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떠보니 선진국 - 앞으로 나아갈 대한민국을 위한 제언
박태웅 지음 / 한빛비즈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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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진국이 된 대한민국이 나아갈 길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정해져 있다. 선진국이 되었으니 만찬을 즐길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차려놓은 만찬을 전세계에 골고루 나눠주어야 하는 것이 모범답안이기 때문이다. 혹여라도 차려놓은 만찬을 즐길 생각이라면 일찌감치 접으라고 충고해야 할 것이다. 왜냐면 그런 생각이라면 결국 '최후의 만찬'을 즐기는 꼴이 될테니 말이다.

 

  이 책은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선진국이 되었다지만 어쩌면 우리 역량이 전세계를 압도해서 선진국이 되었다기보다는 다른 선진국들이 '코로나19'를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서 그나마 잘 버티고 있는 대한민국이 돋보이게 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위기 때, 보여주는 실력이 진짜이듯, 대한민국이 보여준 위기대응능력만으로도 대단한 자부심을 느껴도 무방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코로나19'라는 위기만 잘 헤쳐나간다고 '선진국의 위상'을 꾸준히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잘 알 것이다. 그밖에도 '선진국다운 모습'을 보여주어야 진정한 선진국이고 '선도국가'가 될 수 있을 텐데, 정책적으로 후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디지털시대'에 아날로그적인 행태를 보이면서도 정작 '문제'가 무엇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아둔한 면면이 아직도 여전하기 때문에 생기는 불안감이다. 또한 '4차산업혁명'을 이야기하고 'AI'를 떠들어대는 시대에 여전히 '산업역군'을 키우는 교육시스템으로 인재를 키우고, 과거에 성공한 모델을 고집스럽게 유지하며 '탈피(변화)'를 거부하는 어리석고 형편없는 시스템이 아직도 사회 곳곳에 산적해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대표적인 문제점은 '일재의 잔재'를 아직도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이 대단한 것은 여러 문제점을 갖고 있지만 이런 문제점을 스스로 고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이런 시도가 번번히 '구태의연한 권력집단'에 의해 물거품이 되곤 하지만,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 정말 대단하다. 더구나 그런 노력의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는 점도 눈여겨 볼만 하다. 우리 내부의 고질적인 문제도 심각하지만 대한민국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DNA를 갖고 있는 듯, 끊임없이 도전하고 응전하곤 한다. 이런 멈출 줄 모르는 열정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고, 또 이끌고 있다는 점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책에는 선진국이 된 대한민국을 자랑스러워하는 마음과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에 걸맞지 않는 시스템이 아직도 산적해 있다는 우려스런 마음이 뒤섞여 있다. 이를 테면, 경제는 발전했지만 증거로 내세우는 '지표'가 낡았으니 신뢰가 가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점점 심해지는 양극화현상을 해소할 수 있는 신박한 아이디어가 절실하다는 점도 아울러 지적하고 있다. 만약 이런 '낡은 지표'로 돌려막기하면서 '경제성장' 운운하는 '낡은 정치세력'에 대한민국을 맡기다간 큰일난다는 식이다. 또한 머지않아 일상 곳곳에서 구현될 'AI'를 제대로 다룰 줄 아는 실력을 갖추지 않았다가는 역시 큰 코 다친다는 지적도 꽤나 공감이 간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도 달라지고 있는 'AI기술'에 다가가지 못하면 어느 한순간에 급격하게 변화한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AI시대'는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훌쩍 다가올 것이다.

 

  단언컨대, 대한민국의 미래는 KTX의 속도로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변화를 맞이할 것이다. 그런 빠른 변화속에서도 여전히 '선진국'이고, 세계를 이끌 '선도국가'가 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물음이 계속 떠오르는 책 읽기였다. 한편으론 격세지감을 느끼기도 했다.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 아둥바둥하던 시절에 청춘을 보낸 이들이 얼마나 많았더냔 말이다. 나라 잃은 설움을 겪었던 시절에 청춘이던 분들은 정말 큰 변화를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발목을 잡는 고질적인 문제들을 바라볼 때면 답답하기 그지 없다. 산적한 갈등을 해소할 길이 막막하기 때문이다. 허나 갈등은 푸는 것이 정답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지금은 갈등을 안고서 함께 건너뛸 수 있는 슬기로움을 발휘해야 할 때이기도 하다. 갈등을 풀겠다고 한발짝도 나아가질 못하는 일은 결단코 없어야 한다.

 

  어쨌거나, 끝내 대한민국은 세계를 선도하는 국가가 될 것이다. 대한민국의 장점은 위기극복 능력이 뛰어나며 엄청난 변화에도 발빠르게 대처하는 역동성이다. 그 역동성을 잃지 않는 한 대한민국은 멈출 수 없다. 그런 자긍심이 진정한 선진국으로 만들어 갈 것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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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무삭제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38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김운찬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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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왜 <군주론>을 읽어야만 하는가? 바티칸의 '금서'이면서 동시에 '서울대 필독서'인 까닭은 무엇인가? 과연 마키아벨리즘은 부정적으로 인식해야 하는가? 아니면 긍정적으로 해석해야 하는가?...명쾌한 대답보다는 모호한 질문만 한가득 쏟아지는 '이 책'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일까? 하나하나 풀어보자.

 

  <군주론>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결과만 좋으면 방법이나 과정은 아무 상관없다'일 것이다. 이를 명문장으로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다]로 정리했지만, 어쩐지 나는 명쾌한 문장보다 풀어 쓴 글이 더 끌린다. 그것은 '해석의 여지'를 남기기 때문일 것이다. 문장이 짧고 명쾌할수록 '다른 해석'은 할 수 없다. 그 때문에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다]라는 문장 놓고 보면 반박할 여지도 없이 마키아벨리는 '나쁜놈'으로 해석하게 된다. 하지만 '결과만 좋으면 방법이나 과정은 아무 상관없다'로 풀어 쓰면 '나쁜놈'에게 반론을 던지고 싶기 때문이다. '그건 아니지'..라면서 말이다.

 

  맞다. 마키아벨리가 그저 '나쁜놈'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왜냐면 <군주론>을 쓸 당시의 '피렌체'는 공화국이 무너지고 '메디치 가문'에 의해 종속된 '군주정'에 가깝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혼란스러운 것은 피렌체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전체가 그랬다. 찬란했던 로마의 영광은 찾아볼 수 없고, 이름만 남은 '신성로마제국' 역시, 이탈이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엔 너무 멀었다. 그런 틈새를 파고 들어 프랑스, 에스파냐, 베네치아, 심지어 교황령까지 이탈리아 반도를 혼란과 분열로 이끌며 각국의 이익을 위해 조각조각 찢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마키아벨리는 '강력한 군주'가 등장해서 혼란을 일거에 잠재우고 '통일 이탈리아'를 꿈꿨던 것이다. <군주론>에는 바로 이런 바람이 담겨 있다.

 

  물론, 이렇게 거창한 바람만 담겨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면 마키아벨리는 '이 책'을 당시 권세를 누리고 있던 '메디치 가문'에 헌정했기 때문이다. 피렌체 공화국의 공무원으로 활동했던 마키아벨리는 메디치 가문이 '공화정'을 뒤흔드는 과정에서 '실직'을 하고 '감옥'에 수감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는데 말이다. 다시 말해, 마키아벨리는 이 책을 메디치 가문에 '헌정'하고서 일자리를 구걸하는 처지로 전락한 셈이다.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정리하면, 마키아벨리는 '구국의 신념'과 함께 '개인의 영욕'을 이 한 권에 담았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더 큰 바람이었을까?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마키아벨리에 대한 평가가 긍정과 부정으로 갈린다. '결과만 좋다면'이라는 문구에 해당하는 스케일이 너무나도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만약 '마키아벨리 자신만 좋다면'이라고 해석한다면 정말 나쁜놈일 것이고, '피렌체만이라도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날 수 있다면'이라고 해석하면 애국자일 것이며, '이탈리아가 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수만 있다면'이라고 해석한다면 '로마'라는 위대한 이름을 재정립하는 선구자로 읽히게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건 '독자의 스케일'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당신의 스케일은 어느 정도인가?

 

  암튼, <군주론>을 오늘날의 정치에 막대입하기는 곤란하다. 시대가 변했으며, 무엇보다 '이 책의 진면목'을 알아본 이들이 '지배하는 소수'만이 아니라 '지배 당하는 다수'인 시대이기 때문에, 설령 오늘날의 지배자가 <군주론>을 모티브로 통치를 한다해도 곧이 곧대로 먹혀들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의 가치를 살펴보면 가벼이 넘길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 있다.

 

  첫째는 혼란한 시대에는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소 폭력적이고 몰인정하며 때론 비열한 수단을 써서라도 '대의'를 이뤄내기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두려운 존재'로서 누구도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뿜어낼 수 있는 강력한 리더십 말이다. 둘째는 외적의 침입은 무조건 자국의 군대로 막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돈으로 빌려온 용병이나 외국의 강력한 군대를 빌어서 외적을 물리칠 수 있다는 허튼 환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용병은 평화시에만 강력하고 외국 군대는 들여오기는 쉬워도 내보내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행운과 역량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진정한 실력을 기르고 꾸준히 단련해야 한다. 행운만 쫓으면 게을러지기 쉽고, 역량만 기르다보면 끝내 지쳐 쓰러지기 마련이다. 행운이 역량과 만나면 시너지 효과를 톡톡히 빛내며, 역량에 행운까지 따르면 결과는 언제나 곱빼기가 되기 때문이다.

 

  비판적으로 읽어야 할 점이기도 하다. 강력한 리더십은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다. 혼란을 잠재우고 평화가 찾아오면 국가권력은 다시 '시민의 몫'이 되어야 하고, 강력한 리더십을 '추종하던 무리'는 반드시 솎아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평화는 오래 유지할 수 없으며 '또 다른 혼란'이 찾아오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국의 군대로만 모든 것을 지켜낼 수는 없는 법이다. 때론 동맹도 필요하고 혈명도 유지해야 한다. 물론 철저히 '자국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군대의 속성을 잘 파악하고 적절히 활용해야 한다. 그럼에도 '자국 군대'의 가장 큰 문제점은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점이다. 한 나라의 경제를 휘청거리게 만들 정도로 군대는 '소비제' 가운데 블랙홀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자국 군대를 유지함으로써 얻는 이득이 크다는 점도 분명히 상기해야만 한다. 유지하지 못하면 '망국의 설움'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판할 점은, '르네상스 지식인들'의 공통적인 문제점이기도 한데, 바로 '여성 비하적인 표현'이 난무하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표현이 바로 "포르투나(행운의 여신)는 거친 남성(군주)을 좋아한다"는 표현이다. 그래서 행운의 여신을 거칠게 다룰수록 군주에게 유리하게 행운이 작용한다고 풀이하곤 하는데, 요즘 시대라면 철컹철컹 감이다. 이런 식의 거친 표현들이 [고전]에서 '관용적인 표현'으로 다뤄지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지혜의 보고'라는 수식어가 무색할 정도로 '무딘 성 감수성'으로 가득한 [고전]을 읽어야 하는 고역을 어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때는 그랬지"라면서 그냥 넘겨야만 하는가?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이럴 땐 <완역>보다는 <의역>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좋은 생각 좋은 말'만 해도 모자를 시간에 '시대착오적인 표현들'을 [고전]에 담긴 '원문'이라는 허울 좋은 변명(?)으로 귀에 담아야만 한단 말인가.

 

  끝으로 마키아벨리는 '인간 본성은 악하다'는 사회통념으로 <군주론>을 썼다. 그래서 다수인 민중을 믿기보다는 현명한 소수가 '당연히' 지배하는 것이 정당하는 섣부른 결론을 내려버리고 말았다. 매일 뉴스를 장식하는 사건사고만 보고 있자면 그럴 법도 하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에선 '착한 사람'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착한 사람들 중에서 '현명한 사람'은 더 많다는 진리를 놓치고서 <군주론>을 읽으면 폭력적이고 독단적인 지배자, 다시 말해, 독재자를 옹호하는 궤변만 늘어놓게 될 것이다. <군주론>은 절대로 폭력을 정당화하거나 미화한 책이 아니다. 오히려 선량한 시민 마키아벨리가 애국하는 마음으로 쓴 책에 더 가깝다. 그 애국이라는 것이 다소 폭력적이고 심지어 비열한 것으로 읽히는 까닭은 르네상스 시기에도 '우매한 군중'이 너무 많다는 가정을 밑바탕에 깔아두고 썰을 풀었기 때문이다. 이는 '선각자'라는 자부심이 낳은 잘못된 귀결이다. 마키아벨리와 같은 '르네상스인'들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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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지적 허영을 위한 퇴근길 철학툰 지적 허영을 위한 퇴근길 철학툰
이즐라 지음 / 넥서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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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쨌든, 이 책은 '철학'을 다룬 책이다. 감히 '철학책'이라 표현하지 못하는 까닭은 '철학의 겉핥기'에서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철학을 '아는 척' 할 수 있을 정도의 지적허영이 담겨 있기에 '철학책'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허나 이 책에서 가장 눈여겨 볼만 한 점은 바로 '철학자들의 철학을 나열'한 것에 있지 않고, 철학사상에 대한 작가 나름(?)의 철학이 담겨 있는 점이다. 한마디로 작가의 '철학적 뒷담화'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유쾌함을 촌철살인적으로 쏟아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진정한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철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철학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가 뭐라고 얘기했더라?" 이 딴 걸 알려고 철학책을 읽는 게 아니다. 그런 걸 달달 외울 필요조차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철학은 절대 '암기'가 아니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했어. 그런데 '무엇'을 생각해야 존재할 수 있는 거지? 무조건 '의심'만 하면 존재할 수 있는 건가?" 이렇게 생각의 꼬리를 물며 '자기만의 답'을 내놓다보면 어느새 자신도 철학자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어떤 답'을 내놓아야 할까? 그런 부담감을 내려 놓고 그냥 '철학'을 즐기길 바란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하며,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솔직하게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아는 척'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했다. 물론 그러다 독배를 마시게 되었지만, 소크라테스는 그 독배마저 당당하게 들이켰다.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믿고, 그 신념대로 살았기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으니, 독배를 거부하고 도망(탈옥)갈 까닭이 전혀 없다면서 말이다. 정말 멋진 철학자가 아닌가.

 

  비록 내 '철학'이 위대한 철학자들의 '생각'에 미치지 못한다한들 무엇이 부끄럽단 말인가. '내 생각'에 잘못이 있다면 올바르게 하면 되고, 틀림이 있다면 옳게 고치면 그뿐이다. 내 생각에 오류는 없다며 똥고집을 부리는 것이 아닌 이상,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살아가는 삶은 멋진 삶이다. 혹여라도 '사이비'라면 어떡하냐고? 그건 좀 문제가 있다. 내 '신념'이 사이비에 가까워서 주변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것이라면 꺾어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면 미쳐도 혼자 미쳐야지 주위 사람들을 해악을 끼치면 '범죄행위'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개똥철학'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도 '범죄행위'와 다를 바가 없으니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이처럼 철학은 결코 '맹신'과 '강요'를 수반해서는 안 된다. 철학은 언제나 '비판'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이 간혹 똥고집을 피우며 자신만이 옳다고 박박 우기는 까닭은 젊잖게 표현해서 '토론중'인 셈이다. 위대한 철학자들은 언제나 이런 비판과 토론에 프로였다. 이렇게 설명하고 보니, 아마추어 철학자들의 진흙탕 같은 '토론중'을 보고 있노라면, 늘 답답했었는데, 왜 답답했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한때는 <100분 토론> 애청자였었는데...

 

  암튼, 책이 참 깔끔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책속 철학자들의 '일상'과 '사상'에 대해 간략한 정보를 추려내는 것만으로도 '철학상식'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상식을 암기할 필요는 없다. 허나 '구구단'을 외우면 '암기 이후의 수학공부'에 유용한 스킬이 되는 것처럼 '책속 철학상식'을 간략히 정리해낼 수 있게 된다면 '이후의 철학공부'에 대단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외우지 않아도 얼마든지 가능하고 말이다.

 

  하지만 난 '작가의 철학'이 꽤나 맘에 들었다. 어디서든 "철학을 좋아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지적허영을 누리기 위해 이 책을 펴냈노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시민'으로 거듭나기 위해선 '교양'이 필수가 되어야 한다. 그 교양을 쌓기 위해서 '철학적 사고방식'이 꼭 필요하고 말이다. 그 필수필요를 위해 우리 모두 '지적허영'을 쌓아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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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피보팅 - AI는 어떻게 기업을 살리는가
김경준.손진호 지음 / 원앤원북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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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화의 시기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 도태되기 마련이다. 자동차가 처음 등장했을 때 마부들은 말도 없이 느릿느릿 움직이는 '초기 모델'을 보며 한껏 비웃었지만, 1세기가 지나기도 전에 마부들은 일자리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거리에서 마차를 찾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자동차'라는 변화를 받아들여서 마부에서 운전기사로 거듭난 이들은 살아남았을 것이다. 이들이 맡은 일은 '운송'이었지만 '운송도구'가 바뀌는 시대에는 '새로운 방법'으로 운송을 할 줄 아는 이들만 살아남은 셈이다. 그렇다면 'AI(인공지능)'가 등장할 가까운 미래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제 아날로그 시대는 저물어 간다. 물론 '복고열풍'과 더불어 아날로그가 대유행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 열풍의 주인공들이 점점 나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면 '아날로그의 종말'이 그리 멀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아날로그를 대신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디지털'이다. 그리고 디지털은 '코로나19 대유행'과 함께 전세계에 대격변을 일으키고 있다. 한마디로 '오프라인'이 저물고 '온라인'이 대세를 이루었다는 말이다. 판데믹시대에는 '비대면'이 일상일 수밖에 없는 탓이지만, 그동안 디지털이 아날로그를 대신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이토록 빠르게 변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시대를 마주하고도 아날로그를 고집한다면 자동차시대의 마부꼴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디지털이 마냥 달가운 것만은 아니다. 코로나19 4차 대유행을 맞이한 대한민국 교육현장에선 또다시 '비대면 수업'이 일상이 되었지만, 학생과 학부모 들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학생들은 집에 있는 컴퓨터 앞에 앉아 화면만 쳐다보는 수업에 일치감치 실증을 보였다. 학부모들도 대부분 맞벌이 가정인 탓에 학교나 학원이 아닌 집에만 자녀를 그냥 방치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나날이 늘어난 지 오래다. 더구나 방학을 맞이해서 온라인수업마저 하지 않으니 더욱 걱정이고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날로그(등교수업)를 대체하는 디지털(줌수업)이 마냥 반갑기만 할까?

 

  그렇지 않다. 그때문에 디지털은 아날로그와 융합하는 방법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이를 테면, 배달앱으로 주문을 받는 식당은 코로나시대에도 살아남았고, 이런 변화에 발빠르게 대응하지 않고 맛과 분위기를 위해 포장배달보다는 홀 중심으로 운영한 식당은 조용히 폐업하고 말았다. 물론 단골손님으로 근근히 버티는 식당도 있긴 하지만, 젊은 세대들은 이미 디지털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아날로그 방식'만으로 버티기는 점점 더 힘들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이제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융합(DX)'은 대세가 되었다.

 

  그러면 어떻게 준비하면 좋은가? 이 책의 3부, 4부, 5부는 바로 '디지털 전환과 융합'을 위한 방법과 사례 들을 조명하고 있다. 뭐, 사업을 운영한 경험도 전무하고, 전문적인 내용이라 그 내용을 속속들이 알아볼 깜냥은 없기에 대략적인 내용만 전한다면, '완전한 AI로의 전환보다는 할 수 있는 AI부터 접목시켜라' 왜냐면 모르면 못 쓰고 알면 잘 쓰기 때문이다. '막연한 격변보다는 구체적이고 특화시킨 변화가 필요하다' 왜냐면 게임조차 업그레이드를 순차적으로 해야 달라진 UI에 쉽게 적응하고, 주로 쓰는 캐릭과 유용한 캐릭을 집중적으로 성장시켜야 게임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전환은 작은 성공을 바탕으로 큰 영역으로 확장시켜야 한다' 사업의 기본은 '하나의 아이템'을 성공시키는 것부터다. 모든 일이 다 그런 것처럼 말이다.

 

  이제 '디지털 전환과 융합'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시대가 되었다. 아날로그는 추억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일본의 '워크맨'은 분명 대박아이템이었지만 오늘날에는 거의 쓰질 않는다. 정말 쓰질 않는다. 그런데도 이번 올림픽에서 일본은 '워크맨'이라는 추억을 다시 꺼냈다. 성공할 수 있을까? 현지에서조차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소식이다. 스마트폰으로 스트리밍을 받아 원하는 음악을 골라 듣는 시대에 어렵사리 구한 카세트테입으로 건전지 사다 끼워 유선이어폰를 귀에 꽂아 듣는 수고(?)스러움을 누가 따라하겠느냔 말이다.

 

  이젠 변화를 거부할 수조차 없다. 갈수록 디지털은 우리 생활을 파고 들 것이며, '사용자'는 디지털에 더욱 익숙해질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기업도 변해야만 한다. 그래야 살아 남는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된다는 '진화론'은 생물에게만 적용되는 법칙이 아니기 때문이다. 변화하라. 마냥 어렵지만은 않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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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인문학이 처음인데요 - 교양인이 되기 위한 내 생애 첫 인문학 처음인데요 시리즈 (경제)
박홍순 지음 / 한빛비즈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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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학은 어렵다. 깊고 방대한 내용 때문에 어렵기도 하지만 인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개념어'에 두루 통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철학을 할 때는 '철학용어'를, 과학을 할 때는 '과학용어'를, 예술을 할 때는 '예술용어'를 대충이라도 알아야 책을 읽더라도 뭔 내용인지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의사와 간호사 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데, 의사 가운데 안면이 있는 패션디자이너를 우연히 만나 합석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디자이너는 혼자가 아니라 모델들과 다음 무대를 준비하기 위해 함께 이동중이었다. 이렇게 모인 '의학계'와 '패션계'가 서로 전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서로를 이해하며 대화를 진행할 수 있을까? 아마도 서로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멀뚱멀뚱 어색한 시간이 얼른 지나가길 바랄 것이다. 바로 인문학을 처음 만난 독자들이 느끼는 당혹감과 비슷할 것이다. 뭔가 대단한 것이 있는데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무엇 말이다.

 

  한편, 인문학은 암기가 절대 아니다. 철학사를 줄줄 꿰지 않아도 얼마든지 인문학을 즐길 수 있다. 고전문학을 전공해야만 인문학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절대 아니다. 미술을 감상하기 위해서 '미술사'를 달달 외우는 것이 얼핏 도움이 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것만이 정답이 아니다. 그저 보이는대로 아는대로 즐기면 된다. 이처럼 인문학도 제멋대로 즐기면 된다. 왜냐면 인문학의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맞다. 인문학을 즐기면 정말 행복해진다. 아는 것이 많아져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몰랐던 것을 이해하는 순간 짜릿한 행복을 맛보는 경험을 했다면 인문학을 즐길 준비는 이미 충만한 셈이다. 왜냐면 그 짜릿함은 모르고 살 수는 있어도 단 한 번만 맛보고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이 책에 언급된 '인문학적 지식들'을 그저 나열하고 소개하는 것으로 이 책의 찐맛을 느낄 수는 없다. 어쩌면 이 책에 언급된 지식들조차 '저자의 생각'일 뿐, 절대적인 지식의 원천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저자의 생각과 다르다며 반론을 던질 수도 있고, 심지어 저자의 생각이 틀렸다며 부정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인문학은 원래 그런 학문이다. 청출어람이라고 스승보다 뛰어난 제자가 되기 위해서 때로는 스승과는 전혀 다른 색깔을 뿜어낼 수 있어야 진짜 인문학을 맛볼 수 있는 법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나도 매년 200여 권의 책을 독파하면서 10년도 넘게 지난 지금에 와서야 겨우 인문학의 문턱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그 문턱을 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짜릿함을 느꼈고 말이다. 그동안 읽은 책보다 앞으로 읽을 책이 더 많다는 즐거움을 이해한 독자라면 그 짜릿함을 이미 느꼈을 것이다. '인문학 예찬론'은 이쯤하고, 이 책을 본격적으로 소개하자면, 처음에는 '인문학의 필요성'을, 중간에는 '인문학의 효용성'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문학의 쓸모'를 이모저모 피력한 책이다.

 

  인문학의 필요성은 앞서 설명한 것으로 대신하고, 인문학의 효용성이란 무엇이냐면 '인간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한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삶과 죽음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또 죽음은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가? 감정은 무엇이며 사랑이란 또 무엇인가? 등등 인간으로서 궁금한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물론, 역사, 예술 등 문화적인 것들도 모두 인간이 만들고 사유한 것이기에 당연히 인문학에서 다룬다. 이쯤 되면 인문학은 다루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로 방대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문학의 쓸모'란 무엇인가? 바로 일상조차 인문학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깜냥이다. 한국인은 일중독자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휴식과 여가를 즐기지 못하는 편이다. 요즘 MZ세대는 그나마 잘 즐기는 편이라고 하지만 '월화수목금금금'이라는 노동(알바)의 굴레를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다. 암튼 일 할 줄만 알고 놀 줄 모르는 한국인에게 '여가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내용으로 대단원을 내리는 이 책이 의미심장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어쩌면 이 책의 궁극적인 주제이자 결말은 '행복으로의 귀결'일 것이다. 인문학의 필요성으로 화려한 시작을 하지만 결국은 "인문학적으로 인간은 행복을 추구합니다. 인문학은 행복을 고뇌하는 학문입니다. 고로 인문학은 행복입니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문제를 고뇌할 때에도 '행복한 결말(해피엔딩)'이 되기 위해 인문학적인 고찰이 필요하다고 은근히 강요하고 있다. 마치 '인문학이라면 모든 문제를 행복하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라면서 말이다. 때로는 '비극적 결말'을 내놓고서도 뻔뻔스럽게 '우리의 현실은 저렇게까지 비극적이지는 않잖아. 정말 다행이야'라고 우기기도 한다.

 

  결국, 우리는 모두 인문학을 알아야만 한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변화의 속도마저 엄청나게 빨라서 점점 더 복잡해지는 세상에서 '제대로' 걸음을 내딛으며 비틀거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인문학은 꼭 알아야만 한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갖게 되는 이도 점점 많아지는 것이 팩트인 요즘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문학으로 가는 길'이 너무 길고 험난하다는 점이다. 여기에 더욱 갈피를 잡지 못하는 까닭은 어중이떠중이들이 교양이랍시고, 방대한 지식을 나열하며 달달 외우는 방식으로 인문학을 강요하고 있는 탓에 시작도 하기 전에 두렵고 질려버리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고 했다. 첫술에 배부르지 않다고도 했다. 차근차근 인문학을 접하면 된다. 다행히 요즘에는 인문학을 쉽게 접할 수 있는 방법이 참 많다. 내 경험을 비추어도 '논술쌤'이었던 탓에 어린이청소년용 <인문학책>을 많이 접한 덕분이었고, <교양툰>처럼 만화형식으로 된 <인문서적>도 두루 접하며 차근차근 읽어나갔다. 결과는 매우 흡족했다. 그렇게 '신화'와 '역사'를 두루 습득한 다음에는 '과학'과 '철학', 그리고 '예술'과 '종교'까지 섭렵했다. 그리고 지금은 '고전문학'을 독파하고 있다. <성경>에도 적혀 있듯이 '두드리면 반드시 열리는 법이다(마태복음 7장7절)' 아직도 인문학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어서 서두르길.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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