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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배우는 동물의 역사 - 인류 문명을 이끈 놀랍고 신비로운 동물 이야기 ㅣ 한빛비즈 교양툰 18
카린루 마티뇽 지음, 올리비에 마르탱 그림, 이정은 옮김, 장이권 감수 / 한빛비즈 / 2022년 8월
평점 :
인간도 동물이라는 것에 의아해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동물도 인간처럼 '복지를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에 찬성할 수 있는가? 또는 동물과 인간이 서로 '평등한 관계'를 이룰 수 있다고 보는가? 이런 질문이 낯설기만 한 분들이 아직은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애완견'이라는 표현 대신에 '반려견'이라고 표현하는 분들이 더 많은 실정이다. 개에 불과한데도 사람 팔자보다 더 늘어지게 사는 요즘에는 '동물'인데도 불구하고 '가족'과 같이 여기고, 심지어 가족보다 더 한 존재로 느끼고 있다. 그럼 다시 묻겠다. 당신이 '개'를 사랑하는 만큼 소나 돼지, 닭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육식'을 포기할 수 있겠는가?
요즘엔 '비건(채식주의자)'이 참 많아졌다고 한다. 그런 분들 가운데 상당수가 '동물의 권리'가 인간과 동등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래서 '동물을 살육해서 얻은 모든 것'을 온당한 일이 아니라고 여기고 '육식'을 비롯해서, 밀렵이나 밀집사육 등의 '동물학대'를 통해서 얻은 물건이나, 더 나아가 '동물실험'을 거쳐 만들어진 물건들까지도 쓰지 않겠다고 당당히 선언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물론 이들의 '선택'은 존중 받아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비건'이 아니라는 이유로 비난 받는 것에 '동의'하는 분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비건이 존중받는 만큼 '육식'을 사랑하고 즐기는 이들도 '자기 선택'을 존중받아 마땅하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 '선택'의 문제뿐일까?
인류가 '육식'을 즐겨온 역사를 보면 참으로 길다. 초기 인류는 동물보다 별다른 능력이 없었기에 '포식자'들에게 사냥 당하는 '피식자'였다. 고고학자들에 의해 '검치호랑이의 이빨 자국'이 선명한 두개골이 종종 발견된 것이, 그 증거다. 하지만 인류가 불을 발견하고 도구를 사용하면서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유발 하라리도 지적했지만, 인류(호모 사피엔스)는 개별적으론 별다른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뭉치면 '최상위 포식자'조차 학살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류는 모여 살기 시작했고, 정착을 하며 농사를 짓고 살아갔다. 그리고 '가축화'를 진행시켰다. 소, 돼지, 양, 말, 닭 등이 대표적이다.
이렇게 인간이 동물과 가깝게 지내면서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초창기에는 인간보다 뛰어난 '동물의 능력'을 숭배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자신들의 조상으로 삼기도 했고, 뛰어난 능력을 흠모해서 '신'으로 섬기는 종교로 발전시키는가 하면, 그 뛰어난 능력을 '모방'하면서 새로운 기술발전의 거울로 삼기도 했다. 물론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었고 말이다. 그와 함께 '인수공통 감염병'이 발생하기도 했다. 원래는 서로를 감염시키지 않았는데, 가깝게 지내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발생한 질병이었다. 이는 '가축화 과정'을 통해 생길 수밖에 없었지만, 초기에는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전체 동물 가운데 인간과 접촉하는 동물이 1%도 안 되었기 때문이다. 야생의 생태계는 건재했고, 동물의 다양성은 생태계가 건강하다는 징표이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17세기 이후부터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서구에서 시작된 '과학혁명'은 동물의 생태만이 아닌 '생리학적 모든 것'을 탐구하여 지식을 쌓는 일에 맹목적이 되었다. 다시 말해, 동물을 산 채로 해부하면서 '인간'과 닮은점을 찾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 다른점..아니 '틀린점'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래서 '동물-기계론'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한마디로 동물은 인간과 달리 '기계'와 다를 바가 없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동물은 인간과 달리 '감정'도 없고, '이성'도 없으니, '고통'을 느낄 수도 없다. 그러하니 인간이 동물을 어떻게 하든 아무런 상관도 없고,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왜냐면 인간은 동물보다 우월하기 때문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동물을 함부로 해도 상관 없다는 얘기다. 마치 자신의 종교와 다른 '이교도'를 대하듯 인간은 동물을 맘대로 할 수 있는 권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졌다는 <성서>의 사례까지 들면서 정당화시키고 말았다. 그에 대한 결과는 끔찍할 뿐이었다. 동물의 멸종이 시작된 것이다. 먼 옛날 사피엔스가 매머드를 대량학살해서 멸종시켰듯이 말이다. 동물처럼 '하등한 존재'는 그래도 상관없다면서 말이다.
단지, 먹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멸종시킨 것만은 아니다. 차마 인간을 상대로 실험할 수 없는 끔찍한 실험을 날마다 시행했다. 뱀의 피부를 한꺼풀 벗겨내 '새로운 제품의 독성'을 실험한다. 인간의 피부에 닿아도 무해한지 알아보기 위해서다. 토끼의 눈꺼풀을 붙들어매고 '신상품'을 한 방울 넣는다. 이때 토끼가 발버둥을 치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동물학대'가 아니라 '임상실험'일 뿐이며, 인간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행해지는 일이기 때문이란다. 이런 '동물실험'을 거쳐서 안전하게(!) 만들어진 생필품들이 날마다 쏟아진다. 인간에게는 안전하다는 이유로 말이다.
물건 뿐만 아니다. 양계장 같은 곳에선 또 다른 동물학대가 펼쳐진다. 먼저 양계장에는 '암탉'만 존재한다. 현대식 부화기에서 갓 태어난 병아리들은 '감별사'들에 의해 수컷과 암컷으로 나뉘게 된다. 더욱 발전 방식으로는 달걀 상태에서 빛을 쪼여서 미리 선별하기도 한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양계장'으로 보내지는 것은 암평아리 뿐이다. 수평아리는 태어난 뒤에나 태어나기 전이나 '폐기처분'을 면할 수 없다. 깨어지거나 갈려나가거나 말이다. 암평아리들은 사료를 먹고 무럭무럭 자란다. 좁디좁은 '배터리(밀집사육장)' 안에서 말이다. 층층이 쌓인 그곳에서 자란 암탉들은 잠잘 시간도 없이 24시간 사료를 먹고 알만 낳는 일을 한다. 양계장 주인은 '노동자'들의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면 사정없이 행한다. 암탉이 '해 뜨는 아침'에 달걀을 낳는다면, 한밤중이라도 '강렬한 전등'을 밝혀서 아침이 온 것처럼 만들면 된다. 그렇게 하면 하루에 몇 번이라도 달걀을 얻을 수 있다. 고된 노동을 견디지 못한 암탉이 죽으면, 새로운 암탉으로 '대체'하면 그뿐이다. 양계장 주인은 '신선한 달걀'만 얻을 수 있다면 수천 마리가 죽은들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수익성'이니 말이다.
이처럼 인간이 동물을 멸시하게 된 주된 까닭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본주의'였다. 돈이 된다면 '동물학대'는 인간이 먹고 살기 위해 당연한 일이어야만 했고, '동물학살'이 벌어진다고 한들 수지타산만 맞다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동물은 인간보다 못한 처우를 받으며 '인간을 위해 개량'되어야만 했고, 인간에게 불필요하다고 '낙인'이 찍힌 동물은 폐기처분을 감수해야만 했다. 대표적인 예를 들라면, 미국이 철도를 깔 무렵 '아메리카 들소(버팔로)'는 기차를 타면서 사냥을 당하는 오락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는 미국 기병대에 의해 널리 행해졌고, '버팔로 사냥'은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을 내쫓고 땅을 빼앗기 위해서 '인디언 학살'로 자행되곤 했다.
이런 모든 만행은 '문명화'라는 미명으로 행해졌다. 서구 열강들이 식민개척을 하면서 지껄였던 말이기도 했다. 미개한 것에서 탈피시켜주기 위해 '위대한 백인'이 기꺼이 나서주니 고맙게 여기라고 말이다. 그나마 식민지인들은 '문명화 작업(?)'을 거치면 인간대접이라도 받았지만, 동물은 그럴 가능성조차 박탈 당하고 말았다. 그 결과, 인류가 '가축화'를 시행했을 당시에 '가축화 된 동물'이 1%에 불과하던 수치가 21세기 오늘날에는 66%가 '가축화된 동물'이고 33%는 '인간'이며, 나머지 1%가 '야생동물'이라는 놀라운 변화를 보여주고 있단다. 이는 지구상의 동물 생태계가 망가져버렸다는 증거다. 더구나 현재 77억 인구는 2100년 즈음에는 100억이 돌파할 것으로 전망한다. 생태계가 망가져버린 인간이 지구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제2의 지구'를 찾아 우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고, '인공지능 로봇'을 개발해 인간의 신체와 뇌를 '기계화'할 수 있도록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고 있는 것이며, 그렇게 발전한 과학기술로 '멸종한 동물'을 복원하거나 '동물로봇'으로 대체해서 생태계를 유지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하곤 한다. 정말 그 '호언장담'이 안전하고 건강한 생태계를 복원시킬 수 있을지 '허언'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이제 인류에게 남은 미래는 '두 가지' 뿐이란다. 하나는 '동물 생태계'가 이대로 무너져서 '인간조차' 살 수 없는 미래를 만드는 것이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인간과 동물이 평등한 관계'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생태계를 보전하고 사이좋게,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미래를 만드는 것이란다.
이제는 팬데믹을 넘어 '위드 코로나 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야생에 살아 마땅한 동물들을 '서식지 파괴'를 일삼으며 인간이 사는 곳과 경계를 나누지 못했기에 벌어진 현실이다. 다시는 옛날처럼 마스크를 벗고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기후변화는 인간이 벌인 끔찍한 재앙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인간이 막아야만 한다. 애꿎은 동물들은 그런 변화를 '맨몸'으로 적응하는 수밖에 없다. 이런 현실에서도 인간은 '육식'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현대식 '대형양식장'이 제공하는 '무한 육식의 제공'은 더 많은 동물의 학살을 부르고, 더 많은 야생동물의 서식지를 파괴하며, 그로 인한 기후변화를 겪어야 하며, 지구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 '문명화'된 인간의 터전마저 빼앗을 것이며, 끝내 '인수공통 감염병'은 코로나보다 지독하게 창궐해서 인간이 살아갈 수 없게 만들 것이다.
이제 다시 묻고 싶다. '비건'은 선택인가? 아니 '육식'을 포기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동물복지'나 '동물평등'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가? 이제는 '선택'할 수 있는 항목조차 삭제되었다. 왜냐면 '인간의 절멸'이란 새로운 항목이 '그 자리'에 대신 나타났기 때문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