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전략을 위한 AI 인사이트
이호수 지음 / 한빛비즈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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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설하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AI(인공지능)의 개발은 상당히 일찍 시작되었다. 2차 세계대전 때, 엘런 튜링이 독일군의 암호(애니그마)를 해독하기 위해 만든 컴퓨터를 시작으로 '인간보다 더 똑똑한 지능'을 갖춘 컴퓨터의 등장이 곧 찾아올 거라고 꿈에 부푼 과학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결실은 1950년대에 들어서 실제로 실현되었다. 무엇이든 '과학연구'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기 마련인데, 정부가 과학자들의 연구자금을 대기 시작하면서 활기를 찾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AI 개발에 혹독한 겨울이라고 불리는 시기가 찾아왔다. 일명 '치와와-초코칩쿠키 사건'이라고 불리는 난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막대한 연구자금을 쏟아부었는데도 당시의 인공지능 컴퓨터는 '개와 초코칩쿠키'를 찍은 사진을 분류해내지 못하는 엉뚱한 결과(명백한 오류)가 속출했기 때문이다. 이런 오류를 고치기 위해 '정확도'를 높이고자하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거나 슈퍼컴퓨터를 총동원해야 하는 사고들이 빈번했다. 고작 '사진 한 장' 분류해내는데 말이다.

 

  이때부터 '인간에게 어려운 건 AI에겐 쉽고 AI에게 어려운 건 인간에겐 너무 쉽다'는 말이 나왔다. 이는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인간은 불독, 요크셔테리어, 푸들 등을 모두 개로 인식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지만, AI는 '불독의 특성'과 '요크셔테러어, 푸들의 특성'에 보여지는 정보가 사뭇 다르기 때문에 모두 같은 '개'라고 인식하기가 힘들고 오류를 일으키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인간은 발이 3개인 강아지를 보면서 '아픈 강아지'라고 이해하는 반면에, AI는 '새로운 종', '3발 달린 포유동물'이라고 잘못된 결론을 일쑤라는 것이다.

 

  이처럼 AI가 기대했던 성과를 얻지 못하고 연구자금만 축낸다는 결론이 나오자 정부예산지원을 더는 받지 못하고, 연구는 지속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 '딥러닝'이라는 빅데이터를 다루는 컴퓨터가 등장하자 새로운 활기를 얻기 시작했다. '체스 챔피언'을 이기고 '바둑천재 이세돌'과의 승부에서도 이기자 AI는 다시금 각광받기 시작했다. 더구나 정부자금이 아니라 '민간기업'에서 이룬 성과였기 때문에 더는 '자금난'을 겪을 걱정을 덜었다. 그래서 지금 산업전반에서 'AI'를 접목시킬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궁리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넷플릭스, 아메리칸익스프레스, 리걸테크, LG AI연구원 등 다양한 분야에서 'AI 기술'을 선점하고자 노력중이다.

 

  하지만 이 역시 '기대했던만큼의 성과'가 나타나지 않자, 현재는 지지부진한 상태다. 또한, 인간보다 더 똑똑한 인공지능을 갖춘 '강한 AI'의 등장을 두려워하는 대중들의 분위기나 '약한 AI'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산업전반의 분위기가 맞물리면서 새로운 논란이 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과연 이 모든 난관을 뚫고 AI는 성공적으로 안착해 '인류의 미래'를 밝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자못 그 결과가 궁금하지만, 그에 앞서 우리에게 닥친 문제부터 해결해나가야 하는 것은 올바른 순서일 것이다.

 

  첫번째 문제는 '지속가능한 연구'를 위해서 AI기술을 통해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산업계에서는 'AI기술'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왜냐면 '노동력 절감'을 획기적으로 할 수 있고, 그로 인한 막대한 이익을 벌어들일 수 있다는 것은 큰 매력이기 때문이다. 기업의 관점에서 말이다. 하지만 '노동인력의 감소'는 사회경제의 한 축인 '가계'가 망가지는 것이기에 궁극적으로는 '시기상조'가 될 수밖에 없다. 최대한 충격을 줄이기 위해 인간에서 AI로 바꾸는 '노동력 대체 속도'를 늦춰야만 한다. 하지만 그래서는 기업의 이익을 보장할 수 없기에 서두르고 싶은 마음이 기업들의 솔직한 속내일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로봇세'를 제정하는 등 정부의 노력이 강조되고 있지만, 당장 '기본소득'과 관련된 안도 퇴짜를 맞는 와중에 실업자를 위해서 세금이 낭비되는 일(?)을 신속하게 마련할 것이라는 기대는 애초부터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고 마냥 손을 놓을 수도 없을테니 언젠간 이루어져야 할 일이라는 것에는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는 형편이다.

 

  결국 '지속가능한 연구'를 위해 산업전반에 아이디어가 쏟아져야 하는데, 그저 막연하게 'AI기술'을 적용한 새로운 제품이라는 광고만 내세울 뿐, 정작 제대로 된 'AI기술'을 개발하는데는 관심이 별로 없다는 것이 두번째 문제다. 사실, 이 문제가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인데 마땅히 'AI기술'에 대해서 배울 곳도 마땅치 않고, 가르치는 곳은 더더군다나 없다는 현실이 더욱 안타까울 뿐이다. 사실, 기업들이 가장 기대하는 것도 바로 이 문제다. 기껏 'AI기술'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곳에 발품을 팔아봐도 '원론적인 이야기'만 할 뿐, 새로 개발된 'AI기술'로 만든 시제품은 구경조차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몇몇 기업들은 자체적으로 '연구원'을 뽑아서 AI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연구에 투자하고 있지만, 대기업과 같이 막대한 연구자금을 댈 수 있는 능력있는 기업만이 할 수 있는 방법이라 뾰족한 해결책이 없기는 매한가지다. 그렇다고 정부의 노력이 눈이 부실 정도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초등교육에서 '코딩'을 가르치는 정도로 본격적인 'AI기술'을 습득할 수 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엔 정부차원의 막대한 지원이 시급하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한정된 예산'으로 충당하며 만족할 만한 성과가 나오기엔 너무다고 요원한 방법이다.

 

  마지막 문제는 'AI기술'을 어디까지 적용하도록 허락할 것인가? 라는 물음에서 시작한다. 과연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지능을 갖춘 AI의 등장을 환영할 수 있겠는냔 말이다. 그래서 모든 결정을 AI에게 맡기고 인간은 그저 따르는 안락한 삶을 살고 싶으냐는 것이다. 굉장히 극단적인 결론에 대한 논의이지만, '디스토피아'적으로 'AI기술'을 바라보는 시선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영화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는 반드시 비극을 초래할 것이라고 단정 짓기도 했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그런 AI'는 결코 등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에 준하는 비극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까지 부정하지는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결국, 'AI'가 인간을 대신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범용 AI(약한 AI)' 수준에서 기술개발을 멈춰야만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힘들어하는 분야에서 '특별히 AI가 더 잘하는 분야'만을 선별하여 부담을 덜어주는 선에서 그치는 연구까지만 허용해야 한다는 말이다. 쉽게 말하자면, 로봇청소기가 인간의 명령을 알아듣고 지정된 구역을 깨끗하게 청소하면, 그뿐이지. 고작 청소기를 대신하기 위해 '인간형 로봇'을 만들어 구석구석 청소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말이다. 즉, '인간형 로봇'을 구현해 '집안살림'을 대신 맡기는 것까지는 어찌어찌 허락할 수 있겠지만, '인간형 로봇'이 사람과 구별할 수 없는 외모를 갖추고, '집안살림'을 넘어서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대신할 수 있게 만들고, '인간'과 똑같은 수준의 감정을 느끼고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수준까지 개발을 하게 된다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간사회'는 파멸하고 말 것이다. 아니 파멸까지는 아닐지라도 '엄청난 혁신'에 감당하지 못하고 '인간형 로봇'만도 못한 사람은 '인간 취급'조차 받지 못하는 일이 초래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처럼 '강한 AI기술'은 엄청난 위험성을 안고 있다. 물론 먼 미래의 일이겠지만 말이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걱정부터 하는 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AI기술'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기술이고 유용하게 쓸 일부터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하지만 늘 처음 시작이 중요한 법이다. 우리는 '놀라운 기술' 개발을 하고서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경험이 꽤나 많았기 때문이다. 현재 거의 재앙에 이를 수준이라고 일컫는 '핵무기 사용'과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를 보란 말이다. 분명히 예측하지 못한 결과다. 그러나 엄청난 에너지로 활용하기에 앞서 '끔찍한 무기'로 만들어버린 것도 바로 우리 자신이고, 고갈이 될 정도로 '지하자원'을 낭비한 결과가 빠른 속도로 지구기온을 높이게 될지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결국 우리 스스로 저지른 잘못이다. 여기에 '인간보다 더 높은 지능을 갖춘 시스템'이 등장해 스스로 작동하고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면, 또 어떤 결과가 뒤따를 것이란 말인가? 분명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반드시 '어떤 결과'를 맞이해야만 할 것이다.

 

  물론, 이 책은 '기업의 혁신'을 위해서 관심이 주목되고 있는 'AI에 대한 모든 것'을 풀어내었다. 그래서 AI기술에 대한 역사적 발자취부터 기술이 활용된 사례까지 살펴보면서 '새로운 활로'를 엿볼 수 있는 유용한 책이다. 하지만 난 한 발 더 나아가서 이야기를 진행시켜보고 싶었다. 이를 테면, 자율주행자동차가 이미 개발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상용화' 되지 못한 까닭은 기업들의 돈벌이에 딴죽을 걸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직까지 자율주행차가 도로를 질주하기에는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운전이라는 것이 '한 순간의 판단'과 '그에 따른 결정'에 좌우되는 것이기에 '안전사고(교통사고)'가 일어났을 경우를 예상해서 만반의 준비를 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자율주행차에 대한 '안정성'이 확보되지 않았고, 자율주행차가 대세가 되어 버린 사회시스템에 우리 사회가 적응할 수 있는 대비도 미비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달리지 못하는 걸테니 말이다. 그러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어떤 미래가 닥칠지에 대해서 말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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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 이야기 - 빛의 개념부터 시간여행까지,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양자역학 안내서
팀 제임스 지음, 김주희 옮김 / 한빛비즈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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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말해 '요즘 과학'은 정말 어렵다. 우리가 편리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까닭은 '과학기술'이 점점 발달해왔기 때문인데, 그 과학기술을 이해하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반대중들도 이해하기 힘든 과학인데, 과학의 근간이 '양자역학'에 접어들면서 천재라고 일컫는 과학자들조차 스스로 말하길, "알 수 없다"고 두 손을 들기 일쑤기 때문이다. 실제로 양자역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점점 '아는 것'이 없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 까닭은 캐면 캘수록 점점 '모르는 것'이 늘어나기만 하기 때문이다.

 

  이는 '고전과학(일명 '뉴턴과학')'을 연구하던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보인다. 그 당시만해도 '과학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이다'라는 자신감에 차올라 인간이 '신의 경지'에 오르는 것도 시간문제로 치부하던 시절이었다. 허나 이런 자신감은 '눈에 보이는 영역'을 다룰 때까지만이었다. 다시 말해, '지구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들은 '고전과학'에서 꽉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달탐사를 비롯해서 우주천체로 눈을 돌리고 심지어 '우주의 끝'까지 영역을 넓혀갈 때쯤에에 비로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도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더랬다. 그 결과, 인간은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 점점 늘어나기만 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물질을 '원자'라고 이름 붙였는데, 그보다 더 작은 '원소'를 발견했고, 그보다 더 작은 '양성자'와 '전자', 그리고 '중성자'를 발견했고, 더 작은 '쿼크', 더더 작은 '힉스입자', 그리고 이처럼 작은 '미립자'들을 점점 더 많이 발견하고 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렇게나 작은 입자들의 비밀을 하나둘 밝혀내다보니, 끝내는 밝혀낸 것보다 아직 밝혀내지 못한 것이 더 많다는 사실만 접하게 되고 말았다. 더구나 이런 '미립자의 특성'은 정말이지 알쏭달쏭하기만 하다. 굳이 표현하자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로 설명할 수 있겠다. 입자들의 '위치'를 알아내면 '운동량'을 알 수 없고, '운동량'을 밝혀내면 '위치'를 종잡을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 슈뢰딩거의 '죽어 있거나 살아 있는 고양이'는 어떤가? 이는 '중첩'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데, 양자의 역학관계는 일률적으로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확률적으로 나타날 뿐'이라는 말이다. 젠장, 과학이 도박도 아니고 '확률'로 정해질 뿐이라니, 일찍이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는 표현을 하면서 이 확률을 지극히 부정했었더랬는데, 끝내, 신은 도박꾼이었더는 것을 증명하고 말았다. 피터 힉스가 예상했던 '신의 입자'라 일컫는 힉스 보손을 증명하면서, 드디어 '빌어먹을 입자'가 과학자들을 괴롭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내노라하는 천재과학자들조차 혀를 내두르는 '양자역학'을 우리가 알 필요가 있을까 싶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알아야만 한다. 굳이 써먹을 때가 있기 때문에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의 미래가 '양자역학적 관점'에서 펼쳐질 것이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이 가져올 미래의 산물들은 단순히 우리 생활을 편리하고 유용하게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지금까지 지켜온 '윤리의식'과 '가치관' 따위를 송두리채 바꿔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순간이동'을 예로 들어보자. 양자역학의 세계에선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입자단위'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의 입자'를 순식간에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시킬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된다면, <스타트랙>에 나오는 '순간이동'도 실현가능하게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순간이동 기술'이 상용화를 거쳐 일상생활에서 쓰여지게 된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엄청나게 달라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바람직하지 못한 방법'으로 악용되는 사례도 부지기수로 늘어나게 될 것이다. 범죄를 저지른 범인이 '순식간'에 범죄장소에서 범행을 저지르고 사라져버릴 것이며, 사생활이 보장되어야 할 장소조차 '순식간'에 침입을 받았다가 '순식간'에 도망쳐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순간이동 사건사고'가 일어나 우리 몸의 '일부분'만 전송되거나 '다른 차원'으로 잘못 전송되는 경우도 발생할 것이다. 만약 이럴 경우에 '지금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방도가 없을 것이다. '미래의 상식'에서는 쉬이 해결할 수 있다손치더라도 지금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양자역학'에 대한 상식을 키워나가야만 한다. 그동안에는 '전기에너지'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몰라도 전기를 이용한 제품을 쓰는데 큰 제약이 없었다. 그저 '감전사고' 같은 몇가지 주의사항만 지키면 큰 어려움 없이 써도 무방했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등장하면서 처음엔 '교통법규'도 마련하지 않았지만, 점점 '사용자'가 늘어나면서 필요에 따라 '교통법'을 제정해 혼란을 막고 사고를 줄이는 방법을 고안해내면서 유용하고 편리하게 써왔다. 하지만 '양자역학'이 펼쳐낸 세상은 전혀 단순하지가 않다. '타임머신'도 가능하게 만들고, '평행우주'를 여행하게 만들 수도 있다. 심지어 '다중우주' 속에서 나와 같지만 똑같지 않은 '또 다른 나'를 만날 수도 있다. 멀티유니버스한 세상을 살게 되면, 우리는 '이 우주'를 떠나 '저 우주'에서 살게 될 수도 있다. 이런 모든 것을 관통하고 하나로 이어줄 유일한 상식이 바로 '양자역학'이 된단 말이다. 이러니 '양자역학'을 알지 못하고서는 도저히 살 수 없게 된다.

 

  물론, 당장 펼쳐질 미래는 아니다. 어쩌면 '양자역학이 만들 세상'을 만들지 않아야 할지도 모른다. 오늘날에는 이런 모든 결정을 '민주적인 방법'으로 할텐데, 뭘 알아야 제대로 찍을 수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멍청하면서도 가장 똑똑한 체하는 인간들이 '정치인들'인데, 무식한 그들이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떠벌릴 '양자역학의 미래'를 곧이 곧대로 믿고 찍을텐가? 빨간 휴지나 파란 휴지를 고르는 수준으로 만들면 곤란한 세상이 된다. 그러니 일반대중인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이 책 한 권 읽고 '양자역학의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다는 착각은 금물이다. 이 책은 그저 '양자물리학자들의 연대기적 이야기'를 적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양자역학의 시작에서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를 일목요연하게 풀어 써내어, '양자역학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단순한 개요를 설명한 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어려운 수학공식을 동반한 책을 공부하라는 얘기는 절대 아니고, '과학상식'을 넓혀서 우리 일상생활속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넓혀갈 수 있는 교양을 쌓으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책의 '전작'인 <원소이야기>와 더불어 이 책, <양자역학 이야기>를 읽고, 과학적 상식을 키우며 이해를 높이면 앞으로 펼쳐질 '미래의 변화'에 충분히 적응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고, 이런 적응을 잘하기 위해 '과학상식'을 좀 더 높여야 할 것이라는 당부를 전할 따름이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예측한 미래는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엄청난 혁신'으로 다가올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시점은 2040년, 또는 2045년으로 한결 같이 예상하고 있다. 그 즈음에 일어난 엄청난 혁신이 무엇일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분명 그 즈음에 뭔가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만 명확히 예언하고 있는 셈이다. 이제 고작 20여 년이 남았다. 우리는 과연 혁신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분명한 것은 '준비를 마친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는 엄청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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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르담의 꼽추 - 고학년 논리논술대비 세계명작 32
빅토르 위고 지음, 권태문 엮음 / 효리원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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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어릴 적만해도 '명작소설'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해서 보여주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빨간머리 앤>도 소설보다 애니를 통해 보았고, <알프스 소녀 하이디>, <엄마 찾아 삼만리>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명작을 '애니'로 먼저 접할 수 있었다. 그런 애니들이 보통 미야자키 하야오의 '일본애니'이기도 했지만, 미국과 유럽에서 제작된 애니메이션도 꽤나 많이 볼 수 있었다. <샬롯의 거미줄>, <동물농장>, 그리고 <노틀담의 꼽추>도 '원작소설'이 있는 줄도 모르고 애니메이션으로 먼저 접했던 셈이다.

 

  물론, 어릴 적에는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그저 보고만 있었다. 왜냐면 그 당시만해도 어른들은 '만화'를 보면 무작정 혼을 내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하긴 당시의 어른들도 '명작소설'을 즐길 정도로 여유 있는 집안은 별로 없었을 때이니,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만화'나 보고 있는 자녀를 한심하게 여기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른들도 '보는 눈'은 있는지라 당신께서도 난생 처음 봤을 '명작 애니메이션'의 내용에 곧 빠져들면서 혼을 내는 것도 잊으시고 아들과 함께 끝까지 시청하곤 하셨다. 비록 만화지만 내용이 상당히 깊다면서 말이다. 바로 이 <노틀담의 꼽추>도 내 아버님께서 끝까지 시청하셨던 몇 안 되는 애니메이션이셨다. 특히 '숙명'이라는 메시지로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대작에 "훌륭하네"라는 단 한 마디로 감상평을 마무리하셨던 것을 40여 년이 흐른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이 책을 다시 읽으니, 주제가 참으로 묘했다. 과연 무엇을 두고 '숙명'이라고 위고는 가리킨 것일까? 숙명의 사전적 의미는 '날 때부터 타고난 운명'이라고 한다. 그래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란 뜻이기도 하다.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 이 책의 주인공는 다름 아니라 '콰지모도'다. 날 때부터 꼽추라는 불구의 몸으로 모두에게 버림을 받고 죽을 운명이었으나 클로드 부주교 덕분에 죽을 목숨을 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성당의 종지기를 어릴 적부터 한 탓에 귀머거리가 되어 불구의 몸에 장애까지 갖게 되었다. 그래도 콰지모도는 클로드를 탓하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은혜를 갚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다 할 충직한 하인으로 행세하며 살고 있었다. 과연 '콰지모도'에게 주어진 숙명이란 무엇일까?

 

  이 책의 여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에스메달다'다. 이름부터 에메랄드를 연상시키는 보석같이 아름답게 빛나는 미모의 주인공은 애석하게도 천하디 천한 '집시여인'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두드리는 탬버린 장단에 춤을 출 때면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라도 황홀한 듯 그녀의 춤과 음악이 끝날 때까지 눈을 뗄 줄 모르곤 한다. 심지어 모두가 존경해 마지 않는 클로드 부주교까지 말이다. 하나님을 향한 영적인 믿음으로 숭고한 신앙심을 가졌기에 세속적인 욕심에 불과한 '여인과의 사랑'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금욕의 수도승'이 단 한 번의 마주침으로 그만 불 같은 사랑에 빠져들고 만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늙은 부주교와 어린 소녀의 사랑이라니 가당치도 않은 조합이렸다. 이래저래 맺어질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그런데도 '피할 수 없는 사랑'에 빠지고 말았으니, 이것을 두고 '숙명'이라고 말한 것일까?

 

  한편, 에스메랄다는 소녀의 감성으로 풋풋한 사랑에 빠지고 만다. 상대는 바로 근위대장으로 등장하는 펠뷔스다. 그녀는 콰지모도에게 납치되는 도중에 펠뷔스의 도움으로 구출되는 순간에 듬직하고 멋진 외모의 '구원자'에게 한순간에 사랑에 빠지고 만다. 백마 탄 왕자님이라도 등장한 듯한 감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에스메랄다가 첫 눈에 빠져버린 사랑의 감정을 누구도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순진한 소녀의 사랑을 짓밟아버리고 마는 펠뷔스를 두고서는 누구라도 손가락질을 할 것이다. 펠뷔스는 아름다운 에스메랄다와 연애질을 하지만, 그녀가 '가난'하다는 것을 알자마자 '귀족처녀'에게로 홀랑 달아나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에스메랄다는 '첫사랑'인 펠뷔스에게 헤어나질 못하고 순진무구한 사랑을 계속 하려 애쓴다. 이조차 '숙명적인 첫사랑'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 책에서 '진정한 사랑'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다. 클로드 부주교의 사랑을 말할 것도 없고, 에스메랄다의 철부지 사랑도 곱다시하게 보이질 않으며, 펠뷔스의 사랑은 썩은내가 풀풀 풍길 정도로 속물적인 사랑일 뿐이다. 다만,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보답으로 자신의 목숨을 다 바치는 '헌신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콰지모도만이 사랑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듯 싶다. 허나 이조차 '짝사랑'에 불과하다. 콰지모도는 형틀에 묶여 죽을 위기에 쳐했을 때 자신에게 물을 건내주며 생을 이어나갈 수 있게 해준 에스메랄다에게 보답을 다하기 위해 '헌신'하지만, 성당의 탑꼭대기에서 그녀를 몰래 도와줄 적에는 난생 처음 겪어보는 '사랑의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흉칙한 겉모습을 보일 용기가 없기에 '사랑고백'은 감히 생각지도 못한다. 더구나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콰지모도보다 자신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딴 여자의 품에 뛰어든 펠뷔스를 끝까지 갈구하는 에스메랄다는 콰지모도의 순수한 사랑을 받을 자격조차 없다. 그러니 이 둘도 서로 사랑할 수 없는 사이인 것이다. 설마, 이것도 '이미 정해진대로 따라야 하는' 숙명의 일부란 말인가?

 

  이래저래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하나씩 죽음을 맞이하고 '해피엔딩'을 맞이한 이는 단 하나도 없다. 다만, 부적절한 사랑의 군상속에서 '딱 하나'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싶었던 콰지모도와 에스메랄다의 사랑은 뼛조각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아마도 죽어가는 연인을 품에 안고서 깊은 잠에 빠지듯 생을 마친 듯한 '마지막 장면'이 이 소설의 하이라이트일 것이고, 살아서는 이룰 수 없었던 사랑이지만 '죽음'으로도 갈라놓을 수 없다는 마지막 결의가 돋보이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뼛조각조차 다른 이들의 느닷없는 방문과 함께 바람결에 사그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텅진 자리에 남겨진 글귀가 바로 '숙명'이란 두 글자였다. 마치 '그 누구도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점지해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위고는 왜 이처럼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를 써놓은 것일까? 누구도 사랑할 수 없게끔 숙명을 정해놓은 까닭이 무어냔 말이다. 아무래도 '시대적 배경'에서 찾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때는 바야흐로 15세기 중세유럽이다. 아직 본격적인 '마녀사냥'이 펼쳐진 시기보다는 앞선 시대배경이지만, 교황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왕의 권력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았지만 백성들의 삶은 팍팍할 정도로 힘들기만 했다. 이런 백성들은 존경해 마지 않는 교황과 절대군주에게 충성을 다하지만, 이미 교황과 군주는 '저들의 욕심'에만 관심이 있을 뿐, 백성들의 삶에는 하등 관심이 없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힘든 삶에 '희극적인 요소'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중세의 무거운 분위기는 엄숙하고 경건함만을 요구할 뿐, 불경이라는 명목으로 백성들의 웃음소리조차 허용하지 않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위고는 이 책에서 '시작부터 끝까지' 유머와 해학, 그리고 풍자를 담았다. 평소에는 존경하다못해 감히 얼굴조차 볼 수 없던 고관대작들이 책 속에서는 '우스개의 대상'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백미는 단연코 '바보교황'으로 뽑힌 콰지모도다. 생김새가 가장 우스운 사람을 골라 '하룻밤의 교황'으로 삼아 유쾌한 난장을 벌이다니 말이다. 재판장은 또 어떻고 말인가. 공정하고 엄정해야 할 재판에 '귀머거리 콰지모도'가 주인공이 되어 한바탕 웃음잔치를 벌이며 배꼽을 쏙 빼놓고 만다. 더구나 신성한 직함인 부주교 신분으로 '욕정의 화신'이 되어 에스메랄다에게 매달리다 못해 납치와 감금, 그리고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다. 국왕이라는 작자는 또 어떻고 말인가. 거지떼들이 신성한 장소인 성당을 공격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원인파악'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체면'이 손상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춰 무참한 폭력을 일삼고 마니...당시 백성들이 얼마나 핍박 받고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비록 이야기속에서나마 '저들의 횡포'에 유머로 저항할 수 있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소설의 내용을 비극으로 끝맺은 것은 '그리스비극'에서 말하는 '카타르시스(정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너무나도 비극적인 장면을 보면서 슬픔을 쏟아내고 난 뒤의 '개운함'을 얻을 수 있고, 극 속의 등장인물들이 겪는 비극을 보면서, '그래도 나는 저 정도로 비참하지는 않으니 다행이다'라는 맘을 품을 수 있다는 '비극의 긍정적 효과'에서 이유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위고는 등장인물들의 '새드엔딩'이 독자들에게 미칠 '해피엔딩' 효과를 기대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저들의 숙명적인 사랑이 모두 비극으로 끝맺음을 보고, 당시 독자들은 소소하나마 '자신만의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으리라고 짐작이 된다.

 

  역시나 대작은 '한 번의 독서'로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다시 읽고 새로운 감상을 느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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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3줄 영어 일기 - 조금씩, 매일, 계속! 영어가 일취월장하는 3대 습관 자기계발은 외국어다 1
ALC 편집부 지음, 정은희 옮김 / 한빛비즈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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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국어가 아닌 '다른 나라 말과 글'로 유창하게 표현한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다. 하지만 그 멋진 일을 난 실패했다. 지금도 여전히 멋지다고 생각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사실, 난 외국인과 간단한 의사소통 정도는 할 수 있다. 언어라는 것이 '말과 글'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몸짓과 표정'으로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탁월한 눈썰미만 갖고 있다면, 웬만한 상황의 앞뒤 맥락을 파악해서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은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눈썰미'에 세련된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있는 실력까지 갖춘다면 정말 멋질텐데...난, 그걸 해내지 못했다.

 

  사실, 외국어공부를 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외국인 친구'를 곁에 두는 것이다. 그리고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간단한 표현' 정도는 어렵지 않게 익힐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고졸 이상의 일반 성인이 영어회화를 하는데, '일상단어 800개' 정도면 거의 모든 의사소통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수다를 떨 때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어휘'를 거의 쓰지 않듯이, 외국어도 그렇다고 한다. 그 가운데서도 '동사활용'만 능숙하게 쓸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춘다면 금상첨화라고들 한다. 실제로 어느 나랏말이나 '품사' 가운데 가장 많이 쓰는 것이 '동사'이니 전혀 틀린 말이 아닐테고, '형용사'를 중간중간 넣는다면 세련된 표현쯤은 어렵지 않게 배울 수 있을 게다.

 

  이렇게나 '이론'에 빠삭한데도 영어를 못하는 까닭은 '습관'이 되도록 노력을 하지 않은 탓이 크다. 기껏 동사 100개를 외웠다고한들 써먹을 외국인 친구가 없다면, 말짱 도루묵이 되기 때문이다. 비록 써먹을 외국인 친구가 없다고하더라도 '습관'이 될 정도로 '꾸준함'을 유지했더라면, 지금쯤 영어 정도는 능숙하게 쓸 수 있었을텐데, 난 그러지 못했다.

 

  왜냐면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변명처럼 들릴테지만, 진짜 이유가 그렇다. 재미가 없으니 하다가 말고, 하다가 말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이처럼 '습관'을 들이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절대로 말이다. 그런데 내가 유일하게 습관을 들인 것이 있다. 바로 '책읽기'와 '리뷰쓰기'다. 지난 17년 동안 '꾸준히' 할 수 있었던 까닭은 아주 제대로 '습관'을 들였기 때문이고, 습관을 들일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독서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1년에 100권 읽기를 도전하면서 내가 가장 먼저 했던 일이 '다이어리' 구매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다이어리 속에 딸려 있는 '달력'이었다. 1년 남짓을 '기록'할 수 있는 선만 그어져 있는 그 '빈 달력'에 내가 읽은 '책의 제목'과 '지은이 이름', '출판사 이름' 따위를 깨알 같은 글씨로 채우면서 서서히 '책 읽는 습관'을 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처음엔 한 달에 한 권, 그 다음엔 한 달에 2권, 조금 더 분발해서 한 달에 6권, 조금만 더 노력해서 일주일에 2권, 좀 더 욕심을 부려서 일주일에 2~3권씩 '칸'을 채워나갔더니, '책읽기'가 재밌어졌던 것이다. 어찌보면 '빈칸 채우기'를 하려는 욕심이 컸던 모양이다. 결국 난 '책 읽는 습관'을 들인 지 15년이 지난 어느 해에 '1년에 300권 읽기'를 달성하고 말았다. 어느 새, 책만 읽는 습관만이 아닌 '리뷰쓰기'까지 덩달아 생기면서 지난 17년간 약 1500여 편의 리뷰를 작성하기에 이르렀다. 글쓰기 실력은 둘째치고 말이다.

 

  이 책, <하루 3줄 영어 일기>도 바로 이런 '습관의 힘'을 기반으로 영어실력을 키울 수 있는 도움책이다. 마침맞게 '다이어리 형식'으로 짜여진 이 책은 '영어일기'를 꾸준히 작성하면서, '영작실력'을 키울 수 있게 구성되었다. 핵심은 '꾸준함'이고 말이다. 앞서 말했듯이 '꾸준함'을 키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재미'다. 이 책이 재미 있어야 '영어실력'은 저절로 따라온다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진짜로 재미있을까?

 

  그건 독자에게 달려있다. 무작정 사다놓고 책꽂이에 덩그라니 장식만 하지 않기 위해선 '깨알 같은 재미'를 스스로 찾을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영어일기를 작성하기 위해 '빈 노트'를 마련해놓지 않았다. 사실 어느 나라 글이건 '일기'를 쓰려면 먼저 '생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각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질문'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 책엔 '366개의 질문'이 각 페이지마다 달려 있다. 첫 질문은 "Where would you like to visit the most?"다. "가장 가고 싶은 곳은 어디인가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영어문장으로 3줄'을 적어보라고 줄이 그어져 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예시글'이 적혀 있다. "I would most like to visit Machu Picchu. It is one of the most fascinating places in the world. I'd like to hike through the ruins and see the old buildings." (마추픽추를 가장 가 보고 싶다. 그곳은 세계에서 가장 멋진 곳 가운데 하나다. 유적 사이를 돌아다니고 오래된 건축물들을 구경하고 싶다.)

 

  만약, 아직 영작에 자신이 없거나 '질문'에 대한 답이 떠오르지만, 막상 영작을 하려니 글문이 막혀 써지지 않는다면 '예시글'을 따라 쓰면서 '영어식 표현'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하면 된다. 그렇게 날마다 '질문 하나'에 '영작문 하나'를 꾸준히 쓴다고 생각해보라. 오래지 않아 영어문장 쓰기에 자신감이 생길 것이다. 그정도 실력이 되면 굳이 '예시글'을 따라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질문'에 대한 내 생각을 '간단한 문장'으로 나만의 일기를 작성하면 될테니 말이다.

 

  바로, 이런 습관을 꾸준히 들이면 누구라도 '영어실력'을 단기간에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라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바로 '꾸준함'을 유지할 수 있을 '재미'라는 요소 말이다. 이런 방식에 '재미'를 느끼는 독자라면 분명 성공할테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역시나 말짱 도루묵이 될 것이다. 행여나 실패했다고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 대다수의 독자들은 실패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니까 말이다. 사실 '습관'만큼 지겨운 것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지만, 그 '지겨움'을 재미로 승화시키는 독자라면 정말정말 멋지게 성공할 것이다. 당신도 그럴 수 있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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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같은 한 달을 보냈다.

일주일이 멀다하고 매번 새로운 사건사고가 터지니

머리가 지끈거려서

책읽기에 집중할 수 없었고,

더구나 마지막주에는 컴텨까지 말썽을 부려서

이제사 겨우 고치게 되었다.

남은 12월 한 달은 마음 편히 책읽고 리뷰쓰기할 수 있을까?

제발 그랬음 좋겠다.

여전히 목표는 150권 리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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