다면 <톰 소여의 모험>을 권한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왜 장난을 좋아할까? 무엇보다 재밌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꼽으라면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가 아닐까 싶다. 그런 웃음소리를 들으려면 아이들이 맘껏 뛰놀게 만들주어야 한다. 그렇다고해서 맘껏 뛰어놀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따로 만들어줄 필요까지는 없다. 아이들은 특별히 가르쳐주지 않아도 저희들끼리 놀면서 '시공간'을 초월하는 마법을 부릴 줄 아니까 말이다. 단지 어리석은 어른들이 싸움박질만 하지 않으면 된다. 저들의 욕심을 챙기기 위해서 '선'을 긋고, 그 선을 넘으면 욕설을 내뱉고 폭력을 일삼으며 심지어 '전쟁'까지 벌이는 무식쟁이들만 없다면 아이들은 세상 어느 곳에서라도 맘껏 뛰놀며 까르르 웃음꽃을 피울 테니까 말이다.

사실 아이들이 바라는 것은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다. 그저 자신을 양껏 사랑해줄 어른들이 주위에서 든든하게 버텨주기만 해도 충분하다. 그런데도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물려주겠다는 욕심으로 '돈 버는 기계'를 마다하지 않고 '사회적 지위'를 높여 더 많은 권력을 차지하려고 애를 쓴다. 순전히 저들의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하면서 핑계는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서 엄청난 '희생'을 하는 것처럼 군다. 그런 어들들 밑에서 배우는 것이라곤 '돈돈돈~'뿐이고, 더 좋은 학교에 진학해서 출세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어버린 '박제된 어린이들'뿐이다. 놀 줄도 모르고 장난도 쳐본 적이 없는 '근엄한 표정의 애어른들' 말이다. 그런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면 '어떤 세상'을 만들까? 전쟁 같은 삶을 살아가는 지옥을 만들 뿐일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언제까지나 장난만 치는 삶을 살 수는 없는 법이다. 때가 되면 아이도 어른이 되듯이 '장난질'도 칠만큼 치면 멈추기 마련이란 법이다. 그럼 언제까지 '장난'을 치도록 허용해야 할까? 정답은 '죽기 직전까지'다. 왜냐고? 장난은 즐거운 일이니까 말이다. 물론 장난과 '사고'를 동일시할 수는 없다.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는 짓을 저지르면서 '장~난~'이라고 말하는 철딱서니를 가만 둘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다.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는 허튼짓도 절대 금물이다. 어디까지나 장난은 누구라도 '웃음꽃'을 피울 수 있는 정도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의 장난으로 골탕을 먹은 사람은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모를 수도 있으나,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아이들의 천진함에 함박 웃음을 터뜨릴 수 있는 정도에서 그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정도의 장난이라면 '평생'을 해도 재밌을 것 같지 않은가.

우리 사회는 점점 웃음꽃을 잃어가고 있다. 다시 말해, '웃을 일'이 별로 없다는 말이다. 저출생으로 마을 골목마다 뛰어놀던 아이들의 웃음꽃마저 사라져가는데 그나마 활기 넘쳐야 할 젊은이들마저 생기를 잃은 꽃마냥 축 쳐져있는 모습이 안타깝기만 하다. 이런 저조한 분위기를 되살리는데 '장난'만한 것이 또 있을까? 어린 아이들의 장난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며 모두가 함께 '웃음꽃'을 피우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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