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엄마와 물건 - 물건들 사이로 엄마와 떠난 시간 여행
심혜진 지음, 이입분 구술 / 한빛비즈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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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역사'를 배우면서 거창한 것만 떠올리기 일쑤다. 교과서에서조차 '임금의 업적'만 나열을 하고 '위인들의 생애'만 다루며, 인류사에 큰 영향력을 끼친 '굵직한 사건' 들을 예로 들면서 스케일을 한껏 키우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사'로 오면서 역사의 범위는 점점 복잡해지고 사건사고는 끊이지 않으며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했다 사라지길 반복하면서 위대하고 유구한 역사의 흐름만을 따라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늘 거창해야만 하는 걸까?

 

  한편, 임금이나 위인이나 모두 같은 사람인데, '그들'만 역사의 주인공이 되란 법이 있느냔 말이다. 더구나 무릇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던데, 그 말이 맞다고 친다면 '개인의 취향'이 얼마든지 반영될 수 있다는 증거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만의 역사책'에는 내가 주인공이고, 내가 '아는 사람'이 얼마든지 위인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다. 이를 테면, '엄마' 같은 위인 말이다.

 

  엄마가 왜 위인이냐고 되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겠다. "당신은 엄마를 존경하지도 않으신답니까? 세상에는 인류 모두를 위해 헌신하는 위인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정작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신 엄마를 떠올리지 않는다면, 사람도 아니다."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엄마의 모든 것'을 역사책으로 쓸 수도 있다. 특히, 엄마 때부터 '즐겨 쓰던 물건에 담긴 현대사의 질곡'을 주제로 삼아 역사책을 쓴다면, 바로 이 책일 것이라고 소개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책이 <역사책>은 아닐지라도...

 

  그렇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떠올리신 분들이 꽤나 많을 게다. 왜냐면 대한민국만큼 '빠르게' 변천한 나라도 드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신발만 보아도 그렇다. 지금 100세를 살고 계신 분이 살아계신다면 그분은 어릴 적에는 '짚신'을 신으셨을 것이고, 비가 오는 날이면 '나막신'도 신어보셨을 것이다. 조금 형편이 나아지면 '고무신'도 신어보셨을 것이고, '가죽신'을 신고 폼을 내기도 해보셨을 것이다. 젊어서 직장에 다닐 때에는 '구두'를 신고 다녔을 것이고, 평상시에는 '운동화'를 신고, 근래에 들어서는 '기능성 신발'을 신으며 발건강에 신경 쓰면서, 요즘처럼 부쩍 추워진 날씨에는 발을 따뜻하게 보호하는 '털신'을 신으며 평생 자신이 신어본 '신발의 변천사'를 떠올리실 수도 있을 게다. 이렇듯 '신발' 하나에도 동서양을 아우르고 전통과 현대, 그리고 시대별 유행까지 모두 담겨 있고, 시대마다 첨단을 달리는 '과학기술의 발전'까지 수용하였으니, 우리 주위에 널려 있는 사소한 물건들을 보면서 '대한민국의 역사와 발달사'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의 내용은 글쓴이와 글쓴이의 엄마가 나눈 '대화'가 주를 이룬다. 지금 현재의 '나'는 이런 물건을 쓰는데, 과거의 엄마, 또는 엄마의 엄마는 어떤 물건을 써왔었는가하고 말이다. 이런 내용의 글을 읽다보니, '나 어릴 적의 추억'이 떠올라 색다른 감상에 빠지기 일쑤이기도 했다. 이런 점이 책의 첫 번째 매력이었다. 또 다른 매력은 글쓴이가 '여성'이기에 느낄 수 있었다. 사실 '남자'들은 늘 쓰던 물건에 그닥 애착을 갖지 않는 편이다. 그저 손에 익숙하고 편하면 그뿐, 그 이상도 없고, 쓰다가 없어도 그만이기에 물건 하나하나에 '의미'를 담는 편이 아니다. 더구나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거나 '까라면 까..'라는 묘한 신조(?)가 남자들 사이에 퍼져 있는 까닭에 망치가 있으면, 못을 박는데 쓰다가도, 밤송이를 깔 때도 쓰고, 땅을 팔 때도 쓰고, 심지어 밥 먹다가 이를 쑤실 때도 쓰는..무던한(?) 삶을 살아갈 뿐이다. 아무래도 '군대식 문화'라 남자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기에 그런 점이 없지 않나 싶지만, 확실히 '여성'들의 관점에서 물건에 대한 역사를 살펴볼 수 있어서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한편, 집안 살림을 하다보면 세탁기, 청소기, 밥솥, 김치냉장고 등과 같은 '전자제품'에 대한 위대함을 저절로 깨닫곤 한다. 나 어릴 적에는 부뚜막에서 아궁이에 불을 피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가스레인지'가 등장하기 전까지 '풍로', 또는 '곤로'라고 불리는 기구로 밥을 짓고 국을 끓이며 음식을 조리하곤 했기 때문이다. 지금에야 '전자레인지'에 1분만 돌리면 '즉석밥'이 뚝딱 만들어지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어릴 적에 밥 타는 냄새에 눈을 뜨고, '삼층 떡밥'으로 대충 끼니를 때우고, 도시락도 싸지 못해 점심시간에 물배를 채우고 1시간 남짓 출렁출렁거리는 뱃속 장단을 치던 것이 '컵라면'의 등장으로 끼니를 때울 수 있게 되는 추억을 갖고 있는지라, 집안에 '전자제품'이 하나둘 들어오는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르곤 한다. 실제로 세탁기가 없을 적에 울 엄마는 화장실에서 빨래판에 빨래비누를 듬뿍 묻혀서 비비고 또 비비곤 하셨다. 좀 두꺼운 빨랫감에는 빨랫방망이로 흠씬 두들겨 패기도 했고 말이다. 그러다 세탁기가 들어오자 '세상 참 편해졌다'는 말씀을 하시곤 하셨다.

 

  하지만 늘 처음에만 그러셨다. 세탁기가 들어와도 '빨랫감'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기에 빨래를 널고 걷고 개고, 다시 꺼내 입히는 수고는 똑같이 들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베란다에 널어서 빨래가 마르지 않으니 '연립주택' 앞마당에 집집마다 '빨간 빨랫줄'을 걸고서 널어놓기 일쑤였다. 빨래는 햇볕이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날에 잘 말랐기 때문이다. 한여름에는 뽀송뽀송 잘 마르던 빨래가 한겨울이면 고드름을 주렁주렁 달려 있기 일쑤였다. 초창기 세탁기에는 '탈수기능'이 별로였기 때문이다. 어릴 적에는 그 고드름을 참 잘도 따먹었는데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세제성분'이 제대로 분해되지 않아 '화학물질 덩어리'였다는 생각에 먹지 않았겠지만, 그 당시엔 뭐든 참 잘 먹었다.

 

  암튼, 전자제품이 쏙쏙 들어와서 '엄마의 수고'가 덜어진 듯 싶었지만, 집안살림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그 당시 '남정네'들은 전자제품이 '여성을 게으르게 만든다'라고 단단히 오해했지만, 정작 '전자제품'이 집안살림을 대신한다고 '집안일, 그 자체'가 사라진 건 절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치 젖은 손이 애처로워 '고무장갑'을 사주며 생색을 내도 '고무장갑'이 엄마 손을 보호해줄 수는 있어도 '설겆이, 그 잡채'를 대신 해주지는 않은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훨씬 더 과학이 발전한 미래에도 똑같을 것이다. 아무리 '인공지능 집안일 로봇'이 등장한들, '집안일, 그 잡채'는 여전할 것이다. '로봇청소기'가 그렇지 않느냔 말이다. 얘가 아니라 '물걸레 기능'까지 탑재되었다고 해도, 꼼꼼한 사람손길이 닿지 않는 구석구석까지 깨끗하게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훨씬, 훨씬 더 나중에는 '꼼꼼한 사람손길'이 탑재된 전자제품이 등장한다고해도 그닥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새삼 옛일을 떠올려 아스라한 추억여행을 떠나게 해주는 책이기도 했고, 대한민국의 급속한 변천사를 들여다보는 역사기행을 떠나는 기분이 들기도 했고, 암튼 참 묘한 기분이 들게 하는 책이었다.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누군가 쓰다 버린 '파란 비닐우산'이었고, 비가 오면 학교앞으로 우산을 들고 나를 데리러 오신 엄마가 있나 없나 살펴보던 추억이었다. 대개는 바빠서 학교앞에 오시지 못했지만, 간혹 오시는 날에는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사기도 했다. 울엄마가 너무 예뻐서 말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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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온다, 기후 위기 와이즈만 미래과학 12
김성화.권수진 지음, 허지영 그림 / 와이즈만BOOKs(와이즈만북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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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는 수많은 두려움을 극복하며 지금껏 생존해왔다. 날짐승처럼 날개도 없고 들짐슴처럼 이빨과 발톱도 없어서 '약한 존재'로 살아왔지만, '불의 발견' 이후에는 문명을 건설하며 '최상위포식자의 위치'에 군림하듯 두려운 것 없이 지내는 것 같았다. 허나 인류는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면 또 다른 걱정거리를 만들어내곤 한다. 문명을 건설한 뒤에는 자연이 주는 재앙이 두려워졌다. 가뭄과 홍수, 화산과 지진, 그리고 온갖 것을 다 날려버릴 듯 몰아치는 태풍의 위력 앞에 인류는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류가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고해도 자연이 가져온 재앙 앞에서 속수무책이었기 때문이다.

 

  허나 '과학'이 발달하면서 자연이 몰고오는 재앙을 극복하는 기적을 일으키곤 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었던 것일까? 인류는 과학의 힘을 길러 자연을 정복하고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뿜어내기에 이르렀다. 신의 영역이라 여겼던 것을 하나둘 비밀을 파헤치면서 인류는 '창조의 능력'까지 가지게 되었다는 오만까지 갖게 되면서 자신감은 어느새 자만으로 바뀌어 갔다. 그러나 극복이라 믿었던 '과학의 힘'은 더 큰 재앙을 불어오고 말았다. 과학의 발전하면 할수록 위기는 더욱 크게 찾아왔고, 더욱 발전된 과학의 힘으로 극복하면서 '지속가능하다'고 믿었지만 끝내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음을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 '기후위기'가 그것이다.

 

  사실, 기후위기는 지구적인 사이클로 보았을 때, 너무나도 자연스런 현상이다. 신생대 이후 지구는 '빙하기'와 '간빙기'를 여러 차례 반복해왔고, 그때마다 지구는 얼었다 녹았다는 반복해왔다. 다시 말해, 지구가 추웠다 더웠다 하는 '기후 변화'는 늘 있었던 현상이란 말이다. 그런데 인류의 등장 이후에 지구의 자연스런 변화에 '다른점'이 발견되었다. 늘 있었던 '기후 변화'가 너무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에는 100만 년~ 1억 년을 주기로 일어났던 '기후 변화'가 1만 년전 인류의 문명이 시작되면서부터 서서히 오르기 시작하더니 '산업혁명 이후' 폭발적인 변화를 보이더니 근래에는 도저히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가파른 '기온 상승'을 기록하더라는 것이다. 불과 100년도 안 된 사이에 평균 기온 1도라는 엄청난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인류는 '화석연료'를 엄청나게 소비하면서 지구 나이 46억년 땅속 깊이 잠들어 있던 '온실가스'를 공기중으로 뿜어냈다. 그 결과, 바다의 온도가 100년 사이에 1도가 상승하고 말았다. 앞으로 10년 뒤, 20년 뒤에 바다의 온도가 1도만 더 오르게 된다면 인류를 비롯해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고작 1도 오를 뿐인데 설마 그런 일이 벌어지겠느냐고 되묻는다면, 곰곰이 상상해보길 바란다.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은 냄비에 물을 담고 팔팔 끓게 만드는 장면을 말이다. 무척 간단해 보일 것이다. 이제 그 냄비속에 '지구의 바닷물'을 몽땅 담고 끓여 보길 바란다. 1도 올리는 일이 쉬워 보일까? 아마도 쉽게 상상이 가질 않을 것이다. 더구나 '지구의 바닷물'을 끓일 정도로 큰 가스레인지도 없다. 오직 '온실가스'로만 바닷물을 데웠는데 무려 1도나 올라가버린 것이다. 인류가 얼마나 무지막지하게 '온실가스'를 뿜어냈는지 상상조차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해냈다. 70억 인구가 뿜어내는 '온실가스'의 양이 어마무시했다는 사실 말이다.

 

  그런데도 인류는 아무런 '위기'를 느끼지 못한다. 앞으로 10년 뒤, 아니 20년 뒤에 인류가 숨을 쉬지도 못할 정도로 '기온'이 상승하고, 해수면은 상승해서 발을 딛고 설 수 있는 땅조차 남지 않고, 뜨거워진 바닷물로 인해 태풍은 더욱 강력하고 더 자주 불어닥칠 것이며, 그로 인해 인류를 먹여 살릴 '경작지'는 찾기조차 힘들어져서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게 될 판인데도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는다. 마치 서서히 뜨거워지는 냄비속의 개구리처럼 말이다.

 

  뭐, 아직도 '기후 변화'는 자연스런 현상이기 때문에 전혀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떠벌리는 이들도 부지기수로 많다. 대홍수가 날 정도로 비가 쏟아져도 전지구적으로 볼 때 '균형'을 맞출 것이기 때문에 살짝 이사를 가면 더욱 살기 좋고 풍요로운 새로운 땅을 개척하며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과학자들도 많기 때문이다. 설령 그것이 맞다하더라도 '대한민국 서울'을 사알짝 어디로 이사시킬 셈인가? 결국 정든 땅을 떠나 황량한 땅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그게 정녕 쉬운 일인가? 현재 남태평양의 섬 국가들은 '생존'을 위해 '국가포기선언'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도 뉴스에서는 지구 어디선가 가뭄이 들어 굶주리고 대홍수로 물난리가 났으며, 상상도 하지 못했던 규모의 화산폭발과 대지진으로 삶의 터전을 한순간에 잃어버리는 아수라장이 펼쳐지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정녕 '기후위기'가 아무 일도 아니란 말인가.

 

  화석연료 사용은 반드시 줄어야 한다. 지금 곧 맞이할 '기후 변화'를 막을 수 없을 지라도 변화를 극복하기 위해서 '대체에너지'를 빠르게 확보해야 한다. 온실가스로 일어난 끔찍한 비극인데 '온실가스'를 배출하면서 생명을 연명할 수는 없지 않느냔 말이다. 천만다행으로 '지구적 위기'가 찾아오지 않더라도 '청정연료'를 사용하면 우리가 사는 환경이 보다 깨끗해지기 마련이다.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을 마시며 살았던 추억을 떠올려보길 바란다. 우리의 후손에게 고스란히 물려주어야할 유산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 아니겠냔 말이다. 깨끗한 환경을 물려주면 '기후 위기' 따위는 자연스레 사라지게 될 것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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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더 저널리스트 : 어니스트 헤밍웨이 더 저널리스트 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영진 엮고 옮김 / 한빛비즈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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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널리즘은 신문이나 잡지를 통하여 대중에게 시사적인 정보와 의견을 제공하는 활동을 일컫는다. 그렇다면 저널리스트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할 것이다. 그럼 요즘처럼 신문이나 잡지를 도통 읽지 않는 시대에는 누가 저널리스트라 할 수 있을까? 대중에게 시사적인 내용을 언급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제대로 된 '더 저널리스트'가 있기는 한 걸까? 순방길에 오른 현 대통령 전용기의 추락을 기원하는 사제일까? 그 사제들이 신부직위에서 해제되고 종교계에서 파문을 당한 것을 보도한 기자일까? 아니다. 뭔가 부족하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뛰는 '시사 내용'을 전달하고,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단박에 알아챌 정도로 명쾌한 '기사'가 아니고서는 감히 '저널리스트'라고 입에 오르지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오늘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에는 '더 저널리스트'가 없다.

 

  헤밍웨이는 작가로 유명해지기 전에 '기자'로 활발히 활동했다고 한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과 스페인 내전에 직접 뛰어든 경험을 최대한 살려서 '현장감'이 뛰어난 기사를 쏟아낸 '저널리스트'라고도 전한다. 그가 '더 저널리스트'가 된 까닭도 바로 그 '현장감' 때문이다. 비겁한 기자들은 종종 자신이 직접 취재하지도 않고 증거를 찾기 위해 발로 뛰지도 않고 '누구인지 밝힐 수 없는' 정보원의 말만 믿고 섣불리 기사를 쏟아내기도 한단다. 기자들이 양심도 없이 이런 짓을 서슴지 않는 까닭은 '속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누구보다 더 빠르게 기사를 쏟아내야 한다는 중압감에 그런다고도 하고, '대서특필'로 남기 위해 누구와의 정보공유도 없고, 사실검증(팩트체크)도 하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찍어내듯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낸 뒤에 나몰라라 하는 얌체라서 그런다고도 한다. 암튼 이유를 불문하고 이렇게 비겁한 기사를 써놓고서 뻔뻔스레 '유명세'를 거머쥐는 이들이 종종 발생하기에 너나할 것 없이 '거짓기사 경쟁(?)'에 뛰어든다고 한단다.

 

  이미저도 오늘날엔 '유사언론(너튜브, 포털사이트 등)'이 인터넷기사를 도배하다시피하는 까닭에 전통적인 신문이나 잡지는 아무도 보지 않고, 팔리지도 않는 처지에 내몰리면서 '무한경쟁'에 돌입한 듯한 느낌마저 들 정도로 '무책임한 저질기사'가 온통 도배를 한 지 오래되고 말았다. 그래서 '저널'다운 저널을 좀처럼 찾아보기도 힘들고, 간혹 이슈가 된다 싶은 기사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실검증'에서 신빙성이 떨어지는 '추측성 소설'에 불과하다고 판명이 나는 등.. 정말이지 '정통 저널리즘'이 너무나도 그리워진다.

 

  그렇다면 이 책, <더 저널리스트>에 나오는 헤밍웨이의 기사는 눈여겨 볼 만한 저널리즘 기사들이었나? 무려 100여 년전의 기사들이다보니 '기사'가 갖고 있는 시사가 적절했는지 가늠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이를 테면, 1910년대 미국 어느 도시의 정치인이 '어떤 일'을 하고 있어서 주목된다는 기사를 남겼다할지라도 '기사의 배경'이 됨직한 미국사회의 전반적인 내용을 속속들이 알 수 없으니 '그 기사'가 적절한 시사성을 지니고 있는지 가늠하기란 매우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헤밍웨이'가 꽤나 직설적인 화법으로 기사를 작성하면서 '권력가'와 '유명인' 들을 까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또한, 헤밍웨이가 직접 본 현장이 '전쟁터'였다는 사실에 주목할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이탈리아'와 '스페인 내전 속 마드리드' 따위는 우리가 역사 속에서 접할 수 있는 배경지식이 있으므로 '간접적'이나마 헤밍웨이가 던지는 '시사점'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가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위험천만한 곳에서 직접 겪고 본 것을 사실 그대로 '기사'에 담으려는 진실된 마음이 절절하게 전달되는 느낌도 받았다.

 

  그런 의미에서 '저널리스트'가 갖춰야 할 첫 번째 덕목은 '현장(르포)을 직접 탐방하고 사실검증을 마친 뒤'에 전하는 진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헤밍웨이는 스페인 내전이 벌어진 마드리드 한복판에 뛰어들어 취재를 하면서 '거짓기사'를 작성해서 대박을 터트릴 욕심에 동료기사의 생명까지 위태롭게 만드는 덜떨어진 기자를 '고발'하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내전의 한복판인 마드리드였지만 '전쟁의 위협'은 잦아들고 모처럼 '평온한 일상'을 되찾은 마드리드였는데, 마드리드에 도착한 지 하루만에, 그것도 호텔방 한 구석에서 상상으로 써낸 '무시무시한 전쟁속에서 공포에 떠는 마드리드 시민들'이란 기사를 제 손도 아닌 동료 여기자의 손에 들려서 스페인 밖으로 송출하려 한 몹쓸 기자였다. 만약, 스페인군의 검열에 그런 내용의 기사가 들통이 났더라면 '그 기사'를 국외로 빼돌리려던 여기자는 그 자리에서 검거되어 총살을 면치 못했을 것이며, 무사히 국외로 빼돌려 미국시민들에게 '그 공포감'을 전달했더라면 모처럼 평온을 맞이한 마드리드는 '외부에서 찾아든 오해'로 인해 다시금 피비린내나는 전쟁터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로 인해 '스페인'에 남겨진 현장취재 기자들의 생명도 위험해졌을 것이고 말이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연못을 흐린다는 속담은 이럴 때 딱 어울릴 것이다.

 

  그뿐 아니라 헤밍웨이는 이탈리아 파시스트의 우두머리인 '무솔리니'에 대해서도 진솔하게 돌려까며 이탈리아의 무능을 적나라하게 밝혀냈고, 독재자를 비호하는 여타의 강대국들의 검은 속내를 까발리며 '공산주의(볼셰비즘)'를 막기 위해 '파시즘(무솔리니, 히틀러)'을 감싸는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의 위정자들에게 신랄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더구나 '전쟁의 참상'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에티오피아 전선에 파병된 이탈리아 병사의 주검을 선명한 사진으로 보여주며 하나하나 주석을 달기도 했다. 강대국(?) 이탈리아의 병사들이 전쟁터에 보내진 뒤에 벌어지는 사실들이라면서 이들은 분명 조국의 환호를 받으며 이곳으로 보내졌을 텐데, 환대를 받기는커녕 차가운 시신으로 눕는 것으로도 모자라 날짐승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손과 발, 심지어 얼굴의 일부까지 총탄과 포탄에 찢겨져서 날아가버린 채, 그곳에 방치되어 있다면서 전쟁은 애국하는 병사들의 주검조차 수습하지 않는 비정한 것인데도 '전쟁'에 환장한 이들은 전세계 어느 곳에나 있다는 역설적인 상황을 '날것, 그대로' 기사에 담아냈다.

 

  저널리즘이란 그렇다. '날것, 그대로' 전해져야 한다. 기자는 이런 생생한 정보를 모든 이들에게 알릴 의무가 있는 사람이다. 물론 '생생한 정보'에는 기자의 '가치판단'으로 걸러낸 정수가 담겨야만 한다. 아무리 '날것'이라 해도 그냥 '전달'만 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생생한 정보에 기자의 '생각'을 고스란히 담아 기사로 뽑아내야만 한다. 그 기사가 대박을 칠지 어떨지는 운에 달리긴 했다. 그럼에도 '날것, 그대로'의 기사에 독자들은 반드시 반응을 보이기 마련이다.

 

  지금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것은 '저널리즘'이다. 물론 '저널리스트'도 중요하지만, 사람보다 먼저 양성해야 할 것은 '저널리즘'에 목마른 독자들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이 '저널리즘'을 소비하기 위해선 교양을 쌓아야 한다. 시쳇말로 '옥석을 가릴 줄' 알아야 비로소 '저널리즘'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저널리즘'에 갈증을 느끼는 이들이 많아져야 제대로 된 '저널리스트'들이 활동할 터전이 마련된다. 그 반대라면 저널리스트들이 아무리 입 바른 소리를 높이고 날카로운 기사를 쏟아낸 들 맥이 빠져서 금세 시들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용감하고 굳센 저널리스트라 하더라도 그들도 사람인지라 '먹고 사는 문제'가 결부되면 저널리즘을 쏟아내고 싶어도 못하기 일쑤기 때문이다. 기껏 용기를 내어 '밥줄 끊어질 각오'를 하고 저널리즘을 썼는데,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면 그 저널리스트는 끝내 굶어죽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저널리즘에 목마른 교양있는 독자들이 먼저 양성되어야 한다. 그런 뒤에 '더 저널리스트'가 없는 현실에 대해 개탄을 금치 못한다는 성명을 내면...어디선가 스물스물 저널리스트들이 싹을 튀울 것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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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100리뷰 출판사'가 등장했다.

그간 '리더스클럽'을 통해서 꾸준히 리뷰를 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나름 '나만의 탐독'을 할 정도로 매력적인 출판사였다는 사실이

이런 결과를 나은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한빛비즈'와의 첫 만남이 2018년 9월 27일이었는데,

100번째 리뷰는 2022년 11월 10일로, 대략 4년 2개월만이었다.

훨씬 이전부터 만났던 출판사와는 이제 고작 30여 권의 리뷰를 했을 정도였는데,

한빛비즈는 좀 달랐던 모양이다. 이토록 빠른 시일에 100리뷰 달성이라니...

솔직히 나도 놀랐다.

 

더구나 평소에는 잘 읽지도 않는

[자기계발]과 [경제경영], [에세이] 장르의 책을

도합 37권이나 읽었다.

한빛비즈의 '마법'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기적이었다.

리더스클럽 담당자가 말하길, 

"즐겨 읽지 않는 분야의 책이니 이번 기회에 즐겨보시길 바란다"는

말 한마디가 평소에 읽지 않는 책도 읽게 만들고야 말았다

정말 '미라클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지금까지 '한빛비즈'에서 출간한 책이 380여 권에 육박하니

부지런히 쫓아가면 따라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ㅎㅎㅎ

앞으로도 좋은 책 출간을 부탁드려요^-^=

 

[과학] _ 6권

001 <우주에도 우리처럼> 아베 유타카, 정세영 (2018)

002 <오늘도 뇌는 거짓말을 한다> 알베르 무케베르, 정수민 (2020)

003 <세뿔돼지> 갈로아 (2019)

004 <이기적 유인원> 니컬러스 머니, 김주희 (2020)

005 <원소이야기> 팀 제임스, 김주희 (2022)

006 <협력의 유전자> 니컬라 라이하니, 김정아 (2022)

 

[교양툰] _ 20권

007 <만화로 배우는 의학의 역사> 장 노엘 파비아니, 김모 (2019)

008 <만화로 보는 성차별의 역사> 솔르다드 브라비, 맹슬기 (2019)

009 <퀀텀- 만화로 배우는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 로랑 셰페르, 이정은 (2020)

010 <만화로 배우는 와인의 역사> 브누아 시마, 이정은 (2019)

011 <까면서 보는 해부학 만화> 압듈라 (2020)

012 <할짝 심리학 1> 이한나 (2020)

013 <할짝 심리학 2> 이한나 (2020)

014 <만화로 배우는 곤충의 진화> 갈로아 (2018)

015 <만화로 배우는 공룡의 생태> 갈로아 (2019)

016 <중세1: 만화로 배우는 서양사> 플로리앙 마젤, 이하임 (2021)

017 <중세2: 만화로 배우는 서양사> 파니 마들린, 김수영 (2021)

018 <중세3: 만화로 배우는 서양사> 올리비에 보비노, 이정은 (2021)

019 <인문학 거저보기 : 서양철학 편> 지하늘 (2021)

020 <만화로 배우는 의학의 역사-개정판> 장 노엘 파비아니, 김모 (2021)

021 <만화로 배우는 조선 왕실의 신화> 우용곡 (2022)

022 <올림포스 연대기-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 김재훈 (2022)

023<인피니티- 만화로 배우는 우주와 블랙홀의 비밀> 로랑 셰페르, 이정은 (2022)

024 <만화로 배우는 동물의 역사> 카린루 마티뇽, 이정은 (2022)

025 <만화로 배우는 불멸의 역사> 브누아 시마, 김모 (2022)

026 <만화로 배우는 요리의 역사> 브누아 시마, 김모 (2022)

 

[사회과학] _ 7권

027 <더 저널리스트 : 카를 마르크스> 카를 마르크스, 김영진 (2020)

028 <젠더 모자이크> 다프나 조엘, 김혜림 (2021)

029 <상식의 재구성> 조선희 (2021)

030 <눈 떠보니 선진국> 박태웅 (2021)

031 <대통령의 숙제> 한지원 (2022)

032 <알리기 전에 알면 좋은 사실들> 홍태화 (2018)

033 <나쁜 뉴스의 나라> 조윤호 (2016)

 

[자기계발] _ 10권

034 <미라클 모닝 기적의 공식>  할 엘로드, 김잔디 (2020)

035 <탄력적 습관> 스티븐 기즈, 김정희 (2020)

036 <바쁨 중독> 셀레스트 헤들리, 김미정 (2020)

037 <김불꽃의 불꽃 튀는 성인식>  김불꽃 (2019)

038 <돈 되는 기획> 김도균 (2021)

039 <다시, 배우다 RE:LEARN> 폴 김 (2021)

040 <뛰지 마라, 지친다> 이지풍 (2022)

041 <상식으로 상식을 배우는 법> 제바스티안 클루스만, 이지윤 (2022)

042 <때려치우기의 기술> 사와 마도카, 이효진 (2022)

043 <오늘도 시작하지 못하는 당신을 위해> 윤닥 (2022)

 

[인문학] _ 21권

044 <퇴근길 인문학 수업 : 뉴노멀> 백상경제연구원 (2020)

045 <청소년 인문학 수업 1> 백상경제연구원 (2020)

046 <청소년 인문학 수업 2> 백상경제연구원 (2020)

047 <북킷리스트> 홍지혜, 김나영 등 (2020)

048 <불안한 것이 당연합니다> 한덕현 (2020)

049 <누구 먼저 살려야 할까?> 제이콥 M. 애펠, 김정아 (2021)

050 <생존 교양> 이용택, 김경미 (2020)

051 <저는 심리학이 처음인데요> 강현식 (2021)

052 <저는 인문학이 처음인데요> 박홍순 (2021)

053 <5리터의 피> 로즈 조지, 김정아 (2021)

054 <퇴근길 인문학 수업 : 멈춤 > 백생경제연구원 (2018)

055 <방구석 심리학 실험실> 마이클 A. 브릿, 류초롱 (2021)

056 <심리 읽어드립니다> 김경일, 사피엔스 스튜디오 (2021)

057 <오빠를 위한 최소한의 맞춤법> 이주윤 (2016)

058 <을의 철학> 송수진 (2019)

059 <벌레가 되어도 출근은 해야 해> 박윤진 (2022)

060 <예의 바른 나쁜 인간> 이든 콜린즈워스, 한진영 (2019)

061 <이그노벨상 읽어드립니다> 김경일, 사피엔스 스튜디오 (2022)

062 <4차 인간> 이미솔, 신현주 (2020)

063 <답답해서 찾아왔습니다> 한덕현, 이성우 (2022)

064 <손목시계의 교양> 시노다 데쓰오, 류두진 (2022)

 

[에세이] _ 3권

065 <별, 걔 다 그립네> 밤하늘 (2020)

066 <1년 후 내가 이 세상에 없다면> 시미즈 켄, 박소영 (2021)

067 <나 아직 안 죽었다> 김재완 (2021)

 

[경제경영] _ 24권

068 <바빌론 부자들의 돈 버는 지혜> 조지 S. 클래이슨, 사카노 아시히 (2020)

069 <게임 오버>  한스 페터 마르틴, 이지윤 (2020)

070 <부의 원칙> 래리 하이트, 노태복 (2020)

071 <성공 원칙> 레이 달리오, 고영태 (2019)

072 <원칙 Principles> 레이 달리오, 고영태 (2018)

073 <언택트 이코노미 2021> 최성근, 장두석 등 (2020)

074 <출근길 부자 수업: 트렌드 편 > 백상경제연구원 (2020)

075 <자본주의는 왜 멈추는가?> 한지원 (2021)

076 <기술의 시대> 브래드 스미스, 이지연 (2021)

077 <부동산 세금 사용설명서> 김성일 (2021)

078 <테슬라 웨이> 미카엘 발랑탱, 오웅석 (2021)

079 <감으로만 일하던 김 팀장은 어떻게...> 황보현우, 김철수 (2021)

080 <두 발로 선 경제> 이용우 (2021)

081 <비겁한 돈> 황현희, 제갈현열 (2021)

082 <슈퍼 석세스> 덴 페냐, 황성연 (2021)

083 <저는 주식투자가 처음인데요: 기본편> 강병욱 (2022)

084 <저는 주식투자가 처음인데요: 투자전략편> 강병국 (2021)

085 <저는 기업분석이 처음인데요> 강병욱 (2022)

086 <변화하는 세계 질서> 레이 달리오, 송이루 (2022)

087 <오늘부터 팀장입니다> 레이첼 파체코, 최윤영 (2022)

088 <트러스트 Trust> 벤저민 호, 조용빈 (2022)

089 <위코노미> 크레이그 킬버거, 이영진 (2020)

090 <10억이 열린다> 김민수 (2022)

091 <세븐 파워> 해밀턴 헬머, 유지연 (2022)

 

[교육] _ 2권

092 <서울대 아빠식 문해력 독서법> 이재익, 김훈종 (2021)

093 <게임세대 내 아이와 소통하는 법> 이장주 (2021)

 

[역사] _ 3권

094 <3분 삼국지 톡> 심 쌤 (2018)

095 <세금의 세계사> 도미닉 프리스비, 조용빈 (2022)

096 <세상을 구한 의학의 전설들> 로날트 D. 게르슈테, 이덕임 (2022)

 

[문학툰] _ 4권

097 <제인 에어> 샬럿 브론테, 김성은 (2022)

098 <주홍 글자> 너새니얼 호손, 정이립 (2022)

099 <빨강머리 앤> 루시 모드 몽고메리, 양지윤 (2022)

100 <레 미제라블> 빅토르 위고, 정미선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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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3분 철학 2 : 서양 중세·근대 철학편 만화로 보는 3분 철학 2
김재훈.서정욱 지음 / 카시오페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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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은 왜 배워야 할까? 솔직히 철학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기왕 하는 공부라면 어려운 학문에 도전하는 것이 폼 나니까 '철학공부'를 한다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것이 철학을 배우는 '찐 목적'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럴 듯한 이유는 뭘까? 그건 아마도 '삶의 목적'을 고뇌하는 학문이 철학이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의 모든 학문이 다 그렇지만, 철학은 '목적, 그 잡채'에 초점을 맞추는 학문이기에 참으로 매력적인 학문이다. 그래서 누군가 나에게 "왜 사냐?"고 묻는다면, 그 답은 '철학'에서 찾아야 하는 법이다. 이는 다른 학문에서는 좀처럼 답할 수 없고, 애써 그럴 듯한 답을 하더라도 결국엔 '철학적인 답변'이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에 대해 궁금해진다면 다들 '철학책'을 뒤적거리곤 하는 법이다.

 

  한편, 철학을 쫌 배웠으면 하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요즘 같은 시대에는 '대통령'이 그랬으면 싶다. 과연 '그'도 정치철학이 있기는 한 건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기 때문이다. 제왕적 대통령에서 탈피를 하겠다며 청와대를 떠난 대통령이 '더욱더 제멋대로 행동'하며 폭군으로 전락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질 않나. 긴 연설을 할 자신이 없어서 말을 줄이는 것은 좋은데 '내용'까지 빈약해서 들어줄 말이 없는 것이 문제고, 짤막한 회견을 할 때조차 어김없이 '말실수(?)'가 튀어나오는 것을 보면 평상시에는 얼마나 품위 없는 언행을 하는 것인지 가이 짐작조차 하지 못할 지경으로..한마디로 엉망진창이다. 결국엔 '공개적인 자리'에서 불쑥 튀어나온 욕설 때문에 구설수에 오르고야 말았다. 국제적 망신은 둘째치고 '해명'하기에 급급한 모습에 뒷수습조차 휘뚜루마뚜루 해버리고서 '논란'을 더 키우더니 끝내는 '언론통제'까지 자행 하고야 말았다. 도대체 뭔 생각을 하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희생자를 희생자라 말하지 못하게 하고, 참사 수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검은 리본 뒤집기'에나 신경을 쓰는 등...'우선 순위'도 없고, '일관성'도 없고..'철학'은 더더군다나 없어 보인다. 좋든 나쁘든 뭔가 '보여주는 것'이 있어야 제대로 비판이라도 할 것 아닌가. 이건 뭐 하나를 해도 '갈지 자'를 그리니 비판도 아까워 '비난'만 늘어놓게 만든다. 비단 '대통령'만의 문제는 아니고 말이다. '선진국'이라 불리는 대한민국이 총체적 난국에 빠진 듯해 안타까운 심정일 뿐이다.

 

  이렇듯 철학은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 그렇다면 철학공부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니 질문을 바꿔서, '철학공부를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로 다시 묻고 싶다. 어렵고 복잡한 철학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책이 시중에 많지만, 그런 책들조차 '난해'하기는 매한가지인 까닭에 드리는 질문이다. 이런 궁금증 때문에 이 책의 제목이 더욱 눈에 띄었다. <만화로 보는 3분 철학> 말이다. 같은 내용이라도 '만화형식'이라면 더욱 쉽고 한 눈에 이해하기 쉬워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만화형식'이 마냥 달가운 것만은 아니다. 어려운 내용을 '한 컷'의 그림과 말풍선으로 단박에 이해시키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화가의 역량'이 매우 중요하다. 복잡한 철학의 내용을 뭉뚱그리면서도 한 눈에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노련한 실력을 갖추어야 비로소 제대로 된 '만화'가 그려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3분 철학'이라는 제목도 쓰여 있다. 위대한 철학자의 사상을 꼴랑 '3분'만에 이해시킬 수 있을 정도라니, 얼마나 대단한 책일까 하는 '기대감'이 책을 보자마자 샘 솟았다.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

 

  놀랍게도 결과는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비록 3분만에 완성하지는 못할 망정이라도 말이다. 왜 그런 경우 있잖은가? 컵라면은 '제대로' 익히지 않아도 충분히 맛있는 경험 말이다. 심지어 뜨거운 물을 붓자마자 뚜껑을 열어재끼고 젓가락을 들이밀면서 채 익지도 않은 면발을 갉아먹고 식지도 않은 뜨거운 국물을 입김을 호호 불며 들이키는 경우 말이다. 그렇게 먹어도 참 맛있지 않던가? 이 책이 그랬다. 비록 '철학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철학의 정수'를 맛보지는 못할지라도, '철학의 맛'만은 제대로 느낄 수 있었고 '철학하는 즐거움' 또한 든든하게 채울 수 있었단 말이다. 심지어 이 책은 1권도 아니고 2권이다. 아직 1권을 읽지 않은 상황에서 2권의 내용을 접했는데도 '철학의 재미'를 맛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철학적 호기심'은 부쩍 달아올랐다. 그래서 1권을 채 읽기도 전에 2권의 '리뷰'부터 쓰고 있는 것이고 말이다. 빠른 시일 안에 1권 리뷰도 올릴 것이다.

 

  어쨌든, 이 책은 서양의 '중세철학'과 '근대철학'을 다루고 있다. 아시다시피, 중세철학의 정수는 '신학'이고, 근대철학의 진수는 '이성'이다. 이런 단편적인 개념만 알고 있어도 웬만한 철학적 지식을 나불거릴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교부철학'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콜라철학'이 중세철학의 핵심이고, 근대철학은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만 알고 있어도 대강의 '철학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조금 더 부연설명을 하자면, 고대의 철학자들은 '자연철학'을 했더랬다. 익히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거물급 철학자들의 사상은 '자연'에서 보이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철학적 사유'를 하면서 '통찰적 썰'을 풀어내었더랬다.(아마도 이것이 1권의 핵심내용일 것이다) 그러다 중세로 넘어오면서 '철학사상'은 암흑시대를 맞았다고들 떠든다. 그건 자유롭고 방대했던 '자연철학의 사유대상'들이 오직 하나인 '신앙'으로 대폭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중세철학'은 신앙을 '이성(철학)'으로 설명하려 애쓰던 노력의 결실이다. 그러던 것이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플라톤 철학'을 통한 '교부철학'으로 정립되었고, 아퀴나스 덕분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의한 '스콜라 철학'이 새롭게 떠올랐다. 그러다 '르네상스'를 맞아 근대 사람들은 '인본주의적'인 이성에 다시 집중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근대철학'은 이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열띤 논쟁을 벌이며 '철학적 사유'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가장 먼저 '데카르트'에 의해 더는 의심할 수 없는 '생각하는 존재'를 떠올리며 이성에 대해 논하게 되었다. 이를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로 더 유명하게 만들었고, 철학은 '신학'에서 벗어나 더욱 자유로운 사상으로 '확장'되었다. 물론, 근대의 철학자들이 '신앙심'을 버린 것이 아니다. 서양은 '신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근대철학자들은 '무신론자'가 되는 걸 꺼렸다. 더 정확히는 무신론자로 '낙인' 찍히는 걸 두려워했던 것일테고 말이다. 그래서 근대 서양인은 '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신'으로부터 자유롭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다만, 중세철학자들이 '신의 존재'를 이성적(철학적)으로 증명하길 즐겼다면, 근대철학자들은 굳이 '신의 존재'까지 증명하는 것을 떠나 보다 더욱 '이성(생각)'에 집중하는 철학적 사유를 즐겼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런 '이성(생각)' 중심의 합리적 도출이 심화될 즈음에 '경험' 중심의 경험적 지식 습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철학자들이 등장했다. 바로 로크와 흄 등 '경험론'의 철학자들이다. 이들은 이성과 사유만으로 '실재 존재하지 않는 것'까지 이해할 수는 없다면서 '경험'을 통한 지식 습득만이 보다 완전한 '실존'을 이해하는 척도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데카르트, 스피노자 등의 '합리론'과 로크, 흄 등의 '경험론'은 서로간의 논쟁을 통해 더욱 세련되게 다듬어지게 되었으며, 이후의 철학자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던져주는 멋진 모습을 보여준다. 이를 집대성한 위대한 철학자가 바로 '임마누엘 칸트'다. 그는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 비판>을 통해서 근대철학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업적을 남겼다. 이후 '헤겔'에 의해 서양의 철학은 '변증법'을 통해 '정-반-합'이라는 끊임없는 성찰을 하면서 밝게 빛나는 지성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이후의 '현대철학'은 더욱 세심하고 정교한 철학적 사유를 하게 될 것이다. 그 내용은 <이 책의 3권>에서 다루게 될 것이고 말이다. 역시, 리뷰 올리겠다.

 

  어느날 문득, 내 손에 들려진 책속에서 재미와 즐거움을 찾는 일은 유익함을 넘어 '기쁜, 그 잡채'가 되곤 한다. 이 책도 그렇다. 모쪼록 더 좋은 책이 많이많이 출간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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