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 유인원 - 끝없는 진화를 향한 인간의 욕심, 그 종착지는 소멸이다
니컬러스 머니 지음, 김주희 옮김 / 한빛비즈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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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설하고, 오만한 인간의 최후는 멸종뿐이라는 강렬한 메시지가 담겨 있는 책이다.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후변화' 이야기는 식상할 정도로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명백한 인간의 책임인데도 이를 회피하려는 사람들이 더 많고, 심지어 기후변화에 따른 혹독한 환경변화에 더는 적응하지 못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기 전까지 인류는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할 거라는 질책에도 눈만 깜빡이고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을 사람이 훨씬 더 많을 거라는 지적에 깊은 공감을 하게 된다. 반론마저 예상밖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원시시대로 돌아가자는 거냐?", "쥐라시 시대에는 이보다 훨씬 더 더웠는데도 생물은 번성하고 공룡은 전성기를 맞이하지 않았는냐!"는 반론을 던지며 기후변화의 책임이 인류에게 있다거나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변명만 늘어놓기 일쑤다.

 

  물론, 그렇다. 인간은 과학문명의 이기를 절대로 내려놓지 못할 것이다. 그로 인해 온실가스는 더욱 빠르게 증가할 것이고, 지구환경은 인간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방향으로 빠르게 변화할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과학문명을 더욱더 발전시켜서 지구환경조차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안일한 낙관을 펼치곤 한다. 여태까지의 인류는 '그런 사고방식'으로 지구의 모든 생명 위에 군림하고 '최종포식자의 지위'로 살아왔더랬다. 그리고 언제나 과학이 해결해줄 거라는 '과학만능주의'가 당연한 해결책인냥 마련해왔다. [이 또한 인류는 극복해냈습니다]라는 문구로 거대한 자연재해 앞에 우뚝 선 자랑스런 인류의 이미지를 창출해내고 말이다.

 

  그러나 지구는 그동안 '다섯 번의 대멸종'을 선보이며 지구상의 생물들을 최대 98%까지 절멸(페름기 대멸종)시키는 위엄을 보여왔다. 또한 여러 차례의 빙하기를 겪으며 기존의 생물군이 대다수 멸종하고 새로운 생물군으로 바뀌어 왔다는 지질학적인 근거만 봐도 '기후변화의 끝자락'에서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는 낙관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과연 인류의 과학기술이 대멸종과 빙하기까지 이겨내고 '지구의 주인'으로서 톡톡히 이름값을 할 수 있을까? 끝끝내 인류가 살아남는다고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안락한 현대생활과 편리한 문명의 이기를 누리며 살아남을 수는 없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반성의 기미는커녕 개선의 의지를 요만큼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런 엄청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까? 정녕 인류는 '죽음으로 향하는 열차'에 올라탄 것처럼 숙명처럼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일까? 적어도 점점 빨라지는 지구온난화를 늦추거나 인간이 망친 지구의 자연을 지구 스스로 정화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낮추려는 노력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일까? 이를 테면, 가까운 거리는 자동차를 타지 않고 자전거 타기나 더운 여름철에 에어콘 대신 손부채를 이용하고, 추운 겨울철에 난방보다 내복을 껴입는 방식으로 에너지 소비를 확 줄여서 온실가스 배출을 최소한으로 하고 지구온난화의 속도를 점점 줄이고 기후변화에 보다 현명하게 대처하는 삶으로 바꿔나가는 것 말이다. 우리는 이미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다. 코로나 팬데믹이 전지구를 강타하자 거의 모든 비행기와 배가 일시에 멈추니 일시적이지만 공해가 사라진 푸른 하늘을 다시 볼 수 있었고, 도시봉쇄로 인적이 끊긴 도심에까지 동물들이 찾아와 가장 자연스런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그 잠깐의 '일시멈춤'으로 우리는 색다른 경험을 해본 셈이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지구를 오염시키고 살고 있는지 생생히 경험할 수 있었고 말이다.

 

  이 책은 강력하게 주장한다. 지구의 주인은 절대로 '인간'이 아니라고 말이다. 지구 생물의 '최종진화'가 인간이라는 망상에서 깨어나야 한다고도 말한다. 모든 생명체 가운데 가장 '지능'이 발달한 생물이 인간이라는 사실은 틀림없지만, 그것이 지구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위'를 쥐어준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진리를 제발 말로만 하지 말고 몸소 실천하라고 간절히 말하고 있다. 정말 이해하기 쉬운 진리 아닌가. 그런데도 인류는 고도의 지능으로 지구를 아주 빠른 속도로 파괴하는 재능을 십분 발휘하고 있다. 그 재능이 인간의 멸종을 앞당기고 있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얼마나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할 것인가라는 스릴 넘치는 짜릿한 감동을 선사할 비극을 연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비극'을 이해할 지구생명체는 이미 멸종한 인류 이외에는 단 하나도 없을 것이다. 도대체 그런 비극을 왜 스스로 자초하려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정녕 당신들의 후손에게 지구라는 아름다운 행성을 선보여주기 싫은 것인가? 그 마지막 후손이 지금 당신의 뱃속에 있는 아기일 수도 있는데도 말이다. 정녕 인류의 미래는 깜깜할 뿐이련가.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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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구트 꿈 백화점 - 주문하신 꿈은 매진입니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
이미예 지음 / 팩토리나인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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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많이 팔린 책(베스트셀러)'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 책이었다. 한동안 베스트셀러보다는 스테디셀러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더랬다. 한때 유행하는 일명 '트랜디 북'은 인기에 비해서 격이 떨어지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읽고 싶은 책(스테디셀러)'도 많은데 시간만 축내는 책(?)들은 한켠으로 재쳐두고서 독서를 해왔었다. 그러다 학생들의 입에서 이 책의 제목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아주 재밌는 책이 있는데 '그 책'으로 논술수업을 하고 싶다고 말이다. 그래서 읽게 되었다. 정말 오랜만에 베스트셀러를 손에 잡았다.

 

  이 책을 읽은 첫 인상은 <해리포터>와 <꿈의 대화>를 콜라보한 느낌이었다. 현실세계의 사람들이 무의식의 세계에서 '꿈 백화점'에 방문하고, 그곳에서 자신이 바라는 '꿈을 소비'하면서 자기만의 희망과 욕망, 그리고 때로는 일탈도 하는...그런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형 판타지소설'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가, 문득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자아와 초자아를 다룬 '무의식의 세계'를 담은 독특한 세계관을 담았다는 생각에 다다른 순간, 작가의 스케일의 남다르구나, 작품의 세계관이 엄청나구나...프로이트의 표현을 빗댄다면 '빙산의 일각'만 보여줬을 뿐이구나, 의식의 저편에서 펼쳐지는 '꿈 백화점의 이야기'는 정말 방대하고, 더욱 방대하겠구나..싶은 생각에 닿는 순간, 매 스토리마다 진한 감동과 짜릿한 전율마저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과연 이어지는 후속작에서 그런 감동과 전율이 끊이지 않고 전달될 것인지 자못 기대가 큰 까닭이다.

 

  가장 인상 깊은 내용은 현실세계의 사람들은 '꿈 백화점에 방문한 기억을 잊어버린다'는 설정이다. 그렇다면 꿈 백화점의 직원들은 현실세계의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 주인공 페니를 비롯해서 여러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한국 이름'이 아니라는 점에서 현실세계(대한민국)와는 사뭇 다른 곳이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연상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신'이라고 하기엔 부족한 점이 있고, '무의식의 존재'나 '영혼'이라고 보기에는 뜨악한 점이 한둘이 아닌 탓에 작품의 세계관을 좀더 분석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쯤해서 느닷없이 드라마 <호텔 델루나>와 같은 설정은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사후세계'와의 연결고리나 '중간세계'로 볼 만한 근거 또한 찾을 수 없기에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저 일반 사람들이 잠이 들면 무의식적으로 찾아가는 '꿈의 세계'라고 이해하면 그뿐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작품에 깊이를 더하기 위해선 '세계관'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탓에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는 생각만 남기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보려 한다.

 

  꿈 백화점의 주요 상품은 다름 아니라 '꿈'이다. 즐겁고 재미나고 행복한 꿈도 있고, 무한한 감동을 선사하는 꿈이나 바라고 또 바라던 희망과 욕망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꿈도 판매한다. 때때로 무시무시한 악몽을 꾸기도 하고, 태몽이나 예지몽 같은 신비한 꿈도 있다. 심지어 사람이 아닌 '동물들을 위한 꿈'도 판매한다. 한편, 꿈을 '판매'하는 설정이다보니 꿈을 '상품'처럼 설정하였고, 자연스럽게 꿈을 제작하는 '꿈 제작자'도 등장한다. 그리고 그 전문가마다 저마다 색다른 꿈을 꿀 수 있도록 하였으며, '같은 상품'을 사더라도 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건들은 직접 꿈을 꾸는 사람에 의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점도 당연하지만 신비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꿈을 소비한 대가는 '후불제'라는 점도 신기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설렘'이나 '기쁨', '두려움', '화남' 등등 여러 가지 감정을 정수(에센스)하여, 마치 '향수'처럼 병에 담을 수 있고, 그렇게 꿈의 대가로 받은 감정의 에센스를 은행에 맡기기도 하고 돈으로 교환할 수도 있다는 설정이 신기했다. 딴에는 '감정을 허비했다'는 투로 속상한 마음을 표현하거나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는 표현처럼 기쁨보다 더 큰 희열을 표현하기도 하는데, 여기선 그런 감정을 '화폐'와 교환할 수 있는 '또 다른 무엇'으로 표현한 것에서 세련한 느낌으로 압도 당하고 말았다. 어찌보면 뻔한 설정인데도 결코 뻔하지 않는 익숙함이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단연코 '저마다의 꿈 사연'일 것이다. 아무리 훌륭하고 아름다운 꿈을 제작했더라도 꿈을 꾸는 당사자가 제대로 느끼지 못하면 '좋은 꿈'이 아니라 '나쁜 꿈'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비슷한 경험을 하더라도 누구는 '그 경험'을 통해서 한층 더 성장하는 계기로 삼거나 어려움을 극복하고 한발짝 더 내디딜 수 있는 용기를 북돋기도 하겠지만, 어떤 이의 성공스토리를 직접 경험하는 '소중한 기회'를 눈치채지 못하고 그냥 흘려보내거나 정반대로 실패스토리로 만들어버리는 불운을 경험하기도 한다는 말이다. 책의 내용 하나인 '대박을 내는 꿈'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이에겐 '대박'을 내게하는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꿈이지만, 누군가에겐 그저그런 '일상'을 담은...시간이 지나면 기억도 나지 않는 그저 그런 꿈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이럴 땐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가 떠올랐다. 간절히 바라면 반드시 이루어질 거라는 담담한 이야기말이다.

 

  그동안 꿈을 소재로 한 신나고 재미난 소설과 영화를 보았지만 이 책보다 더한 감동을 얻진 못했다. 이 책을 '판타지'로 분류할 수 있다면 단언컨대 '한국형 판타지'로 거듭날거라 장담한다. 서양의 판타지와도, 동양의 판타지와도 사뭇 다르며, 누가 읽어도 '낯설고도 익숙한 꿈 이야기'에 흠뻑 빠져서 현실의 고민은 툴툴 털어버리고 아름답고 설레는 감동 한 숟갈로 한가득 달콤한 느낌을 만끽할 수 있는 신비하고 재미난 판타지 세계로 당신을 초대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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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래의 신화
최인 지음 / 글여울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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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짤막한 이야기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는 것이 '단편소설'의 매력일 것이다. 등장인물도 많지 않고 플롯도 길지 않아서 이야기 전개가 빨라서 좋고 '메시지(주제) 전달'도 명확해서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어서 좋은 '단편소설'이 많기 때문이다. 여기에 작가 특유의 유머와 위트, 반전과 에로틱한 내용을 첨가한다면 더욱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짧은 서사'로 이 모든 것을 담다 보면 이도저도 아닌 '맹탕'이 되는 경우도 흔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짧은 만큼 '비유적인 표현'을 남발하다보면 웬만한 '문학전문가'가 아니고서는 그다지 흥미를 유발시키지 못하는 난해한 소설이 되고 마는 단점도 극복해야 좋은 소설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 이 책 <돌고래의 신화> 단편소설은 어느 축에 드는걸까? 책의 뒤표지에 적힌 누군가의 평가는 [충격과 반전의 묘미], [빠른 갈등 전개], [녹아 흐르고 있는 에로티시즘]이라고 적혀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최인의 단편소설은 곳곳에 자살과 살인을 암시하는 '죽음의 그림자'가 복선처럼 깔려 있고, 등장인물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군더더기 없는 빠른 전개를 펼쳐냈으며, 죽음을 예감이라도 하듯 마지막 몸부림을 치듯 관능적인 섹스를 나누는 장면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어 충분히 충격적인 에로티시즘을 보여주고 있다. 그 덕분에 책을 '읽는 맛'만큼은 높은 평점을 주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단편소설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인상적이고 강렬한 주제'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흐지부지 끝맺음을 하고 있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물론, 충격적인 결말, 예상 못한 반전 따위를 염두에 둔 결말이라 그런 것이라 짐작은 된다. 허나 중년의 죽음이든 청춘의 죽음이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납득할 만한 이유'가 명확해야 할텐데, 그닥 공감할 만한 내용이 없었다는 점에서 크게 아쉬웠기 때문이다.

 

  무슨무슨 '수상작'이라는 것은 일반독자에게 메리트가 크지 않다. 다시 말해, 심사위원이나 평론가들과는 달리 '일반독자'들은 이야기속에 흠뻑 젖어들게 만드는 '공감'되는 부분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즉, 등장인물과 독자의 고민이 '일치'해야 한다는 말이다. 등장인물의 삶이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고, '보여지는 삶'은 다를지라도 소설속에서 전개되는 '개인적 고민'과 '사회문제', 그리고 '인물들의 갈등'이 닮았다고 느끼는 순간, 일반독자들은 이야기속으로 풍덩 빠져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설속 등장인물이 겪는 고민과 문제에 '깊은 고뇌'가 보이지 않고, 그런 상황에서 펼쳐지는 '에로티시즘'은 그저 흔한 '포르노'를 보는 것처럼 눈을 현혹시킬 순 있지만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감동은 찾을 수 없기 마련이다.

 

  황순원의 <소나기>가 인상 깊은 것은 '소녀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결말과 함께 어린 소년소녀가 보여주는 풋풋한 사랑을 짧은 순간 쏟아붓고 끝나버리는 '소나기'에 비유하며, 아직 여물지 않은 소년소녀에게 찾아온 강렬한 첫사랑이란 감정을 잘 녹여냈기 때문이다. 비록 시골출신이 아닌 독자라도 '첫사랑의 설렘'은 누구에게나 서툴고 강렬하게 찾아오기에 공감하기가 쉽고, 소년소녀의 서툰 몸짓이지만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에로틱한 감정이 물씬 묻어나는 '둘이 함께 건너는 징검다리 씬'과 '쏟아지는 비를 피해 흠뻑 젖은 움막 씬'은 이 소설의 백미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첫사랑은 이룰 수 없다는 속설을 재확인하는 듯한 충격적인 결말, 또한 안타까움이 한껏 살아나는 죽음이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도 그런 설렘과 안타까움을 엿볼 수 있었을까? 아쉽게도 난 그렇지 못했다. 인생은 꼬이고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청춘과 중년의 등장인물들에게서 '희망'을 찾을 수 없었고, 아픔과 고통의 나날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저 허우적거리듯 섹스와 일탈을 일삼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진흙탕 같은 삶을 벗어날 유일한 출구는 '죽음'뿐이라는 듯 전개되는 이야기는...안타까울 뿐이었다. 좀더 희망적인 삶을 노래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솔직히 큰 기대는 하지 않았던 책이었다. 하지만 생각밖으로 이야기는 재미 있었다. 그렇지만 깊은 감동과 진한 여운은 없었다. 마치 80년대 '한국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 당시의 한국영화의 주된 소재가 바로 '방황하는 청춘'과 '위기의 중년'이었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전개와는 하등 상관이 없는 '배드신'과 '노출연기'만이 화제가 되었던...그런 느낌 말이다. 모쪼록 작가의 후속작들은 이보다 '공감력'을 갖추고 요즘 독자와 함께 호흡할 수 있길 바란다.

 

글여울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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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의 철학 - 2019 청소년 교양도서 선정
송수진 지음 / 한빛비즈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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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게 '도서관이 피난처였다'는 이야기에 깊이 공감했다. 나에게도 도서관은 '비슷한' 공간이었던 탓이다. 저자는 그곳에서 '철학'을 만났지만, 난 '직업'을 만났다. 맹목적으로 읽기 시작했던 '책'이 '밥벌이' 도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푸짐한 밥상을 차려주진 못했다. 그래도 난 주말마다 도서관을 찾았고, 평소엔 읽지 않았던 다양한 장르의 책들을 섭렵하며 점점 '논술쌤'으로서의 교양을 갖출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대한민국 최고의 논술쌤으로 자부하고 있고 말이다.

 

  암튼, 저자는 삶의 고민을 넘어 '벽'을 만난 것 같은 답답함을 뻥 뚫어준 철학이야기를 이 책에 담았다. 물론, '저자의 경험'이 밑반찬이다. 그리고 갑이 아닌 을로서 자신이 느낀 우리 사회의 아리아리한 막장을 철학으로 스리스리 넘겨내는 지혜를 풀어내었다. 그리고 삶은 편안해졌단다. 박수가 필요한 순간이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답답함'과 '억울함'을 맞이하는가. 그때마다 당신의 처세술은 무엇인가? 그저 참고 견디는 것뿐인가? 아니면 다 때려치고서 후회하는가? 그러고서는 '원래 삶이 그런거야'라면서 또다시 그 답답함과 억울함 속을 전전하고 있지는 않은가? 때로는 친구들과 술 한잔 나누면서 울적한 마음을 달래곤 한다. 다음날이면 취기와 숙취가 가시질 않아 불편해진 속을 달래려 '반복적인 해장'을 하기도 한다. 이 얼마나 다람쥐 챗바퀴 도는 듯한 인생이란 말인가.

 

  그럴 때 저자처럼 '철학'을 만나보길 권한다. 쫌 쎈 철학자를 만나길 권한다. '반사회적인 철학자'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속에서 괴로워하는 이들에겐 '마르크스'만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름하야 '반자본주의'다. 사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본주의의 폐해'를 지적하며 자본주의가 제대로 굴러가길 누구보다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다. 그래도 자본가들의 반성이 유의미하지 않으니 <공산당 선언> 같은 책을 쓴 것이다.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억압하고 굴종하게 만드는 비인간적인 행태를 일삼는 자본가들에게 경종을 울리고자 말이다.

 

  물론, 오늘날에는 '마르크스'가 무조건 옳지만은 않다. 그의 '실험'은 끝내 현실에서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공산주의 국가들이 망했고, 자본주의로 돌아섰으니 '마르크스 이론'은 틀렸다고 볼 수도 있다. 허나 자본주의도 삐걱거리긴 매한가지다. 그때마다 자본주의를 고치려고 들여다보는 메뉴얼이 있으니, 바로 <자본론>이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 이론'은 유의미하다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 자체가 사라지거나 '대체'될 다른 경제시스템이 요원한 상황에서 '자본주의'는 건실하다. 허나 자본주의 속에서 신음하는 노동자가 여전히 많다는 점에서 '마르크스 이론'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자본론>은 필독서 가운데 하나다.

 

  이 책의 저자도 피난을 간 도서관에서 <자본론>을 읽으며 삶의 위안을 얻었다고 고백한다. 심지어 자신이 고민하고 아파하는 까닭이 <자본론>에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고 말할 정도다. 그래서 단숨에 읽어 내려갔단다. 책하고는 담장을 쌓은 이는 엄두를 내지 못할 독서력이긴 하지만, 지금도 자본주의 속에서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이들이 있다면 '마르크스'를 만나보길 권한다. 정말 속이 시원해질 것이 틀림없다. 왜냐면 마르크스도 철저한 '을'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이 제목이 <을의 철학>인 까닭은 무엇일까? 갑의 철학은 없기 때문일까? 학력으로 보나, 금전으로 보나, 갑들이 철학이 없을 까닭이 없다. 허나 그들의 철학은 '그들만의 잔치'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는 '그들만의 천국'을 만드는데 일조할 뿐이다. 허나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갑'보다 '을'이 많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나 많은 '을'들이 있는데, 딱 하난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철학'이다. 거창한 철학이 아니라도 좋은데, 소위 '개똥철학'이라고 부를 만한 것도 갖지 않은 '을'이 너무도 많기 때문에 안타까울 뿐이다. 그런 수많은 '을'들이 어제도 힘들고, 오늘도 지치고, 내일도 피곤할 거라는 것은 불을 보듯 분명하리라. 그러니 제발 '철학' 좀 하고 살길 바란다.

 

  저자는 철학을 알고 나니, '자기 자신을 좀더 사랑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어쩔 수 없이 직장을 다니는 고통에서 벗어나 백수가 될지언정 '자유로운 영혼'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이란다. 영업사원으로 취직해서 '재고물품을 대리점주에게 떠넘기라는 상사의 지시'와 '울며겨자 먹는 셈으로 재고물품을 떠맡은 대리점주의 자살 소식' 사이에서 고민에 빠졌을 때, 당신이라면 어땠을 것 같은가? '살아남기' 위해서 갑질 아닌 갑질을 하며 수많은 대리점주들을 울릴 참인가? 아니면 대리점주를 죽음으로 내모는 짓은 할 수 없다며 과감히 사표를 던질 것인가? 그도 아니면, 한낱 영업사원에게 '갑질'을 강요하는 '저질 대기업'을 쫄딱 망하게 만들 불매운동에 동참할 것인가?, 이도저도 아니면, 속세를 훌훌 털어버리고 저 세상으로 이항하거나 남은 생을 무한대로 인수분해하는 길로 들어설 것인가? 무엇은 '선택'하든, '을의 철학'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셈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다보면 '경쟁'에 길들여지기 마련이다. 이겨야 살아남는 무한경쟁을 거듭하며 살아남고, 또 살아남는 <오징어게임>에 결국 참여하게 된다. 돈이라는 욕망에 사로잡혀서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그 돈이 꼭 있어야 행복한 것인가? 물론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금전'은 벌어야 할 것이다. 경제적 자립은 '어른의 필수덕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금전은 그닥 필요하지 않다. 그런데도 목숨을 걸고 한 판 승부를 벌이듯 '무한경쟁'에 뛰어들어 자기 삶을 고갈시키곤 한다. 과연 누굴 위해서 말인가? 정말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일까? 원치도 않는 직장생활을 견디며,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서 남을 벼랑 끝으로 떠미는 일도 서슴지 않는 삶을 과연 '바람직한 경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는 '을'끼리 서로 싸우고 있다는 점이다. 절대 '갑'이 끼어들지 않는다. 갑은 그저 '판'을 만들어줄 뿐이다. 자신의 몫은 이미 떼어놓고서 '남은 몫'을 수많은 을들이 서로 더 많이 차지하려고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단 말이다. 이게 '자본주의'다. 왜 '을'끼리 싸워야만 하는 것인가? 왜 '갑'이 더 많이 가져가는 것에 분노하지 않는 '을'이 더 많은 것일까? 아이러니 할 뿐이다. 그렇다고 '갑'과 싸우라는 말은 아니다. 갑도 나름대로 '정당한 몫'을 가져갔다고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을'끼리 사이좋게 노나 먹으면 좋을 일을 굳이 왜 싸우냔 말이다. 만약, '을'이 사이좋게 노나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작게 남겨놓은 것이 문제라면, 그땐 '갑'과 한판 싸워야 마땅할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을'끼리 싸울 까닭이 없다는 점이다. 사이좋게 노나 먹다가 부족한 듯 싶으면 합심해서 '갑'에게 따지면 그뿐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을의 철학'이란 이런 것이다.

 

  물론, 우리의 삶이 이처럼 간단하지도 않고 호락호락하지도 않다. 허나 '철학'과 함께라면 어떤 문제도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최소한 '을'끼리 치고 받으며 싸우는 어리석은 짓부터 멈추는 '철학'이 절실하고 말이다. 다음으로는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철학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미 유치원 때 '착하게 사는 방법'을 모두 마스터 했다. 문제는 '실천'이다. 그런데 왜 착하게만 살 수는 없는 걸까? '철학'이 필요한 순간이다. 적어도 내 생각은 이렇다. 착하게 살면 '호구취급' 당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착각은 하지 말자. 착하게 산다고 순딩순딩하게 살라는 얘기가 아니다. '만렙'으로 살면서도 얼마든지 착하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고, 다른 사람들 위할 줄 알고, 약자를 배려하며, 불의를 보면 참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착하게 살 수 있으니 말이다.

 

  살면서 우리는 수많은 일을 겪는다. 그때마다 '최소한의 원칙'을 지키며 살아간다면 당신은 '슈퍼 을'로 살아갈 준비가 되었다. 갑에게 호구가 되는 '을'이 아니라 갑 앞에서도 당당한 '슈퍼 을' 말이다. 필요한 것은 오직 '철학'뿐이다. 이럴 땐 이랬다가 저럴 땐 저랬다가 하는 '그때그때 다른 철학'이 아니라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한결같은 '철학' 말이다. 그러다가 목이 잘리면 어떻게 해요? 라고 고민하진 말자. 최강의 철학은 '모든 칼'을 다 막아내는 굳센 철학이 아니라 '애초'에 칼이 목으로 들어오지 않게 하는 '슬기로운 철학'이니 말이다. '을의 철학'도 마찬가지다. 내 삶은 무엇보다 소중하니 멋진 철학으로 우아하고 고상하게 한 번 살아보면 좋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철학도 소중하니까 응원할 겁니다. 세상 모든 을들이 철학쟁이가 되는 멋진 상상을 하면서.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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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숙제 - 앞으로 나아갈 대한민국을 위한 경제학자의 제언
한지원 지음 / 한빛비즈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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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말해서 책내용은 그다지 호감이 가지 않았다. 왜냐면 대한민국의 가장 큰 문제는 '대통령제'가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걱정해야 할 문제의 근본은 '교양을 갖춘 시민이 대세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이 잘못 된 길로 빠져도 바라보고만 있고, 국회의원이 깽판을 쳐도 나몰라라 하고, 장관이 헛발질을 해대도 책임을 묻지 않고, 재벌과 엘리트 등이 망나니 같은 짓을 저지르며 사회에 물의를 일으켜도 '있는 놈들'은 스케일이 남다르다는 감탄만 내뱉고 있으니, 이 땅에 제대로 된 '교양시민'이 태부족하다는 명백한 증거다.

 

  한편, '경제학자'가 풀어낸 역사관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경제학자들은 묘한 공통점이 있는데, '도덕'과 '정의'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오직 '자유와 풍요'만을 기준치로 삼는 모양이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가 '친일적폐청산'을 내세운 것을 '반일 민족주의'로 매도하고 있으며, '부동산정책 실패'를 예로 들면서, 경제의 기본도 모르는 정권이 오로지 '포퓰리즘'만 앞세워서 막무가내로 밀어붙인 결과, 대한민국을 폭망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는 공감이 가지 않는 대목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 책의 결론도 그닥 공감 가지 않았다. 같은 저자가 쓴 <자본주의는 왜 멈추는가>는 재미나게 읽었다. 핵심은 많은 사람들은 '자유, 평등, 풍요'의 원칙만 지킬 수 있다면 어떤 경제시스템이라도 상관없이 받아들일 것이다. 21세기 자본주의가 살아남기 위해선 '기본'을 지켜야 한다는 메시지가 큰 울림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에선 뜬금없이 '제왕적 대통령제'를 청산하지 못했기에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은 불운했고, 대한민국은 신음할 수밖에 없었다고 진단하며, 궁극적으로 대한민국은 '제왕적 대통령제'를 마감하고, '의원내각제'로 전환해야 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내각을 책임질 수 있는 능력 있고 신뢰 넘치는 '국회'로 만드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단서를 달긴 했다. 허나 난 여기에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대한민국 국민'이 뽑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교양시민'의 양성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교양시민이란 단순히 돈 많고 사회적 지위가 높으며, 소위 '엘리트 집단'이라고 일컫는 부류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 생활에서 도덕을 실천하고 정의를 지키는데 앞장 서며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것이 '교양시민의 첫째 조건'이다. 그러니 '교양시민'은 누구라도 될 수 있다. 굳이 학력이 높을 필요도 없고, 사회적 지위가 드높을 필요도 없으며, 돈이 많아서 갑질하는 부류는 절대로 '교양시민'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교양시민의 둘째 조건'이 더 까다로울 수 있겠다. 한달 평균 10권 이상의 '독서력'을 갖춰야 하고, 가짜뉴스를 걸러낼 수 있는 '과학적/이성적/객관적 판단력'이 있어야 하며,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면서도 다른 이의 주장도 끝까지 들어주는 '겸허한 경청력'도 반드시 갖춰야만 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 이런 '교양시민'이 넘쳐날 때, 비로소 진정한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이며, 전세계의 시기와 질투를 슬기롭게 넘겨내며 존경과 부러움을 한번에 받는 대한민국이 될 것이 틀림없으며, 수많은 나라들이 대한민국이 가는 길을 따라오려 너나들이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무력이 아닌 국력으로 선진국이 될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동참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찬물을 끼얹는 이들이 있으니,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과 같은 강대국들 틈바구니에 낑긴 대한민국은 어쩔 수 없이 눈치를 봐야 한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의 '국력'이 아직 이들 강대국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니 객관적으로 주위를 살펴야 겨우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한편, 세계적인 골칫거리인 '북한'과 통일을 꿈꾸는 일을 그만 두라고 지적한다. 한마디로 떡 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김칫국 마시지 말라는 말이다. 북한은 애당초 대한민국과 통일할 생각이 없다고 지적한다. 그러니 제발 '햇볕정책' 같이 북한 퍼줄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말한다. 또한, 일본과 과거사논쟁을 벌이지 말라고 지적한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구축해야 대한민국 경제에 '청신호'가 켜진다고 말이다. 더구나 한미일 동맹을 굳건히 해야 북중러와의 대결에서 겨우 맞설 수 있는데, 허구헌날 '과거'에 발목이 붙잡혀서 일본과 거북한 관계를 만드니 대한민국의 미래가 불투명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그리고 제발 '전작권 환수' 같은 뻘짓은 그만두란다. 한미동맹은 대한민국의 목숨줄이라면서 '자주국방' 같은 소리는 하지도 말라고 한다. 대한민국의 경제력으로 '자주국방'은 어림도 없다면서 말이다.

 

  한편으론 맞는 말이다. 이 책에서도 바로 '이런 논리'를 앞세우며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 참아달라고 권유하고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미국의 노예'로 살 것이며, 언제까지 '중국의 종속국'으로 남을 것이며, 언제까지 '일본의 식민지'로 만족할 것이냔 말이다. 경제적인 논리로만 보아도 이미 '일본의 경제력'보다 앞섰고, '미국과는 대등한 경제 파트너'가 되었고, 중국경제는 이미 '한국 베끼기'를 하지 않으면 팔 것이 없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주변국 눈치만 보면서 쭈뼛거릴 거냔 말이다. 이젠 대한민국이 당당해질 때가 되었다. 그래야 통일도 한낱 꿈이 아닌 '현실'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도발에 '발끈'할 것이 아니라 '쯔쯧'할 수 있어야 한다. 북한은 이미 '경제적'으로 대한민국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무엇이 꿀려서 발끈하고 질질 끌려다닐 것이냔 말이다.

 

  이 책이 보다 더 가치 있으려면 '경제학자'가 아닌 '교양시민'으로써 썼어야 한다. 그러나 도덕과 정의에 둔감한 '경제학자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또한 '지적질'보다는 '대안제시'에 중점을 두었더라면 더욱 멋진 책이 되었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은 것은 두고두고 칭찬할 내용이지만, '지적질'로 그친 탓에 윤석열 정부가 배워서 고칠 점이 눈에 띄지 않아서 더욱 아쉬웠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타락한 민주주의'에 절대 빠져들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촛불을 들고 나타날 '교양시민'들이 이 땅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은 서로의 밥그릇 싸움에 여념이 없어서 '패거리 정치'를 일삼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지만, 반드시 '교양시민'으로 거듭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지적질'은 멈추고, 눈부신 미래비젼을 보여줄 때다. 까짓, 대통령 잘못 뽑았어도 '교양시민'을 차고 넘치게 만들 수만 있다면 아무 문제 없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뭣이든 '교양시민'이 가꾸어 나아갈 것들이니 말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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