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한중일 세계사 9 - 블러디 선샤인 신미양요 본격 한중일 세계사 9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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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0년대를 돌이켜보면, 많은 일들이 벌어졌고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지나간 역사를 돌이켜본다는 것은 참 묘한 기분이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본은 신정부에 의해 '근대화(명치유신)'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중국은 어찌어찌 '북양함대'를 추진하며 군제를 서양식으로 개편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한국..아니, 조선은 대원군의 영향 아래 놓여 있는 관계로 '개항'이 아닌 '쇄국'으로 방향을 틀게 된다. 이로써 동북아시아 삼국은 서로를 향해 잠시 숨을 돌릴 틈을 각자 갖게 되지만, 속내는 그러하지 못했다.


  같은 시기, 서양에서는 '보불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에 의해 '북독일연방(프로이센)'이라는 새로운 강자가 등장하려는 형국이었고, 이를 막기 위해 '오스트리아 제국'이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가면서 독일민족 통일이라는 명분에 더욱 불을 붙이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바이에른'을 비롯한 '남독일 4개국'이었지만, 오스트리아가 패배함으로써 힘의 균형이 프로이센에게 기울어진 상황에서 '흡수통일' 되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혀가고 있었다. 이를 가로막고 '통일 독일'을 막아선 나라가 프랑스였다. 왜냐면 '남독일 지역'은 역사적으로 프랑스와 매우 긴밀한 관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랑스는 빌헬름 1세(독일 황제)가 스페인의 왕위 계승을 막아선 전례가 있었기에 '프로이센' 처지에서는 '간섭'으로 볼 수밖에 없어서 결코 곱게 볼 수 없는 나라였다. 그런 프랑스가 '남독일 4개국'과의 통일전선을 막아서니 비스마르크는 전쟁을 선택한다. 시작은 치열한 '언론전'이었지만, 언론끼리의 자존심 싸움은 두 국가의 국민들의 감정을 서로 상하게 하였고, 끝내 '보불전쟁(프로이센-프랑스전쟁, 또는 프프전쟁)'이 벌어졌다. 전쟁의 시작은 프랑스가 우세를 점하며 시작하였으나, 보급물자는 프로이센이 훨씬 더 빠르게 조달할 수 있었고, 화력의 우세함이나 전술운영의 우월함에서 프랑스는 프로이센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결국, 전쟁의 승리는 '프로이센'에게 돌아갔고, 파리의 개선문에서 승전을 기념하는 행진을 하고 돌아가는 등 프랑스로서는 패배의 치욕을 씻을 수 없게 되었다.


  한편, 조선에서는 독일 상인 오페르트(유대인)에 의해 '남연군묘 도굴사건'이 벌어지게 되고, 이에 대노한 흥선대원군은 '통상거부(쇄국)정책'을 더욱 굳게 밀어붙이게 된다. 여기에 미국의 함대가 '제너럴셔먼호'의 행방을 찾는다는 명분으로 강화도로 쳐들어오게 되는데, 바로 '신미양요'다. 프랑스에 이어 두 번째로 조선을 공격한 미함대는 전투에서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지만 애초에 목적으로 삼은 힘에 의한 '수호통상조약'은 맺지 못하고 되돌아가고 마는데, 어찌 되었든 조선에 또 한 번의 승리를 안겨주게 되었다. 승리의 비결은 미국이 '남북전쟁'으로 인해 태평양 건너의 전쟁에 충분한 힘을 보탤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고, 대원군시대의 외교가 '근시안적'이었고, '변화를 거부'하는 기득권 세력의 안이한 태도로 인한 것이었으니, 치열한 격전 끝에 승리를 거뒀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조선에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흘러가진 못했다.


  하지만 눈여겨 볼 대목은 있다. 조선 후기 '북학파의 후손들'이 개항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나름의 방법대로 서양과 (조만간 일본과도) 손을 잡고 '조선의 개화(근대화)'를 시도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북학파의 계승자'들이 어찌어찌 '매국노'가 되어버린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는 점을 다시금 살펴볼 일이다. 이들은 시대를 앞선 지식인들이기도 했으나 '권력'과는 인연이 없던 관계로 늘 '아웃사이더'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국가정책으로 제대로 시행하지도 못하고 어설프게 '외세'만 끌어들이는 결과만 내놓았으니, 중앙정부는 정부대로, 지식인들은 지식인들대로 '따로따로' 조선의 안위와 안녕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백성은 고달파지기만 했고 말이다. 과연, 조선의 백성을 구할 위인은 없었단 말인가?


  다시, 일본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명치시절에 '이와쿠라 사절단'이 활약을 펼쳤더랬다. 이들은 서구열강을 두루두루 둘러보고 '선진제도와 문물'을 일본의 신정부에 어떻게 접목시킬 것인지 중차대한 임무를 떠안고 세계유람을 떠났더랬다. 그 결과, 새로운 일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했다. 얼추 정리해보면, 미국에서는 '행정제도'를, 영국에서 '정치제도'를, 프랑스에서 '사법제도'를, 그리고 독일에서는 '군사제도'를 받아들여, 신일본의 멋진 시작을 뽐내려 했으나, 그보다는 일본내부에서 벌어지는 각종 소요로 인해 시작부터 삐그덕대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이 '서양식 제도'를 도입해 근대화 국가로 변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일본의 민중은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봉건시대의 사상'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서둘러 '폐번치현'과 '사민평등'을 시작했지만, 갑자기 하루 아침에 시골촌놈이 서울깍쟁이로 바뀔 수 없는 것처럼 일본은 혼란스럽기 그지 없는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하루도 편할 날이 없도록 훽훽 돌변하는 '동북아 3국'의 바쁜 일상은 다음 권에 계속된다. 커밍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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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한중일 세계사 8 - 막부의 멸망과 무진전쟁 본격 한중일 세계사 8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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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장황한 서론을 끝내고 '일본의 부흥'을 알리는 명치유신(明治維新, 메이지이신)이 시작된다. 하지만 일본의 부흥은 '막부의 종말'을 뜻하기도 하기에,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는 '유신'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시작하게 되었다. 동시에 일본은 다시 '일왕제'로 되돌아가야 했기에 '또 다른 아이러니'를 낳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신지사'들이 막부의 권력을 찬탈해서 '정당한 권력'으로 되돌려놓은 곳이 하필이면 전근대적인 중앙집권제 방식인 '왕정복고'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본의 왕은 전통적으로 '신의 아들'을 표방하였기 때문에, 일왕이 다스리는 일본은 '인간신(현신, 또는 천손)이 다스리는 신의 나라'였던 것이다. 일본의 부흥을 알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근대화'가 왕정복고에, 신의 나라라니...고대의 건국신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어쨌든, 일본인들은 명치유신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나 소설을 꽤나 좋아한다. 일본의 국운이 하늘을 찌르고 뭐든 했다하면 통하는 기세가 아드레날린을 뿜어내는 것처럼 활활 타오르곤 했기 때문이다. 비록, 1945년에 패망하긴 했지만, 60년부터 90년대까지 빠르게 경제성장을 이루며 미국 다음으로 '경제대국'으로 거듭나기까지 일본은 최고의 20세기를 누렸기 때문이다. 허나 그때 쓴 운빨이 다한 것인지, 1991년부터 버블이 사그라들면서 시작한 '잃어버린 30년'째를 맞은 현재에는 영락없이 비에 홀딱 젖은 생쥐 꼴을 면치 못하고 있기에 더욱더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연, 일본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아 새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찾을 것인가? 모쪼록 그 발판이 '우리'는 아니길 바랄 뿐이다. 대한민국의 위정자들이 그정도로 어리석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뿐인데...

 

  다시, 명치유신으로 되돌아 간다. '조슈정벌'이 한창이던 때, 쇼군의 느닷없는 죽음으로 정벌은 흐지부지 끝나고 막부는 다시금 움츠러들어 버렸다. 때를 같이 해, 일왕도 승하하게 되니, 왕위를 승계 받은 이가 바로 '명치 일왕', 다시 말해, '메이지 일왕'이다. 막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유신지사'들은 모든 권력을 일왕에게 되돌리는 '대정봉환' 계책을 막부에게 들이미니, 당장 손을 쓸 수 없는 막부는 전쟁을 피한다는 명분으로 이를 받아들여 '왕정복고'를 성사시킨다. 이로써 일본은 '신정부'가 들어서게 되고, '명치유신'은 서서히 발효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명치유신'이라는 것이 하루 아침에 성사된 것은 아니다. 친막부세력과 반막부세력의 힘겨루기는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반막부세력에 의해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다음에는 오랜 갈등이 한순간에 쏟아지며 '신정부군'과 '반정부군'으로 나뉘어 '무진전쟁의 시작'을 알렸으며, 서양의 신무기로 무장한 '신정부군'이 막부 사무라이로 구성된 '반정부군'을 토벌하고 승리를 연이어 거두었고, 전쟁 양상은 서남 방면의 신정부군과 동북 방면의 친막부 동맹군의 대결로 이어졌으나 신정부군의 최신무기와 서양식으로 훈련된 군대를 이끌고 손쉽게 전쟁을 끝맺으니, 이른바 '막부의 종말'을 고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명치유신'은 막부가 종말된 이후에 빠르게 진행되었지만, 막부가 종식을 고하기 전부터 서서히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명치유신'은 일본에게 무엇을 달라지게 만들었을까? 겉모습만 달라진 걸까? 속마음까지 싹 개조한 것일까? 겉으로 보여지기엔 일본의 겉과 속이 모두 싹 바뀐 듯이 보인다. 서구의 근대화에 발맞춰 일본의 사회와 문화까지 빠르게 변하고, 정신까지 '개조'하여 동양적 사고관이 아닌 서양의 근대적 사고방식으로 완전히 탈바꿈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허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바뀐 것은 '일본의 겉모습'뿐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일본의 야만성은 전통 사무라이 복장을 하던, 서양의 신식군복을 입던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전성은 더욱 심화되었다. 전통적인 동양의 예법을 따르던 시절엔 '도리'와 '예법'을 그나마 따르던 것이 서양의 '이기주의'를 맛본 뒤엔 '무법천지'로 바꾸고, 국가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몰염치한 짓거리도 서슴지 않는 얌생이로 완전히 돌아섰기 때문이다.

 

  일본은 철저히 깔아뭉개야 말을 듣는 족속들이다. 애매한 '판정승'으로 일본을 고분고분하게 만들 순 없다. 비오는 날 먼지 나도록 두들겨 패야 겨우 패배를 인정하고, 비굴할 정도로 굽신거리며 다시는 고개를 빳빳히 쳐들지 않는 '굴종의 심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본을 향해 '겸양'을 떨거나 '겸손한 예법'으로 염치와 도리를 가르치려 들면 주인의 등에 칼을 꼿는 배은망덕한 일을 자랑스럽게 저지르고 말 종자들인 까닭에 버릇을 고치려 들땐, 가차없고 단호하게 매를 들고, 당근을 줄 땐 '절대복종의 서약'을 맺은 뒤에 줘야 한다. 우리가 하늘과 땅 차이가 날 정도로 '강대국'이 되어야 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이웃나라에 이런 족속이 살고 있는 건 참으로 피곤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일본의 야만성이 '명치유신'이라는 국뽕을 만나 어떻게 변했는지는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 허나 그러기까지 세세하고 조목조목 알아둘 필요는 있다. 역사공부의 진정한 힘은 '디테일'에 있기 때문이다. 방대한 분량의 역사공부를 위해서 처음엔 두루뭉술하지만 '맥락의 흐름'을 파악할 정도로 가볍게 시작하더라도, '맥락 파악'이 끝나면 중요한 사건별로 '인과관계'를 세세히 따져가면서 '미세한 흐름'까지 이해해야 진면목이 파악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본격 한중일 세계사> 시리즈는 제격이다. 비록 '만화형식'이라 그 세세함이 띄엄띄엄 나타날지라도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역사적 상식'보다는 더욱 세분화하고 섬세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국사', '중국사', '일본사', 그리고 '세계사'를 따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따르는 편년체 방식의 서술과 더불어 '사건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기사본말체 방식으로 전세계사적인 스펙트럼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보이기에 '역사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세계사'라고 소개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대중역사책 가운데 이 책처럼, 청왕조의 멸망을 일찌감치 부르고 신해혁명의 프로토타입이었던 '태평천국 운동'을 자세히 펼쳐보이고, '막부의 종말부터 명치유신까지' 일본의 변천을 펼쳐보이며, 조선후기 세도정치 이후의 양상을 '세계사적인 관점'으로 풀어낸 책이 있으면 말씀해주시길 바란다. 단언컨대, 거의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왜냐면 그만큼 동북아시아 삼국의 근현대사가 엄청나게 방대하고, 하루가 멀다하고 새롭고 중대한 사건이 뻥뻥 터지는 통에 이를 '종합적'으로 다룰 수 있는 역사책은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도 이 시리즈는 과감히 손을 댔고, 그것도 '만화형식'으로 쉽게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의 역사서술 관점이 '균형잡혀 있느냐'하는 것을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고, 그저 '완간'이 되기까지 응원하는 수밖에 없다. 왜냐면 어떻게 해서든 다뤄져야 이 책에서 영감을 받아 '또 다른 역사책'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두손 두발을 들며 이 시리즈에 극찬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삼천포에 잠시 갔다왔는데, 암튼, '명치유신'을 통과한 일본은 새롭게 '신일본'으로 거듭났다. 아니, 이제부터는 '일본'이 아니라 '일본제국'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서구열강에 의해 강제로 문을 열게 되었지만, 그 열강으로부터 신문물을 발빠르게 도입해 서구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실력을 쌓은 일본은 '일본제국'으로 거듭나면서 거침없이 세계로 뻗어나가게 된다. 여기까지는 '같은 문화권'을 갖고 있는 동질적인 관점에서 박수를 쳐주고 싶다. 허나 '일본제국'은 첫 수부터 악수를 놓았다. 그것이 초반에는 일본에게 엄청난 행운을 가져다준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대국 전체로 보았을 때, '패착'과 다를 바가 없는 셈이다. '패착'이란 바둑에서 그 돌을 놓음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게 된 나쁜 수를 말한다. 일본이 아시아국가 가운데 가장 빠르게 근대화에 성공한 것까지는 '아시아의 자랑'이 될 수 있었겠지만, 그 자랑이 끝내 서구열강 뺨칠 정도로 악랄한 침략과 약탈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패착의 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한 '대한민국'의 막판 대역전이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초반에 펼쳐놓은 대마는 '잃어버린 30년'과 함께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형국인 탓이다. 안타깝게도 그 역전극이 이 시리즈에 담기지는 않겠지만, 우리의 못난 모습을 거울로 삼기에 딱 좋은 소재이니 두 눈을 부릅뜨고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당장은 답답하고 미칠 노릇이라도 말이다. 그리고 일본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 빠르게 치고 오르는 모습도 눈여겨 볼 일이다. 능력이 실력으로 확인된 다음에 그 힘을 어떻게 써야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는지 말이다. 적어도 일본이 간 길은 옳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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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 한빛비즈 문학툰
SunNeKo Lee 그림, 김성은 옮김, 샬럿 브론테 원작, Crystal S. Chan / 한빛비즈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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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툰'이 출간되었다. 그동안 '교양툰'으로 인문학적 교양을 쌓아올렸다면, '문학툰'으로 우리의 감성과 인성을 충만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에 출간된 '문학툰'은 모두 4권으로, <제인 에어>, <레 미제라블>, <빨강머리 앤>, 그리고 <주홍글자>다. 그 가운데 첫 번째 책으로 <제인 에어>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만화형식'의 책이지만, '원작'의 내용을 고스란히 담아 놓은 훌륭한 '각색'인 덕분에, '원작의 맛'을 잃어버리지 않고 '만화의 재미'까지 담아놓은 수작이다. 만약, 원작에 담긴 내용이 난해해서 이해하지 못한 내용이 있었다면 '문학툰'을 적극 권한다. 주제를 알고 읽으면 더욱 감동적인 '문학툰의 세계'로 기꺼이 인도할 것이고, 기존의 해석과는 살짝 다른 '나만의 리뷰'를 읽어주신다면 더 없는 영광일 것이다. 자, 그럼 시작이다.

 

  19세기 빅토리아시대에 대영제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며 강력한 힘을 자랑하는 강대국이자, 세계를 압도하는 선진국이었지만, 여성의 참정권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활동조차 '남자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로 만들고서, '그들만의 천국'을 위해 '그녀들의 희생'만을 강요하는 '여성 인권'의 암울한 시기였다. 하지만 이런 깜깜한 세상에 등불이 되어주는 인물이 꼭 있기 마련이고, 그 인물은 다름 아닌 '작가, 샬럿 브론테'였다. 그가 쓴 <제인 에어>에서는 '당당한 여성'을 등장시켜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뜻대로 살아갈 권리'가 있음을 천명하였던 것이다. 여성도 자신의 꿈을 위해 당당히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그 당연한(!) 권리를 위해 주위의 따가운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여성의 모습을 부각시킨 소설을 등장시킨 것이다. 이 책이 2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주목받아 마땅한 까닭도 바로 이 때문이다.

 

  부모가 모두 돌아가시고 고아가 된 열 살 소녀, 제인 에어는 외삼촌의 보살핌을 받으며 지냈지만, 자기 자식보다 더 애정을 쏟아준 외삼촌도 돌아가시고 나니 제인 에어를 곱게 보지 않던 외숙모와 외사촌들은 틈만 나면 제인 에어를 괴롭히며 못살게 군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당당히 외치며 자신을 향한 부당함에 함부로 고개 숙이지 않았지만, 그럴수록 집안에서 외톨이가 되어 '하인'보다 못한 처우를 감내하며 하루하루를 버틸 뿐이었다. 그렇게 벼랑 끝으로 내몰린 제인 에어에게 한줄기 희망이 찾아오니, '로우드'라는 자선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

 

  꿈에도 그리던 기숙사 생활이었지만, 이곳에서의 생활도 그닥 나은 상황은 아니었다. 열악한 환경에 제대로 씻지도 먹지도 못해 병들어 죽어가는 학우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제인은 열심히 학업을 이어나갔고 뜻밖에 '남을 가르치는 재능'을 발견해서, 8년 동안의 로우드 학교를 마치고 난 다음에 '가정교사'라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누구에게 청탁하지 않고 스스로 광고를 낸 다음에 손필드로 교사일을 하기 위해 로우드를 떠난다.

 

  그곳에서 제인은 '로체스터'라는 운명의 상대를 만난다. 그리고 그를 향한 아름다운 사랑을 키워간 제인은 로체스터의 진실어린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을 승낙했지만, 결혼식장에서 벌어진 헤프닝으로 결혼은 무산이 되고 만다. 로체스터에게 '진짜 부인'이 있었던 것이다. 로체스터에게도 나름의 사정은 있었다. 사랑의 결실로 맺어진 결혼이 아니라 단지 '재산 증식'을 위한 정략결혼이었으며, 그것도 로체스터가 원해서 한 결혼이 아니라 수많은 재산을 탐낸 아버지 계략에 빠져 원치 않은 결혼을 강요 당했으며, 심지어 결혼한 신부는 '정신병자'였던 것이다. 그렇게 일순간에 원치 않는 삶을 살게 된 로체스터는 자신의 인생이 파멸되는 것을 알았지만, 뜻밖에도 아버지의 이른 죽음으로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아 부자가 되었다. 원치 않던 결혼과 생각지도 않았던 부를 한꺼번에 받게 된 로체스터는 큰 마음의 상처를 부여잡고 방탕한 삶을 살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제인 에어를 만나고 난 뒤에 로체스터는 '진실한 사랑'을 깨닫게 되고, '자신의 삶'에 언제나 당당한 제인 에어를 보며 지난날에 대한 잘못을 깨닫고 다시 태어나는 마음으로 제인 에어에게 청혼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제인 에어는 로체스터의 '진실한 마음'을 확인하고 난 뒤에도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비록 미치광이가 되어 버렸지만 로체스터의 '정식 부인'이 아직 살아있는 한, 자신은 로체스터의 정부(첩)에 불과하다는 현실에 맞닥뜨렸기 때문이다. 더구나 둘의 사랑이 아무리 진실하고 순결하다 해도 세간에서는 '가난한 18살 어린 신부'가 '늙고 돈 많은 40살 귀족'을 꼬드겨 결혼을 한 그렇고 그런 여성과 다를 바가 없다는 수근거림을 받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는 '자신의 순수한 사랑'에 흠결이 없다는 자신감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자신의 진심이라는 것도 고작 '안락하고 쾌적한 환경'에 안주하며 타락할 수밖에 없다는 절망감 앞에서 도망갈 수밖에 없는 '양심적 고백'이었을 것이다.

 

  제인은 그렇게 손필드의 저택에서 도망치듯 나와서 무작정 떠나고 말았다. 수중에 있는 돈만큼 마차를 타고 로체스터에게서 멀어졌는데, 그와중에 마차에 하나밖에 없는 가방마저 놓고 내렸기에 돈 한 푼 없이 굶게 되었고 머물 장소를 찾는 것도 마뜩찮게 되었다. 그렇게 죽기 일보직전에 용기를 내어 화목해보이는 집의 문을 두드렸지만, 그 집의 하녀가 거렁뱅이와 다를 바 없는 제인을 문전박대하니, 제인은 그대로 쓰러져 죽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죽을 운명은 아니었는지, 세인트 존 리버스라는 젊은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하게 된다. 그렇게 리버스댁에서 머물며 기력을 회복한 제인은 우연한 계기로 리버스가 자신의 친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제인이 막대한 유산의 상속녀라는 소식도 알게 되어, 한 순간에 가족이 생기고, 부자가 되었다. 하지만 제인에게 다가온 행운 앞에서도 제인은 행복할 수 없었다. 제인의 마음속에 아직 '로체스터를 향한 사랑'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리버스가 인도로 선교활동을 떠나는데, 제인에게 함께 떠나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제인은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고 소중한 오빠의 부탁이니 당연히 들어줄 수 있다며 흔쾌히 허락하지만, 리버스는 동생이 아닌 아내로서 부탁하는 거라면서 갑작스런 청혼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 둘의 결혼은 '신이 부여한 소명'이며, 그런 소명을 받은 자신에게 어울리는 신부는 너밖에 없다며 막무가내로 결혼 승락을 요구한다. 제인은 친절한 리버스가 이토록 모질게 몰아부치고 조금의 배려도 없이 자신의 고집대로만 밀어부치는 것인지 의아해하면서도, 이것은 '진실한 사랑'이 아니라며 결혼을 정중히 거절하게 된다. 하지만 거듭되는 요구와 '신의 섭리'라면서 물고 늘어지는 청혼에 제인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결혼을 승낙하게 된다. 물론, "신의 뜻이 그러하다면"이라는 조건을 달지만 말이다.

 

  그때, 그 순간, 제인을 부르는 로체스터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제인의 귀에만 들리는 환청이었을테지만, 그 길로 제인은 자신의 진솔한 마음이 아직도 로체스터에게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손필드로 떠난다. 하지만 그곳에서 불에 타다만 흉물스런 저택만을 발견할 수 있었고, 로체스터는 모든 것을 잃고, 장님에 한쪽 손까지 잃어버리는 불구자가 되어 의미없는 연명만을 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제인 에어는 그런 로체스터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 사랑을 속삭인다. 그리고 앞을 보지 못하는 로체스터에게 제인이 돌아왔노라고 말하고, 다시는 떠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한다. 자신의 진정한 사랑과 결혼을 하겠다는 맹세인 것이다.

 

  <제인 에어>가 주는 메시지는 명백하다. '여성 스스로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남자의 도움이 없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가 아니라는 명백한 선언이란 말이다. 남자의 도움으로 '아름답게 가꿔진 꽃'에 불과하니 '남자의 명령'에 절대복종하고, '남자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쯤은 매우 당연한 일이라는 일반적인 상식을 깨는 통쾌한 메시지였다. 더구나 남자라는 족속이 얼마나 뻔뻔하고 고집스럽고 어리석은 짓만 골라 하는지 똑똑히 보라면서 '로체스터'와 '리버스'를 전면에 등장해보였다. 로체스터는 제인을 돈으로 꼬시려 했고, 리버스는 '신의 섭리'라면서 가스라이팅을 가했다. 물론, 제인이 로체스터를 선택하든, 리버스를 선택하든 어느 정도는 행복한 삶을 꾸려나갔을 것이 틀림없다. 제인 에어만큼 당차고 멋진 여성이 살림살이를 맡았으니 오히려 로체스터와 리버스가 '행운아'가 되어 행복에 겨운 삶을 살았을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행복한 삶에는 '제인 에어의 희생'이 절대적으로 동반되어야만 할 것이다. 한 남자의 아내로서 '자신의 삶'을 기꺼이 포기하고, '남편의 삶'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일방적이고 보편적인 강요로써 말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여성에게 굴레를 뒤집어 씌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여성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얼마든지 살 수 있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고 당당히 의견을 밝히고,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면서 말이다. 무릇, 인간이라면 당연히 할 수 있는 권리이고, 당연히 해내야 하는 책무 아니냔 말이다. 그런데 그런 '당연함'이 여성에게만은 전혀 당연하지 않고, 남성에게 매달리고 의존해야 겨우 해결할 수 있는 덕목이라고 '세뇌'를 하느냔 말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해서는 더욱 안 되는 일이고 말이다.

 

  여성, 스스로도 당연히 내야 할 목소리다. 요즘에도 '백의의 천사'니, '사무실의 꽃'이니 하면서 여성의 '사회생활'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는 몰상식이 벌어지곤 한다. 그럼, 여성에게 '본질적인 직업'은 무엇이냔 말이다. 한 남자의 아내이자 자식들의 어머니로서만 '여성의 본질'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이젠 여성들도 '경제적인 독립'이 가능한 시대를 살고 있다. 또한, '자녀육아와 교육'도 엄마만의 몫이 아니라 아빠의 역할이 강조되는 시대다. 바야흐로 '양성평등시대'이며, '인권존중의 시대'인 것이다.

 

  심지어, 어린이와 청소년의 인권도 보장하는 마당에 여성인권이 바닥을 치는 대한민국을 상상할 수 없다. 어째서 여성을 위한 정책이 '남성을 향한 역차별'이 될 수 있느냔 말이다. 공정한 경쟁을 통해서 실력순으로 뽑는다는 대원칙이 통용되기 위해서 '기울어진 운동장'부터 개선하는 것은 당연한 순서다. 그런데 아직도 여전한 '불평등과 불공정'이 개선되지도 않았는데, '실력순'이라는 대원칙을 앞세워 사회적 갈등만 조장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도무지 서로를 위한 '배려심'을 찾아볼 수 없는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남성이 여성을 배려하고, 또한, 여성이 남성을 배려하는 훈훈함은 찾아볼 수 없단 말인가?

 

  제인 에어가 '여성의 목소리'를 낸 지 200여 년이 지나도록 '양성평등'에 이르는 길은 아직도 요원한 모양이다. 아직도 '그들만의 천국'이 그립고, 그립고, 또 그리운 모양이다. 모든 면에서 멋있고 우월한 '그들'이 천국을 그리워하는 것도 볼썽사나울 마당에 '찌질한 놈들'이 천국을 운운하는 것은 같은 남성이 봐도 못봐주겠다. 제발 좀 사람답게 살면 안 되겠는가. 우리 모두가 행복한 대한민국을 꿈꾸는 '소중한 시기'이자 '절호의 기회'인데 말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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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편의점 (벚꽃 에디션) 불편한 편의점 1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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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끼린 그러는 거 아니란다. 서로 눈만 마주쳐도 설레고 가슴이 두근두근거리는 상황에서 '가족'을 연상시켜선 안 된다는 '묻지 않는 규칙'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설령 부부사이일지라도 끈적끈적하면서 달달해지면 안 된다니...그럼, '가족'이란 어떤 관계이고,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걸까?

 

  여기 <불편한 편의점>에는 '불편한 가족'이 등장한다. 겉보기에는 그저 '노숙자'를 채용한 맘씨 좋은 편의점 사장님이 떡상을 하고, '의외의 인물'이 등장해서 어렵고 힘든 상황을 용케 헤쳐나가는 가슴 따뜻한 이야기만 있을 것 같지만, 책의 내용을 한꺼풀 벗겨내고 속살을 들춰내면 가족인데 '불화'로 인해 애간장을 태우고 속을 끓이고 마음에 상처받고 눈물마저 메마른 말 못할 사정을 간직하고서 '불행의 늪'을 허우적거리는 우리네 이웃들을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이 책은 따뜻하다. 곰처럼 우직한 주인공이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불쑥 나타나 어렵게 꼬여버린 문제를 속시원히 해결할 수 있는 '솔루션(해법)'을 툭툭 던져주기 때문이다.

 

  편의점 알바를 하는 시현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 준비중이다. 5급도 아니고, 7급도 아닌, 그저 평범한(?) 9급을 말이다. 설령 합격한다고해도 주민센터에서 허드렛일이나 할 것이고, 시덥잖은 자잘한 업무지만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서 '투철한 봉사정신'을 발휘해야만 하는 하는 대표적인 '3D 업종'인 것이 9급공무원인 것이다. 그런데도 석박사에 해외유학까지 마치고 돌아온 '고급인재'들이 국가고시에 뛰어들어 경쟁률만 미친듯이 올려놓고 있는 것이 '노량진의 현실'이고, '대한민국의 비극'이다. 왜 이런 고급인력들이 한낱 쪼잔한 업무나 하는 '쪼랩 공무원시험'에 몰려드는 것일까?

 

  먹고 사는 문제가 그만큼 심각해졌기 때문이다. 무릇 사람이란 '안정적인 돈벌이'를 하나쯤 챙기고 난 뒤에야 '인생'을 챙길 수 있다. 그런데 국내경기 뿐만 아니라 세계경기가 침체되고 '일할 사람'은 넘쳐나고 '일자리'는 태부족인 상황이 지속되니,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 나라 경제성장의 원동력이자, 급속한 발전의 배경이 되었던 '헝그리 정신'도 고학력, 고스펙의 시대가 도래하자 더는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한때, '아프니까 청춘이다', '열정페이' 따위가 헝그리 정신을 대체하기도 했지만, 왜 유독 '청년'에게만 아픔을 감당하라고 '강요'를 하느냔 말이다. 청춘은 불타오를 때 가장 아름다운 법인데, 가뜩이나 경기가 사그라들어 불태울 곳이 없는 청년들에게 '아픔'만을 강요하는 듯한 분위기는 정말이지 노땡큐란 말이다.

 

  그런데 시현씨에게 '9급공무원'은 천직에 가깝다. 성적이 그리 우수한 것도 아니고 뛰어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남들이 귀찮아하는 일'도 누구보다 친절하고 성실하게 해내는 천성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석박사 취준생들에게 치어서 번번이 공무원시험에 낙방을 하고 있다. 그래서 '편의점 알바'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편의점 업무가 쉬운 것은 아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도 아니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번거롭고 까다로운, 그리고 때로는 더러운(!) 일도 도맡아서 처리해야 하는 고충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음식물 쓰레기 처리'와 '진상 손님 처지'가 그렇다. 간신히 '포스기기 사용법'을 익히고, 매장관리에 익숙해질 즈음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JS(진상) 손님'을 고객으로 맞이해야 하는 난관에 봉착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친절하게 응대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실수하고 꼬투리를 잡히면 쌍욕이 날라오고 갑질을 쳐바르기 때문이다. 하루에 8시간 이상 꼬박 한 달을 일해야 겨우 150~200만 원의 월급을 손에 쥘 수 있는 박봉인데, 초딩부터 노인까지 다채로운 'JS 손님'들이 찾아와서 속을 긁어놓기 일쑤인 것이 '편의점 알바'다. 대한민국 헌법 어디를 뒤져봐도 '친절하고 착한 편의점 알바'를 개무시해도 된다는 문구가 없는데도 '진상들'은 꼭 매너도 없이 갑질을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훈계에, 으름장을 늘어놓기 일쑤다.

 

  그래서 '편의점 알바생'은 얼굴도 내놓고 다닐 수 없는 초라한 인생을 살아야 한다. 모르는 사이도 아닌 친구에게도, 심지어 가족에게조차 '취업했다'고 당당히 어깨를 펼 수 없는 부끄러운 직업이 되고 말았다. 그런 알바생인 시현씨에게 '노숙자 출신' 야간 알바에게 업무를 가르치라는 사장의 분부가 내려왔다. 냄새도 고약하고, 말도 느리고, 말투도 어눌하다 못해 더듬거리기까지 하는 노숙자를 채용하는 것부터 의심스러운데, '가르치기'까지 하라니...사장이 살짝 돈 것도 같지만, 그래도 지시는 지시니까 부닥쳐 보기는 했다. 그런데 웬걸, 의외로 잘 배운다. 물론 빠른 속도로 배우는 건 아니지만, 차근차근 '꼭 해야 할 일'을 꼼꼼하게 해내며, 진상손님을 처리(?)하는 요령까지 신박하게 보여주며 듬직한 일꾼의 모습을 갖춰나갔다. 그래서 보기보다 일을 잘한다고 칭찬을 해줬는데, 그가 말하길, 시현씨가 친절하게 잘 가르쳐주어서 배우기 쉬웠단다. 시현씨가 가르쳐주면 복잡하고 어려운 것도 쉽게 배울 수가 있다면서 말이다.

 

  그 말을 들은 시현은 곰곰히 생각해본다. 나에게 '이런 재능이 있었나?'하고 말이다. 그리고 그가 자신에게 가르치듯 '너튜브'에 편의점 업무(포스기 사용법) 동영상 찍어 올려보라고 권했다. 자기처럼 느리게 배우는 사람에게 '시현씨의 가르침'은 딱 안성마춤이라면서 말이다. 듣고 보니 그럴 듯 했다. 속는 셈치고, 서툴지만, 동영상을 찍어 올려 보았다. 의외로 '조회수'가 가파르게 올라갔고, 고맙다는 댓글도 달리면서 나름 재미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통의 전화가 울렸다. 그리고 '편의점 점장'으로 스카웃을 하겠다는 제의가 들어왔다. 편의점을 새로 오픈하는데, 시현씨처럼 친절하고 꼼꼼하게 가르치는 사람이 '점장'이 되어, '관리'를 해주면 좋겠다면서 말이다. 알바에서 점장으로 승진한 셈이다. 아니, 이제는 당당히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는 '찬란한 인생'이 열린 것이다.

 

  이렇게 어느 날 찾아온 '노숙자'로 인해 달라지는 인생들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 특히, '가족끼리' 원만한 관계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을 툭하니 일러주기도 하고, 인생 자체가 '꼬여버린' 사람에겐 술 대신 옥수수수염차를 내밀며 '맑은 정신'으로 인생을 극복해보라고 응원해주기도 한다. 마치 '용한 점쟁이'라도 되는 양, 복잡하고 뒤틀린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진찰'한 다음에, '신의 손'으로 아픈 곳을 어루만져주는 용한 의사라도 되는 양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알콜성 치매로 기억을 잃어버린 주인공의 정체는 바로 '성형외과의사'였다. 그리고 자신의 실수로 환자의 생명과 가족의 사랑을 외면해버린 크나큰 실수를 저질러버리고 자기 자신을 폐인으로 만들어진 불우한 과거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선량하고 착한 '편의점 알바'로 성실하게 일하고 있지만, 사실은 지독한 이기주의자에 '가족'보다 돈을 더 중요시했던 '나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차츰차츰 기억에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이야기는 계속 된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있을까?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고서야 '완벽'을 운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착하고 친절하며 자기보다 남을 위해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도와주고 힘이 되어 주는 고마운 사람들도 참 많다. 그러면 그런 착한 사람들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 맞다. 그런 사람조차 '완벽'할 수는 없다. 왜냐면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실수를 통해서 자기 잘못을 반성하고 다시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다시 말해,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곤 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름지기 사람은 염치가 있어야 한다.

 

  염치란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을 가져야 사람이 깨끗해진다. 세상이 아무리 더럽다고 해도 더러워진 손발과 얼굴을 '깨끗이' 씻을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도 깨끗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잘못을 했다고 심하게 나무랄 것이 없다. 정작 나무랠 '본질'은 부끄러움도 모르는 마음이니까 말이다. 잘못은 누구나 저지르고 뉘우치고 반성하면 바로 잡을 수 있지만, 부끄러움도 모르는 '몰염치'는 인간으로서의 최소한도 갖추지 못한 말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족 사이에 '염치 없는 인간'들이 종종 있다. 가족을 남보다 못하게 대하는 족속들이기도 하다. 남들 눈에는 친절하고 성실해서 '법 없이도 살 사람'처럼 착해보이는데, 정작 가족에게는 '인간말종'처럼 구는 썩을넘들이 있단 말이다. 그런 넘들은 차라리 '가족'을 남 보듯이 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부모의 유산을 '쌈짓돈'으로 여기고, '아내의 내조'를 당연한 희생으로 여기고, '자식의 미래'를 부모의 못다한 꿈으로 보상받으려는 철부지 들이 참으로 많다. 가족으로서 '자기 역할'도 못하는 못난이들이 "가족인데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라면서 푸념만 늘어놓곤 한다. 정작 자신조차 '다른 가족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으면서, 자기 자신의 속상함만 내세우며 가족 전체를 괴롭하는 얼뜨기들이 넘쳐나고 있다.

 

  가족끼리 그러면 안 된다. 가족이니 더욱더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자기 자신의 허물까지 보여주는 사이가 '가족' 아니냔 말이다. 그 허물을 보듬어주고 아프지 않게 달래주며 행여 남들에게 들키지 않을까 함께 감추고 묻어주는 사이가 가족이다. 그러니 가족끼린 '서로 부끄러운 사이'인 셈이다. 그렇다면 서로 서로 도와주고 힘이 나게 해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 '대화'가 필요하다. 자신의 부끄러운 속마음을 털어놓고 서로의 해결방법이 되어주며, 더러운 곳이 있다면 깨끗이 씻을 수 있게 도와주는 사이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가족이 될 수 있고,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때론, 불편해야 할 경우가 있다. 흔히 '아날로그 감성'이라고 부르는 '불편한 그 시절'을 추억하는 것처럼, 불편해야 서로의 마음이 통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오곤 한다. 가족끼리 투닥거리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너무 편한 사이일 때는 몰랐던 서로의 속마음과 속사정을 허물 없이 털어놓는 순간이 찾아오려면 '불편한' 무엇이 필요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리고 불편한 것 중에 가장 불편한 것은 '가족'밖에 없다. 하지만 그 가족을 통해서 얻는 에너지야말로 이 힘겨운 세상을 버티고 이겨내는 힘인 것이다. 믿기 힘들다고? 아직도 의심스럽다고? 누구에게 업혀본 적이 있는가? 세상 가장 불편한 자세인데도, 엄마아빠 등에 업힌 아기는 세상 모르고 침을 질질 흘리며 편안한 잠에 빠져든다. 궁디 팡팡을 맞으면서도 골아 떨어지는 편안한 잠을 어부바 상태에서 맞이한다. 왜일까? 자신의 모든 것을 상대에게 맡겨 놓은 '가장 불편한 자세', 업힌 사람도, 업은 사람도 모두가 힘든 그 자세를 '가족끼리'는 해준다. 그게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족끼린 그러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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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한중일 세계사 7 - 흥선대원군과 병인양요 본격 한중일 세계사 7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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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격적인 '한국사'가 펼쳐진다. 5권까지 중국과 일본의 '근대의 여명'을 살펴보았고, 6권에서 총정리를 한 다음에, 드디어 '한국사의 근대'를 살펴보게 되었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근대사가 아름답지만은 않은 까닭에 우리 역사를 돌아보는 것이 마음 편하지만은 않다. 그래도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중국, 일본을 넘어 전세계적인 안목을 넓혀보아야 21세기 대한민국의 미래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한시도 '역사적 고찰'을 멈춰서는 안 된다. 누군가 그랬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 번은 '우연'으로, 다음에는 '필연'으로 말이다. 우리 역사에서 단점을 보았다면, 그 단점이 다시 되풀이되지 않도록 만반의 대비를 해야 할 것이다.

 

  각설하고, 우여곡절 끝에 고종이 등극하고, '대원군'이 권력을 잡았다. 조선왕조 사상 '대원군(임금자리에 오르지 못한 현 임금의 아버지)'이 살아 있는 권력의 실체로 등장한 것은 처음이며, 역사적으로도 매우 드문 일이다. 앞서 '세도정치 시대'가 매우 엉망이었던 관계로 새로운 실세인 '대원군의 등장'으로 개혁의 물꼬가 찬란하게 펼쳐질 것인지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먼저, '토지개혁'이다. 삼정문란의 하나였던 '전정'을 대대적으로 손을 본 것인데, 전국토지조사를 실시하여 토지대장을 재작성하고, 은닉을 찾아내고 면세지를 대폭 축소하는 등 비효율적이던 제도를 깔끔하게 손 보았다. 다음은 '환곡 개편'이다. 환곡 업무를 관주도에서 '민간주도'로 바꾸는 사창제도를 실시하여 백성들이 직접 운영하게 하여 부담도 확 줄이는 효과를 보았다. 그리고 '군정 개혁'도 실시하여 양반들도 세금을 매기는 '호포제'를 실시하였다. 양반들의 반발로 인해 실제 효과는 미미했지만, 백성들의 불만을 잠재우는 효과는 만빵이었다. 여기에 '서원철폐'를 통해 세도가문 뿐만 아니라 지방유지들의 정치적, 경제적 향촌 기반을 위축시켜 '왕실과 왕권의 강화'를 꾀하면서, 동시에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는 효과까지 노렸다.

 

  하지만 이런 '대원군의 개혁'이 빛 좋은 개살구로 그친 까닭은 '경복궁 중건' 강행, '당백전 발행'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심화, 천주교 탄압으로 인한 서양세력의 침략 유발 등등 삽질도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모든 것들이 '나라안'에서만 일어나는 '근시안적인 조치'에 그쳐 나라밖에서 벌어지는 일과는 세계로 넓혀 볼 것도 없이 이웃나라인인 중국과 일본과도 사뭇 다르게 진행되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동시대인 19세기에 청 왕조와 일본 막부는 서양의 침탈에 내리막길을 탔으며 서양과 '불평등조약'을 맺으면서 호된 신고식을 치뤘고, 그로 인해, 청 왕조는 '양무운동'을, 일본에서는 신정부가 등장해 '명치유신'을 일으키며 확실히 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결과론적인 비판'일 수 있다. 대원군 시절에 조선이 세계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고 뒤쳐진 까닭은 이웃인 중국과 일본에 비해 '서양의 관심'이 덜 집중되었던 탓이 크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웃나라에 비해 '시간적 여유'가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때론 '충격요법'이 가장 확실한 효과를 낳기도 하는 법이다. 조선은 임진, 병자, 양란 이후에 또다시 200여 년의 평화시기를 거치면서 다시 병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오랜 병을 훌훌 털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대원군의 개혁'이었는데, 결과적으로 그렇지 못하여서 매우 안타까울 뿐이다.

 

  안타까운 시간은 흘러흘러 '제너널셔먼호 사건'과 '병인양요'가 벌어진다. 조선에겐 아직 서양이 '낯선 조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사건은 묘한 공통점이 있다. 두 사건 모두 조선이 '서양의 힘'을 직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나, 조선은 그 소중한 기회를 그저 날려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두 사건 모두 '조선의 승리(?)'를 가져다주었지만 이는 온전히 '조선의 힘'이 서양을 압도한 결과가 아니라 서양이 미처 조선을 제대로 탐색하지 못하고 섣불리 다가섰다가 낭패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비슷한 경험'을 한 중국과 일본도 제대로 본 바다. 비록 조선이 얼떨결에 승리하고, 서양의 힘이 의외로 깊숙이 발휘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조만간 조선이 자신들처럼 '호된 신고식'을 당할 것이라 예감했기 때문이다. 그 예감을 모르고 있었던 것은 오직 '조선'뿐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조선의 지배층'이었다.

 

  실세에서 조금 벗어난 '식자층'에서는 서양의 힘이 중국과 일본을 어떻게 요리(!)했는지 여러 소식통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서양의 문물을 직간접적으로 맛보면서 '개항의 필요성'과 '상업의 발달'이 중요하다는 것도 일찌감치 알아채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정치권력'을 갖고 있는 세력들은 이를 애써 무시하면서 '당장 맛볼 수 있는 떡밥'에 안주하고, '어항속의 풍요'처럼 자신들만의 안락함에 빠져 아무런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있었다. 중국과 일본의 권력층이 그리 폭망하는 것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면서도 말이다. 그래서 '대원군의 개혁'이 거기서 멈춘 것이 안타깝기 그지 없는 것이다. 조금만 더 내다보고 미래를 대비하는 안목이 없었음이 미치도록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단순히 '과거의 영광'에 취하기 위해서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역사는 '과거의 사실'을 연구하는 학문이지만 진실은 '미래를 예측하는 안목'을 기르기 위해 매진해야 하는 학문인 것이다. 우리는 한 치 앞의 미래도 예측할 수 없지만, '과거'를 연구하는 것으로 '미래'를 점쳐볼 수는 있다. 왜냐면 '현재'는 과거의 시점에서 바라본 '미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를 연구해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다보면, 어느 정도 '미래'를 정확히 예측가능한 범주안에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역사는 반복한다'는 대전제를 통해서 알아낼 수 있는 비교적 정확한 예측이다.

 

  물론, 역사에 '정답'은 없다. 이렇게 보면 '이것'이 정답 같고, 저렇게 보면 '저것'이 정답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한 사람이 '이것이 정답이다'라고 예측한 것은 신뢰할 수 없지만, 수천, 수만 명의 연구자가 '이것이 정답이다'라고 '저것이 정답 같다'라고 예측한 결과보다 높은 결과치를 내놓았다면, 정답이 없는 역사에도 '신뢰성'을 갖출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이 역사에 관심을 갖고 서로의 '정답'을 비교분석할 수 있는 깜냥을 갖춰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 '역사전문가'가 되어야만 할 것이고 말이다. 이제 역사교양이 더욱 널리 보급되어야 하는 첫 번째 까닭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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