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배우는 요리의 역사 - 선사시대 불의 요리부터 오늘날 비건까지, 요리의 위대한 진화 한빛비즈 교양툰 20
브누아 시마 지음, 스테판 두에 그림, 김모 옮김 / 한빛비즈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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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쳇말로 역사는 '승자가 남긴 기록'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패자는 말이 없는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기록'은 승자, 패자, 양쪽 모두 남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역사는 '승자의 기록'만 유독 남기는 것일까? 두 가지를 추론해볼 수 있다. 하나는 '두 기록'이 서로 저울질을 하다 '승자'쪽의 입김이 점점 쎄지면서 승자의 기록만이 옳은 것이라 여겨지게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승자가 '고의'로 패자의 기록을 삭제하고 승자의 기록만 남는 것일게다. 물론, 대부분의 역사는 '후자'쪽의 방법으로 선택(?)되어 질 것이고 말이다. 그렇기에 후대의 역사가들은 기본적인 '사료'만을 곧이 곧대로 믿고 아무런 비판의식도 없이 써내려가는 것을 경계해야만 한다. 이는 독자도 마찬가지다. 책 속에 적힌 '모든 것'이 모두 진리일 거라는 맹신은 절대 금물이다. 우리가 '비판적 읽기'를 실천해야 하는 까닭이기도 하고 말이다.

 

  한편, <요리의 역사>라는 제목만으로도 책의 내용을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오늘날까지 '요리'로 유명한 나라는 손으로 꼽힐 정도이고, 그런 나라 중에서도 '역사'를 운운할 정도의 나라는 '프랑스'와 '중국' 두 나라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양작가의 책이라면...이 책의 내용이 '프랑스 미식가'의 내용이 주로 담길 거라는 짐작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읽어보니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 꼭 필요한 세 가지인 '의식주의 차원'에서 '요리'를 다루고 있었고, 말그대로 선사시대의 요리부터 오늘날 먹거리 문제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인 접근을 하고 있어서 참신했다. 그럼에도 책내용 곳곳에 '프랑스 궁중예법과 요리'를 소개하는 장이 꽤나 자세하게 나오며 오늘날 '고급요리의 대명사'는 서양(프랑스)에서 비롯되었다는 자부심이 은연중에 깔려 있는 것을 보면서 살짝 아쉬웠고, 그밖의 유럽 이외의 나라들의 요리를 소개할 때는 '위키백과사전'의 내용을 팩트체크도 하지 않고 올린 듯한 '설명식 나열'에 그쳐서 안타까웠다.

 

  하지만 '요리' 하나에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담겨 있어서 그것들을 엿볼 수 있는 것이 새삼 즐거움을 선사했다. 로마 공화정시절의 검소한 식문화가 제정시대로 접어들면서 '사치의 향연'이 되어 부와 권세를 자랑하는데 잔치(음식)를 빼놓을 수 없게 된 사연이나, 중세 유럽에서는 '하늘의 음식'과 '땅 위 음식', 그리고 '땅 속 음식'으로 나뉘어 신분에 따라서 먹을 수 있는 '음식재료'가 정해져 있었다는 사실도 놀라웠고, 식탁위에서 포크를 사용하면 편리했을텐데도 포크를 사용하던 공주가 결혼을 한 지 얼마 뒤에 흑사병으로 죽자 불경스런 도구(사탄이 쓸 법한 도구)로 알려져서 오래도록 쓰지 않고 손으로 음식을 먹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요리'를 역사적인 관점으로 살펴보면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인류는 오랫동안 먹고 사는 것이 힘들었기에 불과 100년 전만해도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다 먹는 것이 미덕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먹거리가 너무나도 풍요로워져서 오히려 '다이어트'를 해서 수명을 연장하려고 한다. 쉽게 말해, 과거에는 너무 못먹어서 죽었다면, 현대에는 너무 많이 먹어서 죽는 진풍경(?)이 펼쳐지게 된 것이다. 그에 따라 인류는 '건강음식'을 찾게 되었고, 더 나아가 '비건(채식주의자) 음식'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특히, 현대인들은 '정크(쓰레기)푸드'를 너무 많이 먹기 때문에 수명이 늘어났지만 제대로 관리를 하지 못해 고통스런 질병에 시달리고 '건강한 노후생활'을 지속할 수 없게 되는 비극을 연출하고 있기 때문에 '건강한 음식'에 대한 관심은 나날이 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과연 미래의 음식과 요리는 어떤 식으로 바뀌게 될까? 당연한 말이지만 '지금과 같은' 풍요로운 식단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기후변화는 이미 시작되었고, 세계인구는 80억 명을 넘겼으며, 곧이어 찾아올 빙하기는 인류의 식단은 물론이려니와 요리법까지 싹 다 갈아치우게 만들 것이다. 운이 좋아 '빙하기의 도래'를 훨씬 더 늦추거나 '빙결상태'에 빠진 지구를 무사히(?) 탈출해서 '제2의 지구'로 찾아 떠나는 등등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해본다면, 반드시 '요리법' 또한 빼놓지 않고 해야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 미래라고 해도 인간이라면 반드시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뭐, 모든 인류가 '안드로이드화' 되어 전기충전만 해주면 그만이라든가, '식물화'가 되어 광합성만으로도 먹거리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아무쪼록 먹거리에 관한 한 '인류역사상 최고의 풍요'를 누리는 현대에 살면서 <요리의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가져줘야만 할 것이다. 이 책이 살짝 아쉽게도 '한국의 음식'을 전혀 소개하지 않고 있고 있지만, 21세기엔 '한류의 바람'이 '한식'에까지 불어닥칠 것이 분명하다.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는 것 뿐만 아니라, 세계인의 건강까지 탄탄히 보장해줄 '요리법'이 한식에도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 '비법'을 정갈하게 포장해서 세계에 알리는 일만 남았다. 믿지 못하겠다고? 요리의 천국으로 불리는 '중국'이 자국에서 난 요리로 만족하지 못하고 '한국'에서 맛나다고 소문난 '모든 것'을 자기네가 원조라고 박박 우기는 일을 왜 하겠냔 말이다. 뒤늦은 '원조논쟁'까지 벌이며 '김치'를 비롯해서 한국의 음식, 한국의 문화, 심지어 '한국인'조차 중국인이라고 사기(?)를 치고도 부끄러운줄 모르는 중국을 볼작시면 10~20년 뒤엔 '한국의 요리와 음식'이 전세계를 제패할 것이 분명하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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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시계의 교양 - 내 손목에 있는 반려도구의 인문학
시노다 데쓰오 지음, 류두진 옮김 / 한빛비즈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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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명품을 즐겨하지 않는다. 명품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 몸에 두르고 있는 물건'이 값진 것보다 '나 자신'이 값진 것이 더욱 가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내 겉모습은 비록 못 생기고 후줄근해 보일지라도 나와 몇 마디 말을 섞어본 이들은 '나의 뛰어난 가치'에 놀라 깜짝 놀라기도 한다. 이런 나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늘 손에서 놓지 않는 한 권의 책'을 보고 유추하는 것이다. 늘 손에 들고 있는 책이 일주일 동안 서너 번씩 바뀌는 모습을 눈여겨 본다면 나의 교양이 얼마나 차고 넘치는지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나 어릴 적만해도 한 번에 한두 명씩은 꼭 도서관에 파묻히다시피 살아가는 '문학소년'과 '문학소녀' 들이 있곤 했다. 내가 그 당시에 이처럼 책을 파고 들었더라면 그 친구들과 일찌감치 '지음(知音)'이 되어주었을 것을 안타깝게도 나는 서른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책을 즐겨 읽기 시작했고, 뒤늦게 교양을 쌓기 시작했다. 그렇게 10년간이나 책을 읽기만 했더니 마흔 살 즈음에야 겨우 글을 술술 쓸 수 있게 되었다. 말인즉슨, 무엇이라도 술술 풀어낼 수 있게 되기 위해서 이토록 오랜 시간이 쌓이고 또 쌓여야 한다는 말이다.

 

  이 책, <손목시계의 교양>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명품시계'를 낱낱이 분석해낸 책이다. 다시 말해, 명품이 왜 명품일 수 있는지 그 소상한 내력을 풀어내었단 말이다. 그래서 명품시계를 좋아라하는 분들이 읽으면 참 좋을 책일 수도 있겠으나 명품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독자들이 읽어도 좋을 책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쏙쏙 감춰진 책이기도 하다. 그것들은 교양이 없으면 절대로 보이지 않는 고급정보들이기도 하다.

 

  우리는 흔히 '명품시계의 가치'는 비싼 값으로만 따지곤 한다. 적게는 몇 십만 원에서 많게는 수백 억에 이르는 다양한 명품의 세계를 알아볼 수 있다면 소매끝에 슬쩍 보이는 시계만으로 그 사람의 부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명품'도 세월의 풍파를 직격으로 맞으면 부서지고 망가질 수 있기에 '고침(수선)'의 과정을 거치기 마련인데, 10억 원에 상당하는 명품시계의 순정부품 가격만해도 몇 천만 원이 훌쩍 넘으며, 거기에 전문가의 '수리비'까지 청구가 되면 '유지비'만 수 억 원씩 들기 마련이라 웬만큼 부를 쌓지 못했으면 감히 손목에 두르고 외출할 용기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허나 '명품시계의 가치'가 고작 가격만으로 평가된다면 명품이랄 수 있을까? '다이얼'에 수놓인 화려한 보석과 복잡한 '무브먼트'가 정교하게 맞물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정확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조그맣고 얇은 '케이스' 속에 감춰져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선수(?)들 사이에서는 짜릿한 전율까지 느낄 수 있어야 명품이랄 수 있을 것이다. 이게 뭔소린고 하니, 값싼 전자시계와 최고급 명품시계의 차이는 단지 '겉모습'에만 있지 않다는 얘기다. 보통 유리덮개 아래로 보이는 '화려함'만으로 그 차이가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대개 금속으로 이루어진 '뒷덮개'를 열어서 볼 수 있는 '복잡하지만 정교한 부품'들이 그 차이를 명확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실제로 값싼 제품일수록 뒷덮개를 열었을 때 '단순함'을 한 눈에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명품시계'라면 확실히 다르다. 적게는 수십 개에서 많게는 백여 개가 넘는 톱니바퀴 따위의 '부품(파츠)'들이 그 복잡함과 정교함을 자랑하며 일주일이란 시간이 흘러도 아주 근소한 오차만을 보여주어야 비로소 '명품시계'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다. 이런 복잡한 '무브먼트'와 정교하고 정확한 '시간'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두께'도 두꺼워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명품시계'는 그 두꺼움조차 허용하지 않고 '최대한 얇게' 도전하고 있다. 이때 얇으면 얇을수록 슈트 안쪽에 쏘옥하고 자연스럽게 감출 수 있기에 '패션'에 민감한 명품애호가들 사이에서 더욱 각광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교하고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명품의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비결인 것이다.

 

  정교함에 대해서 말이 나왔으니, 손목시계에 '시각' 뿐만 아니라 '달력'까지 담아내는 완벽함을 추구하는 것도 '명품의 가치'에 포함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레고리우스력'은 4년마다 '윤년'이라 2월에 하루를 보태 29일까지 표기하곤 한다. 그런데 명품시계는 그런 4년마다 찾아오는 '이벤트'까지 특별한 조작 없이도 정확히 표기한단다. 보통 '윤년'은 4로 나누어 떨어지는 해에 하루를 더해 366일로 치는데, 4로 나누어 떨어지는 해일지라도 100으로 나누어 떨어지는 해는 평년으로 쳐서 365일로 친다. 그러나 100으로 나누어 떨어지는 해라도 400으로 나누어 떨어지는 해는 다시 윤년으로 치는 복잡한 셈법을 톱니바퀴에 오롯이 담아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고 정확히 표시하겠다는 시계장인의 열정과 수고가 담겨 있어야 비로소 '명품의 가치'가 돋보인다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정확한 시각'을 나타낼 수 있는 시계가 필요하게 되었을까? 그건 시대와 나라의 사정마다 서로 다른 이유가 있었지만, 대표적인 이유로는 '하늘의 변화'를 시간으로 표현하였기에 저마다 '하늘의 자손'이라 일컫던 왕실에서는 '천문의 변화' 또한 정확히 관장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테면, 해와 달이 가려지는 일식과 월식의 '정확한 예측'이 왕실의 존폐를 정할 정도로 중요시되었기에 '정확한 시계'가 필요했던 셈이다. 또 하나는 '대항해시대'를 열어야 했던 유럽의 각국에서는 망망대해에서도 길을 잃지 않고 정확한 목표지점까지 항해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는데, 그때 항해에 참고했던 것이 하늘에 떠 있는 천체인 '해, 달, 별'이었다. 즉, 해와 달, 별이 떠있다면 자신이 타고 있는 배가 지구의 어디쯤을 항해하고 있는지 정확한 '위도와 경도'를 셈할 수 있어서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었지만, 망망대해에서 아무런 육지나 섬도 보이지 않는데, 날씨까지 흐려서 '천체'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때, 길을 잃고 헤매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위도'는 잠시잠깐이라도 해나 별자리를 보는 것으로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었으나, '경도'는 도무지 알 도리가 없었던 셈이다. 이때 '정확한 시간'을 알면 항구에서 출발한 지 '얼마나' 지난 것인지 셈할 수 있게 되어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었기에 '정교한 시계'를 서로 만들기 위해 각축을 벌였다고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시계들이 '명품시계'의 원조격이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으니 '손목시계'는 겨우 시계일 뿐이 아니라 그 안에 '우리가 한 눈에 알아보기 힘든 숨은 가치'를 품고 있게 된다. 여기에 '기술력'까지 헤아릴 수 있게 된다면 '시계에 담겨진 교양'도 한층 더 깊이 쌓을 수 있게 된다. 흔히 '방수시계'라고 표현하지만 실제로 손목시계를 차고 수심 100미터, 200미터를 잠수하는 이들이 차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방수기능'은 왜 필요한 걸까? 그건 '정교한 부품'이 물로 인해서 망가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뿜어낸 기술력인 셈이다. 아닌 게 아니라, 명품시계 고장의 원인 1순위는 '빗물'과 '땀'이 시계안으로 스며들어서 망가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목시계에는 수심 몇 백미터의 압력에도 끄떡없는 '방수기능'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방수기능'보다 '자성'에 특출한 내구성을 띤 명품이 등장하고 있단다. 왜냐면 우리가 쓰는 일상용품에 '자석'이 달린 것이 너무나 많고 '자기장'을 뿜어내는 전자기기들도 너무나 많기 때문에 '정교한 시각'을 나타내야 하는 복잡한 무브먼트가 쉬이 '자성'을 띠면서 망가지기 때문에 '명품의 가치'에 흠집을 내곤 한단다. 이렇게 '명품시계'는 망가지기도 쉬우므로 쉽게 망가지지 않는 튼튼함(?)까지 돋보여야만 하게 되었다.

 

  또한, 방수기능을 위해 '금속케이스'가 많이 쓰이는데, 대표적인 금속이 '스테인리스'다. 하지만 요즘엔 보다 튼튼함을 보완하기 위해 '텅스텐'을 쓰기도 하고, '골드'를 쓰기도 하는데, 텅스텐은 조금만 연마를 하려해도 불꽃을 튀기며 폭발하기 때문에 매끈하게 거울처럼 광을 내기 위해선 스치듯 한 번 연마한 뒤에 충분히 식혀주는 과정을 반복해야 하기 때문에 작업속도가 더딜 수밖에 없다. 또한, 순수한 골드는 너무 무르기 때문에 '다른 금속'과 섞어서 쓰곤 하는데, 여기에도 섞는 비율에 따라 '광채'가 사뭇 달라지기 때문에 '옐로골드'와 '레드골드'로 나뉘고, 또 다른 금속을 적절히 섞는 비결로 '색다른 빛깔의 골드'를 만들 수 있기에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다고 한다. 물론, 그 비법은 비밀에 부치고 말이다.

 

  어떤가? 고작 손목시계에 담겨진 교양이 참으로 다채롭지 않은가. 물론 몰라도 그만, 알아도 그만인 '정보'들이다. 한편, 시계의 본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쓸데없는 정보'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의 참 진리는 '교양'과 맞물려 있다. 교양은 아무런 지식이나 많이 쌓는다고 높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한 교양은 '가치'를 높일 때 비로소 드높아지는 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한 교양은 구중궁궐의 담벼락만큼 높게 쌓아올린다고 빛나지 않는다. 그토록 높게 쌓아올린 담벼락을 채우고 넘쳐흐를 때 비로소 찬란하게 빛나기 때문이다. 고작 손목시계 따위가 '명품의 반열'에 오른 까닭도 마찬가지다. 그 작은 손목시계에 인류가 쌓아올린 '교양의 가치'를 담뿍 담아내고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게 만들었기에 비로소 '명품시계'가 탄생한 것이다. 그러니 단순히 값비싼 물건을 명품이라 부를 게 아니라 '교양의 가치'를 높인 물건에 '명품'이란 이름을 붙여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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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배우는 불멸의 역사 - 연금술사에서 사이보그까지, 인류는 어떻게 불멸에 도전하는가 한빛비즈 교양툰 19
브누아 시마 지음, 필리프 베르코비치 그림, 김모 옮김, 홍성욱 감수 / 한빛비즈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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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 인간은 영생을 꿈꾸는가? 먼 옛날부터 인류는 '불로장생'을 꿈꿨다고 하고, 오래도록 '젊음'을 유지하길 바라며 '노화'하고, '고통'받으며, '죽음'에 이르는 걸 극도로 싫어한 것은 같다. 하지만 정말로 인간이라면 모두가 '불멸의 존재'가 되길 바라는 걸까?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의아스런 대목이다. 반백살이 다 되어가는 나는 벌써 '사는 것'이 지겹기 때문이다. 물론, 노화로 인해 몸의 이곳저곳이 삐그덕거리기 시작하니 드는 생각일 수도 있다. 만약, 내 건강이 아직도 20대만큼이나 팔팔하고 고통을 모르는 혈기왕성한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더라면 생각이 달라졌을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는 것'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 이상 점점 재미없어진다는 사실이다. 늘 같은 일을 하고 비슷한 일상을 보내며 만나는 사람마다 '살기 힘들다'는 얘기만 듣다보면 어느새 '사는 것'에 큰 매력을 느끼기보다 하루하루가 힘에 부치고 버겁다는 느낌만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과연 인간은 영생을 누리길 바라는 걸까? 회의적인 생각이 들곤 한다.

 

  하지만 '과학기술의 발전'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필멸의 존재인 인간이 '불멸의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자꾸 전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냉동인간' 기술은 '젊음'을 유지한 상태로 미래를 맞이할 수 있다고 하며, '인공지능' 기술은 모든 '기억'을 컴퓨터에 저장해두어 육체만 업그레이드(?)하면서 영생을 누릴 수 있다고도 말한다. 아니, 어쩌면 '노화'를 멈추거나 '죽음'을 거부할 수 있는 '유전공학적 기술'이 첨단으로 발달한 미래에는 '늙음'이라는 단어가 사라질 수도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과학자들도 있을 정도다. 물론 과거에는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일축해버렸을 법한 말이지만, 현대과학기술은 '가능성'을 예고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불멸의 존재'가 가능해진다면, 인간은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불멸의 존재'가 될 수 있는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들 것으로 예상하며 일부 소수의 '부유한 계층만의 특권'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인류의 역사가 늘 그랬듯이 초기에는 '소수의 특권'이었다가도 머지 않아 '대중화'가 이루어지면서 '선택의 문제'로 떠오르기 마련이었으므로 '불멸' 또한, 선택의 문제가 될 가능성은 매우 높다. 더구나 '인간사회'는 언제나 무리와 집단을 이루며 '다수의 구성원'으로 살아갔지 '선별된 소수 집단'만이 생존하는 사회는 얼마가지 않아 소멸하고 만다는 섭리를 굳이 따르고 싶지 않다면, 결국엔 '불멸' 또한, 선택의 문제로 부각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불멸을 택할 사람이 많아질 것인가?

 

  적어도 나는 '필멸'로 남고 싶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인간은 '육체'와 '정신'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도 병들고 다친 '신체'를 일부 '기계'로 대신하거나 '이식'을 통해서 생명을 연장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신체 일부'일 뿐이고, 우리 몸의 전부를 '기계'로 대체하거나 '컴퓨터 정보'로 대체되어 살아간다면...그건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책에서 말하는 '트랜스휴머니즘'은 미래인간의 모습을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로 그려낼 뿐, 현존하는 인류의 모습 그대로 '영생'을 누리는 과학기술은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계로 대체되고, 정보로 대체되고, 그저 '0'과 '1'이라는 이진수로 표현되는 나노급 '데이타'로 쪼개졌다 다시 뭉뚱그려놓을 수 있다는 '가능성'만 그려내고 있다. 만약, 그게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인공지능'과 다를 것이 무엇이냔 말이다. 심지어 '인공지능의 능력'이 인간을 뛰어넘게 된다면, 그런 변화에 적응하고 살아남은 '미래인간'은 무어란 말인가?

 

  이를 테면, 미래에는 무한할 정도로 광활한 우주여행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예언하고 있다. 필멸의 육체를 벗어던지고 '트랜스휴머니즘'으로 인간의 지능을 탑재한 신인류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합니다. 마치 유체이탈을 한 인간의 영혼이 '육체의 한계'를 벗어던지고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과연 인공지능처럼 변모한 '트랜스휴먼'이 새로운 인간이 될 수 있는걸까?

 

  사실, 이런 발상은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한 종파인 '그노시스파'에서 불완전한 육체와 성스러운 영혼을 분리함으로써 불멸할 수 있다고 얘기했다고 한다. 물론 널리 인정받지 못하고 '이단'으로 박해를 받고 말았다. 하지만 '불멸의 전설'은 이뿐만이 아니고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 전설'이나 고대 중국 '진시황의 불로장생', 고대 인도의 '영생을 약속한 음료, 소마' 등과 같이 다양한 버전으로 전해져오고 있다. 그리고 이런 전설은 '연금술사'에 의해 더욱 갈고 닦여져서 '현자의 돌'로 재탄생되었고,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기계장치'로 살아 움직이는 장면을 구현하면서, 드디어 신만이 창조할 수 있었던 '생명의 비밀'을 인간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믿음은 소설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표현되었고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처럼 신이 아닌 인간이 창조한 생명체에 대한 이야기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과학자들은 '인간의 몸'이 한낱 '기계장치'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고, 인간의 경우 좀더 '복잡하다'는 것만 빼면 인간도 얼마든지 신과 같은 '생명창조'를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실제로 '유전자의 비밀'이 하나둘 밝혀지면서 '동물복제'에 성공사례가 점점 늘었으며, 인간의 두뇌를 대신할 '스스로 생각하는 기계장치', 즉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인공지능'도 더는 꿈이 아닌 현실이 되고 말았다. 이로써 인간은 못할 것이 없는 존재로 거듭나게 되었다. 신의 영역이라고만 여겼던 '생명창조'까지 과학으로 해결하게 되니 말이다.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게 되는 것이 '과학의 종교화'다. 이제까지 '과학의 영역'으로 불렸던 분야들이 종교에서 말하는 '신념'과 맞물리면서 과학이면서 동시에 종교가 되어 '종교집단의 맹목적인 신앙'으로 변질된 느낌을 지울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들은 전세계의 부유한 셀럽들과 연결되면서 점점 공신력을 갖게 되었고, 더 많은 추종자들이 생기면서 거대한 트랜드를 이끌고 있기도 하다. 심지어 구글과 애플을 비롯한 '실리콘벨리'의 거대기업들이 앞장서 후원하기에 이르렀고, 일론 머스크나 마크 주크버거 들도 '트랜스휴머니즘'에 거액을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처럼 평범한 자선사업에만 후원하는 부자들도 많지만 말이다.

 

  암튼, 이제는 '트랜스휴머니즘'은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미래첨단과학을 이끄는지경에 이르렀다. 일찍이 스티븐 호킹 박사는 '인공지능은 위험하다'면서 강력한 경고를 했다. 핵전쟁보다 더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을 거라면서 말이다. 심지어 '인류의 멸종'은 인공지능 때문에 일어나게 될 거라고도 했다. 하긴 멸종이라는 것이 자연적인 도태 뿐만 아니라 인간 스스로 육체를 버리고 '기계의 몸'으로 갈아입는 것으로도 이룰 수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때가 도래한 뒤에도 '인간적'이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새로운 인류'의 등장에 대해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은 중립을 지켰다. 그래서 읽는 사람의 생각에 따라서 호의적으로도 읽히고, 비판적으로도 읽힐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난 '암울하게' 읽었다. 불멸의 존재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하더라도 난 '그 길'로 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 길로 들어선 순간부터 더는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없으리라는 판단이 섰다. 내 몸안에 '딸깍'이는 소리를 내는 기계장치가 들어간다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한데, 온몸을 기계로 대체하거나 컴퓨터 '네트워크' 속을 헤매는 신세가 되거나 나의 후손이 '시험관'속에서 배양되어 완벽한 유전자만을 가진 채 태어나게 된다면...고통없이 영생을 누리게 되더라도 그다지 기쁠 것 같지가 않다. 어찌보면 '죽음'이라는 그림자가 있기에 '삶'이라는 밝은 빛이 더욱 돋보이는 법인데, 부정적인 것을 싹 제거한 채 온갖 좋은 것만 '탑재'하고 살아가는 삶이 좋을 턱이 있을까?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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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 뭔가 뜻대로 이루기가 힘든가 보다.

이번 달에도 '아버지 치매 판정' 등 다양한 일들이 벌어지면서

목표한 만큼 책읽고 리뷰쓰기가 원만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내일의 태양은 뜨듯이

읽어야 할 책은 읽고 써야 할 리뷰는 쓸 것이다.

세상사 세옹지마요, 고진감래라 했으니

기쁜 일이 있으면 슬픈 일이 뒤따르고

고된 날이 지나면 좋은 날이 찾아올 거라 믿는다.


나이가 드니 그런 경험도 해본 듯 해서

믿어 의심치는 않는다.


10월에 못 읽은 책은 11월에 다시 도전한다.

꾸준히 읽을 책 '한빛비즈'와 '인간사랑' 책이고,

굽시니스트의 <본격 한중일 세계사>와 박시백의 <고려사>

그리고 <서울대선정 인문고전 60선>을 차례대로 섭렵해나갈 것이다.

그리고 '관심도서'도 틈틈이 읽고,

'세계명작소설'도 새롭게 정리하면서 '문학적 안목'을 키워나갈 것이다.


남은 두 달..150권을 찍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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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지음, 오숙은 옮김 / 미래사 / 2002년 8월
평점 :
절판


  어릴 적에 읽었어야 마땅할 책인데 반백살이 되어가는 지금에야 뒤늦게 '문학책 읽기'에 빠져서 허겁지겁 닥치는대로 읽고 있는 중이다. 이 책도 그렇게 책꽂이 속에 푹 파묻혀 있다가 뒤늦게 내 손에 집힌 책인데 무려 20년이나 지난 책이다. 하긴 소설이 200여년 전에 쓰였는데, 고작 20년 지난 책을 읽는 것이 무슨 대수겠냐는 생각도 들지만 '분명히' 다른 점이 있긴 하다. 세월의 변화를 단박에 알아챌 수는 없지만, '뒤침(번역)'에도 유행이랄지 트랜드랄지..뭐, 그런 것들이 있는 것인지 책마다 사뭇 다른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 '뒤친이(번역가)'의 역량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그들'도 유행에 민감할진데 뒤칠 당시에 알게 모르게 유행하던 말투가 고스란히 담긴 듯한 느낌이 들곤 한다. '오래된 책'들을 읽을 때마다 말이다.

 

  그게 그렇게 큰 차이가 있을까 싶지만, 요즘 아이들과 함께 '문학책'으로 논술 수업을 하다보니 그런 차이가 부쩍 눈에 띄곤 한다. 그래서 왜 그런 차이가 나나 싶어서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애들 책(새책)'과 '샘 책(낡은책)'의 내용이 조금씩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뒤친 책의 '원본'이 서로 달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테면, 영국소설인 이 책의 원본이 '원작자'인 메리 셀리가 직접 쓴 것일 수도 있지만, 워낙 유명한 책인 탓에 '미국말로 뒤쳐진 책'을 원본으로 삼아 다시 '우리말'로 뒤쳐진 경우도 허다할 것이다. 더욱 복잡한 경우는 '어린이를 위한 축약된 책'인 경우인데, 이 경우엔 뒤침이에 의해 '각색'까지 더해져서 원작의 내용과 사뭇 다른책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만약, 여러 버전의 뒤침책을 '동시다발'적으로 읽지 않았다면 그런 차이를 모르고 지났을 것인데, 뒤늦게 이런 경험을 하다보니 왜 그토록  '같은 원작의 소설'이 다양한 출판사와 여러 뒤침이에 의해 출간되고 뒤쳐지는지 새삼 알게 되었다. 암튼, 책마다 '맛'이 색다르다는 점을 알게 되었으니, '깜냥'이 될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맛'을 최대한 살려서 몇 자 적어보려 한다. 맛이 다르면 '느낌'도 달라지는 법이니 말이다.

 

  이 책은 '공포소설'이다. 하지만 막상 읽어보면 '공포'라는 느낌은 그닥 들지 않곤 한다. 왜냐면 익히 알고 있는 '괴물'의 등장이 상당히 후반부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요즘 트랜드에는 초반부에 등장해도 시원찮은 공포감이 들기 때문에 '시작'과 동시에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괴물이 선혈이 낭자한 장면을 꽉 채우곤 하기 때문에 소설의 중반부를 훌쩍 넘어갔는데도 사람만 죽고 정작 '원흉'인 괴물이 등장하질 않으니 지루한 감이 없지 않다. 난 이것을 두고 아이들에게 '고전명작의 아쉬움'이라고 표현하곤 하는데, 실제로도 아이들은 '찐 공포감'을 느끼지 못하고 밋밋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괴물 주인공'이 등장했는데도 공포감은 전혀 들지 않는다. 외모가 흉칙하기 이를데 없다는 '묘사'가 나오긴 하지만 동영상에 길들여진 요즘 아이들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인데다 어렵사리 등장한 괴물이 너무나도 '감상적인 복수'를 하고 '논리정연한 궤변'을 늘어놓고 있으니 '공포감'은 싹 사라져버리기 일쑤란 얘기다. 이런데도 이 책을 '공포소설'이라고 소개해도 좋은 걸까?

 

  맞다. 이 책은 '공포소설'이 분명하다. 하지만 외면의 공포가 아닌 우리 인간의 내면에 감춰진 공포가 불현듯 꺼내어졌기 때문에 '공포스러운 소설'이 된 것이라는 장황한 설명이 필요할 뿐이다. 인간이 창조해낸 '생명체'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버린다는 '내면의 공포'와 맞닥뜨려야 제대로 된 찐 공포가 전달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도 다름 아니라 인간의 '편리와 이기'를 위해서 발달해온 '과학'이 만들어낸 공포이기 때문에 정말 무시무시할 수밖에 없다. 아직도 '공포감'이 들지 않는다면 곰곰이 생각해보길 바란다. 그리고 인간이 행한 모든 행동과 활동이 '도리어' 인간을 비롯해서 지구의 모든 생명체를 위협하고, 심지어 지구마저도 파괴해버리는 공포를 말이다.

 

  '과학의 발달사'를 조금만 살펴보면 '안전'하다고, '무해'하다고 만들어서 '유익'하게 써오다가, 어느날 갑자기 '공포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것들이 한둘이 아닐 게다. '가습기살균제'는 어떤가? 갓 태어난 아기와 사랑스런 아내를 위해서 아빠는 '가습기'에 낀 곰팡이를 효과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퇴근길에 '가습기살균제'를 사왔다. 그리고 아내가 맛있게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에 아기가 곤히 잠들어 있는 방에 들어가 '가습기'를 깨끗이 청소하고 물때를 제거한 뒤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청결'하게 하기 위해 소중히 사가지고 온 '가습기살균제'를 넣고 가습기를 켠다. 얼마나 애정이 넘치는 상황인가. 그런 아빠의 애정을 듬뿍 받은 아기와 육아휴직으로 집에 머물고 있는 아내가 '가습기살균제'의 직격탄을 맞고 '중증호흡기장애'로 고통스러워하다가 사망을 하게 되었다. 이제 좀 공포감이 드는가?

 

  프랑켄슈타인 박사도 단순히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화학을 연구했다. 얼마나 심취했는지 오랜 옛날의 과학자인 '연금술사의 비법'까지 손을 대면서 열중을 했더랬다. 비록 대학교수는 '하릴없는 옛 지식'까지 들춰 대는 프랑켄슈타인을 비아냥거리며 '시간낭비'라고 핀잔을 주었지만, 프랑켄슈타인은 이에 굴하지 않고 더욱더 학문에 빠져들면서 놀라운 성과를 냈다. 바로 '죽은 시체'에 전기를 흘려보내면 다시 살아날 수 있게 만드는 놀라운 비법을 알아낸 것이다. 더욱이 그는 '인간'보다 더 크고 힘도 쎈 것을 만들기에 성공하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연구에 성공하고보니 자신이 만든 '새 생명체'가 보기만해도 역겹고 혐오감이 들 정도로 추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살아서 꿈틀대기 전에는 느껴지지 않던 혐오감이 괴물에 '생명'을 불어넣어주자 형용할 수 없는 공포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창조주'인데도 너무도 혐오스럽고 끔찍한 상황에서 벗어나기만을 바라며 갓 태어난 '생명체'를 그대로 방치한 채 도망가버리고 말았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온갖 저주를 퍼부으면서 말이다.

 

  사실, 프랑켄슈타인이 이렇게 빨리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것까지는 아주 잘한 일이었다. 하지만 잘못을 깨닫기만 하고 사태를 수습하는데에는 소홀했던 점이 크나큰 문제가 되고 말았다. 이 괴물이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자신의 창조주인 프랑켄슈타인의 가족과 친구, 지인들을 말이다. 그렇게 괴물은 복수심에 차서 살인을 저질렀고,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벌어지는 '살인사건'을 마주하면서 더욱 심한 공포감에 젖어들게 된다. 바로 이 '공포'가 <프랑켄슈타인>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범인이 누구인지 뻔히 아는데도 범죄를 막을 수도 없고, 범죄를 밝힐 수도 없는 '주인공'이 겪는 공포 말이다.

 

  하지만 괴물이 처음부터 무시무시한 살인을 저지른 것은 아니다. '성선설'을 증명하기라도 할 것인냥 갓 태어난(?) 괴물은 착한 본성을 지녔었기 때문이다. 다만, 인간과 달리 너무나도 혐오스런 외모를 가진 탓에 '선한' 인간과 어울릴 기회가 없었고, 무엇보다도 태어나자마자 버림을 받았다는 충격을 나중에 새삼 깨닫게 되면서 '증오'를 배우게 되었고, 믿었던 사람에게마저 '배신'을 당하면서 그 무엇보다 처절한 '복수의 화신'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것은 '괴물의 탓'일까? 분명 살인을 저지르는 괴물의 죄를 용서할 수는 없겠지만, 애초에 사랑을 받고 '인간답게' 살 수 있었다면 그런 일은 없었지 않을까 싶어서, 괴물에게 '동정심'이 가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끝내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을 찾아가 '복수'와 '살인'을 멈추고 싶다면서 '제안'을 내놓는다. 자신과 똑같은 '여자'를 만들어주면 인간들이 사는 세상을 떠나 '남미'에 정착하겠다고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남미'에도 엄연히 사람이 살고 있는데 뭔소린고 싶지만, 19세기 제국주의시절의 감성이 충만한 '막말'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당시 '대영제국'이 식민지 원주민들을 '사람취급'도 하지 않는 것을 생각한다면 '괴물'이 살아갈 장소로 적당한 곳이기 때문이다. 여튼, 비판적인 읽기를 해야 할 부분이지만, 잠시 고정을 하고서 이야기를 이어나가자.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의 그럴듯한 제안에 이끌려 '살인'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다짐을 믿고 '여자 괴물'을 만들려 했다. 하지만 '또 다른 공포'가 찾아오면서 막바지에 들어간 작업(?)을 멈추고 애써 만든 '여자 괴물'을 망가뜨려버린다. 왜냐면 괴물 종족이 번식(!)을 해서 더욱더 늘어날 것이라는 '새로운 공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유전자 상식'으로 생각해보면, 애초에 인간의 죽은 시체에서 얻은 조각을 이어붙여서 '부활'한 것이기 때문에 굳이 '여자 괴물'을 따로 만들 필요도 없이 '여자 인간'과 사랑(?)에 빠지게 되면 될 것이라 '프랑켄슈타인의 고민'은 쓸데없는...이치에도 맞지 않는 고민이었으나, 19세기 '유전학'이 발달하기 전의 소설인 것을 감안하면서 읽어보면, 제법 고민해볼 만한 '공포감'이었을게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프랑켄슈타인은 또 다시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겪게 되고 만다. 이로써 프랑켄슈타인과 괴물 사이의 쫓고 쫓기는(?) 대단원의 막이 열리게 된다. 프랑켄슈타인은 '창조주의 권리'로써 괴물을 죽이겠다고 다짐을 하고, 괴물은 '할 수 있으면 해봐라'면서 흥미진진한 대결을 벌이게 된다.

 

  소설의 줄거리와는 별개로, 우리는 <프랑켄슈타인>에 대해 수많은 고찰을 하곤 한다. '과학만능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읽기도 하고,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심각한 고민도 해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 '과학자의 윤리의식'에 대해 짚어보고 싶다. '과학'이란 이름으로 해서는 안 될 연구를 끝까지 하거나, 지적 호기심만 충족하고서 책임은 지지 않는 비양심적인 행태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가 이룩한 문명의 이기는 대단한 업적이 될 수는 있겠으나 그로 인한 폐해에도 무한한 책임을 져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전쟁을 빨리 종식시키겠다는 일념으로 '핵무기'를 만드는데 성공한 인류는 '엄청난 파괴력'에만 주의를 기울였을 뿐, '방사능'이라는 위험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실제로 '써'보고 나서야 그 심각성을 깨닫게 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이런 어리석음이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서도 왜 아무도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예상하지 못했다는 '변명'만 늘어놓으면서 말이다. '항생제의 남용'도 마찬가지다. 수퍼박테리아가 등장할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까? 아니, 예상은 둘째치고, 기존의 항생제가 소용 없어지면 '더 강한 항생제'를 개발하려들고, 그도 소용없어지면 '더 쎈 항생제'를 만들 궁리부터하는 것이 문제라는 말이다. 이미 만들어진 무기로도 엄청난 살상력을 갖추고 있건만 '기어코' 더 쎈 무기를 만들어 모두가 공멸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고 나서야 반성하는 기미를 보이는 것이 괘씸하단 말이다.

 

  이런 비판을 우리는 <프랑켄슈타인>을 통해서도 할 수 있다. '과학'이라는 마법사의 돌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만심'이 끝내 혐오스럽기 그지없는 흉칙한 괴물을 만들고야 마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판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공할만 한 물건에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을 붙이곤 한다. 끔찍하기 이를데 없는 괴물의 대명사로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새로운' 프랑켄슈타인을 만들고 또 만들고 있다. 처음엔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조금 뒤엔 '인간만을 위한 편리함'을 만끽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끝에는 '애초에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고 있다.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존재인 때문일까? 여기까지 '죽음을 부르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었다. 조만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괴물의 이름'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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