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배우는 동물의 역사 - 인류 문명을 이끈 놀랍고 신비로운 동물 이야기 한빛비즈 교양툰 18
카린루 마티뇽 지음, 올리비에 마르탱 그림, 이정은 옮김, 장이권 감수 / 한빛비즈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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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도 동물이라는 것에 의아해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동물도 인간처럼 '복지를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에 찬성할 수 있는가? 또는 동물과 인간이 서로 '평등한 관계'를 이룰 수 있다고 보는가? 이런 질문이 낯설기만 한 분들이 아직은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애완견'이라는 표현 대신에 '반려견'이라고 표현하는 분들이 더 많은 실정이다. 개에 불과한데도 사람 팔자보다 더 늘어지게 사는 요즘에는 '동물'인데도 불구하고 '가족'과 같이 여기고, 심지어 가족보다 더 한 존재로 느끼고 있다. 그럼 다시 묻겠다. 당신이 '개'를 사랑하는 만큼 소나 돼지, 닭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육식'을 포기할 수 있겠는가?

 

  요즘엔 '비건(채식주의자)'이 참 많아졌다고 한다. 그런 분들 가운데 상당수가 '동물의 권리'가 인간과 동등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래서 '동물을 살육해서 얻은 모든 것'을 온당한 일이 아니라고 여기고 '육식'을 비롯해서, 밀렵이나 밀집사육 등의 '동물학대'를 통해서 얻은 물건이나, 더 나아가 '동물실험'을 거쳐 만들어진 물건들까지도 쓰지 않겠다고 당당히 선언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물론 이들의 '선택'은 존중 받아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비건'이 아니라는 이유로 비난 받는 것에 '동의'하는 분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비건이 존중받는 만큼 '육식'을 사랑하고 즐기는 이들도 '자기 선택'을 존중받아 마땅하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 '선택'의 문제뿐일까?

 

  인류가 '육식'을 즐겨온 역사를 보면 참으로 길다. 초기 인류는 동물보다 별다른 능력이 없었기에 '포식자'들에게 사냥 당하는 '피식자'였다. 고고학자들에 의해 '검치호랑이의 이빨 자국'이 선명한 두개골이 종종 발견된 것이, 그 증거다. 하지만 인류가 불을 발견하고 도구를 사용하면서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유발 하라리도 지적했지만, 인류(호모 사피엔스)는 개별적으론 별다른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뭉치면 '최상위 포식자'조차 학살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류는 모여 살기 시작했고, 정착을 하며 농사를 짓고 살아갔다. 그리고 '가축화'를 진행시켰다. 소, 돼지, 양, 말, 닭 등이 대표적이다.

 

  이렇게 인간이 동물과 가깝게 지내면서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초창기에는 인간보다 뛰어난 '동물의 능력'을 숭배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자신들의 조상으로 삼기도 했고, 뛰어난 능력을 흠모해서 '신'으로 섬기는 종교로 발전시키는가 하면, 그 뛰어난 능력을 '모방'하면서 새로운 기술발전의 거울로 삼기도 했다. 물론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었고 말이다. 그와 함께 '인수공통 감염병'이 발생하기도 했다. 원래는 서로를 감염시키지 않았는데, 가깝게 지내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발생한 질병이었다. 이는 '가축화 과정'을 통해 생길 수밖에 없었지만, 초기에는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전체 동물 가운데 인간과 접촉하는 동물이 1%도 안 되었기 때문이다. 야생의 생태계는 건재했고, 동물의 다양성은 생태계가 건강하다는 징표이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17세기 이후부터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서구에서 시작된 '과학혁명'은 동물의 생태만이 아닌 '생리학적 모든 것'을 탐구하여 지식을 쌓는 일에 맹목적이 되었다. 다시 말해, 동물을 산 채로 해부하면서 '인간'과 닮은점을 찾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 다른점..아니 '틀린점'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래서 '동물-기계론'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한마디로 동물은 인간과 달리 '기계'와 다를 바가 없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동물은 인간과 달리 '감정'도 없고, '이성'도 없으니, '고통'을 느낄 수도 없다. 그러하니 인간이 동물을 어떻게 하든 아무런 상관도 없고,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왜냐면 인간은 동물보다 우월하기 때문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동물을 함부로 해도 상관 없다는 얘기다. 마치 자신의 종교와 다른 '이교도'를 대하듯 인간은 동물을 맘대로 할 수 있는 권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졌다는 <성서>의 사례까지 들면서 정당화시키고 말았다. 그에 대한 결과는 끔찍할 뿐이었다. 동물의 멸종이 시작된 것이다. 먼 옛날 사피엔스가 매머드를 대량학살해서 멸종시켰듯이 말이다. 동물처럼 '하등한 존재'는 그래도 상관없다면서 말이다.

 

  단지, 먹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멸종시킨 것만은 아니다. 차마 인간을 상대로 실험할 수 없는 끔찍한 실험을 날마다 시행했다. 뱀의 피부를 한꺼풀 벗겨내 '새로운 제품의 독성'을 실험한다. 인간의 피부에 닿아도 무해한지 알아보기 위해서다. 토끼의 눈꺼풀을 붙들어매고 '신상품'을 한 방울 넣는다. 이때 토끼가 발버둥을 치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동물학대'가 아니라 '임상실험'일 뿐이며, 인간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행해지는 일이기 때문이란다. 이런 '동물실험'을 거쳐서 안전하게(!) 만들어진 생필품들이 날마다 쏟아진다. 인간에게는 안전하다는 이유로 말이다.

 

  물건 뿐만 아니다. 양계장 같은 곳에선 또 다른 동물학대가 펼쳐진다. 먼저 양계장에는 '암탉'만 존재한다. 현대식 부화기에서 갓 태어난 병아리들은 '감별사'들에 의해 수컷과 암컷으로 나뉘게 된다. 더욱 발전 방식으로는 달걀 상태에서 빛을 쪼여서 미리 선별하기도 한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양계장'으로 보내지는 것은 암평아리 뿐이다. 수평아리는 태어난 뒤에나 태어나기 전이나 '폐기처분'을 면할 수 없다. 깨어지거나 갈려나가거나 말이다. 암평아리들은 사료를 먹고 무럭무럭 자란다. 좁디좁은 '배터리(밀집사육장)' 안에서 말이다. 층층이 쌓인 그곳에서 자란 암탉들은 잠잘 시간도 없이 24시간 사료를 먹고 알만 낳는 일을 한다. 양계장 주인은 '노동자'들의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면 사정없이 행한다. 암탉이 '해 뜨는 아침'에 달걀을 낳는다면, 한밤중이라도 '강렬한 전등'을 밝혀서 아침이 온 것처럼 만들면 된다. 그렇게 하면 하루에 몇 번이라도 달걀을 얻을 수 있다. 고된 노동을 견디지 못한 암탉이 죽으면, 새로운 암탉으로 '대체'하면 그뿐이다. 양계장 주인은 '신선한 달걀'만 얻을 수 있다면 수천 마리가 죽은들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수익성'이니 말이다.

 

  이처럼 인간이 동물을 멸시하게 된 주된 까닭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본주의'였다. 돈이 된다면 '동물학대'는 인간이 먹고 살기 위해 당연한 일이어야만 했고, '동물학살'이 벌어진다고 한들 수지타산만 맞다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동물은 인간보다 못한 처우를 받으며 '인간을 위해 개량'되어야만 했고, 인간에게 불필요하다고 '낙인'이 찍힌 동물은 폐기처분을 감수해야만 했다. 대표적인 예를 들라면, 미국이 철도를 깔 무렵 '아메리카 들소(버팔로)'는 기차를 타면서 사냥을 당하는 오락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는 미국 기병대에 의해 널리 행해졌고, '버팔로 사냥'은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을 내쫓고 땅을 빼앗기 위해서 '인디언 학살'로 자행되곤 했다.

 

  이런 모든 만행은 '문명화'라는 미명으로 행해졌다. 서구 열강들이 식민개척을 하면서 지껄였던 말이기도 했다. 미개한 것에서 탈피시켜주기 위해 '위대한 백인'이 기꺼이 나서주니 고맙게 여기라고 말이다. 그나마 식민지인들은 '문명화 작업(?)'을 거치면 인간대접이라도 받았지만, 동물은 그럴 가능성조차 박탈 당하고 말았다. 그 결과, 인류가 '가축화'를 시행했을 당시에 '가축화 된 동물'이 1%에 불과하던 수치가 21세기 오늘날에는 66%가 '가축화된 동물'이고 33%는 '인간'이며, 나머지 1%가 '야생동물'이라는 놀라운 변화를 보여주고 있단다. 이는 지구상의 동물 생태계가 망가져버렸다는 증거다. 더구나 현재 77억 인구는 2100년 즈음에는 100억이 돌파할 것으로 전망한다. 생태계가 망가져버린 인간이 지구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제2의 지구'를 찾아 우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고, '인공지능 로봇'을 개발해 인간의 신체와 뇌를 '기계화'할 수 있도록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고 있는 것이며, 그렇게 발전한 과학기술로 '멸종한 동물'을 복원하거나 '동물로봇'으로 대체해서 생태계를 유지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하곤 한다. 정말 그 '호언장담'이 안전하고 건강한 생태계를 복원시킬 수 있을지 '허언'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이제 인류에게 남은 미래는 '두 가지' 뿐이란다. 하나는 '동물 생태계'가 이대로 무너져서 '인간조차' 살 수 없는 미래를 만드는 것이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인간과 동물이 평등한 관계'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생태계를 보전하고 사이좋게,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미래를 만드는 것이란다.

 

  이제는 팬데믹을 넘어 '위드 코로나 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야생에 살아 마땅한 동물들을 '서식지 파괴'를 일삼으며 인간이 사는 곳과 경계를 나누지 못했기에 벌어진 현실이다. 다시는 옛날처럼 마스크를 벗고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기후변화는 인간이 벌인 끔찍한 재앙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인간이 막아야만 한다. 애꿎은 동물들은 그런 변화를 '맨몸'으로 적응하는 수밖에 없다. 이런 현실에서도 인간은 '육식'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현대식 '대형양식장'이 제공하는 '무한 육식의 제공'은 더 많은 동물의 학살을 부르고, 더 많은 야생동물의 서식지를 파괴하며, 그로 인한 기후변화를 겪어야 하며, 지구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 '문명화'된 인간의 터전마저 빼앗을 것이며, 끝내 '인수공통 감염병'은 코로나보다 지독하게 창궐해서 인간이 살아갈 수 없게 만들 것이다.

 

  이제 다시 묻고 싶다. '비건'은 선택인가? 아니 '육식'을 포기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동물복지'나 '동물평등'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가? 이제는 '선택'할 수 있는 항목조차 삭제되었다. 왜냐면 '인간의 절멸'이란 새로운 항목이 '그 자리'에 대신 나타났기 때문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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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 머리 앤 한빛비즈 문학툰
루시 모드 몽고메리 지음, 쿠마 찬 그림, 양지윤 옮김, 크리스털 챈 각색 / 한빛비즈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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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툰> 세 번째 책은 '빨강머리 앤'이다. 너무나 유명해서 안 읽어본 사람이 없을 것 같지만 'MZ세대'들에겐 낯선 작품인 모양이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 중에 '빨강머리 앤'을 아는 친구들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몇몇 아는 아이들조차 '엄마가 좋아하는 책'이라고만 할뿐, 자신들의 취향은 아니라고 말할 정도다. 그럼에도 팬층은 대단히 두터운 편이다. 아마도 그 팬층이 호주머니가 든든한 4~50대이기 때문일 것이고, 이들이 어릴 적에 보았던 '애니메이션'이 추억을 돋우고 있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한다. 하긴 그 당시 남자아이들은 '미래소년 코난'에 열광했고, 여자아이들은 '앤'과 '캔디'에게 푹 빠졌더랬다. 그러고 보니 '들장미소녀 캔디'도 비슷한 설정이었다. 고아소녀였던 것이 말이다. 하지만 캔디는 외로워도 쓸퍼도 울지 않는 씩씩함이 매력이었던 반면에 앤은 '다른 면모'로 사랑을 받았다.

 

  '빨강머리 앤'이 오래도록 사랑받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같이 있는 사람'에게 무한한 생동감을 불어넣어주기 때문일 것이다. 앤은 잠시도 쉬지 않고 상상력을 뿜어낸다. 남들에겐 평범해 보이는 것들에 '매력적인 이름'을 붙여주어 상상력을 공유하는 독특한 능력을 앤은 갖고 있다. 심지어 자신의 이름조차 'Ann'으로 밋밋하게 부르지 말고, 꼭 'e'자를 붙여 'Anne'이라고 불러 달라고 한다. 더 좋은 이름은 '코딜리아'라는 낭만적인 이름이었다. 그 이름이 어째서 낭만적인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앤이 '그렇다'고 하니, 그 순간부터 낭만적일 따름이다. 이토록 쉼없이 쫑알거리는 소녀가 우리 곁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분명할 것이다.

 

  물론, 앤에게도 결점이 많다. 빨강머리에 대한 편견이 지나쳐서 '자격지심'으로까지 심화되었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서 하는 일마다 실수투성이에, 덜렁거리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린 소녀라고는 하지만 '허영심'이 너무 많은 편이긴 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결점조차 '상상력'에서 비롯되었다. 자신의 장점이 너무 커질 때 앤에게 부정적인 효과를 낳기도 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결점은 커가면서 점점 작아지고 철이 들면서 자중할 줄 아는 훌륭한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없어지게 된다. 그리고 결점이 줄어드는 대신에 '상상력'은 수많은 사람들을 공감시키는 능력으로 극대화 되어서 '시 낭송'과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아주 탁월한 능력으로 발휘되곤 한다.

 

  이런 앤 같은 친구가 우리 주위에 한 명쯤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매슈와 마릴라의 삶의 변화가 바로 그 증거일 것이다. 무뚝뚝하고 고집이 센 두 남매의 집에 앤이 함께 살게 되면서 '사람 사는 집'처럼 바뀌었기 때문이다. 친구인 다이애나는 어땠는가. 평생을 함께 할 소중한 또래 친구를 얻음과 동시에 삶의 활력을 얻고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절은 가장 아름답게 보낼 수 있었다. 이는 앤과 함께 다니던 학교 친구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요즘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앤과 같은 친구가 꼭 필요하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점점 꿈을 꾸는 친구들이 줄어들고 있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나 어릴 적만해도 '문학소녀'들이 잔디밭에 모여앉아 예쁜 꿈들을 쫑알거리는 모습을 종종 보곤 했다. 우리 세대가 기억하는 '여고시절'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물론 그 내용이 시집 잘 가서 행복하게 살겠다는 '현모양처의 꿈'이었을지언정, 그 시절에는 그런 꿈조차 쉽게 허락하지 않는 힘겨운 시절이었기에 더욱 소중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현모양처'를 꿈꾸던 소녀가 어머니가 되었다. 그리고 그 어머니의 딸들이 또다시 꿈꾸는 시절이 도래했건만, 그 꿈들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저 명문고, 명문대, 그리고 대기업 사모님을 꿈꾸는 것으로 바뀔 뿐이란 말인가? 이젠 여성들도 얼마든지 '사회적인 역할'을 맡아 더 큰 꿈을 꿀 수도 있는 시절이 왔는데 말이다.

 

  만약, 앤처럼 상상력이 풍부한 친구가 오늘의 대한민국에 살았다면 달랐을 것이다. 뛰어난 '상상력'을 발휘하여 자신의 능력을 맘껏 뽐내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공감력을 발휘하여 '멋진 꿈'을 함께 꾸게 만드는 위대한 인물로 성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뛰어난 위인이 아니어도 좋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이 되고, 언제 어디서라도 사랑받는 사람이 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에 그런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생동감 넘치는 삶의 영감을 받게 되어 살맛 나는 시절을 함께 할 것이다.

 

  물론, 대한민국에서 '고아소녀'로 살아간다면 운명은 좀 달라질 것이다. 왜냐면 대한민국은 아직도 '고아수출국'으로 손꼽히는 나라인 탓이다.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이긴 한데, '핏줄'이 아니면 사랑받을 자격도 행복할 권리도 모두 빼앗긴 것마냥 '고아'에게 냉담한 것이 우리 사회의 현주소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빨강머리 앤'처럼 상상력이 뛰어나고 무엇이든 생기를 불어넣는 초월적인 힘의 소유자라고 해도 대한민국에서는 그 힘을 발휘하지도 못하고 '다른 나라'로 입양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위대한 인물로 성장해 고국을 그리워하는 엉뚱한 헤프닝이나 벌일 것이고 말이다. 그도 아니면 만 18세가 되어 고아원에서 내쫓기고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한탄하며 안타까운 생을 마감할지도 모를 일이고 말이다.

 

  아름다운 문학작품을 '현실'에 대입하는 실례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지 않으면 절대로 달라질 수 없다. 우리 나라보다 경제적 후진국인 동남아 국가들조차 '고아'에 대한 처우가 이렇게까지 박하지는 않다. 자국의 고아를 '다른 나라'에 보내는 비율도 적고, 어려운 경제상황에도 훌륭한 인재로 키워 나라에 보탬이 되는 멋진 일원으로 품에 안아주는 정책을 실행한다. 그러면서 놀라워 한다. 대한민국처럼 멋진 선진국에서 '고아에 대한 정책'조차 제대로 마련하지 않고 있다는 현실을 말해주면 믿지 않을 정도로 놀라곤 한단다. 이젠 우리도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선거철만 되면 양로원에는 문턱이 닳도록 정치인들이 양손 가득 선물을 들고 찾아가지만, '고아원'은 찬밥신세를 면치 못한다고 한다. 연말에나 겨우 찾아가 '사진찍기'만 하고서 하릴없는 훈계나 늘어놓고 돈 몇 푼 쥐어주는 게 고작이다. 이제는 정신 좀 차릴 때가 되지 않았으려나.

 

  그동안 살펴본 <제인 에어>, <주홍 글자>, 그리고 <빨강머리 앤>까지 모두 여성이 주인공인 문학이었다. 비록 만화형식이지만 '원작의 내용'을 크게 훼손하지 않게 각색을 한 덕분에 '원작의 맛'을 새롭게 느낄 수 있었기에 모두 훌륭한 책이었다. 그리고 '문학툰'이라는 새로운 장르였기에 여성이 극복해야 할 '시대적 한계'를 더욱 뚜렷하게 엿볼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인 탓이다.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어린 친구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이 '시대적 배경'이 상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홍 글자>는 17세기 미국 메사추세츠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제인 에어>는 19세기 영국을, 그리고 <빨강머리 앤>은 19세기 캐나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시대의 여성들은 '종교적 박해' 뿐만 아니라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성에게 종속된 삶을 살도록 억압받는 것이 당연시되던 암울한 시대였다. 당연히 여성에겐 '선거권'도 없었고, 사회적 활동을 일절 금하던 시절이었단 말이다. 그런데도 이 작품의 여성들은 하나 같이 '진취적인 사상'을 품고 있다. 여성이 '할 수 없는 일'을 거뜬히 해내면서 말이다.

 

  오늘날이라고 다를까? 우리 사회는 완전한 '양성평등 사회'로 탈바꿈한 것일까? 그러기엔 아직도 미흡한 점이 너무도 많다. 심지어 꼴통대통령이 등장해 '실력우선주의'를 내세우며 여성인권을 박탈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장모와 마누라 말씀을 잘 듣는 강아지처럼 굴면서 말이다. 여성은 굴레에 종속되어야 마땅하고 굴종적인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헛소리는 집어치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기에 당당한 인간으로서 '온전한 삶'을 살아가려 애쓴 여성이 등장하는 작품을 두루 섭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시대적 배경 이해가 힘들다면 <문학툰>을 먼저 읽으며 이해를 돋우고 상상력을 키워는 것도 좋은 선택일 것이다. 앞으로 더 많은 <문학툰>을 만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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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 글자 한빛비즈 문학툰
SunNeKo Lee 그림, 정이립 옮김, 너새니얼 호손 원작, Crystal S. Cha / 한빛비즈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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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툰> 두 번째 책은 '주홍 글자'다. 주인공의 가슴팍에 선명히 새겨진 '선홍빛 글자(The Scarlet Letter)'의 원래 의미는 '간통(Adultery)'였다. 헤스터 프린은 남편이 있는 유부녀였는데도 남편이 아닌 남자와 정을 통해 아이를 낳았으니 '죄를 지은 여인'이란 것을 일깨워서 뭇사람들에게 경계와 금기로 삼기 위해 누구나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가슴 한복판에 선명한 글자를 새겨놓는 형벌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독실한 청교도 신도였던 헤스터는 그 부끄러운 글자를 더욱 밝고 선명하게 '선홍빛'으로 새겨 넣는 것으로 속죄하려 했다. 자신이 지은 죄가 무겁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마음 깊이 부정한 짓은 하지 않았다는 결의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 결의는 조금 있다 다시 언급하련다)

 

  그래서 헤스터는 자신의 딸을 '펄(진주)'이라는 보석으로 불렀다. 진주는 서양에선 '인어의 눈물'이라고도 불리지만 천연에서 얻은 진귀한 보물이란 뜻도 있다. 헤스터는 펄의 아버지를 밝힐 수 없는 처지였으므로 '동정녀 마리아'처럼 순결한 상태에서 얻은 보석같은 아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가 담긴 '주홍 글자'는 헤스터 프린의 경건한 삶 속에서 점점 'Able(능력)'과 'Angel(천사)'라는 의미로 바뀌게 된다. 그녀가 청교도적인 경건한 삶을 살아나감에 따라 죄 지은 여인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인물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아서 딤스데일은 17세기 메사추세츠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목사다. 그러나 그도 헤스터와 마찬가지로 '죄인'이었다. 펄의 아버지가 사실은 딤스데일이었기 때문이다. 그와 그녀가 '어떻게' 만나 '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는지는 줄거리 상에 나타나지 않는다. 작가인 호손이 이 부분을 쏙 빼버린 까닭은 자칫 '통속적인 내용'으로 변질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암튼, 그와 그녀는 성경에서 금기하는 '간음하지 말라'는 일곱번 째 계명을 어기는 죄악을 저지른 사이였다. 간음을 저지르면 '사형'이라는 형벌을 면하기 어려웠기에 목사 신분인 딤스데일에게 '밝힐 수 없는 죄악'은 크나큰 형벌이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왜 그는 자신의 죄를 떳떳하게 밝히고 헤스터처럼 당당히 벌을 받지 않았던 것일까? 감추면 감출수록 '자신의 행위'가 더럽고 지저분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게 될 뿐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말이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형벌을 '스스로' 내리고 '스스로' 견디며 더욱더 무겁고 달게 받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끝내 그 형벌을 달게 받지 못하고 '헤스터와 펄과 새로운 삶'을 꿈꾸려는 희망을 품으면서 죄를 면하려...아니 고통을 면하려 했다. 차라리 헤스터처럼 죄인임을 밝히면 그런 고통도 없었으련만, 딤스데일은 죄를 밝히지 못한 채 속으로 곪아가는 병에 걸려 죽음에 이르게 된다. 얼핏 보면, 헤스터를 더욱 곤경에 빠지게 만들지 않기 위해 '펄의 아버지'임을 밝히지 않은 배려심 돋는 행위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비겁한 변명에 불과하다. 17세기 사회에서 여인이 설 자리는 송곳 꽂을 만큼도 없는데도 뭇사람들의 비난을 나눠 받기는커녕 '외면'해버린 비겁한 핑계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헤스터와 함께 비난을 받고 헤스터처럼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살아갔더라면 더 훌륭한 삶을 살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그녀보다 더 못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헤스터의 본 남편인 로저 칠링워스다. 그는 '학자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지식을 탐구하는 삶을 살았지만, 그로 인해 어여쁜 신부였던 헤스터를 홀로 미국으로 떠나보내고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방치해버린 무책임한 남편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방치된 신부는 살기 위해(?)서 딤스데일의 사랑을 받아들였는지도 모를 일이고 말이다. 암튼, 무책임한 남편은 자신의 아내가 사생아를 안고서 뭇사람들의 비난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와중에 등장했다. 그런데도 자신이 헤스터의 남편임을 밝히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생아를 품고 있는 아내를 비난하지도 않았다. 단지 '복수심'만을 키웠을 뿐이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복수하겠단 말인가? 지식을 탐구한 학자란 사람이 이리 쫌생이가 되어 버렸단 말인가? 차라리 그럴 바에야 아내의 곁을 지켜주는 무던한 남편이라도 되었으면 족하련만, 그는 못나게도 '복수하는 삶'을 선택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드디어 복수할 대상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런데 그 복수라는 것이 '딤스데일의 파멸'이라니...차라리 단숨에 숨을 끊어버리는 방법이라면 덜 치졸했을터인데, 지식을 탐구하여 '인류의 지혜'를 더 많이 더 깊이 갈고 닦는 학자의 본분을 망각하고, 그저 '한 사람의 삶'을 파국으로 몰아넣는 일에 매진하는 삶이라니, 추악하다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칠링워스는 성치 않은 몸이었는데 복수하는 삶을 살면서 더욱더 추악한 꼴로 변해갔다.

 

  세 사람 가운데 온전한 삶을 살아간 이는 오직 '헤스터 프린'뿐이다. 목사인 딤스데일과 의사인 칠링워스는 뭇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고매하신 분들이었으나 '겉보기'에만 그럴 뿐이었다. 그들은 '겉보기'에 치욕스런 삶을 살아가는 헤스터보다 더 부끄러운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목사라는 사람이 신도들에게 그럴 듯한 설교를 하면서도 늘 한 손을 가슴팍에 올려놓고 통증을 참아야만 했다. 그가 '그럴 듯한 설교'를 하면 할수록 죄가 더욱 무거워짐을 정작 본인을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정작 고해성사는 자신이 해야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더욱 뜨끔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의사인 칠링워스는 어떤가. 사람을 살리고 고통을 없애야 할 본분도 망각한 채, 그는 '한 사람'을 죽음보다 더한 고통의 구렁텅이로 내몰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버린 악마와 다를 바가 없었다. 차라리 '헤스터의 결의'처럼 속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비록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날아가버린 덧없는 삶처럼 느껴질지라도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 묵묵히 자신을 희생하는 이로 살아가는 것이 '더 청교도'스럽지 않느냔 말이다.

 

  그리스도교에서 여자는 '남자의 부속물'처럼 여겨지곤 한다. 최초의 여성인 이브가 아담의 갈빗대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악한 뱀의 꼬임에 넘어가 '원죄'를 저지른 이도 이브인 탓에 여성은 '출산의 고통'을 비롯해서 온갖 더럽고 모욕적인 처분을 감내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는 하느님을 향한 경건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청교도'인들에게 더욱더 그렇다. 그렇기에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 헤스터의 삶은 더욱 치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주홍글자'에선 오직 헤스터만이 온전한 삶을 살아간다. 한 여인의 삶이 이토록 숭고하고 아름다울 수가 없다. 그녀는 간통한 여인에서 '성모 마리아'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그것도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말이다.

 

  반면에 딤스데일과 칠링워스로 대표되는 '남자들의 삶'은 떳떳하지 못하다. 이는 '청교도의 사회'의 이중적인 모습을 잘 드러내는 장치로 보이기도 한다. 겉으론 경건한 척하면서 드러나지만 않는다면 '속물적인 근성'을 버리지 못하는 부도덕한 이들의 이중성 말이다. 그래서 <주홍글자>는 여성의 삶이 더욱 진솔하고 숭고하다는 내용으로 읽히기도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곤 한다. 하지만 그 잘못을 뉘우치고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징표'로 삼는다면 흠 잡을 데 없는 완벽한(경건한) 삶을 살게 될 거라는 것을 헤스터가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중적인 삶을 살아가는 딤스데일과 칠링워스는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의식'은 찾아볼 수 없는 부도덕한 인물의 대표주자가 되고 말았다. 어찌 이들에게서 본 받을 것이 있단 말인가.

 

  이처럼 사람은 겪어봐야 한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속은 알지 못한다는 속담이 있다. 죄인이라 손가락질하기에 앞서 '겪어보아야' 할 것이다. 겪어보지 않았다면 '함부로' 사람을 향해 손가락질 해선 안 된다. 우리는 목사님과 의사선생님이라는 '사회적 지위'만 보고 존경어린 시선을 담기에 바쁘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인간 이하' 취급을 받아도 시원찮을 분들이 아주 많다는 것을 말이다. 주위의 평판 따위는 '참고'만 하면 된다. 직접 겪어보고 '말과 행동'을 지켜보면서 직접 평가를 내려야 실수를 덜 수 있다. 우리 주위에 '헤스터 프린'과 같은 인물이 참 많을 것이다. 커다란 실수를 저지르고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더라도 '철저히 반성하는 삶'을 살아가는 진짜배기 인생 말이다. 이런 분들이 우리 주위에 많이 계시기에 아직은 살만한 세상일 것이 틀림없다. 비록 뉴스에는 인간 형상을 한 쓰레기들만이 가득할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난 <주홍글자>를 다시 읽고 또 다시 읽고 싶어진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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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불복종 쫌 아는 10대 - 부당함에 맞서는 삐따기들의 행진 사회 쫌 아는 십대 7
하승우 지음, 방상호 그림 / 풀빛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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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가 한 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하지 않은 말이 있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국가반란을 꾀하고 아테네의 청소년들에게 유해한 영향을 끼쳤다는 죄목으로 사형판결을 받았더랬다. 그래서 그의 친구들이 소크라테스의 구명운동을 펼쳤지만, 이미 썩어빠진 아네테 정치판에서 통할 리 없었다. 그런 까닭에 친구들이 그에게 탈옥을 권유했지만, 소크라테스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부정한 편결'에 당당히 맞서지 않고 비겁하게 도망을 간다면 세상 사람들이 소크라테스를 비웃을 거라면서, 자신은 부당한 판결에 맞서 당당히 죽음을 받아들이겠노라고 선언하고 독배를 들이켰다고 한다.

 

  이를 두고, 소크라테스조차 '악법'도 준수하는 모범시민이라고들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악법을 준수해서 좋아할 세력은 '부정하게 권력을 차지한 못된 놈들'뿐이다. 그러니 소크라테스의 선언은 '악법도 준수해야 마땅하다'는 메시지가 아니라 '부당한 법 앞에 당당히 맞서 잘못 되었다는 것을 만 천하에 알려 잘못을 바로 잡는 계기로 삼으라'는 외침인 것이다. 그리고 교양시민이라면 그 외침에 분연히 일어나 '잘못 되었다'라고 같이 외치면서 끝내 바로 잡힐 때까지 물러서지 않을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시민불복종의 핵심'이다.

 

  우리는 '법치주의'를 대단히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편견을 갖고 있다. 물론 법이 공정하게 작동하는 사회라면 '법치주의'는 공정한 심판자로 공정사회를 이룩하는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허나 대한민국에서 살면서 '법대로 사는 것'이 그리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얼마 전 'n번방 사건'으로 평생을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게 된 조주빈의 배상금에 대한 뉴스가 나왔다. 그가 피해자들에게 배상해야 할 금액은 1억 원이 넘는 돈이 넘지만 지금까지 꼴랑 7만 원을 낸 것이 전부라고 한다. 그리고서 더는 낼 돈이 없다며 버티고 있는데, 대한민국의 법치주의가 공정하다고 느낄 수 없는 수없이 많은 예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어디 그뿐인가. 노동자로 살면서 부당하다고 느끼는 일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하는 일'에 비해 턱없이 '적은 돈'을 벌면서도 사업주나 고용자를 향해 부당하다는 얘기 한 번 시원하게 말하지 못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더더구나 '노동자 파업'이라도 할라치면 같은 노동자들이 먼저 '파업'하는 노동자를 욕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기 일쑤다. 특히, 대기업이나 외국기업의 하청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국가 경제를 말아먹는다'거나 '국제적 망신살이 뻗친다'면서 같은 노동자를 욕하기 일쑤다. 그 노동자들에겐 '가족의 생사'가 달린 급박한 일인데도 나몰라라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사업주나 고용자의 편을 들어 준단 말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파업'에 나서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고 볼멘소리나 해대고 말이다. 하긴, 집 없는 서민들이 '대기업의 법인세 인하 정책'에 찬성하고, '상속세 폐지'에 고개를 끄덕이고, '종부세 감면'에 환호를 보내는 실정이니 말 다했다. 이들의 논리는 '먼훗날' 자신들도 대기업 사장이 되고, 재벌이 되며, 내집마련을 했을 때 '얻을 혜택'에 기꺼이 찬성하는 거라는 궤변을 늘어놓거나, 그런 정책을 내세우는 정당이 정권을 잡아야 콩고물이라도 얻어 먹을 수 있다(낙수효과)는 헛소리를 내뱉을 뿐이다. 이런 대한민국에 '시민불복종'이라니...언감생심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학생들은 달랐다. '박근혜 퇴진' 팻말과 촛불을 들고 가장 먼저 거리로 나선 것은 다름 아니라 학생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학생들은 '단원고 학생들의 희생'이 남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세월호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학생들이 사고가 난 뒤에도 탈출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참변을 당했느냔 말이다. 그건 학생들에게 '자유'보다 '복종'을 가르치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이 폭발한 사건이었으며, 무엇보다 앞서서 챙겼어야 할 '학생들의 생명과 안전'을 내팽개친 채, 자신들의 안위와 부정한 권력을 감추기에 급급했던 '무능한 정부의 탓'으로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무능한 정부'를 향해 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어른들을 대신해서 학생들이 먼저 촛불을 드니, 그제서야 뒤늦게 부끄러움을 느낀 '교양시민들'이 물밀듯이 쏟아져나와 학생들과 함께 춥고 긴 밤을 밝혔던 것이다.

 

  어디 이뿐인가.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를 수입하기로 결정한 이명박 정권에 촛불을 들고, 명박산성과 물대포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국민의 건강권을 외친 학생들이 있었으며, 미순효순 학생의 억울한 죽음 앞에 애도하는 것으로 멈추지 않고 '부당한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을 바꾸는 원동력도 학생들의 촛불시위가 시발점이었다. 3·1만세혁명, 4·19민주화운동, 5·18민주화운동, 6월항쟁 등등 대한민국의 학생들은 대한민국 역사의 살아있는 주역이었고, 양심이었다.

 

  그런데 그런 학생들이 어른이 되면 비겁해지는 것일까? 세상물정 모르던 철부지였다면서 반성이라도 했단 말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시위에 나서기 전에 '유서'부터 적어놓고 나서던 학생들이었는데, 비겁해지거나 외면해서가 아닐 것이다. 그건 자신의 목숨보다 더 아끼는 '가족'을 챙겨야 할 어른이 되었기 때문에 '부당한 권력' 앞에 당당히 나서서 맞닥뜨려야 할 현실이 너무나 아프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그런 것일 것이다. 왜냐면 '시민불복종'은 부당함을 외치다가 막상 '현행법'을 어기면 당당히 처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도 그랬듯이 말이다. 그러니 '시민불복종'을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고 비겁을 운운해서는 안 된다. 누구나 죽음과 고통 앞에서 움츠러 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민불복종은 '연대'가 중요하다. 미국의 흑인인권운동가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는 '교도소의 빈방보다 우리 흑인들의 수가 더 많으니 백인경찰에게 체포가 되더라도 더 많은 흑인이 연대하면 우리의 목소리를 듣지 않을 수 없다'고 외쳤다. 그보다 앞서 마하트마 간디는 '영국의 소금법'의 부당함을 외치며 세금을 낼 바에야 직접 바다에 가서 소금을 만들겠다며 행진을 벌였고, 간디의 뒤를 따라 수만 명의 사람들이 함께 행진을 해서 끝내 소금법을 페지하게 만들었다. 그런 간디가 영감을 받은 책이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이다. 소로는 미국이 멕시코를 상대로 부당한 전쟁을 벌이고 있기에 '세금'을 낼 수 없다고 버티다 감옥에 수감된 사상가였다. 그는 정부의 부당함에 당당히 소신을 밝혔고, 그로 인해 감옥에 수감이 되었지만 도망가지 않았다. 잘못을 바로 잡기 위해 '잘못'이라 주장했으니 끝까지 당당함을 잃지 않아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된 것이다. '시민불복종의 힘'은 이런 것이다.

 

  그렇다면 '시민불복종'은 늘 법을 어겨 감옥에 가야만 할 수 있는 것일까? 그건 아니다. 거대한 상대에 당당히 맞서는 방법에는 '불매운동' 같은 일도 있다. 대리점주에게 강매를 하며 갑지를 일삼던 '남양기업'에게 소비자는 불매운동이라는 철퇴를 내렸다. 결국 남양은 사업주가 바뀌는 진통을 겪으며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고서야 겨우 불매운동이 누그러지는 경험을 했다. 또한 '땅콩회항사건'으로 유명한 대한항공 한진일가도 검찰의 수사를 받는 등 국민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더는 '갑질'을 받고 당하기만 하는 '을'이 아니라는 것을 톡톡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물론, 불매운동이 매번 효과를 보는 것은 아니다. 나 홀로 '불매'를 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목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고 소극적일 필요는 없다. 부당한 일에는 공사가 따로 없기 때문이다. 내가 겪은 부당함이 외면받지 않으려면 다른 사람이 겪은 부당함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게 공감대를 갖추려 노력하는 '교양시민'이 많아야 우리 사회가 건강해진다.

 

  시민불복종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당연히 해야 마땅한 '권리'인 것이다. 그리고 내가 사는 공동체의 운명과 함께 하려는 노력만 있다면 시민불복종은 큰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고, 큰 힘을 발휘하는 만큼 우리 사회는 공정하고 건강하게 바뀌어 나갈 것이다. 그런 건강한 시민들이 많아진다면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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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3의 비밀 우리 문화 속 수수께끼 1
김종대 지음, 이부록 그림 / 사파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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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책은 짧은 만큼 '함축적인 내용'이 담겨 있어 읽을수록 그 속에 담긴 뜻을 헤아리는 재미가 느껴지는 책이기도 하다. 그래서 '독서지도사' 교육을 받을 적에 선생님께서 이르기를 "하루 날을 잡아 가까운 서점이나 도서관에 들러 <그림책> 3~40권씩 후루룩 읽으며, '책의 진면목'을 읽어내는 힘을 길러 보세요"라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실제로 도움도 참 많이 되는 책읽기 방법이었다. 그렇게 서점에 쭈그려 앉아 책을 다 읽고 나면, 그 가운데 가장 맘에 드는 것으로 한 권쯤 사서 '책 읽은 값'을 치루면 출판시장에도 도움이 된다고 귀띔해주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요즘 책값 너무 비싸서, 나는 주로 '도서관'을 이용하곤 했다..쿨럭쿨럭

 

  암튼, 이 책은 '우리 문화 속 수수께끼'라는 주제로 4권을 펴낸 시리즈 가운데 첫 번째 책으로 '숫자 3'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냈다. 물론 '개정판'이다. 책의 내용은 각각 '우리 문화 속 전래이야기', '우리의 얼과 혼, 그리고 전통 신앙', '우리 민족의 농사이야기, 24절기', '우리 민족의 상징, 용'을 담아냈다.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깊이 다루진 않았지만, 담을 수 있을 만큼 넉넉하게 담아 최대한 많이 알려주려는 노력이 엿보이는 시리즈였다. 이는 4~50년 전만해도 우리 나라가 '농촌사회'였기에 우리의 오랜 전통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던데 비해, 오늘날에는 산업화를 넘어 첨단정보사회를 지나 '4차산업혁명'이 일궈낼 인공지능 로봇이 등장할 시점에 다달은 대한민국의 전통문화가 굉장히 낯설게 느껴지기에 의미심장한 결의마저 느껴지게 된다. 과연 우리 나라는 '전통문화'를 오래도록 보존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다른 선진국과는 달리 초고속으로 성장발전하였다. 그래서 더욱 다른 나라의 부러움과 시샘을 한 몸에 받고 있기도 하지만, 우리의 '또 다른 자랑거리'인 전통문화가 심하게 훼손하고, 빠르게 잊혀지고 있는 문제도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정말 이대로 전통문화가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 반가운 일일까? 아직도 초강대국 지위를 놓지 않고 있는 미국이 가장 부러워하고 있는 것이 '유럽의 유구한 전통문화'다. 미국 사람들이 지금도 고풍스런 영국의 전통과 품위 있는 프랑스 예법에 경외심을 갖고 자신들의 '패스트 문화'를 부끄러워하는 까닭도 바로 그 때문이다. 심지어 헐리우드 SF영화에서조차 '전통의상'은 죄다 중세유럽풍이거나 중동과 동양의 의상을 베껴 입고서 '영어'만 나불거리고 있는 실정이다. 왜 그럴까? 미국의 전통문화가 미흡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내세울 전통문화가 무궁무진할 따름이다. 그러니 전통문화는 모두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오래도록 '농경문화'를 간직해왔고, '한자문화'로 기록했으며, 독특한 '세 박자의 흥'을 가진 문명국이란 사실을 점차 망각하고 있는 듯 하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얼과 혼은 '농사일'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도 현대의 농촌사회는 빠르게 고령화, 서구화 되어 '전통문화'를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고, '한자'는 중국만의 문자라는 착각에 빠져 '우리의 기록문화'마저 중국의 것을 기준으로 삼는 얼치기 상황에 빠졌다. 또한, 이웃나라인 중국과 일본조차 '네 박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우리는 독특하게 '세 박자 장단'에 맞춰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노래와 춤을 만끽하는 흥과 재주를 갖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모르고 있다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우리의 먹거리 독립을 위해서라도 '농경문화'는 잊혀져선 절대 안 된다. 또한 '한자'는 중국의 것이 아니라 2000년 동안 우리가 갈고 닦은 '우리 글'과 다를 바가 없다. 지금 우리가 '한글'을 유용하게 쓰고 있지만, 우리의 기록문화가 대부분 '한자'로 써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그 기록을 '중국이나 일본의 잣대'로 해석하지 말고, 우리 식으로 해석해나가야 제대로 된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일이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흥을 돋우는 '세 박자'는 이제 전세계 한류열풍으로 증명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전통문화를 잊지 않고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일은 아주 뜻 깊은 일이란 점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그 가운데 '세 박자'에 담긴 비밀인 '숫자 3에 얽힌 이야기'가 이 책의 내용이다. 우리 민족이 얼마나 '숫자 3'을 좋아하냐면, 뭐든 세 번은 해야 직성이 풀린다는 점을 봐도 잘 알 수 있다. '삼 세 판'은 오랜 옛날부터 국룰이었다. 삼족구, 삼족오, 삼두매 등 '다리(머리)가 셋 달린 동물'은 신비한 능력을 갖고 있어 온갖 액운을 막는 부적에 쓰였을 뿐 아니라 나라의 상징으로 쓰이기도 했으며, 외적과 싸우는 전쟁에 나설 때 '우리 민족'을 뜻하는 상징으로 쓰이며 이마나 가슴팍, 그리고 깃발에 수를 놓아 보기만 해도 오줌을 지리고 적들을 벌벌 떨게 만들 정도로 용맹을 떨치기도 했다. 더구나 여러 신들 가운데 집을 지키는 성황신, 풍년을 바라는 토지신, 액운을 막는 여역신 등 '세 신'을 정성껏 모시는 풍습과 아이를 점지해주고 건강하고 복을 빌어주는 '삼신할매'도 세 명이 짝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보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오죽 좋아하면 '셋째 딸'은 심성도 곱고 집안에 액운을 막아주며 복을 불러온다하여 얼굴도 보지 않고 데리고 온다고 했을까. 그 덕에 전국의 첫째 딸과 둘째 딸은 억울하게 손해를 보고 말았으니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숫자 3'이 좋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우리 민족이 숫자 3에 미춰~버리는 끝판왕은 다름 아니라 '단군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늘을 다스리는 환인의 아들 환웅이 '천부인(보통 칼, 방울, 거울이라 일컫는 우리 민족의 세 가지 보물)'을 가지고 삼 천 명의 신하와 함께 태백산 정상 신단수에 내려와 신시를 세우고 나라를 다스렸으니, 우사, 운사, 풍백는 날씨를 관장해 농사를 지으면 해마다 풍년이었다. 어느 날, 곰과 호랑이가 환웅을 찾아와 인간이 되고 싶다는 소원을 비니 해가 미치지 않는 동굴에서 쑥과 마늘을 먹으며 백 일을 버티면 된다고 말하니, 호랑이는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가고 곰은 '삼칠일(21일)'만에 어여쁜 여인으로 변했으니, 인간으로 변한 환웅과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더라... 여기서 세 가지 신물, 삼 천 명의 신하, 세 명의 신, 삼칠일 등은 모두 '숫자 3'과 연관이 있다.

 

  이를 '중국의 음양설'에서는 남자는 1, 여자는 2, 남자(1)와 여자(2)가 혼인하여 낳은 아이는 3이라 하여 '숫자 3'을 완벽한 수라고 해석하였다. 우리도 이렇게 해석한 중국과 오래도록 이웃하고 있으니, 우리의 '음양오행설'에서도 '숫자 3'은 신비한 힘을 가진 수로 이해하고 있다. 허나 그런 중국이 '숫자 3'을 완벽하다면서도 굉장히 꺼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일단 중국에서 '세 박자'는 죽음을 뜻하곤 한다. 왜? 이는 '숫자 3'인 한민족과 연관이 깊기 때문이다. 중국에선 '황제(신화속 삼황오제 가운데 '황제 헌원씨'를 말한다)'와 치우(동이족의 전쟁신)가 오랜 전투를 하였는데, 황제가 치우에게 번번히 지기만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다 마지막 전투에서 황제가 안개를 뿌려서 치우를 무찔렀다고 전하는데, 그 뒤로 황제는 해마다 동쪽바다에 직접 행차하여 치우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전한다. 잘난 한족이 이겨놓고서 왜 치우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인지는 둘째치고, 이토록 황제를 곤혹스럽게 만든 치우를 상징하는 숫자가 바로 '3'이었기 때문에 오늘까지도 '숫자 3'이라면 오금을 펴지 못하고 있다고 일설에 전해지고 있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다. 이처럼 중국도 '숫자 3'을 꺼리지만, 가까운 일본조차 '숫자 3'을 멀리하는 것을 보면 '숫자 3'은 한국만의 고유한 숫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렇게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놓다보면 끝도 없이 쏟아지기 마련이다. 오래도록 우리 조상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만 주워 담아도 이 정도인데, 이를 체계적으로 연구해서 '성과'를 높이면 얼마나 더 훌륭할지 상상조차 안 될 정도다. 아직까지 이런 연구에 대한 성과가 미미한 것은 우리 민족 고유의 '숫자 3'에 대한 해석을 애꿎게도 '사료부족'이란 핑계를 대며 '중국의 사료'와 '일본의 사료'에서 그 증거를 찾으려하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젠 우리의 자긍심을 드높여 봄이 어떨까 싶다. 우리 민족의 잘남을 시샘한 중국과 일본의 오랜 훼방에 놀아나지 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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