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DCCCXCII / 창비 8번째 리뷰] 지난해 대한민국 첫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한강'이 지목되었을 때 소름이 돋았다. 그동안 여러 한국소설가들이 노벨문학상이 거론되었을 때 '박경리'를 제외하고 그닥 탐탁스럽지 않았는데, 몇 년 전부터 '한강'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국사람은 노벨상 못 타잖아"라는 자조 섞인 말들이 나뒹둘던 시절이었던 터라 해마다 노벨상 수상이 다가오면 으레 다른 외국인을 점치곤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난 꿋꿋하게 한국소설가들을 클릭하곤 했다. 박경리, 고은, 이문열, 황석영, 그리고 지난해엔 '한강'을 클릭했다. 그리고 한강이 수상을 하자 나는 부리나케 미처 구입하지 못했던 한강의 책들을 사모으기 시작했다. 늦게나마 열열한 응원을 하기 위해서였고, '대한민국 최초의 노벨수상자'에 걸맞게 존경의 의미를 담아 내 책꽂이에 영광을 심어두기 위해서였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분들이 많았나보다. 주문한 책은 3주가 넘어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사모으기 시작한 한강의 책들을 리뷰하고자 한다.

한강 리뷰 첫 소설은 <소년이 온다>다. 다들 아시다시피 1980년 '서울의 봄' 이후 전두환 정권은 군부세력을 앞세워 무단통치를 시작했고, 전국의 시위대들을 무차별적으로 폭력 진압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광주'는 달랐다. 왜 하필 광주였는가? 라는 질문은 사절한다. 그 어떤 폭력도 용납할 순 없기 때문이다. 살인마 전두환의 광기가 남다른 것은 유독 광주에서만 일어난 것도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암튼 '그 날, 광주'는 달랐다. 살인마는 '본보기'가 필요하다 느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날, 광주에서는 '살인마의 교과서'라고 보여줄 정도로 잔혹하게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사람을 '처리'한다는 것부터 전두환이 사람이길 포기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제목에서 언급한 소년은 '동호'라는 열여섯 살 중학생을 가리킨다. 살인마는 그렇게 어린 소년에게도 무자비했다. 그 소년이 왜 그곳, 하필이면 그날에 '전남도청'에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한 집에 세들어 살던 친구 정대를 찾기 위해서란다. 시위 현장에서 계엄군이 쏜 총탄에 친구가 맞고 쓰러지는 것을 보고 시신을 한데 모아놓은 그곳으로 갔다가 찾지 못하고, 그날밤 시민군에 합류해서 최후를 함께 맞게 된다. 하지만 시민군이 한 발의 총알도 쏘지 않던 그날, 동호는 계엄군이 쏜 총에 형과 누나 들이 맞아 죽는 걸 목격한다. 그리고 계엄군에게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한다. 그리고 운(?) 좋게 풀려났지만...뒤엣말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이 소설에서는 특히 '고문 장면'이 노골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전두환 정권의 광기는 시간을 거슬러 '박정희 정권', '이승만 정권', 그리고 '일제식민통치' 아래 무참히 짓눌렸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유린했던 그 광기를 연상케 한다. 그럼으로써 '광주의 시민들'은 자연스레 저항의 상징이 되었고, 자유의 수호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이 특별해서 그런 것일까? 아니다. 그들은 지극히 '평범'했다. 지극히 '정상'이었다. 평화롭고 평온한 나날들이 이어지는 시절에 살았다면 아무런 특징도 의의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평범한 시민들이었을 뿐이다. 일제식민시절의 독립운동가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특별한 분들이 아니다. 그런데 '비정상'인 놈들이 판을 치는 어지러운 시대가 되자 '특별한' 사람이 되었다. 왜냐면 그들은 '불굴의 의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의를 지키고 자유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저항'을 몸소 실천한 것일 뿐이다. 그들은 절대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왜 이 미치광이들은 이토록 정상적인 사람들을 두려워해서 무참히 짓밟았을까? 전두환도 그랬고, 박정희도 그랬으며, 이승만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군국주의에 미쳐돌아간 제국주의자들도 '정상적인 사람'을 지극히 싫어했다. 왜? '정상'이 아닌 사람들의 특은 바로 '비정상'을 당연시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비상식'적인 사고방식으로 '자신이 소유한 힘'을 과시하면 과시할수록 모든 사람들이 벌벌 떨며 괴력의 소유자인 자신들 앞에 굴복할 것이라는 망상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폭력'을 사용하면서도 '죄책감'이란 것을 전혀 생각지 못한다. 마치 원시사회의 부족장스러운 낡은 사고방식에 빠진 것이다. 이런 미치광이들은 그래서 '전쟁광'이라 불릴 정도로 살육을 즐긴다. 우리가 '전쟁영웅'을 영웅시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이다. 그들이 저지른 살인행위에 '정당성'이 없다면, 하다못해 '필요성'조차 갖추지 못했다면, 단순한 미치광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 미치광이를 영웅으로 우러러보는 사회나 국가는 또다시 그런 '미친짓'을 반복하기 마련이다.

그런 우려가 대한민국에 다시 벌어지지 않았느냔 말이다. 2024년 대한민국에 '비상계엄선언'이 웬말이냐. 이는 단 한사람의 우발적인 명령이 아닌 '미치광이' 대통령과 군관계자, 그리고 행정각료와 집권여당이 오랜 기간 조직적으로 짜서고 벌인 '계획적인 내란범죄'였다는 것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그리고 내란수괴의 머릿속에는 자신의 생각에 동조하지 않는 모든 이들을 '반국가단체'로 싸잡아서 처단할 것이라 목소리를 높였고 말이다. 과거의 망령이 다시 살아돌아오기라도 했단 말인가? 실제로 계엄군을 이끌었던 군관계자들의 집무실에 '전두환 사진'이 걸려있었고, 그들에게는 '자랑스런 선배'이자 '지도자'였다는 것이 구설로 오른 지도 꽤 되었다. 하긴 윤석열 정권 초기에 육군사관학교에서 '홍범도 흉상'을 없애려는 시도가 있었던 기억이 새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일제식민시절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독립군 대장 홍범도가 '그들'에게 왜 눈엣가시가 되었는지 이제는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이 책이 쓰여진 때가 2014년 박근혜 정권 시절이다. 그리고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해가 2024년이다. 지난 10년간 우리는 달라진 것이 없게 된 셈이다. 이제 곧 윤석열 정권도 탄핵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뼈저린 반성을 하지 않으면 '제3의 탄핵정국'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소설가 한강이 지적한 우리 시대의 아픈 곳을 우리는 이제 더는 외면하면 안 된다. 통증은 피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마취제나 진정제로는 잠깐의 통증만 느끼지 못하게 할 뿐이다. 아픈 상처는 도려내고 깨끗하게 소독한 뒤에 깔끔하게 봉합을 해야 '새살'이 돋아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에 쓰여진 끔찍한 고문묘사는 우리 시대의 '아픈 상처'다. 그 아픔을 딛고 일어서야 진정한 극복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두 번 다시 '비상계엄'이라는 끔찍한 악몽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면,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직시하고 진심으로 해결하려 노력해야 한다. 유일한 해결방법은 '극복'이다. 무거운 죄책감에 짓눌려 살거나 마땅히 받아야 할 죄를 피하려고만 한다면, 또 우리 국민들이 그런 '죄인'을 눈감아주고 어설프게 관용으로 엮어 슬그머니 풀어준다면 우리는 또 어려움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또 '그날의 광주'를 다시 되풀이 해야겠는가? 우리가 또 '망국의 설움'을 당해봐야 속이 시원하겠는가? 모든 것을 다 잃고서 땅을 치고 후회해봐야 늦는다. 이제라도 우리가 짊어진 '과거의 망령'에서 속히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끔찍한 과거일망정 '마주 서기'를 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당시에 지은 죄가 있다면 이제라도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한다. 모든 죄에는 '공소시효'가 불성립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오직 처절한 반성만이 유일한 면죄부임을 우리 모두 명심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탁류 베스트셀러 한국문학선
채만식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1년 9월
평점 :
품절


[My Review MDCCCXCI / 소담출판사 5번째 리뷰] 채만식의 소설 <탁류>는 <태평천하>와 더불어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졌다. 1937년 10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되었고, 39년에는 '박문서관'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고 한다. 이 소설은 1930년대 일제식민지의 피폐한 하층민의 삶을 깊숙이 조명하며 '한 여인의 비극적 수난사'를 줄거리로 삼았다. 그러면서 '한 여인의 비극'이 일어나게 된 배경이 개인의 문제인지, 아니면 사회의 문제인지를 따져 묻고 있다. 그래서 책 제목도 '탁류'다. 이 말의 사전적 의미는 두 가지다. 하나는 '어지럽게 흘러가는 흙탕물, 또는 그런 흐름'이고, 또 하나는 '무뢰한의 무리'라는 뜻이다. 덧붙여서 '무뢰한'의 뜻은 성품이 막되어 예의나 염치를 모르며, 일정한 소속이나 직업이 없이 불량한 짓을 하며 돌아다니는 사람을 일컫는다. 비슷한 말로 '건달', '쓰레기', '야만인'을 꼽고 있다. 그렇다면 1930년대 일제식민지 상황에서 한 여인이 살인을 저지른 사건이 일어났다면, 그것이 과연 어떤 문제 때문에 일어난 것이겠냐는 물음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 초봉이는 가난한 정주사의 딸이다. 성품이 착하고 예쁜 미모를 갖춘 스물한 살의 처녀다. 그런데 그녀를 둘러싼 남자들이 너무 많다. 먼저 남승재란 인물이다. 의사의 조수로 일을 하고 있는데 번듯한 생김새로 초봉이 은근히 맘에 두고 있는 남자다. 고태수란 남자도 있다. 은행원으로 일을 하고 있어 돈푼 깨나 지나고 있어 초봉이 아버지의 맘에 들어 초봉이를 태수에게 시집을 보낸다. 하지만 그는 타락한 인물이다. 초봉이라는 예쁜 아내가 있는데도 다른 유부녀와 바람을 피우다 타살을 당한다. 여기에 곱사등이 장형보가 등장한다. 초봉이 남편인 고태수가 타살을 당하던 날, 장형보는 초봉이를 강간한다. 이런 참변을 당한 초봉이는 결국 군산을 떠나고 만다. 한편, 아버지 정주사의 친구인 박제호도 있다. 그는 친구의 딸, 초봉이에게 일자리를 주는 등 호의(?)를 베풀기도 했지만, 슬하에 자식이 없던 차에 예쁜 초봉이를 유혹해서 몸을 탐하고 동거를 하기에 이른다. 그러던 어느 날, 장형보가 다시 나타나 협박을 받자 박제호는 초봉이를 가차없이 버리고 만다. 그렇게 장형보와 함께 살다, 그의 자식도 낳았지만 고통스런 삶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러다 증오의 대상밖에 아무 것도 아닌 장형보를 살해하고 초봉이는 자수를 한다.

어쩌면 일일연속극에서 많이 보던 '통속적인 신파극'으로 보이기도 한다. 한 많은 여인의 굴곡진 삶을 통해서 '비슷한 처지'에 있던 수많은 여인들의 치맛자락을 눈물로 흠뻑 젖게 만들던 전형적인 스토리로 볼 수도 있다. 그럼 비극적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 많은 여인의 삶을 지켜보면서 함께 울어주는 것밖에 할 수 없는 것일까? 21세기 독자들에게는 어림도 없는 소리일 것이다. 일단, 초봉이를 지켜줘야 마땅한 아버지는 왜 '남승제'가 아니라 '고태수'랑 혼인을 강요했는지 따지지 않을 수 없다. 가난한 아버지는 아내와 네 남매를 먹어 살릴 능력이 없는 가장이었다. 이를 스스로 통감하고 부지런히 일을 하고 돈을 많이 벌어올 생각을 해야 마땅하거늘, 정주사는 첫 딸을 돈 많은 사윗감에게 시집을 보내서 '한 밑천'을 두둑히 챙길 생각만 하고 있다. 그래서 가난한 승제가 아닌 부유한 태수를 사위로 점찍고 초봉이에게 혼인을 강제, 명령하고 만다. 천성이 착하고 효심 깊은 초봉이에게 '아버지의 명령'은 거역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결정이 자신의 딸의 운명을 지옥구덩이로 밀어넣는 '지옥문'이었다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초봉이의 남편인 고태수는 타락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정주사가 '돈'만 밝힌 것이 아니라 '성품'까지 고려해서 자기 딸의 혼인상대를 고르는 정상적인 인물이었다면 초봉이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다.

허나 이는 1930년대 일제식민지 상태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장 먹고 사는 일을 해결하지 못하는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정주사가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당시 사회분위기는 무슨 짓을 하던 돈푼 깨나 펑펑 쓰며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것이 제일로 치던 때였다. 이런 짓을 위해서라면 '나라도 팔아먹던 시절'인데 뭘 더 바라겠느냔 말이다. 이런 도덕적 해이가 판을 치던 시기에 정주사 홀로 '독야청청' 살아봐야 남산골 샌님 꼴을 면치 못할 것이 뻔하다. 그러니 정주사의 결정은 당시 혼탁한 사회분위기에서는 당연한 귀결이었고, 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문제'에서 비롯된 비극인 셈이다. 다시 말해서, 일제식민지가 아닌 다른 시대였다면 초봉이의 운명은 또 달라졌을 것이다.

채만식의 <탁류>는 이러한 두 가지 문제의 대립적 시각으로 비판적인 읽기가 가능하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채만식은 <탁류>를 통해서 1930년대 조선식민지 사회를 지극히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온통 타락한 사람들, 위선적인 사회분위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음모를 횡행하고 살인을 저지르는 악한 사회의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이를 통해서 채만식은 일제의 식민통치를 소설이라는 도구로 '간접적으로 비난'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해방이 된 뒤에 유일하게 과거 일제에 협력했던 지식인으로서 통절한 반성을 표했던 유일한 소설가라는 점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래서 <탁류>는 오늘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는 혼탁하게 불투명한 흐름을 보일지라도 그 물이 더럽고 어지러운 '부정적인' 모든 것들을 싹쓸어버리고 나면 '미래'에는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를 것을 확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탁류'가 흐른 뒤에는 '청류'가 뒤따르는 법이다. 부디 대한민국의 미래에는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는 '청류'가 따르길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삼국지 원전 완역판 10 : 오장원
요시카와 에이지 엮음, 바른번역 옮김, 나관중 원작 / 코너스톤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DCCCXC / 코너스톤 11번째 리뷰] <삼국지> '완역판'이 대미를 장식했다. 부제목이 '오장원'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제갈공명의 죽음'으로 나관중이 지은 '삼국지연의'의 이야기를 마무리한 것이다. 사실 공명의 죽음 이후에도 촉한은 30여 년간 역사를 이어갔다. 그리고 '삼국지연의'에도 그 지난한 촉한이 망해가는 과정을 다 보여주었고, 뒤이어 3년 뒤에 대위가 망하고 '사마씨 중의 사마염'이 진(晉)나라를 세우는 과정까지 세세히 이어나간다. 분량상으로 보면 10권 가운데 6권쯤에 공명이 사망하고 나머지 4권에서는 진나라 건국까지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러나 사실상 <삼국지>는 유관장 삼형제가 진짜 주인공이고, 이들을 뺀 나머지는 '조연'에 불과하다. 그래서 유비가 죽게 되는 '이릉전투의 패전'으로 사실상 <삼국지>를 읽는 재미는 끝장났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나마 '제갈량의 출사표'가 던져진 이후에 위촉 사이에서 공방전이 벌이는 것이 나름 흥미로울 뿐, 동오의 손권 진영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그야말로 흥미를 잃은 변방 취급 당하기 일쑤다.

그럼에도 <삼국지>를 필독으로 삼아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사실 이 책을 처음 읽고 리뷰할 때부터 던진 질문이었는데, 한(漢)나라의 패망이라는 관점에서 풀어내볼까 한다. 항우와 유방의 대결이었던 <초한지>에서 유방이 승리를 거두고 '한나라'를 세웠을 때만해도 대세는 한나라에 있었다. 진(秦)나라가 2대에 걸려 비교적 서두른 멸망에 이른 것도 대세가 한나라에 있었기 때문이다. 진시황과 달리 유방은 '유교'를 전반에 내세웠다. 법치사상이 진나라의 국력을 빠르고 탄탄하게 만들어준 것은 사실이지만, 너무나도 융통성이 없는 '법치'에 사람들은 숨 쉴 구멍조차 없는 갑갑함을 느꼈을 터이기 때문이다. 이에 한고조 유방은 유교에서 내세우는 '덕치'를 기본으로 나라의 기틀을 삼았다. 그리고 이는 백성들에게 살아갈 원천이자 태평성대의 탄탄한 기초가 되었다.

허나 '덕치'도 시일이 지나자 느슨해진 팬티 고무줄마냥 줄줄 흘러내리는 망조가 들기 시작했다. 한나라가 '전한'과 '후한'으로 나뉜 까닭도 바로 그런 망조가 들자 한 번 망했다가 다시 되살려낸 역사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번 죽었다 다시 살아났으면 더욱더 깊이 반성하고 나라를 잘 이끌어나갔어야 하는데, 한 번 망조가 든 원인을 싹 도려내는 개혁을 차일피일 미루자 끝내 '십상시의 반란'과 같은 국정 혼란을 야기한 것이다. 십상시가 누구인가? 국정을 농단하고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리고 나라가 망하든 말든 제 이익만 챙기면 그뿐이라는 파렴치한 놈들의 대명사가 아니던가 말이다. 국정이 문란해지자 백성들을 살길이 막막했고, 끝내 '황건적'이 되어 전국에 도적떼가 들끓게 되었다. 이런 혼란을 타개하고자 각지에서 영웅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삼국지> 이야기의 시작점이다.

이렇게 한나라는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오로지 '힘'을 가진 자가 '권력'을 쥐는 패왕의 시대가 열렸다. 그리고 그런 패왕들은 한결같이 '도덕이 밥 먹여주냐!'를 외치며 불의를 쉬이 저지르며 제 이익을 챙길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서슴지 않는 파렴치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영웅들 가운데 한나라의 후예를 자처하며 '덕치'를 주장하는 세력이 등장했다. 그가 바로 훗날 서촉의 황제 지위에 오르는 '현덕 유비'다. 비록 경제의 후손을 자처하지만 시골구석에서 돗자리나 누벼서 팔아 근근히 먹고 살던 촌부에 지나지 않던 이가 '관우와 장비, 그리고 미축과 간옹'이라는 소소한 무리를 이끌고 도덕으로 어지러운 세상을 밝게 비추겠다는 기치를 높이 세운 것이다.

반면에 대위(大魏)를 세운 조조는 어땠나?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이란 점괘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권력찬탈을 호시탐탐 노리는 야심가에 불과했다. 그에게 운빨이 닿자 그는 결국 '위왕'이라는 지위까지 거침없이 올라 난세를 평정한 권세가로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그에겐 '덕치'와 같은 국정철학 같은 것이 없었다. 오로지 '힘'을 과시하며 정적을 제거하고 역적을 숙청하며 무시무시한 권력욕을 유감없이 발휘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서촉과 동오를 제압하고 북위가 천하를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오래가지 못했다. 왜? 힘으로 권력을 잡은 자의 말로는 결국 힘을 잃으면 모든 것을 빼앗길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힘을 빼앗긴 장본인도 자신이 애지중지 키우던 개(사마염)였다. 그리고 그 능력 있는 개가 통치하던 진나라도 오래 가지 못하고 멸망하고 말았다. 동오의 손권은 말할 가치도 없다. 강동의 비옥한 땅에서 누릴만큼 누리다 그대로 주저앉은 꼴이기 때문이다.

다시 촉한으로 돌아가자. 초대 황제였던 유비가 죽자 공명이 그 유훈을 받들어 '한나라의 재건'을 위해 동분서주한다. 애초에 '위촉오 삼국시대'를 만든 것도 그의 아이디어라지 않은가. 이른바 '천하삼분지계'는 젊은 공명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있어왔던 학계(아마도 '사마휘의 제자들')의 중론이었다는 설도 있지만, 어쨌든 이를 실현시킨 것은 '공명의 공로'가 아닐 수 없다. 그가 '초려'에서 나와 유현덕과 손을 잡은 까닭도 바로 한고조가 내세웠던 '덕치'를 바탕으로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 잡겠다는 포부였을 것이다. 그렇게 '도덕이 밥 먹여주냐!'라던 혼란스럽고 파렴치한 세상을 밝게 비추던 빛이 바로 '촉한이 가진 진정한 힘'이었다.

그런데도 그런 촉한의 정당성이 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일까? 바로 구심점이 될 '리더의 부재'와 위업을 달성할 원동력인 '인재의 부족' 탓이었다. 실제로 유관장이 차례대로 죽자 촉땅으로 들어갈 당시만해도 위풍당당했던 유비의 장수와 책사들은 하나둘 사그라들고 만다. 이미 입촉도 하기 전에 '방통'이 죽었고, 촉한에 들어서자 형주를 지키던 관우가, 이에 복수를 가려던 장비가, 복수전을 펼치던 유비가, 황충이 죽었다. 그리고 마초도 허무하게 세상을 달리한다. 이에 공명은 '남만정벌'을 통해 촉한을 안정적으로 만든 뒤에 천하통일을 차근차근 준비하려 했지만, 그의 수명이 그 긴 시간을 허락치 않았다. 더구나 공명은 천하를 통일할 정도의 넉넉한 시간이 없다는 것을 직감하고 만다. 왜냐면 '인재의 부족난'에 허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첫 번째 출사에서부터 '읍참마속'을 하는 등 가뜩이나 부족한 인재난에서 공명은 헤어날 수가 없었다. 반면에 위나라에는 인재가 차고도 넘쳤다. 그나마 잘난 인재는 '사마의, 하나 뿐'이라 할지라도 중간 이상의 평가를 받는 장수와 책사들이 차고 넘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최종적인 승리는 위나라가 거머쥘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촉나라에 인재가 넉넉했더라면 상황은 완전 달라졌을 것이다.

자, 결국 촉한의 멸망으로 '도덕'은 패배하고 말았다. 오로지 자기 이익밖에 모르는 '권력찬탈자'들만이 횡행하는 혼란의 문이 열리고 말았고, 대륙은 또다시 '5대10국'이라는 대혼란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평화와 안정을 바라는 백성들의 열망은 철저히 외면 받으면서 말이다. 우리가 오늘날 <삼국지>를 다시 읽고, 읽어야 하는 까닭은 바로 '도덕'이 땅에 떨어진 세상에서 온 국민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다시금 '도덕'으로 세상을 바로 잡겠다는 정의로운 세력이 들고 일어서는 그 꿈이 실현되길 바라는 염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비록 유교사상은 수천 년전의 낡은 사상일지 몰라도 유교가 내세우는 '인의예지'라는 기본은 한국인의 마음속 깊이 아로 새겨져 있음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에게는 뛰어난 리더십과 더불어서 넓은 아량과 포근한 마음씨로 국가를 잘 다스려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그 밑에서 보좌하는 국무위원들은 뛰어난 행정실무로 대통령을 뒷받침하며, 입법부의 국회의원들은 제 몫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국민들의 복지와 안녕을 위해서 불철주야 해주길 바라며, 사법부의 판사와 검사 들은 그 누구보다 청렴결백하여 사법정의를 실현하는 정의의 사도가 되어주길 바랄 뿐이다. 이를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대한민국 국민들은 '민주주의 교과서'로 불릴 정도로 아름답고 질서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그런데 작금의 대한민국은 '십상시의 난'을 비롯해서 국정을 폭력적으로 쥐고 흔들려는 '동탁의 집권기'와 마찬가지다. 다행히 대한민국 국민들은 현명하고 선량하기 때문에 '황건적'이 될 생각조차 하지 않을 뿐이다. 더구나 '전한'과 '후한'의 예처럼 집권 여당이 되기만 하면 '탄핵정국'으로 국가를 혼란케 만드는 '망조'가 든 정당이 등장했다. 그런데도 염치도 없이 한 번 잡은 권력을 내놓으려하지 않는다. 진짜 나라를 망하게 만들려 작정했나보다. 나라가 망하면 '그들'은 절대 피해를 보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이든 어디든 '돈'을 잔뜩 짊어지고 도망갈 '플랜 B'가 있는 년놈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피해는 대한민국을 끝까지 지키는 '국민들의 몫'이다. 이런 난세에는 영웅이 등장하기 마련이라지만, 21세기 대한민국에는 이름 없는 국민들 하나하나가 모두 영웅들이다. 그 영웅들이 거리를 물들이는 '응원봉'으로 대한민국을 다시 밝힐 것이며, 이를 지켜본 전세계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대한민국 국민의 위대함을 칭송하게 될 것이다. 국격은 '한 사람의 무능'으로 떨어질 수 있지만, 오히려 '수많은 국민들'이 정의로운 세상을 다시 만들어내는 새로운 국격을 뽐내게 될 것이다. 그게 바로 21세기 대한민국이 지닌 진정한 힘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야의 티키타카 경제왕 3 : 우리의 첫 주식 투자 - 어린이 금융 습관 기르기 프로젝트 호야의 티키타카 경제왕 3
주언규 기획, 박종호 그림, 달콤팩토리 글 / 아울북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DCCCLXXXIX / 아울북 22번째 리뷰] 헌옷을 새옷으로 '업사이클'하여 판매하기 시작한 호야와 친구들은 본격적인 사업에 뛰어든다. 그런 과정에서 경쟁관계에 놓인 못된 라이벌에게 사기를 당하는 일이 벌어지는데, 호야와 친구들은 이를 계기로 더욱더 사업을 하는데 있어서 무겁게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사업의 규모를 키우기 위해서는 여러 모로 '주식투자'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과연 호야와 친구들은 올바른 주식 투자방법을 배울 수 있을까?

이 책 <호야의 티키타카 경제왕>은 어린이책치고 굉장히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 좀 더 정확하게 소개하자면 어른들의 전문적인 영역을 '어린이 주인공'을 앞세워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다시 말해, 주인공이 '어린이'인 것을 빼고는 그냥 어른들의 주식투자 이야기와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고도 과연 어린이책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물론 그 내용면에 있어서 상당히 '경제학의 기초'를 다루고 있기에 어린이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청소년이라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내용인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어린이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수준의 내용이 결코 아니라는 점에서 조금 생각해볼 일이다.

다시 돌아와서, 헌옷을 모아다 새로운 옷으로 재디자인하여 상품으로 판매하는 '업사이클 사업'을 과연 초등학생 어린이들이 할 수 있는 사업일지 고민해보잔 말이다. 이 사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유튜브 채널'을 홍보수단으로 사용하고, 이를 전문 편집자가 여러 상품을 비평하는 영상을 찍어서 선보이고, 이를 '간접홍보(PPL)' 마켓팅 차원에서 의류브랜드에서 런칭하여 광고비를 지급하는 형태를 띠고 있는데, 그 수익자가 바로 초등학생이라는 사실이 그닥 실감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이야기인 것은 사실이다. 못한다는 단정을 짓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긴 하지만, 실제로 이를 따라해서 '성공스토리'를 이룰 수 있는 이야기인가 싶을 정도로 수준이 높다는 문제다. 어린이들도 충분히 할 수 있는 '문방구털이' 정도를 사업아이템으로 잡아 각종 학용품의 성능 비교를 하면서 문구제품 비교영상을 제작해서 수익을 창출했다는 이야기 정도였다면 괜찮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말이다.

3권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업사이클 의류 사업'을 주식에 상장해서 본격적인 사업을 진행하려는 모양새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에 앞서 '주식투자의 기본'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루었다. 그런데 '어린이 주식투자'에 사업의 투명성을 눈여겨 보며 앞으로 성장 가능성이 높은지, 낮은지 판단하는 수준을 넘어 투자하기 좋은 기업으로 'ESG 경영체제'를 갖춘 기업을 찾으라는 내용이나, '경제적 희소성'을 판단해서 기업의 미래성장 가능성을 예측하고, 투자하려는 기업의 '재무제표 분석'이 필수라는 등 어린이가 직접 실현하기 어려운 내용을 가르쳐주고 있는 점에서 우려가 된다. 물론 어린이책치고 살짝 난해한 책 정도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그 내용이 '어른들이 주로 읽는 주식투자책'과 별반 차이가 없는 내용이라면 굳이 '어린이책'이라고 차별화를 둘 필요 없었을 것이다. 굳이 '학습만화'라는 형식을 띨 것도 없이 그냥 '교양웹툰'으로 제작해도 됐을 거라는 말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어색함은 바로 이것이다.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학부모와 자녀가 함께 읽을 '유익한 책'이라는 점에 공감할 내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경제학습만화가 쏟아지고 있는 와중에 '차별화 전략'으로 내세울 수 있을 정도의 공감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도 인정한다. 그럼에도 학부모가 겨우 이해할 수준의 난해한 내용을 담아놓은 의도가 과연 훌륭한 전략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좋은 어린이책을 선별하려는 점에서 이 책은 '난이도 조절의 실패'라는 지적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말하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이 경제 심화 학습서'라는 타이틀을 달아주면 더 나은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재미있다'는 수식어는 인정할 수 있겠지만, '쉽다'는 수식어는 곱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뉴필로소퍼 2022 18호 - Vol 18 : 진실이 사라진 시대의 진실 뉴필로소퍼 NewPhilosopher 18
뉴필로소퍼 편집부 엮음 / 바다출판사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DCCCLXXXVIII / 바다출판사 11번째 리뷰] 이 잡지를 다시 명명해야겠다. '우주를 생각한다' 편을 읽고서 과학잡지로 단언했었는데, 논리적인 논거가 담긴 '인문학잡지'로 부르는 것이 적당할 것 같기 때문이다. 편집자가 기고의 내용을 정리하는 경향이 상당히 '논리적인 전개'여서 읽기에 편하고 익숙했던 것이 '과학적인 주제'의 경향에 휩쓸려 그런 판단을 했다. 이번 주제는 '진실'를 다루고 있으니 인문, 사회, 문학까지 다양한 인식적 접근을 보여주며 흥미를 돋우어 주었다.

우리는 진실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고 믿고 있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별로 진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 같다. 이쯤되면 진실은 위협 받는 것이 아닌 '모욕'을 받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날의 세상은 '진실'이 보이지 않는다. 그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실따위가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있을 정도다. 되려 진실보다 '상황', 상황보다 자신의 '믿음 또는 신념'에 따라 행동하길 주저하지 않고 있다. 여기에 부끄러움까지 내던져버리고 있는 실정이다. 정리하면, 진실이 밝혀져도 자신의 믿음을 바꾸려하지 않고, 정황이 명백히 드러나도 한 번 머리속에 새긴 신념을 돌리려하지 않는다. 왜냐면 부끄럼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실이 아닌 거짓을 일삼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도 모르니 반성 따위는 어따 갖다 버렸는지 찾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 이렇게 '진실이 사라져 버린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조지 오웰의 <1984>를 읽어 보았는가? 소설에서 주인공은 '진실'을 조작하는 부서에서 일하고 있다. 하지만 조작을 하더라도 사람들의 '기억'속에 남아 있는 것까지 조작할 수는 없다는 진실에 봉착하고서 자신이 하는 일에 의문을 갖게 된다. 그런데 그게 가능했다. 남아 있는 기록을 '왜곡'을 통해서 엄연한 사실을 그럴 듯한 거짓으로 바꿔치지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남아 있는 진실조차 폭력과 협박을 통해서 그럴 듯한 '새진실'로 세뇌를하는데 성공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런데 문제가 남았다. 이 모든 '조작 사실'을 알고 있는 주인공 자신의 '진실'은 어떻게 조작할 것인가? 그런데 그것도 조작이 가능했다. 바로 '고문'을 통해서다. 한가닥 남은 진실까지 '스스로 부정'하도록 만드는 고문을 통해 주인공은 모든 것에 굴복하고 다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 스스로도 알고 있던 '진실'을 절대 발설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타협하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세상은 온통 '거짓'으로 가득한 모습으로 바뀌어 간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세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과연 이런 세상이 살기 좋은 세상일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진실마저 '통제'가 가능한 세상은 암울할 수밖에 없다. 차라리 아무 것도 모르는 '무지함'이 선사한 행복을 누릴 수는 있어도, 알고 있는 진실을 부정하며 살아가는 삶은 양심이 짓누르는 엄청난 죄책감 때문에라도 하루도 편히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그런 파렴치한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다. 믿기 힘들지만 양심도 팔아버린 냉혈한이 이 땅에 '같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 바로 내란우두머리 '윤석열과 그 일당들'이다.

어제 12월 27일자 뉴스에서 검찰은 그동안의 수사를 바탕으로 '윤석열, 비상계엄선포의 진실'이 밝혀졌다. 야당의 폭정과 국회의 폭거에 행정마비를 우려한 '우발적'인 계엄령 선포가 아니라 지난 3월부터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우원식, 이재명, 한동훈을 비롯한 약 30여 명의 인사들을 일거에 수감시키고 사살, 또는 고문을 통해서 자신의 독재정권을 영구히 완성하겠다는 시나리오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지난 12월 3일 밤에 '감춰진 진실'이 드러나고 만 것이다. 과연 윤석열만 이런 시나리오를 알고 있었을까? 한덕수 국무총리를 비롯한 '국무위원들'도 알았을 것이다. 아무리 늦게 알았어도 '비상계엄'이 선포되던 그 날 그 자리에 있었을 것 아닌가? 그런데도 아무도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는 위원들이 없었다는 것이 '진실'이다. 또한 국민의힘 추경호의원은 비상계엄이 있던 날, 국회의사당이 아닌 여당당사로 자신들의 소속의원들을 불러 모았다. 왜? 윤석열이 '비상계엄 무효'를 선언하지 못하게 국회의사당에 계엄군을 출동시켰고, '발포 명령'까지 내렸다는 사실을 진작에 알고 있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다시 말해, 그날 그 자리에 가면 '죽을 수'도 있으니 가지 말라고 하였다는 정황이 딱 들어맞는 셈이다. 국회로 가는 길이 막혔다는 둥, 당내의 의견이 수렴되지 않았다는 등 여러 가지 변명을 늘어놓고 있지만, 윤석열이 '지시한 사항'을 미리 알고 있지 않았다면 할 수 없었던 일이라는 점은 그때 '한동훈과 친한파의원들'만이 아무 것도 모른채 국회의사당으로 가서 표결에 참여했다는 것이 이런 정황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 또한 앞으로의 수사과정을 통해서 '진실'로 밝혀질 것이 뻔하다.

이렇게 '감출 수 없는 진실'이 드러나는데도 국민의힘은 윤석열을 다시 대통령 자리로 복귀할 수 있는 시나리오를 짜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자기들의 허물인 '내란죄'에는 눈을 감고, 야당 대표인 이재명의 '범죄사실'만 목소리를 높이며 대통령 탄핵이 불발되기만을 바라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을 감출 수 있는 방법이 그것밖에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 '국민의힘'이 얼마나 윤석열과 합을 맞춰 왔는가? 행정부를 견제하는 입법부의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윤석열의 실책'을 지적하고 개선할 수 있는 의지가 전혀 보이질 않았지 않은가 말이다. 오히려 그런 윤석열을 두둔하고 '자기 대통령'이라면서 감싸주기에 앞장 서왔다. 그런 행위들이 대다수의 국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졌는데도, 그짓을 멈출 줄 모른다. 지금 대한민국의 환율이 치솟고, 주가가 폭락하는 등 '대외신인도'를 추락시키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으면서도 그짓이 잘못인줄 모르고 있는듯, 계속 패악질을 하고 있다. 그렇게 윤석열 독재권력을 되찾았다고 쳐도 윤석열 치하의 대한민국이 잘 살 것이라고 보는가? 망하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런데도 자신들의 안위만을 걱정하며 저짓꺼리를 멈출 줄 모르는 '윤석열과 그 일당들'의 행태를 보고 있으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 이재명에게 죄가 있다면 엄벌에 처하면 그뿐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윤석열도 엄벌에 처해야 할 것 아닌가.

이제 '진실의 시간'이 열렸다. 우리가 명심할 것은 '진실, 그자체'가 정의는 아니라는 점이다. 그 진실이 밝혀진 뒤에 따르는 우리의 행동들이 '합당'해야 비로소 정의로울 수 있는 것이다. 진실은 그저 거짓으로 인해 어두워졌던 것을 밝은 곳으로 이동시키는 것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게 '백주대낮' 같은 밝은 곳으로 드러난 진실을 두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정의로울 수 있게 우리 모두 '양심의 촛불'을 밝혀야 한다. 다시 어둠이 찾아오더라도 한 번 밝혀진 진실이 다시 어둠속으로 숨어들거나 감춰지지 않도록 촛불을 밝게 밝혀야 한다. 이번에는 촛불이 '응원봉'으로 바뀌었다. 10대, 20대 여성들을 주축으로 세상이 어두워지자 집에서 가장 밝은 빛을 들고 참여한다는 의의를 밝혔는데, 정말 시의적절했다고 본다.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탄핵정국을 슬기롭게 이겨낸다면 전세계는 다시 한 번 대한민국을 열광적으로 응원하게 될 것이다. 결코 그 반대의 경우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