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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씨남정기 : 여자의 적은 여자인가? ㅣ 물음표로 따라가는 인문고전 19
강영준 지음, 박미화 그림 / 아르볼 / 2020년 1월
평점 :
서포의 <구운몽>은 즐겨 읽었지만, <사씨남정기>는 이번에 처음 접했다. 비교적 어릴 적에 접했던 <구운몽>이 그닥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만중의 정치적 성향이 '서인'이었던 탓도 컸다. 굳이 페미니즘 관점이 아니더라도 '일부일처제'의 조선시대에 팔선녀와 인연을 맺고 인생의 희노애락이 그저 일장춘몽에 그치지 않다는 내용이 상당히 모순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고, 정치적으로 봤을 땐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의 당파가 훗날 노론으로 이어지고 끝내 조선을 망국으로 이끌었다는 괴씸죄를 김만중에게도 은근히 따져 물었던 탓이 컸기 때문이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이미지)이 안 좋아 읽지 않았던 것이다. 암튼 뒤늦게 접한 이유는 여기까지다.
하지만 <서포만필>에서 밝혔듯이 김만중은 '우리말글의 소중함'을 일찌감치 깨닫고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한글소설'로 창작했더랬다. 안타깝게도 <사씨남정기: 한글본>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한문본'만 남은 탓에 원작이 없는 상황이지만, 수많은 '이본'에서나마 '한글본'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그의 선각적인 업적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당시 양반사회에서 천하게 취급받던 '한글'의 처지로 보았을 때, 양반가문의 사람이 '우리것'에 대한 소중함을 잊지 않고 손수 '소설'로 적어 남긴 것은 칭송 받아 마땅할 것이다.
중략하고, 이 책은 두 가지 관점으로 해석이 가능하다는데서 흥미로움을 느낄 수 있다. 하나는 소설의 내용이 당시 '환국정치'를 일삼고 자신을 유배 보낸 숙종의 정치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으며, 다른 하나는 홀로 자식을 기르며 모진 고생을 한 어머니 곁을 지키지 못하고 발길도 닿기 힘든 머나먼 섬으로 유배를 감으로써 효도를 다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성리학적 관점이 담겨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관점으로 봤을 때, 남성 위주의 '가부장제 사회'에 대한 비판은커녕 순응하며 살면서 여성들끼리 싸우며 문제를 해결하려는 잘못된 인식을 지적할 수도 있다.
첫째, 숙종의 환국정치를 살펴보자. 숙종은 신하들이 파벌을 지어 '예송논쟁'을 벌여 왕권을 우습게 아는 것에 환멸을 보였다. 그래서 1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등극했음에도 우암 송시열에게 사약을 내리는 등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는 임금으로 실력행사를 하였다. 그리고 그 실력행사의 정점이 바로 '환국정치'였던 것이다. 그런데 마침 숙종의 아내들이 정치적 상황과 교묘히 맞아 떨어진다. 둘째 부인이었던 '인현왕후(서인)'와 후궁이었던 '장희빈(남인)'이 그렇다. 소설에서는 남편인 유씨의 처 '사씨'와 첩인 '교씨'가 각각 인현왕후와 장희빈으로 등장하는 것처럼 딱 들어맞는다. 과연 김만중은 소설을 통해서 '환국정치'를 에둘러 비판하여 했던 것일까? 하지만 증거는 없다. 정황이 예언처럼 맞아 떨어진 것은 우연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김만중은 유배간 지 2년 만에 병이 들어 죽었다. 정치적 비판이 의도된 것이었다면 '서인쪽'에서 <사씨남정기>로 여론몰이를 하며 정국을 유리하게 이끌었어야 하는데, 그런 동향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성리학적 유교사상에서 양반이 솔선수범해야 했던 덕목이 바로 '예'다. 그중에서도 '효'는 최고의 가치였으며, '불효'를 하면 신분고하를 불문하고 사형에 처할 정도로 엄격했던 조선이다. 특히, 조선 중기를 넘어서면서 조선은 '예법'은 더욱 강조되었다. 자신들의 무능을 '철저히 예법을 지키는 것'으로 덮으려 시도했기 때문이다. '예송논쟁'이 첨예한 대립을 벌일 정도로 심각하게 다룬 까닭도 바로 이런 까닭 때문이다. 그래서 김만중이 홀로 계신 어머니에게 못다한 효를 실천하기 위해 어머님이 좋아하실 만한 내용의 '소설'을 직접 지은 것은 효의 관점에서 유심히 볼 대목이다.
그런 까닭에 <구운몽>이나 <사씨남정기> 모두 여성이 주인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소설의 여성들은 조선의 여성이 반드시 지켜야할 '예법'을 성실히 지키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할 바다. 열녀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여성들의 삶'이 끝내 복을 받고, 그렇지 못한 여성은 벌을 받는..지극히 당연한 내용으로 적혀 있다.
하지만 어릴 적의 난, 과연 이런 내용이 어머님에게 즐거움과 흡족함을 줬을지 의문이었다. 남성 위주의 꽉 막힌 사회속에서 남편도 없이 두 아들을 급제시킬 정도로 살림을 꾸려나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인데, 소설속에서까지 '그런 꽉 막힌 여성의 삶'을 강요하는 내용으로 그려내는 아들이 원망스럽지는 않았을지...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김만중의 어머님은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욕했을 거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여성의 삶을 여성 스스로 '기록'을 남기지 않았으니 알 수 없는 영역이기도 하다.
이렇게 김만중의 작품을 분석해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사씨남정기>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제목만 보면 '사씨가 남쪽으로 간 까닭'이라는 부제가 달릴 법도 하다. 교통 등 여러 사정으로 여행이 쉽지 않던 시대였고, 더구나 '여성'이 먼 곳으로 정처 없이 떠돈다는 일은 굉장히 이례적인 까닭에 당대에는 제목만 보고도 엄청난 이슈를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까닭이 있길래 여인의 몸으로 머나먼 곳을 떠돌게 되었단 말인가?' 하고 말이다.
그리고 책을 펼쳐보면, 한 남자를 두고서 두 여인이 갈등을 벌이는 장면이 압권이다. 더구나 정숙하고 선량한 처와 교활한 첩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은 '권선징악'이란 교훈을 끌어내는 전형적인 구성이라 '전기수(책을 읽어주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서는 듣는 이로 하여금 심금을 울리다 못해 '악역'에 대해 분노를 탱천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여기까지다. 분명 '처첩제'에 대한 비판적인 성격이 담겨 있는 내용인데, 결말에선 '또 다른 첩(임씨)' 등장하며, 선량하고 순종적인 첩을 들이면 집안에 평화가 찾아온다는 뻔한 결말로 이야기를 끝맺기 때문이다. 더구나 첩을 들이는 주체가 남자가 아닌 여성(사씨)이기 때문에 더욱 전형적인 소설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보면 <사씨남정기>는 오늘날 '독자의 관점'에서 그닥 추천할 만한 '고전소설'이 아님을 넘어 '부적격'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어느 부모가 자신의 딸에게 모진 고난이 찾아오더라도 남편에게 순종적이며, 대를 잇기 위해 아들을 꼭 나아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엔 '첩'을 들여서라도 숙제를 해결해야 하며, 그로 인해 남편과 첩에게 질투를 보여서도 안 된다...고 교훈을 가르칠 것이냔 말이다. 그렇다고 아들에게 권장할 책도 아니다.
그러니 <사씨남정기>를 그렇게 읽으면 안 된다. '시대의 비극'은 극복하기 위해 통찰해야 하고, '모순된 시대'는 해결하게 위해 자세히 들여다봐야 한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순종적인 여인상 만이 옳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면, 성평등시대를 맞아 양성평등의 가치에 입각해서 아직까지도 남성위주의 모순된 사회속에서 '여성의 가치'를 밝히고, 불평등한 사회속에서 '여성이 해야만 할 일'에 대해 생각해볼 꺼리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이 책에서는 '마냥 순종적인 사씨의 문제점'을 밝히고, '가부장적인 사회인데도 무능하기만 한 유씨'에 대한 비판하며 읽어야 한다. '사악한 교씨와 그 일당들'은 여성이라서 더 나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나쁜 것이고, 어떤 벌을 받아야 마땅한지 논의하는 것으로 족할 뿐이다.
결코 해서는 안 되는 것은 바로 [여자의 적은 여자다]라는 잘못된 인식을 무비판적으로 논의하는 것이다. 이런 주제는 토론주제로도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대체 잘못된 가치관으로 무슨 논의를 한단 말인가? 자칫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섣부른 선입견만 심어줄 뿐이다. 다시 말해, 여성끼리의 갈등을 조장하는 것은 여자에게 득이 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책을 읽으며 '편견'을 조장할 필요가 전혀 없다. 차라리 교활하고 사악한 꾀에 홀랑 속아넘어가서 집안을 풍비박산 내버린 무능한 남편 유씨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변호할 줄도 모르고 마냥 순종적인 모습으로 일관한 본처 사씨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더 현명한 독자의 자세다.
한편, 교활한 교씨를 장옥정과 교묘히 오버랩 시켜서 '작품해설'하는 것도 식상하니 적당히 했으면 좋겠다. 실상 남성중심사회였던 조선시대에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직접 나서서 정치일선을 지휘한 것도 아닐 텐데...또한, 강력하다 못해 카리스마 철철 넘치는 숙종이 '여인네의 치마폭'에 휘둘려 환국정치를 펼쳤다는 내용은 '드라마틱'한 즐거움(!)은 줄지언정 실상과는 사뭇 다를 테니 말이다. 설령 아주 관련이 없다손치더라도 '장희빈의 가문'이 남인들을 대표하지 못하였기에 가능성이 희박한 스토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숙종에게 '장희빈', 그리고 '최숙빈'은 정치색이 희박한 '러브스토리'에 가깝다는 점에서 해석하면 좋을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