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세계사 9 - 인류 최악의 전염병과 바이러스 벌거벗은 세계사 9
tvN〈벌거벗은 세계사〉제작팀 기획, 이현희 글, 최호정 그림, 송대섭.장항석 감수 / 아울북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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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LII / 아울북 29번째 리뷰]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인류는 '전염병과 바이러스'에 관한 관심도 부쩍 늘어났고, 새로운 질병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초등학생도 '감염병 대유행'에 대한 지식도 많이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질병에 대해서 '대처방법'까지도 잘 알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다르다. 팬데믹이 지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올해 '독감대유행'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공공장소에선 마스크를 착용해야 하는 에티켓을 잘 지키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기침예절'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잘 지켜지지 않는 장면도 상당히 많이 볼 수 있다. 가뜩이나 '탄핵정국'이라 대규모 집회를 빈번하게 치루고 있는 요즘인데, 자칫 '대규모 감염'이 다시 일어나게 된다면 지난 팬데믹 때와는 달리 속수무책으로 전염을 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는 다시 한 번 '감염경로'를 상기시키고 '마스크와 손씻기' 같은 위생수칙을 지켜나가는 것이 바람직 할 것이다.

그럼 우리는 인류를 위협한 전염병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과거의 사례를 살펴보면 '전염병'이 대유행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 고통을 받다가 죽었다는 기록이 상당히 많다. 고대 로마제국을 멸망에 이르게 한 전염병은 '말라리아'였단다. 이탈리아 반도의 늪지대가 확대되면서 늘어난 인구수를 감당하지 못하고 불결한 지역까지 거주지를 늘려나가는 바람에 모기의 창궐을 방치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넓은 지역으로 전염시켰고, 그로 인해서 로마제국은 인구절감으로 인해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했고, 경제도 위축되면서 끝내 멸망했다고 한다. 물론 말라리아가 직접적인 멸망 원인이 될 수는 없었겠지만, 수많은 원인 가운데 하나로 작용하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단다.

또한, 14세기 중세유럽 인구의 1/3을 사망케 한 전염병은 '흑사병 대유행'이었다. 쥐벼룩이 옮기는 '페스트균'에 의해서 온몸이 타들어가는 듯 '까맣게 죽어가는 병'으로 '블랙 데쓰'로 불리기도 했다. 그래서 이 전염병의 이름이 '흑사병'이다. 이 질병이 유독 중세유럽에서 기승을 부린 까닭은 '소빙하기(14~17세기)'에 접어들어 기근이 만연해서 면역력이 약해진데다가 기독교인들의 풍습(?)으로 '목욕'을 하지 않고, '하수도시설'이 없어 거리거리마다 똥오줌이 가득한 불결한 환경이 한몫 하였고, 전염병의 원인이 '쥐벼룩'이라는 것을 모르고 쥐들(특히, 곰쥐)이 창궐하는 것을 방치했으며, 또한 '호흡기(비말감염)'를 통해서도 감염이 되었는데, 질병에 걸리자 신에게 기도를 드리고 치료를 바란다다면서 '교회와 성당'으로 몰려드는 바람에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감염되었다고 한다. 더구나 '흑사병'은 아침에 걸리면 저녁에 죽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는 질병이라서 여러 모로 '중세유럽인들'에게는 치명적인 감염병이었던 셈이다.

한편,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새로운 감염원인을 파악할 수 있었다. 바로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바이러스'는 있었지만 맨 눈으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작기 때문에 '현미경'이 발명된 이후에야 원인으로 지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첫 시작은 바로 '스페인 독감'이다. 사실 이 독감은 미국 캔자스 주에서 최초로 발병했다. 그렇기에 이름을 굳이 붙이자면 '미국 독감' 또는 '캔자스 독감'이 되어야 할 텐데, 어이 없게도 이 감염병이 대유행하던 시기가 1918년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접어들 때였다. 이 독감의 특성이 초기 증상은 '감기'와 다를 바가 없는데, 갈수록 증상이 심해지다가 온몸이 파랗게 변하는 '청색증'을 보이다 심한 고열과 함께 환자가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독감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미국은 전쟁에 참전했고 '독감'에 걸린 병사를 유럽에 파견해 버렸다. 1차 세계대전은 지독한 '참호전'이 펼쳐졌고, 이 참호는 '불결한 환경'으로 최고봉을 찍을 정도로 악명 높았다. 그래서 미군 병사가 옮긴 '독감 바이러스'는 삽시간에 전 유럽에 퍼져나갔다. 그런데 '전시상황'이었기에 이런 감염병이 돌고 있다는 사실을 각국 정부는 감추고 있었고, 당연히 언론도 보도할 수 없었다. 그런데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았던 '에스파냐(스페인)'에서만 이런 대유행 사실을 최초로 보도하자 전세계는 깜짝 놀라게 되었고, 자국에도 번지고 있는 '독감 대유행'을 스페인 언론을 통해서 보도하기 시작하게 되니, 독감의 명칭을 엉뚱하게도 '스페인 독감'으로 짓게 되었다. 애초에 '스페인'하고 아무런 관련이 없던 '피해 당사국(?)'인데 억울하게 최초로 보도했다는 이유로 그렇게 명명된 것이다. 어쨌든 '스페인 독감'은 전세계 5000만 명이나 사망하게 이른 끔찍한 감염병이었고, 감염원인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조류독감)'이 인간에게까지 전염된 사례로 밝혀지게 되었다.

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90년 뒤, 2009년에 '신종플루'라는 이름으로 다시 유행하게 되는데, 이때는 감염경로가 '조류'에서 '돼지'를 거쳐 '인간'에게 감염되는 사실을 밝혀냈다. 조류독감이 인간에게 곧바로 전파되지는 않았지만, '돼지'를 매개로 해서 새로운 '연결고리'가 생겨나게 된 셈이다. 이런 일을 계속 발견된다.

2014년에는 '에볼라 바이러스'가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최초 발병했는데, '과일박쥐'에게서 '인간'으로 감염된 사례이고, 2003년에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사스'로 대유행했고, 2012년에는 '메르스'로, 2020년에는 '코로나19'로 대유행을 했다. 이는 각각 '사스'가 박쥐-사향고양이-인간에게, '메르스'가 박쥐-낙타-인간에게, '코로나19'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진 않았지만, 아마도 박쥐-천산갑 또는 사향고양이-인간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2003년 '원숭이두창(엠폭스)'으로 알려진 천연두 감염병도 '원숭이-프레리도그-인간'에게 감염전파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렇게 새로운 감염병 대유행은 '인수공통감염'을 기본 매개로 전파되고 있는 것이 문제다. 이를 막기 위해서 감염의 원인인 '야생동물'을 멸종시켜야 하는걸까? 그건 옳지 않은 방법이다. 야생동물을 '인위적인 방법'으로 말살시켜버리면 당장은 살기좋은 세상이 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이는 결국 '생태계 균형'이 파괴되어 생태계의 일부인 '인간의 삶'까지 말살시켜버리는 최악의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니 자연속에서 어우러져 살아갈 궁리를 해야지 자연환경을 훼손하고서는 결코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야생동물'과 밀접한 접촉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걸까?

결국, '인간'이 문제의 원인이라는 각성을 해야 한다. 80억명의 인구가 지구 곳곳의 터전을 독차지하고 있기에 '야생동물'이 살 수 있는 서식지가 자꾸 파괴되어 사라진 탓에 인간과 야생동물의 '접촉'이 늘어나게 된 것이다. 새로운 감염이 발생하지 않도록 '밀접 접촉'을 차단하는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러기 위해선 야생동물이 인간의 활동공간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런데 인간의 탐욕이 '아마존 밀림'을 불태우고 '경작지'로 만들어 경제적 생산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남미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세계적으로 인간은 '야생동물'과 따로, 또 같이 살아갈 궁리가 아니라 '야생동물의 서식지'마저 인간의 터전으로 삼고 경제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가려고만 하고 있으니, 결국은 살 곳을 잃어버린 야생동물은 자꾸만 인간들이 사는 곳으로 넘어오게 되고, 그렇게 '접촉'을 늘려나가다 보니 '인수공통감염 경로'가 활짝 열려 버린 것이다.

이제 인간은 감염병 대유행을 쉴 틈 없이 겪어야만 할 것이다. 다행히 '코로나19 팬데믹'은 잘 넘어갔다. 하지만 머지 않은 시기에 또다시 '새로운 감염병'이 어떤 동물의 감염매개로 삼고 인간에게 질병을 퍼뜨릴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이 살 곳과 야생동물이 살 곳을 '따로' 격리 시킬 방법도 없다. 지구는 딱 하나 뿐이기 때문이다. 지구가 엄청나게 큰데도 인간의 탐욕은 그보다 훨씬 더 크기에 결국 '인수공통감염'이라는 고리를 끊어내고, 인류를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조만간 '인간'이 인수공통감염의 연결고리를 자처해서 야생동물의 멸종을 부추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멸종이 '인간'이 아니라서 참 다행이라고 안심하고 있다가 '생태계 파괴'로 인해 한꺼번에 몰살 당하는 대멸종을 겪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는 멸종 당하는 이유도 알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최후를 맞이할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이라도 '야생동물'이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한다면, 그런 비참한 최후는 막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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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안 나이트 - 천일야화 현대지성 클래식 8
작자 미상 지음, 르네 불 그림, 윤후남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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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LI / 현대지성 11번째 리뷰] 갈랑의 <천일야화>를 완독하면서, 이 책도 함께 읽었더랬다. 제목이 <아라비안 나이트>지만, 앞서 구분했던대로 리처드 버튼의 <천일야화>는 아니다. 아예 '작자미상'으로 소개하며 유럽의 작가에 의해서 새롭게 엮어지기 전에 '아랍 지역에서 구전되던 이야기'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바로 뒤에 '엮은이'에 따라 내용이 바뀌거나 새로운 이야기가 덧붙여지면서 <아라비안 나이트>의 세계는 더욱 풍성해졌다는 말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 '엮은이의 판본'을 참고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책 <아라비안 나이트>는 대단히 점잖은 표현으로 '고전미'를 풍기는 문장으로 엮어진 것으로 보아 '앙투안 갈랑의 판본'을 참고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이 책의 장점은 뭐니뭐니해도 '르네 불'이라는 삽화가의 삽화들이다. [현대지성] 출판본에 대부분의 삽화가 수록되어 있는데, 1900년대 초반에 주로 삽화를 그렸던 터라 많은 분들이 한 번 보면, '아하~'하고 단박에 알아챌 것이다. 그만큼 익숙한 그림체다. 한 번 보면 잊지 못할 정도로 대단히 인상적이고 말이다. 삽화가의 위대함은 '단 한 장의 삽화'만으로 책의 내용이 자동적으로 떠오르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삽화가가 되기 위해선 '책의 내용'을 완벽하게 섭렵하지 않고선 불가능하다고 한다. 이 책 <아라비안 나이트>도 '삽화'만으로 전체 내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히 완성도가 높은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만약 이 삽화를 보고도 내용파악이 안 된다면 아직 <천일야화>를 읽지 않은 독자일 것이다. 그만큼 이 책의 삽화는 인상적이다. 예술적이고 말이다.

수록된 이야기는 많지 않다. '단행본'인 관계로 수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그나마 가장 유명하고 재미난 이야기만 엑기스마냥 꼭꼭 짜서 수록한 듯, '12개의 이야기'만을 담았다. 하지만 <아라비안 나이트>가 '액자 구도'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 12개의 이야기속으로 들어가서 또 읽을 수 있는 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에, 실제로는 더 많은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그렇지만 수록된 이야기는 아주 알차다. 가장 유명한 '알라딘과 요술램프',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어부 이야기', '신밧드의 모험', '아메드 왕자와 요정 이야기', '하룬 알 라시드 왕의 모험', '바그다드 상인 알리 코기아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부 하산, 자면서 깨어 있는 자의 이야기' 등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알라딘과 알리바바' 이야기는 갈랑판본에서만 전해지기 때문에 그 책을 참고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이야기가 야하지 않고 건전하기에 그렇게 짐작할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런 까닭으로 이 책은 '청소년용'으로 권장하기에 딱 좋다. 기본적으로 <천일야화>는 5권 이상의 방대한 분량을 자랑한다. 전체 쪽수로도 1700쪽이 훨씬 넘는다. 이런 책을 공부하기에 바쁜 학생들에게 권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을 것이니, 아무래도 '단행본'으로 권장할만 할텐데, 그렇다고 분량을 대폭 축소한 책을 권하기엔 아쉬울 것이니 약 300여쪽 분량으로 줄여놓은 이 책이 딱 적당할 듯 싶다. 그리고 전체적인 줄거리를 크게 해치지 않는 정도로 알맞게 축약해놓은 점도 아주 좋았다. 원작의 분량이 방대하다보니 '서술'이 너무 길고 '호흡'이 늘어져서 '읽는 맛'이 상당히 떨어지게 된다. 이는 사실 셰에라자드가 '천하룻밤'동안이나 목숨을 연장하기 위해서 이야기를 늘리고 또 늘린 면이 없지 않아 작용한 것일테다. 그런데 전체적인 맥락만 파악하는데 있어서, 그렇게 늘여서 한 이야기는 오히려 방해만 될 것이다. 그러니 적당히 내용을 간추린 '축약본'이 필요한데, 그래도 줄거리가 '기승전결'로 분명하게 전달되는 축약본을 골라야 할 것이다. 이 책이 바로 바쁜 '청소년을 위한' 그 좋은 책임에 분명하다.

아쉬운 점은 셰에라자드의 '서바이벌 스토리텔링'과 샤리아르의 '심적인 변화과정'이 <천일야화>의 핵심 키포인트인데, 그 원전의 맛을 전혀 느낄 수가 없다. 그저 샤리아르 황제가 배신을 당한 분노로 새로 맞이한 아내를 처형하는 폭군으로 변했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셰에라자드가 자청해서 혼인을 청했으며, 매일밤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어서, 샤리아르 황제가 큰 깨달음을 얻고 분노를 가라앉히면서 셰에라자드를 정식 아내로 맞이하며 행복하게 살았다는 주된 줄거리만 요약했을 뿐이다. 그래서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에 슬쩍슬쩍 드러나는 '서스펜스'를 전혀 맛볼 수 없고, 목숨줄을 걸고 외줄타기를 하는 살떨리는 '흥정의 장면'도 전혀 맛볼 수가 없다. 이런 맛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원전'을 읽는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책 자체는 아주 훌륭하다. 군더더기 없이 '축약'을 해놓았기에 핵심파악하는데에는 아주 탁월할 정도다. 단지 이런 '축약본'만으로 느낄 수 없는 '원전의 깊이'가 아쉬울 따름이다. 감동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서 맛을 보아야 하는데 말이다. <천일야화>를 완독함과 동시에 '단행본'을 같이 읽으니 이런 아쉬움이 먼저 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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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탐정 엘리자베트 3 - 마지막 수수께끼를 풀다 공주 탐정 엘리자베트 3
아니 제 지음, 아리안느 델리외 그림, 김영신 옮김 / 그린애플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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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L / 그린애플 3번째 리뷰] 1774년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을 중심 배경으로 '세 개의 뮤직박스에 담긴 수수께끼'를 공주 탐정 엘리자베트와 그녀의 친구들이 풀어나가는 모험담이라고 소개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탐정이라는 제목이 눈에 띄지만 '추리소설'이라기엔 너무 초보적이고, 그렇다고 소녀들이 좋아하는 '애정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천방지축이다. 엘리자베트 공주가 말이다. 물론 소녀 독자들이 좋아하는 왕실의 비밀 가득한 이야기들이 호화로운 드레스와 아름다운 장식들과 함께 어우러져 있기에 '모험'이라는 단어와는 사뭇 어울리지 않지만, 이 책의 주인공 '엘리자베트 공주'는 여느 소녀스런 공주와는 완전 다르다. 이 공주는 말을 타고서도 달리길 좋아하니까 말이다.

말을 타면 '달려가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싶겠지만, 여성의 말타기는 남성의 방법과는 다르다. 양다리를 벌리고 말안장 위로 올라타는 남자들과는 달리, 양다리를 모으고 한쪽 방향으로 걸터 앉아서 말을 타는 여자들은 기본적으로 달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왜냐면 말안장에 올라타서 양 발을 '등자'안으로 끼어넣어야 말이 달릴 때 말등에서 떨어지지 않고 착 붙을 수 있는데 반해, 여성용 말안장은 양 발을 '한쪽'으로 모으고 '등자'도 한쪽으로 모아져 있기에 말이 달리게 되면 그 반동으로 인해 낙마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남성은 '바지'를 입고, 여성은 '치마'를 입기에 그렇다. 아무리 '속바지'를 입었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다리를 벌리고 말을 타는 방식은 '숙녀답지' 못하다는 지적 때문에 귀족여성은 말을 타더라도 엉덩이만 살짝 걸쳐서 사뿐사뿐 걷는 속도로밖에 말을 탈 수 없으며, 여성은 말을 타지 않고 '마차'를 타는 것이 기본이었던 시절이다. 그런데 엘리자베트는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고서 양다리를 벌리고 말을 타는 '야만스런(?)' 장면까지는 연출하지 않더라도 '여성스러운 승마자세'로도 말고삐를 바투 잡고 다그닥다그닥 달리는 말타기를 즐길 정도였다. 이 정도면 '모험소설'이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을까?

암튼, 엘리자베트와 친구들은 '세 번째 뮤직박스'를 찾아냈고, '플루티스트 뮤직박스' 속에서 마지막 비밀암호를 찾아냈고 마침내 그 비밀문구를 풀어냈다. 그것은 바로 '천사를 따라가라'였다. 그 천사가 있는 곳에 테오의 할아버지가 감춰둔 보물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테오의 집에 있는 천사는 모두 찾아보았는데... 추리에 관한 내용은 여기까지다. 이 다음에는 바로 추리의 결말이 나오고 만다. 추리소설로는 영 꽝인 셈이다. 그럼에도 '간단한 추리'를 통해서 '논리적인 사고'를 키우는 것이 아주 중요하고, 심지어 그런 추리적 사고력이 '공부'가 된다는 사실을 아주 간결하게 알려주기 때문에 소녀 독자들도 '수학공부의 매력'을 알아채는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사실, 여학생이 '수학'을 잘 못할 것이라는 편견이 있는데, 이는 결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어릴 적부터 그런 '잘못된 편견'에 노출된 탓에 여학생은 '수학'을 못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래도 된다는 잘못된 선입견마저 갖게 되어 전체 여학생들의 수학 평균점수가 형편없게 나온다는 과학자들의 분석결과도 이미 나왔다. 그러니 여학생이 '수학공부'를 못할 것이라는 편견은 그냥 깨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이 책의 주인공 엘리자베트도 공부를 하기 싫어하고, 수학은 덧셈도, 곱셈도 하지 못하는 허당이었는데, '비밀암호문'을 척척 풀어내는 놀라운 일을 해냈다. '암호문 해독'은 세계 최초의 컴퓨터 창조자 '엘런 튜링'의 수학적 사고력으로 풀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수학문제는 '간단한 규칙'만 알면 누구라도 쉽게 풀 수 있다. 흔히 '수학공식'을 대입하면 쉽게 문제가 풀리는 것도 바로 그런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관건은 어떤 '공식'을 어떤 '문제유형'에 알맞게 대입해야 쉽게 풀릴 것인지 알아채는 것이다. 그것만 이해하면 누구나 수학천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수학적 사고력'에 '원리이해'를 더하면 된다. 수학공부는 그게 전부다. 구구단도 외우지 못하는 엘리자베트 공주가 '비밀암호문'을 풀 수 있었던 비결도 바로 이런 원리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자, 이쯤 되면 수학에 도전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은가? 수학문제가 풀리지 않아 답답하다면 '원리'를 가르쳐 달라고 조르면 된다. 한 번 풀어서 이해가 되지 않으면, 두 번을. 그래도 풀리지 않으면 '한 번 더' 시도를 하면 결국 어렵던 수학문제도 풀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차곡차곡 '원리이해'를 쌓게 되면 어렵던 '미적분 공식'도 결국 쉽게 풀 수 있게 된다. 프랑스 왕실의 바보라고 소문난 엘리자베트 공주도 해낸 일 아니던가 말이다.

이 책은 '수학공식'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공부'도 할 수 있다. 18세기 프랑스에선 '천연두'가 대유행을 했다. 그래서 프랑스 왕실도 베르사유 궁전을 떠나 시골귀족들의 저택을 전전하며 피신을 할 정도였는데, 안타깝게도 '루이15세(엘리자베트 공주의 할아버지)'가 그만 천연두에 걸려서 사망하기에 이른다. 이에 그치지 않고 파리 시민들에게도 천연두가 급속도로 전파가 되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루이16세'는 자신이 먼저 '우두접종(천연두백신)'을 하면서 천연두를 극복해보자는 의지를 엿보인다. 이는 '왕실이 먼저' 모범을 보여서 프랑스 국민들 모두를 '천연두의 위협'으로부터 이겨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이렇게 왕실이 모범을 보인 덕분에 '천연두 백신 접종'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다행히 루이16세를 비롯해서 왕실 사람 대부분이 '접종'을 받아서 천연두를 극복했기에 백성들도 안심하고 '접종'을 했고, 천연두 대유행도 한풀 꺾이게 되었다.

당시의 '접종 실시'는 지금처럼 '주사 한 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천연두균'을 대량 배양할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에 '천연두에 걸린 환자의 고름'을 실에 묻혀서, 그 실을 접종대상자의 팔뚝에 두세 번 바늘로 꿰어 통과시키는 방법으로 실시하였다. 이를 대규모로 실시할 경우 '소독방법'도 아직 마련되지 않았기에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대단히 비위생적인 방법으로 실시된 것을 알 수 있었는데, 당시에는 '천연두(마마)'에 걸리면 거의 대부분 사망에 이르는 끔찍한 질병이었기에 그 정도의 비위생적인 방식이었다해도 '살 사람'은 대부분 살아남는 기염을 보여준 셈이다. 어떤가? 재밌는 동화책속에서 '역사적 사실'도 배울 수 있다는 점이 꽤나 유익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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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야화 6 열린책들 세계문학 141
앙투안 갈랑 엮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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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LIX / 열린책들 17번째 리뷰] 드디어 다 읽었다. 숨가쁘게 읽는 바람에 '책의 진수'를 제대로 음미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천일야화>를 '완독했다'는 뿌듯함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 뿌듯함이 그닥 벅차오르지는 않았다. 왜냐면 모처럼 완독했는데 그 누구와도 <천일야화>에 대한 담론을 나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왜냐면 아무도 <천일야화>를 완독한 이가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 주변엔 말이다. 이게 '고전명작'을 완독한 이들의 고독감이다. 누구나 제목만 대면 단번에 알 정도로 유명하지만 정작 그렇게나 유명한 고전을 아무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외로움을 느껴야만 한다. <알라딘과 요술램프>라는 제목만 들어도 그 내용까지 다 알 정도로 유명하지만, 그 작품이 <천일야화>속 이야기의 일부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이들이 많다. 더구나 8권(버튼판 <천일야화>)의 분량이라고 하면 읽기도 전에 거부감을 표하곤 한다. 이 책은 6권(갈랑판 <천일야화>)으로 분량이 조금 더 적으니 권해봐도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 뿐이다. 막상 읽기 시작하면 멈출 줄 모르고 읽을 수 있는데 왜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는 건지 잘 모르겠다.

사실, 우리 나라에 <천일야화>가 처음 출간되었을 때는 '리차드 프랜시스 버튼'이 엮은 10권 분량의 <천일야화>가 먼저 소개되었다. 책 분량의 방대함도 유명했지만 내용이 '난삽한 성행위 묘사'로 점철되어 있는 것으로도 꽤나 유명세를 높였다. 그런 까닭에 <천일야화>는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고전소설로 '청소년필독서' 목록에 올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음에도, 노골적인 성묘사가 가득했기에 우리 나라에서는 '권장도서'가 되지 못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에도 낯뜨거운 대목이 담겨 있다는 이유만으로 '학교도서관'에서 추방시켜야 하고, 청소년권장 도서목록에서도 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것이 뉴스를 장식하지 않았던가. 버튼판 <천일야화>도 딱 그런 분위기였다. 당시엔 뉴스에 오를 정도로 이슈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 어떤 학교선생님도 <천일야화>를 학생들에게 읽으라고 권장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도 서른살이 넘어서 버튼판 <천일야화>를 처음 접했지만, 2권을 넘기지 못했다. 이건 뭐 이야기속에 야한 이야기, 그속에 또다른 야한 이야기가 멈추지도 않고 계속 이어졌기에 도저히 책장을 넘길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럴 정도였기에 그 누구도 당시 <천일야화>를 '완독'했다는 자랑을 하지 못했다. 그저 그 유명한 책을 알고 있다는 정도로 점잖게 애둘러서 표현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천일야화>는 어른들만 읽을 수 있는 '성인용 고전'이란 말인가? 그건 아니다. 애초에 '버튼판 <천일야화>'가 나오기 전에 프랑스 작가 '앙투안 갈랑'이 엮은 <천일야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버튼조차 '갈랑판 <천일야화>'를 참고해서 자신의 책을 엮었다고 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원본'이었다. 그런데도 우리 나라에서는 '갈랑판 <천일야화>'가 뒤늦게 출간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미 <천일야화>는 '야화'라는 이미지로 굳어서 '야한 소설'로 이해하고 있었고, 청소년이 읽어도 무방할 정도로 '건전한 내용'으로 점잖은 '갈랑판 <천일야화>'도 도매금으로 넘겨짚어서 우리 나라 독자들에게 외면 받았다고 한다.

실제로 '갈랑판 <천일야화>'가 소개된 이후에는 하릴없이 난삽한 낯뜨거운 묘사를 싹 걸러낸 '단행본 <천일야화>'가 많이 출간되었다. 어린이책으로 출간된 <천일야화>도 모두 '갈랑판본'으로 아주 건전하고 유익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래서 학부모들께서 자녀에게 <천일야화>를 읽혀주고 싶다면 책의 저자가 '앙투안 갈랑'인지 먼저 확인하면 된다. 혹시라도 '리차드 프랜시스 버튼'이라고 적혀 있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성인용'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시기적으로도 '갈랑판본(프랑스어)'이 18세기에 만들어졌고, '버튼판본(영어)'이 19세기에 출간되었다. 애초에 '아랍어'로 적혀 있는 '원본'은 따로 없고, '출처'도 불분명할 정도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는데, '아랍어'에 정통한 앙투안 갈랑이 이 책의 가치를 알아보고, 흩어져 있던 이야기를 하나로 엮어서 <천일야화>라는 이름으로 출간을 했고, 이 책을 다시 중동을 비롯해서 전세계로 수출하는 업적을 남긴 것이다. 리차드 프랜시스 버튼은 이런 '갈랑판본'을 참고로 하여, 자신이 직접 찾은 '천일야화'의 이야기를 더하고, 여기에 '낯뜨거운 묘사'까지 잘 버무려서 또 다른 <천일야화>를 내놓았다. 이것이 '영문판'으로 소개된 덕분에 전세계로 빠르게 퍼뜨려졌고, 우리 나라에서는 바로 이 '버튼판본'이 먼저 소개된 셈이다. 그래서 두 개의 '판본'을 모두 읽은 사람은 이 책들이 서로 '같은 책'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딴판'이라는 사실을 먼저 알게 될 것이다. 기본적으로 세헤라자드가 샤리아 술탄에게 밤마다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이야기 설정은 '같지만', 그밖의 이야기 순서라든지, 심지어 이야기 내용까지 사뭇 다른 점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읽어보면 알 게 된다. '버튼판본'보다 '갈랑판본'이 훨씬 읽었을 때 감동이 더 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단순히 내용이 '점잖치 못하고', '점잖고'의 차이만 보이는 게 아니라, 이야기의 서사 방식 자체가 완전 다르다. 버튼판본은 '음담패설'을 읽는 듯 시시껄렁한 시정잡배가 들려주는 분위기가 연출된다면, 갈랑판본은 아버지가 침대맡에서 어린 자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듯 사랑스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같은 제목인데도 이토록 엄청난 차이가 나고 있는 것이다. 현재는 '버튼판본'은 <아라비안 나이트>(동서문화사)로 검색을 해야 찾을 수 있다. '성인용'이긴 하지만 읽을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해는 하지 말길 바란다. 감동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덜 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일 뿐이다.

언제 기회가 되면 '야한 고전소설'만 따로 골라서 소개를 해드려도 좋을 듯 싶다. 사드 백작의 소설들이나 <데카메론>을 비롯해서 '버튼판 <아라비안 나이트>'도 말이다. 점잖치는 않지만 '문학적 가치'가 높다고 주장(?)하는 비평가들이 많다. 왜 그런 비평을 했는지 '공감'하진 못하겠지만 말이다. 뭐, 나중의 일이고. 이번 기회에 '앙투안 갈랑'의 <천일야화>를 완독할 수 있어서 기뻤다. 언젠가 <천일야화>를 다시금 소개하는 기회가 찾아올 것이다. 셰에라자드가 들려준 이야기를 토대로 수많은 창작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니까 말이다. 지금까지도 말이다. 마치 '온세상 거의 모든 이야기의 원조'라고 소개해도 무방할 것이다.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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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야화 5 열린책들 세계문학 140
앙투안 갈랑 엮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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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LVIII / 열린책들 16번째 리뷰] 드디어 나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알라딘과 요술램프' 이야기가 말이다. 갈랑의 <천일야화>에서는 이 이야기의 원제를 '알라딘과 신기한 램프 이야기'라고 전했다. 워낙 유명한 이야기라서 수없이 많은 버전의 이야기로 각색이 되었고, 우리에게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알라딘(1992)>(실사 영화(2019)도 같은 제목)으로 더 익숙하다. 하지만 이 애니메이션은 <천일야화>속 이야기와는 판이하게 다른 내용을 품고 있다. 등장인물의 구성도 비슷하긴 하지만, 애초에 담고 있는 '주제' 또한 사뭇 달라서 애니메이션을 즐긴 뒤에 원작이야기를 읽으면 살짝 뚱한 표정을 짓는 어린이들도 상당히 많이 보았다. 왜냐면 나와 같이 '원작이야기'를 먼저 읽고서 '애니메이션'을 본 사람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바로 원작에선 '알라딘의 재치'가 돋보인다면, 애니메이션에선 '램프의 요정 지니'가 거의 다 해먹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으로 올수록 '알라딘의 재치'보다는 '요정 지니의 익살'이 더 인상 깊기에 그럴 것이다. 자, 원작과 비교를 해보자.

원작에서는 이슬람 제국의 영향을 받는 '중국의 한 왕국'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굳이 역사적인 고증을 하자면, 중국의 서쪽 변경의 제후국이라고 설정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곳에서 알라딘은 망나니 소년으로 등장한다. 재봉사인 아버지가 죽고나서 홀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소년이 바로 알라딘이다. 그런데 이 소년이 아주 철부지다. 일 하기는 싫어하고 놀기 좋아하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방탕하기 그지 없어서 날이면 날마다 사고를 치고 다니는 그런 망나니가 따로 없었다. 한편, 애니에서는 고아소년으로 등장한다. 직업도 없어서 좀도둑이다. 애초에 둘 다 '빈털털이 가난뱅이'라는 설정은 유사하지만 '어머니의 존재 여부'가 사뭇 다르다. 이렇게 어머니가 살아계신 원작에서는 훗날 알라딘이 왕국의 공주(바드룰부두르)와 혼인을 하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하는 역할을 하지만, 애니에서는 '램프의 요정'의 도움을 받아 뚝딱 해치우고 만다. 일륜지대사에 속하는 혼인인데, 원작에서처럼 '격식'까지는 아닐지라도 '전통(상견례 포함)'을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아무리 요즘에는 젊은 두 남녀가 '직접 연애'를 한 뒤에 사랑만으로 뚝딱 결혼을 할지언정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원작에서는 알라딘과 공주가 혼인과 동시에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끈끈한 연을 맺고 결코 헤어질 수 없다는 애정을 강조한데 반해서, 애니에서는 그런 끈끈한 연보다는 '사랑의 조건'을 따지면서 헤어질 수 있으면 헤어지는 게 '맞다'는 식으로 연출하고 있으니 좀 아쉬운 설정이다. 아무리 젊은 감성일지라도 '부부의 연'을 그렇게 쉽게 끊을 수도 있다는 설정은 애초에 '예시'로라도 보여주어선 안 되는 건데 말이다. 부부사이에 '사랑'이 식으면 서로 헤어질 수 있는 조건이 성립한다는 건, 동서양을 막론하고 권장해선 안 된다고 본다. 물론 '폭력이 가득한 부부'까지 붙들어 매어야 옳다는 건 절대 아니다.

아무튼 이런 등장인물의 차이점은 또 있다. 애니에서는 '램프의 요정 지니' 뿐만 아니라 '원숭이 아부', '마법양탄자'까지 나와서 이야기의 재미를 더해 주지만, 원작에서는 '램프의 정령'과 '반지의 정령'이 등장할 뿐, 원숭이나 양탄자 같은 건 나오지 않는다. 거기에 애니에서는 '마법사 자파'가 홀로 악역을 맡지만, 원작에서는 '아프리카 마법사와 그 동생'까지 악역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알라딘과 공주에게 온갖 시련과 위기를 맞게 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결말의 차이점'이다. 애니에서는 쟈스민 공주가 지혜를 발휘해서 마법사 자파를 '새로운 램프의 요정'으로 바꾸어서 스스로 파멸하게 만들지만, 원작에서는 '램프의 정령의 도움'을 받은 알라딘이 나쁜 두 마법사를 처리하는 것으로 행복한 결말을 맡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니에서는 알라딘과 쟈스민의 행복한 결혼으로 끝맺지만, 원작에서는 국왕 사망하자 바드룰부두르 공주가 '왕위의 계승'을 받아 왕권을 거머쥐고, 남편인 알라딘과 공동통치를 하면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로 끝맺는다. 이는 '실사 영화 <알라딘>'에서 원작을 살려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애니만 기억하고, 원작을 잊어버린 평론가들이 실사 영화를 '패미니즘의 구현'이라고 논평한 것이 어색할 지경이다.

이렇게 차이가 많기에 '원작'만의 매력을 더 찾아볼 수 있다. 철없던 소년이 온갖 시련과 행운을 연이어 겪으면서 끝내 한 나라의 통치자까지 되는 행복한 결말 말이다. 이게 원작의 주제다. 단지 이야기의 재미만이 아니라 이야기 속에서 '교훈'까지 솎아낼 수 있기에 원작이야기를 나는 더 좋아한다. 이런 교훈은 애니와 실사영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저 재미로 시작해서 재미로 끝날 뿐이다. 굳이 주제를 찾자면 '사랑은 아름답다' 정도일까?

한편, 원작에서는 '소원의 갯수'가 무제한이다. 소원을 들어주는 정령들은 '주인의 명령'이라면 무엇이라도 들어준다. 물론, 금기되고 터부시 되는 것들이 있긴 하다. 금기 되는 것은 '상위 정령이 해놓은 일'을 '하위 정령'이 어쩔 수는 없다는 것이고, 터부시 되는 것은 '정령의 주인(로크 새)'을 해치는 행위를 하게 되면 아무리 '램프의 주인'의 명령이라도 따르지 않을 수 있다. 그에 반해서 애니에서는 '소원은 딱 세 가지뿐'이다. 좀 째째하다는 느낌이지만, 이렇게 '횟수'를 한정해놓으면 더욱 신중한 소원을 빌게 된다. 바로 이 부분이 원작보다 더 능가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원작에서도 '소원의 남발'을 하지 않고 '한정된 느낌'을 주고는 있다. 바로 알라딘이 순박하고 세상 물정을 잘 몰라서 소원을 남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알라딘이 비는 소원이 워낙 '검소(?)한 편'이라서 그러한 방만한 이야기가 되지는 않았다. 다행히. 이에 반해서 애니에서는 딱 '세 가지 소원'만 들어준다고 한정해 놓았기에 알라딘을 비롯한 '램프의 주인들'은 모두 신중하게 소원을 빌게 된다. 하긴 바라는 소원이 다 이루어지는 인생만큼 식상한 인생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지 않다고? 무한정 소원을 들어주면 행복할 거라고? 배블런이 <유한계급론>에서 배부른 자(부자)의 행복이 배고픈 자(빈자)의 행복보다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을 증명했다. 무한정 이루어지는 소원에서 우리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결론은 진리다.

암튼, 나는 <천일야화>속 이야기 중에서 '알라딘과 신기한 램프 이야기'를 가장 좋아한다. 어릴 적부터 이 이야기는 읽고 또 읽었던 추억이 서려있기도 하고, '소원'을 들어준다는 설정이 너무 좋았다. 그때부터 빌었던 소원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나이가 들수록 그 소원은 점점 구체적이 되었지만 결코 실현되진 않았다. 하지만 어떠랴!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아야 '소원'으로 남을 수 있다는 것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깨닫게 된 진리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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