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내가? 정치를? 왜? - 요즘 것들을 위한 최소한의 정치 상식
이형관.문현경 지음 / 한빛비즈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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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를 보면 날마다 정치인들이 싸우는 소식만 전해진다. 국회를 아수라장으로 만들 정도로 서로에게 삿대질을 하고 언성을 높이면서 말이다. 이른바 '정쟁'이라는 명목 아래 서민들을 위한 민생법안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그들만의 밥그릇 싸움'만이 펼쳐지곤 한다. 그뿐 아니다. 행정수반인 대통령을 비롯해서 그 휘하 장,차관들이 입에 올리는 정책이라고는 오로지 '부자들만의 잔치'를 벌이려는 듯, 민생정책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그들에게만' 유리한 정책을 연일 내놓기 일쑤다. 이에 야당이 비판이라도 할라치면 여당은 대통령을 감싸며 '국민들의 지지율'만을 내세우며 그들의 정책이 정당하다고 아우성 소리를 지른다. 그 지지율이 20%든, 40%든, 반대하는 국민들이 50%가 넘는다는 사실을 외면한 채 말이다.

 

  그래서 많은 국민들이 정치를 외면하곤 한다. 열심히 일하라고, 싸우지 말고 화합하고 조율하라고 뽑아놨더니 고작 싸움질밖에 하질 않는다면서 말이다. 이놈을 뽑든, 저놈을 뽑든 매한가지니 아예 정치와는 담을 쌓고 나몰라라하는 국민들도 점점 늘어나기만 한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 국민들이 정치를 외면해도 되는 걸까? 정말 정치를 몰라도 괜찮은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절대 안 된다'. 민주주의의 근간은 더 많은 국민들의 '정치참여'를 바탕으로 유지되는 것이기에 국민들은 더욱더 정치에 관심을 두고, 적극적인 참여를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쁜 정치인들이 '독재'를 하게 되고, '저들만을 위한 입법, 행정, 그리고 사법'까지 장악하여 독단적인 정치를 하는 것을 그대로 '방조'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온 국민은 정치를 잘 알고, 잘 하는 '정치 100단'이 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민주적인 교양시민'으로 거듭나야 한단 말이다.

 

  일단, 민주정치는 어려울지 몰라도 '교양시민'이 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매일 뉴스를 '경청'하고 정치인들이 하는 짓거리를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웃들이 전하는 정치적 의견(여론)에도 '경청'을 하고 자신의 의견을 적극 표출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어떤 정책을 내놓는지, 국회의원들이 어떤 법안을 추진하는지, 법관과 검사 들이 누구를 기소하고, 어떤 판결을 내놓는지 촉각을 곤두세우면 될 일이다. 그리고 '정치참여'할 기회가 보이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 이렇게만 하면 누구나 '교양시민'이 될 수 있다.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할 '정치적 수단'을 잘 모르겠다면, 선거날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평소에 정치에 관심이 높았다면 적어도 '누구'를 찍어야 할지 난감해 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집회나 시위에 참여한 적이 있다면 '자신의 의견'이 정치에 어떻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도 잘 알 것이다. 이뿐 아니다. '불매운동' 등과 같이 대기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방법도 있다. 정치인과 경제인은 서로 끈끈한 관계를 맺기 십상이니 '대기업의 움직임'을 유심히 관찰하면 '정치인의 행보'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치인들을 어떻게 평가를 내리면 좋을까? 평가를 매길 수 있는 '기준'이 있을까? 물론 '객관적인 평가기준'이 있을 턱이 없다. 만약 그랬다면, 정치가 이토록 혼탁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저마다 '개인적인 기준'을 세워야 한다. 그래서 민주정치가 어려운 법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명확하게 구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름대로 '평가기준'을 세워야 적극적인 정치참여가 가능해진다. 이른바 '명분'이라는 것인데, 나의 정치참여에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으려면 '타당한 기준'을 내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가지는 '객관적인 잣대'로 유용하게 쓰일 수 있겠기에 참고 삼아 내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란다. 첫째, 소수의 이익보다 다수의 이익을 위하는 정치인이어야 한다. 다분히 '공리적인 기준'이지만, 발빠른 정책으로 신속한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이다. 물론 '소수의견'을 묵살하라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일단 첨예한 논란이 예상될 때, 정책결정이 늦어져서 더 많은 손실이 발생될 때에는, 일단 '다수의 이익'을 챙기고 난 다음에 '소수를 위한' 후속조치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기에 하는 말이다. 둘째, 법과 질서를 지키는 정치인이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취지였다고 하더라도 사법체계를 흔드는 일은 용납할 수 없다. 다만, 법과 질서를 내세우면서 '저들만의 잔치'를 노리고 있다면, 법과 질서를 사랑하는 '국민들의 심판'을 먼저 받게 될 것을 명심하는 바른 정치인이어야 한다. 셋째, 부도덕한 윤리, 또는 그에 준하는 철학을 내세우며 '독단적인 행보'를 내딛으려는 정치인을 솎아내야 한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만, 위에 내놓은 '나름 객관적인 기준'조차 무색하게 만드는 용의주도하고 심보 고약한 철면피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난 정치인은 모두 '거짓말쟁이'라고 믿는다.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은 주권자인 '국민의 동의'를 받는 절차를 거쳐야 함에도 '대의민주주의'를 앞세워 정치인으로 뽑힘과 동시에 '면책특권(?)'을 내밀면서 뻔뻔스럽게 '저들만의 잔치'를 누리기 일쑤기 때문이다. 그런 뻔뻔함은 저들의 '독단적인 판단'을 '국민들의 결정'이라고 오인하는데서 찾아볼 수 있다. 적어도 그런 뻔뻔한 작자들은 절대 '정치인'이라고 부르면 안 된다. 그냥 '정치꾼'에 불과한 쓰레기인 까닭이다. 교양시민이라면 이런 정치꾼들을 눈여겨보길 바란다. 그리고 절대로 대한민국 정치의 장에 발을 못 붙이게 해야 한다.

 

  물론, 이렇게나 나름의 '소신'을 갖기도 힘든 것은 사실이다. 하루하루 벌어 먹고 살기도 힘겨운 마당에 어느 틈에 정치에 관심을 두고 적극 참여까지 할 수 있겠냔 말이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당신들의 삶이 하루하루 힘겨운 까닭이 '정치가 잘못 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바른 정치가 이루어지도록 바꿔나가길 소홀히 한 덕분에(?) 당신의 삶이 피폐해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기에 정치에 적극 참여해야만 한다.

 

  한편, TV만 틀면 연일 '정치인들의 싸움박질' 때문에 밥맛이 떨어진다고 얘기하는 분들도 계신다. 기껏 뽑아놨더니 이놈도 싸우고 저놈도 싸우니 열불이 터져서 다시는 '정치'에 관심을 두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 하지만 정치인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기 때문에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정쟁'이라 부르고 '논쟁'을 일삼는 것이 바른 정치인이 해야만 할 일인 것이다. 흔히, 여당과 야당으로 나뉘어서 서로 반대되는 주장을 펼치는 것을 싸운다고 표현하는데, 이는 '더 많은 이익'을 '더 많은 국민들'에게 돌려주기 위한 첨예한 다툼인 것이다. 이를 싸운다고 오해하도록 만든 장본인은 다름 아니라 '언론'이다. 언론이 '엉뚱한 편견'을 갖도록 전체가 아닌 일면만 보여주니 오해가 쌓인 것이고, 정치꾼과 결탁해 '저들만의 잔치'를 용이하게 주최하기 위해 '여론을 호도'하기 위해 만든 편견이다. 근본적으로 이는 '정치인의 책임'이 아니라 '언론의 무책임'이 문제되는 것이다. 그러니 TV에서 정치인들이 싸우는 모습이 보여진다면, 날카로운 눈썰미로 판단을 내리길 바란다. 누가, 누구를 위해서 어떤 정책(법안)을 내세워 무엇을 획책하려고 하는지 말이다.

 

  대한민국의 정치판은 지난 100년 동안 살얼음판을 건너왔다. 왕조의 멸망과 함께 일제에게 국권을 피탈 당하고 온갖 설움과 억압을 받았더랬다. 그 모진 역경을 딛고 독립을 쟁취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겪었으며, 동족상잔이라는 비극과 군부독재, 그리고 민주화투쟁이라는 격동의 세월을 지나왔다. 그리고 새천년을 맞이해 대한민국은 세계에 우뚝서는 자랑스런 역사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정치판은 여전히 혼란스럽기만 하다. 첨예한 갈등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해결할 방법도 마땅치 않아 보인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바라는 미래는 분명하다. 전쟁 없는 평화가 영구히 깃들길 바라며, 지속발전가능한 경제적 풍요속에서 전세계가 부러워마지 않는 아름다운 선도국가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해결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 같이 많겠지만, 올바른 정치를 해나간다면 못할 일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겪어봐서 안다. 그리고 꼭 해낼 것이라 믿는다. 우리는 대한민국인이기 때문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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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고 쎈 중등 수학 3-1 (2023년용) 중등 쎈수학 (2023년)
홍범준.신사고수학콘텐츠연구회 지음 / 좋은책신사고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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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공부의 비법'은 평범하다. 공부를 억지로 하지 않고 즐기면서 하면 된다. 정말 쉽지 않은가? 그런데도 대다수의 학생들은 공부를 즐기는 방법을 묻지 않고 그저 '잘 하는 비법'만을 캐묻는다. 정작 자신은 공부를 하지 않으면서 공부를 잘 하게 해달라고 소원만 비는 것처럼 말이다.

 

  공부의 비결은 '다이어트 건강법'과 비슷하다. 일단 체중을 줄이려면 '먹는 양'는 확연히 줄여야 한다. 그 다음에는 몸에 나쁜 음식을 '절대' 섭취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소식을 하면서 '해로운 성분'이 덜 들어간 음식을 골고루 섭취한다면 다이어트는 자연스레 된다. 그런데도 수많은 사람들은 단단히 오해한다. '먹는 양'을 줄이지 않으면서 '살 빠지는 약(?)'만 먹으면 100% 살이 빠질 수 있다고 말이다. 반면에 '먹는 양'을 확실히 줄이고도 살이 빠지지 않는다면서 '살 빠지는 약(!)'을 동시에 복용하면 효과가 더 좋을 것이라 착각을 하곤 한다. 이럴 땐, 살이 빠지는 것은 둘째치고 '건강'이 나빠져서 몸이 병들기 십상이다. 그렇게 병들어 가면서 살이 빠진다고 좋아라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공부도 '이렇게' 하기 십상이다.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시험에 나오는 문제'만 골라(?) 골라서 풀면 성적이 쑥쑥 올라갈 것이라 믿고 '쪽집게 과외', '시나공(시험에 나오는 문제만 공부한다)'과 같은 환상에 젖곤 한다. 또는 '공부의 양'만 잔뜩 늘여놓고서 자신의 건강도 돌보지 않고 잠도 줄여가면서 코피를 쏟아가며 죽어라 공부만 하는 친구들이 있다. 이런 식으로 공부를 하다보면 성적이 오르더라도 '단기적인 성과'에 불과하며, 마라톤과 같은 학업의 길을 완주하기에 택도 없는 방법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공부는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저마다 찾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공부 비법' 되겠다. 그렇다면 공부를 즐길 수 있는 궁극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일단 자신의 적성에 맞는 '과목'을 찾는 것부터 해야 한다. 언어적 영역에 호기심이 많다면 국어나 영어, 그밖의 외국어를 공부하면서 다양한 '배경지식'을 쌓아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탐구적 영역에 관심이 높다면 사탐이나 과탐 쪽 과목들과 연관된 '배경지식'을 넓혀가는 것이 좋다. 이렇게 자신이 좋아하는 과목의 '배경지식'을 속깊고 폭넓게 다루다보면 저절로 '공부의 맛'이 달라지기 마련이다. 한편, 예술적 재능이나 체능적 재주가 발달한 친구라면 '예체능의 실력'을 더욱더 갈고 닦길 바란다. 이를 테면, 음악 공부도 하다보면 자연스레 실기와 함께 '이론'을 병행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이론을 접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다시 '수학'과 '과학', 그리고 '역사'와 같은 과목을 만나게 되고, 그렇게 속깊은 이론수업을 통달해야 비로소 음악적 재능이 꽃 피울 수 있게 되는 법이다. 이는 미술과 체육도 마찬가지다.

 

  여담이지만, 공부가 정말 싫어서 음악을 전공하던 친구가 '음대'까지 진학하게 되었지만, 전문적으로 음악인으로 살아가려다보니 어쩔 수 없이 다시 '수학'을 공부해야만 더 좋은 음악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는 거짓말 같은 경험담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정말 많다.

 

  하지만 정말로 공부와 담을 쌓은 친구들은 '수포자'라는 별칭으로 불리우면서 공부를 점점 더 하기 싫어질 것이다. 그럴 땐 '유용한 도구'를 잘 만나야 하는 법이다. 물론 '좋은 선생님'도 함께 만나야 한다. 사람을 절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공부도 혼자의 힘으로 대성하기 정말 힘들기만 하다. 그러니 '유용한 도구(교재)'와 '좋은 선생님'을 찾으러 시간과 공을 들이는 것은 전혀 아까운 일이 아니다. 이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이다.

 

  자, 그럼 공부를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유용한 수학교재는 무엇일까? 당연히 '이 책'이라고 소개하고 싶지만, 교재도 자신에게 딱 맞는 성향의 것을 찾아야만 한다. 그러니 무조건 '이 책'이 좋다고 권하는 친구나 선생님이 계시다면 '알았다'고 참고만 하고, 자신이 직접 문제를 풀어보면서 고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다. 교재를 고를 때 가장 중요한 팁은 '답지'를 옆에다 펼쳐놓고 풀어보는 것이다. 공부는 뭐니뭐니해도 '피드백'이 중요하다. 풀고서 곧바로 답을 맞춰보면서 '왜' 맞았는지, '왜' 틀렸는지 확인하는 습관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 자신의 공부 실력을 가늠할 수도 있으면서, 동시에 '좋은 교재', '나에게 딱 맞는 교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답지를 옆에다 펼쳐놓았다고해서 '답을 베끼라'는 얘기가 아니다. '풀이과정'을 눈여겨 읽어가면서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을 눈으로 익히고 실제로 시험을 치룰 때처럼 '막히는 부분'이 어디인지 빠르게 검토하면서 문제를 내것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반복 연습' 해보는 것이다. 그러니 '막히는 부분'이 나올 때마다 답지를 보면서 술술 풀어가는 연습이 대단히 유용하게 먹힐 것이다. 그러면서 '해설'이 눈에 쏙쏙 들어오는지, 풀이과정이 '이해'가 술술 되는지 스스로 판별하면서 풀다보면, 자연스레 '나에게 딱 맞는 수준의 교재'를 찾을 수 있다.

 

  그런 경험이 쌓이다보면 '공부하는 비법'을 저절로 터득하게 된다. 비단 수학과목에만 써먹을 수 있는 비법이 아닐 것이다. 모든 과목의 교재를 '이런 식'으로 고를 수 있는 수준이 되는 것만으로도 이미 상위권 성적을 따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하위권 학생'들에겐 힘든 공부비법인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좋은 선생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신의 문제점을 스스로 찾아내기 힘겨워하는 학생에게는 '선생님의 코칭'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테니 말이다. 물론 나와 '사는 곳'이 가까운 친구라면 내가 '그 선생님'이 되어 줄 수 있고, '그 교재'도 딱 알맞게 선별해줄 수 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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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2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안장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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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처럼 아름다운 사랑이 있을까..라는 느낌을 학창시절에 읽었을 때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사랑하기에 죽음을 선택한다는 결말이 그랬고, 임자(약혼자)가 있는 여자에게 사랑을 허락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살하는 내용이 그랬다. 이런 불륜스런 이야기가 '고전명작'으로 선정되어 널리 읽히고 '서울대선정 청소년 필독서'로 선정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 답답할 노릇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다시 읽어보니, '시대배경'이 읽히고, '작가의 의도'가 보였다. 그래서 이 책이 청소년이 꼭 읽어야 할 세계문학으로 꼽히게 되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각설하고, 첫 느낌은 괴테의 문장은 너무나도 수려하고 아름다웠다. 이것이 '작가의 문장력'인지, '뒤침이(번역가)의 힘'인지 딱 한 번으로 모두 알 수는 없었지만, 여러 모로 고려해본 결과, [문학동네]만의 장점으로 이해하려 했다. 물론 다른 출판사도 수려한 책들을 많이 출간하겠지만, '책표지'도 그러하고, 책이 지닌 아름다운 면만 따져본다면 [문학동네]만 한 것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요즘 내 독서경향이 '문학장르'만큼은 '같은 책, 다른 뒤침'을 원칙으로 삼고 꼼꼼히 비교하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책읽는 속도가 더뎌지게 되었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고 있고, '지금'이 아니면 더 미룰 시간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부득이 '여러 출판사의 문학책'을 두루 읽어보고 있다. 그 중간결과로, 소설책이 가진 '미적센스'를 고려한다면 [문학동네]가 책꽂이에 진열해놓기에도 아름답고, 손에 들고 다니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으기에도 단연 으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추후에 결론은 또 달라질 수 있다. 아무튼 괴테의 문장은 '자연예찬'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답고 또 아름답게 이어나갔다.

 

  그러면 괴테는 왜 이리도 '자연'을 예찬한 것일까?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18세기 유럽이다. 이 시기는 '낭만소설'이 주름잡던 시절이었으며 동시에 '계몽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지적교양을 쌓는 일을 매우 중시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모든 사물이 지닌 이치와 더 나아가 자연현상의 근원이 무엇인지 궁금해하고 '알려고' 부단히 노력하였던 것이다. 드디어 '과학'이 고대의 자연철학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탐구영역에 들어섰다는 의미다. 그렇기에 이 시기의 사람들은 '신의 섭리'를 따르는 것과는 별도로 '인간의 본성'과 더불어 '세상의 이치'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고 그 안에 감춰진 비밀을 알고자하는 욕망이 꿈틀댔던 것이다. 하지만 그 욕망에 앞서 '아름답고 신비로운 자연에 대한 깊은 감명'을 받아 자연의 품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한없이 작고 미미한 존재라는 사실 또한 함께 느끼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괴테는 '낭만파'의 대표주자가 되어 위대한 신의 섭리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자연을 예찬하는데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괴테는 '사랑'이 지닌 아름다움 또한 대단히 극찬하였다. 사랑(에로스)이야말로 텅비고 아무 것도 없던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근원적인 힘이며, 생명이 없는 사물에조차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원초적인 힘이 곧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르테르는 샤를로테에게 첫 눈에 사랑에 빠지고 만다. 자신을 꿈틀거리게 만드는 '무엇'을 느꼈기 때문이고, 그녀와 함께 있는 '순간'과 '공간'에서만 살아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에겐 알베르트라는 약혼자가 있었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그는 '사랑'을 멈출 수 없었다. 그 사랑이 없다면 자신도 존재 가치를 잃고 말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베르테르는 젊은이답게 과격한 면이 있다. 샤를로테를 향한 사랑도 그렇고, 궁정에서 일을 할 때도 그랬다. 샤를로테가 알베르트와 결혼을 한 뒤에도 베르테르는 샤를로테를 찾아가 만남을 갖는다. 알베르트가 '불편'해하는 기색을 보여도 막무가내로 샤를로테에게 '애정'을 쏟아내곤 한다. 이런 베르테르의 '무례함(?)'에도 샤를로테는 베르테르의 순수함을 믿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젊은 베르테르에게 호의를 베풀곤 한다. 베르테르는 그런 샤를로테를 더욱 사랑하게 되고, 더욱더 욕망을 뿜어낸다.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베르테르는 그런 욕망을 잠재우기 위해 잠시 샤를로테를 떠나 궁정일을 하게 되지만, 그곳에서 직속상관과 '일처리 방식'을 두고 설전을 벌이며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는다. 상관인 백작은 이런 베르테르를 두둔하며 '일처리'를 잘한다며 칭찬을 하지만, 칭찬은 그저 칭찬일 뿐이고, 직속상관과의 마찰은 점점 거칠어지게 된다.

 

  그러다 베르테르는 궁정의 사교모임에 우연히 참석했다가 '격이 다름'을 뼈저리게 느끼는 경험을 하게 된다. 사교모임에 참석한 귀족들이 베르테르를 발견하고서, '귀족이 아닌' 베르테르와 동석하게 된 것을 불편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애초에 베르테르는 그 모임에 참석할 수 없는 신분이지만, 평소 베르테르를 좋게 보던 백작의 호의(?)로 부름을 받고 참석했을 뿐인데, 그런 창피를 당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린 베르테르가 마주한 '벽'을 느끼게 된다. 모든 인간이 평등한 세상은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쩌면 그런 세상은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젊은 베르테르'는 그런 세상을 꿈꾼다. 신분이 아니라 능력으로 인정받고 정당한 대우를 받는 그런 세상을 말이다. 어쩌면 베르테르는 꿈꿨는지도 모른다. 그런 세상에서는 '구태의연한 체제'가 아닌 '공명정대한 올바름'만이 유일한 척도가 되어 세상을 밝혀주는 빛이 되리라는 희망에 부풀어서 말이다. 그리고 그 세상에서는 '사랑'이 충만하여 온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거라고 말이다. 언뜻 궤변처럼 들린다. 하지만 베르테르는 그런 세상을 꿈꿀 수밖에 없다. 유일하게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께 해주는 샤를로테가 온전한 '내 여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은 그뿐이기 때문이다. 샤를로테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알베르트가 아닌 자기 자신밖에 없으니 말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눈에는 당시의 '사회규범'이 너무나도 갑갑했던 것이다. '결혼제도'라는 것도 그렇고, '신분사회'라는 것도 그렇다. 왜 한 여자를 두 남자가 사랑할 수 없단 말인가? 아니, 내가 더 사랑받을 자격이 넘칠 정도로 사랑하고 있는데, 왜 '내 여자'로 만들 수 없단 말인가. 그래서 베르테르는 살인죄를 저지른 범인마저 변호하기에 머뭇거리지 않았다. 이 세상이 허락하지 않는 사랑을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이라면서 말이다. 이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는 것일가 싶지만, 젊은 베르테르에겐 그 살인자를 변호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명확하다. 그 자신조차 '허락받지 못하는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다.

 

  베르테르에게 '사랑'은 절대적인 잣대다. 그래서 샤를로테가 베르테르에게 '전부'였던 것이다. 하지만 사회규범이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만약 알베르트가 건강상의 이유로 먼저 죽기라도 한다면 '일말의 가능성'을 기대하며 기다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알베르트가 높은 신분을 이용해 무도하고 부도덕한 짓을 저지르는 망나니였다면 '정의의 심판'을 내리고 샤를로테를 차지할 수도 있었으리라. 그렇지만 알베르트는 착하고 도덕적으로 나무랄 데가 없는 '젠틀맨'이었다. 무엇보다 '사랑'이랍시고 막무가내로 자신의 아내를 탐하는 무례한(?) 베르테르에게조차 '매너'를 잃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베르테르는 죽기로 결심한다. 스스로 사회부적응자로 낙인을 찍듯 자기 자신에게 단죄를 내리고 만다.

 

  베르테르는 결심을 하고서 알베르트에게 총을 빌린다. 알베르트는 총알을 장전하지 않은 '빈총'을 베르테르에게 빌려준다. 비록 총을 빌려주긴 하지만 장전은 되어 있지 않으니 '살해의도'는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알베르트는 베르테르가 '빈총'을 머리에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는 모습을 보고 대단히 경솔하다면서 베르테르를 꾸짖었던 적이 있었기에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럼에도 이번엔 순순히 빌려주었다. 베르테르 스스로 죽을 결심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알베르트도 베르테르가 부담스러웠던 것은 아닐까? 샤를로테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돌적으로 애정공세를 보내는 '연적'이 스스로 꺼져준다고 하니, 한편으론 앓던 이가 빠진듯한 속시원함을 느꼈던 것일까?

 

  결국, 베르테르는 죽었다. 당시 사회적으로 금기시하던 '자살'로 말이다. 단테는 <신곡>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이 망령이 되어 구천을 떠도는 것으로 묘사했듯, 그리스도교에서는 '자살'을 한 사람은 끝내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며 외면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베르테르의 죽음은 성직자들도 외면하고 말았다. 그의 무덤에 단 한 명의 성직자도 참석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베르테르의 죽음'은 당시 젊은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모양이다. 베르테르가 즐겨 입던 '노란색 조끼와 푸른색 연미복'이 대유행을 한 것을 보니 말이다. 어쩌면 베르테르는 '시대저항의 아이콘'이 된 셈이다. 기성세대들의 고리타분한 규범에 순응하기보다는 거부하다못해 '주검'으로 승화한 베르테르가 젊은이들 사이에 아이돌(우상)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책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자살예찬'을 한 이야기로 볼 수 없다. 베르테르는 사랑이 충만한 세상을 꿈꿨고, '원초적인 사랑'을 금기시하며 '사랑의 힘'을 애써 부정하는 구태의연한 세상에 '경종'을 울린 셈이다. 사랑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숨막혀 죽을 듯 괴로우니, 제발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면서 말이다.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세상에서는 신분의 높고 낮음 따위가 중허지 않다. 사랑, 그 자체에는 아무런 죄가 없다. 그러니 마음껏 사랑하라..제발 좀 허락해달라면서 말이다. 오해는 하지 마시길, 베르테르가 말한 사랑은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고 누구보다 더 가슴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는 모든 '순간'과 '공간'에서 더욱더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찐사랑이었음은 두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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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을 위한 레이 달리오의 원칙 - 일과 삶의 성공을 위한 나만의 원칙 만들기
레이 달리오 지음, 조용빈 옮김 / 한빛비즈 / 202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자기계발서는 임팩트가 필요하다. 이를 테면, '제목'만 읽어도 책내용이 훤히 보이도록 말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책을 보라. 책을 읽지 않아도 '칭찬의 효과'가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 또한, <아침형 인간>도 마찬가지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는 잡는다는 속담처럼 '하루 일과'를 일찍 시작하면 여러 모로 이득을 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하루'인데도 말이다. 한편, <마시멜로 이야기>는 '유명한 실험'을 통해서 참고 인내하는 습관이 찬란한 성공을 보장하더라는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면서 설득력을 높였다. 이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는 책에서도 마찬가지로 '성공한 사람들의 습관' 가운데 공통되는 것을 추려 많은 사람들에게 성공 노하우를 전파하였다.

 

  그렇다면 '레이 달리오'의 자기계발서는 어떤 쪽에 속할까? 아마도 '데일 카네기'를 떠올리면 좋을 듯 싶다. 카네기는 '좋은 인간관계'를 맺는 것이 성공비결이라고 말했는데, 이를 위해서 평소에도 '품격있는 대화'를 하는 것을 강조했다. 그럼 달리오는 무엇을 성공비결로 꼽았을까? 그건 바로 '5가지 성공원칙'을 말하면서 '흔들리지 않는 원칙 세우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달리오는 '돼지꼬리'를 연상시키는 곡선을 '연속'적으로 보여주며 다섯 단계인 [목표-문제-진단-계획수립-실천]이라는 원칙을 따라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설득했다.

 

  중요한 것은 실패를 거듭할수록 성공에 다다를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을 한 것이니,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실패의 원인'을 철저히 분석하고 과감히 수정하고 다시 도전하면 반드시 성공에 다다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한 번 세운 원칙'을 스스로 부정하거나, '하나의 단계'가 완수되기도 전엔 건너뛰지 않고 철저히 단계를 밟아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면 그래야 '원칙'을 고수할 수 있고, 실패의 원인을 정확하게 분석할 수 있고, 철저한 분석 위에 탄탄하고 건전한 '새 목표'를 세울 수 있기 때문이란다.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한 번 실패했던 경험'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면서 영영 성공에 다다르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레이 달리오가 쓴 책들의 제목에는 늘 '원칙'이라는 제목이 붙는다. 이는 '성공원칙'의 준말로 성공에 다다를 수 있는 가장 쉽고 빠른 지름길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는 누구나 성공을 꿈꾸지만 모두가 성공에 다다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공'이 마냥 어려운 것만도 절대 아니다. 심지어 달리오는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고도 주장한다. 자신이 말한 '원칙'만 제대로 지킨다면 말이다. 결국 가장 중요하고 정말 어려운 것은 제대로 된 '성공습관'을 가지는 일이다. 이는 '패배를 모르는 승리자'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기도 하다. 24전 24승의 불패 신화를 쓴 이순신도 전장에 나갈 때마다 두려움을 느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늘 승리했다. 이길 확률이 높았기에 이긴 적도 있었겠지만 누가 봐도 질 것이 뻔한 전투에서도 늘 승리하곤 했다.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바로 '원칙'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승리의 조건은 단순하다. 아군에게 유리하고 적군에에 불리한 장소를 골라 적을 유인하고, 때론 매복을 해서, 적의 약점을 파고들고 기세를 꺾어 승리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계획'은 늘 그렇게 세우는 원칙으로 삼고, '실천'을 하기 전에 철저한 준비와 대비를 한 뒤에 전장터에 나갔기에 불패의 신화를 세운 것이다. 물론, 실전은 예상치 못한 일로 가득했고, 그로 인해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지만 철저한 준비를 했기에 '위기대응 능력'도 탁월할 수밖에 없었고, 끝내는 대승이라는 성공신화를 이룰 수 있었다. 레이 달리오가 말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이 책은 그런 '성공원칙'에 다다를 수 있도록 '충분히 연습'할 수 있는 책으로 구성되었다. 각각의 장에는 '여백'을 마련해서 성공을 꿈꾸는 이들이 '철저히 준비'할 수 있게끔 만들었으며, 중간중간에 '달리오의 조언'을 겸한 '사용설명서'가 적혀 있기 때문에 그저 따라하기만 하면 된다. 이처럼 책은 쉽게 구성되어 있지만 '성공원칙'의 필수 조건은 '꾸준한 습관'이다. 성공에 다다를 때까지 꾸준히 연습을 하면서 자신을 더 잘 알아가도록 노력하며 '첫 번째 성공'을 이룬 뒤에도 멈추지 말고, 그 다음, 또 그 다음 성공을 위해 정진해 나가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달리오의 성공비결의 핵심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은 괜한 말이 아니다. 이미 성공을 한 사람들도 수많은 실패를 경험했기에 성공에 다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도 문과시험에 수차례 낙방한 뒤에 무과시험에 간신히 합격한 경험을 바탕으로 누구보다 꼼꼼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옳지 못한 일이라면 상관이라 할지라도 결코 굽히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운 탓에 백의종군도 두 차례나 겪었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파직을 당하고 모진 고문을 받기도 일쑤였다.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도 이러할 진데, 성공신화를 쓴 선배들이라고 다를 것이 없을 터다. 수많은 실패를 겪었다면 성공에 다다를 수 '없는' 길 하나를 제거했다는 행운이 깃들었다고 생각해보길 바란다. 고작 '칭찬'으로 고래도 춤추게 하는데, 지난 잘못을 '성찰'한 당신에겐 춤보다 더한 영광이 함께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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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의 인간 탐구 보고서 4 - 사춘기 땐 우리 모두 외계인, 어린이를 위한 뇌과학 프로젝트 정재승의 인간 탐구 보고서
정재승 기획, 정재은.이고은 글, 김현민 그림 / 아울북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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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우린들의 지구인탐구는 '사춘기'로 옮겨갔다. 지난 시간에 바바는 지구인은 아우린과 함께 어울릴 수 없을 정도로 '폭력적'이라고 진단을 내리고 아우린들의 안전한 지구정착을 위해 '지구인 전멸' 의견을 냈지만, 아우린 행성에서는 좀더 지켜본 뒤에 결정을 내리자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아우린 탐사대는 오늘도 지구인을 감시(?) 하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옆집에서 화재가 났고, 그 집에서 살던 '중학교 2학년생'이 아우린들이 사는 집에 얹혀 살게 되었는데...

 

  줄거리는 잠시 뒤로 하고, '사춘기'에 대해서 정의를 내려보자. 나 어릴 적에는 '질풍노도의 시기'라 불리며 '반항'이 제멋인 줄 아는 철 모르던 시절을 일컫는 말이었고, 부모님들은 그런 사춘기 청소년들에게 '등짝 스메싱'을 날리는 것으로 결론 짓곤 했다. 여튼 큰 사고(!)만 치지 않으면 그저 말썽을 부리는 정도로 마무리 짓곤 했고, 당사자인 청소년들도 '이유없는 방황'을 끝맺으면서 자신에 대한 반성으로 마무리 되곤 했더랬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중2병'이라고 부르면서 '말도 안 되는 짓'을 서슴지 않게 저지르곤 하는 그들을 '외계인 취급'하기 일쑤다. 아무래도 정상적인 지구인과는 사뭇 다른 말과 행동을 저지르곤 하니까 말이다.

 

  이렇게 차원이 다른 사춘기 청소년들은 언제부터 등장했던 것일까? 먼 옛날에는 아무래도 '사춘기'가 없었을 듯 싶다. 보통 그 즈음에 '혼인'을 치루고 어른 대접을 받았기 때문에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치거나 '이유없는 반항'을 저지르기엔 '사회적 책임'을 지어야만 하는 막중함에 눌러 '사춘기'라 단정지을 수 있는 시기가 따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일테니 말이다.

 

  하지만 근대화 이후, 산업역군을 많이 양산하기 위해 '학교'라는 곳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한창 활개를 치고 다닐 정도로 에너지가 넘치는 이들을 '갇혀진 틀'에 가두기 시작하면서 '사춘기'는 발발하게 되었을 것이다. 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하기만 한 '학교의 규율'을 지키며 얌전히 지내기엔 너무나도 에너지가 넘치는 시기인 탓이다. 하지만 육체적으로는 어른에 못지 않은 힘을 뿜어내지만 '정신적'으로는 그에 미치지 못해 자신이 하는 말과 행동에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여 스스로도 '모순적인 상황'에 놓여 이도저도 결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청소년 시기에 '문제아'로 지목된 아이들에게 정정당당한 규칙을 갖춘 '스포츠(운동)'를 권장하면 문제를 일으키는 비율이 확연히 저하되는 현상을 보게 된다고 한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넘치는 에너지를 발산시켜야'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소년 시기에 좁은 교실이나 학원 구석에 쳐박아두고서 '중2병' 운운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청소년 시기에는 남녀를 불구하고 마음껏 활개를 칠 수 있도록 내비두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이다. 물론,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기에 '공부와 성적'을 방치할 수 없다는 의견에도 공감한다. 그러나 사춘기 시절이라고 해봐야 길어야 2~3년이고 대개는 1~2년이면 후딱 지나가기 마련이다. 그러니 내 아이가 '중2병'에 걸렸다고 느껴질 때면 '예술활동'이나 '체육활동', '봉사활동'을 직접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적당한 스트레스 해소에도 도움이 되고 여러 모로 긍정적인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언제부터 정확히 '사춘기'가 시작되는 것을 알아챌 수 있을까? 일단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나 행동이 잦아지면 사춘기로 보면 될 것이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아 고민이 많을 시기인데도, 부모님이 대화를 하려하면 성질부터 낼 경우라면, 십중팔구다. 또한, 부모님들이 하는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녀석이 친구 말이라면 뭐든 믿고 따르는 엉뚱한 짓을 벌인다면 조심스레 '중2병'을 의심하고 서서히 준비해야 할 것이다. 준비물은 상황에 따라 다를 테지만, 드물게는 '몽둥이'가 약이 될 경우도 있긴 하다.

 

  암튼, 아우린인들은 '사춘기'를 겪고 있는 지구인들을 대단히 위험한 존재로 판단하고, 지구인 전멸계획을 실행에 옮기려고 하는데, 과연 지구인들은 아우린들의 공격에 대비가 되어 있는 것일까? 정말로 아우린인들을 지구인을 전멸시킬 것인가? 다음 시간에는 '지구인의 감각'에 대해서 탐구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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