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는 세계 질서
레이 달리오 지음, 송이루.조용빈 옮김 / 한빛비즈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사에서 말하는 흥망성쇠는 참으로 놀라운 진실을 전달하고 있다. 계속 될 것만 같은 초강대국 로마도 천 년이라는 '빅 사이클'을 그리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전세계를 호령했던 대영제국도 400년 동안 점진적으로 흥하던 기세를 끝내 꺾더니 이제까지 다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근래 새롭게 부각된 두 강대국 미국과 중국은 어떨까?

 

  미국은 독립한 이래 눈부신 발전을 해왔다. 영토가 비약적으로 늘어났으며, 그로 인한 지리적 이점은 미국을 '축복받은 나라'라고 불릴 지경에 이르렀다. 거기다 '개척정신'이 미국에게 늘 성공만을 가져다주었던 탓에 남북전쟁과 대공황 등으로 나라가 휘청거릴 상황에 놓여도 기적과 같은 승승장구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선 그 기세가 꺾이고 좀처럼 회복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그래서 미국의 '빅 사이클'은 영국의 그것과 닮아가고 있다.

 

  반면, 중국은 과거 그 어떤 나라보다 강하고 부유했지만 여러 부침 끝에 1800년대 이후부터는 나락으로 떨어져 열강의 식탁만 배불려주는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1900년대 후반부터 빠르게 성장하는 기세는 역대 그 어느 나라보다도 무섭게 치고 올라오고 있으며 2000년대 접어들어서는 미국과 함께 G2시대를 논할 정도로 강하고 부유한 나라가 되었다. 그렇다면 중국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 미국도 가볍게 재끼며 새로운 강자로 탄탄히 자리매김 할 수 있을까?

 

  레이 달리오의 <변화하는 세계 질서>는 '빅 사이클'이라는 개념을 통해 미래 경제를 예측하는 놀라운 사실을 전하고 있다. 흔히 역사를 말할 때, 현미경과 망원경을 준비하라고 하는데, 현미경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한 도구이며, 망원경은 멀리 내다보고 전체를 조망하는데 필요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빅 사이클'이라는 것은 망원경의 장점을 한껏 살리면서, 동시에 현미경의 장점도 놓치지 않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한 도구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결론은 무엇일까? 우선 '빅 사이클'로 세상이 돌아가는 작동 원리를 분석하였고, 그렇게 분석한 결과, 놀랍게도 미국은 망하고 중국은 새로운 강자로 자리매김하게 될 거라는 것이었다. 얼지 않은 미래에 미중전쟁은 발발하게 되며, 그 전쟁의 승자는 모두가 아는 데로 결론이 나게 될 것이다. 물론 미래에 벌어질 예측일 뿐이다. 전쟁이라고 해서 늘 뜨겁기만 한 것도 아니고 냉혹할 정도로 차갑게, 하지만 치열하게 진행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이는 모두 '과거의 데이타'를 분석한 결과다. 우리는 미래를 한 치 앞도 알 수 없기에 무던히도 예측하려고 하지만, 예상대로 진행된 것보다 상상조차 하지 못한 미래를 맞이하곤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는 끊임없이 미래를 예측하려 한다. 그 방법은 '과거'를 들여다보는 방법이고 말이다. 왜냐면 지금 '현재'는 과거의 시점에서 바라보면 '과거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의 특정한 사실'이 원인이 되어 나타난 결과를 분석하고, 그 과거에 '현재'를 대입해서 '미래를 예측'하는 고전적인 방법을 늘 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빅 사이클'이라는 방식을 도입해서 좀 더 심층적으로 과거를 분석하고 미래를 예측해보았다.

 

  그렇게 레이 달리오가 예측한 미래는 우리가 바라던 미래인 것인가? 만약 바라던 미래가 아니라면 그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할 것이다. 미래는 아직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변화무쌍'한 법이다. 때로는 예측하지 못한 변화에 휘말려 대혼란을 겪기도 하지만, 그런 혼란마저 '과거'에는 '늘 있어왔던 것'이기에 우리는 충분히 대비할 수 있다. 다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중국과 미국에 둘러싸여 이리저리 흔들리는 대한민국이 되고 말 것인가? 정확한 예측과 철저한 대비로 강대국들이 초래한 변화의 물결을 타고 비약적인 도약을 하게 될 것인가. 그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다. 반드시 풀어야만 하는 의무이고 말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의 바른 나쁜 인간 - 도덕은 21세기에도 쓸모 있는가
이든 콜린즈워스 지음, 한진영 옮김 / 한빛비즈 / 2019년 4월
평점 :
절판


  한때, 도덕이 밥 먹여주지 않는다며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 큰 일을 하겠다던 정당이 부도덕한 방법으로 권력을 휘두르다 온갖 부정부패로 망신살을 당한 일이 있었다. 딴에는 맞는 말이었다. 도덕군자로 행세하면서 경제적 부를 쌓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까운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경제적 부를 쌓으면서 '최소한의 도덕'을 지키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상상조차 하기 싫은 비인간적인 사회가 되고 말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인간은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얼마나 도덕적이어야 하는 것일까? 욕심껏 살다보면 부도덕한 짓도 서슴지 않게 될 것이고, 자본주의 사회속에서 도덕적으로만 살다보면 자기 앞가림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사람이 되고 말 것인데 말이다. 과연 적절하고 균형잡힌 선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이 있기는 한 걸까?

 

  이 책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자 '도덕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는 내용을 담은 책이다. 물론, 종교적인 율법은 걷어내고, 오직 '과학적인 방법'으로 증명하고자 할 뿐이다. 우리는 흔히 윤리와 도덕을 '종교'와 연관짓는 오류를 범하곤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종교적인 관점에서 읽으면 안 된다. '인간은 선한 존재인가'라는 물음에 종교적인 답변을 기대했다면, 안타깝게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과학적인 접근 방법'을 사용하여 인간 행동에 대한 깊은 고찰을 할 뿐이다. 그리고 '같은 행동'이라도 동서고금에 따라, 사회문화에 따라, 세대에 따라 도덕적으로 보기도 하고, 부도덕하게 보기도 하는 '관점의 차이'를 서로 비교해볼 뿐이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글쓴이는 그저 나열할 뿐이니 말이다.

 

  가장 흥미로운 내용은 '도덕과 섹스'를 다룬 단원이었다. 흔히 '예술과 외설은 한 겹 차이다'라고 말하곤 하는데, 그만큼 애매하고 모호한 분야가 바로 '섹스'에 관한 내용인 탓이다. 그렇다고 야한 이야기를 상상하면 곤란하다. 그보다는 '판단'해보길 권한다. 인간이 타고난 '성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바람직한 '인간 행동'에 대해서 말이다. 과연 불륜은 나쁜 일인가하고 말이다. 우리는 '사랑의 결실'을 섹스로 표현하곤 한다. 그리고 '종의 번성'을 위해서 이성간의 섹스는 필요불가결한 조건이다. 그런데 누구하고는 되고, 누구하고는 안 되는 '도덕적 기준'을 과연 '누구'를 위해서 정했느냔 말이다. 막장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궤변으로 들리기도 하지만, 불과 십수 년 전까지만 해도 '처첩제'에 대해 관대한 우리였고, 신분이 높은 남자, 권력(힘)을 가진 남자, 경제적 능력이 뛰어난 남자가 여러 여자를 거느리는 것에 대해 눈 감아주던 사회에서 살았음을 알고 있고, '여성인권'이 향상된 지금까지도 '능력자의 성욕구'에 너그러운 여성들이 많음을 인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비해 '여성의 성욕구'에 대한 우리의 시선은 어떤가? 성에 대한 자유분방한 여성들이 늘어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불합리한 기준을 내세우고 남성에게 너그러운 분위기에 반해서 여성에겐 까다로운 기준을 들이밀기 일쑤일 것이다. 더구나 '결혼'이라는 사회적 제도를 들이밀면서 '여성에게만 까다로운 성도덕 기준'을 마련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남성의 경우엔 '결혼 유무'와는 상관없이 자유롭게 성욕구를 분출하고 해소하는 것에 관대하면서, 여성의 경우엔 '결혼 전'엔 무작정 엄격하고, '결혼 후'엔 강력한 출산의무를 지우는 사회분위기도 이해할 수 없는 처사인 셈이다. 더구나 '성매매'나 '성상품'의 대상의 거의 대부분은 남성은 구매자, 여성은 판매자라는 사실도 놀라울 뿐이다. 도덕을 넘어서 법적으로도 막는 일인데도 버젓이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더구나 '섹스비디오'로 인한 성범죄 피해자는 여성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여성들이 이런 기준에 더 엄격하게 적용하며 '주홍글자'를 남긴다는 점이다.

 

  이쯤 되면, 도덕에 대한 판단 기준이 모호하게 될 것이다. 과연 시대와 세대를 넘어선 만고진리의 '도덕기준'은 있기나 한 것일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도덕기준'을 과연 우리가 꼭 따라야만 하는 걸까? 하지만 놀랍게도 우리는 이토록 유연한 도덕기준이기 때문에 잘 지키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단다. 식탁예절이 그렇고, 손님이 예절을 지킬 때 우리는 흐믓해 한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딱히 식탁예절이 정해진 것도 아니고 손님이 지켜야 할 예법이 때와 장소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정성스런 마음을 담아 공손한 행동을 하는 것으로 감동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도덕'이 가장 장점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도덕은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로 확대해서 '판단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비록 문자로 기록되어 있는 법조항 같은 것이 없어도 '선한 마음'으로 행하는 '반듯한 몸가짐'을 보면 우리 가슴은 따뜻해지기 때문이다. 이는 AI(인공지능)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도 통용될 것이다. 인공지능에게 도덕적 판단기준을 가르칠 수는 없겠지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도덕적인지, '어떤' 말을 해서는 안 되는지는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모순된 인간의 말과 행동을 보며 헷갈리겠지만 말이다.

 

  따라서 도덕은 미래사회에서도 꼭 필요하다. 딴에는 겉으로만 도덕적인 체하고 속으로는 제 잇속만 챙기는 못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법조항의 빈틈을 악용해서 '합법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일이 비일비재하겠지만, 그런 그들을 처벌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도 바로 '도덕'이 될 것이다. 비록 도덕, 그 자체는 힘이 없어서 아무런 영향을 미칠 것 같지 않아 보일지라도 우리 마음속에 자리잡은 '도덕기준'은 불매운동과 같은 큰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비양심적인 사람을 단죄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그때그때 다른 '도덕기준'일지라도 모두가 공감하는 '도덕기준'을 세우고 따르는 사회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예의 바른 나쁜 인간>에게 따끔한 벌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때려치우기의 기술 - 행복하고 가벼운 삶을 위해 똑똑하게 손절합니다
사와 마도카 지음, 이효진 옮김 / 한빛비즈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 제목만 보아서는, 지금 당장 하던 일을 때려치우고 '하고 싶은 일'을 찾아나서라는 내용일 것 같다. 웃고만 살아도 짧은 삶인데 울상과 죽상을 하고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 같은 출근길로 하루를 시작하는 삶은 당장에라도 때려치우라고 말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에게 '하고 싶은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먹고 살 걱정'을 더는 일이기 때문에 더럽고 아니꼬운 직장이라하더라도 함부로 그만 둘 수는 없는 일이다. 새 직장을 구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려면 반드시 '먹고 살 걱정'부터 해결하고서 시도해야 할 일이다.

 

  물론,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무작정 일을 저지르고 보니 일이 술술 풀리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적성에 맞는 일을 하니 매 순간이 즐거워지고, 즐겁게 일을 하다보니 일의 능률이 쑥쑥 오르고, 능률이 쑥쑥 오르니 실적도 좋아지고, 좋아진 실적만큼 수익도 빵빵하게 늘어서 살림살이가 넉넉해지고, 살림살이가 넉넉해지니 삶이 한층 여유로워져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되는 드문 경우가 없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복을 절로 찾아오고 뭘해도 운이 따르는 사람은 드문 법이다. 그리고 겉으로는 운이 좋은 사람처럼 보이더라도 '보이지 않는 노력'으로 실력을 갈고 닦은 '준비된 능력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능력자들의 숨겨진 노력은 정녕 토가 나올 지경이라 일반인은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법이고 말이다. 그러니 이런 능력자들을 참고 삼아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과감히 사직서를 내던지는 어리석은 짓은 하덜 말아야 한다.

 

  그런데도 글쓴이가 <때려치우기의 기술>이라는 책을 써낸 것은 버려야 할 것이나 버려도 상관 없는 것들을 버리지 못해서 하고 마는 후회를 할 바에야 '과감히 버리자!'라고 조언한 것이다. 어쩌면 '때려치우기 기술'이란 '정리의 달인'으로 이해를 해도 무방할 정도다. 집안 곳곳을 둘러보면 '버려도 상관없는 것들'이 공간을 차지하고, 정리정돈을 방해하는 물건들이 한가득일 것이다. 심지어 그런 문제를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언젠간 쓸모가 있을 거라는 헛된 희망을 품은 채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물건들도 수두룩할 것이다. 쓰지도 않으면서 차마 버리지도 못하는 그런 물건 말이다.

 

  글쓴이는 이런 현상을 경제학 용어를 빌어서 '매몰비용'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매몰비용이란 지출한 비용 중에서 회수할 수 없는 비용을 일컫는 것으로 지금까지 들인 돈과 노력, 그리고 시간이 아깝다는 핑계를 대며 더 큰 손해를 감수하게 하는 비용을 말한다. 우리는 인생에서도 '매몰비용'이 발생하고 있다면서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다. 특히, 낡은 전자제품을 빗대면서 새로운 제품이 성능도 좋고 더 편리한 기능도 갖췄는데도 여전히 낡은 전자제품을 고집하며 '아직도 쓸만해'라는 고집을 부리고 있는 건 아닌지 되돌아 보라고 따끔하게 일갈한다. 현재 다니고 있는 직장이 여러 모로 맞지 않아 힘겨워하고 있으면서도 새 직장을 구하기 힘들거라는 막연한 두려움과 새 직장도 지금과 별반 차이가 없을 거라는 어설픈 합리화로 자신의 재능을 꽃 피우려는 노력은커녕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더구나 '지금까지 노력한 것이 아깝다'는 생각에 다다르면 한 치 앞으로도 나아갈 수 없는 상황에 빠지고 만다.

 

  이는 단순히 '먹고 살 걱정'이라는 문제를 넘어서 아무러 변화조차 시도하지 않으면서 현재에 대한 불만만 키우고 있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따끔히 질책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가두고서 일생을 마치는 것이 진정 바라는 것이냐고 말이다. 더구나 시대는 늘 변하고 있다. 지금 당장은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세상의 변화에 시기적절하게 적응할 수 있어야 변화된 사회에 살아남을 수 있는 법이다. 이를 테면, 팬데믹이라는 변화된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이들이 겪은 어려움을 예로 들면서 말이다. 어디 그뿐인가. 글쓴이는 '신선 식품'을 예로 들면서, 마트에서 구매하는 방법밖에 모르는 사람은 급변한 재난에 마트가 정상운영을 하지 못하게 되면 그대로 굶는 수밖에 없지만, 신선 식품을 직접 재배하거나 원산지에서 직접 구매하는 방식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마트가 문을 닫는 사태가 벌어져도 아무런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때려치우기 기술'이라는 것은 단순히 잘 다니던 직장을 일시적인 감정의 변화로 멋드러지게 때려치우고 나가는 기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적성과 재능'에 걸맞는 일을 찾아나서는 용기와 '변화된 세상'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적절히 적응하며 살아가는 지혜를 일컫는 셈이다. 그러기 위해선 가장 먼저 '버리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조언하고 있고 말이다. 어쩌면 글쓴이의 조언은 '잃어버린 30년'이라고 불리는 일본경제의 어려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슬기로운 생활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일본은 경제의 고도성장을 이루면서, 한때 '경제대국 2위'라는 위상을 보여줬지만, 버블경제의 거품이 빠지면서 서서히 가라앉는 경제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 형국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수많은 일본인들이 '아직은 아무 문제가 없어'라고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고 있다가 결국은 경제적 어려움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문제에 봉착해서 이도저도 못하고 있는 이들이 속출한 경험과 함께, 일자리는 넘쳐나는데 일하기 싫어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경종을 울릴 목적으로 쓴소리를 아끼지 않은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쓴소리가 일본에게만 필요한 것일까? 우리가 빠르게 경제성장을 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일본경제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참고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는 머지 않아 한국에서도 벌어질 일이라는 것은 상식일테니, 우리도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허나 이 책을 그런 용도로만 읽으면, 하나만 보고 둘은 볼 줄 모르는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왜냐면 한국경제는 이미 일본을 넘어서고 있는 단계에 접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비단 경제규모면에선 아직 일본에 비해 뒤쳐진 것처럼 보이지만 새로운 기술적인 면이나 새로운 사업적인 면에서 봤을 때 일본은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들을 우리는 이미 시도해서 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타산지석의 교훈'으로만 이 책을 읽으면 안 된다.

 

  그보다는 행복한 삶을 꿈꾸고, 그 행복을 실현하는 지혜를 배우려는 목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 더 좋을 것이다. 필요없는 물건만 버릴 것이 아니라 하릴없는 인간관계까지 깔끔하게 손절하는 지혜를 터득하려고 읽으면 더 좋을 것이다. 사실, 물건보다 사람을 버리기가 더 힘들다. 하지만 아무 짝에 쓸모도 없으면서 자리만 차지하는 물건이 있는 것처럼 내 삶에 보탬은커녕 발목만 붙잡는 인간도 있는 법이다. 그런 물건과 인간을 내 삶에서 깔끔하게 치워버리는 지혜, 더 나아가 내 삶에 더는 관여하지 못하게 손절하고 범접할 수 없도록 자존감을 높이는 것이 더 중요한 법이다. 자, 이제 내 인생에서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러 가보자.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벌레가 되어도 출근은 해야 해 - 버티기 장인이 될 수밖에 없는 직장인을 위한 열두 빛깔 위로와 공감
박윤진 지음 / 한빛비즈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자유로운 영혼'이 되었던 적이 있었더랬다. 갑갑한 출근길 대신에 집안에서 늘어지게 늦잠을 자면서 하루의 일과를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가 일과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며 밤늦도록 책읽기와 글쓰기로 하루를 마감했던 시절을 말한다. 그러나 자유로운만큼 돈벌이는 시원치 않았다. 돈을 적게 벌었다는 의미보다는 월수입이 들쭉날쭉했다는 의미에 가까운 돈벌이였다. 결국 많은 이들과 같이 '코로나 여파'를 견디지 못하고 다시 '직장일'을 하러 다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벌레가 되어도 출근은 해야 해>라는 책제목이 고대로 눈에 꽂혀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모든 직장인이 그렇듯이 '때려치는 법'을 몰라서 직장을 꾸역꾸역 다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먹고는 살아야겠기에 싫어도 싫은 체를 하지 않고 좋아도 미친놈 소리 듣기 싫어서 좋은 체하지 않고 그저 그러고 다니고 있는 셈이다. 물론 그런 미친놈들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지치고 힘든데도 '직장'에 출근하려고 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카프카의 <변신>에 주목했다. 어느날 갑자기 벌레가 되어버린 주인공도 처음으로 한 걱정이 '지각하면 안 되는데'였기 때문이다.

 

  책제목을 관통하는 메시지에 흥분하는 현대인이 많을 것이다. 나도나도!! 라고 외치며 깊은 공감을 나타낼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어느날 갑자기 아침에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아플 때, 가장 먼저 전화를 거는 곳이 바로 '직장'이고, 가장 먼저 전화를 거는 사람도 '직장 상사'인 현대인의 애환을 고스란히 담아낸 글귀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책의 내용이 당장 직장을 때려치우자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속시원한 책이라 생각한다면 크나큰 오해다.

 

  책내용은 오히려 직장일이 지옥같이 느껴지더라도 다시 힘내서 잘 다녀보아요~라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유는 다른 것 없다. 아무리 직장일이 힘들더라도 직장을 박차고 나오는 순간 더 큰 어려움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속시원하게 사직서를 상사 면상에 던져버리고 때려치우고 박차고 나오는 순간은 짜릿하고 통쾌할지 몰라도 다음달 월급통장에 '들어오는 돈'은 없고 '찾으신 돈'에만 수두룩 빽빽한 글이 담겨지는 것을 보면 한숨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게 통장잔고가 바닥을 드러내면 갑갑한 출근길보다 더 답답한 생활고를 겪을 수밖에 없다. 나도 한달 평균수입 30만원으로 1년을 버티니 모아두었던 적금통장을 다 깨고 마지막 통장의 잔고가 고갈될 즈음에 한 일이 '알바천국'에 이력서를 남기는 일이었다. 꼴에 논술쌤이라고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정도는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써서 면접관들의 극찬을 받는 일은 식은 죽 먹기로 써대곤 했다. 하지만 합격여부는 또 다른 문제였다. 감동과 현실은 엄연히 다르니까.

 

  암튼, 이 책은 '다니던 직장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잘 때려치우는 스킬을 알려주는 내용이 아니라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는 '긍정 노하우'를 선보여주는 책내용이 담겨 있다. 카프카의 <변신>, 사르트르의 <닫힌 방> 등과 같은 고전명작을 소개하면서, 명작 속의 주인공들도 '직장인의 고민'을 똑같이 하고 있고, '직장인의 애환'을 대신 해주고 있으니, 우리는 그들의 현실을 보면서 '다르지 않다'는 위안을 얻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음에도 슬기롭게 극복하는 지혜를 배우며, 아무리 힘든 직장을 다니더라도 우리들만의 애환을 서로 나누고 공감하면서 부정을 긍정으로 바꾸는 노하우를, '자기만의 방법'으로 터득해보자고 말하고 있다.

 

  딴에는 '말이야 방구야~'라는 느낌도 들지만, 직접 책내용을 읽다보면 깊은 위로와 감동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만 힘든 게 아니었구나'라는 공감력을 키우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더러운 회사 생활속에서 고작 "버티자!!"라고 얘기하는 셈이긴 하지만, 내가 힘든 이유를 '책속의 책'에서 찾아내고, '나만 힘든 게 아니야'라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만으로 사직서를 내기 직전의 위기를 넘길 수 있게 될 것이다. 어쩌면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스킬'이 아닐까? 씁쓸하지만 말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올림포스 연대기 -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 한빛비즈 교양툰 16
김재훈 지음 / 한빛비즈 / 202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그리스로마 신화>만큼 오래도록 읽은 고전은 없다. 잠시 나관중의 <삼국지>가 그 자리를 차지한 적도 있지만, 어린 시절부터 '별자리이야기'로 시작해서 20대엔 점성술사와 천문학도를 꿈꾸기도 했으며, 30대엔 토마스 불핀치와 이윤기를 필두로 헤시오도스와 호메로스, 그리고 오비디우스까지 섭렵하고 또, 탐독한 고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을 헤아리며 별 하나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곤 하는 감수성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그 별들에 담긴 이야기의 원전이 바로 <그리스로마 신화>였던 탓에 읽고 또 읽었던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같은 책'이라도 '세대마다' 느낌이 다른 법이고, '글쓴이에 따라' 내용이 다 다르다. 따라서 <그리스로마 신화>라는 책제목을 달고 나온 책일지라도 누가 썼느냐, 무슨 관점으로 써내려갔느냐에 따라 사뭇 다른 느낌을 받기 마련이다. 이는 '모든 책'에 다 해당되는 사항이지만, 특히, <고전>의 경우에는 더 특별한 법이다. 이를 테면, 같은 <논어>라 하더라도 '보편적인 내용(텍스트)'는 비슷할지라도 '글쓴이의 관점(해석)'는 제각각인 법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수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도덕군자로 살아가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고 공자를 추켜세우고, 어떤이는 오늘날에는 전혀 맞지 않은 '낡은 관점'에 불과한 까닭에 우리 안에 내재된 공자를 죽여야 나라가 산다고 외치는 것이다. 누가 옳고 그르냐는 문제는 오롯이 '독자'에게 달렸다. 오래도록 널리 읽힌 <고전>은 '다양한 해석'에서 그 가치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수많은 해석 가운데 '무엇'이 옳고 그른지 평가하는 재미가 '고전을 읽는 맛'이기도 한 까닭이다.

 

  그럼에도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갖춰야 옳은 해석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는 법이다. 그리고 수많은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심금을 울리는 '보평성'을 갖춘 해석이라야 비로소 제대로 된 '고전의 맛'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로마 신화>는 어떤 해석으로 읽어야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 있을까? 어떤이는 '서양문화'를 이해하는 두 가지 가운데 하나라면서 '필독서의 반열'로 올려놓기도 했다. 또 누군가는 신화의 상징성과 시의 함축성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로마 신화>에 담긴 내용이 너무나 야하고 비도덕적인 내용이 많으므로 읽기에 부적합한 책이라고 단정 짓기도 했다. 특히, 어린아이들이 '필독서'랍시고 이 책을 읽고 무엇을 배우길 바라는 것인지 학부모들은 각성하라며 경각심을 심어주기까지 했다. 딴에는 솔깃하고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점이 없지 않다. 그래서 논술쌤인 나 역시 <그리스로마 신화>를 어린아이들이 읽기에 부적합한 책이라고 생각해서 '만화'로 된 책을 읽지 말라고 권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또 바뀌었다. <그리스로마 신화>만큼 '인간의 본성'을 잘 드러낸 이야기가 없는 탓이다. 신들의 이야기인 신화속에서 '인간의 본성'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옛 그리스인'과 '옛 로마인' 들이 상상하던 신의 모습은 다름 아닌 '인간'의 모습을 꼭 닮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화는 종교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종교에서의 신은 '신의 형상'을 본따서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하는데, 신화에서의 신은 그 반대인 까닭이다. 또한, 다른 신화에서는 근엄하고 엄격하며 진지하다 못해 '절대적인 존재'로 전능을 가진 신을 그리는데 반해서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는 신의 능력조차 어딘가 모자른 점을 드러내는 불완전한 모습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엄근진하기는커녕 우스꽝스럽고 익살스러운 실수투성이 신들을 보여주면서 '인간의 모습'을 고스란히 빼다 박은 것처럼 그려놓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딱 하나 완벽한 것이 있다면 바로 '신의 형상'인 육체다. 그리스로마의 조각상으로 전해지는 신들의 모습은 '인간'이 가장 바라는 육체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빚어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동작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역동성을 담아 빚어냈다. 이런 육체미를 직관하면서 '성욕(에로스)'을 불태우지 않으면 참된 인간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헐벗은 <그리스로마 신화>를 읽는 것 자체를 금할 필요는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런데도 멈칫거리는 점이 있다. 아무리 '성욕'에 충실한 인간일지라도 '불륜'만큼은 절제해야 제대로 된 인간이라고 할 수 있고, '부도덕한 짓'을 일삼고서도 벌을 받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 해로운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탓이다. 특히, 제우스의 행실 말이다. 도대체 제우스를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제우스는 '최고신'이다. 그런데 '최고 바람둥이'이기도 하다. 결혼을 하기(?) 전에 벌인 애정행각까지 탓할 수는 없을지라도 헤라와 결혼을 한 뒤에도 벌인 불륜은 탓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신화라고 할지라도 '같은 아버지'의 핏줄인 여자형제, 아버지의 여자형제, 어머니(하긴 크로노스와 레아도 남매사이다)의 여자형제로도 모자라서 수많은 조카들, 종족(?)이 다른 인간까지 섭렵하였으며, 그 방법 또한 강간, 납치, 협박, 유혹 등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등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부도덕한 짓거리들을 참 잘도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로마 신화>는 여전히 권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스러운 고전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 책에 '나의 고민'에 대한 답변이 담겨 있었다. 바로 '제우스를 위한 변명'이라고 부제를 붙이면 딱 좋을 내용이 말이다. 부연설명은 생략하고 결론부터 풀어보자면, 제우스가 신화속에서 바람둥이 역할을 떠맡을 수밖에 없는 까닭은 바로, 그가 '최고신'이 되었기 때문이란다. 최고신에 등극한 바람에 '이 지역', '저 지역'에서 너나할 것 없이 '최고신'과 연줄을 닿게 하기 위해 "우리 지역을 다스리는 왕은 제우스의 후손이다"라고 제 입맛에 딱 맞는 신화를 만들어서 훗날 <그리스로마 신화>로 뭉뚱그려 엮은 탓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비록 '인간의 잣대'로 보았을 때는 부도덕적일 뿐만 아니라 '비도덕'적일지라도 '최고신'과 연줄을 맺을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망설이지 않았고, '신화'라는 이름으로 이를 품었다는 해석에 수긍할 수 있었다. 허나 그럼에도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건, 나뿐 아닐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에 '바람직하지 못한 짓(부도덕)'과 '도덕이 아닌 것(비도덕)'을 허용하거나 일부 수용하는 일이 있어선 안 될 것이다. 특히, 자본주의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도덕'은 필수이지 선택이 될 수는 없다. 자본주의는 무한이윤을 추구하는 자유경쟁이 원동력인 까닭에 조금이라도 '도덕적 기준'을 허물어버리면 인간이 살 수 없는 세상을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지금도 '합법'이라는 탈을 뒤집어 쓰고서 몰염치한 짓을 일삼는 못된 사람들이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다. 반면에 법 없이도 살 정도로 착한 사람들은 '최소한의 도덕'조차 작동되지 않는 사회을 탓하며 신음하고 있고 말이다. 그러한 까닭에 도덕을 하찮게 여기는 사상은 절대로 이땅에 발도 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여기 '새로운 해석'이 담긴 <올림포스 연대기>는 그 자체로 재밌고 유쾌하며 뼈 때리는 해학과 풍자까지 담겨 있는 훌륭한 책이다. 하지만 새로운 해석이 '변명'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변명'이 이 책에만 담겨 있는 것도 아니다. 수많은 글쓴이들이 이미 <그리스로마 신화>를 그런 식으로 해석해놓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무리 좋은 약이라 할지라도 오남용 되었을 때 무시무시한 독이 되는 것'처럼 <그리스로마 신화>를 읽는 독자들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어떤이는 이런 말도 했더랬다. "웃자고 하는 일에 죽자고 덤빈다"고 말이다. 내가 참 많이 듣는 말이긴 한데, 나는 교육자(논술쌤)의 한 사람으로서 '만의 하나'라도 지적할 점이 있다면, '반드시' 지적하고 '널리'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을 읽으며 배꼽 빠지게 웃었던 탓에 조금더 심각하게 정색을 해보았다ㅋㅋㅋ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