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승의 인간 탐구 보고서 3 : 인간의 감정은 롤러코스터다 - 어린이를 위한 뇌과학 프로젝트 정재승의 인간 탐구 보고서
정재승 기획, 정재은.이고은 글, 김현민 그림 / 아울북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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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감정'을 과학적으로 접근하면 어떤 분석을 할 수 있을까? 감정의 반대적 개념은 '이성'이라서 감정적인 표현은 이성적인 표현보다 낮은 수준으로 생각하기 일쑤다. 그 까닭은 '감정'은 생각과 판단이라는 과정을 건너뛰고서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본능'에 가깝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뜨거운 감정보다는 냉철한 이성으로 행동하는 것을 더 바람직한 행동이라도 여기곤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인간의 감정은 정말 불필요할 정도로 뜬금없는 일을 초래하기도 한다. 그래서 감정적으로 일을 해결하기보다 침착하게 '이성적 판단'을 먼저 하라는 격언이 많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보다 앞서 '욱하는 감정'을 자제하는 것이 바람직한 행동이라고 추켜세우기도 한다. 그렇지만 인간에게 감정이 없다면 결코 인간답지 못하다 할 것이다. 태초의 인류는 '감정'이 있었기 때문에 원만하게 무리생할을 할 수 있었고, 만약 '감정'이 없고 '이성'만 있었다면 불가능에 도전을 하는 무모한 짓은 절대 하지 않았을테니 거대한 문명사회를 건설하기는커녕 그저 '생존'하기에 바빴을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감정'을 통해서 서로를 돕고 더 큰 시너지 효과를 거두는 놀라운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인류는 '질투'를 통해서 남들보다 더 나은 것을 추구했고, '즐거움'이란 마약(?)에 취해서 고된 반복노동도 힘든 줄 모르고 거뜬히 해냈으며, '슬픔'을 통해서 '감정의 쓰레기'를 토해내고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내는 새 힘을 얻어내기도 했다. 하긴 '하릴없는 걱정'만하면서 없던 걱정까지 싹싹 긁어모아 더 큰 불행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짓도 저지르기도 한다. 하지만 쓸데없다고 여겨지는 걱정을 통해서도 얻는 긍정적인 것이 있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미래를 '미리' 대비하고 준비해서 걱정했던 것보다는 훨씬 덜하게 어려운 일을 해낼 수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감정'을 나누면서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을 지향했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할 때, 기쁨은 '두 배'가 되고, 슬픔은 '절반'으로 줄어드는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이성적으로 볼작시면, '너의 기쁨'과 '나의 기쁨'은 별개인 것이기에 함께 기뻐해야 할 아무런 이유나 근거가 없기 마련이다. 하지만 인간은 비록 남일지라도 '함께' 기뻐해주면서 기쁨을 만끽하는 경험을 하면서 '감정의 긍정적인 면'을 터득하곤 했다. 이처럼 지구인은 '감정의 폭발 상태'로 살아가는 것의 유익함을 일찌감치 터득하고 보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감정'을 적극 표현하고, 때론 '감정'을 절제하면서 위기의 상황을 슬기롭게 헤쳐나가는 지혜를 갖게 되었다.

 

  이런 인간의 감정은 뇌에서 어떻게 조절하는 것일까? 뇌 속의 뇌하수체는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을 조절하는데, 우리몸의 곳곳에서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되면서 여러 가지 감정을 느끼게 해준다. 보통 호르몬은 혈액과 림프절을 통해서 먼 곳까지 화학신호를 전달하는데 멀리 이동하기 때문에 효과가 느리게 나타나지만 오래 지속되고, 신경전달물질은 뉴런과 뉴런 사이에 전달되는 화학신호 매개체로 이동거리가 비교적 짧아서 효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좋은 일이 생겼을 땐 '세로토닌'과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되면 행복한 감정이 빠르게 우리몸을 감싸고, 무서운 상황에 놓였을 땐 '세로토닌'이라는 신경전달물질과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되면서 즉각적이고 오랫동안 감정을 안정시키며 위험상황에 대비하도록 한다. 또한, 화가 났을 땐 '아드레날린'이라는 호르몬이자 신경전달물질이 심장을 빠르게 뛰게 만들고, 더욱 화가 나면 '노르아드레날린'이라는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비되면서 심박수와 혈압을 높여 긴장감과 집중력을 높여준다. 하지만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면 다른 감정에 무뎌지게 만들기 때문에 화가 난 상태에서는 물불이나 앞뒤 가리지 않고 날뛰게 만들곤 한다. 때론, 매우 신나는 상황에서도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어 심장이 두근두근하면서 활력과 집중력을 높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이 적당하게 분비되는 것에 실패하게 되면 감정이 폭주하게 되고, 심리불안 증세를 보이기도 하며 '정신과치료'를 받으며 '약물치료'를 받기도 하는데, 이 약물의 주성분도 바로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로 이루어진 것이 많다. 신날 땐 '도파민' 쭉쭉, 짜증날 땐, '코르티솔' 솔솔 나와서 더욱 신나게 해주고 스트레스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며, 슬플 땐 '세로토닌'이 부족하기 때문에 보충해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정폭주'와 '심리불안'이 생겼을 때 적절한 약물치료를 병행하면 도움이 된다. 물론, 너무 약물에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감정을 조절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물론, 뇌하수체를 '직접'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하지만 '감정조절'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만으로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의 분비에 영향을 줄 수는 있을 것이다. 결국은 뇌에서 분비되는 '물질'에 의해 우리의 감정은 수시로 바뀌며 영향을 받지만, '감정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 약간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뭐든 지나치거나 모자르면 '문제'가 생기는 법이다. 우리의 감정을 조절하는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감정을 너무 절제하려고 들지도 말고, 감정에 지나치게 휘둘리지도 말도록 적절히 훈련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스스로 할 수 없다면 '약물의 도움'도 받고 말이다. 우리는 '정신과 치료'에 대해 너무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가 없다는 '이성적 판단'의 도입이 시급한 편인 것을 긍정적으로 감안할 필요가 있다.

 

  한편, 책속의 줄거리를 살짝 들여다보면, 지구를 탐사하는 '아우린 외계인들'의 비밀이 속속 밝혀지는데, 그 비밀임무가 바로 '지구정복'이었던 것이 새롭게 밝혀졌다. 그래서 아우린 행성인들이 지구에서 정착하기 적당하다는 것이 판명된 지금 '지구인 절멸'을 결정했는데, 그 이유가 지구인들은 명확한 이성이 아닌 '불확실한 감정'에 휘둘려 살아가는 예측불가능한 존재인만큼 '아우린 행성인들의 이주'에 위협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란다. 다행히 좀더 신중히 결정하자는 의견이 나와서 '탐사대'의 지구인 관찰은 조금 더 길어지게 되었지만...과연, 지구인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 다음 편은 지구인의 '사춘기'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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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 미제라블 한빛비즈 문학툰
SunNeKo Lee 그림, 정미선 옮김, 빅토르 위고 원작, Crystal S. Chan / 한빛비즈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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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빛비즈의 <문학툰> 네 번째 책은 너무나도 감동스런 <레 미제라블>이다. 19세기 낭만주의 문학의 최고봉이라 불리는 이 책을 '한 권의 만화책'에 다 담는다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책에는 다 담겨 있다. 비록 그 감동까지 다 담을 순 없을지라도 마지막 장을 넘길 때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는 것은 이 책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4주간 아이들과 함께 한 논술 수업의 <문학툰> 마지막 책으로 이 책을 골랐으며 '대작'을 축약해 어린이들도 충분히 읽을 수 있는 책들 가운데 이 책만이 줄 수 있는 감동 포인트도 함께 수업해보았다.

 

  아시다시피, <레 미제라블>은 '불쌍한 사람들'이란 뜻이다. 또는 '비참한 사람들'이란 뜻도 있다. 시대배경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의 혼란을 겪으며 '공포정치' 시절을 지나 '제정'이 들어섰다가, 다시 '왕정복고'가 들어섰다가 또다시 '7월혁명'이 일어날 즈음의 1820년대를 관통하는 프랑스를 배경으로 삼았다. 시민들은 성직자와 귀족들의 수탈과 억압을 더는 참지 못하고 '제3신분(부르주아)'를 주축으로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는 것으로 혁명을 시작하였다. 그로 인해 '루이16세'를 단두대에 올려 시민들이 직접 왕정을 폐지하기에 이르렀지만, 국가를 운영하는 주축이 사라진 프랑스는 '내부 혼란'과 '외부 공격'이라는 두 가지 위기를 한꺼번에 맞게 되었다.

 

  이때, 등장한 영웅이 바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다. 나폴레옹은 내부의 혼란과 외부의 침략을 '결속'으로 극복하는 한편, 시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심어주며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수호하는 듯 했다. 하지만 그런 그가 스스로 '황제'에 올라 '구체제의 모순(앙시앵 레짐)'을 다시 재현하는 모습을 보면서 실망하게 된다. 더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의 몰락'이다. 이는 프랑스 사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으며, 노동자들이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빵 한 조각'을 사기 힘들 지경에 놓이게 되면서 노동자들은 먹고 살 길이 막막해졌던 것이다. 이런 경제적 불안은 사회불만을 키웠고 조금이라도 힘이 약한 사람은 자기 것을 빼앗기고 절망에 빠지게 되었다.

 

  사회불안이 이어지자 프랑스 정부는 '법치주의'를 내세우며 법과 질서를 앞세우지만 당장 먹을거리가 부족한 시민들은 법과 질서보다 먹을 것을 달라며 아우성을 목놓아 외쳤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가혹한 형벌'과 '무시무시한 채찍질'이었다. 이렇게 프랑스 시민들은 너나할 것 없이 비참한 처지에 내몰렸다. 그러나 더욱 끔찍한 것은 그렇게 불쌍한 처지로 내몰린 사람들끼리도 서로 돕기는커녕 '범죄자'로 낙인 찍힌 이들을 차별하며 나락으로 내몰 정도로 사회분위기가 뒤숭숭해진 것이다. 누구라도 아무런 죄 없이 '범죄자'로 전락하는 사회에서 그 구성원들 하나하나가 '범죄자'로 낙인 찍히면 두 번 다시 사회로 복귀할 수 없도록 내몰았던 것이다. 이렇게 비참하다 못해 '비열한 사회'가 되어 버린 프랑스는 혼돈 그 자체였고,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또 다른 혁명'을 꿈꾸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불쌍한 두 사람 '팡틴'과 '장 발장'이 서로 만난다.

 

  팡틴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어여쁜 10대 소녀였던 팡틴은 아름다운 금발머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멋진 남자와 달콤한 사랑을 나누며 결혼을 꿈꾸는 평범한 소녀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멋진 남자는 팡틴은 '하룻밤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가 헌신짝처럼 버렸고, 팡틴은 그만 버림 받았다. 비단 팡틴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원작'을 보면 팡틴을 비롯한 다른 소녀들도 똑같이 사내들의 무정함에 버림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팡틴은 달랐다. 이미 그 남자의 아이를 뱃속에 가졌기 때문이다. 졸지에 미혼모가 된 팡틴은 어린 코제트를 데리고 일자리를 얻어 생계를 꾸려가려 했으나 어디에서도 받아주질 않았다. 결국, 팡틴은 테나르디에가 운영하는 여인숙에 소중한 딸을 맡기고 고향으로 돌아가 일자리를 구하게 된다.

 

  한편, 장 발장은 굶주리는 조카를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쳐 달아났다가 도둑으로 잡혀 재판을 받았는데, 형량이 5년이었다. 빵 한 조각을 훔쳤다고 5년 동안 감옥에서 썩어야 한다니 '말도 안 되는 판결'이었다. 더구나 자기 자신을 위해서 벌인 것도 아니고 어린 조카들이 굶어죽을 판이기에 어쩔 수 없이 벌인 죄값이었다. 그래서 장 발장은 탈옥을 결심한다. 허나 탈옥은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고 다시 붙잡히길 반복하니 결국 19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말았다. 그렇게 '가석방'을 받아 자유를 만끽하는 것도 잠시, 범죄자의 신분으로는 일자리는 고사하고, 먹을 것도, 지친 몸을 잠시 뉘일 곳도 얻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떠돌기 일쑤였다. 범죄자라는 낙인이 찍혔으니 지나가던 아이들도 돌을 던져대는 신세가 되자 장 발장은 어느새 분노와 복수라는 마음만 가슴 가득히 품게 되었다.

 

  그러다 겨우 눈을 부친 곳이 성당 문앞이었는데, 그곳에서 만난 '미리엘 주교'가 선뜻 맛있는 빵과 따뜻한 잠자리를 권해주어 실로 오랜만에 장 발장은 '안식'을 맞게 된다. 하지만 이미 가슴 가득히 분노와 복수 등 나쁜 마음을 품은 장 발장은 주교의 호의를 '도둑질'로 갚게 된다. 성당에가 가장 값비싼 '은식기'를 훔쳐 달아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장 발장은 마을을 벗어나기도 전에 헌병에게 붙들려 성당으로 되돌아 오고 만다. 또다시 '죄인' 신분으로 말이다. 하지만 미리엘 주교는 장 발장은 범죄자가 아니라며 두둔했고, 남아 있는 '은촛대'마저 챙겨가라며 손수 가방에 넣어준다. 그리고 "잊지 마시오. 정직한 사람이 되기 위해 이 은식기를 쓰겠다고 약속한 것을"라고 말을 건낸다. 장 발장은 한 적이 없는 약속이라 얼떨떨했지만, 주교는 은은한 미소만 지을 뿐이다. 이제 장 발장은 악이 아니라 선에 속하는 사람이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장 발장은 고뇌에 빠진다. 자신이 정말 다시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이미 절망을 맛본 상태에서 아무도 구원해주지 않는 비정한 사회를 향해서 다시 착한 사람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그렇게 고뇌의 찬 와중에 자신의 발밑으로 굴러온 동전을 본능적(!)으로 감추고 동전을 잃어버린 소년을 향해 꺼지라고 윽박을 지르고 만다. 장 발장은 다시는 나쁜 짓을 짓지 않겠다는 맹세가 얼마나 허망하게 사라질 수 있는지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다시 감옥에 갈 자신의 처지를 생각했다.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을 억울하게 살았다 생각하면서 '동전 한 닢'을 훔치는 자신의 본성이 얼마나 추해졌는지 확인하는 계기가 된 셈이다. 장 발장은 자신은 절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나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뒤늦게 소년을 찾았지만 끝내 찾지 못하고 다시 도망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장 발장은 두 번 다시 '나쁜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굳은 다짐을 한다.

 

  시간이 흘러, 두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된다. 장 발장은 '새로운 기술(구슬제조법)'로 제법 돈을 모았고 공장을 열어 수많은 직공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사장이 되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신임을 얻어 '마들렌 시장님'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팡틴은 마들렌의 공장에 취직해 알뜰히 돈을 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팡틴은 좀처럼 돈을 모을 수 없었다. 하루 빨리 돈을 모아 자신의 딸 코제트를 찾으로 가야 하건만, 여인숙의 주인은 '사기꾼'에 '도둑놈'이었기 때문에 팡틴에게서 돈을 뜯어내 제 몫으로 취하고 코제트는 하녀 취급을 하기 일쑤였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까맣게 몰랐던 팡틴은 테나르디에 내외가 달라는 돈을 넙죽넙죽 갖다바치기 바빴고, 액수는 점점 부풀려져서 끝내 감당하기 힘들어졌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곱상한 팡틴을 두고 질투심에 불타던 동료직원들이 '팡틴의 비밀'을 공개하면서 결국 일자리도 잃게 되었고, 그 뒤로 팡틴은 여자로서 감당할 수 없는 치욕을 참고 견디며 코제트에게 필요하다는 돈을 송금하며 서서히 병들어 갔다.

 

  뒤늦게서야 마들렌(장 발장)은 이 사실을 알고 팡틴을 도우려 했지만, 이미 병든 팡틴의 목숨을 살릴 수는 없었고, 죽어가는 여자의 마지막 부탁인 '코제트'를 구하기 위해 떠나려 하지만 '자베르 경감'에게 정체가 들통나는 바람에 시간이 조금 더 미뤄지게 되었다. 자신을 대신에 억울한 재판을 받고 있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정체'를 당당히 밝히고 감옥에 수감되었기 때문이다. 암튼, 위기에 빠진 선원을 구하고 탈옥 아닌 탈옥을 한 장 발장은 '시장 시절'에 모아둔 돈을 챙겨 코제트를 구하려 떠난다.

 

  우여곡절 끝에 코제트를 구한 장 발장은 '코제트의 아빠'가 되어 세상의 큰 기쁨을 느끼게 되었지만, 자베르 경감의 집요한 추적 때문에 '도망자 신세'가 되었고, 포슐르방의 도움으로 수녀원에 숨어 지낼 수 있게 되었다.

 

  또다시 시간이 흘러, 마리우스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마리우스 퐁메르시는 부유한 외할아버지의 귀여운 손자였지만 '왕당파'인 외할아버지와 '공화파'인 아버지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가난하게 사는 청년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아버지의 아들임을 포기하면 자신의 재산을 상속받아 부유하게 살 수 있다며 말했지만, 마리우스는 조국을 위해 헌신한 아버지의 핏줄임을 자긍심으로 삼았기 때문에 외할아버지의 재산을 받지 않을지언정 아버지를 부정하지 않는 꼿꼿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 마리우스였기에 자연스레 '사회 부조리'에 눈을 떴고, '혁명'을 꿈꾸는 청년들의 모임에 들락거리거렸지만, 한 눈에 사랑에 빠져버린 소녀 때문에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기도 했다. 그 소녀의 이름이 바로 '코제트'였던 것이다.

 

  하지만 '혁명'은 곧 시작될 것이고, '코제트와의 사랑'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왜냐면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경찰이 활동하기 시작했고, 이는 '마리우스'와 '장 발장'에게 위기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 경찰 가운데 자베르도 있었던 것이다. 경찰들은 시위대에 잠임해서 정보를 캐내는 한편, 자베르는 장 발장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추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급박한 상황속에서 '마리우스'와 '코제트'는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장 발장이 자베르의 추격을 피해 영국으로 도망갈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마리우스를 짝사랑하는 에포닌은 마리우스와 코제트의 사랑을 곁에서 지켜보며 사랑의 달콤함 대신 쓰디쓴 고통을 느끼게 된다. 테나르디에의 큰 딸이었던 에포닌은 자신의 아빠가 '코제트의 아빠'의 재산도 노리고 '마리우스의 주머니'도 모두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이 둘을 위기에서 구해내는 것뿐 아니라 끝내 경찰과 시위대의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마리우스를 구해내고 대신 목숨을 잃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제트와 이미 사랑에 빠져버린 마리우스는 에포닌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닥 슬퍼하지 않는다. 아니 슬프고 고맙긴 했지만, 코제트와 헤어질 아픔 때문에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절망에 빠졌었기 때문이다.

 

  끝내, 마리우스는 경찰과 총격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상처를 입고 쓰려져 죽을 위기에 처했지만, 장 발장이 때마침 구해서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그리고 마리우스와 코제트는 결혼을 하게 되었고, 장 발장은 코제트의 행복을 위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홀연히 떠났다. 뒤늦게서야 모든 비밀이 밝혀지고 마리우스는 자신의 목숨을 구한 의인이 바로 장 발장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분을 범죄자 취급한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용서를 구하지만 이미 장 발장의 목숨은 꺼져가는 촛불과 같았다. 그렇게 이야기는 마무리 된다.

 

  어린 독자를 위한 '축약본'이 이미 많이 출간된 상태라서 대강의 줄거리는 이미 잘 알려진 상태다. 여기에 '만화형식'의 한계까지 더하게 되니 줄거리는 더욱 간결하게 표현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이 책만의 장점을 꼽자면, '시대배경'을 (그림으로 직접 보면서)눈으로 직접 확인하며 읽을 수 있기에 어린 독자들의 이해가 더욱 편리했다는 점이다. 또한 등장인물의 '표정'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대화'를 읽어나갈 수 있었기 때문에 '원작의 감동'을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물론, 원작이 주는 감동에 비할 바는 못 된다. 허나 이는 '장편소설'이 주는 위용과 거대한 물줄기를 타는 듯한 큰 감동과 여운에서 비롯된 것일테니, 만화에서 큰 감동을 느낄 수 없었다는 것은 단점이 아니라 꼬투리를 붙잡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오히려 원작의 내용을 알고 있기에 <문학툰>이 주는 감동은 또 새롭다. 그리고 그 새로움은 '새로운 이야기'로 펼쳐져 현대적인 느낌으로 되살리는 촉매가 될 것이고 말이다.

 

  실제로 아이들과 논술수업을 하면서 '프랑스 혁명'과 '6월 항쟁'을 비교하면서 읽어 나갔다. 프랑스 시민들이 꿈꿨던 새로운 세상과 대한민국 시민들이 꿈꿨던 새로운 세상을 분석하면서 말이다. 시대적 아픔이 시민들의 의식을 성장시키기 마련이다. 비록 혁명은 피를 부르고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치룬 다음에야 얻어지는 새 세상이지만, 이미 불쌍하고 비참한 상황에 놓인 수많은 사람들이 꿈꿀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안위'가 아니라 '미래 세대의 행복'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려놓을 '그 순간'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의 희망과 목숨을 맞바꾸면서까지 말이다.

 

  그리고 권력의 속성은 '그들만의 잔치'를 벌이기 위함이니 <동물농장> 속의 돼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감시하고 정책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교양시민으로 성장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도 강조했다. 민주주의는 선거가 끝난 뒤에 넋놓고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던진 '소중한 표'에 무한한 책임을 질 때 바로 설 수 있다고도 했다. 또한 정치인은 100% 사기꾼이고 예비 독재자이니 뽑고 난 뒤에 잘 관리하는 성숙한 시민이 되어야 민주주의가 바로 잡힐 수 있다고도 강조했다. 그래야 우리 모두가 '레 미제라블'이 되지 않을 수 있다면서 말이다. 결코 '그들만의 천국'을 좌시해선 안 된다고 또다시 강조하면서 말이다.

 

  끝으로 <문학툰>을 감상한 뒤에 '원작'을 다시 한 번 읽어보라고 권했다. <문학툰>으로 '원작의 맛'을 보았고, '대작의 감동'을 느낄 준비를 마쳤으니 어렵지 않게 즐길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이 책 <문학툰> 시리즈가 굉장히 훌륭한 점은 뛰어난 '각색'으로 원작의 재미를 놓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수의 '축약본'이 각색을 하고 줄거리를 압축하면서 '원작'과는 사뭇 다른 '또 다른 이야기'를 하는 실수를 저지르곤 하는데, 이번 <문학툰>은 전혀 그런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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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나쁜 뉴스의 나라
조윤호 지음 / 한빛비즈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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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고 싶다. 아직도 우리 나라에 참언론인이 살아 있을 거라고 말이다. 주요 신문들은 '보수 정권의 나팔수'가 되어 버린지 오래고, 지상파 뉴스는 '기계적인 균형'을 맞추느라 나쁜놈을 나쁘다하지 못하고 있으며, 종편 뉴스는 태생부터 '한쪽 편'만을 들며 '뉴스의 가치'를 무색하게 만들어버리고 있다. 그래서 교양있는 시민들은 '종이신문'을 보지 않은 지 오래되었으며, '지상파 뉴스'도, '종편 뉴스'도 점점 보지 않고 있고, 그나마 읽고 보더라도 '믿지 않은' 지 오래 되고 말았다.

 

  대신 '인터넷(포털) 신문'이나 '너튜브 동영상' 따위를 통해서 뉴스를 접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이들은 '언론'이 아닌데도 '언론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마저도 '기레기(기자+쓰레기)'가 낚기 위해 쓴 '허섭스레기' 같은 기사들이 점령하였기 때문에 제대로 정독하지도 않고 대충대충 읽고 보면서 어떤 '댓글'이 달렸는지만 훑어본 뒤, 평가를 내리곤 한다. 왜냐면 애초에 '뉴스의 가치'가 없는 선정적인 사진이 걸린 짤방(짤림방지)용이거나 기사의 내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낚시성 제목'으로 클릭수만 늘리려는 기사들이 '메인'에 올라오기 때문이다. 더구나 '속보'랍시고 올라온 기사들도 정치인 누구누구의 말(인용문)을 그대로 옮긴 '따옴표 기사'가 대부분이라 기자의 주장이나 의견 따위는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기 때문에 읽을 가치가 전혀 없어져 버린 현실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물론, 기자들의 고충도 이해할 점이 없지 않다. '가치 있는 기사'를 쓰기 위해 발로 뛰고 몇 날 며칠을 고민하며 쓴 기사가 '무가치한 낚시글'에 밀려 메인에 오르지도 못하거나, 소신껏 기자의 양심을 걸고 쓴 기사가 '데스크(언론사 국장급 이상)'의 검열(?)에 걸려 기사의 원본이 수정되거나 애초에 올려지지도 않는 등의 억압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난관을 뚫고 무사히 신문에 나오고 뉴스에 한 꼭지를 차지한다고 해도 '시민들의 무관심'이 이런 가치 있는 기사들을 무덤으로 보내고 마는 우리 현실이 더 안타깝기 그지 없다.

 

  어찌보면 총체적 난국이다. 기자는 '기레기'라 욕먹고, 독자들은 '교양없다'며 깎아내리며, 그렇게 우리 언론은 '언론다운 언론'이 되지 못하는 비극이 악순환처럼 되풀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어려움을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딱 하나 있다. 그 방법은 '진실'이 승리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리고 진실은 반드시 승리하기 마련이기에 반드시 헤쳐나갈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건 바로, '교양 시민이 되는 길'이다.

 

  아직도 '가짜뉴스'와 '편향적 뉴스'를 보면서 현혹되는 이들이 많다. 약간의 상식만 있어도 '가짜'임을 알 수 있고, '한쪽으로 치우친' 불공정한 뉴스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는데도 홀라당 속아넘어가는 까닭은 바로 '교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올바른 가치'를 배우길 멈추지 않아야 하는데,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도 이해가 부족한 이들이 '언론의 역할'에 대해서도 무관심할 수밖에 없다.

 

  이를 테면,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이 여야로 갈려 '정책적 대립'을 벌이고,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의 정책에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두고, 언론은 '정쟁'이란 표현을 곧잘 쓴다. 그리고 이런 뉴스를 접한 이들은 한결같은 목소리를 낸다. "국회의원이라고 뽑아 놓았더니 하는 일이라고는 싸움질밖에 없다"고 말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국회(입법기관)는 정부(행정기관)를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니 국회의원이 대통령의 권한과 정책에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국회의원들끼리도 '여야로 갈려 어떤 법을 만드는 것이 나라를 위해 좋은 일이냐'면서 정책토론을 벌이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국민은 '그걸'하라고 뽑아놓은 의원들이다. 그런데도 이를 싸잡아서 '싸움질'이라고만 판단해버리는 국민들은 '교양'이 없는 셈이고, 그렇게 오해하도록 내비두는 '언론'은 쓰레기인 셈이다.

 

  교양 있는 시민이라면 당당히 목소리를 내야 한다. 국회의원의 싸움질(?)을 지켜보면서 '이 정책에 관해선' 누가 더 잘했는지 근거를 내세워 목소리를 내고, 참언론이 되려면 '국회에서 벌어지는 정쟁'에 대해서 교양시민들의 목소리를 적극 반영해 '제대로 된 여론'을 보도하면서 바람직한 정책 방향을 잡아나가려 노력해야 할 것이다. 물론, 제대로 된 국회의원이라면 '언론'이 보도하기에 앞서 시민들의 의견을 적극 수렴해 '입법 활동'을 하는 것이 바람직할테고 말이다.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나쁜 뉴스', '가치 없는 뉴스'가 점점 사라지게 될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독자들의 수준'이 높아져야 하고, '참언론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하면서도, 제왕적인 권력과 거대 언론에 주눅이 들어 있기에 바꾸기 힘든 현실만 탓하고 있다. 그래 가지고 무슨 개혁을 하고, 혁명적인 성과를 이룰 수 있겠느냔 말이다. 통탄할 일이다. 그러면서 '나쁜 뉴스'를 가려낼 스킬(?)만 화려하게 나열하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무릇 '내공'이 받쳐주질 않으면 화려한 스킬은 그저 '관상용(눈요기)'일 뿐이다.

 

  지금 우리 시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스킬'이 아니라 '내공'이란 말이다. 내공을 기르기 위해선 당장이라도 '공부(교양)'를 해야 하고 말이다. 무엇보다도 '인성', '도덕', '책임'과 같은 '선한 윤리의식'이 앞서야 한다. 내 이익을 앞세우기보다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배려심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사회에서 살아야 '사는 맛'을 느낄 수 있지 않겠느냔 말이다. 너나할 것 없이 '부'를 쌓고, '권력'에 다가가기만 하면 '인두껍'을 쓴 악귀처럼 갑질을 부리고, 국민을 개돼지로 만들어버리는 거지같은 사회에서 살고 싶으냔 말이다.

 

  가지나부랭이들이 '쓰레기'같은 기사를 쓰는 것으로도 모자라 돈벌이를 위해 '광고성 기사'를 퍼나르는 양심없는 짓거리를 일삼는 것도 '인성'이 내팽겨쳤기 때문이다. 그 따위 인성이 밥 먹여주는 게 아니라면서 말이다. 그러나 '인성'이 아니고 사람답게 사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 수 있다는 말인가? 언론을 쓰레기로 만들어 놓고 '뉴스'를 믿지 못하게 만들어 놓고, 어떻게 '바르게' 살기를 바라냔 말이다. 권력이 썩지 않게 하기 위해선 '언론'이 바로 서야 한다. 부패한 권력이나 부정한 세력이 '그들만의 잔치'를 벌이지 못하게 막을 유일한 방법도 '바른 언론'밖에 없다. 그런 바른 언론을 만들고자 '교양 시민'도 필요한 것이고 말이다.

 

  정리하면, 바른 언론도 교양 시민도 하루 아침에 만들 수 없는 법이다. 하나씩 하나씩 쌓아나가야 한다. 한 사람이 바른 말을 하면 두 사람이 바른 말을 할 수 있는 분위기만 만들어도 좋다. 중요한 것은 '바른 말'을 가려낼 수 있는 '교양쌓기'가 필요하단 말이다. 이 책에서 '나쁜 뉴스'를 가려내는 스킬을 나열한 것과 마찬가지다. 숲을 제대로 보려면 '전체 숲'을 조망할 수 있는 안목도 중요하고, '나무 하나하나'를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실력도 중요하다. 언론을 제대로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뉴스의 전체 맥락을 파악할 수 있는 '교양시민의 안목'과 뉴스를 세세히 분석할 수 있는 '실력있는 언론인'이 함께 해야 한다.

 

  이 책이 쓰여진 지 6년이 지났는데도 슬픈 현실은 변함이 없다. 아니 언론은 그 역할을 더더욱 못하고 있다. '뉴스의 가치'를 무색하게 만들수록 기뻐하는 세력이 아직도 건재하다는 말이다. 이제 '언론'이 제스스로 바로 서기에는 힘든 상황이 되었다. 이젠 '독자들의 힘'을 보여주어야 할 때다. 당장의 내 이익만 챙기며 살다보면 '더러워진 세상' 때문에 더욱 살기 힘들어지기 마련이다. 내 주위에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잘 살아보기 위해 작은 걸음을 모아야 할 때다. 그 작은 걸음이 모이고 모여서 '큰 걸음'이 되는 세상을 꿈 꿔야 비로소 세상은 바뀌게 된다. '착한 뉴스의 나라'가 되길 바라 본다. 더 나아가 '희망찬 뉴스의 나라'가 되어 전세계가 함께 힘찬 발걸음을 옮겨보길 바란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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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5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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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신이 안배한 운명을 받아들이고 오직 신앙심만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람마다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원동력'은 모두 다를 것이다. 어떤이는 부를 쫓을 것이고, 다른이는 권세를 누리길 바랄 것이며, 대개는 행복한 삶을 꿈꾸며 소박하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에 만족하며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한 여자의 사랑만을 바라며 모든 것을 바친 순정남'이 있다. 바로 개츠비다. 이제부터 그가 왜 '위대한 개츠비'가 되었는지 말하려 한다.

 

  때는 1920년대 미국 뉴욕발 대공황 직전이다. 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전세계, 특히 유럽이 심각한 물자난을 겪고 있었기에 미국은 이에 발맞춰 '세계의 공장'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에서 만든 물건은 전세계로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그렇게 판 물건값으로 또다시 공장을 만들어 물건을 만들었는데도 만드는 족족 팔려나가 경기는 '대호황'이었다. 그렇게 일자리는 넘쳐났고 미국인들의 주머니는 두둑해졌다. 그렇게 주머니가 두둑해지자 사람들은 돈을 감당할 수 없게 되고 돈을 쓸 곳을 찾아 흥청망청 쓰고자 했다.

 

  하지만 집집마다 물건은 넘쳐났기 때문에 새로운 물건을 사는 것으로는 주머니를 탕진할 수 없었다. 그래서 너나할 것 없이 '주식'에 투자하기 시작했는데, 이게 또 대박이었다. 건드리는 사업마다 '대호황'을 누린 미국의 주가는 자고 나면 천정부지로 올랐기에 어제 산 100달러짜리 주식이 아침에는 10000달러로 치솟아 여기저기 '백만장자'가 속출하는 시대가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벼락부자들이 늘어나니 사람들은 날마다 파티가 열린 곳을 찾아다니며 흥청망청 탕진잼을 누리며 살게 되었다. 가난한 사람도 주머니가 빵빵해지는 '경제호황기'를 맞았으니 부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너나할 것 없이 부자들은 연일 파티를 주최하며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기에 바빴다.

 

  하지만 그 많은 파티들 중에서도 최고가 있었으니 바로 '개츠비'가 연 파티였다. 이 파티에는 늘 춤과 음악이 흐르는 것으로도 모자라 술이 강처럼 흘러 사람들의 입속으로 들어갔고, 그렇게 모두들 미친듯한 광란의 파티를 즐기는 와중에 파티의 주인공 개츠비는 정계의 거물들과 만나느라 바쁠 정도로 매일매일 엄청 화려한 파티가 열리곤 했다. 바로 그때 개츠비의 옆집으로 이사온 사람이 있었으니, 닉이다.

 

  닉은 증권사에서 일하는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부자들과도 친분이 많았다. 하긴 졸부들이 많던 시절이라 그닥 새삼스러울 일도 아니지만, 진짜 명문가 출신의 부유한 사람들과 같이 학창시절을 보냈기에 안면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닉은 부자집 친구였던 톰과 그의 아내인 데이지의 초대를 받아 친구집에 방문하였다. 하지만 닉은 부자집인데도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은 친구들의 모습에 의아해하면서 톰과 데이지의 사이가 서먹서먹하다는 것을 눈치챈다. 아니나 다를까 톰은 직장에서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고, 데이지는 그런 톰을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긴 온 도시가 흥청망청 탕진잼의 라이프를 즐기고 있는데 모자랄 것 없이 다 가진 이들이 찾는 것은 '일탈'뿐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술에 쩌들어서 남녀가 엉겨붙으니 불륜이 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을 것이다. 그렇게 톰은 닉과 함께 놀러간 자리에서조차 대놓고 '몰래 숨겨둔 정부'와 불륜을 즐겼고, 닉도 분위기에 휩쓸려 거나하게 취해 몽롱한 상태에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환락의 재미'를 느끼며 황홀한 나락에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개츠비의 초대장'이 도착한다. 매일밤 파티를 열면서도 그 파티에 정식으로 초대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파티 손님들도 그저 무작정 늘 열리는 파티에 그냥 참석했던 것이다. 그런데 닉은 '정식 초대장'을 받았다. 뭐, 이것도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그리고 그곳에서 진짜 환상의 파티를 두 눈으로 확인했고, 바로 그곳에서 '개츠비'를 처음 만났다. 모두가 술에 취해 광란과 관능의 축제를 벌이고 있는 와중에도 홀로 '깨어있는 듯'해 보이는 말쑥한 차림에 고귀한 혈통을 지닌 듯한 묘한 매력을 뿜어내는 개츠비와의 첫 만남은 닉에게 강렬했던 것이다. 그렇게 '대단해' 보이는 친구가 한 눈에 닉을 알아보더니 곧바로 '친한 척' 다가와 자신을 직접 소개했다.

 

  그리고 둘은 언제부터인지 모를 정도로 친해졌으며 부자들만 드나드는 '비밀클럽'에도 같이 출입하곤 했다. 그리고 언제나 개츠비는 닉을 '대단한 친구'라면서 도시의 거물들에게 직접 소개해주곤 했다. 그렇게 닉도 덩달아 '상류사회'에 프리패스를 받은 듯한 기분이 들 즈음 개츠비는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며 닉에게 부탁을 한다. 바로 닉의 친구인 '데이지'와 우연을 가장한 자연스런 만남을 만들어 달라고 말이다. 순간 닉은 의심한다. 개츠비라는 고귀한 사람도 어쩔 수 없이 그렇고 그런 '불륜'을 저지르는 저질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개츠비는 이미 데이지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였고, 심지어 첫사랑이었다고 고백까지 한 것이다. 닉은 생각했다. 또 다른 친구인 톰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어차피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나쁜 친구'였기에 '진짜(?) 친구'인 개츠비를 위해 데이지와 만날 수 있게 주선한 것이었다. 물론,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데이지를 위해서(?)도 개츠비와 만날 수 있게 햊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긴 것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옳았다. 개츠비와 데이지는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던 것이다. 정말 예쁘고 착한 데이지에게 딱 어울리는 남자는 '한 여자밖에 모르는 순정남'이었지, '예쁜 아내를 두고서도 바람을 피우는 불륜남'이 아니었던 것이다. 더구나 오랜만에 만난 개츠비와 데이지는 못다 이룬 사랑을 다시 이룰 것처럼 활활 타올랐다. 물론 정황상 두 사람도 '불륜'이 맞지만, 너무나도 로맨틱하고 순수한 사랑으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인정했을 것이다.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말이다.

 

  사실, 개츠비에겐 남모를 비밀이 있었다. 지금은 남부러울 것 없는 부를 쌓았고, 전쟁에도 참전했던 군인으로 명예로웠으며, 영국 옥스퍼드 대학 출신의 명문가 자제(?) 같은 품위를 보여주었기에 정말 반듯했지만, 데이지와 첫 만남을 가졌던 때에는 '데이지' 곁에 있을 수 없는 절박한 비밀이 있었던 것이다. 바로 '가난뱅이'였던 점이다. 하지만 둘의 첫 만남은 아름다웠고, 둘은 서로 첫 눈에 반해 사랑을 약속했던 것이다. 그러나 부자집 딸이었던 데이지의 부모님 앞에 당당히 나설 수 없는 처지였기에 데이지에게 편지 하나 달랑 남겨놓고 전장터로 떠나버린 것이다. 그후 소식도 끊긴 채 5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그 사이 데이지는 부모님에 의해 돈 많은 톰과 덜컥 결혼식을 올렸던 것이다. 그 사이에 개츠비는 엄청난 부자가 되어 나타날 수 있었지만, 데이지는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개츠비는 가장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영혼'이라도 팔아버릴 각오로 부를 쌓았지만, 결국 놓쳐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개츠비는 포기하지 않았다. 데이지도 자신을 여전히 사랑할 것이라 믿었으며, 개츠비 자신은 절대로 '변치 않는 사랑'이었기에 당당했다. 그래서 데이지가 사는 저택의 '맞은 편'에 으리으리한 집을 짓고 날마다 환한 불빛을 휘황찬란하게 밝히며 파티를 열었던 것이다. 우연일지라도 데이지가 바라볼 것을 바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커다란 강이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개츠비는 언제 어디서라도 볼 수 있을 만큼 환한 빛을 뿜어내며 파티를 열었다. 마치 '등대'를 밝혀 망망대해에서 길을 잃어버린 배가 안심하고 찾아올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 맞다. 개츠비는 데이지의 남편인 톰이 '바람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그렇게 둘이 서로 어긋나서 이혼이라도 하길 바랐던 것이다. 개츠비는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데이지가 사랑하는 남자는 오직 '자신'뿐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우연을 가장해서 '톰의 불륜현장'에 개츠비는 데이지와 함께 찾아갔고, 그 자리에서 개츠비는 데이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자신'이며, 톰을 사랑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고백을 하길 꾸몄다. 개츠비의 시나리오는 완벽했다. 누가 보더라도 바람 핀 남편을 사랑한다고 말할 아내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배신감에 슬픔과 눈물을 쏟아낼 데이지를 품에 안고 사랑한다고 속삭일 만반의 준비를 마친 개츠비는 속된 말로 안달이 났다. 그리고 데이지의 한 마디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하지만 초조한 시간이 지나는데도 데이지는 톰에게 '사랑한 적이 없다'고 말을 하지 않는다. 왜 그랬을까?

 

   바로, 이 대목이 이 소설의 '하일라이트'다. 이른바 '데이지의 선택'인데, 여자들은 '이해'하고, 남자들은 '분노'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여자들은 '그래도 이혼까지는 아니지'라며 공감을 표하지만, 남자들은 '이건 아니잖아'라며 분노를 참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지고지순한 순정남'을 버리고 '불륜 피우는 바람둥이'를 선택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데이지를 어리석다고 비난만 할 수는 없다. '여자의 직감'이랄까? 데이지는 개츠비도 '감추고 있는 비밀'이 있을 거라는 의심을 풀지 않았고, 무엇보다 '나이 든 여자'는 사랑이 전부가 아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데이지는 부모님의 강요에 못이여 '부자집 톰'과 원치 않는 결혼이었지만 식을 치르려 했다.하지만, 결혼식날 찾아온 '개츠비의 편지(5년만 기다려줘, 내 사랑)'를 받고 식장을 박차고 나가려 했지만, 끝내 그러지 못하고 톰과 결혼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보니 부모님의 강요가 썩 나쁘지 않았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한 톰과도 그닥 사이가 나쁘지 않았고, 신혼생활은 꽤 달콤했던 것이다. 그런데 뒤늦게 찾아온 개츠비로 인해 '불 같았던 청춘의 추억'을 되살리며 권태로운 결혼생활에 새로운 활력이 되긴 했지만, '안정적인 가정생활'을 파탄낼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데이지는 '사랑'이 고팠던 것이고, 톰이 불륜을 멈추고 되돌아 와주기만 한다면 부유한 생활을 여전히 누릴 수 있을 것이기에 '개츠비'라는 위험스런 모험을 포기했던 것이다. 이런 '데이지의 선택'을 무작정 나쁘다고만 할 수 있을까? 법적 효력이 살아있는 부부사이인데 말이다. 자고로 '부부싸움은 칼로 물베기'라고 했다.

 

  그렇지만 이런 '데이지의 선택'에 비난을 퍼부을 수 있는 사건이 벌어지고야 만다. 바로 '톰과의 사랑'을 끝낼 수 없는 데이지의 마음을 돌리려 '드라이브'를 떠났고, 자동차가 과속으로 질주를 하는 와중에 교통사고로 '한 여자'의 목숨을 앗아갔기 때문이다. 그 여자는 바로 '톰의 정부'였던 것이다. 한낮에는 분명 톰이 타고 나갔던 차였는데, 사실 '그 차'는 개츠비의 차였던 것이다. 그 여자의 남편은 '톰 사장의 부하직원'이었는데, 자기 아내가 불륜을 피우는 것을 알고 추궁하던 중, 폭력을 휘둘렀고 매맞는 것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워서 마침맞게 '톰이 타고나간 차'가 지나가자 톰이 운전하는줄 알고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차는 과속을 하고 있었고 미처 세우지 못한 사이에 교통사고가 발생했고, 여자는 즉사했던 것이다. 목격자도 수없이 많았지만 '개츠비의 차'는 그대로 뺑소니를 치고 말았다. 그렇게 교통사고의 범인은 '개츠비'가 되고 말았다. 더구나 사고의 책임도 지지 않고 도망치는 '비열한 사람'으로 말이다.

 

  그러나 '사건의 진실'은 달랐다. 그때 차를 몰고 내달렸던 사람은 개츠비가 아니라 '데이지'였다. 사랑했던 남자와는 헤어져야만 했고, 남편은 불륜을 피운 것이 확실했고, 그런데도 자신은 '순정남'이 아니라 '불륜남'을 선택했으니 오죽 착찹했을까. 더구나 지금 데이지 옆에는 '지고지순한 사랑'을 뿜어내는 '잘 생긴 직진남'이다. 이런 남자를 내치고 '바람 피운 남편'을 선택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수록 자동차의 엑셀을 밟아댔고, 결국 '교통사고'를 낸 살인자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런데 그런 진실조차 밝힐 용기가 없는 데이지는 끝내 '개츠비'로부터 멀리 도망가버리고 만다.

 

  개츠비는 그 와중에도 '데이지'가 자신에게 돌아올 거란 확신을 버리지 않는다. 더구나 '데이지'가 저지른 살인죄까지 자신이 감수하지 않았느냐면서 '반드시' 돌아올거란 확신에 차서 데이지의 연락을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완벽하게 뒤집어 씌울 수 있는 사람'을 버리지 않고 선택할 리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개츠비가 데이지의 연락을 기다리는 순간에 톰은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데이지를 데리고 떠나버린다. 데이지도 '자신의 죄'가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해서 개츠비를 버리고 톰을 따라가버린다. 그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마냥 기다리기만 하던 개츠비는 '누군가'의 총에 맞고 죽고 만다. 그 '누군가'는 바로..누굴까? 스포, 다 해놓고 꼴랑 요거 하나 남겨두긴 했지만, 그래도 책을 읽는 마지막 즐거움(?)까지 차마 빼앗을 수 없기에 남겨둔다.

 

  암튼, 개츠비는 죽었다. 하지만 초라한 죽음이었다. 살아서는 모든 이의 숭배를 한 몸에 받던 개츠비였지만, 사랑하는 여인의 죄까지 뒤집어 쓰고나자 사람들은 빠르게 '손절'해버리고 만 것이다. 더구나 개츠비가 그토록 짧은 시간에 엄청난 부를 쌓을 수 있었던 비밀이 두 가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밀주사업을 하던 갱단'과 비밀거래를 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의 경기호황은 '주식' 덕분이라고는 하지만 진짜 알짜배기 부를 쌓은 사람은 '금주법' 덕분에 엄청난 이익을 남길 수 있었던 '밀주사업'을 벌인 갱단(마피아)이었다. 알 카포네는 그 당시 갱단을 이끌던 대명사다. 바로 개츠비가 엄청난 부를 쌓을 수 있었던 비법이 바로 이런 '불법'을 이용한 것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개츠비'를 비난할 수 없다. 사랑을 향해 직진밖에 모르는 남자라는 강렬한 이미지가 모든 죄를 사하여 주기 때문이다. 더구나 불법이라고는 하지만 '술'을 판 것이 전부다. 오늘날에도 '금주법'은 시대적 착오인 악법이라고 평가할 정도다. 오히려 그 법으로 인해 '범죄집단'만 돈을 버는 엉망진창인 법이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런 불법적인 방법일지라도 '순정남'에게 이익이 돌아가서 사랑을 이루기 위해 썼다는 것을 알고 나면 마냥 탓할 수도 없게 되어 버리고 만다. 오히려 비난을 받아 마땅한 사람은 '데이지'다. 사실 데이지도 '희생자'일 수 있지만, 자신의 안위를 위해 '순정남'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고 도망가고 말았으니 스스로 속물임을 증명하고 만 셈이다. 이런 여자를 위해서 사랑밖에 모르던 남자는 모든 것을 감내하고 죽고 말았고 말이다.

 

  이런 개츠비를 '위대하다' 하지 않는다면 뭐라 부를 수 있을까? 오직 사랑만을 위해서 살다 간 개츠비를 어리석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세상에 널리고 널린 게 여자인데, 데이지를 '대신'할만 한 여자를 찾지 못하고 매달리는 순진함 탓할 수 있을까? 이는 마치 '종교인'에게 세상에 믿을 게 없어서 신을 믿어요? 라고 말하거나, '소방관'에게 불속이 얼마나 뜨거운데 거길 뛰어들어요? 라고 말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조국을 사랑해서 목숨 받쳐 외적을 무찌르는 용감한 군인을 보고도 어리석다고 탓할 것인가? 그런 사람들은 '위대하다'고 말하면서. 왜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 물불 안 가리고 직진하는 남자를 위대하다고 말하지 못한단 말인가?

 

  물론, 결과적으로 불륜인 셈이고, 법적으로 보호받는 '남의 부인'에게 직진하는 점은 비판해 마땅하다. 하지만 개츠비에게 데이지는 '첫 사랑'이었고, 원래 자신과 결혼해야 할 '아내'였으며, 평생을 함께 할 '운명적 사랑'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을 안타깝게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분명히 개츠비 자신은 '자격'이 충분했지만, '타이밍'을 놓쳤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데이지'는 자신과 행복하게 살아갈 운명이었는데, 무슨 '운명의 장난'이었는지 개츠비는 사랑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사랑에 '타이밍'은 매우 중요한 선제 조건이다. 한 번 지나간 버스는 탈 수 없는 법이다. 기다리면 '다음 버스'가 오긴 하겠지만, 그 버스는 '다른 버스'일 뿐이다. 하지만 개츠비는 '놓친 버스'를 타려고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다. 심지어 지나간 지 5년도 넘었는데 말이다. 5분도 아니고 말이다.

 

  우리는 사랑에 '직진'하고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개츠비를 향해 씁쓸한 박수를 보낼 것이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찐 사랑'에 진한 낭만을 느끼고 열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랑을 할 수 있기에 한 번, 그런 사랑을 받는다는 설렘에 또 한 번 말이다. 나도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사랑에 직진하고 싶다. 내 사랑이 개츠비보다 더하면 더했지 모자른 것이 없었다고 생각하기에 말이다. 비록 가난했지만 내 사랑도 개츠비 못지 않았다고...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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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 한겨레 옛이야기 22
신동흔 지음, 노을진 그림 / 한겨레아이들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 나라 판소리 여섯마당 가운데 하나인 '춘향가'를 이야기로 묶어낸 '판소리계 소설'이 <춘향전>이다. 원래는 '판소리 열두마당'이라 전해지는데, 대부분 유실되었고 신재효에 의해 판소리 여섯마당이 전해지고 있다. 여섯마당에는 '춘향가'를 비롯해서 '흥부가(박타령)', '수궁가', '심청가', '적벽가', '변강쇠가(가루지기타령)'이 정리되었다. 이 가운데 '가루지기타령'은 너무 야한 내용을 담고 있어 점잖은 소리꾼들은 잘하지 않아 요즘에는 '판소리 다섯마당'으로 정리되고 있기도 하다.

 

  이렇듯 전해지는 <춘향전>은 판소리계 소설 가운데 가장 널리 가장 많이 사랑받고 있다. 특히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로 시작되는 '사랑가'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명곡이며, 완창을 하려면 총 7~8시간 정도가 소요되는데, 이마저도 간략히 추려서 핵심적인 내용만 부를 때 걸리는 시간이며, 완벽한 완창을 한다면 12시간이 넘게 걸린다고 한다. 들리는 소문에는 '판소리 유럽투어'를 떠났을 때, 이탈리아 극장에서 '춘향가 완창'을 요구했다가 된통 혼났다고 전해진다. 사연인 즉슨, 관객들의 매너가 좋기로 자부심이 강한 이탈리아 극장측에서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완창'을 해달라고 요구했고, 12시간 이상이 걸릴 수도 있다고 주의를 주었는데도 끝까지 고집을 하는 바람에 결국 완창을 시작했고, 한 번 시작한 이상 무대를 끝까지 듣고야마는 이탈리아 관중매너 때문에 12시간 동안 관객들이 화장실도 가지 못하고 고문(?)을 받은 끝에 감동의 피날레로 기립박수를 1시간 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는 믿지 못할 후문이 들리기도 했다.

 

  그때 '춘향가'의 가슴 절절한 소리꾼의 '소리조'와 '아니리' 사이의 오묘한 앙상블과 소리꾼의 적절한 '발림'으로 완벽히 알아듣지는 못할지언정 이야기의 맥락과 흐름을 가슴으로 전해들을 수 있었다고 극찬을 했고, 12시간이 넘도록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소리꾼'과 '고수' 단 2명이서 완창을 소화해내는 것을 보고 자국의 오페라 명가수들도 해내지 못하는 무대매너라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실제로 3~4시간짜리 오페라 가수들도 길어야 2~3일간 무대에 오를 뿐이며, '같은 배역'을 2~3명 이상의 배우가 돌아가면서 무대에 오르기 마련인데, 12시간이 넘는 완창을 단 한 명의 소리꾼이 일주일을 공연하는 것을 보며 '신의 경지'에 올랐다면서 놀랍다는 말로도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대단하다는 호평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춘향전>의 매력은 무엇일까? 일단 판소리를 소설로 옮겼기에 그 매력은 '소리'가 전해주는 매력과는 사뭇 다른 '흡인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팔 청춘 꽃다운 나이의 선남선녀가 아우러낸 사랑이야기라는 것이 첫 번째 까닭일 것이고, 두 번째는 기승전결이 딱 들어맞는 흥미진진한 이이갸구성일 것이며, 세 번째는 온갖 인물들이 벌이는 갈등과 억압적인 사회적 모순이 엮어낸 모진 고난을 이겨낸 두 남녀가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결실을 맺는 것으로 해소해버리는 통쾌한 결말을 맺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모름지기 이야기가 '극적인 성공'을 얻어내기 위해선 주인공이 잘 생기고 아름다워야 한다. 더구나 꽃다운 나이 '열여섯'의 두 선남선녀가 맞났으니 혈기왕성한 두 사람이 벌일 일이야 너무나도 뻔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토록 '아름다운 배경'을 깔아놓았으니 이미 반 이상 성공한 셈이다.

 

  그런데 이야기의 구성이 두 남녀를 소개하기도 바쁘게 첫 만남부터 첫 사랑을 나누며 하루가 멀다하고 만나더니 '혼인약조'까지 나눌 정도로 빠르게 진행된다. 그런데 덜컥 제동이 걸린다. 몽룡이 '과거급제'를 위해 서울로 떠나야만 한단다. 남자의 출세길을 막지 않으려면 춘향은 몽룡을 따라가지 않고 남아 몽룡을 기다려야만 하고 말이다. 이렇게 이별의 눈물바다를 만들어놓고서 더욱 눈물을 쏙 뺄 일이 남았다. 춘향이 기생의 딸이라는 이유 때문에 새로 부임한 사또의 수청을 들어야 한단다. 하지만 춘향은 일부종사, 이군불사, 삼종지법을 내세우며 이미 낭군이 있는 몸이니 정절을 지키겠다고 선언한다. 그러자 변사또는 천한 기생 주제에 정절 운운하다니 꽤씸하다며 온갖 매질을 다하고 옥에 가두고 만다. 그렇게 춘향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몽룡이 암행어사가 되어 춘향을 죽을 위기에서 구하고 변사또를 벌하며 온갖 수탈로 억압받던 백성들의 설움을 해소하니 '최고의 절정'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해피엔딩 중에 해피하다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선남선녀가 헤어졌다 다시 만나는 장면과 자신의 목숨을 구한 어사가 실은 그토록 그리던 낭군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장면은 독자들로 하여금 가슴을 절절 끓게 만들다가 한 순간에 둑이 무너지는 것처럼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장면이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말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명장면일 것이다. 그리고 거지꼴을 하고 변사또의 생인잔치에 사또의 부정부패를 낱낱이 밝히는 '칠언율시' 끝에 '암행어사 출두야~'를 외치는 장면은 죽을 위기에 놓인 춘향의 목숨이 다시 살았다는 안도와 함께 탐관오리들에게 온갖 수탈을 당하며 곤궁함을 면치 못한 백성들의 설움이 일순간에 풀림과 동시에, 억울한 사연을 아무리 외쳐도 들을 척도 하지 않던 아전들이 제대로 된통을 맞게 되는 통쾌함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화룡점정의 순간'일 것이다.

 

  이처럼 <춘향전>은 단순한 사랑이야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시 힘들게 살아가는 백성들의 울불을 해소시켜주는 역할을 톡톡히 한 것이다. 그렇기에 <춘향전>은 곱씹어가며 읽어야 할 고전이다. 더구나 천한 기생이 양반들이나 지키던 '정조'를 다하겠다는 서민들의 의식고양은 눈여겨 볼 일이다. 실제로 조선후기에는 일반 평민들도 웬만한 부를 이루며 살 수 있던 시대였다. 그로 인해 '평민들의 삶'은 차츰차츰 수준이 높아지고 있었고, 일부 평민들은 '양반' 못지 않은 의식주를 갖추게 되면서 자신들만의 문화를 형성하였다. 또한 그렇게 부유한 평민들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평민들은 '양반'들보다 더 양반 같은 행세를 했으며, 심지어 양반이 양반 같지 않다며 '비꼼'의 대상으로 만들어 풍자와 해학이라는 새로운 '서민문화'를 만들어냈으니 춘향이 양반흉내를 내고 있다한들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춘향과 몽룡은 '자유연애'를 시도하였다. 양반가의 아들과 천한 기생의 딸이 '혼인약조'를 한다는 것조차 놀라울 판에 부모가 점지해주는 짝이 아닌 자기 자신들 '스스로'가 정한 혼인약조 맺고 정절과 수절을 지키려 애쓰는데 아무도 놀라지 않고 있다. 마치 '그런 것'이 당연한 일인냥 말이다. <춘향전>은 시대를 뛰어넘는 초월적인 면모를 갖췄다 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네 고전소설 속에서 으레 찾던 '시대적 한계'를 찾는 것보다 이런 선구적인 면모를 찾아내는 것이 더 의미 있다 할 것이다. '남자의 발목을 잡는 여인'이라느니 '여성의 해방이 아닌 한 남자의 아내로 만족한다'느니 하릴없이 부정적인 시각으로 깎아내리는데 급급한 평론 따위는 개나 줘버렸으면 좋겠다. 비단 <춘향전>뿐이 아니다. 교과서에 실린 '우리 고전'은 죄다 '시대적 한계점'을 시험에 출제하며 달달 외우게 만든다. 외국소설을 보면서 '단점'을 꼽아보라고 시험문제를 내지 않으면서 말이다. 앞선 서양문물에 비해 뒤처진 우리네 전근대적인 낡은 사상을 직시하라던 '식민사관'과 다를 바가 없다. 하긴 해방 이후에도 교육계에도 상당기간 '친일적폐'들이 윗자리를 선점하였더랬으니 놀랄 일도 아니긴 하다. 암튼, 이제라도 '전근대적인 낡은 비판'은 집어치웠으면 좋겠다.

 

  이제 '우리 고전'은 다시금 조명해야만 한다. <춘향전>은 종종 <로미오와 줄리엣>에 비교되곤 하지만, 복수심에 불타는 두 가문 때문에 죽어야만 하는 젊은 두 남녀 이야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작품이라고 평가되어 마땅할 것이다. <춘향전>에서는 젊은 두 남녀의 사랑을 가로 막는 것이 '사회적인 병폐 현상'이었고, 두 남녀가 끝내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되면서 '사회적 문제'도 아울러 해결해버리는 뜻깊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가방끈 긴 평론가들은 '희극(해피엔딩)'보다 '비극(새드엔딩)'이 카타르시스를 더 진하게 느끼게 해주기 때문에 값어치가 높다고들 하지만, 난 달리 생각한다. 이 세상에 '해피엔딩'보다 값어치 높은 것은 없다고 말이다. '죽느냐 사느냐 고것이 문제로다'라면서 고뇌에 쩌들기보다 '암행어사 출두야'를 외치며 십년 묵은 체증이 쭉 내려가는 듯한 통쾌함이 더 짜릿하지 않느냔 말이다. 우리네 고전이 더 맛깔 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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