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 먼저 살려야 할까? - 깐깐한 의사 제이콥의 슬기로운 의학윤리 상담소
제이콥 M. 애펠 지음, 김정아 옮김, 김준혁 감수 / 한빛비즈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렇게 결정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아니면 저렇게 하는 것이 정의로운 것일까? 의료현장에서 벌어지는 문제들 가운데에는 결정을 내리기 곤란한, 아니 어쩌면 답은 정해져 있는데 의료인이기 때문에 곤란한 문제들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는 책이다. 우리 사회에서 의료인들을 존경하고 사회지도층으로 당연시하는 까닭은 그들이 자타공인 똑똑한 인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똑똑한 이들조차 곤란에 빠지게 만드는 문제란 무엇일까?

 

  이를 테면, 이런 문제들이다. 의사가 환자를 진료하다가 사랑에 빠지게 된다면 어떨까? 그 결과 결혼까지 하게 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까? 스승과 제자가 사랑에 빠져 연인관계가 되거나 혼인을 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경우에는 사회적인 지탄을 받곤 한다. 근래에는 법적인 문제로까지 불거져서 처벌을 받기도 한다. 의사의 경우에도 내담자와 진료상담을 하다보면 환자의 개인정보를 속속들이 알게 되고, 의사 자신의 명성과 부를 이용해서 환자를 적극적(?)으로 보살피다가 사랑이 싹터서 연인관계를 지속하다 결혼에 이를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 윤리적인 또는 법적인 문제점은 없을까? 물론 있다. 미국에서는 정신과 의사가 상담을 이어온 환자와 성관계를 하는 것만으로도 처벌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정신과 상담의 경우에 환자가 의사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게 되는 경향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환자는 의사가 자신을 돌봐주고 관심을 가져주는 것만으로도 치료가 되고 있다고 믿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더욱 쉽게 사랑의 포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신과 상담을 종료한 지 5년 이내에 성관계를 하거나 결혼을 하게 되면 의사 면허를 박탈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을 하는 연인 관계로 자연스럽게 발전하는 것까지 법이 막을 수 있을까? 아무런 조건도 따지지 않고 어떠한 방해로도 막을 수 없는 사랑의 힘을 막을 윤리도덕과 법적절차가 있느냔 말이다. 단지 의사와 환자로 만났을 뿐인데, 악용될 사례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랑을 해서는 안 되는 사이가 되어야만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있느냔 말이다. 물론 어렵게 딴 의사면허를 기꺼이 반납하면 아무런 문제도 없는 좋은 해결방안이 있긴 하지만, 의사와 환자 사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랑에 빠지면 안 되는 사이가 되어야만 하는 것도 논란의 여지가 분명해 보인다.

 

  어디 이뿐인가. 미국에서는 금지된 의학실험을 개발도상국에서 실행에 옮긴다면 괜찮냐는 물음에는 어떻게 답할 것인가? 인권의식이나 인권법이 발달한 선진국에서는 당연히 금지하는 의학실험을 상대적으로 인권이 뒤쳐져서 아직 법이 미흡한 개발도상국에서 합법적(?)으로 의학실험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이냐는 물음이다. 신약개발과 같은 의학실험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위험한 부작용이 예상되어서 충분한 임상실험이 불가능할 때가 있다. 그럴 때에 예상되는 부작용이 있더라도 '허용해주는 나라(!)'에서 실험을 진행함으로써 신약개발에 성공을 하거나 엄청난 비용절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윤리적으로 해도 될 일이냐는 물음이다.

 

  예전에는 '인종차별'도 서슴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던 터라 미국 사회에서도 '흑인'을 대상으로 하는 반인권적인 의학실험이 자행되곤 했다고 한다. 지금에야 '인종차별'이 철저히 금지되고 '인권의식'도 상향이 되었기 때문에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을 인간이하의 취급을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상식으로 여기지만, 한때는 인간으로 생각지 않았던 흑인을 대상으로 온갖 실험을 자행했다고 한다. 그랬던 미국이 지금에는 인권보호 차원에서 '임상실험'에 대한 철저한 관리를 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위험한(?) 실험을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다른 나라에서 실험을 대신하고 달콤한 결과만 취하겠다는 심보는 정말이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인류를 위해서 꼭 만들어야 하는 의학실험의 경우에도 막아야만 할까? 고민스런 문제지만 개인적으로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의학실험이고, 그런 위험한 실험은 어느 곳에서도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인간이 인간을 위해서 동물실험을 하는 것도 끔찍한 일인데, '인간실험'을 허용한다면 아무리 좋은 취지라 하더라도 희생을 치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코로나19 치료제'와 같이 인류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실험까지 막자는 것은 아니다. 특정 국가나 기업의 이득만을 보장하는 임상실험을 반대한다는 의미다. 인류 모두의 보편적 의료복지를 위해서만 허용해야 하는 위험한 실험이라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살인자나 독재자를 살려야만 할까? 또는 범죄자나 살인자가 의사면허를 따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의사는 죽어가는 생명을 아무런 조건도, 차별도 없이 기꺼이 살리겠노라고 선서를 한다. 그런데 자신이 살려야 하는 이가 연쇄살인범이라면? 또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몬 악명 높은 독재자라면? 기꺼이 살려야만 할까? 만약 의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기에 기꺼이 살려낸다면, 다시 살아난 살인자와 독재자가 더 많은 사람들을 또다시 죽음으로 내몰 가능성이 아주 높은데도 말이다. 한편, 과거에 범죄를 저지르거나 살인을 저지른 이가 엄청난 공부를 해서 의사면허를 취득한다면? 당연히 의사면허를 내주어야만 할까? 의사가 되어 또다시 범죄를 저지르고 살인을 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또는 환자들이 그와 같은 사실을 알고도 기꺼이 자신의 병을 치료하고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그 의사에게 진료를 받거나 수술을 받으려 할까?

 

  결코 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다. 이 책에는 미국 사회에서 윤리적으로 금기되고 있거나 법적으로 허용하지 않는 의료적 문제에 대한 논란거리를 담아 놓았다. 그 가운데 몇 가지를 추려서 위에 열거해보았는데, 당신은 명쾌한 답을 내놓을 수 있었는가? 때로는 쉽게 답을 낼 수 있었지만 대다수의 논란거리는 정말 답을 내놓기 곤란하기 짝이 없었다. 이를 테면, '진상 환자'에 대해서 치료 거부를 하는 것이 옳으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답하는 의료인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겠는가? 의사도 사람인지라 감정이 개입될 수 있지만 꺼져가는 생명을 눈앞에 두고서 망설이는 이를 의사라고 할 수 있느냐는 물음이 되어 버리면 '또 다른 문제'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상에 쉬운 문제란 결코 없는 법이다. 그렇다면 해답은 딱 한 가지다. 수많은 문제에 대해서 우리 모두 함께 고민해보는 것이다. 물론 갑론을박이 이루어질테고 명쾌한 답을 내놓기보다는 더욱 심한 혼란속으로 빠져버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원하는 해답에 다가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만 할 것이다. 이때 '공리주의'나 '다수결 원칙'으로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다. 어쩌면 '똑같은 문제'에도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서로 다른 해법'을 내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완벽한 인간은 없다'는 당연한 진리를 마주하게 되면 그런 혼란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지혜로움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지혜를 나눌 때에야 비로소 밝은 사회로 한발짝 더 나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렇게 나누는 지혜를 더욱 빛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자세가 바로 '경청'일 것이고 말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할짝 심리학 - 현대 심리학의 초석을 다진 3인의 천재들 한빛비즈 교양툰 7
이한나 지음 / 한빛비즈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느 덧 <교양툰>시리즈를 10권이나 읽었다. 이 시리즈가 매력적인 까닭은 무엇보다 어려운 인문학 교양을 재미난 만화형식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만화형식이 가져다주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때로는 독으로 다가오곤 하지만 '가벼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짬짬이 <고전>을 함께 읽어주는 센스(?)를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 어렵기만 한 <고전>도 한결 가볍게 읽어내는 깜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교양툰>은 어려운 심화문제를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모범답안'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어낸 <교양툰>일수록 그 아우라가 더욱 영롱할 수밖에 없다.

 

  혹시 프로이트의 저서들을 읽어 본 적이 있는가? 칼 융의 책도 읽기 거북하기는 마찬가지다. 상대적으로 쉽다고 여겨지는 아들러의 저서들도 읽다보면 맹해지는 느낌을 받기 십상이다. 왜냐면 <심리학>이라는 학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짜깁기한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하긴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심리)'을 연구하는 학문이니 설명을 하다보면 막연해지기 일쑤일 법도 하다. 또한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도 저마다 천차만별이니 이를 '한 가지 이론'으로 꿰뚫어내는 일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에 심리학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일 테다.

 

  이를 테면, 유명한 심리학책 가운데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이 있다. 물론 이 책은 '자기계발서'에 더 가까운 책이지만 남자의 심리와 여성의 심리를 밑바탕에 깔고서 풀어낸 책이기에 심리학책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학문적 근거는 '경험'에서 비롯하였다는 썰로 풀어냈기 때문에 매우 빈약하지만 누구나 읽기만 해도 쉽게 공감이 갈 정도로 남녀의 심리묘사를 적절히 해냈기 때문에 더욱 유명해진 책이기도 하다. 암튼 이 책이 남자와 여성의 심리를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기는 하지만 100%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답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자라고 무조건 동굴로 들어가길 좋아하고 여자라고 무조건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폭력적인 성향을 내보이는 남녀도 있을 것이며, 당황하거나 놀라서 두서 없이 행동을 일삼는 경우도 참 많다.

 

  이처럼 '심리학'은 매우 다양한 사례를 토대로 원인을 밝혀내고 해법을 제시하는 학문이기에 대충 그럴 것이라는 식으로 두루뭉술한 결론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경험'에 근거한 자기계발서와는 수준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은 매우 깊이 있게 '마음'을 분석하고 결론을 내리기까지 복잡다단한 과정으로 풀어낼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엄청나게 복잡하고 난해하기까지 한 학문인 셈이다.

 

  그런데 <교양툰>에서는 어려운 설명은 다 재껴두고 프로이트는 '변태', 아들러는 '열등생', 융은 '도덕군자'라는 핵심어로 아주 쉽게 풀어냈다. 이런 핵심낱말만으로도 얼마든지 그들의 심리학을 '분석'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마치 '일타강사'의 강연을 들은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게 만들어버린 것처럼 아주 쉽고 재미나게 심리학자의 이론을 마스터해버리게 된 셈이다.

 

  이를 테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기초는 '무의식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정신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근원은 바로 '무의식'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무의식은 우리가 인식할 수 없지만 '꿈의 대화'를 통해서 들여다 볼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 핵심 포인트다. 이때 '무의식의 세계'에는 인간의 온갖 욕망이 담겨 있는데, 그 가운데 '성적인 욕망(성욕)'이 99%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석한 것이 바로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핵심이다..라고 깔끔하게(?) 설명하였다. 원초아-자아-초자아...뭐 이딴 식으로 설명한 프로이트의 저서를 읽는 것보다는 매우 쉽게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는가. 바로 이 책이 매력적으로 읽히는 까닭이다.

 

  한편, 아들러는 어린 시절에 겪은 열등감을 노오오오력으로 극복한 사례를 보여주면서 <아들러 심리학>의 핵심에 정곡을 찔러 넣었다. 사실 아들러 심리학은 오랫동안 주목 받지 못하다가 <미움 받을 용기>라는 책이 인기를 끌면서 새삼스럽게 주목 받게 된 '심리학계의 역주행'을 잘 보여주었다. 암튼 아들러 심리학은 '열등감 극복'이 행복한 삶의 원천이라는 다소 뻔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정신분석학을 온통 '성적인 이미지'로 더럽혀 온 프로이트에게 질려 버린 수많은 '반 프로이트 심리학자들'에 의해서 탄탄히 이론을 다져온 결과 현대 심리학계에 주류로 인정받는 영광을 얻게 된다. 오늘날 '미투 운동'으로 여성의 인권운동이 다시금 주목을 받으며 여성이 마음에 상처를 받게 된 원인이 '남근 상실' 때문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해석을 할 수 없는 시대에 딱 어울리는 이론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칼 융은 프로이트의 제자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지만 전혀 근거 없는 소문일 뿐이다. 융의 심리학이 '무의식'을 다루고 있어서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유사한 것은 사실이나 칼 융의 무의식에는 '변태적 성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아름답고 도덕적이며 성인군자의 아우라를 가득 담고 있고 있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프로이트과 같을 수가 없다. 마치 상어와 돌고래의 겉모습이 비슷하기는 하지만 상어는 어류이고, 돌고래는 포유류인 것만큼이나 프로이트와 칼 융은 서로 다르다는 점을 알고 접근해야만 한다.

 

  이렇게 이 책에서는 현대 심리학의 3대 거장인 프로이트와 아들러, 그리고 칼 융의 심리학을 핵심만 콕콕 분석해서 선보이고 있다. 어렵디 어려운 심리학이 한결 쉽고 재미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프로이트와 칼 융의 심리학은 낡은 이론으로 치부하곤 한다. 이 둘의 정신분석학의 공통점인 '무의식의 세계'를 오늘날에는 거의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긴 꿈을 해석하는 일이나 가면(페르소나)을 쓰고 내면을 감추려 한다는 이론이 한물 가긴 했다. 아들러는 뒤늦게 주목을 받은 탓에 오늘날에 새삼 인기를 끌고 있긴 하지만, '열등감 극복'이라는 주제는 '자기계발서'에 딱 어울리는 주제가 되었기에 최근 심리학계의 주류와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최근의 심리학은 '뇌과학'이 발달하면서 '호르몬'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도파민'이나 '세로토닌'과 같은 호르몬의 이름을 들어본 일이 많을 것이다. 살짝 시간을 거슬러가면 '엔돌핀'이라는 행복 호르몬 이야기도 참 많이 들었을 것이다. 이처럼 '호르몬의 노예(?)'가 되어 버린 현대 심리학은 정신분석에서 많이 벗어났다는 느낌을 받고 있지만, 사람의 마음을 해석하는 일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만은 않을 것이다. 설령 사람의 마음(또는 기분)이 호르몬에 의해 결정(!)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 결정에 저항하고 호르몬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지는 것 또한 우리의 마음일 것이다.

 

  최신 심리학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고 해서 '정신분석학의 3대 거장'의 이야기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인류가 학문을 연구하는 까닭은 낡은 것에서 새로운 점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 지나간 옛날 학문이라도 다시 들여다보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온고지신의 정신'을 잊지 않는다. 특히나 '심리학'은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마음을 연구하는 학문이기에 더욱 그렇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감염병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 인문학과 함께하는 과학 산책
김정민 지음 / 우리학교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직도 끝나지 않은 판데믹시대를 맞아 아이들과 독서논술 수업을 하려고 선정한 책이다. 초등학생 아이들이 읽기에는 다소 어려운 내용이 담겨 있다고 생각이 되지만, 이보다 훨씬 더 어려운 고전책도 필독서로 선정하곤 하는데, 이 정도의 과학인문책은 현실에서 접하는 일상의 경험으로 그닥 어렵지 않게 문제의식에 접근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선정하게 되었다.

 

  또한, 요즘 언론이 부추기고 있는 '가짜 뉴스'로 인해서 어른들 뿐만 아니라 초등학생들마저 헷갈려 하고 있는 실정이다. 2%의 사실에 98%의 나쁜 상상력(?)을 덧붙여서 써내려간 기레기들의 코로나 뉴스를 접하고 있으면, 선생인 나조차도 홀랑 속아넘어가서 불안에 떨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린 초등학생들이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잘못된 뉴스의 한 토막을 듣고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겠느냔 말이다.

 

  물론, 이 책의 내용은 그러한 '가짜 뉴스'의 심각성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뉴노멀'이 되었을 때 우리가 새로운 감염병에 어떻게 대처를 해야 바람직한 것인가..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과거에 감염병을 인류가 어떻게 극복했고, 이를 토대로 '코로나19'를 비롯해서 앞으로의 감염병 유행에 어떻게 대비를 해야 하는지를 다룬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 가장 중요한 상식을 인식해야만 한다고 방점을 찍었다. 다름 아니라, '지구의 주인'이 결코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그렇다면 지구의 주인이 따로 있는가? 그것도 아니다. 왜냐면 '자연'은 아무런 의식도 없고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있는 그대로'일 뿐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결코 특정한 생물에게 유리한 조건을 내걸지 않는다. 그저 '환경'을 제공할 뿐이고 각각의 생물들은 그 환경에 알맞게 '적응'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인류는 오랜 세월동안 '지구의 주인 행세'를 하면서 자연을 황폐하고 만들었고 수많은 생물을 멸종에 이르게 했으며 끝내 환경을 오염시켜서 지구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치고 말았다. 대표적으로 '지구온난화'를 예로 들었는데, 그뿐 아니라 '코로나19'도 인류 스스로 자초한 결과라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왜냐면 '코로나19'가 대유행을 하기 이전에 이미 '사스(2002년)', '메르스(2012년)'로 우리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모두 '코로나바이러스'라는 같은 병원균으로 점차 변이를 거듭하며 인류를 감염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점은 사스나 메르스 때는 이유를 알 수 없게 급속도로 유행하다가 삽시간에 종적을 감춰버려서 백신이나 치료제를 개발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지만, 코로나19는 막대한 비용이 드는 백신과 치료제 개발에 전세계가 몰두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코로나19라는 새로운 감염병을 맞아 다시금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백신과 치료제 개발'에 비용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할 수 있는데도 비용 절감을 이유로 개발을 미루다가 새로운 감염병이 대유행 해버린다면 엄청난 경제손실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이는 '포스트코로나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다행히 코로나가 물러나고 인류가 극복할 수 있는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한다고 해도 언제든 다시 '새로운 감염병'이 우리를 괴롭힐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열려 있기 때문이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쳐봐야 적절한 때를 놓쳤다는 사실만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는 당연한 진리고 말이다.

 

  또 하나, 코로나 판데믹의 원인을 살펴보면 인류의 무분별한 자연훼손과 무리한 개발로 인해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동물들이 인류에게 감당할 수 없는 감염병을 선사했다는 사실이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숙주로 거론된 '사향고양이', '천산갑', '박쥐' 등을 사냥해서 요리해서 먹는 행위나 이들 생물이 살아갈 숲을 망가뜨리고 인간의 영역으로 둔갑시키는 바람에 인간과 접촉이 늘어나게 되자 '새로운 감염'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숲을 개발하지 않고 욕심을 부리지 않았으면 '코로나' 같은 감염병은 애초에 생기지도, 생겼다하더라도 전세계로 퍼지지도 않았을 거라는 얘기다.

 

  이처럼 인류의 끝없는 욕심이 화를 불러오게 된 '코로나바이러스'는 미래의 인류에게 뼈아픈 교훈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제는 자연을 정복을 대상으로 삼지도 말며 인류끼리 무모한 경쟁으로 자연을 황폐하게 만들어서도 안 된다. 오직 자연과 '공생'해야만 겨우 살아갈 수 있다는 진실을 인식하고 인류의 삶을 자연친화적으로 개선하려고 무한한 노력을 해야만 할 것이다.

 

  흔히들 말하지만, 지구를 병들게 한 것은 인간이지만, 병든 지구를 살릴 수 있는 것도 오직 인간 뿐이다..라고 말하곤 한다. 또한, 인간은 어떤 위기속에서도 반드시 극복해내곤 한다..며 지구 유일의 '잘난척쟁이'로 살아가고 있다. 물론 인류의 위대한 역사를 일구어내는 원동력이 된 자부심이기도 하지만, 이제는 '오만의 경지'에 다달았다는 '경고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다. 더는 지구 환경이 인류에게만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과학자들의 전망이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 인류의 건강은 지구의 건강과 맥을 같이 하게 되었다. 지구를 아프게 하면 인류는 더 아플 수밖에 없다는 진실. 이걸 깨닫지 못했다면 인류의 미래는 없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등학생이 딱 알아야 할 화학원소 상식 이야기
김성삼 지음, 홍나영 그림 / 파란정원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 일상에서 화학은 매우 밀접합니다. 현대인이 쓰는 생활용품의 거의 대부분이 바로 '화학제품'이기 때문입니다. 천연재료인 돌, 흙, 나무조차 화학처리를 하지 않고 천연 그대로 쓰는 경우는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화학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는 매우 부정적이랍니다. 그건 바로 '인공물'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인데, 잘못 사용된 화학제품이 사람의 건강을 해치고 심지어는 목숨까지 앗아가는 주범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화학제품은 일상에서 쉽게 구하고 편리하게 쓰는데도 잘못 쓰이면 건강과 생명까지 앗아가는 심각한 부작용을 갖고 있기에 '양날의 검'의 특성을 갖고 있답니다. 그렇다면 해결방법은 한 가지입니다. 그 방법은 바로 '아는 것이 힘'입니다.

 

  화학공부를 하는데 있어서 가장 좋은 방법은 '화학원소'를 낱낱이 아는 것입니다. 학창시절에 화학을 배울 때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주기율표'를 외우는 것처럼 화학의 시작은 언제나 '화학원소의 특징'을 샅샅이 알아내는 것입니다. 그 까닭에 '암기과목'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무작정 외우기보다는 생활과 밀접한 내용부터 차근차근 알아나가면 더 쉽게 공부할 수 있을 겁니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화학은 일상생활과 매우 밀접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테면, 화장품이나 향수의 '성분'만 살짝 공부해도 매우 많은 화학적 지식을 익힐 수 있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마트에서 파는 식재료의 '구성성분'만 읽어도 웬만한 '화학원소 이름'을 찾을 수 있답니다. 여기에 살짝만 노력을 가해서 '화학성분 이름'을 백과사전(인터넷 검색 등)에서 찾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면 교과서나 참고서에서 배울 수 없는 '기본 상식'들을 흥미롭게 알게 된답니다.

 

  물론, 모든 공부비법이 일맥상통하기에 특별할 것이 전혀 없는 공부법이지만, 이 방법을 통하면 어렵게만 느껴지던 화학공부를 더 쉽고 빠르게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경험하실 겁니다. 비단 화학공부가 '원소'나 '원자'와 같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들을 배우고 익히기 때문에 골치를 썩이고, 수학에 버금갈 정도로 복잡한 수식으로 문제를 풀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 낯선 친구와 금방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이 '이름'을 먼저 알고, '사는 곳'과 '성격이나 취미'를 알게 된 뒤에 점점 친해지는 것처럼, 화학공부도 '화학원소의 이름'을 알고, 각각의 특성을 파악하면 그닥 어렵지 않게 익숙해지게 될 겁니다.

 

  특히, 요즘에는 '방사성 원소'에 대한 지식이 어린 시절부터 필요하답니다. 예전과는 달리 핵분열이나 핵융합 에너지를 '미래의 에너지 자원'으로 활용하거나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기 더욱 그렇습니다. 얼마 전에는 '라돈 침대' 때문에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어진 적이 있었죠. 정상가동을 하지 못하는 일본의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에서 생성되는 엄청난 양의 방사능 오염물질을 그대로 바다나 육지에 버리고 있다는 뉴스는 지금도 꾸준히 나오고 있답니다. 또한, 일본에 떨어진 핵폭탄으로 인해 지금도 아픔을 겪고 있는 한국인 피폭자들이 아직도 제대로 된 배상을 받지 못하고 외면 받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꼭 알고 있어야 한답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 오래 전에 건설된 원자력발전소가 노후 되어 방사능 안전에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지식입니다. 더구나 북한에서 핵실험을 하고 핵폭탄을 보유하고 있다는 엄염한 현실도 매우 심각하게 각성하고 있어야만 하지요.

 

  이처럼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할 '화학지식'은 차고도 넘칩니다. 현재의 일상생활을 넘어 미래세대를 위해서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지식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이 책의 제목처럼 <상식이야기>란 바로 이런 의미를 담고 있답니다. 물론, 어려운 내용이나 복잡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초등학생도 얼마든지 읽고 즐길 수 있는 재미난 책이랍니다. 하지만 이 책이 담고 있는 깊은 의미마저 가볍게 치부되면 안 되겠지요. 이 책을 읽은 초등학생들에게 살포시 '현실의 문제점'과 '미래에 다가올 지도 모르는 문제의식'을 일깨워주면 더할나위 없는 독서수업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논술쌤으로서 이 책 시리즈를 사랑하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파란정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형의 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8
헨릭 입센 지음, 안미란 옮김 / 민음사 / 201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페미니즘의 원조격인 희곡이다. 여성이 제 목소리를 내기 힘든 19세기에 남편과 아이를 버리고 당당히 문을 박차고 나가는 엔딩이 인상적인 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21세기가 된 지금에도 '여성의 목소리'는 여전히 무시 당하기 일쑤다. 왜일까? 여성들의 개인적인 성향 문제일까? 아니면 사회구조적인 분위기에 매몰된 탓일까? 그도 아니면 '여성운동'이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여서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 탓일까? 한참 부족한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마지막 이유 때문인 듯 싶다.

 

  흔히 '여자의 적은 여자다'라고 말하곤 한다. 여성운동이 제 힘을 발휘하기도 전에 산산히 흩어져버려서 흐지부지 되기 일쑤인 것은 '여성 문제'를 제대로 접근해서 남성 지배적인 사회에 당당히 입장을 발휘하려고 해도 번번히 '현실의 벽'에 부딪혀 버리기 때문이다. '현실의 벽'이란 여성은 '가정적'이어야 한다는 잘못된 고정관념을 말한다. 여성은 밖에 나가서 '자아실현'을 하기보다는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 늘 희생해야만 하는 존재로 인식되는 것을 말한다. 설령 사회에 큰 공헌을 이룰 정도로 걸출한 인재로 발탁이 된다 하더라도 '결혼의 굴레'에 갖혀버리면 임신과 출산, 자녀 양육과 교육, 살림과 가사 등을 도맡아서 해내고 난 뒤에야 허락되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남편들은 직장에서 출장, 야근, 회식을 하면서도 '가정'을 위해서라고 변명하지만, 아내들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출장도 안 되고, 야근도 안 되며, 회식은 더더군다나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린다. 왜 이런 차별이 생겨버린 것일까?

 

  물론, 임신과 출산이 전적으로 '여성의 몫'인 탓이 크다. 불룩한 배를 내밀고서 출근이라도 하면, 아무리 '여초 직장'이라고 하더라도 눈치가 보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임산부에게 가중한 일을 강요할 수 없잖은가 말이다. 더구나 출산이 가까워지면 짧게는 세 달, 길게는 삼 년 동안 직장일에 집중할 수 없게 된다. 어린 젖먹이를 내버려두고(?) 출근이라도 할라치면 '독한년' 소리 듣기 십상이고, 그렇게 해서라도 '출세'가 하고 싶으냐..라는 빈정거림을 듣기 일쑤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식을 사랑할 줄도 모르는 비정한 엄마(또는 며느리)라는 불명예스런 딱지라도 받게 되면 '일과 가정' 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해야만 하는 갈림길에 서서 고민해야만 한다.

 

  반대로 '남자'의 경우에는 전혀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남자는 결혼을 하면 더욱 출세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아빠가 되면 웬만해선 직장에서 짤리지도 않는다. 여자와는 달리 '처댁(시댁의 반대말, 처가의 높임말)'의 눈치를 보지 않고 얼마든지 사회생활에 매진할 수 있다. 오히려 사회생활을 하지 않는 가정적인 남성을 '무능력자'로 낙인을 찍을 정도로 말이다. 오히려 가정에 소홀히 할수록 사회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 '남자의 세계'다.

 

  이런 '사회구조적인 문제점'을 인식하면서 이 책을 읽어보면 느낌이 남달라질 것이다. 주인공인 '노라'는 남편을 사랑하고 가정에 헌신적이었는데도, 남편은 노라를 자신의 명예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할 뿐이었다. 노라는 남편이 쥐꼬리만한 수입으로 곤궁한 처지에 있을 때도 불평 한마디 없이 자녀 셋을 낳고 기르면서 알뜰살뜰 살림을 해왔다. 심지어 신통찮은 벌이를 하던 남편이 과로로 건강이 나빠지자 의사의 권유대로 '요양'을 가서 남편의 생명을 살려내는 일까지도 했다. 엄청난 돈이 필요한 일인데도 말이다. 물론 곤궁한 살림에 큰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범죄(?)'를 저지르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오직 사랑하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매달 '빌린 돈'을 갚기 위해서 허드렛일까지 도맡아 하면서 아끼고 또 아끼며 살림을 해나갔다. 이 모든 일을 남편에게 비밀로 하고, 남편과 아이들은 좋은 음식과 좋은 옷으로 호강(?)을 시키면서도 노라 자신은 늘 싼 음식과 싸구려 옷을 챙기면서도 절대 티나지 않게 했더랬다. 그런데도 남편은 자신의 명예만을 걱정하는 쫌생이처럼 굴었다. 아내가 자기 몰래 저지른 범죄(?)가 들통나면 자신의 명예와 처신이 깎일 것만 걱정하며 노라에게 험한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그때 노라는 결심을 한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지도 않고 아내로서 존중하지도 않는 남편과는 같이 살지 않겠노라고 말이다. 심지어 남편과 가정에 헌신적인 아내를 '법적'으로 보호하지도 않는 사회는 잘못되었노라고 당당히 선언하기까지 했다. 여성은 태어나면서부터 '남자들의 보호'가 없이는 살 수 없게 만든 세상에 대한 경고를 던진 셈이다. 여선은 어릴 때는 '아버지'의, 결혼을 하면 '남편'의, 남편이 죽으면 '아들'의 보살핌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사회에 경종을 울린 <문제작>으로 보아야만 할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 희곡이 초연했을 당시엔 수많은 관객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고 전해진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말이다. 당시 사회분위기를 대변해주는 '남편 헬메르'의 대사 한마디 한마디는 '상식', 그 자체였지만, '아내 노라'의 대사와 몸짓은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니 말이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다. 여성도 당당히 사회의 문을 두드릴 수 있는 세상이 되었고, 자신의 존재를 세상이 인정하는 시대가 펼쳐졌다. 하지만 여전한 것도 있다. 바로 '현실의 벽' 말이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굴레를 뒤집어쓸 수밖에 없는...그러한 것들이 '상식'처럼 떠벌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노라는 말한다. 자신은 아버지의 '인형'으로 자랐고, 결혼한 뒤에는 남편의 '인형'이 되고 말았다고 말이다. 노라 스스로는 '남자' 못지 않은 어려운 일을 해냈고, 충분히 사랑받고 존중받을 만한 일이었다고 자부했지만, 아버지에게서도, 남편에게서도, 누구에게서도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 사실을 인식한 순간에 노라는 떠날 준비를 마쳤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제대로 된 교육(공부)'을 받겠노라고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노라는 잘못한 일이 없다. 그런데도 남편에게는 '종속'을 강요받았고, 사회로부터는 '온전한 사람'으로 인정 받지 못했다. 사회는 노라에게 '남자의 도움(또는 보살핌)'을 받지 않고서는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존재로 치부해버렸다. 노라는 이처럼 잘못된 것을 바로 잡기 위한 '교육'을 다시 받겠노라고 당당히 선언한다. 그래서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집을 떠난다.

 

  이런 노라를 비난할 수 있을까? 남편은 몰라도 자식을 버리면서까지 '교육'에 집착하는 이기적인 여자로 낙인 찍을 수 있을까? 그래선 절대로 안 된다. 반대로 아내와 자식을 나몰라라하고 집을 떠나는 남편이 있으면 '무정하다'는 비난이 고작이기 때문이다. '사나이 가는 길'을 막지 말라는 그럴 듯한 핑계까지 마련해주면서 말이다. '여성이 가는 길'은 왜 축복해주지 않느냔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