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택청약의 모든 것 - 한국부동산원 청약홈이 선보이는 대한민국 주택청약 바이블
한국부동산원 지음 / 한빛비즈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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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대한민국에 살면서 '내집 마련'만큼 간절하고도 어려운 것이 또 있을까? 그토록 간절하기에 해마다 주택(아파트) 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라도 수많은 젊은이들은 대출로도 모자라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을 해서라고 수도권에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하고자 노오오오력을 했건만, 돌아오는 것은 가파른 금리인상으로 인한 '대출이자 상승'으로 빚더미에 빠지고 말았다. 정말 이렇게까지 '내집마련'에 올인하는 삶을 살아야만 하는 걸까?

 

  한편, 내집 마련의 꿈을 이루기 위해 절묘한 한 수가 있었으니, 바로 '주택청약'이다. 청약을 통해서라면 '일반 분양'보다 훨씬 이득이 되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왜냐면 청약으로 내집을 마련하면, 일반 분양보다 비교적 빠르게 '입주'가 가능하며, '분양가상한제'이라는 제도를 통해 입주하기 전에 체결한 '계약금'보다 훨씬 오른 중도금을 치르거나 '늦어진 입주'로 인해 분양가가 인상되어 계약했던 금액보다 훨씬 더 많은 잔금을 치룬 뒤에야 겨우 입주할 수 있는 불편함을 대폭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약에 당첨되는 것을 '로또'에 비유하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청약에 당첨되었다고 '내집 마련'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청약 당첨은 그야 말로 '시작'에 불과하며 '부적격취소'를 당하지 않고, '중도금'을 꼬박꼬박 정확한 계획 아래 다 치루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입주'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청약으로 내집 마련의 꿈을 완수하기 위해선 철저하고 꼼꼼한 공부가 선행되어야 한다. 왜냐면 그동안 정부는 '청약의 공정성'을 높이기 위해 꽤나 복잡한 절차와 심사를 거쳐 당첨자를 선정해왔기 때문이다. 물론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고, 투기과열과 같은 부작용을 근절시키기 위한 조치였고 말이다. 무엇보다 '주택청약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못 알아먹을 전문용어'들 때문에 쉬이 이해하고 절차를 따라하기 힘들다고 한다. 그럼에도 '단 한 번'이라도 공모에 참여해봤다면, 이후에는 비슷한 과정에 따라 진행되기 때문에 마냥 어렵지만도 않다고 하니 지레 겁을 먹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특별히 이 책, <주택청약의 모든 것>에 '1순위 당첨비결의 모든 것'이 낱낱이 밝혀져 있으니, 청약에 관심이 있거나, 청약을 통해 내집 마련 계획을 짜실 분이라면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으면서 '복잡한 절차'와 '어려운 용어'를 먼저 학습한 뒤에 도전을 하신다면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난 엉뚱한 고민을 했더랬다. 사실 오랜 의문이기도 했는데, 왜 하필 대한민국에서는 '내집 마련'이 이토록 어려운 일이 되었느냔 말이다. 주택 물량이 딸리는 것도 아니고, 해마다 '신도시 계획'에 따라 새로 분양 될 아파트는 점점 늘어나고 있으며, 저출산으로 인해 인구는 눈에 띄는 증가세를 멈추고 제자리걸음을 한 지 오래 되었는데도, 집값은 점점 올라 갈수록 구하기 힘들어지는 기이한 현상이 해마다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오름세가 주춤하고 '하락세'로 돌아섰다고 하지만, 여전히 서민들의 피부에는 와닿지 않고, 여전히 집값은 비싸디 비싸 구매하기 힘든 것은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외국의 경우에는 '99년 임대'와 같은 방식으로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집 걱정'을 하지 않고 '의식주'에 대한 고민을 거의 하지 않은 청춘들이 저마다의 꿈을 펼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부럽기 그지 없었기 때문이다. 40대 후반이 되어서도 '내집'을 갖지 못한 나로서는 정말 '걱정 없이'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그저 부러울 따름이었다. 정녕 대한민국에서는 불가능하단 말인가?

 

  사실 '자본주의' 속에서 살아가는 한 딱히 뾰족한 방법은 없어 보인다. 수요와 공급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에 좌우되는 아파트 시세는 이미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워져서 차라리 그냥 포기하고 사는 것이 더 속 편한 세상이 되고 말았다. 아무리 주택청약과 같은 방법으로 우리 청년들을 돕고 있다고 하지만, 청년들이 빠져들고 만 시름을 덜어주기엔 너무나도 동떨어진 해법인 것을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운'에 따라 결과를 맡기는 '당첨'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말이다. 오죽했으면 '청약 당첨'을 로또에 비유하겠느냔 말이다. 그만큼 혜택을 받는 젊은이들이 '희박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한, 청약에 당첨되었다고 하더라도 엄청난 액수의 대출을 받지 못하면 어렵사리 당첨된 주택청약도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리기 일쑤다.

 

  이런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청년임대주택'이라는 카드를 꺼내들기도 했지만, 이 또한 허울 좋은 눈가림에 불과한 까닭은 '20년'이란 짧은(?) 기간 때문에 늦은 결혼으로 육아와 자녀교육 등으로 한창 살림살이가 팍팍해질 40대에 또다시 '주택 걱정'을 해야 하는 자충수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럴 바에야 '50년 임대', 아니 '평생보장임대'라는 정책을 내놓으면 되지 않을까 싶다. 요즘 건축기술로 5~60년 이상 거뜬하게 버틸 수 있는 튼튼한 아파트를 짓지 못할 것도 아니니 말이다.

 

  물론, 아파트(주택) 건설이 한두 푼 드는 사업이 아니기 때문에 '사고 파는 대상'으로 삼아 자유로운 시장경제 속에서 기업의 관리 아래에서 건실히 운영되게 만들어서 정부와 국민들의 부담을 덜어보기 위해서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리고 '청약제도'를 통해서 그 부담을 덜어주는 방법을 마련하는 정부의 노력도 잘 알고 있다. 허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서 '경제적으로 취약한 서민들의 고민'까지 덜어주는 획기적인 방법을 짜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더구나 정상적인 투자가 아닌 '소수의 이득'만 챙겨주는 투기를 근절하지 못하고, 부의 상위계층과 사회적 지위가 높은 분들이 앞장 서서 '개인적인 부를 늘리는 비결'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 눈꼴 시릴 뿐이다. 서민들의 서러움을 일갈에 해소시켜주어야 할 '능력자'들이 오히려 '빌런(악당)'이 되어 약자를 서글프게 만드는데 일조하는 현실이 비극이란 말이다.

 

  그럼에도 현실은 '뜨거운 불만'을 잠시 마음속에 묻어두고 '차가운 이성'으로 살살 달래며 '주택청약 공부'로 직시해야만 할 것이다. 결코 그 뜨거움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 뜨거운 열정이야말로 대한민국을 더욱더 잘사는 나라로 만들 것이고, 선진국을 넘어 선도국가로 이끌어갈 '중심축(구심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뜨거운 가슴을 가진 젊은이들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자랑일지니, 그런 멋진 젊은이들이 고작 '주택마련' 때문에 골머리를 쌓게 만드는 비정한 현실을 안타까워할 따름이다. 비록 나의 젊음이 그랬을지언정 그들의 젊음마저 그래서는 안 되겠기에 덧붙여 보았다.

 

추신...참, 주택청약의 시작은 '청약저축(기왕이면 '주택청약종합저축')' 가입부터다. 가까운 시중은행에서 가입가능하며, 19세 이상부터, 기왕이면 10만 원/매월(1500만 원이상)이면 '1순위'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함.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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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영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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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에서 '시대배경'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아무 것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리고 '미국 문학의 자존심'이라고 불리는 까닭도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왜냐면 그냥 맥락만 볼 때면, '미국판 막장드라마'와 다를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을 '배경지식'도 없이 그냥 읽으면 그저 그런 '불륜소설'이고, 심지어 우리 나라 일일드라마보다도 재미가 없는 '통속소설'에 불과하다는 느낌만 받기 일쑤기 때문이다. 그래서 1차세계대전이 막 끝난 1920년대 미국 대호황의 시대를 이해하고 넘어가야만 한다.

 

  미국은 1차세계대전의 승전국이지만, 바다 건너 유럽대륙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참전할 생각까지는 전혀 없었다. 왜냐면 미국은 제5대 대통령이었던 제임스 먼로가 선언한 '먼로주의'에 입각해 바다 건너 유럽의 간섭을 받지도, 하지도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세기를 지나 20세기에 접어들자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당시 패권국가였던 '대영제국'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던 대영제국이 다른 제국국가들의 거센 도전을 받다가 부침을 심하게 겪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흔들리는 대영제국을 대신할 국가로 '미국'이 새롭게 등장하게 된 것이 바로 1차세계대전이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의 전황은 지지부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리고 독일의 공세는 점점 세찬 광풍처럼 불어재꼈고, 영국과 프랑스는 버티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웠기 때문이다. 이젠 미국의 도움이 절실해졌다. 엄청난 자원과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하는 '물량공세'가 승패를 가를 분수령이었던 것이다.

 

  이로써 미국은 참전을 선언하고 '막대한 이익'을 톡톡히 챙겼다. 마침내 '먼로주의'는 폐기되다시피했고 전후의 유럽에 '미국의 입김'은 거대해졌다. 그리고 산업기반이 완전히 망가진 유럽의 여러 국가들과 그들의 식민지에 '미국제 상품'이 쏟아지듯 들어갔다. 이로 인해 미국의 공장은 눈코 뜰새 없이 돌아가기 시작했고, 새로 지은 공장에서 만든 물건조차 만들자말자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미국의 경기는 가파르게 상승했고, 주식시장도 '파란불'을 잊은 듯 온통 '빨간색' 천지였다. 거짓말 조금 보태면 어제 산 1달러짜리 주식이 내일 아침에 눈을 떠보니 100달러로 오르는 일이 일상다반사였다. 투자를 하면 할수록 돈방석에 오르기 십상이었고, 급기야 미국사람들은 '흥청망청' 하루하루를 소비하는 것에 길들여졌다. 라디오, 냉장고를 비롯한 전자제품은 하나만이 아니라 방의 갯수만큼 사들이기 일쑤였고, 옷 같은 것은 하루 입고 버리는 등 돈을 써도써도 늘어나기만 했을 정도다.

 

  이렇게 흥청망청한 세상이 되면 으레 '날마다 파티'를 열어째끼며 온갖 향락을 즐기며 돈지랄을 하기 십상일텐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마침 미국에서는 '금주법'을 제정해서 술이 귀한 시대가 되고 말았다. 청교도적인 발상에서 착안한 '금주법'은 또 한 번 아이러니하게도 범죄조직인 마피아를 배불려주고 말았는데, 마피아가 이 당시 '밀주'를 제조하고 유통하며 판매까지 '독점'을 하며 엄청난 부를 쓸어담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본래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프기 마련이고, 몰래 들여온 술인 만큼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아 막대한 이득을 범죄조직이 챙기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 덕분에 '칵테일'이라는 술 비슷한 음료가 만들어지게 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이 당시 미국 사회 전반적으로 볼 때면 '파티' 같은 것을 열어 술에 취해 헤롱헤롱대는 모습을 보여주기 쉽지 않은 차분한 분위기였던 것이다.

 

  자, 그런데 이 책에서는 '매일밤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바로 개츠비라고 하는 비밀스런 인물에 의해서 말이다. 그는 아무도 초대하지 않았지만, 수많은 유명인사를 비롯해서 돈 깨나 있다는 사람들은 몽땅 개츠비의 집을 찾아와서 미친듯이 여흥을 즐겼다. 당시로서는 센세이션이 휘몰아치는 듯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분명 '실제'와 전혀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책이었을테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환락'을 배경으로 삼아 '불륜남녀'가 등장해 사랑을 나눈다. 청교도의 후예라고 자부하는 건전한 미국가정에서 이 책이 읽기에 끔찍한 책이라는 사실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래서 글쓴이인 피츠제럴드가 살아 생전에는 '그닥 많이 팔리지 않는 소설'이 되고 말았다. 그 덕분에 피츠제럴드도 비참한 생을 살다 불우한 죽음을 맞이했고 말이다.

 

  하지만 또 다시 아이러니하게도 이 소설은 '피츠제럴드의 죽음' 이후에 각광받기 시작했다. 미국 독자들이 대공황을 지나 2차세계대전까지 치르고 나니 '그 시절'에 대한 향수라도 불러일으킨 듯 '그 시대'를 배경으로 삼았던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부각된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평론가들이 이 책을 '미국 문학의 정수'가 고스란히 담겼다는 것에 틀림없다는 자부를 하였고, 독자들 또한 이에 호응하듯 '판매부수'는 나날이 늘어만 갔다. 21세기가 된 지금까지도 '순위권'에서 내려간 적이 없다고 하니, 이 책에 미국인들의 자부심이 곳곳에 담겨 있다는 평론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무엇이 그다지도 '미국스럽다'는 것일까?

 

  개츠비의 순수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앞선 리뷰에서 넘치도록 나불거렸으니, 이번에는 '데이지의 사랑'에 대해서 읊어보려 한다. 아무래도 데이지는 '영원한 소녀'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순진무구한 사랑'을 꿈꾸는 미 동부출신 아가씨다. 미국을 동서로 가르면, 동쪽은 부유한 귀족적이고 세련된 도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반대 방향인 서쪽 출신은 가난한 서민들이 일확천금을 노리고 '서부개척(골드러쉬)'에 나선 거친 시골스런 면모를 갖췄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개츠비가 바로 서부출신이고 말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출신배경'을 가진 남녀가 우연히 만나 사랑을 나누려 했으니 잘 될 턱이 없다. 그래도 데이지는 자신을 '공주 이미지'를 갖도록 추켜세워주는 귀족집안의 자제들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서민출신'이라고 할지라도 사랑을 베풀어줄 넓은 아량을 갖춘 듯한 '꾸밈'을 묘하게 잘 하는 그런 사랑꾼이었다.

 

  다시 말해, 데이지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였기에 자신과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재능을 타고났다. 이런 데이지에게 강렬한 첫사랑으로 등장한 남자가 바로 '개츠비'였다. 개츠비는 잘 생겼고 매너 좋았으며, 비록 '서민출신'으로 가난했지만 매력적인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자신'에게 푹 빠졌으니 귀족아가씨가 사랑을 베풀어주기에 딱 좋은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데이지는 개츠비와 불 같은 하룻밤을 보낼 정도로 사랑을 했다. 하지만 개츠비가 데이지를 얻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고, 명예와 사회적 지위 따위가 필요했던 것이다. 서민출신인 개츠비가 전쟁에 참전하게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물론 당시 미국 젊은이들은 '전쟁영웅'이 되고 싶다는 열망에 부풀어있기도 했지만, 정의를 실현시키기 위해 악당을 물리칠 '의무' 같은 것에 더 끌려서 참전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개츠비에게는 돈과 명예를 얻어 '데이지'를 쟁취해야 할 목적이 더 분명했다.

 

  하지만 데이지는 개츠비를 기다리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데이지는 천성적으로 '사랑'을 갈망하는 타입이었고, 순수한 사랑보다는 뜨거운 사랑에 더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젊은 아가씨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 많은 귀족가문의 톰 뷰캐넌을 만나 결혼을 하는 것에 크게 거부감도 없었다. 마침맞게 결혼식날 날아온 '개츠비의 편지' 때문에 결혼식이 무산이 될 뻔하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신혼여행을 떠난 데이지는 톰과 찐한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이것이 훗날 다시 만난 '개츠비'에게 돌아갈 수 없게 한 이유였고 말이다. 결국 데이지는 '사랑, 그 잡채'를 원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 가져다주는 환상과 허영에만 만족하는 '실속' 챙기는 여자였던 것이다. 속물의 대명사로 일컫는 '동가숙서가식'을 꿈꾸던 그 여인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끝내, 데이지는 모순덩어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자신을 두고 바람을 피우는 남편, 톰에게 배신감을 느끼면서도, 그가 가져다주는 '사랑의 징표' 따위에 헬렐레하고 마는 공주였다. 잠시 잠깐 '다시 돌아온 연인, 개츠비'와 만나서 '사랑의 추억'을 담뿍 느끼며 설레였지만, 거기까지였다. 데이지는 결코 '사랑의 도피' 같은 걸 할 수 있는 용기 따위는 없는 여자였다. 어쩌면 데이지는 톰과 개츠비를 오가며 '이 사랑, 저 사랑'의 단물만 쏙쏙 빼먹으며 지내는 것을 찐행복이라고 여기며 살았을 것이다.

 

  오, 그렇지만 이런 데이지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왜냐면 토마스 뷰캐넌도 도덕군자처럼 입바른 소리는 곧잘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두고서도 '욕정에 불타오른 유부녀'와 달달구리한 섹스를 탐하고 또 탐하는 '욕망덩어리'였기 때문이다. 모순덩어리와 욕망덩어리가 부부라니, 정말 잘 어울리지 않은가?

 

  현대인들은 어쩔 수 없이 모순과 욕망을 품고 살아간다. '해서는 안 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선악과'를 따먹을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후손이기 때문일까? 겉으로는 이성을 지키는 척하지만 '남들 눈에 띄지만 않는다'면 본능에 충실한 유전자를 품고 있기 때문인걸까? 세상 가장 맛있는 사과는 '훔친 사과'라는 말도 안 되는 늘어놓으며 키득거리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정말로 많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책은 '개츠비의 순수함'이 더욱 돋보이기 마련이다. 세상 모두가 타락해도 오직 '개츠비'만은 사랑을 믿고, 사랑으로 움직이며, 사랑만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정말 읽으면 읽을수록 매력적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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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60선 41 : 논어 NEW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60선 41
서기남 지음, 신명환 그림, 손영운 기획 / 주니어김영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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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철학을 너무 어렵게 생각한다. 왜 그런가하고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우리는 철학을 공부할 때, '철학, 그 잡채'가 아닌 '철학자의 위대함'만을 떠들곤 한다는 것을 새삼 느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철학에서 말하는 '인식론'이니 '존재론'이니, 또는 '영국의 경험론'이니 '대륙의 합리론'이니 뭔가 그럴듯한 이론들만 늘어놓고, 그걸 애써 끄집어내고 발견(?)해낸 철학자들의 업적(!)만을 나불거리곤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선생님들이 먼저 '위대한 철학자의 위상'에 짓눌려서 학생들 앞에서 꺼뻑 죽는 소리를 하니, 그런 '철학자들의 위대함'만을 듣고 배운 학생들은 그런갑다하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 십상이다. 이러니 철학을 전공한 이들조차 '자기만의 철학'을 내세우기보다는 고작 '철학자의 위대함'을 해석해서 들려주고 말 뿐이다.

 

  그렇게 철학자들의 똥꼬만 추켜세워줄 바에야 '철학'을 아예 모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모름지기 철학이란 '비판의식'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위대하다면 '그의 철학'에 비판할 틈이 없을 정도로 빈틈이 없다는 것에 주목하고, 그럼에도 그가 남긴 '빈틈'을 찾아내서 더 위대하고 완벽한 철학으로 가다듬는 것이 '후학들의 의무'일 것이다. 훌륭한 학생들을 가리켜 '청출어람'이라 했거늘, 스승보다 더 나은 제자가 될 생각은 애당초 '시작'도 하지 않고, 어찌 철학을 배웠다고 할 것인가? 그렇기에 철학은 배우고 난 다음에 더욱 갈고 닦아 빛내야 '대상'에 불과하다. 그러니 '철학자의 위대한 똥꼬'만 바투 세우는 '철학공부'는 애초에 생각도 하지 말 것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개똥철학'일지라도 '자기만의 철학'을 시작하라. "소크라테스가 그랬대? 하지만 내 생각은 달라!", "데카르트가 요랬대? 하지만 내 생각은 이런 걸!", "칸트가 그랬어? 그럴 듯 한대, 나라면 이렇게 하겠어"...얼마나 멋지냔 말이다. "나의 철학은 이렇다"는 말을 왜 못하냔 말이다. 너무나도 위대한 철학자들의 뿜어내는 밝은 빛에 어둠마저 가려지듯, '나의 철학'이 너무나도 초라해서 감히 말을 할 수 없기에, 그렇다는 변명 따위는 할 생각도 하지 마라. 그런 철학나부랭이를 나불거릴 거면서 뭣하러 '철학공부'에 뛰어들었단 말인가. 우리 속담에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랴'는 말이 있다. 장을 담그다보면 곰팡이도 피고, 구더기도 끼고, 그런 법이다. 그럴 때 우리 어머님들은 슬기롭게 곰팡이 핀 부분을 걷어내고, 구더기가 끼지 못하게 고추도 띄우고, 망도 갈아주고, 이 항아리에서 저 항아리로 장을 옮겨담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며 알뜰살뜰 장을 담가오셨다. 그렇게 우리 음식에 '깊은 맛'을 내주는 비법인 '장 담그는 법'을 전통으로 살려내 지금의 우리 음식에 다채로운 맛을 내주는 '근본'이 된 것이다. 어떻게 이제 '철학공부'를 제대로 할 생각이 좀 드는가?

 

  각설하고, 성현들의 위대한 가르침인 '철학'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는 '비판의식'이다. 다시 말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질 준비를 하라'는 말이다. 그래야 오래 전의 철학이 오늘날에 다시금 생생히 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끔 특정종교의 '근본주의자'와 같이 철학자들의 사상을 맹신하며 '토씨 하나 틀림이 없어야 한다'는 그릇된 자세로 공부하려 드는 어리석은 사람들도 많은데, 그럴 거면 '철학자'가 아니라 '종교가'가 되길 권한다. 철학은 얼마든지 비판이 가능하지만, 종교에서는 비판은 금물이기 때문이다. 비판도 하길 꺼린다면 차라리 '철학공부'를 그만 두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기에 이 책, 공자님의 말씀인 <논어>도 날카로운 질문으로 시작해 날카로운 질문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자세다.

 

  한편, <논어> 좀 읽어보았다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하길, "옳은 말씀이긴 한데, 오늘날에는 잘 안 맞아"라고 떠들곤 한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공자가 살던 '춘추시대'에도 똑같은 말을 수많은 사람들이 떠들곤 했다는 점이다. 그 까닭은 공자는 너무 '예법'을 따지고, '도덕'으로 세상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고리타분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21세기를 사는 현대인이 보기에 그렇다는 것은 쉬이 이해가 되는 바지만, 2300여 년 전에도 '그런 소리'를 들었다고? 그렇다면 공자가 말한 '유교사상'이란 오늘날에도 낡고, 과거에도 '낡은 사상'이었단 말일까?

 

  좀 따져보자. 공자의 제자들이 썼다고 전해지는 <논어>에는 '인(仁)'이란 글자가 가장 많다고 한다. 그리고 공자는 툭하면 '예의도덕'을 강조하고, 그것으로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주장한 철학자이다. 사실 '춘추시대'라는 것이 '힘의 논리'로 모든 것을 해결하던 막 되먹은 세상이었기에, 옆 나라에서 힘을 길러 쳐들어올 것이 두려워 공자께 여쭈면, 공자는 "임금께서 몸소 예를 다하면, 신하들도 옳은 일이라 여겨 그대로 따라할 것이고, 백성들도 저절로 감화를 받아 그른 일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니, 나라가 태평해질 것입니다. 나라가 태평해지니 백성들도 살기 좋아 열심히 일을 해서 부를 쌓을 것이고, 신하들도 바른 정치로 나라를 부강하게 할 것이니, 어찌 이웃나라가 넘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임금께서 예를 다하시면, 그들도 바른 나라를 치는 것이 부끄러워 감히 쳐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내용으로 설교를 했다고 한다. 틀린 얘기는 하나도 없지만 '현실성'이 떨어지는 답변이라고 생각하기 일쑤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국제관계도 '첨예한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보면, '춘추시대'와 다를 바가 전혀 없다. 이런 각박한 현실에서 '예의도덕'을 말하면 고리타분한 몽상가로 보이기만 할까? 그렇다면 '예의도덕'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오로지 '강 대 강'으로 강력한 무기를 선점해서 이웃나라에게 힘을 과시하며, 여차하면 '이토록 강력한 무기로 선제공격을 할끄얌!'이라고 떠세를 부리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해법'이란 말인가? 공자도 적군이 쳐들어오면 용감하게 맞서 싸우라고 했을 것이다. 염치고 나발이고, 당장 죽게 생겼는데, 날아오는 미사일에 대고 호통을 친들 무슨 소용이겠냔 말이다. 다만, 아직 그렇게 공격 당할 것 같진 않으니, 먼저 '나라살림'부터 관리하고, 백성들의 '민심'부터 달래주어 부국강병의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한 해법이라고 제시했을 것이다. 더구나 공자는 '학자'이자 '선비'인데, 전쟁에 대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전쟁전문가'와 같은 답변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가 생각한 바른 나라란 무엇일까? 문제를 해결할 평화적인 방법이 단 하나라도 남았다면 '그것'부터 시행한 다음에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나라의 모든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온국민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길 망설이지 않는 나라라고 본 것 같다. 공자가 말한 '예의도덕'이란 그런 큰 힘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온 국민이 '부끄러움(염치)'을 알고 불의를 참지 않으며 어진 마음으로 공명정대하게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는 힘'을 발휘한다면, 저절로 부국강병한 나라가 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나아갈 길도 바로 그렇다고 본다. 이제는 '선진국'을 넘어 '선도국가'로 거듭나야하는 마당에 자꾸 발목을 붙잡고 나아가질 못하게 하는 '어질지 못한 무리들'이 있기 때문이다. 누구라고 지목하지 않아도 눈에 뻔히 보인다. 왜냐면 우리는 경험을 해보았기 때문이다. 세상 어디에서도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내걸면 한없이 자랑스럽고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던, 그 경험 말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불의스럽고 뻔뻔한 행동을 하는 나라들에게 부끄럽지 않느냐고 준엄하게 꾸짖었던 경험도 말이다. 적반하장으로 대한민국을 면박 주려던 '그 나라들'에게 대한민국은 어질지 못하고 부끄러운 짓을 일삼는 자들에게 "부끄러운줄 알라"고 당당히 말할 용기있는 국민들이 있다고 행동으로 보여준, 바로 '그 경험' 말이다. 지금 공자가 살아있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예와 도덕이 살아있는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구나"하고 말이다.

 

  물론, 이 책 <논어>에 '대한민국'과 관련된 그런 말은 담겨 있지 않다. 하지만 철학공부가 '공자님의 말씀'을 그대로 읊어야 하는 것이라면 하지 말라는 의도로 몇 자 적어봤다. 한때는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면서 공자의 말씀을 '전근대적인 낡은 사상'으로 싸잡아 퉁쳐서 '버려야 할 것, 1호'로 낙인을 찍었다는 것에 어이가 없었다. 어찌 '낡은 사상'이 공자왈 뿐이겠는가. 철학이란 늘 새로운 것이어야 마땅하다. <논어>에도 '온고지신'이라 하지 않던가. 옛 것을 배워 새롭게 하라고 말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선도국가로 나아가려 함에 '나침반'이 필요할 것이다. 그 나침반에 꼭 필요한 것이 '철학'이라는 것에 반박할 이는 드물 것이고 말이다. 다만 '철학, 그 잡채'에 매몰되어 '낡은 사상'에만 매달리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지 않으면 된다. 이제 오래 묵혀두었던 <서울대선정 인문고전>을 끄집어내어 하나하나 써내려 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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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 - 입문자를 위한 철학
김현강 지음, 안스가 로렌츠 그림, 김현강.신성엽 옮김 / 인간사랑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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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라보예의 책은 두 번째다. 그리고 참 만족스럽다. 난 '몸소 실천하는 철학자'를 좋아한다. 생각만으로 그쳐 '세상 바꾸기'에 전혀 관심이 없는 철학자는 그저 '말 많은 수다쟁이'라는 느낌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마르크스를 좋아한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현실에 투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바꾸기를 망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꿈꾸던 공산주의는 '노답'으로 귀결이 되었지만, 그의 사상은 끝없이 변주되면서 '자본주의'를 바로 잡는데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훌륭한 철학자였기 때문이다. 여기 '슬라보예 지젝'도 마르크스 못지 않은 철학자임에 틀림없다.

 

  슬라보예는 1949년 슬로베니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정신분석학'을 연구하며 라캉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지만, 그저 그런 학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치계'에 입문하여 대통령체제에 도전하는 등 자신의 사상을 현실에 접목시키려 한 '실천가'이기도 했다. 또한, 그의 사상은 마르크스의 영향을 진하게 받고 있으며, 오늘날에는 '포스트구조주의'의 범주에 속하는 철학자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그리고 슬라보예는 '농담'을 즐겨 한다. 물론, 그의 농담에는 뼈도 있고, 가시도 있다. 그가 농담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동구권 출신'이며, '사회주의 정치 색채'가 물씬나는 지역에서 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가 즐기는 농담이 목숨을 걸고 내뱉을 정도로 나치나 공산당의 감시와 같은 것들이 팽배한 '독재정권의 그늘'이 짙게 깔려 있는데도, 거침없이 내뱉는 그의 용기에 박수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실제로 그의 저적들은 한결같이 유머러스함이 빠지지 않아 철학적인 내용인데도 쉽게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그득하다.

 

  그 가운데 이 책은 <슬라보예 지젝>이 '어떤 사람'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게 해주는 친절한(?) 책이다. 마치 그의 '연대기'를 연상케하는 내용을 뼈대로 삼아 '그의 사상'을 일목요연하게 늘어놓으며 설명해주고 있어 '슬라보예, 그는 누구인가'라는 부제가 어울릴 지경이다. 이와 함께 '근현대 철학사상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이 함께 수록되어 있는데, '슬라보예의 철학사상'이 어떻게 정립하게 되었는지도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철학은 역시 철학이다. 잘 정리된 듯한 내용을 간략하게나마 옮기려고 해도 결코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철학을 멀리할 필요는 없다. 왜냐면 철학의 핵심을 가장 잘 설명한 '헤겔의 변증법'으로 철학을 간략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철학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철학'을 비판하는 것에서 시작하고 끝맺기 마련이다. 이를 헤겔은 '테제-안티테제-진테제'라는 '정-반-합'으로 요약했다. 다시 말해, '기존 철학사상'을 '비판'하는 철학사상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철학사상'이 나온다. 이렇게 새로운 철학사상은 다시 '기존 철학'이 되어 '또 다른 비판'을 받고 '새로운 철학'으로 거듭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철학자들의 거듭된 비판의 내용들'을 정리하다보면 자연스레 '철학사상의 흐름'이 눈에 들어오기 마련인데, 그 심오하고 복잡하며 방대한 내용을 간략히 설명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어쨌든, 슬라보예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 '정신분석학(라캉)'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그의 사상의 핵심은 '윤리적이면서 폭력적'이다. 정신분석학에서 '윤리'는 도덕적인 선함과는 결이 다르다. 오히려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쪽에 윤리적인 탓이다. 오히려 욕망에 거스르려할 때 상황이 악화되기 십상이니, 욕망에 충실하라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것이다. 허나 욕망이 '성적쾌락'과 같은 수준이하의 것을 대변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히 한다. 그는 '성차별'이 아닌 '성차이'를 뚜렷히 밝히며 여성을 비하하는 부류들에게 통쾌한 어퍼컷을 날리길 아끼지 않는다. 한편, 슬라보예는 '폭력'을 지지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지만, 그에게 '폭력'이란 '혁명'에 가깝다. 다시 말해, 엿 같은 세상을 시원하게 바꿔버리기 위해서는 '폭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슬라보예는 자타공인 '마르크스주의자'인 셈이다.

 

  물론, 마르크스가 꿈꾸던 '공산주의'는 오늘날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공산당'은 히틀러의 나치와 더불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대명사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래서 '공산주의'는 입에 올릴 것도 없게 되었다. 하지만 공산주의의 반대 개념인 '자본주의' 역시 노답인 상황에 처하자 세계의 석학들은 다시금 '마르크스주의'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극단적인 사상가들은 "2008년 이후, 자본주의는 이미 끝났다"고 주장하면서, 대표적인 자본주의 폐해인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해소할 수 있는 자본주의적 방법은 없다고 단언할 정도다. 자본주의를 맹신하는 우리 사회도 '수저 계급론'을 펴며, 금수저는 태어날 때부터 입에 무는 것이지 흙수저가 아무리 노력을 한들, 감히 들어볼 수조차 없게 된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이 '소득의 재분배'의 한 형태인 '기본소득제도'인데,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세력들은 '빨갱이' 운운하며 극렬하게 반대하는 실정이다. 이들은 '능력'대로 먹고 사는 것이 바람직한 사회를 만든다고 맹신하고 있기에, '기회의 평등'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면서 오로지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위한 규제철폐를 목놓아 외치고 있다. 대한민국의 상위 1%에 해당하는 금수저들의 외침이라면 이해하고도 남을 현상이지만, 웃기게도 99%에 해당하는 '흙수저'들이 '자유시장경제'를 훼손하고,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고, '소득의 재분배'를 하는 것에 부정적인 여론을 형성하는 일에 열심이다.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지만, 이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를 접목시켜 수많은 '복지정책'을 펼침으로써 겨우 유지되고 있는 형국이다. 쉽게 말해, 상위 0.1%가 하위 99.9%의 부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부를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토록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형평에 맞게 '복지정책'을 강화하며 경제적으로 몰락하는 '빈곤층'이 더 많아지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다수의 국민들은 '가난은 게을러서 생기는 질병'쯤으로 여기고서 늘어나는 빈곤층을 그대로 방치하여 소멸시켜버리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이는 '착각'이다. 빈곤층은 게을러서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노력해도 잘 살 수 없는 '구조적 문제점' 때문이다. 이는 마치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하고 돈을 모아도 '내집(아파트) 마련'에 실패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과연 대한민국 국민들 태반이 게으름이라는 질병에 걸렸단 말인가?

 

  오늘날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하는 것은 공산주의자라서가 아니다. 일찍이 마르크스는 '노동자의 착취'로 말미암아 '자본가의 배만 불려주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노동자가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는 사회를 실현시키려 노력했다. 나의 노동이 '내 조국'을 건실하게 만들고, '우리 사회'를 부강하게 만들며, '내 가정'을 먹여 살리기에 모자람이 없다면 힘든 줄 모르고 즐거이 할 것이다. 그런데 '내 조국', '우리 사회'를 튼튼하게 성장시키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소수 재벌의 사치와 향락'을 위해서 수탈 당한 것을 알게 되었다면, 나아가 정부가 재벌들을 비호하고 노동착취를 보장하며 '내 가정'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굶주려 모아둔 목돈을 날름했다면, 이를 그저 '방관'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한 목소리로 외친다.

 

  과거에는 이를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고 외쳤겠지만, 이제 우리의 혁명은 '촛불'이다. 촛불을 들고 한 목소리로 외치면 '혁명'이 완수되는 놀라운 경험을 우리는 해보았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전세계는 대한민국이 '선진국'이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우리는 가장 '혁명(폭력)적인 방법'이면서도 가장 비폭력적인 방법인 '촛불의 위력'을 전세계에 선보였다. 이는 오직 '대한민국'에서만 이룩한 위대함이다. 이런 위대함이 '전통'으로 자리매김하고 이어지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제 다시 촛불을 들 시간이 오는 듯 하다. 또 한 번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 것이다. 비겁한 무리배들은 요란스럽게 목청을 높이고 난리법석을 떠들겠지만 말이다.

 

인간사랑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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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 살인 사건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애거서 크리스티 에디터스 초이스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남주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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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학시절에 난 '추리소설'에 푹 빠졌더랬다. 어릴 적부터 기괴하고 신비스런 '오컬트 문화'에 심취해 있던 참에 '살인사건'을 추리해나가는 명탐정들의 활약에 금세 매료되고 말았다. 그 덕분에 코난 도일과 애거사 크리스티, 그리고 모리스 르 블랑의 작품들을 읽고 또 읽었던 추억이 있다. 물론 그밖의 여러 탐정소설도 읽긴 읽었지만, 줄곧 위 세 사람의 작품만 줄기차게 읽었더랬다. 아무래도 나의 취향이었나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코난 도일은 너무나도 유명한 '셜록 홈즈'가 등장해서 좋았고, 모리스 르 블랑은 <813의 비밀>, <기암성>에서 '이지톨'이라는 소년탐정이 등장해서 정말 좋아했지만, 유독 애거사 크리스티의 책에서는 '탐정'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물론 어른이 된 지금은 '에르퀼 푸아로'라는 명탐정을 인식하고 있지만, 어릴 적에는 유독 애거사의 탐정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살인사건, 그 잡채'에 신선함을 느꼈던 모양이다. 왜 그랬을까? 하긴, 르 블랑의 '뤼팽 시리즈'에서도 난 뤼팽보다 소년탐정 이지톨이 더 좋았으니, 그럴 수 있겠다 싶지만, 유독 '왜 그랬을까?'라는 의문이 여전히 남는다. 하긴 '미스 마플'도 잘 기억나지 않긴 마찬가지다. 그저 '사건, 그 잡채'만이 선명할 뿐이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살인사건이 일어났는데 '알파벳 순서'대로 살인사건이 진행된다는 신선한 충격에 좀처럼 헤어나질 못하고, 사건이 미궁에 빠져 '끝까지(Z까지)' 이어지길 기대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어릴 적의 나는 '나의 기대'를 무참히(?) 무너뜨려버린 푸아로에 대해서 '반감'마저 들었던 모양이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참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어릴 적부터 남들과는 다른 '기발한 착상'을 했었다는 소박하나마 뿌듯함으로 풀이해보고자 한다.

 

  암튼, 책의 줄거리는 '살인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탐정인 '푸아로'와 동료인 '헤이스팅스'의 대화로 시작한다. 이것은 살인사건의 대한 '포석'이자, 이야기를 '전개'시키기 위한 준비과정이라고 볼 수 있지만, '홈즈와 왓슨'의 대화로 시작하는 코난 도일과의 유사성이 엿보인다. 하긴 두 작가 모두 '영국작가'이니 그런 듯도 싶지만, 대부분의 '추리소설'은 이런 전통(?)을 따르곤 한다. 왜냐하면 이런 스타일로 소설의 시작을 장식하면 뒤이어 벌어질 '사건개요'를 잘 설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명탐정'이라는 점을 새삼 부각시킬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명탐정'에게 동료나 조수가 항상 같이 붙어있다는 점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아무래도 '자화자찬'보다는 '곁에서 띄워주는 사람'이 있어야 객관적인 신빙성이 높아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아울러, 명탐정을 돋보이게 하는 효과는 또 있다. 그것은 '추리소설'속의 경찰이 언제나 '무능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수사'나 '증거수집', 그리고 '범인검거' 등 공권력의 권한은 자신들에게 있으면서도 언제나 '명탐정과 동료'보다 뒤쳐지거나, 엉뚱한 수사나 범인을 잡아들이고, 뻔히 보이는 단서조차 허술하게 놓쳐버리고서 모든 공을 '명탐정'이 차지하는 수법을 곧잘 쓰곤 한다. 정말 뻔한 수법이지만, 추리소설을 읽는 맛, 또한 이것 뿐일 것이다. 안 그런가?

 

  그럼 <ABC 살인사건>의 매력을 진단해보자. 으레 추리소설을 읽다보면 '범인찾기'에 푹 빠져들곤 한다. 그래서 '등장인물'이 하나둘 나올 때마다 '의심'의 눈초리로 사소한 단서 하나라도 놓칠세라 유심히 '관찰'하며 탐독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재빠르게 '단정'짓곤 한다. "범인은 바로 너야!"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소설속 명탐정처럼 조목조목 근거를 대지는 못하고 대개 '찍는 수준'에서 그치고 만다. 하지만 추리소설을 제대로 맛보려면 섣불리 찍지 말고, 범인일 수밖에 없는 근거(이유)를 찾아보는 것이다.

 

  이 책의 매력은 바로 '범인찾기'에 꼭 필요한 단서가 차근차근 들어난다는 점이다. 애초에 '살인사건'이 일어났을 때 푸아로는 범인이 누구인지, 왜 범행을 일으키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명색이 '명탐정'이라면서도 날카로운 예지력으로 '살인사건'을 막지도 못하면서 그저 '범인이 직접 보내는 편지'만을 기다리며 계속 일어나는 '연쇄살인사건'을 그저 방조하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이는 분명한 까닭이 있다. 바로 '단서'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애초에 '모든 단서'를 주어지고 난 뒤에 추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조각난 단서'를 하나씩 모아 완성하듯 찔끔 질끔 단서를 던져주고 있다. 그래서 명탐정으로 소문난 푸아로조차 사건해결은커녕 '범인'이 누군지도 지목하지 못하고, '살인사건'을 막지도 못한다. 조금씩 드러나는 단서가 '살인사건, 그 자체'인 까닭이다.

 

  그렇게 살인사건은 A로 시작해서, B를 지나, C도 지나, D까지 벌어지고 만다. 하지만 C까지 이어져오던 범인의 '완벽한 살인사건'이 D에 이르러서는 왠지 모르게 어설프고, 성급하기도 했으며, '결정적 실수'를 하고 만다. 추리소설 마니아쯤 되면 바로 이 '결정적 실수' 때문에 범인이 누군지 확신하게 되고 명탐정보다 더 빨리 '범인검거'를 위한 증거수집을 끝마쳤을 것이다. 왜냐면 '범죄를 저지르는 까닭'이 몇 가지 없기 때문이다. 첫째는 원한이나 복수 때문이고, 둘째는 사랑과 질투, 배신 같은 감정 때문이며, 셋째는 금전적 이득 때문에 범죄를 저지른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추리소설>을 읽을 때면, 누가 누구에게 원한을 품었거나, 누가 누구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리고 범죄가 일어난 뒤에 누가 '이득'을 챙겼는지 꼼꼼히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당신도 명탐정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범인이 밝혀지고 나면, 왜 범죄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 또는 왜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는지 '뒷이야기'를 풀어가는 스토리를 즐기면 된다. 그리고 이 스토리가 감동적이거나,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짜릿하거나, 뒷통수를 후려맞은 것처럼 반전이 드러나면 '명작추리소설'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 크리스티의 작품은 대개 '반전'을 주는 쪽이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범인이었거나, 기발한 범행수법, 그리고 기막한 반전 따위가 '추리소설의 매력'인데, <ABC 살인사건>은 이 세 가지 매력조건이 적절히 믹싱되어 '감칠맛'이 최고인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애거사 크리스티가 1920년부터 70년까지 활발히 작품을 써왔으니 '100주년 기념'을 맞아 다시금 조명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 올해 <나일강의 죽음>이 영화화되었으니 벌써 기념은 시작된 셈이다. 나도 새삼스레 '애거사 크리스티의 작품'을 다시 읽으며, 리뷰를 새로 써볼까 한다. 나도 3~40년 전에 읽었던 작품들을 다시 읽게 되는 셈이다. 옛 추억에 풍덩하고 빠져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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