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에 관한 짧은 우화 - 반 룬 전집 2
헨드릭 빌렘 반 룬 지음, 김흥숙 옮김 / 서해문집 / 200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화'는 도덕적인 명제나 행동의 원칙을 인간이 아닌 동식물에 빗대어서 들려주는 짧은 이야기를 말한다. 그래서 우화속에는 유머가 담겨 있고, 교훈을 알아채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여기 '코끼리'가 코끼리로 남게 된 사연을 소개하고 있다. 이야기는 '인간'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황새들이 인간 아기를 날라다주는 일이 점점 줄어들게 된 것이다. 그렇게 감소하는 인간들을 대신하기 위해서 동물들 가운데 가장 '현명하다'는 코끼리들이 점점 줄어드는 인간을 대신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었다. 그래서 코끼리는 '인간세상'을 먼저 경험해보기로 결정한다. 그러고 나서 '인간'이 되기로 결정해도 늦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한 코끼리가 용감하게 뉴욕으로 떠난다. 그곳이 인간세상 가운데 가장 번화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직접 읽어보시길 바라고, 결론은 '코끼리'는 인간이 되길 포기하고 코끼리로 남기로 했다. 그건 '인간세상'에서 겪은 일들이 인간이 아닌 동물들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분명 인간도 '동물'과 함께 살아가던 시절이 있었는데, 인간세상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다른 동물들은 감히 인간세상에 적응조차 할 수 없게 된 것일까? 정녕 '무엇'이 인간과 동물을 다르게 만든 것일까?

  인간이 '문명'이란 것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다른 동물과는 별개로 살아가기 시작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그 문명은 오직 '인간'만이 살아갈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다. 다른 동물들은 해당사항이 전혀 없다. 그렇게 인간은 스스로 고립된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그 덕분에 인간들은 '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잃어버렸다. 문명이 점점 확장되면 확장될수록 동물들은 서식지를 잃고 떠나야만 했다. '그곳'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동물들은 끝내 멸종되고 말이다. 그래도 인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오직 '문명'이 유지되고 번영하는 일에만 골몰할 뿐이다.

  그렇다고 '문명'에 아무런 문제가 안 생긴 것은 아니다. 인간조차 살 수 없을 정도로 '환경오염'을 시켰고, 맘놓고 살 수 없을 정도로 '치안'이 확보되지도 않았으며, 착하게 살기보다는 못된 짓만 골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욕심' 때문이었다. 남을 위하는 마음은 '자기만을 위하는 마음' 앞에 설 자리를 잃고 내쫓긴 지 오래 되었다. 그렇게 무법천지로 만들고서도 인간들은 '귀찮은 일'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으려 한다. 그저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이었다. 그래서 뉴욕에 간 코끼리도 불운한 사건에 휘말렸던 것이다. 그 불운한 일을 겪고도 코끼리가 무사히 고향으로 되돌아 갈 수 있었던 것은 몰인정한 인간사회에서도 '착한 마음'을 잊지 않은 사람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도시에 살아가는 '착한 동물들'이 먼저 도움을 주었지만 말이다. 이런 사건을 통해서 '인간사회'에도 아직 따뜻한 온정이 남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결국은 나쁜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더 많기에 결국 '인간사회'는 멸종해 버릴 것이라는 게 이 '짧은 우화'의 주제다.

  도대체 인류 문명은 언제부터 '나와 다른 것을 포용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게 된 것일까? 왜 인간은 다른 동식물처럼 '한 곳'에서 나고 자라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곳까지' 정복하지 않고서는 직성이 풀리지 않게 된 것일까? 더구나 씀씀이는 너무나 헤퍼졌다. 지구의 자원으로도 모자라 '지구밖의 자원'을 탐내서 굳이 지구로 가져와 쓰려고 혈안이 될 지경으로 '욕심'이 그득하다. 핑계는 참 좋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구인들의 삶'이 평안하고 윤택해질 것이란다. 그럼 지구에 사는 '다른 동식물들의 삶'도 그러할까? 인간이 확장해온 '문명' 아래 인간 이외의 다른 생명들도 모두 평안하고 윤택한 삶을 '더불어'서 살 수 있을까? 답은 너무도 뻔해서 답하는 것이 민망할 정도일 것이다. 정답이 '아니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들이 '도덕적인 삶'을 말하면 위선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문명'이란 것도 인간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해코지 하기 위해서 만든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판국에 '도덕'은 두말 할 것도 없다.

  이 책을 쓴 '반 룬'은 네덜란드계 미국인으로 살다 1944년에 62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러니 이 책이 쓰여진 때는 20세기 초반이었을 것이다. 무려 100여년 전에 쓰여진 책이다. 그때 쓰여진 책인데도 '인간세상'은 살기에 썩 적합한 곳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하긴 100여 년전이 '세계대전'이 벌어지던 때였으니, 인간이 저지른 가장 끔찍한 만행을 경험한 탓일지도 모르겠으나, 그 당시의 서양인들에게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며, 특히 '백인'에 대한 우월주의가 판을 치던 시절이었는데도 '하얀 인간'이 쓴 책치고 꽤나 진보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그가 쓴 대표작이 <인류이야기 (전3권)>라니 조만간 다시 읽어보아야 겠다. 십 몇년 전에 휘뚜루마뚜루 읽은 기억이 나긴 하는데 말이다. 전반적인 느낌을 다시 정리해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듄 신장판 1
프랭크 허버트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듄2>가 개봉을 했다. 아직 관람전이긴 하지만 엄청난 대작으로 명성이 자자할 것이 분명하다. 예상컨대, <듄2>에서 폴 무앗딥은 황제와의 결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새로운 제국의 통치자로 우뚝 설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고작 1편의 결말일 뿐, 6부작까지 이어지는 대서사에 비하면 고작해야 '첫발'을 내딛은 것과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런 김에 <듄 신장판 1>에 해당하는 줄거리를 대강이나마 찌끄려보려 한다.

  모래행성으로 알려진 '듄'에는 '스파이스'라는 귀한 자원이 있다. 복잡한 설명은 책속 '부록'에 적혀 있으니 참고하시길 바라고, 암튼 이 귀한 자원은 '에너지'로 쓸 수도 있으며, 그 자체로 '화폐'의 역할도 하고, 심지어 '먹을 수'도 있는 아주 유용한 자원이다. 그래서 이 '스파이스'를 둘러싼 인간들의 탐욕이 바로 <듄>의 이야기를 이끄는 원동력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누가 '스파이스'를 탐하는가? 그건 바로 '제국의 황제', '하코넨', 그리고 '아트레이데스'라고 불리는 대가문들이다. 물론 '스파이스'를 탐하는 이들은 더 많지만, 1편에서의 줄거리에서 알아볼 대가문들은 이 세 가문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대가문 말고도 '스파이스'와 동화되어 살아가는 듄의 원주민 '프레멘'도 잊지 말아야 한다. 물 한 방울조차 목숨과 직결될 정도로 소중히 다뤄야 하는 척박한 모래행성에서 살아가는 '프레멘'들은 오랜 세월 스파이스와 더불어 살아간 덕분에 '눈의 색깔'마저 파랗게 스파이스를 닮아 버렸다. 그래서 대가문들이 '스파이스'를 약탈해 갈수록 프레멘들의 삶은 고달파지는 셈이다.

  이런 '프레멘'에게 고달픔을 견디게 해주는 전설이 하나 있다. 퀴사츠 해더락이라 불리는 구세주가 나타나 자신들을 노예와 같은 삶에서 해방시켜줄 것이라고 말이다. 그 구세주는 '무앗딥(사막생쥐)'이라고도 불리며, '우슬', '리산 알 가입'이라고 불린다. 원래는 '베네 게세리트 학교'에서 의도적으로 퍼뜨린 전설인데, 오랫동안 예언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졌다가 '폴 아트레이데스'의 등장으로 드디어 예언이 실현된 것이다. 이는 전형적인 '영웅의 탄생'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전혀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정작 <듄>을 이해하기 힘든 것은 온갖 '음모'가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주대서사라는 낯선 이야기에 제대로 몰입도 하기 전부터 '음모'가 펼쳐지고, 그 '음모'속에 '또 다른 음모'가 진행되며 초반부터 스펙타클한 장면들이 연출되는 탓이다. 그래서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인지 알 지 못하는 상황에서 펼쳐지는 속고 속이는 이야기가 독자와 관객을 혼돈의 소용돌이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주 간단하게 '대립하는 세력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먼저 '하코넨 vs 아트레이데스'다. 둘다 대가문에 속하며 명칭상 하코넨은 '남작가문', 아트레이데스는 '공작가문'으로 소개하고 있으나, '공-후-백-자-남작'이라는 순서로 위계질서가 정립되어 있는 건 아닌 듯 싶다. 그렇다고 '지휘고하'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닐 것이니, 대강이나마 이름 정도만이라도 기억해두면 <듄>을 이해하는데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암튼, 이 두 가문이 서로 대립하는 이유는 '대가문의 자존심(명예)'라고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원래 귀족가문끼리는 서로 '정략결혼'을 통해서 가문의 친밀감을 높이기도 하고, 권력과 영지를 더 높이고 더 넓히는데 유리한 까닭에 서로 적대시하는 가문일지라도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서로를 존중하는 척하지만, 뒤돌아서서는 서로 죽이지 못해 사족을 못쓰는 '앙숙'인 것이다. 두 가문에 뭣 때문에 서로 사이가 틀어졌는지는 이야기에 심취해가면서 알아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어쨌든 두 가문은 서로 '앙숙'인 상태다.

  그런데 이렇게 서로 앙숙인 두 가문이 서로 싸운다면 누가 이길지 장담을 하지 못할 정도로 '호각지세'다. 그래서 하코넨은 황제의 사다우카(황제의 광전사) 집단을 '용병'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아트레이데스 가문의 모든 것을 서로 노나먹겠다는 합의(?)를 하고서 '음모'를 펼쳐놓은 것이다. 그래서 하코넨이 다스리던 '아라키스(듄)'를 황제의 명령에 의해 아트레이데스의 영지로 내려주는 척하면서 '우연한 사고'인척 가장한 채 아트레이데스의 '레토 공작'을 암살하고, 아라키스는 다시 '하코넨의 영지'로 삼아, 그곳에서 나는 '스파이스'를 꿀꺽하겠다는 음모를 펼친 것이다. 물론 레토 공작도 멍청이는 아니기 때문에 이런 '하코넨의 꼼수'를 마냥 당하지만은 않았다. 뛰어나고 충직한 신하들의 도움으로 '하코넨의 야욕'을 간파하고 충분히 대비까지 해놓은 상태였다.

  허나 '적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법이다. 하코넨은 아트레이데스의 감시망에 일찌감치 걸려들 것을 알아채고 레토 공작이 신임하는 '충성스런 신하들' 중에 한 명을 포섭해서 레토 공작의 암살에 성공한다. 하지만 그 심복의 배신은 '더 큰 음모'를 품고 있었다. 비록 자신이 '개인적인 사연' 때문에 배신하긴 하지만, 하코넨을 전적으로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토 공작을 이용해서 '하코넨 블라디미르 남작'을 독살하려는 계획을 짜지만, 교활한 악당이 그런 얄팍한 술수에 걸려들지 않고 말았다. 하지만 일련의 '음모와 음모'속에서 레토 공작의 아들인 '폴 아트레이데스'와 그의 부인 '레이디 제시카'는 살아남게 된다. 그리고 그 둘은 사막 한복판에서 '프레멘'과 합류하게 된다.

  한편, 하코넨의 공격으로 대혼란에 빠진 아트레이데스의 군대는 주군인 레토 공작을 잃고, 주군의 아들인 폴 마저 행방불명이 되자 '복수심'에 불타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일련의 사건들이 '배신자'에 의해 벌어졌다고 믿어 의심치 않게 된다. 그리고 그 배신자는 엉뚱하게도 '레이디 제시카'라고 결론을 내린 끝에 '하코넨의 부하'가 되고 만다.

  그러거나 말거나 '폴과 제시카'는 사막에서 합류한 프레멘과 점점 동화되어 간다. 애초에 선택받은 영웅이었던 폴은 자신의 영감과 예지력으로 보았던 것이 '프레멘'과 밀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빠르게 적응(?)하면서 폴은 서서히 '퀴사츠 해더락'으로 각성하게 되고, 프레멘들의 구세주가 되어 '하코넨'과 맞서 싸우게 된다. 허나 하코넨은 겉으로 드러난 '음모'에 불과하고, 진정한 음모를 꾸민 악당은 '황제'라는 사실을 밝혀내고, 황제의 막강한 '사다우카 군대'와 맞서 싸우게 된다. 이후의 이야기는 영화 <듄2>에서 펼쳐질 테니, 영화관람을 즐겁게 마치고서, 이 책 <듄 신장판 1>을 마저 읽어도 좋을 것이다. 허나 잊지 마시길. <듄>의 진정한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월엔 기대만큼 많이 쓰진 못했다. 300편의 리뷰를 쓰려면 월평균 25편 이상은 써야 할텐데 말이다. 좀더 분발하도록 하고. 그렇다고 해서 '숫자'에 연연하진 않으련다. '나만의 리뷰'를 완성해야 할 중요한 고비를 넘기고 있는데 '숫자'를 채우기 위해서 쓰기에 급급한 리뷰를 남기고 싶지는 않다. 그저 오래 기억에 남는 리뷰를 쓰고 싶을 뿐이다. 그러기 위해선 '나만의 인상'이 드러나는 리뷰를 써야할텐데, 이게 쉽지 않다. 암튼 노오력 중이다.


  리뷰 기록에 큰 변화는 없다. '전자책'의 비중이 좀 늘어났을 뿐이다. 슬슬 노안이 오고 있는지 '글자크기'가 작은 책들은 점점 읽기 힘들어졌다. 그래서 '글자크기' 조절이 가능한 전자책이 좀더 읽기에 수월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1~2월엔 '어린이책'을 많이 읽었다. 3월엔 '장르소설'을 많이 읽을 것 같은데, 두고 볼 일이다. 덕분에 '비문학 분야책'을 좀 소홀히 하고 있는데, 곧 균형점을 찾아갈 것이다.


  '소설' 분야에 이어 '역사' 분야도 200권을 돌파했다. 그 책들을 일일이 나열하기보다 독서와 리뷰에 열중하련다. 언젠간 '빅히스토리'를 보여줄 날이 올 것이다. 주절주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오이디푸스 이야기 생각하는 힘 : 진형준 교수의 세계문학컬렉션 3
호메로스 지음, 진형준 옮김 / 살림 / 201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은 끔찍한 신탁 때문에 버림 받은 아이가 끝내 '정해진 신탁'대로 살아가게 되는 이야기다. 한마디로 '정해진 운명'은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비극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런 비극을 통해서 '그리스 사람'들은 무엇을 깨달았을까? 일설에는 그리스의 비극이 현실보다 더 끔찍한 내용을 담고 있기에 그리스 사람들은 '상대적 행복감'에 젖을 수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최소한 현실에서는 저런 비극적인 삶을 살지 않을 것이니 얼마나 다행이냐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닥 공감이 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슬픈 이야기를 통해서 눈물을 쏟아내는 '감정의 정화(카타르시스)'를 거침으로써 삶의 활력소를 되찾을 수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평가에 더 솔깃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펑펑 울고 나면 한결 속이 시원한 느낌을 얻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오이디푸스 왕>이 보여주는 비극은 좀 갑갑한 느낌이 든다. 아무리 끔찍한 비극이 펼쳐진다고 해도 '인간의 노력'으로 인해 조금이나마 피할 수 있고, 비극이 덜할 수도 있어야,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할텐데, '한 번 정해진 운명'은 결코 피할 수 없다는 이야기 전개에 어쩌라는 거냐는 반문이 끝없이 되묻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정해진 운명은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으니 신의 뜻 앞에 '순종'하라는 것일까? 그렇다면 '순종'한다면 끔찍한 운명은 피할 수는 있는가? 그럴 수도 없다면 '순종'하는 의미가 무색해질 뿐이잖은가 말이다. 그런 까닭에 <오이디푸스 왕>에서는 적당한 교훈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다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도덕적인 문제'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기는 했다. 결코 쉽게 판단을 내리기 힘든 '난제'를 던져주고 있다는 말이다.

  이 책은 '고전의 축약본'이긴 하지만, 단편적인 내용만 수록된 책들과는 달리 오이디푸스 이야기로 이어지는 3부작 <오이디푸스 왕>,  <콜로너스의 오이디푸스>, 그리고 <안티고네>를 모두 수록되어 있어, 전체적인 줄거리를 대략적으로나마 모두 살펴볼 수 있는 매력적인 책이다. 특히 <콜로너스의 오이디푸스>는 단독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 거의 없으니, 이 책이 아니고서는 3부작을 한 번에 읽을 수 있는 책이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오이디푸스 이야기가 담고 있는 '도덕적 딜레마'를 한꺼번에 살펴볼 수 있는 책도 바로 이 책밖에 없다.

  먼저 <오이디푸스 왕>에서는 [과연 오이디푸스에게 죄를 물을 수 있겠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분명 오이디푸스는 친아버지를 죽이고 친어머니와 결혼을 해서 네 명의 자식까지 낳는 반인륜적인 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오이디푸스가 인지하지 못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친아버지가 오이디푸스를 어릴 적에 내다버렸기 때문에 오이디푸스는 친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고 자랐다. 그래서 자신을 길러진 '양부모'를 친부, 친모로 알고 자랐을 뿐이다. 그런데 거기서도 똑같은 신탁, "친아버지를 죽이고 친어머니와 결혼해 자식을 낳을 것이다"이란 신탁을 받았기에 양부모 곁을 떠나 방랑을 하던 차에 그만 '친아버지'와 말다툼 끝에 죽이고 만 것이다. 그 사이에 오이디푸스는 영웅이 되었다. 괴물 스핑크스를 죽여버렸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수수께끼를 풀고서 말이다. 그렇게 영웅이 되어 홀로 된 왕비, 즉, 오이디푸스의 어머니와 오이디푸스는 결혼을 하고 왕과 왕비가 되어 왕국을 평화롭게 다스렸다. 그런데 자식을 넷이나 낳는 동안 왕국을 평화롭게 다스렸는데도 불운한 일들이 왕국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까닭은 '왕국내에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른 부정한 사람이 머물고 있기 때문'이란다. 너그럽고 현명한 오이디푸스는 그 부정한 사람을 찾아 왕국에 다시금 평화를 가져다주려 했는데, 그만 그 부정한 사람이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큰 슬픔에 빠져 스스로 자신의 눈을 멀게 하고 왕국에서 쫓겨나게 된다.

  분명, 오이디푸스는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른 부정한 사람이다. 그러나 오이디푸스에게 죄를 묻기에는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오디이푸스는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테베의 영웅이 된 뒤에 자신이 '테베의 왕자'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친아버지를 살해하고 친어머니와 결혼을 하고 자식까지 낳는 일을 제정신으로 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이디푸스의 친부, 친모도 자신들이 죽여 버린 자식이 장성해서 되돌아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를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묻겠다.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저지른 죄에도 마땅히 벌을 내려야만 하는가? 독자마다 다른 결론을 내릴 것이다. 물론 이유도 다를 것이고 말이다.

  다음 이야기 <콜로너스의 오이디푸스>는 장님이 된 오이디푸스와 큰 딸 안티고네가 오랜 방랑의 세월을 마무리하고 속죄를 받는 시점에서부터 '난제'가 시작된다. 바로 테베의 왕위 자리를 놓고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이 전쟁도 불사했기 때문이다. 애초에는 첫째 아들 폴리네이케스가 왕위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숙부 크레온와 짜고서 둘째 아들 에테오클레스가 반란을 일으켜 첫째 아들을 왕국에서 내쫓고 왕위에 오른다. 이에 불복한 첫째 아들은 '외국의 용병'을 모아서 빼앗긴 왕위를 되찾으려 쳐들어가고, 둘째 아들과 숙부는 이에 맞서 싸우게 된 것이다. 여기에 불운한 신탁 하나가 또 등장하게 된다. [둘 중 아버지를 모시는 쪽이 승리할 것]이라고 말이다. 내쫓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자신들의 승리를 위해서 내다버린 아버지를 모셔오려는 두 아들의 눈물 겨운 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 아버지인 오이디푸스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가? 결론은 양쪽을 모두 돕지 않고, 제3자의 힘(테세우스 왕)을 빌어 두 아들 모두 벌을 주는 것이었다. 이때 독자들은 또다시 난제를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자신을 버린 아들을 도울 것인가? 말 것인가?]라고 말이다.

  부모의 처지에서 곤경에 처한 자식을 못 본 척하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일 것인가? 그런데 '제3자의 관점'에서 보면 조금쯤은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다. 아버지라면 당연히 자식을 도와야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인지만, 그 자식들이 애초에 아버지를 내다버린 원죄가 있다면, 괘씸해서라도 돕지 말아야 한다고 결정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아무리 꽤씸하더라도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인데, 어찌 두 아들을 벌주기 위해서 '제3자(테세우스, 이웃의 왕)'에게 이득을 내어줄 수 있겠느냔 말인가? 그런 관점에서 보면 오이디푸스가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 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누구를 돕는 것이 가장 현명하고 도덕적인 판단이란 말인가?

  마지막 이야기 <안티고네>는 더 끔찍하다. 결국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이 결전을 벌인 끝에 모두 죽고 숙부 크레온이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테베를 지킨 둘째 아들 에테오클레스는 구국의 영웅으로 추대하며 성대하게 장례식을 치룬 반면에, 첫째 아들 폴리네이케스는 '외국군'까지 끌고 와서 조국을 공격한 반역자였기에 그의 주검을 들판에 방치하고서 그 누구라도 주검에 손을 대거나 묻어주거나 슬퍼한다면 사형에 처하겠다는 새로운 국법을 정해버린 것이다. 허나 아무리 국법이라고 하지만 '혈육의 장례식'도 치루지 못하게 막을 수는 없었기에 큰 딸 안티고네와 둘째 딸 이스메네가 장례식을 대신해 오빠의 주검 위에 흙으로 덮어주었다. 이에 숙부 크레온은 두 여인을 국법으로 다스려 사형에 처하겠다고 공표해버린다. 하지만 모든 국민들이 그건 너무나 과한 처사라며 사형을 면하게 해주라고 권하지만, 크레온은 끝끝내 "국법은 지엄한 것이다"라는 논리를 내세워 끝내 어두운 동굴에 가두고 바위로 입구를 막아버리는 형벌을 시행하고야 만다. 하지만 그 사이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은 안티고네를 사랑하고 있었고, 아버지에게 사형을 멈춰달라고 하소연도 해보지만 여의치 않자 안티고네와 함께 죽음을 선택하고야 만다. 하이몬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한 크레온의 아내도 덩달아서 자살을 해버리니, 그제서야 크레온은 자신의 처사가 너무 과격했고, 용서를 하는 것도 너무 뒤늦었다고 후회의 눈물을 흘린다.

  이렇게 '나라가 정한 법'이 우선인지, '자연이 정한 법'이 우선인지 둘의 경중을 따지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자연이 정한 법'이란 '혈육의 정'과 같이 자연스럽게 따르는 도덕적 관습을 일컫는 것이다. 물론 국왕이 다스리는 왕국에서 '국법'은 반드시 지켜여야 할 것이다. 아무리 왕이 정한 법이라고 할지라도 함부로 이랬다 저랬다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오빠의 주검이 짐승들의 밥으로 전락하는 것을 방치할 동생은 없을 것이다. 만약 그런 동생이 있다면 국법에는 없더라도 모두가 손가락질하며 욕해야 마땅한 짓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안티고네는 과연 '죽을 죄'를 저지른 것일까? 동생으로서의 마땅한 의무마저 가로 막는 '국법'이 과연 온전할 수 있다고 할 것인가? 그렇다고 국가가 정한 법을 함부로 어기는 짓을 방관만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게 사사로운 이유로 국법을 어긴다면 애당초 국법을 지킬 까닭도 없을 것이다. 어떤가? 어느 것 하나 쉬운 결정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운명'은 신이 정하는 것이지만 '판단'은 인간이 내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 인간은 스스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끝없이 묻고 답을 해도 '정답'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지혜로운 판단'만이 남기 때문이다. 그 지혜로운 판단에는 수많은 '경우'가 달라붙기 마련이다. 예컨대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저런 경우에는 저렇게...", 때로는 "이런 경우일지라도 요로케..." 해야 마땅하다고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그리고 언제나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 수많은 '질문'을 던져야만 하고 말이다. 그 질문이 많고,  고, 결정적으로 '남'을 위한 결정을 위한다면, 그 질문 끝에 내 '단'은 더욱더 위대해질 것이다. 인류는 이렇게 발전해나갈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꾸로 생각해 봐! - 세상이 많이 달라 보일걸
홍세화 외 지음 / 낮은산 / 200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상이 점점 발달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는 '디지털 치매'라는 얘기를 하지도 않았다. 수십 명에 달하는 지인들의 '전화번호' 정도는 누구나 거뜬히 외우고 다닐 정도였고, 노래방에 가면 '좋아하는 노래의 번호' 정도는 습관적으로 눌러 신나게 불러재끼곤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스마트폰을 잃어버리면 '지인들의 연락처'도 같이 잃어버리고 만다. 물론 '백업'을 미리 받아놓아서 그럴 염려가 없을 수도 있지만, 결국엔 '지인들의 연락처'를 척척 눌러서 연락하지는 못한다. '검색기능'이 너무 익숙해지고 편리한 세상이 되다 보니 '생각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생각'조차 하지 않는 세상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렸는데, 이 책은 '거꾸로' 생각을 해보란다. '처지를 바꾸서 생각해보기'는커녕 '내 처지조차 생각해보지' 않는데 익숙해져버린 요즘 사람들에게 너무 어려운 주문일 수도 있겠다.

  허나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해보았을 것이다. '내 처지'와는 정반대에 있는 사람들의 '처지'를 고려해보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말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마음씨를 전문용어(?)로 '배려'라고 한다. 이 책에는 8명의 명사들이 나름의 생각을 '뒤집어서' 펼쳐보인 세상을 바라보는 시도를 해보았다. '승자독식', '공정무역', '과학기술', '생명', '시', '공동체', 그리고 '평화'에 관한 각각의 편견들을 한껏 뒤집어 보았다. 그렇게 세상을 '뒤집어' 볼 때 우리는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이야기해볼 수 있었다. 물론 그렇게 뒤집힌 세상이 불편할 '누군가'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누군가'를 위해서 또 한 번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것, 아까도 얘기했지만 '배려'라는 전문용어를 사용할 때인 것이다. 그런 '배려'가 전문용어인 까닭은 '그것'은 아무리 남발되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아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배려' 받는 사람은 고마워하고, '배려'를 배푸는 사람은 박수를 받기 때문이다. 설령 그 '배려'가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다하더라도 말이다. 그만큼 '배려'는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가장 기본적이자 '최소한의 예의'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은 2008년에 발간되었기 때문에 벌써 16년이나 지난 책이라서 '책내용'을 읽다보면 옛날 이야기를 읽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도 이 책이 신박한 까닭은 십여 년 전에 '미래예측'한 내용이 담겨 있고, 그 당시의 '미래'가 바로 지금의 '현재'인 까닭에 묘한 느낌이 들기도 하다. 그 당시에 '예상'했던대로 지금 이루어진 점도 있지만, 그 예측이 사뭇 달라지게 진행된 것도 있어 의외로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도 있었는데, 그건 바로 '불평등'에 관한 문제였다. 그리고 그 당시엔 '예측'에 불과했지만, 오늘날엔 '심각한 현실문제'가 되어 버린 '불평등'은 너무나 정확해서 놀랄 지경이었다. 이를 테면, 2008년 당시엔 '중산층의 몰락'을 위험하다고 경고했었는데, 2024년인 지금은 '부익부 빈익빈'이 너무나도 극명하게 나타나서 심각한 사회문제가 된 내용이다. 이 책은 '승자독식 사회'의 위기를 경고했는데, 오늘날에는 그 위기가 '현실'이 되어버렸단 말이다. 그래서 이젠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은 폐기처분 되어버리고 말았다. 한마디로 '계층사다리'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사회속에서 '경제적 계급사회', 즉 '새로운 신분제도'가 형성되고 말았다.

  이젠 아무리 노력해도 '경제적 차이'를 극복할 수 없는 사회가 되고 만 것이다. 자, 이렇게 몇몇 '소수'가 경제적 부를 독차지한 세상은 아름다운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99%의 소외된 사람들은 '불만족한 상태'일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우스운 일이지만 '경제적 부의 불균형'이 벌어진 사회현실에 별로 불만을 품지 않은 사람들이 꽤나 많다. 오히려 좋단다. 소위 말하는 '하우스 푸어'들이 그 대표적이다. '아파트 공화국'인 현실에서 어떻게 '아파트 몇 채'를 손에 쥔 이들은 천정부지로 오르는 '집값'에 대해서 자신의 부가 늘어난다는 착각(?)에 빠져 '내집마련'의 꿈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비웃으며 '경제적 무능' 때문이라며 손가락질 하고 자신들은 '경제적 유능(?)'인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사회적 전반적인 문제를 오히려 '문제없음'으로 인식하고, 집값이 더 오르기만을 기다리는 '방관자'로 남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점 오르는 '집값' 말고는 이들도 변변한 재산이 없는 형편이다. 대한민국 상위 1%라는 '재벌계급'에 낑기지도 못하면서 언젠가는 자신들도 '부동산 재벌'이 될 것처럼 '승자독식의 세상'을 찬양할 따름이다. 이런 사람들이 '배려'라는 것은 생각해볼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대한민국 1%'만 만족스럽게 만드는 '승자독식'이 판을 치게 냅둘 것인가? '언제까지' 말이다. 현재의 2, 30대 청년들은 온통 불만투성이다. 사회는 점점 팍팍해지고, 비전은커녕 한치 앞도 바라볼 수 없도록 깜깜한 세상인데, 뭘 어쩌란 말인가? 점점 물가는 오르고, 정규직 취직은 '뽑지를 않으니' 애초에 포기할 수밖에 없고, 비정규직이 되느니 알바나 뛰면서 '실업급여'를 받으며 근근히 버티는 것이 더 나은 세상이 되어 버렸다. 이런 비극을 살고 있는 젊은 청년들에게 기성세대들은 여전히 '열정페이'니, '아프니까 청춘이니' 따위는 헛소리나 나불거린다. '라떼'는 사절이다. 기성세대들은 그나마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는 호시절'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청춘들은 '노력한 만큼 골병만 드는 암흑기'를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도 이들을 지원하는 정부정책은커녕 '실업급여'마저 '시럽급여'를 받아먹는다며 어처구니없는 비난을 퍼붓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앞서 말한대로 '생각'이란걸 하지 않기 때문인 듯 싶다. 정보의 바다를 넘어 '홍수'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이지만, 정작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저 엄지손가락을 아래에서 위로 '습관적'으로 올릴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엄지를 놀려서 '시선'을 사로잡는 미디어들을 보면서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다. 그런 각양각색의 미디어를 보면서 '생각'이란 걸 해보기라도 하면 좋을텐데, 그 생각에 '진입'하기도 전에 넘겨버리기 바쁘다. 그러니 '거꾸로' 생각해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세상은 온통 불만투성이라고 투덜거릴 뿐이다.

  변화의 중심은 '내'가 되어야 한다. 온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기적인 발상'이라고 태클을 걸어주면 '땡큐'다. 나는 거기에 수백만 가지 '반박'을 날려줄 준비가 되어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생각'으로 충만한 사람은 무엇이든 '긍정적인 자세'를 갖추는 법이다. 물론 밑도 끝도 없는 '긍정에너지'는 현대인들의 눈에 '미친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때론 '미쳐야'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법이다. 왜냐고? 세상이 미쳐돌아가고 있으니 미치지 않고서는 세상을 '똑바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각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들은 그야말로 미쳤다. '강대국'이란 이유로 '주변국'을 간섭해도 괜찮다는 논리를 펴는가하면, '납치'를 당했으니 '테러집단'이 숨어있을만한 곳은 학교나 병원, 심지어 '유엔'일지라도 대량살상무기를 터뜨리고 보는 '피의 보복'이 당연하다고 나불대고 있다. 또한, 핵오염수를 자국내에서 처리하는 것에 막대한 비용이 든다는 이유로 바다에 '걸러서' 버리겠다는데도 소위 강대국이란 나라의 지도자들은 그저 방관만 할 뿐이다. 과학적으로 위험하다고 증명되지 않았으니 '안전'할 거라는 밑도 끝도 없는 헛소리를 해도 아무도 막으려 들지 않고 있다. 이처럼 끔찍한 만행들이 저질러지고 있는데도 그저 속수무책으로 손을 놓고 있는 '자칭 선진국들의 방관'은 이미 도를 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변화'를 꿈꾸는 사람이 있다면 그저 '남'이 해결해주겠지라면서 넋을 놓고 기다리면 될까? 택도 없는 소리다. 변화를 꿈꾸는 사람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 '내'가 생각해봤을 때, 아무리 강대국이라도 맘대로 '전쟁'을 일으키면 안 돼! 아무리 납치를 당한 처지라고 해도 '테러단체'만 골라 잡아야 곱게 봐줄 수 있지 마구잡이로 아무 죄도 없는 민간인들을 향해 폭력을 저지르면 누가 '응원'해줄 수 있겠어. 그건 절대 용납 못 해! 네가 저지른 폭력만큼 너도 똑같이 당하는 날이 반드시 올꺼야. 피의 보복은 언제나 그랬거든! 핵오염수가 그렇게 안전하다면 너희 식수로 쓰라고 말했잖아. 그 오염수를 쬐끔 '누출'했을 때 질색하고 난감해하던 모습을 보니 결코 안전해보이지 않더만. 그런데도 또 방류하겠다고, 더 많이 방류하겠다고? 미치지 않고서는 할 수 없지 않겠니! 이렇게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왜 말을 하지 않느냔 말이다. '생각'이라는 걸 한다면 '말'하지 않을 수 없을 텐데 말이다.

  물론, 이 책에 이런 내용이 담겨 있진 않다. 그저 '생각'을 바꾸면 '세상'도 바뀐다는 평범한 진리를 말할 뿐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하고 '말'을 한다고 해도 그저 '공허한 외침'이 되는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 혼자 외친다고 세상이 바뀌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아리가 잘 울리는 '환경'이 있는 법이다. 나의 외침에 '공명'이 울려서 여기저기 널리 퍼져나가는 '상황'이 벌어질 때가 있다. 만약, 그런 환경이 조성되었을 경우, 그런 때가 찾아왔을 경우에 내가 외치지 않고 있으면 어쩌냔 말이다. 그렇다면 우선 '나'라도 계속 외치고 있어야 한다. 나의 외침이 '공허'할지라도 언제 어디서 '화답'이 올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뭐, '희망고문'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변화를 바란다면 '나'는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외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