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적으로 상식을 배우는 법 - 당당한 교양인으로 살기 위한
제바스티안 클루스만 지음, 이지윤 옮김 / 한빛비즈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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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는 독일 '퀴즈대회'에서 여러 차례 우승 경험을 갖고 있는 경력자다. 퀴즈대회의 성격상 굉장히 많은 배경지식이 필요로 하는 까닭에 글쓴이는 '모르는 것'을 빼고 '모든 것'을 다 아는 절대적인 상식의 소유자라고 착각하기 쉽다. 글쓴이도 고백하건데, 자신은 결코 '엄청난 상식의 소유자'가 아니라 그저 단순히 열심히 지식을 배우고 익히는 '노력가'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무엇'을 물어보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고 아주 상식적인 선에서 대답하곤 한단다. 그만큼 상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방대한 지식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상식이라고 하면 '누구나 알만한 지식'을 일컫는 것이지만, 뜻밖에도 우리는 '상식'이라 부를 만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가늠하기 어렵다. '나'의 상식이 '모두'의 상식이 되어야 '우리 모두'의 상식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우리 모두의 상식이라고 할만한 것을 추려보면 그다지 많지 않다는 사실을 맞닥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왜냐면 '상식'이라는 범주도 '세대차이'가 존재하며 '교양'이라는 딱지(프리미엄)를 하나 더 얹으면 '수준차이'까지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남녀차이', '인종차이', '민족차이' 등등 세부적인 수준까지 파고들면, 과연 우리 모두가 알만한 '상식'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의심케 만들 지경에 이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일반적으로 모두가 알만한 지식'을 상식이라 일컫는다. 그리고 우리는 '상식'을 쌓으려 대단히 오랫동안 배우고 또 익히며 살아간다.

 

  그런데 21세기에도 '상식'이 필요한 걸까? 지금은 '검색능력'이 상식을 대체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이른바 '인공지능의 시대'를 맞은 지금의 세대에겐 지식을 외우는 능력보다는 '검색'을 통해서 적절한 지식을 빠르게 찾아내는 능력이 더 필요한 시대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인공지능'과 직접 대화를 통해서 필요한 지식을 쉽고 빠르게 얻어낼 수 있는 시대에 '상식' 따위를 익히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시간낭비로 보이기까지 하니 말이다. 마치 주산, 암산이 대유행하던 시대를 지나 전자계산기와 컴퓨터가 보편화된 시대에 와서까지 열심히 주판알을 튕기고 있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허나 글쓴이는 단언한다. 인공지능 나부랭이가 판을 치는 시대라할지라도 '상식'을 공부하는 것이 반드시 도움이 되고 꼭 필요한 공부가 될 것이라고 말이다. 이유를 들어보면 수긍이 될 것이다. 구글검색을 통해서 얻어낸 쉽고 빠른 '정보'들은 한쪽으로 쏠린 '편향된 정보'일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검색을 거듭할수록 '편협한 정보'만을 한정해서 보게 되기 때문에 폭넓은 사고를 기를 수 없고, '내 입맛'에만 딱 맞는 정보를 골라서 보여주는 것에 길들여지면 '다른 생각'을 원천 차단 당하는 까닭에 '원하는 정보'는 얻을지언정 '그밖의 정보'와는 담을 쌓게 되는 우물의 안의 개구리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말이다.

 

  이 책의 내용은 퀴즈대회의 우승자답게 엄청난 양의 지식을 쉽고 재밌게 얻을 수 있는 방법들을 소개하고 있다. 개중에는 이미 알고 있고 이미 익히고 있는 방법도 있었지만, 새롭게 알게 된 유용한 방법도 소개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 눈을 사로잡은 내용은 따로 있다. 바로 상식이 '교양'으로 승화되는 순간이었다. 이를 테면, 전세계의 '수도이름'을 외우는 것은 상식의 범주이지만, 우연히 만난 외국인 친구의 '수도'를 아는 채하며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드러내어 상대방의 '호감'을 끌어냄과 동시에 '절친'으로 발전하는 것은 교양의 수준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세계 '프로축구선수'를 달달 외우고 관련된 '축구정보'를 척척 읊어대는 것이 축구팬으로서의 상식이라면, 각구단의 사정에 빠삭하고 올해 시즌의 성적을 예상하며 팀과 선수들의 기량을 비교하며 전문해설가 못지 않은 해설을 풀어낸다면 '교양인'으로 거듭나게 된다는 말이다.

 

  이처럼 상식은 교양인의 필수가 되기 때문에 반드시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뜻깊게 읽을 수 있어서 매우 유익한 책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 주변에는 '상식밖의 말과 행동'을 일삼으며 페해를 일으키는 분들이 너무나도 많다. 이분들에게 '상식'이 없어서 그런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분들 나름대로는 꽤나 많은 상식을 쌓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허나 단언컨대, 이분들은 '교양이 없다'고 말할 수는 있다. 사람으로써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는 고사하고 '자기가 보고 싶고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맹목적이고 맹신적인 행동을 일삼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시대의 교양은 절박한 시점에 다달았기 때문에 '상식'은 더욱더 절실할 수밖에 없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첨예한 대립'을 넘어서 '치열한 갈등 양상'을 벌어지고 있다. 예를 들면 끝도 없다. '페미문제'에서 비롯된 '남녀갈등'은 해결점을 찾지 못했고, '소녀상'과 '위안부'를 둘러싼 해묵은 진실공방은 참과 거짓을 구분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으며,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건설적인 토론을 기대할 수 없는 맹목적인 비난과 상대를 향한 비방은 끝내 서로를 청산하지 못해서 안달이 나버린 우스운 꼴로 전개되어 버린 탓이다. 어느 곳에서도 '교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버렸다. 과연 무엇 때문일까? 조심스럽게 진단을 내려본다면, 바로 '상식'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탓이라고 본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화합할 수 있는 '모두가 알만한 상식'이 사라져버린 탓에 벌어진 다툼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비상식'이 '비정상'으로 귀결되고 있다고 말이다.

 

  이제 우리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대한민국이 왜 서로 갈라져서 싸워야만 하는가. 아니, 의견이 서로 다르고 갈라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런데 왜 조금만 '양보'하고 '한발' 물러서서 '상대의 의견'에 귀 기울이고 이해하려 노력하는 '경청'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까하고 '상식'적인 생각을 해보잔 말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경청'을 멈출 수는 없는 법이다. 경청을 하다보면 말이 통하지 않을 수도 없다. 내 생각을 상대에게 '주입'하려 드는 것은 '상식'이 아니라 '꼬장'이다. 내 주장을 상대에게 '설득'하려 백 번 양보하는 것이 '상식'이자 '교양인의 자세'다. 그리고 교양인이 되기 위해선 풍부한 배경지식을 쌓아야 한다. 그래야 내 주장을 논리정연하게 전개시킬 수 있고, 상대의 주장도 십 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상식을 쌓아야 할 이유를 이해했다면, 상식을 쌓을 방법만 익히면 된다. 그 방법은 말 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방법'이 아니라 '실천'이란 것도 잊지 마시길.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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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글쓰기 수업 - 서술형·논술형 시험에 강한 아이로 키우는
김윤정 지음 / 믹스커피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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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역시 논술쌤이기에 아이들에게 '글쓰기의 중요성'을 곧잘 강조하곤 한다. 하지만 정작 아이들은 흘려듣기 일쑤다. 왜냐면 주위를 둘러보면 '글쓰기'를 잘하는 어른은 그닥 많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글쓰기'를 일상에서 즐겨 쓰는 어른이 도통 보이질 않는데도 학생이니까 '글쓰기(논술)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강요한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독서논술은 '학교시험'에서나 쓸모가 있는 공부라고 생각하고 만다.

 

  허나 학교시험이라고 마냥 '글쓰기'를 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서술형 논술형 답안을 중요하게 여기고 많이 요구한다고 해도 여전히 '객관식 문제', '단답형 서술 문제'가 출제되고 있기 때문에, 아이들은 논술서술은 과감히 포기하고 '객관식'만 만점을 노리는 공부를 하기 일쑤다. 비단 학생만의 문제는 아니다. 현장교육의 책임자인 선생님들조차 '학업성과가 낮은 학생들'을 위해 궁여지책으로 객관식 평가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교육이 나은 '선택'일까? 학업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만을 위해 과감히 '100% 서술형 평가'만을 고집해야 할까? 아니면 학업 성적이 뒤쳐진 학생들도 고려해서 '서술형 평가 출제 경향을 50% 이하'로 유지해야 할까? 어려운 선택이다. 마치 공리주의에 입각해서 '정의로운 행동'을 고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이를 테면, 침몰하는 배에서 소수의 희생자를 선택하면 배 안에 남은 사람은 안전하다면, 누구를 '희생자'로 선택할 것인가..처럼 말이다. 소수의 엘리트를 키우는 교육시스템이 좋은 것일까? 학생들의 행복을 우선하는 교육시스템이 좋은 것일까? 물론, 정답은 '둘 다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고민을 하면서 모든 학생들이 '좀 더 쉬운 글쓰기 공부'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두 말 할 것도 없이 바로 도입해야 마땅할 것이다. 글쓰기 공부의 첫째는 '독서 습관'이고, 그 다음은 바로 '문해력 훈련'이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가 '글쓰기의 일상화'다. 글을 쓰려면 먼저 읽어야 한다. 그리고 이해하고 생각한 뒤에, 그 '생각'을 정리해서 한 편의 글로 정리하는 것이 순서인 셈이다. 물론 다른 방법도 있다. '독서습관' 단계에 '토의토론'을 넣는 것이다. 그렇게 '토의토론' - '듣고 이해하기' - '내 주장과 상대의 주장 정리하기' - '한 편의 글'로 내용정리하기...이렇게 하면 '글쓰기 훈련'은 완성이 된다. 허나 '토의토론'을 하기 위해선 '배경지식'도 많아야 하고 '자료조사'도 충실히 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독서'가 선행되야 하는 건 마찬가지다.

 

  자, 그렇다면 '글쓰기 공부'는 언제부터 시작해야 할까? 두 말 할 것도 없이 '초등학교'부터다. 가장 적기는 '초등3학년' 때부터이고, 독서수준이 뛰어난 아이의 경우에는 '초등1학년'부터 시작해도 무방하다. 허나 미취학아동은 '글쓰기'를 시키면 절대 안 된다. 도리어 역효과가 나는 경우가 태반인 탓이다. 아직 손가락 근육도 야물지 않은 상태(소근육 미발달)에서 글씨쓰기를 강요하면 나이가 들어서도 제대로 된 글씨를 못 쓰는 경우가 발생하고, 아직 덜 발달된 근육을 강제로 쓰게 하면 '피로감'부터 배우게 되어서 '글쓰기' 자체를 싫어하게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직 '생각훈련'도 하기에 이른 나이에 '뭘 쓰라'고 강요하는 것 자체가 상당한 스트레스로 작용할 뿐이다. 이런 현상은 '초등 1,2학년'에게서도 자주 발견되는 문제점이기 때문에 성장발달이 늦은 아이일수록 '글쓰기 교육'은 절대 서두르면 안 된다.

 

  하지만 어릴수록 '창의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독서수업을 진행하면서 '질문하기'를 통해서 아이의 생각을 '표현'하도록 유도하는 건 좋다. 이 시기의 표현법은 '그림그리기', '만들기', '노래부르기', '율동하기', '다양한 감정으로 표현하기' 등으로 쉽고 재미나게 하면 된다. 이런 능력은 초등 3학년까지 최고조에 달하기 때문에 '초등 3학년'에 글쓰기 수업을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창의력을 살리면서 독서습관과 글쓰기 습관을 동시에 다잡을 수 있는 최적의 시기인 셈이다.  허나, 이 시기를 놓쳤다고 불안해할 것은 전혀 없다. 본격적인 '글쓰기 공부'는 중등 이후부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초등시절에는 '독서습관'을 탄탄히 다잡는 것이 매우 바람직하다.

 

  그러나 막상 글을 쓰려고 하면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겠고, 책을 읽으려 하면 '어떤' 책을 먼저 읽어야 할지 고민이라는 분들이 정말 많다. 이럴 때 '유용한 팁'이 있으면 참 좋을 것이다. 이 책에는 바로 그런 '유용한 글쓰기 팁'과 '좋은 책'을 선별해서 수록해 놓았기 때문에 참고가 될만 할 것이다. 더구나 '창작동화', '위인전', '과학책', '철학책' 등 다양한 도서를 샘플로 삼아서 '글쓰기 팁'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기대에 부흥할 책이다.

 

  중요한 건 '글쓰기에 정답은 없다'는 것이다. 형식도 내용도 자유롭게 창의적으로 쓰면 그뿐이다. 다만, '잘 쓴 글'은 누가 읽어도 잘 썼다고 느끼기 마련이라는 점이다. 잘 쓴 글의 공통점은 '내용이해'가 한 눈에 될 정도로 쉽게 쓰고 간결하다는 점이다. 또한, 잘 쓴 글은 '거꾸로' 읽어도 내용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는 점이다. 이는 '하나의 문단에 하나의 주제를 담는다'는 글쓰기의 기본을 잘 지켰다는 것이고, 문단과 문단사이에 내용의 '일관성', '통일성'이 잘 지켜졌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나의 주제에서 벗어나지 말고 적절한 근거를 들어서 주제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도로 쓰는 훈련을 하는 것이 전부라는 말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형식'을 강조하면서 서론-본론-결론 같은 걸 지키라고 따분하게 가르치지 말며, '분량'을 지키라면서 처음부터 무리하게 강요를 하면 글쓰기의 참맛은 더욱더 배우기 힘들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훌륭한 독후감 한 편을 선보이며 마무리하련다. <짜장 짬뽕 탕수육(재미마주, 1999)>이란 재미난 창작동화가 있다. 책내용은 전학을 간 아이가 새친구를 사귀기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마침맞게 '왕따문제'가 학교에서 유행을 하던 시기였던 터라 힘쎄고 짖굳은 아이들 때문에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문제와 맞닥들이면서 벌어지는 사건이 핵심 포인트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런 어려움을 유쾌하고 재치넘치는 '한 방'으로 위기를 넘기면서 책내용은 마무리 된다. 이것을 읽고 난 다음에 쓴 어린이의 독후감이다. [난, 짬뽕]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세 글자'였다. 물론 독후감을 발표하고 나서는 더욱 세심한 '부연설명'을 하였다. 그 결과, [난, 짬뽕]이란 독후감을 쓴 것이었다. 책 한 권의 내용과 책을 읽은 아이의 생각이 '세 글자'로 함축되는 순간이었다. 글쓰기 공부는 결코 어렵지 않다. 즐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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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지 마라, 지친다
이지풍 지음 / 한빛비즈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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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가 들면서 제대로 드는 생각은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지천명을 코앞에 두고 보니 인생은 참 길고 할 일은 더럽게 없으면서 매일매일이 '반복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제 한 일을 오늘도 하고 내일 또 할텐데 뭘 그리 아등바등하며 살았었는지...인생은 '장거리 달리기'와 같으니 쉬엄쉬엄 달려도 괜찮다는 진리를 인생 후배들에게 알려주고 싶을 뿐이다. 때로는 게으름을 피울 때 '인생대박'을 터뜨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반대로 '쉼없이' 달리고 또 달려서 성공을 꿈꾸는 이들 가운데, 정작 흡족할 만큼 성공한 이는 드물다는 사실도 함께 말이다.

 

  이 책의 저자는 '야구 트레이닝 코치'다. 경력은 20여 년이 넘었단다. 그래서 야구 이야기가 참 많지만, 야구에 대해서 하나도 몰라도 읽고 공감할 수 있는 내용으로 가득한 책이다. 어쩌면 한국야구계에 만연한 '꼰대문화'를 적확하게 꼬집어서, 사회초년생들에겐 '맞아맞아'를 연발하게 될지도 모르고, 기성세대들에겐 뼈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아픔을 동반한 깨달음을 얻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책을 읽다보면 '공감'되는 내용이 참 많을 것이다.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내용은 '닥치고 훈련'부터 시키는 감코진(감독과 코치)의 관행적 트레이닝에 대한 비판이다. 운동선수에게 체력을 기르는 훈련과 기술을 익히는 훈련은 기본 중에 기본일 것이다. 그런데 한국야구에서는 이것이 너무 심해서 탈이란다. 이를 테면, 야구선수에게 모든 선수들에게 달리기 훈련을 시키는 것, 타자에게 빈방망이 휘두르기, 투수에게 투구 훈련, 야수에게 좌우로 크게 왔다갔다시키는 펑코 훈련 따위를 새벽부터 야간까지 주야장천 시키는 것이 문제란다. 야구선수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훈련들이긴 하지만, 당장 내일 시합인데도 '야간훈련'을 시키며 몸을 혹사시키고 난 뒤에 정작 '본시합'에서 어떻게 기량을 발휘하라고 하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면서 말이다.

 

  까닭인 즉슨, 야구경기는 보통 3시간 정도 치루는데, 한 경기당 야구선수가 평균적으로 '전력질주'를 하는 시간은 고작 18분에 불과하단다. 다시 말해, 야구선수는 '오래달리기' 같은 훈련이 별로 쓸모가 없다는 말이다. 기초체력 훈련을 위해서라면 할 말이 없겠지만, '시합 전날'에 선수들이 기진맥진해질 때까지 체력을 고갈시키는 강도 높은 '달리기 훈련'은 애당초 본시합에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차라리 '쉬는 것'이 더 시합에 긍정적인 보탬이 될 것이라고 말이다. 실제로 140년 역사의 메이저리그에서는 선수들을 혹사시키는 훈련 따위는 시키지도 않는단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힘'을 기르는 웨이트 훈련이나 '기술'을 가르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단다. 그러다 시합 전 날이 되면 그냥 '휴식'이나 충분히 취한 뒤에, 본시합에 기량을 뽐내라고 한단다. 그런데도 한국야구에서는 땀을 뻘뻘 흘리지 않으면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꼬리표가 붙어서 선수들은 눈치껏 알아서 땀을 흠뻑 흘리고, 감코진도 그런 선수들을 뭐라고 탓하지 않는...암묵적인 합의(?)가 있는 것도 같고, 잘못된 관행이 오래 가는 것 같은 느낌도 들고...뭐, 그렇단다.

 

  다시 말해, 경기시간 3시간 동안 고작 18분만 '폭발적인 힘과 전력질주'가 필요한 선수들에게 가장 필요한 훈련은 '힘을 비축했다가 한순간에 터트리는 고강도 집중훈련'이 더 필요하단 말이다. 꽤나 상식적인 조언 아닌가. 그런데도 한국야구에서는 이런 상식이 통용되기까지 정말 오래 걸렸다고 한다. 그래서 저자는 기왕에 한국야구가 '선진야구'를 배우려 한다면, 140년 역사의 메이저리그에서 배울 것이지, 고작 70년 역사를 가진 일본야구에서 배우려 하는 것은 뭔가 잘못 되었다고 지적한다. 심정적으론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기량이 월등히 앞선 미국야구보다 '40년 한국야구'와 근접한 '일본야구'를 따라하며 배우는 것이 '스텝 바이 스텝'이 아닐까 하는 그런 거 말이다. 허나 저자는 딱 잘라 말한다. 그런 '일본야구'가 자신들의 문제점을 고칠 때 참고하는 것이 '미국야구' 아니냔 말이다. 결국, 일본야구는 건너뛰고 메이저리그에서 '직접 배우면 된다'고 말이다. 이게 더 상식에 가까울 거라고 말이다.

 

  허나 저자는 말한다. '진짜 상식'은 한국은 한국에 맞는 '한국야구'를 찾아야 한다고 말이다. 진정한 선진국은 '베끼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남들보다 앞서서 '대안'을 제시하고 다른 나라에 '모범'이 되는 길을 닦아 나가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 선수에게 딱 맞는 트레이닝 방법을 찾아 '한국야구'를 발전시켜 나간다면, 메이저리그보다 더 매력적인 '한국야구의 맛'을 전세계에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선 고질적인 '꼰대문화'부터 고쳐 나가야 한다고 지적질을 아끼지 않고 있다.

 

  절로 공감이 되는 말이었다. 그리고 야구에 맞는 훈련법이 따로 있는 것처럼 '자기 인생'에 딱맞는 인생 트레이닝 방법도 반드시 있을 거라는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수많은 청춘들이 '성공'을 꿈꾸지만 '모두'가 성공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다면 인생의 목표를 절대 '성공'에 두면 안 된다. 야구에서도 일찍 성공한 선수들이 오랫동안 성공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학창시절에 '유망주'였는데, 프로에 와서 빛을 보지 못한 안타까운 선수들이 정말 많으며, 화려한 선수시절을 보냈는데도 은퇴와 함께 '야구인생'을 접는 사람들도 참으로 많으며, 오히려 선수시절에는 빛을 보지 못했다가 감독이나 코치로 '제2의 야구인생'을 데뷔한 뒤에 명감독, 명코치로 유명해진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야구인생'으로 진로를 잡았다면 '야구와 함께 하는 나날'이 가장 행복할 것이다. 그렇다면 야구와 함께 오랜 시간을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일 것이다. 그 방법은 '야구전문가'들이 더 잘 알테고 말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평생할 수 있는 것만큼 행복한 삶이 있을까.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행복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삶을 혹사시키면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물론, 전력질주가 필요할 때도 있다. 하지만 모든 순간을 전력질주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쉴 때는 확실히 쉬어주어야 하고, 때론 게으름을 피우며 멍 때리는 여유도 즐길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인생은 길다. 10대부터 무작정 달리려고만 하지 말길 바란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한 20대를 보내겠지만, 지나고 보면 별 것 아닌 일에 열을 올린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보다 바쁘게 살아갈 30대가 찾아오겠지만, 그 역시 매일매일이 '반복되는 바쁨'일 것이다. 얼마나 지루하고 지겨울 것이냔 말이다. 적당히 요령피우며 살아도 되는 게 30대다. 그리고 40대가 되면 '체력(건강)관리' 하느라 노심초사하게 될 것이다. 생각보다 건강이 나빠지면 '전전긍긍'하면서 체력을 되살리려 고군분투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의 제목처럼 '뛰지 말길' 바란다. 행복한 인생을 살려면 '여지껏' 잘 뛰어왔다는 것보다는 '앞으로도' 잘 뛸 수 있는 것이 더 중요할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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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구한 의학의 전설들 - 위대한 의학의 황금기를 이끈 찬란한 발견의 역사
로날트 D. 게르슈테 지음, 이덕임 옮김 / 한빛비즈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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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의학지식'이 담겨 있는 역사책이다. 다시 말해, 역사적 사실을 낱낱이 드러내면서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나 '새롭게 알게 된 사실', 그리고 '더 알고 싶은 내용'으로 정리하면서 읽으면 충분한 책이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의학계에서 획기적인 발견, 또는 발명으로 수많은 인류를 죽음에서 삶으로 바꾼 전설적인 인물들의 삶과 비하인드 스토리가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꽤나 감동적인 감상으로 읽어도 좋을 역사책이다. 그러나 이러나저러나 '여러 가지 지식의 나열'인 것만은 다른 것이 없다.

 

  그래서 난 이런 책을 접하면 고민을 하게 된다. '지식의 나열'에 동참해서 책을 읽지 않고도 책내용의 전반적인 내용을 감 잡을 수 있도록 '친절한 리뷰'를 쓸 것인가? 아니면, 책의 내용보다 더 풍부한 지식을 자랑질하듯 '화려한 리뷰'를 쓸까? 그도 아니면, 글쓴이가 미처 다 담지 못한 몰랐던 정보를 담아 '놀라운 리뷰'를 써낼 것인가? 하고 말이다. 적어도 난 '친절한 리뷰'하고는 담을 쌓았다. 너무 식상하기 때문이다. 간혹 '화려한 리뷰'를 쓰기도 했지만, 글쓴이에게 실례가 된다는 것을 깨달은 뒤로는 절필하였다. 그래서 종종 '놀라운 리뷰'를 쓰곤 했지만...이것도 자주 쓰다보니 이 책의 내용을 저 리뷰에, 저 책의 내용을 요 리뷰에 짜깁기하는 느낌이 들어서 자중하고 있는 편이다. 이런 까닭에 요즘에는 '내 생각'에 '충실한 리뷰'를 쓰고자 노력한다. 책을 읽고 난 뒤의 나의 솔직한 느낌을 최대한 살려서 말이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담론'은 바로 '의학이 바꿔 놓은 인류사'다. 이를 테면, 손씻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산모를 출산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고, 마취제를 발명함으로써 더는 수술장이 비명으로 가득하지 않았으며, 소독제를 사용함으로써 더는 감염으로 인한 죽음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게 되었다는 내용 말이다. 물론, 쌩뚱맞게도 철도의 발명이 '외상 후 스트레스(PTSD)'라고 하는 질병을 보다 더 잘 알 수 있게 해주었고, 다윈의 <진화론>이 '유려한 문체'로 쓰여진 탓에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었던 데 반해서, 제멜바이스의 책은 너무나도 읽기 힘들 정도로 어렵고, 때로는 광기에 물든 문체로 쓰여져서 의학전문가들조차 읽기 거북한 탓에 '손씻기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강조했음에도 그후로도 오랫동안 '산욕열'로 죽어가는 산모와 '감염'으로 인한 사망이 줄지 않았다는 내용도 적혀 있었다. 어쩌면 '기-승-전-의학'이라는 귀결로 쓰여진...어떤 에피소드라도 결국엔 '의학'이라는 우격다짐으로 쓰여진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토록 난삽한 면이 없지 않지만, 그럼에도 '의학의 발달'로 수많은 목숨을 구할 수 있게 된 역사적인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그 가운데 난 '의학의 전설들'이 하나같이 당대에는 큰 관심을 받지 못하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주목받데 된 점이 눈에 띄었다. 마치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이 그의 사후에 '주목'받고 걸작으로 평가받게 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팬데믹'을 되돌아 보았다. 벌써 대유행이 시작된 지 3년째이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인간과 바이러스의 대결이었다. 그리고 이 대결은 대부분 '시간'이 해결해주곤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말이다. 전염병이 창궐하면 삽시간에 퍼져 넓은 지역의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난 뒤에 '면역력'을 갖춘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전염병이 잦아드는 '기록'이 참 많기 때문이다. 당대의 내놓아라하는 '명의'들도 팬데믹과 같은 상황에선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허나 오늘날에는 달랐다. '의료계'에서 발빠르게 움직였고, '감염관리'를 전담하는 부서에서 긴밀하고 적절하게 대응함으로써 '팬데믹' 상황속에서도 버티고 시간을 지연시켜 '대비'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의 팬데믹과 이번의 '코로나19 팬데믹'은 양상이 많이 달랐다.

 

  물론, 겉잡을 수 없이 확진자와 사망자가 늘어나는 것에 대응할 수 없었던 국가들은 초기에 많은 희생을 막을 수 없었다. 심지어 선진국에서조차 말이다. 그동안엔 돈 많은 선진국들은 가난한 후진국처럼 '질병에 의한 죽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방관자의 입장'을 취하곤 했는데, 이번 '팬데믹'에서는 '직접 당사자'가 되어 큰 피해를 보았다. 허나 이렇게 선진국에서 호되게 당하고 나니 좋은 점도 있었다. 거대제약회사들이 앞다퉈서 '백신개발'에 나섰고, 보통 10년 이상이 걸리던 개발기간을 1년이내로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완전한 백신'은 아니어서 추후에 예측하지 못한 부작용에 시달리거나, 원인을 알 수 없는 죽음에 처하게 되는 일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한 조치였다. 그만큼 급박한 사태로 번졌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코로나 팬데믹'를 막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손씻기'와 '마스크'였다는 사실에 새삼 주목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의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질병' 자체를 없애거나 '죽음'을 막을 순 없다. 또한, 백신이나 항생제, 그리고 치료제 따위로 완벽하게 막아내고 되살리는 일도 불가능하다. 그리고 누군가에겐 백신이나 항생제, 치료제가 너무나도 비싸서 '있어도' 사지 못하고 써보질 못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손씻기'와 '마스크'는 비교적 저렴한 돈으로 엄청난 혜택을 볼 수 있기에 누구나 '할 수 있는 예방법'이다. 물과 비누, 또는 소독제로 '손'을 씻으면 98%의 감염병을 예방할 수 있고, 마스크로 코와 입을 막는 것만으로도 '호흡기질환'의 99%를 차단할 수 있게 된다. 단돈 천원(1달러 상당)으로 엄청난 효과를 볼 수 있으니 웬만해서는 병원에 갈 일도 없게 해주는 효과적인 '상식'이고 말이다.

 

  현재는 '오미크론'이 대유행을 하면서 마스크조차 '무용지물'이 된 것은 아니냐? 하는 오해를 불러오고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마스크 착용을 꼼꼼이 하면 거의 대부분 걸리지 않는다. 잠시 방심한 틈에 걸리고, 오랜 방역으로 인한 피로도가 증가한 탓에 느슨해진 틈을 타고 번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확실할 것이다. 하지만 '팬데믹'이 지나고 나면 선명하게 밝혀질 것이다. 마스크를 '벗을 자유'보다는 마스크를 '쓰는 배려'가 더 많은 인류의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또다시 '팬데믹'이 찾아왔을 땐, 분명해질 것이다. '벗을 자유'를 주장하는 이들이 진짜 '모두를 위한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그랬는지, '개인의 이익'을 침해받지 않기 위해 그랬는지 말이다.

 

  대유행의 정점을 지나면 '집단면역'을 형성해 '백신의 효과'와 더불어서 팬데믹을 종식하게 될 것이라 전망하고 있다. 지금 대유행으로 안타까운 사망자가 늘고 있는 것은 안타깝지만, 종지부를 확실히 찍기 위해서라도 '손씻기'와 '마스크'를 다시 한 번 상기시켜야 할 때인 것은 분명하다. 의학의 전설들도 복잡한 치료법과 비싼 치료약을 만들었기에 전설이 된 것은 아니다. 의외로 가장 기초적인 방법에서 힌트를 얻어 기존의 방식보다 훨씬 더 획기적인 방법을 제안하는 것으로 의학을 발전시켜 왔기 때문이다.

 

  또다시 '손씻기'를 강조한 제멜바이스의 이야기로 마무리하련다. 의사들에게 '모든 환자와 접촉하기 전, 반드시 손을 씻을 것! 예외는 없음'이라는 문구를 전하고 실천하라고 했을 때, 당대의 권위 있는 의사들은 '권위'를 앞세워 손씻기를 거부했다. 그 이유는 고귀한 의사의 손을 '전염의 도구'로 전락시킨 제멜바이스를 의사들의 권위를 추락시킨 원흉이라고 비난해서가 아니었다. 당시의 손씻는 소독제(염소)가 의사들의 손을 쓰라리고 아프게 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귀찮아서였다. 아직 세균의 존재가 증명되지 않아 '감염의 원인'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손씻기'라는 상식이 통하지 않던 시절인 탓이었다. 그럼에도 제멜바이스는 '통계'를 이용해서 손씻기를 강조했다. 손씻기를 하지 않은 병동에서는 여전히 산모들이 산욕열로 죽어나갔지만, 손씻기를 한 병동에서는 점점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의사들의 손씻기가 일상화 된 것은 먼 훗날의 이야기였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사실은 바로, '단순함'과 '예방'이다. 진리를 통찰하는 힘은 '단순함'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하고, 건강은 아프고 난 뒤에는 절대로 되찾을 수 없기에 미리미리 건강을 챙겨야 하고, 모든 질병은 치료에 앞서 '예방'이 최선임을 말이다. 복잡하게 설명하는 사람은 잘 모르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복잡한 것도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진짜로 '안다'고 할 수 있다. 당대의 의사들이 우주의 기운이 나쁘게 작용해서 산모들이 죽어간다고 했을 때, 제멜바이스는 관찰과 통계로 '손부터 씻으라'고 명령했다. 산모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산욕열'은 '감염'에서 일어나는 질병이니 감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손씻기'라는 예방책을 내놓았다. 단순명쾌한 의학적 발견이다. 세상의 모든 이치 또한,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코로나 팬데믹' 상황속에서 손씻기와 마스크가 최선이라는 진리도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또다른 팬데믹이 찾아온다고 해도 우리는 극복할 것을 의심치 않을 것이고 말이다. 물론 지금 당장은 '코로나'부터 극복하고 말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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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의 세계사 - 뺏고 싶은 자와 뺏기기 싫은 자의 잔머리 진화사
도미닉 프리스비 지음, 조용빈 옮김 / 한빛비즈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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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금을 내면서 좋아라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세금은 꼭 필요한 것이라 세금은 '아예' 내지 않겠다는 사람도 드물다. 그러면 '적정 수준'의 세금이 존재하지 않을까? 많이 내기는 싫고 원천적으로 내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의 저자는 국가경제(GDP 기준)의 10퍼센트 정도가 적당하다고 제시하고 있다. 더 나아가 저자는 "그 정도의 세금은 '강제'로 걷어간다고 해도 기분 나쁘지 않을 것이다"라고 확신에 차 있을 정도였다. 정말 그럴까?

 

  역사적으로 사료를 뒤적거려도 '그리스도교의 십일조' 정도의 세금은 언제나 매겨 왔고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큰 불만을 사지 않은 평화로운 시기의 세율이었다고 저자는 밝힌다. 부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가난한 이들조차 '그 정도'의 세금은 경제적으로 버틸 만한 수준이었다면서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국가경영'이 위태로운 상황을 초래하게 되어 '증세'를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경우에 발생했다고 한다. 이 시점부터 부자들은 더 내기 싫어하고 가난한 이들은 없어서 못 내는 '조세저항'이 세진다고 말이다. 결국, 한 나라의 흥망성쇠는 '세금'에 있었다면서 '강제징수'부터 '조세형평성'까지 세금과 관련된 문제로 인해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했고, 나라의 운명조차 좌지우지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굳이 예를 들지 않아도 수긍할 수밖에 없는 대목일 것이다. 국가(정부)가 세금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권력의 행방이 좌충우돌하였다는 것은 얼마전에 치뤄진 대한민국의 대선에서도 알 수 있으니 말이다. 극단적으로 설명할 것도 없이 '문재인 정권'의 교체를 바란 대다수의 국민들은 '부동산정책의 실패'를 거론하며, '부동산세'에 대한 반감이 대통령후보의 능력검증보다 더 확실한 결정력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만큼 후보와 정당 모두에게 '비호감'으로 치뤄진 적이 없었으며 여러 이슈들을 모조리 덮어버리고 '부동산정책'만 제대로 하라고 목소리를 높이던 때도 없었다. 그럼에도 선거가 끝나고나자 '하릴없는' 이슈들을 들먹이며 '부동산정책'에 대한 관심을, 아니 '부동산세'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희석시키려 드는 적폐언론들의 행동거지는 일찌감치 예상했던 바인지라 놀랍지도 않다. 하지만 결국 그런 '공작'도 1년만 지나면 고스란히 밝혀지고 말 것이다. 과연 새정부가 어떤 '세금폭탄'을 터트리게 되느냐에 따라 여론의 행방이 결정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부디 공정하고 부정부패비리와는 손절하길 바랄 뿐이다.

 

  암튼, 글쓴이가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조세정책을 정리하자면, 첫째, 세금을 많이 걷는 정부는 망하고 적게 걷는 정부는 오래 간다. 둘째, 강제로 걷는 세금보다 자발적으로 내게 하는 세금이 더 많이 걷힌다...로 간단히 정리할 수 있겠다. 한마디로 세금은 적게 매기고 부족한 세금은 자발적으로 내도록 하되 세금을 많이 내는 이에게 후한 혜택을 충분히 제공하면 국가를 운영하는데 큰 지장이 없으면서도 국가경제가 성장발전하는 양상을 띠게 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심지어 그런 나라를 '유토피아'로 지칭하면서 말이다. 과연 그럴까?

 

  저자는 그런 유토피아의 예로 고대 아테네와 영국 지배하 홍콩의 조세정책을 대표적인 예로 들고 있다. 아테네가 도시국가로 성장발전하고 페르시아의 공격에도 꿋꿋하게 버틸 수 있었던 이유로 '강제징수'가 없었다는 것을 예로 들었다. 세금은 지배층이나 부자들이 모두 충당했고, 일반 평민들은 세금을 내지 않았단다. 물론 세금을 많이 낸 만큼 '정치참여'의 기회를 주었고, 일반 평민들도 '정치'에 참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적게나마 세금을 내며 국가를 운영했다고 한다. 홍콩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홍콩은 전쟁으로 인해 황폐했지만 이렇다 할 '조세정책'을 내세우는 대신 '자발적인 징세정책'으로 일관했다. 그 결과는 놀라웠고, 마치 <국부론>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이라도 하듯 홍콩은 빠르게 경제를 회복했고 홍콩시민들은 자유와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렇듯 '부담없는 조세정책'은 자유와 평화의 첫걸음이라는 공식을 살펴볼 수 있었다. 반면에 '강제징수'와 '증세'는 어김없이 나라 안을 혼란스럽게 했고 심할 땐 망국이나 파국으로까지 치달았던 예는 부지기수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과연 '세금'은 내야 하는가? 내지 말아야 하는가? 국가경영의 시작은 '조세'에 있다. 무엇을 하든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 같은 돈을 떼인다는 생각만 해도 극렬히 저항하는 본능(?)은 어찌할 것이냔 말이다. 물론 '자발적'으로 필요한 만큼의 세금을 내고, 충분할 만큼의 세금을 걷게 되면 아무 문제도 없지만, 내려는 자와 걷으려는 자의 갈등은 쉬이 '뺏기지 않으려는 자와 뺏으려는 자의 갈등'으로 변질되기 마련이다.

 

  허나 그럴수록 우리 모두의 지혜를 모아야 하지 않을까. 일찍이 영국의 마그나카르타(대헌장)에는 '대표 없는 곳에 과세도 없다'고 밝혔다. 다시 말해, 세금이 필요한 만큼 '투명하게' 그 이유를 밝히면, 언제든지 얼마만큼의 세금을 낼 용의가 있다는 말이다. 반대로 걷은 세금을 어따 쓰는지도 밝히지 않으면서 무작정 세금만 많이 걷으려 하면 극렬한 '조세저항'을 맞닥뜨릴 수밖에 없음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우리 나라의 부동산정책도 그러하다. 복잡할 필요도 없다. '1가구 1주택'을 원칙으로 삼고, 이를 지키면 세금부담을 대폭 낮추고, 반대로 어기면 '세금폭탄'을 매기면 된다. 물론, 이를 두고도 저항하는 부류가 있기 마련이다. 바로 '임대업'으로 먹고 사는 이들인데, 이들에겐 '재산세'와 '소득세'로 징벌적 과세를 하면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자유로운 나라에서 '징벌적 과세'가 웬말이냐 싶지만, 욕심꾸러기에겐 그래도 된다고 본다. 집이 없어 서러운 서민들이 길거리에 나앉을 판인데 '한정된 주택'을 선점한 것으로도 모자라 '신도시 주택'까지 투기로 '가격상승'을 부추긴 원인제공을 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적인 '부동산세법'은 더 복잡하고 많은 이유를 품고 있다. 그러나 설명하기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기득권의 이득'만 챙겨주는 방향으로 나아갈 뿐이니, 온국민의 관심사로 떠오른 마당에 '부동산세법'에 대한 간소화 작업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암튼, 세금은 꼭 필요하다. 부자에게 쏠린 혜택이 가난한 이들에게도 골고루 돌아갈 수 있도록 '최소한의 비용'은 언제나 필요한 법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세금을 거둬들이는 '방법'에 대한 국민과의 합의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일방적인 과세정책'은 언제나 '조세저항'을 불러왔다. 그런 까닭에 '세금의 역사'에 대해서 우리가 관심을 기울어야 한다. 잘 나가는 나라에는 조세저항 따위는 없다는 것이 만고의 진리인 까닭이다. 그리고 애써 거둔 세금이라면 꼭 '투명하게' 쓰고 또 써야만 한다. 물론 막상 거둔 세금이 '이쪽'에 써야 하는데 남아서 '저쪽'으로 유용되는 경우도 있고, 갑작스럽게 예상할 수 없는 곳에 급하게 '땡겨서' 써야 할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성심성의껏 밝혀야 한다. 그래야 내가 낸 세금이 '어디에', '어떻게' 쓰였는지 알고 세금에 대한 반감을 덜 수 있고, 꼭 필요한 곳에 소중하게 쓰였다는 보람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행방이 '묘연한' 세금이 엉뚱한 '그들'을 위해서만 쓰여서 '그들만의 천국'이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가 더욱더 세금에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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