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왕성에서 유턴 열림원어린이 창작동화 4
이경아 지음, 조현아 그림 / 열림원어린이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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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LI / 열림원어린이 1번째 리뷰] 우리네 가족의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바뀐 지는 한참이나 지났고, 이젠 '한부모가족', '조손가족', 그리고 '다문화가족'까지 가족을 이루는 구성원이 사뭇 달라지고 있다. 심지어 '사람'이 아닌 '반려동물'과 가족을 이루어 사는 모습까지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쯤 되면 가족이라는 단어 대신 '식구(食口)'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릴 듯 싶다. 가족이 '혈연'을 강조했다면 식구는 '함께 밥먹는 사이'로 더욱 폭넓은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솥밥'을 같이 나눠먹는 사이라면 '한식구'가 될 수 있다는 뜻을 살린다면 현대사회에 재구성되고 있는 다양한 식구들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좋은 뜻까지 품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책 <천왕성에서 유턴>은 어린이를 위한 동화이긴 하지만 엄마, 아빠가 잦은 다툼을 벌이다 끝내 이혼을 '선택'했고, 그로 인해 주인공인 '도은별'은 재혼한 엄마, 돈 벌러 외국에 간 아빠와 헤어져서 할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다. 아직 초등 6학년인 은별이는 이런 처지를 비관하고 자신이 불행하다고 여긴다. 이런 은별이에게 <바리데기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은 영화로 제작하자는 동아리 모임의 제안이 나왔고, 비슷한 시기에 우연히 '게임기'를 통해서 바리데기가 튀어나오며 아주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게임기에서 나온 '바리데기'는 형체가 없는 홀로그램일 뿐이라 서로 만질 수도 없지만, 외롭게 지내던 은별이와 금세 친해져서 비밀스런 이야기까지 나누는 둘도 없는 벗이 된다.

근데 '바리데기'는 민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딸 많은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나서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지만, 그 무정한 아버지가 병이 들어 죽자 '버림'받았던 막내딸이 모진 고생을 한 끝에 아버지를 살릴 수 있는 '약수'를 구해와 죽은 아버지를 살려냈다는 효심 깊은 딸에 관한 이야기속 주인공이다. 효를 중요한 덕목으로 꼽던 옛날에는 감동스런 이야기였을지 모르지만, 현대의 관점으로 봤을 때는 '바리데기가 겪어야 했던 불행'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지경이다. 이를 '고난극복'이란 관점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보통의 사람이 이겨낼 수 있는 고난이 아니기에 그렇다. 어쩌면 '수난'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암튼 바리데기는 한 여인이 감내할 수 없을 정도의 '불행'을 겪지만, 아버지를 다시 살려내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 모든 '불운'을 견디고 견딘 끝에 '약수'를 구하고 아버지를 살려낸다.

이 책 <천왕성에서 유턴>은 바로 그 '바리데기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아 초등학생 주인공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불행'을 이겨내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멋진 모습을 보여준다. 바리데기도 불행한 삶을 살았지만 끝끝내 견디고 이겨낸 것처럼 은별이도 한창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자랄 초등시절을 엄마, 아빠 '없이' 지내야 하는 불행을 딛고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누구나 어른이 되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삶의 지혜를 터득하기 마련이지만, 한창 '질풍노도의 시절'을 겪는 사춘기 시절에는 남들과 조금이라도 '다른점'이 있다면, 그것 자체로 큰 상처가 되고, 커다란 충격을 받고 제풀에 쓰러지기도 한다. 그럴 때 또래 친구들이 가장 큰 힘이 된다. 자신이 겪을 수밖에 없는 상처와 슬픔을 이겨내는데 '동질감'과 '감정이입'이 가장 크고 편한 상대가 바로 친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구만으론 부족한 경우가 많다. 왜냐면 친구들도 똑같이 '질풍노도의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어린이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은 어른의 역할이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부모가 서로 쌈박질만 하고 '이혼'까지 해버리고 나면 자식들은 '어느쪽'으로부터든 '버림'을 받았다는 충격과 상처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물론 부모들도 나름의 고충을 있을 것이다. 한때는 사랑이었으나 여러 가지 '차이'가 드러나면서 불화가 심해지면 이혼을 '선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억지로 함께 살면서 '불행한 결혼생황'을 지속하는 것보다 차라리 이혼을 하는 것이 더 행복한 삶을 살 수도 있기에 그 자체를 반대할 수도 없다. 그렇기에 현명한 부모라면 자신들의 '이혼'으로 인해 자녀가 짊어져야할 아픔과 고난이 무엇일지 미루어 생각한 뒤에 절대로 자녀에게 '상처'를 주는 선택을 해서는 안 된다. 행여 자녀가 그 상처를 이겨내지 못할 때에는 삶은 '선택'하는 것일 뿐, 삶 자체에 '행복'과 '불행'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일깨워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를 테면, '교통사고'가 나서 다리를 다친 어린이가 있다면, 그 어린이는 '불행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 아이를 볼 때마다 "넌 정말 불행하구나. 그러니 넌 평생 불쌍하게 살아야만 해"라고 말할 텐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비록 교통사고를 당하는 불운을 겪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친 부위도 나을 것이고, 다시 씩씩하고 건강해질 수 있다는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혹시라도 '평생불구'의 몸으로 살아가게 되는 경우일지라도 '평생불행'한 삶을 살게 되어 정말 불쌍하다는 말은 꺼내지도 않는다. 교통사고가 일어난 것은 '불행이자 불운'이겠지만, 그걸 극복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주지 않겠느냔 말이다. 부모의 이혼도 마찬가지다. 당장은 엄마도, 아빠도 곁에 없는 '불행'을 겪게 되겠지만, 그렇다고해서 평생 엄마, 아빠를 못보는 것은 아니라는 것, 심지어 재혼을 하더라도 '엄마, 아빠'인 것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뒤에 남은 것은 '선택'뿐이다. 부모 없는 삶을 살더라도 얼마든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이다. 단지 '나의 선택'만 남을 뿐이다. 행복한 삶을 살 것인지, 불행해서 도저히 살 수 없다고 여겨 더욱더 비참해지든지 말이다.

물론 쉬운 '선택'은 아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런 '선택'따위는 평생 모르고 살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닥쳤다면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만 한다. 과연 어떤 '선택'을 할지 말이다. 그런데 이 '선택'에는 정답이 정해져 있다. 바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말이다. 왜 '불행한 삶'을 선택하지 않는지는 어른이 되면 저절로 알게 된다. 다시 말해, '시간'이 지나면 아픔도, 슬픔도, 그리고 고통도 점점 무뎌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게 된다. 그 누구도 '불행'을 추구하는 일은 없다. 적어도 '삶'을 선택한 이들은 말이다. 그러니 어린 시절에 아픔을 겪는 친구들이 있다면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길 바란다. '너의 삶을 응원한다'는 의미로 말이다. 그렇게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 은별이에게도 그런 친구들이 많아서 참 좋았다. 바리데기에게도 그런 친구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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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AI 대전환: 주도권을 선점하라 - 국가대표 AI 전문가 2인이 제안하는 AI 주도권 확보 전략
오순영.하정우 지음 / 한빛비즈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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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L / 한빛비즈 157번째 리뷰] 인공지능 AI를 둘러싼 IT강국들의 '선점 경쟁'이 점점 거세지고 있단다. 향후 AI 기술을 기반으로 한 '기술강국'이 세계경제를 비롯해서 모든 기반시설들을 싹쓸이하고, 이런 기술을 갖추지 못한 AI 후진국들은 강국들에게 비싼 로열티를 지불하고도 후발주자로 내몰려 강국들에게 휘둘리고 말 것이라면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AI 선진국 대열'에 나란히 서야만 한다는 것에 방점을 찍고 있다. 이제 본격적인 AI 기술이 펼쳐지는 시대가 되면 새로운 '지정학적 패권' 열리게 될 것이라면서, 지금이야말로 대한민국이 미국과 중국에 이어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강국이 되어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최적기라면서 '주도권 경쟁'에서 결코 물러서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챗GPT 출시 이후 '생성형 AI'와 관련된 콘텐츠가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는데도, 이를 뒷받침할 만한 '산업계의 호응'이 적극적이지 않은 것이 의문일 정도란다. 그러나 '산업계(기업들)'도 나름의 고충은 있다. 바로 AI 기술을 바탕으로 내놓을 신제품이 마땅하지 않다는 것이다. 분명 AI 기술은 한두 달이 지나면 새로운 것이 나올 정도로 발빠르게 변화하고 놀라운 기술들이 매번 쏟아져나오고 있지만, 이런 기술들이 '스마트폰'처럼 대중들이 '꼭 갖고 싶은(must have)' 제품을 내놓기에 몇 가지 문제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란다. 바로 성능 대비 가격이 너무 비싼 기술이라는 점 때문에 '제품화'하기도 쉽지 않고, 막상 제품으로 내놓아도 '너무 비싸서' 살 수 있는 사람이 적다는 것이 문제점이다. 물론 값비싸다고해도 꼭 필요하다면 누구나 사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점을 감안해도 'AI 기술'을 적용시켜서 내놓은 제품들이 그닥 쓸모가 없다는 것이 현재의 문제점이다. 이를 테면, 'AI 개인비서' 같은 것인데 아직까지는 '있으면 편리'하겠지만, 신기한 점이 없지는 않지만 성능이 그닥 뛰어나지도 않은데 값비싼 비용을 주고서 'AI 개인비서'를 두려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 현실인 셈이다.

그렇다면 AI 기술은 과거 '닷컴 버블'처럼 거품이 많이 낀 시장인 것일까? 과거에도 '인터넷 열풍'이 불면서 무슨 회사일지라도 '닷컴'이라는 이름만 붙이면 열광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닷컴'을 이용해서 내놓을 만한 제품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거품이 일제히 꺼지면서 '주가대폭락 사태'를 일으키며 경제적 문제만 일으켰던 선례가 있었다. 허나 AI 기술은 다르다고 말한다. 실제로 가까운 미래에는 'AI 기술'이 탑재되지 않은 제품이 없을 거라는 전망까지 제시하며 실제로 제품을 생산하고 시연까지 하고 있기 때문에 AI 기술에는 거품이 없을 거라고도 한다. 그런데도 막상 이를 지켜본 대중들의 반응은 시큰둥할 뿐이다. 분명 놀랍고 신기한 것에는 틀림없지만 '굳이, 저걸 비싼 값을 치루고 사야 돼?'라는 분위기만 연출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한국의 AI 기술은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을 정도로 발전이 정체되고, 투자도 소극적이라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보다 '후발주자'였던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각국에서 본격적인 개발과 투자를 하며 우리보다 앞서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대로 계속 답보상태에 빠져 뒤쳐지게 된다면 한국은 'AI 주도권'을 잃어버리고 멀지 않은 미래의 '강국의 지위'를 내주고 값비싼 대가를 치뤄야 하는 처지로 전락할 수도 있다고 한다. 이건 굉장한 위기를 우리 스스로 초래하는 셈이다.

허나 AI 기술개발이 호락호락한 상황도 아니다. 기술개발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신기술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도 이를 실제 적용시키는 단계에서 크고 작은 문제들이 터져나오고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가장 큰 문제는 바로 '할루시네이션(AI의 거짓말)'이다. 우리가 '인공지능의 도입'을 할 때 가장 기대하는 것이 '공정하고 객관적이며 정확할 것'인데, 정작 그런 기대를 무색하게 만들 수도 있는 'AI의 거짓말'이란 오류가 등장했으니 여간 곤란해진게 아니다. 그런데 AI전문가들은 할루시네이션이 '오류'가 아닌 AI의 현명함이 증명된 것이라는 대답을 늘어놓고 있으니 현장의 혼란만 가중된 격이다. 과연 할루시네이션은 '오류'일까? '정상'일까?

사실 인공지능 AI가 대단해진 것은 '챗GPT의 등장' 이후였다. 그 이전에도 인간을 상대로 체스게임에서 승리를 거두고, 바둑게임에서 인공지능이 승리를 거두면서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을 갖춘 '인공지능의 시대'가 금방이라도 펼쳐질 것으로 짐작했으나, 결과는 잠잠했다. 왜냐면 그당시 인공지능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체스'와 '바둑'뿐이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인공지능이 탑재된 '가정부 로봇'을 집집마다 배치하고 써먹으려면 엄청난 '빅데이터'를 갖추고 '딥러닝'을 할 수 있는 빌딩만한 컴퓨터 공간이 필요했으며, 그런 대량의 컴퓨터를 감당할 수 있는 '전력'을 댈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춰야 하며, 이 모든 것을 해결가능하다고 해도 간단한 요리를 위해서 달걀을 깰 수 있는 로봇손을 개발하는데 천문학적인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럴 바에야 '인간 가정부'를 고용하는 것이 더 가성비가 높지 않겠느냔 말이다. 그냥 직접 요리 해먹거나 말이다.

그런데 '챗GPT'가 등장하면서 인공지능은 매우 똑똑해진 것처럼 보였다. 간단한 명령어만 입력했는데, 수십 년을 연구한 박사만큼 '장편의 논문'을 써내고, 수 년간 디자인을 공부한 사람만큼 '예쁜 그림'을 뚝딱 그려내며, 인간과 대화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구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더 'AI 기술'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로 인한 기술개발은 발빠르게 성장발전하고 있는 셈이다.

이제 '챗GPT'를 비롯해서 다채로운 AI가 등장하며 본격적인 AI 기술이 선보이는 줄 알았는데, 우리가 기대했던 '공정하고 객관적이며 정확한 AI'는 거짓말(할루시네이션)을 늘어놓았다. 영화 <아이언맨>에 등장하는 '자비스'가 토니 스타크에게 거짓된 정보를 늘어놓는 상상을 하게 만든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누가 'AI 기술'에 투자를 할 것이고 산업계가 제품생산을 대량으로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아무도 사지 않을텐데. 하지만 전문가들은 할루시네이션이 '오류'가 아닌 "딥러닝 모델의 데이터 생성이 확률적이기 때문이고, 방대한 데이터를 응축해서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리고 AI의 언어 모델 학습이 '사실'을 보장할 필요가 없는 방식을 택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증상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그리고 할루시네이션을 줄일 수 있는 기술인 'RAG'로 할루시네이션을 현저히 줄일 수 있다고 말한다.

사실 소설처럼 '있을 법한 허구'를 다루는 일을 할 때 할루시네이션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정확성'을 요구하는 의료장비나 판결문구 등을 다루는 일에서 '거짓정보'를 자연스럽게 늘어놓는 AI를 장착할 수 있을까? 스포츠 경기 심판을 맡은 AI가 '억울한 판정'을 받았다며 항의하는 선수에게 '거짓정보'를 늘어놓으며 자신의 심판을 받아들이라고 한다면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렇다고 AI를 소설창작과 같은 '예술적인 용도'로만 한정해서 사용할 것이라면 애초에 이런 열풍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AI 기술을 선점하려는 각국의 경쟁은 멈출 줄 모르고 있다. 모든 기술개발 과정에는 문제가 있었고, 그 문제를 극복해나가는 몫도 반드시 치뤄야 할 대가라면서 말이다. 그리고 전문가들의 조언처럼 '할루시네이션'도 향후에는 그리 큰 문제가 없을 정도로 개선될 가능성이 더 큰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시간'과 '비용' 문제다. 이런 크고 작은 문제점을 해결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얼마인지 누구도 알 수 없고, 문제해결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도 누구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기술개발은 늘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주도권'을 빼앗길 수는 없지 않은가. 대한민국은 AI 선진국이었다. 현재도 그렇다. 그런데 앞으로가 걱정이다. 프랑스, 일본 같은 나라들이 우리보다 앞서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으며, 심지어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도 우리 뒤를 바짝 뒤쫓고 있단다. 그렇다면 우리의 'AI 기술개발의 현주소'는 어떨까? AI 관련 인재들의 국외 유출이 심각하고, 국내 산업계의 외면으로 인해 기술경쟁에서 뒤처지고 있는 상황이란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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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것들의 미학 - 포르노그래피에서 공포 영화까지, 예술 바깥에서의 도발적 사유 서가명강 시리즈 13
이해완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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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LIX / 21세기북스 29번째 리뷰] 미학(美學)은 미와 예술을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이라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머리속에 떠올리는 '아름다움(beauty)'과는 달리 '미적인 것(the Aesthetics)'에 대한 차원이 다른 영역을 주로 탐구한다고 한다. 허나 비전공자인 나로서는 이게 뭔소린가 싶다. 아름다운 게 '미적'인 것이고, 미적인 것이 '아름다움' 아닌 가 말이다. 그래서 조금 비틀어서 접근해보기로 했다. 이 책의 제목에서 '미학'의 앞에 놓인 낱말부터 접근해보았다. '불온하다'의 반대말로 '건전하다'라는 낱말을 슬며시 놓아본 것이다. 애초에 '불온하다'의 반대말은 '온당하다'이겠지만, '온당하다'의 반대말은 '부당하다'는 낱말이 있으니 적절치 못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온한 사상'이라는 말이 쓰이니, 이에 반대되는 '건전한 사상'이 적당할 것 같아 두 낱말을 나란히 놓아본 것이다. 그랬더니 뭔가 보이기 시작한다.

'건전한 것들'은 우리의 마음을 평안하게 만든다. 해악을 끼칠 것이 없고 온통 '선한 영향력'만 전파할테니 누가 마다하겠는가 말이다. 근데 한편으로 곱씹어보면 '건전한 세상살이'만큼 지루하고 재미없는 것도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심심할 것이란 말이다. 날이면 날마다 그저그런 하루를 보낼 것을 생각하면, 날마다 '똑같은 일상'만 반복되는, 그런 삶을 떠올리면 말이다. 그런데 '불온한 것들'은 우리의 일상을 짜릿하게 해준다. 분명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자꾸 해보고 싶고, 하면 '즐거울 것' 같아서, 또는 '은밀하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누구에게 알려져서도 안 될 일을 몰래 해보는 그런 재미가 있을 것 같지 않은가 말이다. 물론 그런 '불온한 나날들'을 보내면 필히 후회하게 될 것이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불온한 것들의 미학>이라는 것도 그런 짜릿하고 전율이 느껴지는 철학이지 않겠느냔 말이다. 물론 '일상적인 것'이 되어선 곤란하겠지만, '철학의 범주' 안에서 우리가 한 번 생각해볼 여지가 있을 것이라는 빈틈을 한 번 파고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모두 4가지다. '위작', '포르노그라피', '나쁜 농담', 그리고 '공포물'이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상당히 '불온한 것들'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이런 것들에서 철학적으로 논해볼 '미적인 것'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문제'였다. 학문적 연구에서는 종종 '객관성'을 따지며 일상에서 나타날 도덕적 문제(모럴해저드)조차 너그럽게 대하는 경우가 있는데, 일반 독자에 불과한 나에겐 '부도덕적인 것들'에 관용과 허용을 논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기에 아무리 '미적 탐구'를 위한다고 하더라도 부도덕적인 내용에 대해선 용서하지 않는다는 '기준'을 명시하고 싶다. 책의 내용에서도 '도덕적 잣대'를 허술하게 들이대는 경향이 보였는데, 그런 경향에 대해 일체 '무관심'으로 대했다는 점도 상기해주길 바란다.

암튼, '위작'부터 살펴보자.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우리는 '진품'과 '복제품'의 차이를 명확히 구분하기 힘든 시대를 살고 있다. 그렇다면 '위작 논쟁'은 의미가 무색해지는 것 아니겠냐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오히려 '진품'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이 재현하는 화가의 재능'을 높이 사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는 반문을 던지고 있다. 그렇지만 여기에 대한 일반대중들의 대답은 '아니오'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한 이유를 되물으면 어떨까? 아마도 마땅한 대답을 말하기 힘들 것이다. '진품'과 그것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히 재현한 '복제품'을 그려낸 재주 또한 '뛰어난 재주'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제품'을 인간이 아닌 '인공지능 로봇'이 그려낸 것이라면 하등 가치가 없다고 폄훼할 것이 분명하다. 아직까지 '예술의 가치'는 오직 인간만이 만들어낼 수 있다는 암묵적인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 빈치의 '모나리자'를 오늘날의 화가가 진품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재현해내는 재주를 가졌다는 것을 우리는 '뛰어난 재주'로 인정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왜 '위작 논쟁'은 끊임없이 나타나는 걸까? 이중섭, 박수근, 천경자 등 뛰어난 화가들의 작품을 모방해서 '진품과 위작을 가리는 시비'가 매번 곤혹스럽게 문제시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것일까? 물론 이런 논쟁의 귀결은 언제나 '작품의 가격'이 되곤 한다. 만약 '진품'이라면 높은 가격을 매길 수 있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위작'으로 판명이 되면 가짜를 만들어낸 화가가 오명을 뒤집어 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소장하고 있는 사람은 시쳇말로 '똥값'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위작 논쟁'을 벌이는(?) 진풍경이 벌어지곤 한다.

그런 한편으로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다 빈치의 '모나리자'는 정당한 이유(?)로 진품이 아닌 복제품이 전시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도, 여전히 방문객의 발길을 끌어모으고 있는 것은 왜일까? 만약 자신이 '직접' 본 '모나리자'가 진품이 아닐 수도 있는데 말이다. 이 소문의 진위를 알 수는 없지만, 그 까닭만큼은 쉬이 이해가 될 법하다. 바로 '진품'이 훼손될 수도 있다는 전제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나리자'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진품과 큰 차이가 없는 '모나리자'를 관람하면서도 아무도 '위작'을 거론하지 않고 있다. 도대체 무슨 차이인걸까? 왜 '위작'은 진품에 비해서 가치가 떨어진다고 이야기하는 걸까?

다음은 '포르노그라피'다. 바로 '예술 vs 외설'이라는 논쟁을 떠올릴 수 있다. 왜 명화속의 벌거벗은 나체는 '예술'이고, 영화속의 벌거벗은 몸은 '외설'이라 평하는가 말이다. 어떤 이는 '성적행위의 유무'를 따지기도 하고, 또 다른 이는 '성적흥분의 유무'를 차이로 내세우기도 한단다. 그렇다면 '성행위'를 묘사한 예술은 없단 말인가? 글쎄, 예술 '전체'를 다 알지 못하는 문외한인 내가 언뜻 떠올려보아도 남녀의 중요부위(!)가 낯뜨겁게 노출된 예술품들이 적잖히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왜 그런 예술품에는 '포르노그라피'라는 불명예를 들추지 않으면서, <플레이보이>, <허슬러> 등과 같은 '도색잡지'나 하드코어로 분류되는 '야한 동영상'에는 어김없이 '외설'이라는 낙인을 찍느냔 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성적흥분'을 차이점으로 내세우는 이들이 있는데, '성적흥분'이 왜 나쁜 것인지 합당한 근거를 내세우는 이는 없는 것 같다. 아니 '성적흥분'은 예술의 범주에 들어선 안 된다는 기준은 누가 세웠느냔 말이다.

어쩌면 '포르노그라피'에도 예술적인 아름다움과 감동의 서사시를 담아내서 관객들을 매혹시키는 무엇을 담을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겠느냔 말이다. 물론 낯뜨거운 성행위를 공공연한 자리에서 선보이는 것이 점잖치 못한 주장이고, 동물의 짝짓기를 연상시키는 것처럼 '포르노그라피'를 대중화시켜야 마땅하다는 주장은 아니라는 점을 밝힌다. 앞서도 '부도덕적인 것'에 대해선 용서치 않겠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과거에는 '미니스커트'가 허용될 수 없었을 정도로 낯뜨거운 패션이었으나, 지금은 '하의실종'이 버젓이 패션으로 자리잡은 것으로 모자라 '언더붑'과 '시스루'조차 미적인 것으로 분류되고 있는만큼 언젠가는 '포르노그라피'도 예술의 범주에 들어갈지도 모를 일이라는 것으로 마침표를 찍겠다.

세 번째는 '질 나쁜 농담'이다. 미국의 한 코미디언이 귀여운 강아지 사진을 관객들에게 보여주면서 "나, 이 사진 본적 있어. '한식당 메뉴판'에서"라는 유머를 선보였단다. 분명 '웃기는 상황'을 연출한 농담이다. 하지만 이는 '(모든) 한국인은 개를 식용한다'는 것을 전제로 깔았기 때문에 명백한 인종차별적인 발언이며, 이 농담을 듣고 웃는 사람의 품격조차 의심스럽게 바라보게 만드는 '불편한 농담'이다. 우리는 과연 '어느 선'까지 농담을 허용할 수 있고, 허용해야 한단 말인가? 요즘 공중파 방송을 비롯해서 그밖의 방송에서조차 '코미디 프로그램'이 사라지고 있다. 심지어 '개인방송'에서도 무분별적인 '개그소재'를 일삼는 방송인들을 향한 지탄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을 정도다. 한때는 주말 연휴에 '개그 프로그램'을 시청하지 않으면 평일날 일상적인 대화에 끼지도 못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는데, 왜 이제와서는 '개그(유머)'에 대해 이토록 진지해졌는가 말이다.

바로 '질 나쁜 농담'에 웃을 수 없는 상황이 연출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비도덕적인 농담'에 웃으면 안 되는 일상이 보편화된 것이다. 과거에는 '바보개그', '허무개그', '자학개그'까지 개그의 소재는 끝이 없었다. 영구와 맹구가 하는 바보짓은 일상의 피로를 풀어주는 활력소가 될 정도였고, 저런 게 왜 웃기는 걸까? 싶을 정도로 '허무한 개그'에도 우리는 박장대소를 멈추지 않았다. 여기에 '뚱뚱하고', '못생긴' 개그맨(우먼)들은 오디션장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공채'로 채용이 되는 일도 벌어졌다고 한다. 왜냐면 이들은 '존재, 그 잡채'로 웃음을 몰고다니는 귀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얼굴도 못생긴 것들이 잘난 척 하기는~"이라고 말하는 옥동자 캐릭터의 대사는 그 자체로 모순이었고, '자학개그'였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촌철살인의 풍자'를 우리는 놓치지 않았었다. 이런 개그 뒤에는 '정치풍자', '세태풍자', 더 나아가 인류 공영을 위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품격 높은 농담들이기도 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런 '농담'들에 날선 반응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소수자들의 인권을 짓밟는 '개그'에 차별금지라는 딱지를 붙였고, 정치적 소신을 말하는 '개그'에 국가권력이 개입하기 시작했으며, 씁쓸한 세태에 웃고 넘어가지는 '유머'에 웃음기 사라지는 정색이 줄을 이었다. 한마디로 점잖치 못하다는 이유로 '유머'에 족쇄를 매단 것이다. 물론 '비도덕적인 농담'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다. 저급한 개그소재로 품격을 잃은 개그프로그램을 되살리자는 운동을 벌이자는 것도 아니다. 왜 우리는 '웃음'을 상실한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지 되묻는 것뿐이다. 왜 '유머'를 양지로 드러내서 긍정적 효과를 내지 않고 '음지'로 내몰아서 더욱더 저속하게 만들고 마는지 안타까워서 그런다. 이 책에서는 '철학으로 농담을 분석하기'라는 장을 펼쳤지만, 그 글을 읽으면서 내 머릿속에는 이런 '웃지 못할 세태'가 떠올라 안타까웠다. 부디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유머'가 되살아나길 바란다.

마지막으론 '공포물'에 대한 미적 감상을 나열했는데, 솔직히 '느낌'에도 해석이 필요하다는 '감정 이론'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실 '공포물'을 좋아하는 것은 취향의 문제 아니냔 말이다. 그런 것을 좋아하고 말고를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싶다. 하긴 '존재하지 않는 것'에 느낌을 가지고 감정을 쏟는 것에 대해 '합리성'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말에는 공감이 가긴 했지만, 좋아하는 것에 대해 '합리성'을 따지는(?) 것이 온당한 일인지까지는 의아할 뿐이란 말이다. 하긴 난 '공포물'을 보아도 무서움을 느끼지 못하는 편이라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토시오는 귀엽고 처녀귀신은 섹시하지 않은가? 나만 그런가.

미학이라는 '분석철학'을 맛보았다. 물론 철학의 난해함이 엿보이기도 했지만 나름 재밌는 '접근'이었고, 사유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책이기도 했다. 세상의 모든 '미학(the Aesthetics)'이 이처럼 재밌지는 않겠지만, 흥미를 가질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는 것만큼은 부정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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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봐도 머리에 남는 어린이 야구 상식 - 야구의 재미를 제대로 알게 하는 알쏭달쏭 야구의 모든 것 유쾌한 교양 수업
김양희 지음, 나인완 그림 / 블루무스어린이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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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LVIII / 블루무스어린이 1번째 리뷰] 스포츠 경기를 재밌게 즐기기 위해서는 '경기 규칙'부터 제대로 익혀야 한다. 그래야 흥미진진한 승부의 맛을 짜릿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야. 그런데 모든 스포츠 경기를 통틀어서 가장 복잡한 '경기 규칙'을 갖고 있는 것이 바로 '야구 경기(베이스볼)'다. 그래서 야구 경기를 제대로 즐기기 위한 '초보 입문서'가 꼭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야구는 왜 이렇게 복잡한 규칙을 갖게 되었을까? 그건 다른 스포츠 경기와는 확연히 다른 점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공격'과 '수비'가 확실히 보장되며 공정하게 한 번씩 주어지는 아주 느슨한 방식으로 경기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구 한 경기는 평균 3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연장전이 거듭되면 5시간 이상이 훌쩍 넘어가는 경우도 있고, 하루에 두 경기가 연속으로 벌어지는 '더블헤더'가 펼쳐지는 날에는 최장 10시간을 넘긴 것이 기록에 남았을 정도란다. 이렇게나 느슨한(?) 경기 진행방식인데도 경기를 뛰는 선수나 그걸 지켜보는 관중들도 손에 땀이 흥건할 정도로 짜릿한 쾌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야구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동일 것이다.

이 책 <대충 봐도 머리에 남는 어린이 야구 상식>은 야구에 흠뻑 빠진 어린 독자들 뿐만 아니라 성인이 되었는데도 아직 야구 경기가 낯선 '야구 입문자'에게도 유용한 책이다. 왜냐면 책의 내용이 '야구 상식'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만 읽어도 웬만한 '야구 중계'가 귀에 쏙쏙 들어올 정도로 아주 이해하기 쉽고 친절한 설명이 담겨 있는 알찬 해설집이다. 더불어 상식적인 내용이라고 할만 한 것들은 모두 총망라할 정도로 풍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어, 한국프로야구(KBO)에 관한 내용 뿐만 아니라 미국 메이저리그에 관한 상식적인 내용까지 아울러 설명하고 있어서 '어린이책'이라는 제목답지 않은 전문가적인 내용까지 다루고 있다. 특히, 일본야구에서 널리 알려진 상식까지 통찰하는 설명이 수록되어 있어서 정말 '상식'적인 책이라 소개하는 것이 딱인 책이다.

사실, '야구(野球)'라는 명칭부터 '일본식 한자'에서 비롯된 것이라 '우리식 표현'으로 제대로 바꿔 나가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닌 상황이다. 이제는 '포볼'을 '볼넷'으로, '데드볼'은 '몸에 맞는 공'으로, '직구'는 '속구'로 바꾼 지 한참 되었지만, '들에서 하는 공놀이'라는 뜻의 야구라는 명칭조차 아직 바꾸지 못한 상황이 어처구니 없기는 하다. 왜냐면 미국에서는 'Baseball(베이스(기지)를 차지하는 공놀이)'라고 부르고,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에 처음 야구가 소개되었는데, 어째서 '일본식 명칭'인 야구라고 쓰고 있느냔 말이다. 이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의해서 강제로 '명칭'이 일본식으로 정착이 된 채로 한국에서 경기가 치뤄진 탓이 크다. 그래서 우리가 원치 않은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야구용어'를 써야만 했었다. 그렇다면 해방 이후에는 '우리식'으로 바꿨어도 되지 않았을까? 사실 미국 선교사들이 소개할 초창기에는 '타구(打球)'라고 불렀다고 한다. 방망이로 공을 치면서 하는 놀이였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봉구(棒球)'라고 부르며 '방망이'를 강조해서 불렀으니, 각 나라마다 야구의 특징을 살려 제대로 써왔던 셈이다.

그런데도 해방이 된 이후에도 우리는 '일본식 용어'를 크게 탈피하지 못했다. 까닭은 한국야구선수들의 출신지가 대부분 '일본야구'에서 비롯된 탓이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야구를 경험했던 이들이 '한국야구'의 모태가 되어 실업야구, 고교야구를 거쳐 프로야구를 출범시켰고, 또한 실력이 좋은 선수와 감독, 코치 들도 모두 일본에서 경험을 쌓고 한국으로 건너와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우리는 '일본야구의 영향력'에서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굳어져버린 '명칭'을 하루아침에 바꾸는 일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고 말이다. 그렇다고해서 '일본식 야구용어'를 벗어나겠다고 '메이저리그 용어'를 그대로 차용하는 것도 차선책일뿐, 최선의 방법이 될 수는 없다. 결국은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 '우리식'으로 바꿔나가는 방법밖에 없는 셈이다. 이제 '한국야구'의 위상도 세계적으로 뻗어나가고 있을 정도로 실력을 다지지 않았는가 말이다. 물론 선수나 코칭스테프, 그리고 중계진 등 '야구관계자'들이 먼저 솔선수범을 하며 바꾸려는 노력을 해야 겠지만, '야구 상식'을 키운 수백 만 관중들도 그런 노력에 힘을 보태주어야만 할 것이다. '타구'라는 옛이름을 다시 살릴 수는 없겠지만, 그보다 더 좋은 명칭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어쨌든 <어린이 야구 상식> 책인데도 '일본식 한자 용어'를 우리에게 맞게 고쳐 쓰는 것까지 신경 쓴 책이어서 더욱 호감을 샀던 책이기도 하다. 모쪼록 '구름 관중'을 동원할 정도로 야구에 대한 팬들의 사랑이 쑥쑥 커가는 이때에 이런 책들이 더욱 많아졌으면 한다. 솔직히 나도 '야구 입문자'에 속하기 때문에 이 책을 통해 새로 알게 된 내용도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키스톤 플레이'라는 용어였는데, '키스톤'이 아치형 구조물을 무너지지 않게 하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듯 '유격수'와 '2루수'가 중책을 맡아 탄탄한 내야 수비를 하는 경우에 쓰이는 용어라고 한다. 또한 '테이블 세터'는 1번 타자와 2번 타자를 가리킬 때 쓰는 용어인데, 출루율이 좋은 1번 타자와 작전 능력이 뛰어난 2번 타자가 주자로 나가야, 뒤이어 출전하는 '클린업 트리오'인 3, 4, 5번 타자가 차려진 밥상(테이블 세터)을 싹 치우며 득점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쓰는 용어란다. 이런 뜻을 알고 나면, 테이블 세터는 '밥상 차리는 타자들'이라 부를 수 있고, 클린업 트리오는 '싹쓸이 타자들'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물론 이미 '준족(발 빠른 타자)', '거포(잘 때리는 타자)' 등의 용어로도 불리고 있지만 말이다. 정말이지 '아는 만큼' 더 재밌게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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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여행은 가능한가 - 한국 스켑틱 Skeptic 2015 Vol.1 스켑틱 SKEPTIC 1
스켑틱 협회 편집부 엮음 / 바다출판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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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My Review MDCCCXLVII / 바다출판사 9번째 리뷰] 각종 잡지를 즐겨 읽는 편이다. 주로 '월간 잡지'를 읽었는데, 이번에 눈에 띄는 '계간 잡지'가 있어 들여다 봤다. <스켑틱>이란 잡지였다. '스켑틱 협회'에서 발간한 잡지인데, 비판적 사고를 촉진하고, 건전한 과학적 관점을 모색하는 비영리 과학 교육기관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이 교육기관에서 검증하는 것은 다름 아닌 '초자연적 현상', '사이비 과학', '유사과학', 그리고 '모든 종류의 기이한 주장들'을 따져 본단다. 흔히 말하는 '신비로운 이야기들'에 관한 과학적 검증을 시도한 책이라고 보면 되는데, 그 검증방법으로 기준을 삼은 것이 바로 '회의주의(일단 의심하고 깊이 파고들어 논리적인지, 비논리적인지 따져봄)'란다. 그러니 이 잡지에 실린 내용에 대해서는 일단 '믿어 의심치 않아도 좋다'는 신뢰도가 약간 높다고 볼 수 있다.

'회의주의'라는 것을 일단 의심부터 하고, 새로운 생각에 딴죽을 걸어 거부하기 위한 근거를 찾으려는 꼼수라고 오해할 수도 있는데, 그런 '괴팍한 태도'가 아닌 '충분한 근거'를 요구하는 신중한 자세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왜냐면 우리가 이 책에서 찾아볼 주장들이 얼핏 듣기만 해도 '신빙성'이 낮은 사이비 과학에 대해서 논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이비 과학'은 그 자체로 과학과 유사해 보이지만 과학적 근거를 전혀 없거나, 얼토당토 않거나, 근거가 매우 희박한데도 '정상적인 과학'인 것인냥 수많은 사람들을 현혹하여 믿게 만드는 위험성이 많기 때문이다. 사이비 과학의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골상학(두골의 형상에서 사람의 성격이나 운명이 결정된다고 추정하는 학문)'이다. 다시 말해, '생김새'만으로 성격이나 운명이 결정지어진다면서 19세기 중엽에 꽤나 유행했는데, 학문이 탄생한 유럽에서는 '금지'되다시피 했는데도, 미국에서 '대유행'을 하면서 수없이 많은 '못생긴 사람들'이 억울하게(?) 정신병자나 범죄자로 지목되어 그 피해가 막심했다. 다행히 오늘날에는 '골상학'에 과학적 근거가 현저히 부족하다는 것이 입증되어 더는 발달하지 못한 학문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이비 과학'으로 의심(!)할만 한 것이 있다면 '의심'하고, '과학적 근거'를 더 많이 찾아보려는 자세가 매우 필요한 셈이다.

이런 까닭에 이 잡지가 꽤나 흥미로웠다. 이 책은 그에 관한 '창간호'로 [시간 여행]에 대해서 집중 의심해보았다. 그간 '시간 여행'에 관하여 수많은 소설가와 물리학자들이 고민해왔다. 그리고 여전히 팽팽하게 '가능하다'와 '불가능하다'로 맞선 주제이기도 하다. 결론만 놓고 이야기하자면, "아직까지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는 충분한 증거가 발견되지 못했고, 실현해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시간 여행'에 긍정적인 관점을 가진 이들은 끊임없이 가능할 것이라 여기는 방법들을 신중하게 모색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내려진 '최신 결론'은 "시간 여행은 가능하다. 이론적으로 충분한 검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론에 따라 실현시킬 '방법'을 찾지 못했을 뿐이다"이다. 꽤나 흥미롭지 않은가? 가능할 수도 있다는 얘기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허나 과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 말을 듣는 순간, '불가능'을 떠올릴 것이다. 왜냐면 과학자들은 '방법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 실현가능성 0%라는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현재 과학기술로는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저 검증되지 못한 이론만 난무할 뿐인 상황이란 말이다. 하지만 실망하기엔 이르다. 이 책에서 검증하고 있는 수많은 '이야깃거리'만 읽어도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많고도 많은 논쟁거리가 화수분처럼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 여행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이라면 이 책을 권해드린다. 비록 10여 년 전의 과학적 논쟁을 다루고 있지만, 10년이 지난 지금도 '시간 여행'을 못하기는 여전하기 때문에 이 책에서 검증하고 있는 '단계'에서 크게 벗어나지도 못하고 있기에 결코 낡은 이론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잡지의 진정한 매력은 오래 묵을수록 더욱 진가를 발휘한다는 점이다. 맘 같아서는 이런 잡지를 '정기구독'하고 싶지만, 잡지의 가장 큰 단점은 모으면 모을수록 어마어마한 부피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눈에 솔깃한 주제를 다룬 잡지만 '골라서' 자주 손이 가는 곳에 두고 틈틈이 읽는 맛이 제격이다. 제발 그 장소가 '화장실'만 아니면 좋겠다. 세균번식하기 딱 좋은 곳이니 '소장용' 잡지라면 제발 그곳에 두지도 말고, 가지고 갔더라도 제발 가지고 나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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