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머리 만드는 초등 문해력 수업
김윤정 지음 / 믹스커피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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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해력은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을 말한다. 독해력과 비슷한 말이지만, 독해력이 '책'을 읽고 이해하는 힘이라고 한다면, 문해력은 '글로 쓰인 모든 것'을 이해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문해력은 독해력보다 훨씬 포괄적인 이해능력을 말한다. 그렇다면 요즘 아이들은 독해력을 넘어서 문해력을 갖춰야 하는 걸까? 그건 단순히 책을 읽고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서 '글로 쓰여진 것' 뿐만 아니라 그림이나 동영상으로 전달하는 내용까지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젠 단순한 텍스트로 정보를 전달하는 시대를 넘어서 그림과 영상, 거기다 '이모티콘'과 같은 여러 가지 기호까지 '언어의 역할'을 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 처리해야할 정보의 양은 얼마나 방대하냔 말이다. 보고 읽는 순간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속도까지 빨라야만 한다. 그렇기에 미래 세대의 우리 아이들에겐 '문해력'이 더할나위 없이 절실해진 셈이다.

 

  문해력의 기본은 독서에서 비롯된다. 이렇게나 중요한 능력인데 고작 '책읽기'로 키울 수 있다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틀림없는 사실이다. 웹툰과 너튜브 등등...요즘처럼 책 말고도 볼 수 있고 보고 싶은 것들이 넘쳐나는 시대인데도 말이다. 왜냐면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는 건 여전히 독서뿐이기 때문이다. 글을 소리내어 읽고 눈으로 따라가며 읽는 활동은 엄마 뱃속에서부터 시작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흔히 '태교'라고 하는 것인데 문해력을 알고 하든 모르고 하든 아무 상관이 없지만, 엄마는 알게 모르게 뱃속의 아기에게 '문해력 수업'을 해왔던 셈이다. 그렇다면 뱃속을 나온 아이들에게도 책을 들려주고 읽으라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매우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고 말이다.

 

  그런데 이를 간과해서 독서수업을 허투루 여기는 부모님들이 꽤나 많다. 물론 요즘 아이들에게 책만 읽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요즘 아이들은 책읽기 말고도 할 수 있는 하고 싶은 일들이 넘쳐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을 읽고 '생각하는 힘'을 기르거나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활동은 독서만한 것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웹툰(만화) 형식이나 동영상에 담긴 정보는 눈에 들어온 것이 머릿속에 '잔상'으로 남기 때문에 '상상력'을 발휘할 기회가 줄어들며 한계성을 드러내곤 한다. 하지만 글을 읽거나 들려주면 머릿속에서는 활발하게 상상을 하게 된다. 바로 이 상상력의 크기가 '생각하는 힘'과 비례한다. 그리고 그 상상력의 크기에는 '한계'가 없다. 흔히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는 표현도 그래서 나온 말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그림이나 영상으로 '이미지'를 시각화해버린 정보는 확장 가능성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마치 머릿속에서 카메라를 찰칵한 것처럼 '순간적인 정보'를 인화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반면에 독서를 하면 머릿속에서는 온갖 상상력을 발휘하게 된다. 간혹 '삽화'가 들어 있는 책이 있어서 상상력을 방해(?)하는 것 같지만, 삽화는 '글내용'을 바탕으로 하였고 '연속적'인 장면을 연출하며 줄거리를 진행시키지 않으며, 오히려 '연상력'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상상력을 방해하지 않고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한마디로 책의 내용을 이해하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삽화란 말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문해력'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체계적인 '독서활동'이 전개되어야 제대로 익힐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질문(발문)'이다. 좋은 질문은 아이들에게 책의 내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며, 경험이 적어서 아이들의 안목으로는 볼 수 없고 보이지 않던 '숨은 내용'을 보여주어서 '생각하는 힘'을 더욱 증폭시켜주므로 매우 중요하다. 좋은 질문과 더불어서 '창의적인 독후활동'을 덧붙여준다면 아이들은 '독서'를 통해서 감수성을 기를 수 있음은 물론, 신체적, 감각적, 예술적 창의성까지 함께 배울 수 있으므로 꼭 해보길 권한다. 이 모든 활동이 '문해력'을 길러준다는 확신과 함께 말이다.

 

  이렇게나 중요한 문해력이고, 우리 아이에게 꼭 길러주고 싶은 능력인데, 맞벌이 등 아이에게 시간을 할애하고 신경을 써주는 것조차 벅찬 부모들도 많을 것이다. 앞서 설명한 내용들이 매우 거창하고 복잡한 방법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감히 독서논술선생으로서 말씀 드린다면, 하루 30분만 투자해도 충분히 기를 수 있다고 조언해주고 싶다. 널리 알려진 '침대 맡 책읽기' 말이다. 아이들이 잠들기 전에 엄마아빠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아이들이 평생 기억에 남는 추억이기도 하다. 물론 잠들기 직전이 아니라 온가족이 '식시시간'을 활용해서 독서토론을 펼치는 것도 좋은 활동이다. 또한, 아이들에게 책을 읽으라고 던져주듯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먼저 솔선수범하며 자녀와 함께 '거실에서 책읽기'를 자연스럽게 실천한다면 충분히 '문해력'을 기르는 활동을 충분히 할 수 있다. 질문의 갯수는 중요하지 않다. 독후활동에 준비물이 필요하지도 않다. 요령만 터득하면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독서습관'을 길러주는 것이다. 매일매일 강요하듯 읽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책읽는 습관'을 길러주어야 학년이 올라가도 어른이 되어도 꾸준히 독서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해력의 능력은 초등학교보다 성인이 되어서 더욱 필요하고 절실하기 때문에 독서는 평생해야만 한다. 그리고 독서습관은 어릴 적부터 시작하며 기르는 것이 좋고 말이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속담이 바로 그 증거다.

 

  하지만 막상 '문해력 수업'을 하려고 하면 걸림돌이 생기기 마련이다. 먼저 '작심삼일'이 되고 만다는 점이고, 작심삼일을 넘어서고 난 다음에는 '어떤 책을 골라 읽어야 하는지' 고민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은 전문가의 '도서목록'을 참고하는 것이 가장 따라하기 쉬운 방법일 것이다. 그렇게 50권, 100권이 넘어가게 되면 어느새 책을 고르는 안목이 생기게 되며, 적어도 '좋아하는 책(장르)'을 직접 고를 수 있는 실력을 쌓게 된다. 이때 주의할 점은 <전집류>의 책을 사들여서 빠짐없이 읽으라고 하는 방법이다. 가장 쉬이 질리게 만드는 방법이므로 절대 해서는 안 된다. <전집류>는 어느 정도 독서력이 받쳐준 다음에 구매해도 절대 늦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책도 '비슷비슷한 유형의 책'을 30권~100권 정도 진열되어 있는 책을 보게 되면 '어른의 눈'에는 예쁘게 보일지 몰라도 '아이의 눈'으로 보면 부담만 느낄 뿐이다. 실제로도 <전집류> 가운데 아이가 진짜 재밌게 읽는 책은 3~5권 정도가 전부다. 십중팔구 나머지 책들은 거의 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잘 모르겠다는 분들을 위해, 이 책에는 '도서목록'과 함께 '질문요령'이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아이들이 꼭 알고 있어야 할 주제에 관련된 내용의 책들로 선별되어 있으며, 부모님이 자녀들과 함께 책을 읽으면서 '독서지도'를 할 내용까지 자세히 적혀 있으므로 참고하면 좋을 듯 싶다. 물론, 몽땅 다 따라 읽을 필요는 없다. 10권 안팎만 따라해도 '읽고 싶은 책목록'이 저절로 생길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실천이 잘 안 된다 싶으면 '독서수준'이 낮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으니 '비슷한 주제'의 좀더 쉬운 책을 골라서 읽으면 좋겠다. 그래도 '독서지도'를 잘 할 자신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가까운 '독서논술지도사'의 도움을 받아도 좋고 말이다. 굳이 대형학원에 보내서 비싼 비용을 지불하며 배울 필요는 없다. '문해력 실력'을 키우는 방법은 '학원비 금액'과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참관수업 의사를 밝히고 선생님의 수업을 직접 보고 들은 다음에 독서선생님을 골라도 좋고 말이다.

 

책드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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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거저보기 : 서양철학 편 한빛비즈 교양툰 13
지하늘 지음 / 한빛비즈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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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클리드의 <기하학> 강의는 재미나기로 유명을 떨쳤지만 매우 어렵기로 정평이 나있기도 하다. 이런 유클리드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가 두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선생님의 강의가 재밌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어렵습니다. 도대체 기하학을 배워서 어따 써먹을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한 학생에게 유클리드는 "누가 저 학생에게 동전 몇 닢 던져주거라. 학문을 돈벌이로 잘못 이해한 녀석이니 말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또 하나는 그 유명한 강의를 왕자도 들었다고 한다. 한창 강의에 빠져들즈음에 왕자는 무척이나 어려운 증명을 하다 말고, "내가 말이야. 한 나라의 왕자인데 말이야. 기하학을 좀더 쉽게 배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유클리드 선생?"라고 물으니, 유클리드는 곧바로 "기하학에는 왕도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여기서 왕자는 왕이 다니는 편한 길을 물었지만, 유클리드는 왕관의 무게를 짊어진 자의 의무를 강조하면서 동시에 학문의 순수성을 밝히고 있는 셈이다. 앞의 이야기에서도 '학문은 돈벌이가 아닌 재미로 배운다'라고 말하며, 학문의 순수함과 학자의 진지함을 동시에 강조하였다.

 

  이렇게 인물의 에피소드(뒷담화)를 통해서 엿볼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비록 인문학(철학)의 정수를 바로 깨우칠 수는 없을 지라도 '호기심'은 부쩍 생길 것이다. 또한 철학자의 뒷담화를 들으며 '철학에 대한 관심'을 키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호기심과 관심이 '철학에 대한 이해'로 연결될 수만 있다면 이 책의 목적은 100% 완성된 셈이다.

 

  물론, 이 책 한 권으로 모든 철학을 마스터할 수는 없다. 철학의 진면목은 어쩔 수 없이 <철학 고전>을 통해서 배울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어려운 철학의 세계로 들어가게 해주는 '마중물' 역할을 하는 책이라고 소개해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호기심과 관심으로 어려운 '철학의 세계'를 말랑말랑하게 만들어놓는 효과를 맛보았으니 분명 달라진 자신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철학을 공부해야 할까? 수많은 답변이 나올테지만, 개인적으로는 '신념'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누구나 철학을 공부해야 하고 아무나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신념이라고 해서 거창할 것 같지만 '줏대'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것이다. 줏대란 '마음의 중심'이란 뜻이다. '저 사람은 줏대도 없어'라고 말할 때, 마음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의 이야기에 팔랑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람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적어도 살아가면서 줏대 없는 사람은 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럼 줏대는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단언컨데 '공부'가 정답이지만, 여러 공부 가운데 '철학이 으뜸이다'라고 답하고 싶다.

 

  왜냐면 철학은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힘을 기르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알게 되고, 나아가 정의와 불의를 구분할 수 있게 해준다. 적어도 자신이 하는 생각이 어떠한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지적능력은 길러야 하지 않겠냔 말이다. 이런 지적능력은 민주시민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 소양이 되고 말이다. 이런 시민으로 거듭나지도 않은 채 누군가에 의해 '조종 당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마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나서 다시 책을 돌아보면, '철학자들의 삶'이 남달라 보일 것이다. 우리가 철학자라고 이름하는 이들은 모두 '저마다의 생각'을 펼쳐냈으며, 행동으로 옮겼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생각과 행동 들에 정말 감탄하지 않더냔 말이다. 시대의 큰 획을 그은 철학자를 우리는 길이길이 되새기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우리도 철학자처럼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미치게 된다. '줏대' 있게 살면 멋져 보이고, 줏대가 '공감'을 얻으면 따르는 이들이 생기며, 따르는 이들이 늘어나면 '사상'으로 거듭나고, 그 '사상'이 인류 공영에 이바지하면 철학이 되고, 종교가 되며, 역사에 기록된다. 먼 옛날 소크라테스가 그랬고, 공자가 그랬으며, 예수와 부처가 그랬으며, 지금 바로 당신이 될 수도 있다. 정말 멋지지 않은가. 철학과 철학자들의 뒷담화로 풀어낸 철학의 세계가 말이다. 그리고 그 세계의 주인공은 당신이어야만 가장 의미가 있을 것이다.

 

  끝으로 이 책을 다시 소개하자면, 만화형식으로 풀어낸 '서양철학 인물사'다. 복잡다단한 철학을 풀어내는 대신에 '뒷담화 형식'으로 철학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을 부쩍 끌어올릴 수 있는 책이다. 끌어올린 호기심과 관심으로 철학에 대한 지적허영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허나 난 여기서 그치지 않으련다. 우리가 철학을 공부하는 목적은 '줏대'를 갖기 위해서다. 다시 말해, '생각하는 힘'을 길러야 하고,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힘은 민주시민사회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시대를 앞서가는 철학자가 되어 인류 공영이라는 큰 획을 그을 수 있을 것이다. 다름 아닌 당신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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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심리학 실험실 - 집에서도 할 수 있는 50가지 초간단 심리실험
마이클 A. 브릿 지음, 류초롱 옮김 / 한빛비즈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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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류시화의 <소금인형>이라는 시가 있다. 내용을 추려보면, 바다의 깊이를 알고 싶은 소금인형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바다로 뛰어들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사랑하는 당신의 속마음이 궁금한 나도 당신의 속마음을 알기 위해 내면으로 들어가자 소금인형처럼 녹아버렸다는 내용이었다.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확인받고 싶어하곤 한다. 내가 사랑하는만큼 너도 날 사랑하고 있는 것인지, 얼만큼인지, 속이는 것은 아닌지, 진정으로 사랑받고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지 등등을 알고 싶어진다. 이처럼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심리학자가 되고 싶고, 심리학 실험을 해서라도 상대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진다.

 

  물론, 사랑에 빠져야만 심리학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일상이 온통 '심리학 실험'인 까닭에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심리학자'가 될 준비가 이미 되어 있다. 이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매일 아침 <오늘의 운세>는 새아침을 알리는 알람마냥 클릭하곤 한다. '띠별 운세'로도 모자라 '별자리 운세'를 번갈아 확인하며 '연애운 / 건강운 / 재물운' 따위를 점치며 최상의 운세로 판별되면 '복권'을 구매하거나 '주식'에 과감히 투자하는 등 열심히 실험데이타를 모으며 심리학자가 된 양 실험에 매진한다. 도대체 '심리학'과 '운세'가 뭔 상관이냐고? 실상은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알고 싶다'는 것만이 유일한 공통점이지만, 원래 심리학, 자체가 좀 생뚱맞은 학문인 까닭에 '심리학'을 어려워하는 선입견을 타파하고자 풀어보았다.

 

  그렇다. 심리학은 절대 어려운 학문이 아니다. 그리고 어차피 '속마음'을 100% 정확히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저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놀라운 사실은 많은 사람들은 98%의 거짓속에서 2%의 진실만으로도 100% 신뢰를 내주는 오류를 범하고 만다는 것이다. '보이스피싱'을 비롯한 수많은 사기꾼들이 아주 쉽고 단순한 방법으로 사기를 치지만 그 얕은 수법에 홀라당 속아넘어가 전재산을 빼앗기는 사람이 속출하는 까닭이 바로 그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잘 속아넘어가는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연구대상으로 삼아 학문으로 거듭나게 하곤 한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심리학'이 철학의 범주에 속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틀렸다. 심리학은 '과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리학자들은 자신의 가설이 맞는지 증명하기 위해 '과학실험'을 하곤 한다. 우리는 '생각'과 '마음'의 차이점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모호하게 표현하는 까닭에 철학과 심리학을 구분하기 어렵게 만들지만, 철학은 사유를 통해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고, 올바르고 바람직한 사회구현을 위해 실천을 강조하곤 한다면, 심리학은 인간의 마음상태를 알아내기 위해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하여 증명하는 '과학적인 탐구방법'을 근간으로 한다. 이처럼 매우 다른 학문인 셈이다.

 

  그렇다면 심리학자들은 왜 인간의 마음을 연구대상으로 삼았던 것일까? 그건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유명한 심리학자들도 때때로 인간들이 보여주는 '특이한 행동들'에 깊은 관심을 두고서, 그 행동의 원인인 '심리상태'를 연구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 유명한 '전기충격실험'도 인간이 얼마나 잔혹할 수 있는가에 대한 궁금증에서 시작되었고, 실험결과 또한 충격적이었다. 인간은 잘못된 권위나 명령에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는 듯이 엄청난 전류를 사람에게 보내는 단추를 눌렀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가 아니라 실제처럼 연기한 상황이었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실험자는 '가학적인 행동'일지라도 '권위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실험을 통해서 '악의 평범성'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히틀러 같은 악당이 아니더라도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심리적 자극만 주는 것으로 평범한 사람도 악마와 같은 짓을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이런 실험결과로 '평범한 사람의 무죄'가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비도덕적이고 비상식적인 행동은 하지 않아야 한다는 당연한 의무를 잊고, 잘못된 권위와 명령에 아무런 비판없이 따랐다는 것만으로 유죄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실험은 두 번 다시 할 수 없게 되었다. 왜냐면 비윤리적인 실험이었기 때문이다. 사전에 아무런 정보를 인지하지 못한 실험참가자가 겪었을 공포(!)는 훗날 심리적 스트레스와 심각한 트라우마로 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점은 평생 '죄책감'을 갖고 살아갈 가능성도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일부 참가자는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저질렀다며 심리적 안정을 되찾기까지 엄청난 시일이 걸렸다는 후문도 있을 정도였다. 따라서 이 실험 이후에는 비윤리적인 실험의 경우에는 '금지처분'을 내리는 조치를 취해 두 번 다시 할 수 없는 실험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우리는 심리실험을 통해서 재미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더구나 집에서 할 수 있을 정도로 초간단 실험이라면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서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재미난 이야기를 나누는 즐거움은 덤이다. 또한 한 번 해보면 멈출 수 없을 것이다. 왜냐면 인간은 호기심 덩어리인 탓이다. 한마디로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한다. 유사과학인 '혈액형'으로도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느냔 말이다. 꼴랑 4가지 유형밖에 되지 않는데, 인간에 관한 모든 것을 혈액형에 담았다. 정말 신기할 따름이다. 여기 방구석에서도 할 수 있는 '심리학 실험실'이 있다. 당신은 과연 셜록홈즈의 뺨을 후려칠 정도의 심리학자가 될 준비가 되었는가? 심심풀이로 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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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괄량이 길들이기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정유선 옮김 / 레인보우퍼블릭북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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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셰익스피어의 두 번째 책으로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꼽았다. 물론 그동안 읽은 책이 그것 뿐은 아니었으나 요즘 글이 좀 안 써지는 관계로 '셰익스피어 읽기'에 게을러진 것은 사실이다. 우선 <4대 비극>과 <5대 희극>을 중점적으로 읽고 있다. 원활한 리뷰 생활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 되는데로 써보려 한다. 서론이 긴 까닭도 바로 손가락에 기름칠 좀 하려는 까닭이다. 다시 시작이다.

 

  여자를 '길들인다'는 표현에 시작부터 난관에 빠져들었다. 누가 누구를 길들인다는 표현이 요즘에는 부적절한 탓이다. 근래에 저질러지는 '데이트 폭력'과 '가스라이팅', 그리고 '스토킹'과 같은 성폭력에 끔찍한 느낌을 받고 있다면 이 책이 달갑게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고전문학>이라고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려고 해도 노력해도 말이다. 더구나 극의 결말이 누구도 못말리는 말괄량이 카타리나를 순종적인 아내인 케이트로 변신해서 수많은 남자들이 원하는 여인의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에 매우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과연 길들여진 케이트가 '우리 시대가 원하는 여인상'일까?

 

  우리가 읽어야 할 고전문학으로 '셰익스피어'를 꼽는데 주저하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어린이 필독서로 '셰익스피어의 문학'을 선정하는 것에 반감을 갖는 학부모도 없기 마련이다. 그런데 아무도 반대하지 않는 대문호의 작품속에서 교육적으로도 인성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은 내용'을 발견했을 때의 느낌은 놀라움, 그 자체가 되고 만다. 모름지기 <고전>에서는 시대를 거슬러 변하지 않은 아름다운 지혜를 배울 수 있기에 아무런 의심도, 거부감도 갖지 않는 '믿음'이 밑바탕을 깔고 있을 진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결코 바람직하지 않는 내용'이 담겨 있다니...

 

  <햄릿>에서도 셰익스피어는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이니라"라는 명대사를 남기며, 유혹에 약하고, 이성적인 사고력에 뒤쳐지는 캐릭터들이 등장하곤 했는데, <말괄량이 길들이기>에서도 꼭 같았다. 그나마 '카타리나'의 첫 등장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아버지나 구애자들에게 당당하고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피력하며, 때로는 마음에 차지 않으면 거칠게 말하고, 그에 걸맞게 당당하게 행동하는 모습 말이다. 21세기 여성의 당당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주위의 평판은 형편없다. 카타리나는 바람직한 여성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대명사가 되었으며, 그녀를 자식으로 둔 아버지에게 심심한 위로를 건내며, 그녀를 아내로 맞이할 '미래의 남편감'에게 애도를 표하는 방식으로 카타리나를 '돌려까기' 하기 일쑤다. 심지어 동생인 비앙카도 언니인 카타리나를 '심술쟁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식으로 에둘러 비꼴 뿐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카타리나는 '페미니즘(여성운동)'의 선구자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작품속 무례한 남정네들과 무지한 여인네들 덕분에 카타리나는 스스로 '여성운동의 선구자'인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물론, 오늘날의 페미니즘은 그 갈래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관계로 단순한 '여성운동'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난 '여성운동'에 찬성하고, 진정한 '양성평등'을 지지하기 때문에 당당한 여성에게 큰 매력을 느끼며 응원하고 싶은 마음 뿐이다. 그런데도 나를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여성운동을 진심(?)으로 펴 나갈 수 없다고 하고, 진정한 여성운동은 오직 순수한 '여성'만이 할 수 있다고 한계를 정해버린다면 안타깝기 그지 없다. 모름지기 '한쪽 날개'만으로는 하늘 높이 날아오를 수 없으니까 말이다. 페미니즘의 완성은 여성 뿐만 아니라 남성도 함께, 또 같이 '공감'할 수 있는 운동으로 지향되어야 할 것이다.

 

  암튼, 카타리나는 구혼자로 등장한 페트루키오에 의해 철저히 '길들여'진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육체적인 힘을 앞세워 폭력적인 행위로 길들이지는 않았다. 페트루키오를 '베로나의 신사'로 소개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는 사회적인 지위에 걸맞는 엄청난 부를 앞세워 눈부시게 아름다운 카타리나를 아내로 맞이할 것을 많은 이들에게 맹세하며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순수한 사랑'을 전해서 카타리나의 마음을 얻어낼 것이라고 호언장담 한다. 카타리나의 성깔을 잘 아는 이들은 모두 페트루키오를 안쓰럽게 여길 뿐이다. 카타리나가 못말리는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을 잘 모르는 상황에서는 저럴 수 있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페트루키오도 만만찮은 성격 파탄자(?)였다. 그는 누구도 못말리는 카타리나보다 더 망나니처럼 굴면서 카타리나의 기를 꺾어버린다. 막무가내로 결혼식을 밀어붙였고, 첫날밤에는 빵 한조각도 먹지 못하게 굶겼으며, 꽃과 같이 아름다운 아내에게 어울릴만한 드레스를 준비하고서도 카타리나 눈 앞에서 형편없다며 드레스를 내다 버렸다. 또한 처댁 방문차 여행중일 때는 한낮의 태양을 보고도 달이라고 우기고, 길을 지나는 할아버지를 가리키며 아가씨라고 소개하며 카타리나에게 맹목적인 복종(!)을 강요했다. 이 모든 행위들이 괄괄한 성격의 카타리나를 길들인다는 '남편의 당연한(?) 권리'라면서 말이다.

 

  못말리는 카타리나는 어처구니 없는 남편의 성화를 견디다 못해 '바른 소리'를 말했고, 남편의 오류를 지적하며 '논리정연한 반론'을 제시하며 남편의 우격다짐을 바로 잡으려 했으나, 끝끝내 길들여지고 만다. 너른 초원을 마음껏 내달리던 야생마가 올가미에 걸리고, 갈기를 휘어잡힌 채, 함부로 등에 올라탄 사람을 떼어내려 날뛰다가 끝끝내 떨궈내지 못하고 길들여지는 것처럼 말이다. 셰익스피어는 온갖 미사여구를 갖다 붙이며 페트루키오가 카타리나를 길들이는 장면을 묘사했으나, 내 눈에는 딱 '그렇게'밖에 보이질 않았다. 결국 카타리나는 '만인이 원하는 바'데로 순종적인 아내가 되고 말았다. 아니 그보다 더욱 심하게 변절(!)하여서 다른 여인들 앞에서 '순종적인 여자'가 되는 것이 얼마나 바람직한 일인지 일장 연설을 할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희곡은 수많은 남정네들이 변절한 카타리나를 극찬하면서 막을 내린다.

 

  <고전문학>을 읽을 때에는 '시대상'을 반영하며 읽어야 한다고 곧잘 말한다. 이른바 '반영론적 관점'으로 읽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나는 일개 '독자'일 뿐이기에 '효용론적 관점'으로 읽어야 마땅하다고 반론을 말하고 싶다. <고전문학>을 옛날 옛적의 '시대상'만을 고려하며 읽어야 한다면, 결코 시대를 '초월'해서 읽어야 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는 그랬어"라고 <고전문학>이 이야기한다면, 오늘날의 독자는 "그건 그때고, 지금은 달라졌어"라며 읽어야 한다고 말이다.

 

  분명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지금 읽어도 위트가 넘치는 대사 덕분에 미소가 지어지는 재미난 희극임에 틀림없다. 비극과는 달리 '해피 엔딩'이 넘쳐나며 극중 인물들이 벌이는 저마다의 사연을 엿보는 관객들에겐 함박웃음이 가득해질 것이 틀림없다. 허나 딱 거기까지다. 극중 초반에 카타리나의 당당한 모습에 흡족해졌다가 페트루키오의 '길들임'이 보여질수록 알게 모르게 불쾌감이 샘솟다가 완벽하게 길들여진 카타리나의 모습에 실망을 금치 못할 것, 역시 틀림없다. 남자나 여자나 똑부러진 '자기 주장'을 펼치며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 씀씀이로 인해 감동적인 나날을 보내는 것이 평범하지만 아름다운 행복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런 행복을 누구나 편견없이 누리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일 거라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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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1 - 1910-1915 무단통치와 함께 시작된 저항 (박시백의 일제강점기 역사만화) 35년 시리즈 1
박시백 지음 / 비아북 / 201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친일의 역사를 광복한 지 76년이 지난 지금까지 바로 세우지 못한 까닭은 무엇일까? 이 책은 출간 직후에 바로 읽었지만 쉽사리 리뷰에 옮기지 못한 까닭은 '민족배반자'들에 대한 단죄의 방법을 결단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는데도 '개인의 영달'만 추구한 매국노들에게 단죄를 속히 내리지 못한 까닭은 또 무어란 말이냐. 허나 대한민국의 역사가 그리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민주주의'가 바로 서지 못한 탓이 가장 크고, '경제적 부'를 자유로이 누리지도 공평하게 나누지도 못했던 탓이 더욱 크다. 이 땅에 민주주의와 경제적 안정이 어느 정도 갖춰진 지금에서야 겨우 '친일적폐의 단죄'를 논할 여유가 생겼으니 말이다. 늦었지만 바로 세워야 한다.

 

  친일의 대가로 오래도록 호의호식하던 이들은 늘 말한다. "그때는 다 그랬다.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 과거는 묻고 미래만 말하자" 반론의 여지는 분명하다. '독립운동가'들이 그 근거다. 그들의 피, 땀, 눈물이 없고서 '광복'은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피, 땀, 눈물의 대가를 친일파들이 가로챈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대다수의 국민들 목소리를 묵살하고, 기필코 대한민국을 '그들만의 천국'으로 만들어 놓고 말았다. 말할 것도 없다. 이승만이 옹호한 세력, 박정희가 구축한 세력, 그리고 둘이 만든 기득권 세력에 빌붙어서 떵떵거리며 배불린 '적폐들'만이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으로 대한민국을 만들고 말았다. 그들은 어떻게 대한민국을 '그렇게' 만들 수 있었을까? 그 물음을 풀 열쇠는 바로 '일제 35년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책은 바로 그 열쇠를 만 천하에 공개하였고 말이다.

 

  1권은 1910년부터 1915년까지의 일제시대를 밝혀 놓았다. 일제는 대한제국(조선)의 국권을 침탈하기 위해 철두철미의 작전을 짜놓았다. 자신들이 서구 열강에게 당한 방법 '그대로' 말이다. 동북아시아에서 중국과 일본이라는 '이권'을 톡톡히 챙긴 열강들은 조선에도 찝쩍거렸지만 큰 이득을 챙길 수 없을 거라 여겼는지 '두 차례의 양요' 이후에 별다른 행보를 보이지 않았다. 조선과 수호조약을 맺은 미국조차 '필리핀'이라는 이권을 챙기기 위해 일본의 조선 침탈을 묵인(가쓰라테프트 조약)한 상태였다.

 

  암튼, 일제는 1910년에 '강제병합'을 한 이후에 조선에 천인공로할 온갖 인권유린을 저지르며 가혹한 식민통치의 서막을 보여주었다. 이렇다할 전쟁이나 저항도 없이 꼴랑 '문서 나부랭이(을사늑약)'의 결과였지만, 매국노들조차 일제의 만행이 어떠할지는 아무 것도 짐작할 수 없었던 셈이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속담은 이 시절에 생긴 것인지도 모르겠다.

 

  식민지의 삶은 처참했다. 몇몇 친일 행적을 보인 이들을 제외하고 '일본인'과는 사뭇 다른 '2등 국민'으로 살게 되었고, 한순간에 삶을 유린 당한 하층민들의 절규는 어느 하나 들어주는 사람조차 없는 절박한 처지로 내몰렸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조선시대 하층민들의 삶 또한 비참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왜 일제시대 하층민들의 삶만 처참하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맞다. 어느 시대나 '파렴치한 무리들'이 횡행하였고, 그들의 단죄하지 못해 힘 없는 백성들의 무고함이 낯설지 않은 시대가 없다 하겠다. 허나 자기 나라 백성들이 헐벗고, 우리 나라 국민들이 못살겠다고 절규하면 모두가 나서서 구휼하고 발 벗고 도와주는 훌륭한 임금과 믿음직한 정부가 있었다. 그런데 일제시대에는 그렇지 못했다. 조선인은 매로 다스렸고, 오직 수탈의 대상일 뿐이었다. 똑같이 처참했을지언정 긍휼이 여기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인 것이다.

 

  이런 처참한 삶이 펼쳐지자 '뜻 있는 이'들이 독립운동을 발벗고 나섰으니 이들이 바로 '독립운동가'들이다. 의병항쟁, 신민회, 대종교, 대한광복회 등 굵직한 행보를 한 이들도 있었고, 국내에서 활동하기 힘들어져서 망명을 통해 독립운동에 앞장선 이들도 엄청났다. 어디 그뿐인가 국외에서도 독립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간도, 연해주, 상하이, 만주, 중국내륙, 그리고 하와이와 멕시코 등 실로 전세계 어디서든 한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의 기치를 높였던 것이다. 물론, 친일파들의 활동도 만만찮았다. 이들의 대다수는 지식인이었으며, 관리들이었고, 지주들이었다. 또한 어지러운 시대를 틈타 '풍운의 꿈'을 안고 출세욕으로 가득찬 이들도 '민족배반'에 앞장서서 개인의 영달만을 위해 발에 땀나게 움직였다.

 

  박시백은 이런 독립운동가와 친일파 들의 행보를 일일이 나열하였다. 때론 현미경을 들이밀고 핀셋으로 잡아낼 듯 세세하기도 했고, 위성사진을 펼쳐놓은 듯 큰 그림을 살펴볼 수 있게 망라하기도 했다. 세세한 내용은 책 속에서 찾아보길 바란다. 특히, 1권에서 주목할 내용은 '이승만의 행보'다. 사학자들이 말하듯, 그의 행보는 "독립운동이 2할이면 친일활동은 8할이다"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승만은 도대체 왜 이랬던 것일까?

 

  이승만의 행보가 확연하게 달라진 사건으로 '105인 사건'을 빼놓고는 달리 표현할 방도가 없다. 독립운동으로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던 그가 정작 '신민회' 소속 독립운동가들이 대부분 감옥에 수감될 적에 유유히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그 뒤 미국에서 한 행보도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다. 스티븐슨 저격 사건의 변호를 거부한 것이나, 미국 대통령을 면담하고도 조선의 독립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통치를 찬성한다고 씨부린 것이나, 박용만이 주도해서 하와이에 만든 독립운동기지를 쑥대밭으로 만든 것도 모자라 '개인소유'로 유용하고서 흥청망청 써버리고서는 공중분해시켜 버린 것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보다. 이승만이 추구한 독립운동 노선이 '외교'였다고는 하나, 부국강병하지 않고 '외교의 성과'를 얻은 나라가 없다는 당연한 진리를 이승만 개인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듯 싶을 뿐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행보를 모두 아우를 수 있다. 겨우 5년간 동안 있었던 일을 나열할 뿐인데도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독립운동가들의 헌신에 놀라고, 친일파들의 약삭빠름에 놀라고, 마지막으로 일제의 치밀한 잔혹함에 또 한 번 놀랄 것이다. 이 모든 놀라움을 우리는 똑바로 쳐다볼 수 있어야 한다. 무엇 하나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의 부정할 수 없는 위대함, 친일파의 부정할 수 없는 뻔뻔함, 그리고 일제의 무단통치에 아직까지 신음하고 고통을 호소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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