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3 : 만화로 배우는 서양사 - 중세를 지배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역사 한빛비즈 교양툰 12
올리비에 보비노 지음, 파스칼 마냐 그림, 이정은 옮김 / 한빛비즈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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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거의 모든 가치관의 척도는 '기본과 상식에 충실한가?'다. 그것이 정치든, 종교든, 도덕이든 심지어 인성이든 '기본과 상식'에서 어긋나면 '좋지 않게' 판단한다. 나이 어릴 적에는 이를 '나쁨'으로 판단했는데, 성숙해지니 조금은 유연해져서 '좋지 않음'으로 판단하고 있다. 왜냐면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모두 나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초식동물의 잡아먹히는 관점에선 육식동물이 '최악'이고 '공공의 적'이겠지만, 육식동물에겐 잡아먹는 관점에 '삶'이고 '일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치든, 종교든, 뭐든 간에 '나와 다른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 매우 중요한 법이다. 이런 의미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역사>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을 살펴보려 한다.

 

  우리가 어렴풋이 알고 있는 '서양 중세'에 대한 이미지는 [교회의, 교회에 의한, 교회를 위한 시대]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공인 이후 십자군전쟁과 마녀사냥으로 귀결된 '중세 교회의 역사'는 오직 교회를 중심으로 두고 세상을 돌아버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오늘날의 교회를 이해하는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 1000년 전에 벌어진 교회의 만행(?)이 오늘날까지 직접적으로 전해질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런 상관이 없을 줄 알았던 그때 그 일들이 지금껏 매우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을 줄이야...난 이것이 '종교의 힘'인지 '맹신의 힘'인지 구분할 수 없지만, 그때 그 일들이 일어난 까닭을 주의 깊게 고찰함으로써 오늘날에 또다시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을 수 있을 거라는 '역사적인 교훈'을 얻게 될 것이다. 특히, 십자군전쟁과 마녀사냥 말이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유대인'들이 믿던 '유일신 사상'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모세5경'에서도 살펴볼 수 있지만 유대인들은 자기 민족이 받는 박해와 설움에서 구원해줄 메시아를 기다렸다. 하지만 유대인으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구원받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이를 좁은 의미로 해석한 유대인들은 예수를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매달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예수는 다시 부활하는 기적을 선보이며 '그리스도교'가 세상에 널리 퍼지는 계기로 삼았다.

 

  이처럼 초기 그리스도교는 '사랑'을 전파하는 것이 전부였다. 원수조차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은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는 행위가 스스로를 부정하는 행위와 동일하다는 깨달음을 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누가 너의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을 내밀어라"라는 말씀의 뜻은 때리는 사람의 행위에서 볼 때, 상대의 오른뺨을 때리기 위해선 오른손을 손바닥방향으로 휘둘러야 하지만, 그 뺨을 때린 오른손으로 상대의 '왼뺨'을 때리기 위해선 왼쪽에 위치한 오른손을 '손등방향'으로 휘둘러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그 당시에 '부정(틀렸음)'을 나타내는 행위였으므로 예수의 말씀은 '스스로 틀렸음'을 깨달을 때 진정한 사랑을 깨우칠 수 있다는 의미였단다. 이런 복음은 예수의 제자들에게 전파되었고, '사도 바울'에 의해 더욱 널리 퍼지게 되고, 마침내 서로마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공인을 받고 '로마 가톨릭'으로 자리맺음 하게 된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만 자리 잡은 것이 아니다. 동로마 방향에서는 '그리스정교회'가 자리 잡았고, 중동에서는 '이슬람교'가 훗날 자리 잡게 된다. 훗날 가톨릭이 '구교와 신교'로 갈라서게 된 개혁 뿐만 아니라 수많은 종파와 이단으로 '분화'되는 것으로 엄청난 대혼란이 찾아올 거라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지 않은가. 암튼,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이처럼 '말씀(복음)'이 변질되고 왜곡되어 점점 본질과 다르게 된 까닭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봐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 까닭을 가장 잘 설명한 것은 공자님이셨다. "현자는 달을 가리키는데 바보는 손가락만 바라본다"는 말씀 말이다. 이는 세상의 모든 종교(사상)가 같이 겪고 있는 문제점이다. 말씀을 가장 잘 실현하기 위해서 인간이 만든 '원칙'이 애초의 말씀과는 사뭇 다른 뜻으로 해석되고 엉뚱한 방향으로 문제를 만들어 해악을 끼치기 때문이다. 이건 완벽한 신이 아닌 불완전한 인간의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놉!! 나쁜 원칙은 바로 잡거나 없애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우리는 이를 종종 '개혁'이라고 부른다.

 

  종교가 세속화하고 정치권력과 결탁하며 경제적 특권을 누리며 타락해가는 일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종교가 속세와 인연을 모두 끊고 '저 세상 텐션'으로만 나아가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어차피 종교는 인간이 사는 곳에서 '쓸모'가 있는 법이다. 방법이 잘못되었다면 바로 고치고 원칙이 틀렸다면 바로 잡으면 된다. 또한, 종교는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에 임해야 한다. 다시 말해, '가진 자'를 위한 종교가 아니라 '못 가진 자'의 편에서 사회적 균형을 맞춰야 한다. 종교가 그러지 못할 때 어떤 사회든 대혼란이 찾아왔으며 헐벗은 자를 더욱 헐벗게 만들곤 했다.

 

  이 책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민낯'을 보여주는 책이다. 성경에서 전해는 '말씀'의 진위를 따지며 중세의 교회가 행한 모든 일을 낱낱히 파헤쳤다. 역사가 가르치는 '밝은 면'도 있었지만, 반대로 역사가 감췄던 '어두운 면'도 함께 살펴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진위논란'..다시 말해, '팩트 체크'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졌다. 역사전공이 아니다 보니, 이 책이 '거짓'으로 단정한 사안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책이 늘 진실만 말하지 않다는 '상식'선의 불확신이긴 하지만, 종교의 민감성을 감안했을 때, 함부로 속단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매우 유익한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어서 좋았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덕분에 더욱 좋았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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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슬라 웨이 - 미래가치 투자자들이 주목하는 테슬라 혁신의 7원칙
미카엘 발랑탱 지음, 오웅석 옮김 / 한빛비즈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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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말하면, 난 '기업가 정신'을 다룬 책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국가경제의 든든한 기둥 역할을 하는 '기업'의 가치를 폄하해서가 아니다. 단지 그런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빠지는 '특정기업 옹호론'이 펼쳐지기 때문에 그다지 호감(?)이 가지 않을 뿐이다. 그런데도 난 '유한킴벌리', '삼성전자', '마이크로소프트' 등의 기업가들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는 책들을 곧잘 읽곤 했다. 그리고 그 책에서 그 기업가들이 얼마나 훌륭한 업적을 남겼는지 잘 볼 수 있었다. 물론 책에는 담겨 있지 않은 '그 이면'에 대한 내용도 신문기사를 뒤적이며 살펴보고 말이다. 그래서 <테슬라 웨이>를 읽으면서, '일론 머스크'의 면면도 살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은 '4차 산업혁명' 시대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2차 산업혁명 때에는 대량생산을 실현한 '포드주의'가, 3차 산업혁명 때에는 고객만족을 내세운 '도요타주의'가, 4차 산업혁명 때에는 디지털플랫폼이 불러온 다양한 혁신을 적재적소에 알맞게 구현한 '테슬라주의'가 널리 회자되고 있다는 책의 설명에 공감한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포드주의'가 완벽하지 않고, '도요타주의'가 모든 기업에 만족할 만한 성과를 가져다주지 않은 것처럼, '테슬라주의'도 그럴 것이라는 상식적인 비판에 마주 서야만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오래된 선진국들이 자국의 '제조업 붕괴'로 인해 겪고 있는 경제적 어려움은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기업의 이윤을 높이기 위해선 포드처럼 대량생산을 밀어붙여야 하는데, 소비자의 까다로운 입맛을 맞추기 위해선 도요타처럼 '리스크'를 안고 '안정'을 감수해야만 하는 모험을 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디지털'이 상용화되고 '제조업'마저 부진한 상황에서 '무한한 리스크'와 '감당하기 힘든 안정 비용'을 감수하면서 버틸 수 있는 기업은 전세계적으로도 몇 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테슬라조차 매출이 예년보다 증가했음에도 엄청난 적자를 보는 상황에서는 말이다.

 

  어쩔 수 없이 기업은 '이윤추구'라는 것을 할 수밖에 없다. 특히 '4차 산업혁명'은 플랫폼(시장)의 변화가 매우 빠르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기업도 빠른 변화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가벼워'야 한다. 그러면서도 온갖 리스크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든든'한 자금력과 기술력을 갖춰야 하고 말이다. 이걸 '테슬라'는 어떻게 마련할 수 있었을까? 바로 '협업 / 융합 / 열정 / CEO의 비전'이었다.

 

  기업들이 갖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부서 이기주의'다. '관료주의'에서 많이 보여주는 이런 이기주의가 기업의 운명까지 영향을 주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 기업은 끊임없이 협업하고 최적화하고 대량화 해나가야 한다. 물론 잘나가는 기업이라면 당연히 이런 문제쯤은 잘 해결해 나가곤 한다. 다시 말해, '테슬라'만의 고유한 스킬은 아니란 말이다. 지금까지는 '테슬라'가 잘 헤쳐나갔다고 보여주고 있고 말이다.

 

  또 하나는 '융합'이다. 현재는 '제조업'과 '소프트웨어'가 별도로 구현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미래에는 'IT 진화'를 통해 둘은 융합하게 될 것이다. 쉽게 말해, 자동차와 컴퓨터의 일체화는 '자율주행자동차'로 거듭날 거란 말이다. '인공지능'과 융합된 이후에는 자동차는 자동차가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자동차에 '인간의 감정'을 탑재(?)할 필요성까지는 없겠지만, '인간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된 자동차가 그러지 말라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생각과 감정(느낌)은 정말 구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암튼, 이런 기술적 융합의 힘을 보여주는 기업이 앞으로 승승장구할 거란 생각은 어렵지 않게 할 것이다.

 

  오늘날의 테슬라가 있게끔 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무엇보다 열정과 비전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미래에는 더욱더 '수평적인 관계'를 추구하게 될 것이다. 누구라도 조직에 몸 담게 되면 모두가 함께 혁신을 말하고 실천해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CEO가 비전을 제시하면 '상명하복'하면서 부하직원들이 일사분란하게 맡은 일을 해내는 것을 최고로 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미래에는 그렇지 않다. 누구라도 리더가 될 수 있고 비전을 제시하며 '함께'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스타트업 정신'은 탑다운이 아니라 보텀업에서 더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라도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쏟아내고 누구보다 발빠르게 미래를 향해서 열정적으로 뛰어드느냐가 '기업 성패의 관건'이 되었다. '테슬라'가 보여준 사례들은 바로 그런 열정과 비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뭐, 이런 점들만 열거하다보면 테슬라는 위대한 기업이고 바람직한 롤모델이며 '테슬라주의'는 모든 기업의 모범답안이 될 것만 같다. 하지만 동전에도 앞면이 있으면 뒷면이 있기 때문이다. 앞면과 똑같은 뒷면을 가진 '가짜 동전'은 희귀하다는 점을 빼면 통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분명 '테슬라'도 뒷면을 갖고 있다. 바로 '도덕성 논란'이다. 만약, '자율주행차'가 사고를 일으키면 누구의 책임일까? 보통은 '운전자'에게 책임을 따지지만 '자율주행'이라는 점에서 운전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힘들어졌다. 그렇다면 차를 직접적으로 움직인 '소프트웨어'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까? 기술적 장치에게 책임을 묻기는 힘드니, 결국엔 '소프트웨어'를 만든 사람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자율주행차를 '만든 사람'이 모든 책임을 떠안게 된다. 그렇다면 '교통사고 피해금액'을 감당하다 파산하기 딱 좋을 것이다. '테슬라'도 여기에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신기술로 수익창출할 생각만 하고 있지, 그 수익과 그 기술로 인한 무한한 책임에는 발뺌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일론 머스크는 '비트코인'으로 장난질(?)을 쳐서 수많은 투자자들의 원성을 듣고 있다. 투자의 일상적인 면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뻔한 장난질이었다. 그의 비도덕적인 행보에 개탄을 금치 못하는 이들이 많은 까닭이다.

 

  하지만 '테슬라'가 보여주는 수많은 선례들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4차 산업혁명 이후'의 세계를 엿보게 만들어주었다. 물론 정답은 아니다. 그래도 미래 산업의 면모를 예측하는데 많은 영감을 준 것은 사실이다. 이제 우리의 미래는 '테슬라'가 보여준대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테슬라가 걸어간 길'을 따라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이 만들 미래세계로 가야 한다.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가는 도중에 '또 다른 갈래길'이 나올 수도 있고, 기후변화, 판데믹 등과 마주쳐서 한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상황에 쳐할지도 모른다.

 

  이렇듯 난 '특정 기업가 정신 옹호론'으로 마무리하는 책을 딴생각을 하며 읽는다. 정답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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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 삼국지 톡 - 세상에서 제일 빠른
심 쌤 지음 / 한빛비즈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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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명나라 때 쓰여진 소설이다.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진수가 쓴 <정사 삼국지>에 필적할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은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둘의 차이점은 명백하다. 바로 '관점의 차이'다. <정사 삼국지>는 삼국을 통일한 진나라(초대 황제 사마염)를 정통으로 보며, <삼국지연의>는 한나라의 후예인 촉한(초대 황제 유비)을 정통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굳이 주인공을 내세우자면, <정사 삼국지>에서는 '조조'가 주인공으로 보일 때가 많고, <삼국지연의>는 '유비'를 주인공으로 내세울 때가 많다는 차이점을 보인다. 그래서 꼬장꼬장한 독자들은 진정한 역사를 담은 <정사 삼국지>만을 권장하고, 판타지(?)가 가득 담긴 <삼국지연의>는 허황된 이야기라면서 읽지 말라고 떠들어대곤 했다.

 

  하지만 오랜 옛날부터 수많은 백성들과 독자들에게 사랑받은 주인공은 단연코 '유비'다. 따라서 시대의 간웅으로 전락한 '조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정사 삼국지>는 그닥 인기가 없었던 때도 있었다. 근래에 들어서 '삼국통일의 기틀'을 세운 조조의 공로를 높이 사면서 주목을 받기도 하지만, 조조의 처세술이라는 것이 결국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기회주의적인 면이 없지 않아서, 의리와 인정으로 뿜뿜하는 '유비의 매력'에 빛을 잃어버리기 십상인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삼국지>를 다룬 소설 가운데 '촉한정통론'이라고 불리는 유비가 주인공인 <삼국지연의>가 널리 읽히고 있는 셈이다.

 

  아닌 게 아니라 <삼국지연의>를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유관장 삼형제에 관심이 쏠리기 마련이다. 밑천 하나 없으면서 '도원결의'만으로 의기투합해서 황건적의 난을 평정하고, 머무를 땅이 없어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유랑집단(?) 불과하면서도 수많은 인재와 영웅들의 관심을 받고, 마침내 와룡과 봉추를 얻고 유비가 날개를 펼쳤을 때,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짜릿한 전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서 조조와 손권 진영에서는 그런 짜릿함을 찾아볼 수가 없다. 심지어 유비 진영의 이야기가 아닐 때에는 지루함(!)마저 느낄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런 전차로 <삼국지연의(이하 삼국지)>를 읽을 때에는 유비와 함께 웃고 울면서 읽어나가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렇게 <정사 삼국지>보다는 <삼국지>를 읽는 편이 덜 부담스럽고 재미도 한층 높기 때문에 초보독자들이라면 <삼국지>를 권하는 바다. 그런데 과연 <삼국지>를 꼭 읽어야만 할까? 웬만하면 10권짜리 분량으로 읽다가 지칠 정도로 긴 소설인데다가, 등장인물마저 수 천 명은 족히 될 정도로 어마어마할 뿐만 아니라 '주인공급'만 줄잡아 뽑아도 100여 명이 훌쩍 넘어가기 때문에, 이들의 '줄거리'를 쫓아가며 읽어내는 일이 만만찮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힘들게 완독을 했다고 해도 '시대에 뒤떨어진 옛날책'이라는 점도 읽기에 꺼리게 만들곤 한다. <삼국지>의 기본 전략은 '모략'이다. 상대의 뒤통수를 치고 배반하기를 밥 먹듯이 하고, 그래야 출세를 할 수 있다는 '난세'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 본성 가운데서도 '나쁜 짓'을 너무 많이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유비 진영의 인물들은 '의리'를 따르는 등 배워야 할 '좋은 일'을 하고 있긴 하다. 그런데도 유비 진영의 결과는 허무하리만치 좋지 않고 시작 또한 엄청 힘들기만 했다. 과연 이런 결말을 보여주는 소설을 '권장도서'로 읽힐 만 한 것일까?

 

  그럼에도 읽어야 한다고 말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단순한 재미와 교훈이 <삼국지>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삼국지>의 시대배경은 후한 말에서 위·진으로 이러지는 '한·위·진교체기'다. 한마디로 혼란스런 시대였으며 '난세'였다. 바로 이런 난세를 평정하기 위해 저마다의 방법으로 능력을 한껏 보여준 이야기가 담겨 있는 책이 바로 <삼국지>인 셈이다. 물론 최후의 승자는 진나라를 건국한 사마염(사마의의 손자)이다. 하지만 사마염만 옳고 나머지는 그르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을 것이다. 바로 '실패'를 통해서도 배울 수 있는 것이 '인생'인 탓이다. 창업 군주로 꼽히는 조조, 유비, 손권(손견, 손책 포함)에게서 나름의 장단점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어려운 시기(난세)'를 헤쳐나가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값진 교훈일 것이다. 살면서 누구나 겪는 '어려운 시기'에 좌절하지 않고 '이겨내는 힘'을 배운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삼국지>를 읽을 가치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다. 이렇게나 좋은 책이건만 웬만한 독서력이 아니면 읽어내기 힘들다는 점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너무 길고 너무 장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좀 더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 필요하지 않을까? 바로 그런 생각으로 등장한 책이 바로 이 책 <3분 삼국지 톡>이다. <삼국지> 가운데서도 '30가지의 핵심 주제'를 선정해서 '3분 안'에 읽고 내용을 정리할 수 있게 펼쳐낸 책이기도 하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장황한 내용'을 싹 걸러내고, '필수 등장인물'만 소개하며, 가장 중요한 줄거리만 골라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 부연설명으로 마무리한 내용이다.

 

  물론, 이 책 한 권을 읽고 <삼국지>의 정수를 단박에 알아차리고 진한 감동의 여운을 만끽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허나 대략의 줄거리와 내용을 파악을 한 뒤에 '10권 분량'의 <삼국지>를 도전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독파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면 누구나 '아는 만큼 보이기' 때문이다. 또 '알아야 재미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책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삼국지 길라잡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정리하면, <삼국지>는 읽으면 좋은 책이다. 누구나 살면서 '어려운 시기'를 경험하기 마련인데, 그럴 때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삶을 엿보면서 나에게 딱 맞는 지혜를 미리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꼭 그러한 절박한 지혜를 얻을 목적이 아니더라도 읽으면 좋은 책이다. 왜냐면 굉장히 재밌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런 재미를 알아챈 독자들이 그 길고 긴 책들을 읽고 또 읽는 점이 바로 증거다. 만약 아직도 <삼국지>를 읽지 않았다면 읽길 바란다. 어려워서 읽기 힘들다면 이 책을 통해 도움을 받으시길 바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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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중세의 여인들
아일린 파워 지음, 이종인 옮김 / 즐거운상상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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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에 대한 책이다. 아일린 파워는 '여성 사학자'로 20세기 초반을 살다간 짧은 생이지만 '여성의 관점'을 선보이기 쉽지 않은 시대에 당당히 역사학자로서의 명성을 날릴 정도로 대단한 성과를 보였고, 주위 동료들에게도 대단한 인정을 받을 정도로 탄탄한 실력을 선보였다고 한다. 과연, 그런 여성학자가 쓴 <중세의 여인들>에서는 '색다른 시각'을 엿볼 수 있었다.

 

  '여성사'는 근대 이후에 주목받기 시작했을 정도로 비교적 최근에 성과를 보여주는 분야다. 또한 <역사>라는 것이 대부분 '남성의 관점'으로 쓰여진 탓에 여성을 다룬 분량이 대단히 적고, 설령 다루었다고 하더라도 대부분 '부정적인 시각'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연구하기 상당히 까다로운 분야라고 아일린은 지적하였다.

 

  그런데도 아일린은 '중세의 여인들'이 의외로 남성 종속적이 아니라 '양성 평등한 위치'에서 실력행사를 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따라서 중세의 종교관이 여성을 '원죄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부정적인 시선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런데도 '여성의 지위'가 대단히 높이 평가되던 부분이 있었음을 낱낱이 밝혀내었다. 이를 테면, 영주인 남편이 영지를 비우면 영주의 부인이 영지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을 혼자서 도맡았다는 점이나 아버지나 남편의 재산을 '상속'이라는 이름으로 엄청나게 차지함으로써 자신의 발밑에 수많은 남성들을 '구혼자'라는 이름으로 엎드리게 할 수 있었던 사회적 지위도 당당히 펼칠 수 있었음을 꼬집었다. 특히, '집안일'에 대해서는 남성들이 아무런 상관(간섭)을 할 수 없게 하는 능력은 시대를 막론하고 공통된 특권이었던 점도 역사적으로 여성이 소외되었다는 인식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을 인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처럼 '여성의 지위'가 펼쳐질 수 있었는데도, '한계점'을 드러냈다는 것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사회 전반적으로 '남성우위적인 편향적 분위기'가 맹렬하게 펼쳐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기에도 아일린은 '반론'을 던진다. 이는 <역사기록>이 '남성위주'로만 쓰여진 탓이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여성에 대한 기록'이 태부족하기 때문에 충분히 감안하여 연구를 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래도 크게 달라지는 '역사적 관점'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지만, 당시로서는 '소수'일 뿐인 <여성사>에 대한 '토론과 대화의 장'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주목할 만한 편이다. 실제로 오늘날에는 <여성사>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진행중인 것을 보면, 가히 '아일린'은 선구자 역활을 매우 잘 했음을 알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중세에 대한 이미지'가 더는 깜깜한 '암흑'이 아니라는 점이다. 중세에 대해 알면 알수록 다채로운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특히, <기사도>나 <궁정연애>, 그리고 <수녀원>에 대한 연구를 보면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었던 '중세의 이미지'가 단박에 깨져버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중세에는 종교에 의한 '마녀사냥'이 심했던 시절로 기억하면서 '여성 인권'이 최악 중에 최악일 것이라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중세의 기사들은 '기사도'를 수행하기 위해 평생 '한 여성'에게 순정을 바치는 것을 최고의 명예로 삼았고, 귀족여인들은 수많은 남성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꽃보다 더 귀한 대접을 받으며 생활했다는 사실도 엿볼 수 있었다. 거기다 '수녀원'을 통해서 여성 스스로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다'라는 생각을 품게 하였고, 교육을 받으며 여성 자신들만의 꿈을 꾸고 실현시키는 무대가 되기도 했었단다.

 

  물론, 어디까지나 '한정된 특권'이었고, 귀족여인들이 아닌 신분이 낮은 여인들은 꿈도 꿀 수 없는 삶이었지만, 그런 여인들도 나름의 삶을 살면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며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고 아일린은 주장했다. 다만 '기록'으로 전해지지 않아 안타깝지만,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여성사'는 매우 제한적인 탓에 감질나는 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런데도 '즐거운상상'을 하면서 읽어나가면 새로운 면모를 엿볼 수 있었기에 '기존의 역사책'과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읽을 수 있었다. 이외에도 '여성사'를 읽으며 또 다른 여성의 모습을 엿보고 싶다는 므흣한 상상으로 책읽기를 마무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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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의 힘 - 지리는 어떻게 개인의 운명을, 세계사를, 세계 경제를 좌우하는가 지리의 힘 1
팀 마샬 지음, 김미선 옮김 / 사이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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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정학적 위치에 놓은 우리 나라는 '지리의 힘'을 눈여겨 보아야만 한다. 자연환경이 인문환경을 만들 뿐 아니라 문명을 만들고, 문화를 만들기 때문이다. 거기다 '전략적 요충지'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쟁의 승패까지 가늠할 수도, 가름할 수도 있는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곤 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오늘날에도 국제적인 정치, 경제, 사회 문제들이 여전히 '지리적인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 만으로도 '지리의 힘'은 절대로 좌시할 수 없는 국가적인 힘으로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각설하고, 이처럼 중대한 힘인데도 이 책이 가지고 있는 크나 큰 결함은 '서구인의 눈'으로 서술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밀접한(?) 근동과 중동 아시아까지는 그럭저럭 서술하고 있지만, 반만년의 역사동안 이어져온 '극동 아시아의 힘'은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한 듯한 서술이 아쉬울 따름이다. 다시 말해, 서구인의 눈으로 본 '극동 아시아'의 문제점과 해결점을 그저 '명치유신 이후에 보여준 일본의 힘'을 근거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테면, '한반도의 오늘날의 문제'를 과거에는 거대한 두 나라인 중국과 일본의 침략에서, 그리고 근대 이후에는 러시아와 미국까지 포함해서 해석하고 있다. 이는 '분단된 한반도'를 설명하는데 기가 막히게 잘 들어맞는 듯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의 한일관계와 한중관계, 그리고 비핵화를 둘러싼 남북한 사이의 관계를 해석하는데 오판하기 십상이다. 다시 말해, 서구인의 눈으로 본 '한국의 힘'은 과거부터 오늘날까지 아예 없었던 듯 무시하며 '주변국들의 흥망성쇠'에 한반도의 국가들이 이리저리 부대끼는 '약소국의 비애'로 전락해버리곤 한다는 말이다. 이처럼 우리 나라가 '대륙 국가의 일원'으로 '반도 국가의 특징'을 살리며 대륙과 해양을 호령했던 시절도 있었다는 점, 이로 인해 중국과 일본이 크나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며, 머지 않은 미래의 대한민국이 그 영광을 다시 찾을 거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긴, 이 책이 2015년에 쓰여졌으니 그렇게나 우습게 보였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아 보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암튼, 다시 '지리의 힘'으로 시선을 되돌리면, 인류의 터전인 '땅의 법칙'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그 무엇도 섣불리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책이다. 그 때문에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러며, 미래에도 그럴 것이라는 '땅의 상식'을 배울 수 있는 책이다. 그리고 꽤나 날카로운 분석이기도 하다. 특히 '오늘날의 국경선'이라는 결과물이 나올 수밖에 없는 논거를 조목조목 들고 있는 점에서 고개가 절로 주억거릴 수밖에 없을 정도다.

 

  대략적으로 살펴보면, 천하의 중심에서 '대륙의 바깥'으로 나가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중국이 오늘날에는 왜 '해양강국'으로 거듭 나려고 애를 쓰며 '동중국해'와 '남중국해'를 넘어 태평양과 인도양까지 모두 '중국의 앞마당'이라고 그토록 우겨대는지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미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지리의 혜택'을 누리며 사상 초유의 강대국으로 성장하고 세계를 주름 잡을 수 있게 된 발자취, 역시 '지리의 힘'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었다.

 

  한편, 러시아는 어떤가?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넓이에 비해 초라한(?) 인구를 갖춘 탓에 영토의 대부분이 '불모지'와 다를 바가 없다는 점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더구나 영토의 대부분이 '평지'인 탓에 주변국의 침략을 자주 받는 저주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험준한 지형'으로 방어막을 두르지 못한 탓에 침략을 원천적으로 막을 수는 없었어도, 이는 침략한 쪽에게도 엄청난 재앙이 되곤 했다. 나폴레옹도, 히틀러도 이를 간과하고 섣불리 러시아를 공격했다가 쫄딱 망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러시아는 '지리의 힘'을 아주 잘 활용(?)하고 있는 나라인 셈이다. 그러나 여전히 '부동항(얼지 않는 항구)'을 아직 얻지 못한 이유로 여전히 '영토확장'을 꿈꾸는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푸틴의 장기집권을 우리가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물론, 이 또한 '러시아의 팽창'을 몹시 경계하는 '서구인의 편견'에서 기인한 점을 부정하기 힘들지만 말이다. 이를 감안하면서 읽으면 '색다른 해석'도 가능해지면서 매우 흥미로워질 것이다.

 

  또한, '유럽연합'에 관한 이야기도 색달랐다. 특히, 프랑스와 독일이 오랜 앙숙이면서도 유럽연합을 버티게 만드는 두 기둥이라는 사실이 솔깃했다. 사실, 유럽연합은 '잘 사는 나라'와 '못 사는 나라'로 갈라서기 일보직전에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는 서유럽과 남유럽의 불균형으로 잘 보여주고 있어서 문제 이해가 정말 쉽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마땅한 해결책이 없다'는 점이다. 그런 와중에 프랑스와 독일이 유럽연합의 핵심으로 다른 회원국들을 떠받치고 있으며,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두 나라의 파트너십으로 원만히 해결하고 있다는 해석이 눈여겨 볼만 했다. 따라서 향후의 유럽연합의 흥망성쇠는 '프랑스와 독일'의 오랜 경쟁의식과 절대적인 공동협력의 조화에 달려 있다는 점이 눈여겨 볼만 했다.

 

  이처럼 저자는 '지리'라는 렌즈를 통해서 세계사를 통찰하려는 결실을 선보였다. 물론, 이 책의 '사실'이 명백한 '진리'에 가깝다는 오판은 고이 접어두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에서 말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세계 정세와 국제정치, 경제, 사회 등에 관련된 모든 것이 '지리'에서부터 시작한다는 해석은 매우 흥미롭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지형적인 제약이 덜한 오늘날에도 '지리'는 우리에게 매우 유용한 지식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주를 항해할지도 모르는 미래에도 여전히 '지리'는 중요할까? 여전히 중요할 것으로 전망한다. 인류가 '땅'에 머물며 살아가는 한에는 중요도가 절대로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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