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세뿔돼지
갈로아 지음 / 한빛비즈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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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라의 세계는 심오하다. 흔히 구라를 '거짓말'이나 '거짓'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데, 정말 큰 오해다. 왜냐면 거짓말은 그저 남을 속이기 위한 '도구(수단)'에 불과하지만 구라에는 철학이라는 '목적'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구라를 통해서 거대하고 심오한 상상력을 '체계적'으로 승화시켜 '과학'이라는 놀라운 학문적 성과를 얻어내기도 한다. 이게 절대 구라가 아닌 것이 바로 '공룡의 진화'를 밝혀내는 원동력인 탓이다.

 

  비단 '공룡의 세계'만 밝히는데 구라가 빛을 발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천동설'이 지배적인 시대에 코페르니쿠스라는 구라쟁이는 '지동설'을 내밀며 "사실은 지구가 돌고 있어요. 진짜예요~"라며 구라를 내질렀었더랬다. 이를 이어받은 갈릴레이는 종교재판장을 나서면서도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며 구라쟁이들의 아이돌(우상)이 되었더랬다. 그리고 이런 구라쟁이들을 아이돌로 숭배하는 빠순이들이 속속 등장했는데, 우리는 그 이름을 이미 <다빈치 코드>라는 명저로 익히 알고 있다. 바로 '프리메이슨' 말이다. 이들은 흔히 '석공 길드'로 알려져 있으나, 아이작 뉴턴, 벤자민 프랭클린 등도 모두 프리메이슨 회원이었다. 이쯤 되면 '구라'는 더는 구라라고 지껄일 수 없게 된다.

 

  이처럼 과학자들은 거의 대부분 구라쟁이들이다. 아인슈타인도 어릴 적부터 '사고실험'이라는 '구라상상력'을 심심풀이로 하면서 과학의 패러다임을 '상대성이론'으로 확 바꾸어 버렸다. 상대성이론을 간단히 말하면, '질량'에 '빛의속도'로 거듭제곱하여 곱하면 '에너지'를 만들 수 있다는 건데, 익히 알고 있듯이 '빛의속도'는 초속 30만킬로미터로 1초에 지구를 일곱바퀴 반을 갈 수 있는 거리다. 따라서 '상대성이론'은 지구 안에서는 그닥 쓸 필요가 없다. 너무 좁기 때문에 '상대성이론'으로 상상할 꺼리가 그닥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주로 나가면 다르다. 빛의 속도로도 태양에서 지구까지 걸리는 시간이 무려 약 8분 20초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태양에서 방출된 '빛 에너지'가 지구에 도달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8분 걸렸단 얘기고, 우리는 아름다운 노을을 감상할 때에 이미 8분 전에 져버린 태양의 빛 끝자락을 보며 아름다움에 감탄한 셈이다. 태양에게 속았다고 분통을 터뜨릴 것은 없다. 왜냐면 밤하늘을 수놓은 웬만한 별빛은 이미 수명을 다해서 사라져버리고 없어진 채 별빛만 남아 우리를 즐겁게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별까지의 거리가 너무나도 멀어서 '빛의속도'로 달려온 별빛조차 수명을 다해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보아도 여전히 별빛은 아름다울 뿐이다.

 

  이처럼 심오한 구라는 천문과학자들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천문학책'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 책은 '공룡책'이다. 읽다보면, '공룡책'이라는 사실을 망각해버릴 수도 있지만, 웬만큼 공룡상식을 갖고 있는 독자가 본다면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책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공룡상식을 갖지 못한 독자가 읽는다면? 안타깝게도 그냥 허섭스레기 같은 '허풍선이 웹툰'으로 오해하기 딱 좋은 책이다. 왜냐고? 비교적 짧은 이 책에는 '광합성 상추 돼지'와 '대머리로 고민하는 아저씨', 그리고 공룡팬이라면 모두가 좋아하는 '트리케라톱스(일명 '세뿔돼지')'의 비망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밖에도 짤막한 토막공룡상식을 다룬 웹툰이 담겨 있는데, 공룡상식이 풍부한 독자들에겐 감동이 주옥같이 밀려오고 촌철살인을 당해버릴 걸작으로 꼽을 만큼 우스운 에피소드가 수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 책은 '과학상식'이 풍부한 독자들이 읽어야만 한다. 또한 '공룡학자'를 '과학자'로 인정하는 독자여야 깊은 공감과 더불어 쓰나미처럼 밀려드는 감동의 여운을 즐길 수 있는 명저라고 감히 소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감동을 간략히 소개하자면, '광합성 상추 돼지'란 공룡을 복원하다 보면 도무지 알 수 없는 '기관'이 달린 공룡의 뼈(화석)을 찾을 수 있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풀이해보자면 분명 '용도'가 있을 것인데, 그 '용도'가 불분명한 것들 말이다. 이를 테면, '스테고사우루스'의 볏 같은 것 말이다. 화석으로 봤을 땐 딱딱해 보였기에 육식공룡의 위협에 대항할 수 있는 날카로운 방어수단인 '뿔'처럼 상상했으나, 뿔이라기에는 너무 말랑한 조직을 찾을 수 있었고, 혈액이 순환하고 있었다는 증거로 밝혀냈다. 그래서 '체온조절'을 위한 볏이었다고도 상상했으나, 그렇다고 보기엔 너무 크고 너무 많았다. 오늘날에는 공룡은 체온이 일정한 '항온동물'에 가깝다고 이해하고 있기에 '체온조절'용 볏이 굳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렇다면 무슨 용도였을까? 새롭게 등장하고 작가도 그럴 것이라고 동의한 내용이 바로 '이성을 유혹하는 매력포인트(성적 과시용)'로 사용된 볏이 아닐까 라는 '상상'이다. 오늘날에도 별 쓸데없다 싶은 것들을 온몸에 주렁주렁 달고 있는 동물들이 있고, 그 용도가 주로 암컷을 유혹(공작의 꽁지깃 따위)할 때 쓰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솔깃할 것이다. 바로 이런 상상력에 '상상력'을 더해서 '광합성 상추 돼지'를 작가는 탄생시켰다. 사료가 필요없는...심지어 '맛있는' 돼지고기를 제공할 수 있는...맛있게 먹고 난 뒤에 '상추 씨앗'을 땅에 심으면 다시 '광합성 상추 돼지'를 수확할 수 있는...그런 맛난 상상력을 발휘했단 말이다.

 

  어디 이뿐인가. 작가가 대머리인 탓에 '탈모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수십 억 '탈모인'들의 걱정거리를 소재로 인류애가 가득한 감동적인 휴머니즘을 '공룡의 털'로 승화시켰다. 다름 아니라 공룡의 온몸을 뒤덮고 있을 것으로 상상하고 있는 '깃털' 말이다. 그렇다. 공룡은 아직 멸종되지 않고 오히려 번성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매일매일 공룡을 맛나게 시식하고 있다. 바로 '치킨사우르스'라고 명명해도 시원찮을 닭 말이다. 오늘날의 새는 '공룡의 후예'가 거의 확실하다. 왜냐면 공룡화석의 피부조직과 새의 깃털이 유전학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밝혀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머리의 고민인 '머리털'을 유전학적 휴머니즘 사이언스틱 메카닉 기술을 발휘하여 '깃털'로 변환시키는 상상력을 발휘한 결과, '깃털의 장점'을 갖게 된 대머리 아저씨가 탄생한 것이다. 깃털의 장점은 두말 할 것도 없이 '하늘을 날 수 있고', 성적 과시를 발휘해서 여성들에게 엄청난 매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대머리 아죠씨는 젊은 여성들의 인기남 1순위가 될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대머리 작가의 상상력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대망의 '세뿔돼지(트리케라톱스)' 에피소드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 궁금하면 500원!! 책값이 1500원이니 손해보는 장사는 아닐 것이다(--)뻔뻔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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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배우는 의학의 역사 - 개정판 한빛비즈 교양툰 14
장 노엘 파비아니 지음, 필리프 베르코비치 그림, 김모 옮김, 조한나 감수 / 한빛비즈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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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 3막을 시작한 지도 벌써 11개월이 지났다. 20대에 맞이한 IMF로 '비정규직'에 발을 들여놓았고, 30대에는 '나만의 직업'을 찾아 독서논술선생의 길을 걸었다. 그러다 맞이한 '코로나 판데믹'으로 인해, 의도치는 않았지만, 어쨌든 '병원에서' 일을 하는 직업을 갖게 되었다. 한편, 이 책 <만화로 배우는 의학의 역사>는 처음 읽은 책은 아니다. 이미 읽었던 책이었고 이번에 '개정판'이 출간되어 다시 읽게 되었다. 그런데 느낌은 사뭇 달랐다. 논술쌤의 관점으로 이 책을 봤을 땐 '역사'에 꽂혔었는데,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지금 다시 읽으니 '의학'에 더 깊은 관심을 쏟는 것을 새삼 느꼈기 때문이다. 비록 '의료진'은 아닌 탓에 직접 환자에게 도움을 주거나 의술을 펼치는 것도 아닌데, 환자와 의사와 간호사, 그밖에 병원에서 함께 일하는 모든 분들과 같이 지내다보니 나도 모르는 새에 '의학'에 깊은 관심을 쏟으며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암튼, '현대의학'은 과학과 기술이 발달한 덕분으로 못 고치는 질병이 없을 정도가 되었고, 현장에서 의술을 펼치는 의료진도 꽤나 안락한(?) 병원 환경에서 현란한(!) 의술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과거에는 '불치의 병'이던 것도 '치료의 길'을 열어 단순히 환자를 살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없이 '편안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우리는 얼마든지 '의료혜택'을 볼 수 있도록 매우 가까운 곳에 '병원'이 있는 환경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얼마나 큰 혜택인가 하면, 40~50년 전만해도 병원이 있어도 '돈이 없어서' 의료혜택을 받지 못했으며, 100여 년 전만해도 '의사가 없어서' 가족중에 누군가 아프기만 하면 산 넘고 바다 건너 의사를 만나러 환자를 업고 뛰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119에 신고만 하면 5분 내에 환자를 싣고 병원으로 달려가며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는 의료환경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제 좀 더 먼 과거로 가보자. 원시시대에도 '의료행위'는 있었다. 무리중에 '아픈 사람'이 생기면 이를 고치기 위해 애쓰던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분명 미신이고 의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 같지만, '의학의 발달'은 바로 '아픈 사람을 돌보는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의술'이 발전하기까지는 그후로 아주 오랜 뒤의 일이기 때문에 '의학의 역사'를 바로 보기 위해서는 '아픈 사람'을 어떻게 돌보고 있는지 살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의학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중세시대까지는 '아픈 사람'을 주술이나 종교적 믿음으로 고치려 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전혀 '의술'이 아닌 '신의 영역'으로 남겨 놓은 것이다. 다시 말해, 전문적인 의학지식보다는 주문이나 기도 따위로 '자연치유'를 기다리는 것밖에 한 것이 없던 셈이다. 물론, 기초적인 약초를 다루고, 그것으로 약물을 제조하여 '고통'을 제어하는 노력은 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과학'과는 사뭇 달랐기 때문에 큰 효험을 준 것은 아니었다. 또한, 의학은 '철학'의 한 갈래이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나 갈레노스, 그리고 동양의학까지도 마찬가지로 '우리 몸'을 4원소설이나 기경팔맥 따위의 형이상학적인 학문체계를 세워, 나름 상상의 나래를 펼쳐놓고 '아픈 환자'를 치료하는 교과서로 삼았다. 하지만 이것이 아주 쓸모없지도 않았다. 그러나 고대 철학자의 '권위의식'이 잘못 작용하여 오래도록 '잘못된 의학'을 바로 잡는데 큰 걸림돌 역할을 톡톡히 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과학의 발전'을 막을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의학지식'도 과학적 증명으로 차근차근 바로 잡게 되었다. 아주 오래 걸리긴 했지만 말이다.


  이처럼 '과학'은 의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직접 환자를 돌보는 의사와 간호사의 '의술'과는 별개로 발전한다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실제로 '노벨생리의학상'을 타는 이들은 '현장에서 일하는 의사'가 아니라 '연구소에서 연구하는 학자' 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학자들이 연구한 내용을 바탕으로 의사들이 현장에서 의술을 펼치고 있으니 아주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아픈 환자들을 직접 돌보는 의사들의 헌신이 대접 받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적절한 비유는 아닐지라도, 전투에서 목숨 바쳐 승리를 거둔 것은 '병사의 몫'이지만, 값진 승리로 영광을 독차지 하는 것은 '지휘관(간부)의 몫'이 되는 것만큼이나 의사와 학자의 관계가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학자들이 차지한 영광의 역사'와 함께 '의사들이 현장에서 펼친 거룩한 의술'을 낱낱이 파헤쳐서 독자들에게 풀어놓은 점이 참 인상적이었다.


  한편, 이 책은 '서양의학'을 테마로 엮어놓은 책이다. 간간히 '동양의학'도 소개하고, 동양인 의사(대개는 일본인)도 언급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서양의학의 테두리' 안에서만 의학의 역사를 풀어놓고 있다. 더구나 프랑스 작가가 쓴 탓에 '프랑스 의학의 역사'가 주된 테마이고, '프랑스인이 이해할 수 있는 유머'로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점이 눈에 거슬릴 정도는 아니지만, '대한민국의 의학과 의술의 현주소'도 세계적인 수준인데, '우리의 관점'으로 풀어놓은 의학의 역사를 책으로 엮어내지 못하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물론, 그런 책이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현재의 주류 의학이 '한의학'을 곱게 보지 않는 까닭에 우리 의학의 역사를 고대부터 현재까지 풀어낸 이 책과 같은 얼개로 결코 풀어내지 못할 것이라는 아쉬움이 앞선다. 이제는 '통섭의 시대'이기 때문에 굳이 '양학'과 '한의학'을 구분할 필요는 없을 텐데 말이다. 일부이긴 하지만 '침술'을 마취 대신으로 하여 수술을 성공한 사례도 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는데 말이다.


  이 책을 계기로 더 많은 '의학서적'을 탐독할 계획이다. 물론 의사나 간호사, 조무사가 목적인 독서는 아니다. 완전히 아니라고는 부인하지 않겠지만, 좀 더 폭넓은 의학의 세계를 쉽게 풀어 리뷰를 쓰고 싶은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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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킬 박사와 하이드 삼성 초등 세계 문학 5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한상남 옮김, 윤종태 그림, 김준우 해설 / 삼성출판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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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흔히 착각에 빠지기 쉬운 것이 '닥터 지킬'은 선한 존재이고, '미스터 하이드'는 악한 존재라고 딱 잘라 구분하는 것이다. 닥터 지킬은 선과 악이 공존하지만 '겉으로는 선한 체'하고, 미스터 하이드는 '겉으로 선한 체'하지 않고서 한없는 자유와 쾌락을 누린다고 해석해야 이야기가 이해되기 시작할 것이다. 그래야 닥터 지킬이 미스터 하이드에게 모든 재산을 넘겨주려는 장면도 이해가 되고, 마지막에 지킬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하이드만 남을 것이 두려워 자살하는 장면도 이해가 되기 때문이다.

 

  닥터 지킬은 부와 명예를 한 몸에 받는 사회지도층이면서 과학자의 재능까지 출중한 부족할 것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딱 하나 부족한 것이 있다. 그건 바로 '한없는 자유로움'이다. 부와 명예를 누리는 것은 좋지만, 그러기 위해서 남들 앞에선 체면을 차리고 점잖은 체하는 생활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지킬의 마음속에선 '쾌락'을 쫓고 있는데도 말이다. 한마디로 지킬은 지위에 걸맞지 않은 '나이트 부킹'과 '부비부비 클럽댄스' 같은 걸 즐기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교양과 체면을 중요시하는 영국사회(빅토리아시대)에서 지킬은 절대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닥터 지킬은 '약'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교양이니, 체면이니, 체통 따위는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고 마음껏 자유와 쾌락을 즐길 수 있는 약 말이다. 그 기똥찬 약은 바로 '선과 악'을 분리할 수 있는 약이었다. 쾌락을 즐기려고 해도 자꾸 브레이크를 거는 체면치레용 마음을 억누를 수 있는 약 말이다. 실로 '과학만능주의의 쾌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닥터 지킬이 만든 약을 복용하면 마음껏 쾌락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지킬은 당장 실험을 한다. 밤거리를 쏘다니며 길거리에서 난폭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어린 소녀를 넘어뜨리고 발로 밟아도 보았다. 선한 마음을 억누를 수 있게 되니 지킬은 울부짖는 어린 소녀를 보고도 '죄책감' 따위를 느끼지 않게 된 것이다. 대성공이었다. 지킬은 선한 본성을 제거한 순수한 악의 모습을 한 자신을 '미스터 하이드'라고 지칭하게 된다. 그리고 계획을 착착 진행시킨다.

 

  그 계획이란 바로 마음껏 쾌락을 즐기는 '미스터 하이드'로 삶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었다. 부와 명예 가운데 명예를 버린 삶을 선택한 것이다. 그래도 부는 포기할 수 없었다. 자유롭다 못해 방종한 삶을 살 것이 틀림없는 '미스터 하이드'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부였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변호사 친구에게 편지까지 써가며 '닥터 지킬의 재산'을 모조리 '미스터 하이드'에게 넘기려 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완벽한 쾌락을 즐기던 '미스터 하이드'가 점점 난폭한 짓도 서슴지 않더니 기어코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체면 따위는 헌신짝처럼 내던질 수 있었던 '닥터 지킬'조차 끝내 용서할 수 없는 짓을 하고 만 것이다. 그래서 서둘러 '약 복용'을 끊으려 했지만, 한 번 맛들린 '쾌락의 맛'을 쉽사리 끊을 수는 없었다. 그러자 더 큰 문제가 생겨버렸다. 더는 약 복용을 하지 않아도 '닥터 지킬'의 몸 속에서 '미스터 하이드'가 불쑥불쑥 튀어나와버린 것이다. 그리고 점점 더 '미스터 하이드'로 있는 시간이 늘어났고, 이젠 '닥터 지킬'이 감당해낼 수 없는 방종, 아니 망종의 짓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닥터 지킬의 삶'을 '미스터 하이드'가 송두리채 집어삼키는 날만 남은 셈이다. 하루 1시간, 아니 10분도 '지킬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된 것을 알게 된 '닥터 지킬'은 영원히 '미스터 하이드'를 잠들게 만드는 결단을 내리고 만다. 그동안 '약 개발'을 시도했지만 '미스터 하이드'를 잠들게 하는 시도는 모두 실패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야기는 충격적인 결말로 끝맺는다. 과학만능주의를 믿었던 지식인의 최후를 보여줌으로써 '과학'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거라는 잘못된 신념에 경종을 울리는 명작이기도 하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가 '중세시대'를 비판하는 까닭도 종교가 모든 것을 해결해줄 거라는 '잘못된 믿음'을 타파하기 위함이 아니었냔 말이다. 근대이후 인간은 '지성'이 폭발하면서 '과학'을 발전시켰고, 그로 인해 수많은 문명의 이기를 개발해내서 편리하고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었지만, 그로 인한 환경파괴는 생태계파괴를 넘어 지구파괴에 이르게 되니 끝내 '인간의 삶'조차 제대로 영위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고 만 셈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제2의 지구(테라포밍, 인공행성 따위)'를 만들려는 시도를 하며 여전히 과학의 힘에 기대어 꼼수를 부리려는 어리석음을 끊지 못하고 있다. 마치 닥터 지킬이 '약'으로 미스터 하이드를 길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선과 악으로 구분하며 선한 지킬이 악한 하이드로 '변신'한다는 얼개로 이야기를 이해하면, 이 책의 진면목을 제대로 즐길 수가 없다. 왜냐면 '지킬 박사'는 절대로 선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과 악의 경계'에서 헤매는 <데미안>과 비교하면서 읽어도 제맛인 책이기도 하다.

 

  한편, 우리는 모두 '지킬 박사'다. 다시 말해, 선과 악이 공존하는 평범한 존재란 말이다. 일단 재능은 둘째치고, 이 책의 주제인 '선과 악'에 대해 논해 보자. 우선, 선과 악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빛과 어둠처럼 말이다. 빛이 있어야 어둠이 존재하고, 빛이 강하면 어둠도 세지듯이 말이다. 그런데 결정적인 차이점은 빛과 어둠은 '경계'가 뚜렷하지만, 선과 악은 경계가 '불분명'하다. 똑같은 행위라도 수많은 사람을 죽인 살인자는 지탄 받고, 수많은 외적을 물리친 이순신은 영웅으로 추앙 받는다. 그렇다면 살인은 선일까? 악일까? 이를 테면, 좋은 사람을 죽이면 벌 받고, 나쁜 사람을 죽이면 상 받아야 할까? 도대체 '경계'가 불분명하다.

 

  지킬이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은 어디서부터일까? 자살을 선택한 것은 너무 늦었다고 보인다. 하이드로 변신한 시간이 점점 늘어나는 것을 막으려 '약 개발'을 선택한 것도 늦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약 복용'을 한 것부터 잘못일까? 평범한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하고, 이를 바로 잡으려 노력하는 삶이 바람직하다고 하질 않는가 말이다. 그렇다면 '약 복용'과 '약 개발' 자체를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각각 '실수'와 '노력'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음가짐에서 문제를 찾아야 할 것이다. 마음을 나누어 선과 악으로 분리하려 들고, 악한 짓으로 물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마음껏 쾌락을 즐긴 죄를 물어야 할 것이며, 쾌락에 빠져서 영원히 즐거운 삶을 살려고 '절제'를 잃어버린 죄를 따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젊어서 '건강'에 자신있어 한다. 밤새 술을 퍼마시고도 다음날 일어나 술로 해장을 하는 자신을 대견(?)해 하는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는 젊음 말이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건강'에 이상신호를 접하면서 '늙음'을 깨닫기 시작한다. 사실 이때부터 '건강'을 챙기는 건 이미 늦었다. 건강은 건강할 때 챙겨야 건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고장나기 시작하면 아무리 잘 고친다고 해도 '새것'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지킬 박사도 마찬가지다. 온종일 쾌락에 빠진 삶을 살아도 마냥 행복하기만 할 것으로 여겨 온재산을 넘겨주며 '제2의 인생'을 살아보려 꿈꿨지만, '이상신호'를 감지하고는 부리나케 '온전한 지킬'로 되돌아오려 했다. 그러나 온전한 지킬, 다시 말해서, '평범한 지킬'로 다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쾌락에 빠지면서 '절제'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술도 기분 좋게 한두 잔만 마시고 술자리를 즐기면 그뿐이었건만, 술독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빠져나오질 못해 병들고 마는 것처럼 말이다.

 

  어린이 책에 '술'을 비유로 들어서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중독'에 빠질만한 것으로 바꿔서 생각해보셔도 좋을 것이다. 이를 테면, '게임중독', '인터넷중독', '스마트폰중독', 그리고 '쇼핑중독' 같은 것으로 말이다. 어른이라면 '담배중독', '도박중독' 등으로 대체해도 무방할 듯 싶다. 중요한 것은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제맛으로 즐기면 그뿐이다. 도움이 되는 '가이드'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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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늦기 전에 MBA 가면 어때요?
국승운 외 지음 / 원앤원북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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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설하고, MBA는 기업 관리 전문가로 '실무'에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스킬을 바로 배우는 곳으로 학업을 위주로 하는 '경제경영 대학원'과는 결이 다르다고 하겠다. 그래서 MBA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실무경력 10년이상'의 경력자로 대학조교 생활을 하며 대학원을 다니는 분들과는 차원부터 다르다. 물론, MBA라고 해서 무조건 '경력자'만 선별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대학원생처럼 대학을 졸업한 뒤에 바로 MBA에 뛰어들어 석사학위를 따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학생들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직장'을 다니면서 '야간 MBA'를 병행하는 쪽을 선택하는 경우도 다반사라고 한다. 왜냐면 '실무경력자'를 우대하는 MBA도 많기 때문이란다. 그러려면 자연스럽게 직장을 다니면서 퇴근후에 학업을 병행하는 코스가 자연스러운 법이다. 그래서 이 책은 대표적으로 '연세MBA를 졸업한 11인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이들이 말하고 있는 'MBA의 모든 것'은 무엇일까? 11인이 말하는 공통점을 추려보면, 첫째, 단조로운 직장생활에 지쳤는데 '리프레쉬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같은 직장을 10년 넘게 다니면 누구나 매너리즘에 빠지기 일쑤다. 그때 새로운 자극으로 '퇴근 후 MBA'는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한결같이 말한다. 일과 학업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는 고된 일일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일주일에 세 번, 학교 가는 길이 너무 기다려지고 즐거웠단다. 다시 '대학생활'을 만끽하는 듯한 추억에 빠져들 수 있어서 기뻤다고도 빼놓지 않고 후일담을 전했다.

 

  둘째는 '성취감'이었다고 한다. 2년 과정의 MBA 코스를 졸업하고 나면 '석사 학위'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오랜 직장생활을 하면서 '학사 학위'로 만족하지 못했던 차에 '석사 학위'를 딸 수 있다는 매력이 크게 작용했다고 여럿이 말했다.

 

  셋째는 '다양한 인맥'을 얻게 된 것이란다. 어느덧 중년이란 나이가 되고, 직급도 과장, 차장, 부장 등 '간부급'이 되면 만나는 사람이 고정되기 일쑤다. 그런데 MBA를 통해서 서로 다른 분야에서 내노라하는 '짱짱한 학우들'을 새롭게 만나게 되니, 이 또한, 새로운 삶의 활력소로 작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실제로 '정치인'을 꿈꾸는 한 학우는 짱짱한 스팩의 인맥을 쌓고 'MBA'라는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나도 기뻤다고 소회를 전하기도 했다.

 

  넷째는 '즐거운 동호회 활동'을 꼽고 있는데, MBA 학비가 '연 1억원'에 달하는 수준이다보니 모임의 스케일이나 퀄리티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노는물이 다르다'인데, 그저 '방탕한 놀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쁜 스케줄에도 짬을 내서 여행과 레포츠, 그리고 재미난 파티를 하며 '젊음과 열정, 그 이상'을 다시금 불태우는 짜릿함을 맛볼 수 있었다는 것에 매우 만족을 나타냈다. 아닌 게 아니라, '직장 10년 차 이상'이면 누군가의 남편이나 아내, 그리고 아빠와 엄마인데, 얼마나 일상에 찌들어 지냈겠느냔 말이다. 그런데 다양한 인맥을 통해서 새로운 만남과 모임을 통해 '일상탈출'을 할 수 있으니 일과 학업이라는 힘든 나날도 '즐거움의 연속'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물론, 단점도 상당하다.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퇴근 후'가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 기본 상식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직장상사와 가족들의 눈총을 받으면서 'MBA'로 달려가면, 엄청난 과제와 수준 높은 토론수업, 그리고 발표준비 등등으로 밤을 꼬박 새우기 일쑤였다고 한다. 더구나 상대적으로 비싼 학비도 쉬이 'MBA'를 선택할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었다고 한다. 흔히 말하는 '가성비'를 따져보면, '그 돈으로 MBA보다 더 좋은(?) 곳에 투자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주변의 유혹도 상당하다고 한다. 무엇보다 가장 힘든 것은 일과 'MBA'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것이라고 한다. 직장일에 충실하다보면 'MBA'에 소홀하기 쉽고, 'MBA'에 열정을 쏟으면 직장생활이 원만하게 풀리지 않고, 이렇게 둘 모두에 치이다 보면 '가정'을 등한시해서 가족들에게 원망을 받기도 하는 등등 쉬운 일은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MBA 2년 과정'이 지난 지금의 소회를 이야기해달라고 하면, 한결 같이 "더할나위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2년, 길지 않다"고도 했다. 그래서 'MBA 졸업'을 한 지금은 주변사람들에게 "더 늦기 전에 꼭 해보라"고 권하고 있단다. 100세 인생에 2년은 '내 인생에 투자를 한다'고 생각하면 결코 손해보는 일이 아니라면서 말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지금, 새로운 삶을 꿈꾸고 있다. '전문 경영인'으로 제대로 실력발휘를 해보고 싶은 꿈은 기본이고, '제2의 인생'을 화려하게 수놓으려는 설계로 희망에 부풀어 있기 때문이다.

 

책드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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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관찰 30년 - 한국이 일본을 이기는 18가지 이유
염종순 지음 / 토네이도 / 2020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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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위 '일본전문가'라는 분들은 두 가지 부류다. 첫째는 '어쨌든 일본이 한국보다 앞선 나라니 배울 건 배워야 한다'는 부류고, 둘째는 '이제는 한국이 일본보다 더 선진국이다. 그러니 더는 일본에 쫄지 말고, 아니 일본을 사뿐히 즈려 밟고 멋진 대한민국이 되자'라는 부류다. 이렇듯 일본에 대해서 상반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흡사 임진왜란이 벌어지기 직전에 서인과 동인이 '풍신수길'을 두고 내린 평가와 매우 닮은 평가이기도 하다.

 

  그런데 묘하게도 상반된 관점을 가진 두 부류 모두 공통된 의견이 하나 있다. 바로 '한일 양국의 상호교린이 필요하다'는 결론이다. 어찌 되었든 한국과 일본은 '이웃나라'이니 서로 으르렁거리기보다는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양국이 이득을 가져올 거라고 진단한다. 하지만 양국은 애초부터 '잘못 끼워진 단추'마냥 사이좋게 지내기는 매우 힘들다는 의견을 덧붙이고 있다는 점도 공통점 가운데 하나다. 이 책도 그런 내용으로 마무리 한 책이기도 하다.

 

  과연 어느 전문가(?)의 말이 사실일까? 한국과 일본은 사이좋게 지내며 서로 윈윈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엔 두 가지 상반된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이 일본보다 선진국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꼼꼼이 따져보면 분명 배울 점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이다.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보는 더 정확하다고 할 정도로 둘 사이는 틀어질대로 틀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과거사 청산 문제'만 보아도 한국은 겉으로는 사과하는 척하면서도 속으론 인정하지 않고 망언을 일삼고 있다고 분개하는데 반해서, 일본은 도대체 언제까지 사과를 해야 하는 거냐? 이미 지난 일을 들춰내며 양국의 미래를 운운하는 한국은 진정성이 없고 신뢰할 수 없 나라라면서 매도하기 일쑤다. 타협점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대립적 형국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현재 일본은 '회생불가능'할 정도로 망해가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화로 일찌감치 '디지털화'에 성공하고 전세계 'IT업체'를 선도하고 있을 정도로 대한민국은 '혁신의 아이콘'이 되었는데도, 일본은 여전히 관공서에서 서류를 한 장 떼려 해도 '직접 방문'을 해야 하고, '전자결제'는커녕 사인도 인정하지 않아 도장을 호호 불며 찍는 '아날로그'적인 나라의 대명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이를 애써 '전통문화'를 지키는 아름다운 풍습이라고 포장하고 있지만, 코로나 판데믹 상황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방관하고 있는 지경에 이르고서도 아름다운 전통문화 운운하는 것은 '무능함'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잃어버린 30년'이라며 90년대 이후 일본경제는 내리막을 면치 못하고 있다. 언제 바닥을 찍고 반등할지 아직도 불투명할 지경이라고 한다. 오랜 관행처럼 정경유착은 끊이지 않고 '정치인의 비리'가 터지고 있고, 일본기업들은 혁신을 하지 못해 '기득권의 이득'만 챙기기 급급하며, 언론은 총리의 눈치만 살피며 '정권의 나팔수 역할'만 하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사법부마저 일본정부의 입맛에 알맞는 판결을 내리는 현실이고, 총리의 한 마디면 유죄도 무죄로 바꿀 수 있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펼쳐지고 있다고 한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이미 망가진 복사기'를 새로 구입하는 것보다 고칠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는 일본인의 습성으로 잘 표현하는 것 같다. 바쁜 업무 처리를 위해서 하루라도 빨리 '새 복사기'를 구입하는 것이 효율적일텐데도 일본인은 '책임소재'를 따지며 누가 망가뜨렸는지 따지고, '구입비용'과 '수리비용'을 꼼꼼이 따지며, 이를 따지기 위해서 매일매일 '마라톤 회의'를 여는 일본의 일상은 '한국인의 시선'으로 보면 답답함, 그 자체일 뿐이다. 한마디로 한국인에게 일본은 '이상한 나라'일 뿐이다.

 

  그런 까닭에 더는 일본에게서 배울 것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일본을 즈려 밟고 당당히 '선도국가'가 될 대한민국을 그리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그럴 필요조차 없다. '일본보다 앞서자'라는 마음가짐 자체가 후진국 일본을 신경 쓰는 일이기 때문이다. 선도국가 대한민국 앞에 '일본은 없다'고 보고 세계로, 우주로 나아가면 될 뿐이다. 그래도 일본에게 배울 점이 아직 남았다면 가뿐하게 배우고 넘어가면 된다. 이 책에서는 '장애인 천국'을 예로 들었다. 한국에서는 아직까지도 '장애인'이 살기에 편의제공도 미흡하고,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살기에도 불편한 나라지만, 일본은 '장애인 등록'만 하면 '평생 연금'과 더불어 나이에 맞는 '공짜 휠체어 제공', '간병인과 치료사 등 사회복지사 지원' 등등 사회적으로 장애인에 대한 편견도 없을 뿐더러 재활과 치료에 대한 모든 것을 제공하는 진정한 선진국이라면서 대한민국이 진정한 선진국이 되려면 '이런 점'들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지당한 지적이다.

 

  하지만 글쓴이의 표현처럼 한국과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가 아니라 '가깝지만 너무 다른 나라'라는 현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일본은 혁신은커녕 '변화'를 지극히도 싫어하는 나라라는 사실도 명심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불과 100년 만에 변화를 넘어 혁신에 성공한 나라가 되어 전세계에 '한류열풍'과 'K-컬쳐붐'을 일으켰지만, 일본은 그 100년간 달라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21세기를 살고 있으면서도 '사농공상'이라는 신분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낡은 인식이 통용되고 있고, 국외출장도 아닌 지방출장이 잦다는 이유로 대기업 입사를 거부하는 일본의 젊은 세대들을 보면서 일본은 망해야 정신 차리겠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날 정도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똥볼을 차고 있는 일본인데도 그동안 뿌려놓은 '국외자산'과 '내수경제'로 근근히 버티며 또 버티고 있다. 위축된 경제는 '엔화발행'으로 부흥시키고 국가부채는 날로 늘어나고 있는데도 '냄비 속의 개구리'마냥 서서히 죽어가는 일본을 보면서 우리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아닌게 아니라 초고령화 국가인 대한민국은 '초초고령화 국가'인 일본과 매우 흡사하다면서 말이다.

 

  그동안 여러 일본관련서적을 읽으면서 갖가지 진단을 살펴보았는데, 이제는 결론을 내리고 싶다. 어떤 진단이든 그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일본에게 배울 점이 있든 없든 '일본'이 더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대한민국은 '세계'를 배우고 선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잘못된 과거를 반성하지 않고 사과도 하지 않으며, 젊은 세대에게 제대로 된 역사를 가르치지도 않는 일본에게 대화와 설득은 그닥 중요하지도 효율적이지도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일본의 젊은 세대는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일로 사과를 요구하는 한국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는 일본인의 비겁한 변명에 불과하지만 '일본인들의 논리'로만 본다면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그들에게 한국은 여전히 '후진국'이면서 '혐오스런 한국인'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구조를 단박에 깨지 않고서는 한일양국의 우호는 요원할 뿐이다.

 

  그리고 '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대한민국이 월등히 앞선 나라가 되어 철저히 짓밟아줘서 '처절하게 깨닫게 해주는 방법'뿐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일본의 황당한 논리구조를 풀 수 있는 마법이 없다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 다행히 일본은 서서히 망해가는 나라를 면치 못하고 있다. 철저히 망하지 않고서는 일본의 혁신은 물건너 갔기 때문이다. 전세계를 향해 '거짓말'을 일삼는 일본정부를 두둔하는 '일본언론'과, 그런 언론을 철떡같이 믿고 옹호하는 '일본국민'이 있는 한은 말이다. 이웃나라가 망해서 우리가 볼 피해가 무지 걱정은 되지만, 일본은 정말이지 철저히 망해야 정신을 차릴 모양이다. 망해가는 일본 때문에 우리가 볼 피해를 현명하게 줄이는 방도를 찾는 것도 매우 중요한 현안이 되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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