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런 킹덤스쿨 4 - 도시 쿠키 vs 시골 쿠키 쿠키런 킹덤스쿨 4
김언정 지음, 이태영 그림, JA Korea(국제비영리청소년교육기관) 감수 / 서울문화사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DCCCLXXII / 서울문화사 7번째 리뷰] 경제에 있어 '도시와 시골'의 상관관계는 '소비와 생산'과 밀접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인식하기에는 '도시'는 세련되었고 '시골'은 투박한..한마디로 '촌스런' 느낌이 강하다는 것이 연상되면서 '소비활동'은 우월하고 '생산활동'은 열등한 개념마저 잘못된 선입견을 가질 수 있다. 그러니 어린이들에게 '경제교육'을 시킬 때에도 주의가 필요하다. 그리고 도시의 직장인은 '화이트칼라', 그밖의 생산공정 업무를 맡고 있는 직업인을 '블루칼라'로 지칭하는 것도 지양해야 한다. 요즘에는 이런 표현을 거의 쓰지 않고 있지만, '이미지' 만큼은 여전히 그러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된다.

만약 '생산'을 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해보라. '소비'는 결코 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생산을 담당하는 '노동의 가치', '노동자의 인권'을 하찮게 여기는 분위기는 왜 생기는 걸까? 그건 '황금만능주의'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돈이면 다 해결된다는 생각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정말 그런가? 돈만 있으면 '없던 상품'도 척척 만들어지고 '무한 서비스'를 제공받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고 답할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런 생각'을 어린이들에게 심어주고 있느냔 말이다. 우리 주위의 '노동자'에게 절대로 함부로 행동하면 안 된다. 노동자들의 수고가 없다면 우리의 일상은 절대로 편리하지도 않고, 풍족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어린이경제교육 속에 반드시 담겨 있어야만 한다. 그러니 '생산활동'이 고되고 힘들어도 아주 훌륭한 가치가 담겨 있다는 것, 다시 말해, '노동의 가치'가 고귀하다는 것을 알려줘야 건전한 경제교육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 '소비활동'에만 교육에 중점을 두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직업만이 가치가 높다고 여기고 '적은 돈'을 벌지만 '꼭 필요한 직업'을 경시하는 풍조가 만연할 수도 있게 된다. 이를 테면, 겉모습만 보고서 도시거주민은 부자고, 시골거주민은 가난하다는 선입견을 갖게 될 수도 있고, '하는 일'을 잣대로 경제수준을 가늠하는 잘못된 경제관념을 가질 수도 있다. 그리고 조기경제교육을 한답시고 '투자교육'을 하면서 '노동의 가치'를 폄하하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는데, 투자금에 '이자'와 '배당금'만으로도 웬만한 노동자들의 월급만큼 벌 수 있다면서 '무노동'으로 평생을 놀고 먹고 살 수 있다는 잘못된 경제관을 심어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열심히 일한 '노동의 대가' 가운데 여유자금을 따로 활용하여 '돈이 돈을 벌어오는 투자이익'을 모아서 '노후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란 설명이 덧붙여져야지, 젊어서 한탕 크게 돈을 번 다음에 남은 여생은 편하게 지내라는 식으로 조기경제교육을 한다면 안 된다.

이 책 <쿠키런 킹덤스쿨 4>에 이르니 '도시경제'와 '시골경제'에 관한 대략적인 설명을 하려는 듯 싶었는데, 용감한 쿠키를 비롯한 블루반 학생 쿠키들이 도시에 도착해서 '엉뚱한 사건'에 휘말리는 내용만 늘어놓고, 정작 경제교육에 해당하는 내용은 터무니 없이 빈약해진 것이 아쉬웠기 때문에 책의 내용에서 살짝 벗어나 추가적인 내용을 보충설명하고 말았다. 그나마 유의미한 내용은 '수요와 공급'에 대한 개념이었는데, 그마저도 '교과서 수준'에 딱맞는 내용밖에 없어서 아쉬웠다. 그럴만한 까닭은 있을 것이다. 바로 '사회교과서'에 담긴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게 기획하다보니 '한 챕터로 묶기 곤란한 내용'을 한데 짜깁기하였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마법천자문>에서도 스토리 상 '억지스럽더라도' 필수교육으로 지정된 한자를 어쩔 수 없이 넣다보니 엉뚱하다 싶은 모험이 펼쳐지면서 독자조차 당황스럽게 만드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럴 경우에'는 과감하게 편집하고 생략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교육자의 처지에서는 '꼭 익혀야 될 내용'이라 여긴 탓에 교과서에 넣었는데, 학습만화에서는 과감하게(?) 생략을 해버린다면 곤란할 수도 있다고 본다. 암튼 그런 연유로 학생 쿠키들이 '킹덤스쿨'을 벗어나 '낯선 도시'에서 엉뚱한 모험을 벌이며 중간중간 '꼭 알아야 할 경제지식'을 한도막 두도막 토막내서 배울 수밖에 없게 되었다. 어쩔 수 없는 '학습만화의 한계'를 접할 때에는 안타까운 마음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만과 편견 세계문학의 숲 16
제인 오스틴 지음, 고정아 옮김 / 시공사 / 201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DCCCLXXI / 시공사 17번째 리뷰]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는 단연 '셰익스피어'일테지만, 2위로 꼽은 작가가 '제인 오스틴'이라는 사실은 의외로 여겨질 법도 하다. 오늘날의 시선으로 바라본 <오만과 편견>은 '오만한 남자와 편견 가득한 여자'가 사랑을 하고 결혼에 골인한다는 지극히 단순하고 뻔한 줄거리를 보여줄 뿐이기 때문이다. 너무 뻔해서 진부하기 짝이 없는 이 책의 어디가 영국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게 된 이유인지 파헤쳐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18세기 영국사회는 여성의 상속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들 없이 딸만 넷을 둔 '베넷 가문의 상속권'은 엉뚱하게도 다른 남성인 사촌 콜린스에게 넘어가게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베넷 씨의 네 딸 가운데 한 명이 '사촌 콜린스'와 결혼을 한다면 아버지(베넷)의 재산을 지킬 수 있게 되고, 아버지가 죽고 난 뒤에도 콜린스의 아내로서 정당하게 '재산권'을 보호하고, 다른 세 딸과 어머니의 생활을 궁핍하게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이는 영국 이외의 다른 이웃나라에서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기에 이 책 <오만과 편견>에서 등장하는 영국사회의 여성들은 '결혼'이 유일한 생계수단인 셈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어린 나이(십대)에 이미 결혼 적령기를 맞이하고, 이십대 초반이라도 '노처녀' 취급을 당하는 <오만과 편견>의 줄거리가 상당히 불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과 달리 '여성의 경제활동'이 변변찮던 18세기 영국에서는 여성이 무도회장에 나가 남성과 함께 춤을 추는 것이 거의 유일한 '경제활동'이었다고 봐야 한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책 <오만과 편견>의 깊은 주제를 우리는 인지하지 못하고, 그저 결혼에 목메는 여성들의 '로맨스(칙릿)소설'로 오해하게 될 것이다.

그럼 <오만과 편견>의 진짜 주제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여성의 관점'에서 바라본 가장 이상적인 결혼이다. 당시 결혼은 오직 남성에게만 자유로운 '선택권'이 주어졌고, 여성은 남성의 프로포즈를 받고 난 뒤에야 비로소 '수락/거절'이란 단 한 번의 찬스(기회)만 주어졌을 뿐이다. 이때 여성이 꼽은 이상적인 남성은 '부와 지위'를 얼마나 소유했느냐 뿐이었다. 왜냐면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철저히 억제되어 있기 때문에 여성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돈 많은 남성'과 결혼하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성도 가정교사를 하거나, 삯바느질을 하는 등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 액수가 여성이 '홀로서기'하기에는 너무도 적었던 탓에 여성이 '사치'라도 부릴라치면 '아버지의 도움', '남편의 도움', 그리고 '아들의 도움'이 없으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거기다 애초에 '상속'이 불가하니 여성은 부모가 살아있을 때 넘겨준 재산으로만 넉넉한 부를 쌓을 수 있었고, 그나마 여성의 부는 미혼 뿐만 아니라 기혼 남성의 '먹잇감'으로 노려지기 마련이라 아버지나 전 남편이 넘겨준 '돈 많은 과부'는 당시 남성들의 신붓감 1순위였다.

이런 사회분위기에서 여성은 사회활동의 '주체'로 당당해질 수 없었다. 경제적 자립이 힘들었던 여성들은 오직 남성들의 부에 따라 팔자(?)가 바뀌는 '뒤웅박 인생'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교모임에서 여성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남성들의 눈길을 사로잡아야만 했고, 남성들의 취향에 따라 '본성'을 감추고 살아야만 했다. 이런 사회분위기를 타파하고자 제인 오스틴은 <오만과 편견>에서 당당한 여성인 '엘리자베스'를 등장시켰던 것이다. 물론 엘리자베스도 어쩔 수 없이 18세기를 살아가는 여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만, 단 한가지 '남성의 선택'에 몸둘 바를 두지 못하는 평범한 여성이 아닌 당당히 '스스로의 선택'을 강하게 어필하며 남성들로 하여금 '당당한 여성의 아름다움'에 반하게 만드는 모습을 펼쳐 보였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만과 편견>을 통해서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의 당찬 모습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에는 너무도 당연한 가치라서 그리 놀라울 것도 없지만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자유롭지 못했던 7~80년대 대한민국 여성들이 어릴 적에 가장 많이 읽은 소설이 <오만과 편견>이었다는 것은 바로 이런 가치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만과 편견>을 단순한 '로맨스소설'로 읽으면 아쉽다. 베넷 가문의 딸들, 제인, 엘리자베스, 막내 리디아, 그리고 엘리자베스의 친구인 샬럿까지 이들이 남자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살펴보면서 가장 이상적인 커플이 누구인지도 살펴보면 좋을 것이다. 먼저 제인과 빙리는 가장 평범한 커플이다. 돈 많고 착한 남편과 가정적이고 순종적인 착한 아내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커플은 굉장히 안정적이다. 하지만 이런 '교과서적인 커플'은 실제로 맺어지기 굉장히 힘든 타입이기도 하다. 선남선녀에 착한 남녀는 서로에게 연애조차 '소극적'인 까닭에 주변의 격렬한(?) 도움이 없으면 만남조차 힘든 커플이기 때문이다. 물론 서로 만나기만 한다면 더할나위 없는 커플이긴 한데 말이다. 그래서 착한 남자는 불같은 여자에게 휘둘리다 홀랑 벗겨 먹히기 딱 좋고, 착한 여자는 바람둥이 남자에게 상처만 받고 청순을 가장한 청승만 떨다가 좋은 시절을 망쳐버리고 마는 안타까운 사연도 꽤나 많다.

반면에 리디아와 위컴은 '사랑의 도피'까지 불사하는 불같은 사랑을 한다. 물론 사랑이 뜨겁다고해서 늘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 함정이지만 말이다. 더구나 리디아는 철부지에 위컴은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 사기꾼이다. 이런 사기꾼과 철부지 커플은 서로 죽이 잘 맞으면 '부부 사기단'으로 꿍짝을 벌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철저하게 '이기적인 패턴'을 보여주며 주위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그런데도 둘의 사랑은 서로 불타올라 서로가 서로를 '이용(?)'해 먹으면서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이 해결되면 다시 달라붙어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분노유발 커플'이다. 될 수 있으면 멀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음은 엘리자베스의 절친이었던 샬럿과 콜린스 커플이다. 애초에 콜린스는 엘리자베스에게 청혼을 했지만 거절 당했고, 이후로 키티와 리디아까지 찝쩍거리다가 경제적으로 궁핍해서 생활고에 시달리는 엘리자베스의 친구인 샬럿과 결혼을 하고 만다. 이를 두고 엘리자베스는 친구인 샬럿을 안쓰럽게 여기지만, 주위의 평판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엘리자베스가 넝쿨째 굴러들어온 행운을 어리석게도 뻥 차버렸다면서 위로를 해줄 정도였다. 왜 그랬을까? 비록 콜린스가 못 생기고 무례하며, 무엇보다도 여성을 '상식 이하'로 낮게 폄하하면서 오직 '순종적인 아내'로만 있기를 바라는 덜 떨어진 구시대적 남편인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런 못난 남성인데도 콜린스는 '가진 재산'이 많았다. 더구나 직업은 '목사'이고 베넷 씨가 죽고 나면 엘리자베스의 집과 재산마저 모두 콜린스에게 넘어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여러 모로 콜린스와 엘리자베스가 결혼을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결혼(?)이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엘리자베스는 무례한 콜린스의 청혼을 거절했고, 그 틈을 타서 친구인 샬럿은 콜린스의 아내 자리(?)를 낚아챘던 것이다. 비록 돈에 팔려가듯 성급하게 결정한 결혼이었지만 주위에서는 오히려 샬럿의 결혼을 부러워한다.

그렇다면 샬럿의 결혼이 가장 이상적인 결혼이었을까? 작가인 제인 오스틴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콜린스의 재산'보다 훨씬 더 많고, 젊은 나이에 잘 생겼으며 사회적 지위에 걸맞는 품위까지 갖춘 다씨라는 남성과 엘리자베스가 결혼에 성공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엘리자베스가 다씨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 까닭이 자신의 의견을 똑부러지게 말하다 못해 '편견' 가득한 고집불통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영국사회에 어디 엘리자베스 같은 여성이 결혼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남자의 청혼을 제 맘에 들지 않는다고 '거절'까지 했는데 말이다. 이런 여성은 평생 혼자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로 제인 오스틴도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고 한다. 실제 성격이 엘리자베스와 같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엘리자베스와 다씨의 커플을 가장 이상적인 결혼으로 본을 삼았다. 무릇 멋진 남성은 멋진 여성을 알아보는 법이라듯이 말이다. 그래서 '다 갖춘' 다씨는 '완벽한' 엘리자베스에게 반하지 않을 수 없는 매력에 푹 빠져서 헤어나질 못하는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를 짰다.

자, 이렇게 <오만과 편견>을 마무리하면 좋을까? 아니다. 오늘날에는 '결혼의 의미'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물론 여전히 결혼을 하기까지 '두 사람 사이의 사랑'도 중요하고, '집안끼리의 화목'도 중요하지만, 요즘 '비혼'이 너무 확산된 까닭이 바로 젊은 세대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사회 문제가 만연했기 때문이다. 18세기 영국사회에는 여성이 스스로 '경제독립'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남성들에게 매달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21세기 대한민국 사회는 젊은 세대가 스스로 '경제독립'을 할 수 없기에 결혼 자체를 포기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는 자연스레 '저출생 문제'와 '인구 감소 문제'로 이어져 우리 사회의 미래를 어둡게 만들고 있다. 오히려 <오만과 편견>에서 말하고 있는 '여성 인권'을 올리는 문제는 어느 정도 해소되었는데, '경제 문제'가 도리어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래서야 '결혼이야기'로 처음부터 끝까지 장식한 이 책을 읽을 '가치'를 좀처럼 찾기 힘들어진다. 다시 말해, 이 책 <오만과 편견>에서는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경제적인 것들'을 남성들이 알아서 해결하고 있다는 점을 문제 삼지 않으면, 요즘 독자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하기 힘들 것이다.

오늘날의 '결혼'은 돈 문제는 남자가 해결하고 여성은 '예쁜 미모와 착한 마음씨'만 갖추면 모든 것이 충족되고 해결되는 사안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경제적인 문제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 양쪽 모두가 여유 있게 돈을 버는 상황이 아니면 애초에 결혼을 할 수조차 없다는 것이 비극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책 <오만과 편견>을 '오만한 남자'와 '편견(선입견) 가득한 여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러브 스토리로만 읽을 것이 아니라, 선남선녀가 결혼을 전제로 한 '경제적인 고민'을 이야기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이에 '경제적 고민'이 생겼을 때, 어느 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부담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 또한 그런 일방적인 부담을 '사랑의 척도'로 가늠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값비싼 선물을 주어야만 뜨거워지는 사랑이라면, 그것이 진짜 '사랑'인지 고민해봄직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퇴마록 2 : 말세편
이우혁 지음 / 엘릭시르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My Review MDCCCLXX / 엘릭시르 14번째 리뷰] 책의 줄거리는 점점 심각해져만 간다. 책의 제목이 '말세편'인 것처럼 온세상이 멸망할 징조가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이야기전개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점입가경으로 전세계에서 내노라하는 종교의 수장들과 특수한 목적을 지닌 단체들이 하나 같이 한국의 퇴마사들을 향해 조여오고 있다. 바티칸의 이단심판관을 필두로 성당기사단, 검은편지결사, 그리고 중요 인물들을 암살하려는 목적의 어쌔신과 차이나 마피아까지 '홍수편' 이후로 활동에 제약을 받고 있는 퇴마사들을 개별적으로 찾아서 목숨을 빼앗으려 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애초에 <해동감결>을 소유하고 있던 일본내의 명왕교 잔당과 인도 힌두교의 이단교파인 깔끼파에서도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을 동원해서 퇴마사들을 곤경에 처하게 만든다. 거기에 '홍수편'에서 등장했던 대악마 블랙엔젤이 다시 등장해서 퇴마사들을 이러한 곤경에서 구해주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아니 악마가 왜 퇴마사들을 도와주는 것일까? 이런 의문이 들때쯤 '악마의 교묘한 계획'이 번뜩 떠오르게 된다. 바로 퇴마사들이 하려는 '세상의 구원'을 돕는 척하면서, 오히려 세상을 악의 구렁텅이로 내몰기 위한 개수작이란 것을 말이다. 그런데도 퇴마사들은 '악마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빠져들고 만다. 그건 바로 '같은' 인간이지만 생각은 전혀 '다른' 사람들끼리의 풀리지 않는 갈등이 끝내 세상을 파멸로 이끄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악마가 바라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사람들끼리 서로 믿지 못하고 저들끼리 죽자고 서로 싸우길 바라는 것이었다.

이쯤해서 '말세'는 어떻게 실현되는가? 한 번 정리해 봄직하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 현재도 그렇고 인간의 미래를 예측한 '예언가'들은 한결 같이 '종말의 그날'을 언급했다. 가장 유명한 것이 <성경>에서 언급한 '요한묵시록'이고, 이를 바탕으로 노스트라다무스는 '정확한 날짜'까지 언급하며 암울한 미래를 예언했었다. 다행히도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날짜'가 틀린 것으로 확인 되었고, 세기말이 지난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은 어느덧 '말세'를 잊고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정말 말세는 지나간 것일까?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것일까? 만약 온다면 어떤 방식으로 찾아올까? 그리스도교 방식일까? 이슬람교 방식일까? 아님, 불교식이려나? 그것도 아니라면 '사이비종교'에서 말하는 아주 독특한 방식일까?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호사가들은 마치 '예언가의 재림'인듯 저마다 특색 있는 인류 종말의 형태를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하곤 하지만, 일단 어떤 특정 '종교의 방식'대로 말세가 찾아올리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오고 '그분'을 믿는 몇몇 사람들은 구원을 받고 믿지 아니 하는 자들은 영원한 지옥의 구렁텅이에 빠져들 것이라는 묘사는 절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선별적인 구원 방식'이 왜 불가능하냐면 믿고 안 믿고를 무엇으로 '증빙'할 것이냔 말이다. 전지전능한 그분께서는 '불신자'를 구별할 능력이 있다손치더라도, <성경>에도 최후의 순간에 '그분'을 믿는다는 고백만 해도 천국행 티켓(구원)을 주겠노라 했다던데, 굳이 먼저 믿음을 증빙해야 할 까닭이 없지 않느냔 말이다. 그러니 이런 애매한 방법으론 말세를 막을 수도 없고, 말세를 피할 수도 없으니, 종교적 방식의 말세는 몰라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

종교가 아니라면 '도덕적 방식'일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나이드신 어른들은 버릇없는 젊은 세대를 못마땅하게 보면서 '말세'를 언급한다. 이렇게 부도덕한 세상이 도래하면 정말 세상은 망하는 것일까?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수천 년전 '어른'들도 그렇게나 많이 말세를 언급하였지만, 그 시대의 '젊은 세대'들이 아무리 망나니처럼 행동을 해도 세상은 잘만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젊은 세대들이 나이가 들면 또다시 '말세'를 언급하지만, 그 말세 또한 멀쩡하게 잘 돌아갔다.

그럼 말세는 어떻게 찾아올까? 좀 더 현실적인 파멸을 언급하자면 '전쟁'밖에 없을 듯 싶은데, 온세상이 파멸될 듯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20세기에 펼쳐졌지만 세상은 지금도 멀쩡하게 돌아간다. 물론 3차 세계대전을 언급하고 있는 요즘은 쪼큼 걱정되긴 한다. 핵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들끼리 서로서로 쏘아대면 하나뿐인 지구는 어디 하나 성한 데가 없어져 결국 인간은 절멸할 수도 있을테니 진정한 '말세'가 찾아올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도 진정한 말세와는 사뭇 다른 양상일 것이다. 분명 살기 힘든 세상이 되긴 하겠지만 '전쟁의 상처'는 언제나 극복하곤 했다. 지난 역사를 보면 자명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럼 진정한 말세는 어떻게 찾아오는가? 그건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는 세상이 찾아오면 말세는 자연스럽게 진행될 것이다. 신 따위를 믿고 안 믿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인간을 믿지 못해 '절대적인 존재'에 의지하기 위해서 신(종교)을 찾는 거라면 그게 바로 '말세의 시작'인 셈이다. 사람은 사람과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다. 그런데 사람을 '절대'적으로 믿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면서 인간은 '종교'를 만들었고 절대적인 신의 존재를 믿으면서 그 신의 말씀(뜻)만을 쫓는 행위를 통해서 위안을 얻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종교의 테두리 안에서는 절대로 싸움이 일어나선 안 된다. 그런 종교의 신이 하신 말씀 가운데 '서로 싸워도 좋다'는 말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종교전쟁 따위가 발생하는 것일까? 도대체 어느 신(절대자)이 사람을 죽여도 좋다고 말씀하였나? 결론만 말하면, 그런 종교도 없고, 그런 말씀도 없다. 오직 사랑하고, 자애하고, 자비로워 지라고 말씀하셨을 뿐이다. 그럼에도 서로 죽고 죽이는 끔찍한 일이 발생했을 때에는 용서하고, 또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 그것만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고, 그런 세상이 곧 '천국(파라다이스)'이라고 일컫었다. 그러니 종교의 이름으로 전쟁도 불사하는 이가 있다면 '그'야말로 완전한 '불신자'임에 틀림없다. 그렇기에 말세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면 절대 찾아올리 없다. 이것이 팩트다.

그러나 세상을 파멸로 이끄는 원인이 꼭 발생하곤 한다. 우리는 그를 '파멸자'라고 부른다. 누가 파멸자인지, 언제 어디서 태어나는지 알지 못하고, 스스로도 자신이 파멸자인지 깨닫지 못하나, 때가 되면 그 '파멸자'가 누구인지 확연히 알게 된다. 이 책 <퇴마록>은 바로 그러한 때를 '말세'라고 가리켰다. 그리고 그 파멸자가 언제, 어디서 등장하는지 <해동감결>에 고스란히 적혀 있고, 그때가 곧 임박할 것이라고도 정확히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파멸의 날은 고작 40여일 밖에 남지 않았단다. 그런데 독사에게 물렸을 때, 그 독을 해독할 수 있는 풀이 근처에 있다는 격언처럼 '파멸자'가 말세의 카운트다운을 시작함과 동시에 그 파멸자로부터 세상을 구해낼 '구원자'도 나타난다고 한다. 이 구원자, 또한 누구인지 아무도 알 수 없으며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다고 한다. 이렇게 아무 것도 정해진 것이 없이 이야기는 진행되지만 분명한 것은 '말세'가 곧 찾아온다는 사실 뿐이다. 과연 퇴마사들의 행보는 어떻게 이어질 것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포그래픽, 셜록 - 그래픽으로 읽는 셜록 홈스 인포그래픽 시리즈
비브 크루트 지음, 문지혁 옮김 / 큐리어스(Qrious) / 2019년 1월
평점 :
절판


[My Review MDCCCLXIX / 큐리어스 2번째 리뷰] 인포그래픽(infographics)는 '인포메이션 그래픽'의 줄임말이란다. 정보를 '시각화'하여 빠르게 인지할 수 있게 해주는, 한마디로 '한 눈에 쉽게 알아보게' 하는 그림 기술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그래서 인포그래픽 기법은 여러 방면에서 '쓰임새'가 확장되는 편인 듯 싶다. 그러나 '만들기'는 어려운데 '쓰임새'는 그리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지 않는 느낌도 들곤 한다. 왜냐면 '쉬워 보이는 것'들의 수명기간이 그리 길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쉽다 못해 너무 가벼운 듯하게 만들면 만든 수고에 비해 '가치 비중'을 낮게 평가받기 십상일 듯 싶기 때문이다.

거두 절미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서, 작가 코난 도일과 그가 창조한 명탐정 셜록 홈즈의 문학적 평가를 쉽게 내릴 수 있겠느냔 말이다. 전세계 수많은 '셜로키언(또는 홈지언)'이라는 열광적인 팬을 존재하는데, <셜록 홈즈>의 시리즈 하나하나에 품평을 내리는 것조차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광적이고 두터운 팬층을 19세기부터 21세기까지 150년이 훌쩍 넘는 시공간을 꿰뚫는 '셜록 홈즈'의 명성을 가볍게(?)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수많은 팬층을 만족(?)시키고자 만들어진 '인포그래픽'이 결코 쉽게 만들어질리도 만무하다. 그런데 말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명탐정 셜록 홈즈'에 대한 명성이 바로 이해되고 덩달아서 '셜로키언'에 합류하게 될까? 그건 아니다. 이 책은 그리 매력적인 모습을 선보여주지 못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그건 우리가 '셜록 홈즈'에게 바라는 것은 명쾌한 추리를 통한 '감탄'이지, 그가 추리해낸 사건에 대한 총괄적인 '정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에서 얻은 정보가 무익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단순한 '정보의 나열'이 아닌 '명탐정'이란 수식어가 허투루 쓰인 것이 아니었다는 '가치'를 논하는 담론을 읽고 싶었다. 아니면 셜록 홈즈의 사건 추리 과정에서 일반독자라면 '당연히' 놓치고, 열렬한 광팬만이어야만 찾을 수 있는 '숨겨진' 뒷이야기가 궁금했단 말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그런 '감탄'스런 대목이 별로 없었다.

벌써 12월이다.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올해 계획했지만 미처 다 읽지 못한 책들 가운데 아쉬운 한 가지를 꼽자면, '추리소설'이었다. 그래서 내년엔 '애거사 크리스티'와 더불어 '코난 도일'과 '모리스 르 블랑'의 책들을 섭렵할 원대한(!) 계획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래서 우연히 발견한 이 책에 큰 기대를 품었는데, 읽자마자 아쉬움이 밀려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내가 기대한 것은 혹시라도 내가 읽지 못하고 '놓쳐버린 명장면'이었는데 말이다.

그렇지만 '인포그래픽'이라는 장르에 대해서 새삼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생각보다 정보를 더 잘 정리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제 연말이 되니 '온라인 서점'에서 한 해 동안 '책구매'한 내역과 '리뷰'한 기록이 바로 이런 '인포그래픽' 방식으로 정리될 것이다. 이때 부끄럽지 않은 기록이 되고자 매년 200편이 넘는 리뷰를 쓰고, 300권이 넘는 책을 읽어댔는데, 이제는 좀 유의미한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라도 닥치는대로 읽고 쓰는 습관보다 파고 드는 집요한(?) 면모를 선보여야 할 것 같다. 그래야 남은 내 인생도 부끄럽지 않을 것 같고, '내가 남긴 기록'이 좀 더 유의미해질 것 같다. 이제 넓힐 만큼 넓혔으니 이제부턴 '집중'이다. 그 집중할 수 있는 방법을 이 책에서 귀띔 받은 것 같아 기분이 상쾌한 면도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딸에게 들려주는 경제 이야기 - 평등한 세상으로 향하는 진실의 발걸음
야니스 바루파키스 지음, 정재윤 옮김, 임승수 해제 / 롤러코스터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DCCCLXVIII / 롤러코스터 1번째 리뷰] 이 책은 그리스의 전(前) 재무장관이었던 야니스 바루파키스가 쓴 청소년을 위한 경제책이다. 하지만 나는 '청소년'과 '어린이'를 딱히 구분하지 않으련다. 왜냐면 0세부터 19세까지 '미성년'에 해당하는 아이들의 눈높이는 절대로 '일률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독서수준'을 고려해서 책읽기를 권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수준은 절대로 '남'이 결정할 일이 아닌 '어린이',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할 일이다. 그러니 책의 리뷰를 전하는 처지에서 따로 구분할 필요는 없고, 읽는 이가 스스로 판단해서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서 '초중고'로 따로 구분하지 않았음을 밝힌다. 다만 이 책은 '독서수준'이 조금 높은 어린이가 읽기에 좋은 책이라는 것만 알려주고 싶다. 조기 경제교육 붐이 일고 있는 지금 중·고등학생이 읽기에 적합한 책이라 여겨지는 책이라도 초등생도 얼마든지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책이 많기 때문이다. 이 책 또한 그렇다.

이 책은 두 개의 경제체제를 서로 비교분석하며 미래세대의 주역인 '어린이'들이 직접 어느 경제체제가 자신들에게 유리하고, 자신들이 살아갈 사회에 유익한지 생각해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그렇기에 어린 독자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경제학개론'에나 어울릴 만한 딱딱한 경제용어나 풀이로 쓰여지지 않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재미난 이야기와 봤음직한 <영화>의 줄거리를 소재로 삼아 두 가지 경제체제의 원리를 소개하였다. 두 가지 경제체제란 다름 아닌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말한다. 물론 경제학적인 용어로는 사회주의보다 '공산주의'로 표현하는 것이 더 적합하겠지만, 여기서는 스웨덴이나 덴마크처럼 '북유럽 복지국가의 경제형태'에 걸맞게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라는 표현을 썼다. 그리고 최근 그리스 경제상황이 별로 좋지 않은 관계로 '자본주의'보다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조금 더 바람직한 경제체제인 듯한 인상으로 경제학을 풀어낸 책이라는 것도 밝혀둔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미래세대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나쁜 경제체제란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글쓴이는 '경제체제, 그 자체'는 좋고 나쁜 것을 가릴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면 어느 쪽 경제체제든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런 경제체제속에서 살아가는 구성원들이 어떤 식으로 운영해나가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려줄 뿐이다. 그럼에도 그리스 전 재무장관 출신인 탓에 '자본주의'로 살아본 경험이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대목이 참 많이 나온다. 그러면서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장점을 살렸더라면 그리스의 현실 경제상황이 이렇게까지 나빠지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는 여운을 남기는 것으로 마무리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다름 아닌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양쪽 모두에 장단점이 갖춰져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미래세대의 주역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완성하고서 자신들에게 적합한 '경제체제'를 완성해나가는 것이 한 나라의 경제질서를 바로 잡는 일이란 것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면서 말이다. 안타깝게도 현재의 그리스 경제상황은 썩을대로 썩어버린 정치세력들이 집권을 하며 그리스의 경제를 좀 먹고 그리스 젊은 세대들의 미래마저 암울하게 만들고 있지만, 이런 어려운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바로 '어린 세대'에게 있음을 당부하고 있다. 부디 어린 세대들은 올바른 '선택'으로 현재의 어른들이 저지른 어리석은 짓을 되풀이 하지 말라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바로 '불평등'이다. 빈부격차가 극심해지면 자본주의는 순기능이 마비가 되고 온갖 사회문제는 점점 심화되고 해소되는 일이 사라지게 되어 버린다. 이럴 때 가장 필요한 수단이 바로 '부자'들에게 쏠린 부를 '빈자'에게 되돌려 줄 수 있는 수단을 적절하고 효과적으로 써먹어야 하는데, 자본주의의 폐해가 심각해지면 가장 먼저 '정경유착'이 발생해서 부패한 정치인이 장악한 권력으로 부당한 경제수단을 연이어 악용하면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더욱 부추길 뿐이니 한 나라의 경제가 망가지는 일은 순식간이고 절대불변이라는 얘기다.

그러면 사회주의 경제체제는 이러한 자본주의의 폐해를 애초에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란 말인가? 꼭 그렇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가능성이 있다고 단언한다. 왜냐면 사회주의 경제체제는 애초에 '빈부격차'를 방지할 수 있는 '부의 평등'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은 '한정된 자원'의 낭비를 애초에 막을 수 있다는 점이다. 왜냐면 꼭 필요한 물건만큼만 생산하면 그뿐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처럼 우리의 하나 뿐인 지구환경을 황폐하게 만드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장점만 있다면 어느 국가가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택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사회주의 경제체제에도 단점은 있다. 바로 '정치세력', 다시 말해 국가의 권력을 쥐고 있는 정치인들이 '절대 부패'하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착한(?) 정치인들이 욕심(?)으로 가득한 경제인들의 경제활동에 적절히 개입하고 부의 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공평무사한 정책만을 실행할 수 있도록 국민들 하나하나가 올바르고 공정한 시민의식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필요조건', 또한 충족시켜야만 한다. 이걸 어느 정도 실현한 국가들이 바로 '북유럽의 복지국가들'이고 말이다. 그러니 절대 실현불가한 이야기는 아니란 말이다.

그러나 한 번 정국이 불안정해진 나라에서 이러한 선진적인 시민의식이 발현하고, 그 싹이 터서 성숙한 민주질서를 갖추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일이 걸리고, 피를 부르는 혁명이 자행되겠는가 말이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이 바로 '경제발전'이라는 사실은 이미 '대한민국'이 증명한 팩트다. 그런 대한민국조차 '경제발전'과 '민주발전'을 이루기까지 지난하고 복잡한 일들이 벌어졌으며,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강요받아야만 했는지...그 어려운 일을 실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잘 알 것이다. 그렇기에 미래세대의 주역이 깨우쳐야만 한다는 것이다. 현실이 암울하다고 '가상현실'로 도망가서 허상의 행복만을 누리려는 나약한 마음을 갖지 말고, 나쁜 현실을 깨뜨리고 나쁜 고리를 끊어나가 궁극적으로 '밝고 희망찬 미래'를 위해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좋은 것이 어떤 것인지는 금세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좋은 것을 '갖추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다. 애초부터 좋은 것을 가지고 있다면 아주 좋은 사회이겠지만, 좋은 것을 갖추지 못한 사회에 살고 있다면 '남 다른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노오오오력'을 해서 그 좋은 것을 가질 수 있는 사회라면 아주는 아니어도 좋은 사회일 것이다. 문제는 아무리 노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력을 해도 좋은 것을 갖출 수 없는 '희망 없는 사회'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잘 살 수 있는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새로운 희망을 찾아 '다른 사회'로 떠나는 방법도 있겠지만, 글쓴이는 희망 없는 사회속에서 '희망을 찾으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이런 불가능에 가까운 주장을 하는지 다음의 설명을 들으면 금세 이해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하나 뿐인 지구'가 망가졌다고 '또 다른 지구'를 찾아나설 생각인가?"

이 책의 핵심 주제는 바로 이것이다. 아무리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불평등이 만연한 회생불가능한 국가일지라도 '희망'을 버려선 안 된다는 말이다. 지금 당장은 힘들고 괴로움 속에서 신음하는 일밖에 할 일이 없을 것처럼 보일지라도 한 가닥 희망을 보여준다면 기꺼이 그 희망을 따라 나설 의향이 있다고 말이다. 2차 세계대전 독일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도 희망이 없어보였다. 나치 독일군을 쳐부술 소련군(해방군)이 자신들이 위치한 곳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이 간간히 들리곤 했지만, 현실은 달라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닥 희망이 샘솟자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지가 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이루어졌다. 만약 그 의지가 없었다면 희망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련군에게 해방되었다고 희망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나치주의가 지나간 자리에 공산주의가 시뻘겋게 타올라 희망을 짓밟았기 때문이다. 아직 진정한 희망이 다가오지 못한 까닭이다. 만약 거기서 굴복하고 희망을 의심하며 '좋은 삶'을 포기한다면 그냥 끝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 희망이 '자본주의'인지, '사회주의'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좋은 것', 내게 '꼭 알맞는 것'이라는 점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두 가지 경제체제의 장단점을 깨우쳐 스스로 선택하고 '실현'시키는 방법밖에 없다. 나에게만 '좋은 것'이 아닌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좋은 경제체제'가 무엇일지 진지하게 고민해봄직하지 않은가. 이 책은 우리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