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의 섬 3 쥘 베른 베스트 컬렉션
쥘 베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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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쥘 베른의 소설을 읽어야 할까? 자꾸 이 질문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경이로운 내용을 담고 있는 공상과학(SF)소설의 원조라는 수식어를 읊어댄들, 결국은 '19세기 소설'이기 때문이다. 1800년대에는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아 세계일주를 80일 만에 하는 것이 놀라운 일일지 몰라도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하루나 이틀이면 지구 한바퀴쯤 돌고도 남으니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란 말이다. 거기다 '잠수함'으로 해저를 누비고 '우주선(대포알)'을 타고 달궤도를 돌아 귀환했다는 이야기는 과학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그저 식상한 이야기에 불과할 뿐이다. 현실이 이럴진대, <로빈슨 크루소>와 같이 어느 외딴섬에 표류하여 모진 고생을 하다가 극적으로 생존한 뒤에 기적과 같이 고국에 돌아온다는 이야기가 눈에 들어올 독자도 그닥 많지 않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보다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모험소설'이 얼마든지 있는 요즘이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난 자꾸 쥘 베른의 소설이 끌린다. 뭐라 딱 꼬집어서 '이것'이 매력이라고 말하기 난감하지만 말이다.

 

  한편, 쥘 베른의 소설을 '아동용 소설'로 소개하기도 애매하다. 애초에 베른의 소설은 '아동'을 위해서 쓰여지지 않았다. 물론, 출판사가 베른의 소설을 '축약'하여 호기심이 충만한 19세기 아이들에게 신비로운 이야기로 소개하기도 했다고는 전해진다. 또 이러한 전략이 20세기 아이들에게도 <소년소녀명작동화>로 만들어져 나름 재미를 본 것도 사실이라고 한다. 그러나 21세기 아이들에게도 잘 먹히는 전략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일단 그의 소설에 흥미를 느끼기에는 21세기 과학기술이 너무 발달한 탓이고, 그의 소설이 너무 '장황한 나열과 설명'으로 이루어진 탓에 요즘 아이들에게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설명이 길더라도 '감동'이라도 진하게 전해질 주제를 담았다면 '교육용'으로라도 써먹을 수 있을텐데, 쥘 베른의 소설에는 '재미(흥미)'라는 요소 이외에 '교훈'이라고 할 내용이 거의 없다보니 요즘 아이들에게 소개하기에도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도 난 쥘 베른의 소설로 논술수업을 진행해보고 싶은 생각이 꿈틀거리곤 한다.

 

  왜냐면 쥘 베른의 소설은 '공상과학소설'의 창조자이면서 '모험소설'의 계승자이기 때문이다. 쥘 베른의 업적은 평범한 소설가에 불과한 그가 '상상의 나래'를 펼쳐 만들어낸 결과물이 오늘날에는 '현실'로 실현시키는 원동력이었다. 다시 말해, 몽상가의 꿈이 현실로 가능하도록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단 말이다. 거기에 아무리 극한 상황에 놓이고 험난한 위기에 닥치더라도 '인간'에게는 '이성의 힘'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이겨낼 수 있으며 끝내는 기적과도 같은 생환이 이루어지는 '낭만적인 모험담'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교육적 요소가 다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막상 소설을 읽어보면 실망을 금치 못하게 된다. 요즘 아이들이 읽기엔 너무 지루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꿈보다 해몽'으로 해석한 것은 아닐까?

 

  <신비의 섬>은 총 3부작으로 쓰여졌다. 쓰여질 당시에 공전의 히트작이었던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에 영감을 받아 '외딴섬'에 표류한 주인공들이 극한 상황을 이겨내고 극적으로 귀환하여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가 주된 줄거리다. 그래서 '모험소설'의 교과서를 충실히 따르고 있지만, 쥘 베른만의 독특한 양식인, (당시로서는 첨단이었을) '과학적인 설명'을 눈앞에서 실현하듯 생생하게 묘사하며 독자들을 황홀(?)하게 만들고, 계몽사상을 충실히 실천하듯 '이성의 빛'으로 모든 위기를 극복해내는 '문명의 힘'을 선보이며, 제국주의적 팽창을 옹호하듯 대양 한복판의 외딴섬에 표류한 처지이면서도 '깃발꽂기'를 선보이며, 조국사랑의 실천과 애국적 행위를 일삼으며 독자들에게 묘한 감동(자긍심(?)) 전해준다.

 

  이런 모험담을 성사시킨 5명의 개척자 또한 각자 나름의 매력을 선보이며 소설의 처음부터 등장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쥘 베른의 소설에서는 이렇듯 '강인한 신념'을 갖추고 '뛰어난 이성'으로 온갖 위기를 극복해낸다는 이상적인 인물을 전면에 내세운다. 오히려 주인공을 곤란하게 만드는 '반동적인 인물'이 너무 나약해 보일 정도다. 허나 쥘 베른의 소설에는 허약한 빌런(악당)보다 더 위험한 것이 등장하기 때문에 악당 따위는 등장하지 않아도 그닥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자연환경(비문명적 조건)'이다. 자연환경의 거대함은 그 앞에선 인간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절대 극복할 수 없는 무지막지한 스케일로 등장하곤 한다. <해저2만리>에서도 남극점 도달 직후에 빙하속에 갇힌 노틸러스호라는 극한 상황에 빠지게 되고, <신비의 섬>에서도 개척자들에게 무한한 자원의 풍요로움을 선사하던 링컨섬이 하루 아침에 화산섬으로 돌변해서 화산분화와 함께 송두리채 파괴되어 개척자들을 남태평양 한가운데도 날려버렸다. 그러나 쥘 베른은 그러한 '거대함' 앞에서도 등장인물들을 쉽사리 죽음에 이르지 않게 만든다. 왜냐면 한없는 '인류애'를 갖추고 있는 마음씨 고운 이들을 신(하느님)께서 쉬이 거두어갈리 없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이승에서 할 일이 많은데 어딜 저승 문턱으로 들이겠느냔 말이냐는 듯이 말이다. 착한 사람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설정(해피엔딩)을 난 참 좋아한다.

 

  그런데 그 '착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너무나도 장황한 설명을 한다는 점이 쥘 베른의 단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해서 그 '장황함'을 빼버리면 주인공들이 왜 착한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빼기에도 그렇다. 다시 말해, 그렇게 길게 설명을 듣고 난 뒤에야 주인공들의 '매력'이 이해가 되기 때문이다. <신비의 섬>에서도 개척자들의 리더격인 '사이러스 스미스'의 매력은 해박한 지식으로 아무 것도 없는 무인도를 '지상낙원'이라고 부를 정도로 풍요로운 문명의 이기를 누리게 만들어내는 능력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 능력은, 이를테면 그가 '과학지식'을 동원해서 그저 돌멩이에서 '철광석'으로 탈바꿈시키고, 그 철광석에서 뽑아낸 '순철'로, 필요에 맞게 '주철'을 만들고, '강철'로 제련해서,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도구를 척척 만들어 과정을 엿보아야만 알게 된다. 이런 예들을 수도 없이 많고, 그 때문에 이야기는 단순히 개척자들이 집이 필요해서 집을 만들었다거나 새로운 먹거리를 구한 김에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해서 안정적인 식량공급원을 마련했다는 내용인데, 그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그동안 인류가 축적한 지식이 총동원되어 자세하게 나열되었다. 그 덕분에 개척자들은 무인도에 불과한 섬을 불과 3년만에 '전신주'를 설치해서 통신장비까지 구축해 '문명생황'을 영위해 나간다. 만약, 그들이 더 오래 그 섬에 정착했더라면 '기차'를 비롯한 교통수단까지 마련해서 남태평양 한복판에서 '산업혁명'을 이룩하는 위엄을 뽐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실현가능성'이 농후한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니 결코 허무맹랑한 상상의 산물이 아님을 독자들도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때문에 19세기 몽상가들이 20세기에 위대한 과학자, 공학자 들로 거듭나 바다와 하늘을 누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최첨단 기기를 만들어 해저를 정복하고, 우주를 항해할 수 있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난 이런 점에서 쥘 베른의 소설을 우리 아이들의 필독서로 삼고 싶었다. 비록 읽기에 지루한 감이 없지 않지만, 그 '진면목'을 깨우치는 순간, 우리 아이들도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 대한민국을 넘어 대양을 누비고 우주로 나래를 펼칠 게 아니냔 말이다. 물론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21세기에 재미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꼰대스타일의 '설명충'의 지루한 설교를 읽고서 '몽상가'를 꿈꾸고, 21세기형 과학자로 거듭날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렇다면 차선책으로 쥘 베른이 갖춘 위대함을 '압축'해서 숨겨진 진면목을 '단숨'에 이해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멀지 않은 미래에는 책속에 담긴 '지식'을 '지혜'로 변환시켜주는 기계를 머리에 쓰고서 '쥘 베른의 소설'을 읽으면, 장황하기 짝이 없는 기나긴 설명을 '단숨'에 이해할 수 있도록 '압축'해서 핵심만 쏙 넣어주는 방식이 도입될 것이라는 상상이 실현되길 바란다. 이런 상상이 22세기에는 너무나도 식상하고 뻔한 내용의 지루함을 선사하게 된다면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럴 듯한 '해몽'보다 '꿈'이 절실하다. 남들이 쌓아놓은 '기초과학'을 빌어다 실컷 '응용과학'의 혜택을 누려왔지만, 이젠 그런 혜택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내야 할 정도로 우뚝 성장했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쥘 베른'을 소개해야할 당위성은 바로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를 살았던 쥘 베른이 20세기를 장황하게 설명한 '설명충'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지닌 번뜩이는 아이디어(상상력)를 우리가 배워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쥘 베른의 소설속에서 '낡은 지식'을 뽑아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가 '어떻게' 해서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것들을 (전문가도 아니면서) 상상해 낼 수 있었는지, 그 '원동력'을 배워야 한단 말이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한 세상을 살더라도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힘은 바로 '상상력'뿐이다. 그렇기에 선생인 내가 할 일은 바로 이 지루한 소설속에서 아이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뿜어낼 수 있는 원천에 이르는 지름길을 '보여주는 일'일 것이다. 비록 꿈 같은 이야기고, 해몽에 불과한 소리일지라도, 선생이라면 반드시 꾸어야 할 꿈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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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무삭제 완역본) - 현대판 프로메테우스 현대지성 클래식 37
메리 셸리 지음, 오수원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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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명작은 너무나 유명하지만 아무도 읽지 않아 고전을 면치 못하는 듯 싶다. <프랑켄슈타인>도 그런 명작소설 가운데 하나다. 이 소설을 읽었는지 파악할 수 있는 날카로운 질문법이 있는데, 바로 '괴물의 이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십중팔구는 확인할 수 있다. 소설을 읽지 않은 이들은 괴물의 이름을 '프랑켄슈타인'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괴물은 이름이 없다. 괴물의 창조주인 과학자 '프랑켄슈타인'이 자신이 생명을 불어넣어 만든 직후에 너무나도 끔찍하고 혐오감을 느껴 '새 생명'을 눈앞에 놓아두고 그대로 도망가버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선 소설의 중반부까지 읽어야 눈치챌 수 있고, 끝까지 읽지 않으면 '괴물'을 무어라도 이름을 붙여 불러주었는지 확인할 도리가 없기 때문에 '좋은 질문'인 셈이다.

 

  하지만 진짜 괴물은 생김새가 끔찍하고 보기만 해도 역겨움을 느끼고마는 '새 생명'이 아니라, '새 생명'에 과학의 정수를 담아 숨결을 불어넣고서도 그대로 방치하여 수많은 이들에게 배척 당하고 사회밖으로 내몰아버리도록 원인을 제공한 '창조주' 프랑켄슈타인인 까닭에 그가 괴물의 대명사로 불리더라도 할 말은 없을 것이다. 애초에 괴물도 살인과 같은 악행을 저질러 '악마'가 되기 이전에 어질고 선한 존재였다. 그토록 선한 마음씨를 가졌는데도 겉모습이 흉측하다는 이유로 선한 행위조차 '위협행위'로 오해하는 어리석은 이웃들 때문에 분한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토록 오해를 받고 분한 마음을 품었을 때 '창조주'였던 프랑켄슈타인이 나서서 오해를 풀어주고, 애초에 '반듯한 외모'로 창조했던들 그런 혐오감을 조장하기나 했겠느냔 말이다. 이제 막 세상의 아름다움에 눈뜬 존재에게 제대로된 훈육과 사회적응을 시켜주지도 않고서 그대로 방치한 결과가 끝내 살인을 저지르는 악마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런데도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피조물에게 미안한 마음이나 불쌍하게 여기는 따뜻한 마음씨는 없는 듯 싶다. 시종일관 자신의 가족, 친구, 사랑하는 연인마저 죽여버린 괴물에게 복수하려는 일념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살인을 저지른 괴물을 처치하는 것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최선이라는 사명감까지 부여하며 '자신의 책임'은 망각한 채, 그저 '복수의 화신'이 되는 것만이 당연한 것인 마냥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다. 더 한심한 노릇은 자신이 무책임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련의 살인사건'에 철저한 피해자 코스프레(?)까지 완벽하게 실행에 옮긴 것이다. 아주 뻔뻔스럽기 그지 없는 '순수한 악의 화신'이라고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괴물의 이름이 '프랑켄슈타인'이라고해도 크게 다를 건 없다.

 

  그런데 말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도 '프랑켄슈타인' 같은 뻔뻔한 사람들이 참 많은 듯 싶다. 뛰어난 지식으로 우리 사회의 엘리트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였으면서도 자신들은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병폐현상'에 대해 일말의 책임감도 없이 뻔뻔스레 '남탓'만 하는 무책임한 짓을 서슴지 않는 분들이 참으로 많은 것을 보니 말이다. 일찍이 메리 셀리도 진보주의 사회운동가인 남편(퍼시 셸리)과 함께 '러다이트 운동'을 목격하며 남편이 '기계파괴 운동', 즉 '폭력의 원인은 가난이다'라고 지적한 부분에 공감을 표했고, 그후 <프랑켄슈타인>에 일정부분 '러다이트 운동'에 대한 지지를 담았다고 해석한 이들도 꽤나 많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속 '괴물'이 애초에 선한 존재였으나 살인을 저지르는 악행을 어쩔 수 없이 저지르는 것에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실제로도 독자들은 괴물이 저지르는 살인행각에 '혐오감'을 내비치기보다 오죽하면 그랬을까?라며 '동정심'을 품기 십상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에 '괴물'처럼 보이는 이들이 있다. 바로 '노동자'로 대변되는 사회적 약자다.

 

  이전에도 그런 경향이 없지 않았지만, 현 정부가 들어서니 여당과 언론에서 '노조갈등'을 강성노조 탓으로 돌리고, 정당한 집회인데도 '불법시위대'로 몰아 강경하게 탄압하기 일이 비일비재한 까닭이다. 그러고는 '낡은 이념'을 꺼내들고 '전가의 보검'마냥 휘두르며 우리 사회를 혼란하게 만드는 '원인'으로 낙인 찍고, 그렇게 낙인 찍은 자신들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멀찍이 서서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병폐현상을 치유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데, 저런 강성노조와 저런 불법시위자 들 때문에 나라꼴이 엉망이라고 난리부르스를 추고 있는 듯 하다. 정말, 어이도 유분수고, 적반하장이 없다.

 

  우리는 어쩌다 저런 '프랑켄슈타인' 같은 놈들을 엘리트로 떠받들며 살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애꿎은 괴물, 선량한 괴물을 무시무시한 악마처럼 혐오하게 되었을까? 어쩌면 우리 사회는 아직도 '외모지상주의'라는 후진국형 병폐현상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듯 싶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방송에서 퇴출시키고 '소수자들의 커밍아웃'에 호들갑을 떨지 않지 않을 정도의 분별력을 갖추게 되었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외양만 그럴 뿐, 우리 속마음까지 완전히 인식을 바꾸지는 못한 듯 싶다. 만약, 우리가 성숙한 시민의식을 갖췄다면 '교통약자의 시위'로 인해 출근길 교통불편을 당했다고 해도 그들의 '권리'를 존중하고, 그들의 권리가 '침해' 받은 것에 공감과 응원의 목소리를 아끼지 않으며, 되려 교통불편을 초래한 서울시나 담당공사 책임자에게 그러한 민원처리를 어째 했는지 살펴보지는 못했을지라도 최소한 관심을 표하기라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일부 기레기 언론에서 '출근길 불편'만을 담은 인터뷰를 인용해 '교통약자'를 벽안시하는 어리석은 짓은 저지르지도 않았을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도 대한민국 정부가 이러한 '교통약자들의 정당한 권리주장'을 불법으로 치부하고 국민불편을 초래하는 교통약자단체의 주동자를 체포해 달게 처벌받게 했다며 정당한 공권력 행사를 자랑처럼 늘어놓고 있다.

 

  어디 '교통약자'뿐이었나? 노동자들의 정당한 시위도 '불법'으로 처벌했고, 농민들의 집회도 '무산'시켰으며, 핵오염수 방류 시점에는 어민들의 우려의 목소리와 수산시장과 수산물을 취급하는 식당 관계자들이 걱정어린 의견을 내놓는 것조차 '과학적 근거'가 없는 유언비어 날조라며 엄정한 법집행을 할 것이라 온국민을 상대로 엄포를 놓기 일쑤였다. 당연히 이러한 비정상적인 행보에 야권의 실력행사와 반대의견을 가진 국민들의 여론이 들끌었지만 어째 '들은척'도 하지 않고, 흔히 말하는 '국민들은 개돼지'라는 듯 개무시전략으로 일관하고 말았다. 이에 정부여당 지지자들은 이러한 '폭거'를 일삼는 시민과 성숙한 시민의식을 모두 싸잡아서 '괴물'을 보듯 날선 비난만 늘어놓고 말이다. 정작 누가 괴물인지 이제는 헷갈릴지경이다.

 

  소설에서는 '괴물'과 '프랑켄슈타인'의 끈질긴 추격이 펼쳐진다. 그리고 둘의 추격이 끝맺게 된 것도 극한 환경까지 쫓아간 프랑켄슈타인이 체력이 다해 죽고 난 뒤에 괴물이 나타나 프랑켄슈타인의 주검을 안고 북극의 빙하속으로 떠나면서 이야기를 끝맺는다. 우리도 이런 결말만 남겨둔 것은 아닐까?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명백하다. 그 누구도 '괴물'로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혐오스럽게 여기는 '괴물'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괴물'일지라도 없애버리거나 내쳐선 안 된다. 그럴 수도 없다. 실상은 '괴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괴물'이 아닌 그저 평범한 '우리'이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괴물'이 아닌 선한 존재로 태어났는데, '괴물'로 적대시하느냔 말이다. 이전에 그런 아픔이 있었다면 앞으론 절대 그래선 안 된다.

 

  나와 '다른 모습'이라 나와 '다른 생각'이라 적대시하는 일은 이제 그만 둬야 한다. 물론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그동안 쌓인 감정이 얼마나 많은데 한순간에 스르르 녹아 없어지겠는가. 또한 그동안 당한 게 얼마나 많은데 쉽사리 '용서'하고 쉬이 '관용'이란 말이 나올 수 있겠느냔 말이다. 성인군자도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해내야만 한다. 극과 극의 대치상황조차 '대한민국'이라는 이름 하나로 스스로 녹여낼 수 있어야 한단 말이다. 우리가 지난 100여 년동안 어떤 일을 겪었는데 고작 '내부분란'으로 대한민국을 망칠 수 있단 말인가. 대한민국이 망하는 일만큼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싸울 땐 싸우더라도 그 싸움의 이유가 오로지 대한민국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첨예한 갈등속에 극한 대치를 했더라도 '대한민국'이란 이름 하나로 똘똘 뭉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대한민국'이란 이름으로 뭉칠 수 없는 이유로 싸우는 것들은 나라밖으로 내쳐도 좋다. '대한민국'이란 이름보다 다른 이름을 더 소중히 여긴다면 그쪽으로 내쳐도 좋다. 우리 대한민국이 보다 잘 되기 위해 싸우는 이들에게 열렬한 응원을 보낸다. 그렇지 않은 '껍데기'들은 까불어서 날려보내면 그뿐이다.

 

  끝으로 고전명작을 읽으며 줄거리만 외우려 들지 않길 바란다. 등장인물이 누구누구 나오는지는 결코 중요하지 않다. 굳이 외우고 싶다면 등장인물이 하는 말과 행동을 유심히 보고, 그걸 외우라. 그리고 그렇게 외운 내용을 깊이 들여다보고 '뜻'을 부여해보길 바란다. 그러면 등장인물이 하는 말이 또렷해지고, 행동 하나하나가 생동감이 넘치게 될 것이다. 바로 그때, 그 느낌을, 자신만의 표현법으로 나타내는 것도 '좋은 독서법' 중에 하나다. 고전을 읽었는데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고 쓸 내용이 없다면,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을 떠올리긴 했는데 차마 말로 담지 못하고, 쓰긴 썼는데 누가 읽으면 쪽 팔리다고? 설령 틀렸으면 좀 어떤가. 생각을 정리해서 쓰긴 썼는데 십분의 일도 제대로 담지 못해 안타깝다면 훌륭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남기는 것'이다. 기껏 떠올린 아이디어를 말로 웅얼거리고 글로 쓰지 않으면 영영 사라지고 머릿속에선 아무 기억도 나지 않게 될 것이다. 당장은 어줍잖다고 여긴 '기록'이 훗날 번뜩이는 대박 아이템의 '소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수많은 위인전에서 읽지 않았던가 말이다. 뉴턴의 사과처럼 말이다. 중구난방으로 써내려갔는데, 훗날 더 좋은 수업재료로 쓰기 위해 남긴 기록이어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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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4
헤르만 헤세 지음, 구기성 옮김 / 문예출판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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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 시절에 꼭 읽어야 할 책을 추천한다면, 단연코 <데미안>을 꼽을 것이다. 흔히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표현으로 청소년들을 싸잡아 놓지만 우리네 청소년들은 그저 '폭풍속에서 갈 길을 잃고 헤매는 존재'만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나역시 청소년 시절을 겪었지만 '질풍노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오리무중'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했던 것 같다. 뭔가 '해보고 싶은 것'은 많은데 어른들의 말씀을 들으면 '이것저것 다 해볼 시간 따윈 없다'면서 그저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에만 매진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지금, 나도 어른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다보니 '그 말'도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만 뼈져리게 느낄 뿐이다.

 

  그렇다면 청소년 시절에 꼭 챙겨야 할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너무 많지만, 딱 세 가지만 말하겠다. 첫째는 '건강'이다. 10대에는 돌도 씹어먹을 정도로 무엇이든 왕성한 시절이기 때문에 '건강'을 소홀히 하기 십상이다. 이는 20대가 되어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무엇을 하더라도 건강을 해쳐가는 줄도 모르고 미치기 일쑤이고, 정작 3, 40대가 되어서야 서서히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기 마련이고, 50대 이상이 되면 여기저기 몸이 망가져서 '하고 싶은 것'이 생겨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기 때문이다. 예전이야 나이 50살을 넘기면 인생을 다 산 것처럼 '죽을 날'만 손꼽고 살았지만, 이제는 '100세'를 바라보고 살아야 하지 않느냔 말이다. 50살이 넘어도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넘쳐날 나이다. 그런데 정작 건강은 10대부터 챙기지 않으면 50살을 넘기기 힘드니 미리미리 챙겨야만 한다.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여기저기 망가지고 난 다음에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해서 '사이보그', '안드로이드'가 되어 영생을 누린다해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면 청소년 시기부터 건강을 챙기는 습관을 올바르게 들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둘째는 '인성'이다. 부모님께 효도하고 웃어른을 공경하며 형제끼리 돈독하고 친구에게 우애로운 것도 해당되는 것이 '인성'이지만, 청소년 시기에는 '제 앞가림'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남에게 폐를 끼치는 '배려(싸가지) 없음'을 경계하고, 우리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한 점 부끄럼 없는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갖추는 것을 통틀어 '인성'이라고 말하고 싶다. 흔히 말하는 '인성 쓰레기'들은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개쓰레기'밖에 될 것이 없다. 아무리 학벌 좋고, 돈 많아서, 사회지도자 자리에 떡하니 올라가도 '인성 개쓰레기'라면 우리 사회에서 절대로 얼굴 들고 살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지금까지는 인성이 나빠도 '잘 생기고 예쁘면' 봐줬고, '학벌 좋고 돈 많으면' 깨갱했고, '금배지 달고 '사'짜 직업 갖고 있으면' 그저 굽신굽신 해줬을지 몰라도, 이젠 그딴거 다 필요없다. 인성이 더럽다고 '확인'되는 순간 모든 걸 박탈시켜 우리 사회에서 영원히 격리시키는 사회 분위기를 형성해야 할 것이다.

 

  셋째는 '공부'다. 물론 어른이 되어서도 공부할 시간은 많다. 아니 공부는 평생해야 하는 것이기에 딱히 시기를 논할 꺼리가 없다. 그럼에도 청소년 시기에 '공부'에 전념해야 하는 까닭은 오직 청소년 때만 유일하게 '공부'에 매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고 난 다음에는 '공부'에만 전념할 시간이 없다. 하더라도 먹고 살아야 할 '돈벌이 수단'과 병행해야만 한다. 전문적인 용어로 '경제적 안정'을 꾀하기 위해서 20대 이후부터는 '집 걱정', '결혼 걱정', '육아 걱정', '노후 걱정' 등등의 무거운 짐을 덜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하기 때문에 '뛰어난 학업 정진', '훌륭한 가치관 형성'과 같은 한가로운(?) 공부는 오직 '청소년기'에만 할 수 있는 특권인 탓이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와 <데미안>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아시다시피 헤세는 불우했던 학창시절을 보낸 뒤에 '자살'을 극복하고 '정신분석학'의 도움을 받아 문학의 거장으로 발돋움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겪어야 했던 수많은 갈등과 고뇌, 그리고 가난한 환경이 주는 핍박속에서 모진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자신이 하고픈 일'을 찾아내 인류애를 성찰시킨 위대한 작가로 성장했다. 이러한 성찰한 내용들은 헤세의 소설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고, 우리는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가 이겨낸 깊은 고민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 <데미안>은 작가가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조국을 위해 싸울 것인지, 아니면 배신자로 낙인 찍힐 것인지 고민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건 바로 '선과 악의 공존'이다.

 

  책속의 주인공인 싱클레어는 우연히 '두 개의 세계'를 깨닫게 된다. 자신의 집안에서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도 그렇고, 우리를 둘러싼 모든 세상이 선과 악으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에 큰 혼란을 겪게 된다. 그러다 만난 '데미안'이란 인물은 선한 인물인 것 같으면서도 악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묘한 인물이었다. 그러면서 싱클레어는 데미안이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며 선과 악의 개념마저 혼동해버릴 지경에 이른다. 그러다 만난 베아트리체와 피스토리우스를 통해 한층 더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하지만 아직은 그뿐이었다. 그러다 첫사랑의 얼굴에서 다시금 데미안을 떠올린 싱클레어는 '이상한 꿈'과 함께 그에게 편지를 쓴다. 그리고 도착한 답장에는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는 내용이 짤막하게 적혀 있을 뿐이다. 세상은 알, 그 잡채이고, 그 경계를 허물고 나와야 새로운 세상과 조우할 수 있으며, 그 새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라는 묘한 말과 함께 말이다. 여기서 '아브락사스'는 신의 이름인데, 이 신의 특징은 선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악한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선과 악의 구분'은 모호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다 전쟁에 참전한 싱클레어는 전투중에 포격을 받아 부상병으로 치료를 받는데 옆자리에 누워있는 데미안을 발견한다. 반가운 마음도 잠시, 데미안은 이 만남이 마지막이라는 말만 남기고 떠나버린다. 싱클레어는 문득 잠에서 깨어나 데미안을 찾았지만, 그는 이미 떠난 듯, 낯선 사람만이 누워있을 뿐이었다. 싱클레어는 그 뒤에도 아픈 일 투성이었지만 더는 괴로워하지 않았다. 이제는 그와 완전히 닮아 있었기 때문이라면서 소설은 끝맺는다.

 

  흔히 <데미안>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구를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에서 찾곤 한다. 더 넓은 세상을 맞이하려면 '경계'를 깨고 나와야만 하고, 그러려면 '기존의 세상'을 깨부수어야 한다며 아주 당연한 이야기를 매우 깊이 음미하곤 한다. 그렇다면 '기존의 세상'이란 무엇이고, '더 넓은 세상'이란 무엇인가? 소설의 전반적인 내용을 첨부한다면 '선과 악'을 구분하며 괴로워하던 싱클레어라는 껍질을 깨고 '선과 악'을 구분할 것도 없이 더 넓고 깊은 세상을 훨훨 나는 데미안을 맞이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데미안이 누구인가. 최초의 살인자 '카인'도 그저 살인을 일삼는 나쁜놈의 대명사가 아니라 하느님마저도 용서할 수밖에 없는 '능력자'라고 말하고,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옆에 있던 도둑놈마저 예수의 꼬임에 넘어가지 않고 끝까지 지조를 지켜 자신의 죄값을 달게 치룬 멋쟁이라고 추켜세운 인물이 아닌가 말이다. 세상 일이라는 것이 그렇다. 우리가 '악인'이라고 낙인을 찍은 사람조차 '어쩌면' 선한 존재일 수도 있다는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는 혜안을 지닌 인물이 바로 '데미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만 <데미안>을 해석하면 청소년 필독서라고 하기에 부족한 점이 많을 것이다. 만약 싱클레어에게 앞서 말한 '세 가지'를 이미 갖춰진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어떻게 바뀔 것인지 곰곰히 따져보길 바란다. 싱클레어가 '건강'을 챙기다 못해 뛰어난 운동실력을 갖춘 능력자였다면, 감히 '프란츠' 따위가 어린 싱클레어에게 삥을 뜯지는 못했을 것이다. 또한, 싱클레어가 '두 개의 세계'를 깨달음과 동시에 '올바른 인성'까지 깨우쳤더라면 프란츠 떼거리의 어설픈 협박에도 전전긍긍하지 않았을 것이고, 데미안의 알쏭달쏭한 견해에도 따박따박 반박을 하며 고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다 '공부'까지 짱 먹었다면 첫사랑 베아트리체는 싱클레어가 꼬시기도 전에 넘어왔을 것이고, 범생이 피스토리우스의 궤변 따위에 고민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참가한 전장에서도 하는 일마다 명쾌했을 것이다. 애당초 전쟁은 완벽한 폭력일 따름이니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지만, 자신이 참전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라면 '전우'를 위해서 내 한몸 희생할 각오로 싸울 것이고, '지키기 위한' 전쟁을 할 뿐, '빼앗기 위한' 전쟁에는 결사반대를 할 것이고, '조국을 위해' 무모한 희생을 강요하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무뇌충'들에게 저항의 목소리를 냈을 것이다. 조국을 위한다며 하나 뿐인 목숨을 기꺼이 내놓으라고 말하려면, 그 '조국'은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약자'를 위해서 뭐라도 했어야 하지 않느냔 말이다. 그런 위대한 조국이라면 애초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을 것이며, 일어났더라도 애꿎은 희생을 줄이기 위해 '약자'를 총알받이로 내세우기에 앞서 '힘센 강자'를 내세워 적들이 감히 쳐들어오지 못하게 든든히 막아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약자'들도 뭐라도 내놓을 것이 없어 '기꺼이' 목숨을 바쳐 싸울 것이 아니냔 말이다.

 

  그렇기에 <데미안>은 청소년 필독서여야 한다. 제 앞가림을 하기 위해 '건강, 인성, 공부'를 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 모두가 사는 '공동체 사회'에서 우월한 일원이 되어 밝고 멋진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헌신하는 위인으로 거듭날 훌륭한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라면 말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너무 '돈돈돈'밖에 모른다. 돈만 벌면 장땡인 듯 스스로 '개쓰레기'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지치고 힘들 때에는 '사회비판'이랍시고, 우리 사회에 희망이 없다는 비난을 나불댄다. 그런 사람들에게 되묻고 싶다. 우리 사회에 '인성 쓰레기'가 넘쳐나는데 당신도 한몫 단단히 하지 않았으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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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엔 12권으로 마쳤다.

다행히 추석연휴로 마무리하는 달이었기에 허리통증과 다리통증도 조금은 견딜만 해졌다.

그 덕분에 막판 스퍼트를 올리게 되었고 말이다.

이대로 10월에도 쭉 달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지난달과 달라진 점은 거의 없다.

여전히 어린이 분야가 1위를 차지하고 있고,

그 뒤를 '인문학', '역사', '소설', '청소년', '과학'이 잇고 있다.

하지만 다음 달에는 '소설 분야'의 책이 3위인 '역사'를 제치고 올라설 것 같다.

아이들과 수업도 '소설 분야'의 책 위주로 진행할 예정이라서 그렇다


북모리 독서앱에서 '새로운 기능'을 찾아냈다.

그토록 염원했던 '출판사 통계'를 확인할 수 있는 기능이어서 반가웠다.

하지만 '년간 통계'만 낼 수 있고, 독서기록 전체통계는 한 눈에 볼 수 없어 아쉬웠다.

그런 기능을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을 다시 찾아보도록 하고...

 

23년 9월까지 '출판사 통계'는 위와 같다.

상반기에 '서평단'으로 활동했던 [한빛비즈]의 책이 가장 많았고,

[인간사랑] 출판사에서 기획했던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100선 리뷰' 기획 덕분에

읽기 시작한 '인문고전'과 더불어 눈독을 들인 '문학고전'을 섭렵하기 위해서 읽기 시작한

[주니어김영사]와 [채우리]가 그 뒤를 이었다.

아직 남은 10월~12월 동안에도 꾸준히 읽고 올해 안에 마무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제 건강이 회복되는대로 [인간사랑]의 책도 섭렵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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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의 섬 2 쥘 베른 베스트 컬렉션
쥘 베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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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권에 이어 '신비의 섬, 링컨섬'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일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개척자들은 '자신들만의 섬'이라 여겼던 곳에 대한 탐험을 점점 더 넓혀나갔다. 하지만 탐험을 하면 할수록 개척자들은 신비롭고 아름다운 경관에 빠져들어갔지만, 그 와중에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점점 쌓여만 갈 뿐이었다. 그리고 개척자들은 드디어 깨닫게 되었다. 이 섬에는 자신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존재'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 존재가 드디어 실체를 드러내었다. 링컨섬으로 배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설의 줄거리는 온통 '개척자'들이 링컨섬을 'DIY(Do it yourself)'로 꾸미는(?) 이야기로 가득 했다. 1권에서도 소개한 만물박사 '사이러스 스미스' 덕분이었다. 사이러스는 못 만드는 물건이 없었고, 모르는 지식이 없을 정도였다. 다른 개척자들이 '무엇'이 필요하다고 하면 사이러스는 대수롭지 않게 '만들 수 있다'고 답했고, 실제로 아주 간단하게 뚝딱뚝딱 만들곤 했기 때문이다. 마치 <정글의 법칙>의 김병만 족장 같은 믿음직함이었지만, 단순히 불을 피우고 먹거리와 간단한 잠자리를 해결하는 수준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화약과 폭탄을 만들어 물길을 바꾸어서 폭포를 만들고, 그렇게 만든 폭포를 수력발전소 삼아 물레방아를 돌리고, 엘리베이터를 만들고, 풍차를 만들어 곡식을 빻아서 빵을 만들어 식생활을 고급화시키는 등 천재적인 지능을 가진 완벽한 리더,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런 능력은 '한 사람의 천부적인 재능'이 아닌 '인류의 지식' 쌓이고 발전하여 '과학의 위대함'으로 인류가 문명화 될 수 있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엄함을 연출하였다.

 

  이는 링컨섬 바로 옅에 있던 '타보르섬'에 있던 조난자 에어턴과 극렬하게 비교가 된다. 그는 사실 해적질을 하던 범죄자로 남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외딴섬에 죄인의 신분으로 유배된 것이지만, 링컨섬과는 다르게 타보르섬은 '그랜트 선장'에 의해 이미 개척된 상황이었기에 에어턴이 마음만 굳게 먹었다면 '문명인'으로써 삶을 이어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홀로 남겨졌다는 고독과 죄값을 치뤄야 한다는 자책으로 인해 '인간의 삶'으로부터 멀어지려 하였고, 결국은 짐승과 다를 바 없이 날고기를 씹으며 야만의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런데 링컨섬은 개척자들이 도착하기 이전에는 '아무 것'도 없는 무인도와 다를 바가 없었던 터라 숙식은 물론, 의복을 제대로 갖추기 위해서 무던히도 '섬안의 자원'을 활용하여 끊임없이 만들어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만약 '사이러스의 지식과 리더십'이 없었더라면 링컨섬의 개척자들도 야만인과 다를 바 없는 살거나 거칠고 모진 환경에 이미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딴에는 19세기 소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제국주의 식민지의 팽창'이라는 관점을 빼놓을 수도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서구 열강의 위대함을 '문명'으로 포장하고, 그 문명으로 척박한 환경조차 지배하여 '미개함'을 좀 더 나은 문명으로 바꾸어 나가는 과정이 엿보인다는 말이다. 그래서 남태평양의 외딴섬에 우연히 착륙(?)하였지만, 그들이 힘들게 개척을 한 뒤에는 기꺼이 '조국의 품'으로 바치겠다는 제국주의적 사고관이 뚜렷하게 보인다. 그러면서 이들은 그러한 사고관을 자연스레 '인류애'로 포장하고 있는데, 진정한 인류애를 보여주기 위해선 '국적'을 포기하고 '지상의 낙원'으로 만드는 것에 만족해야 했을 것이다. 하긴 제국주의적 사관에 길들여져 있었을 당시의 지식인들에겐 너무 앞선 이상이었을테니 오늘날의 독자들은 이러한 점을 충분히 감안하여야만 할 것이다.

 

  암튼, 이어지는 3권에서는 드디어 '네모선장의 비밀'이 밝혀지게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매우 기대가 크다. 인류 최초로 잠수함 '노틸러스호'를 타고 바닷속을 항해한 네모선장의 일대기였던 <해저 2만리>에서도 꼭꼭 감춰두었던 선장의 비밀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링컨섬이라 불리는 이 '신비의 섬'이 노틸러스호의 비밀기지로 소개되었던 그 섬이 맞는 것일까? 그리고 우연히 표류(?)하게 된 다섯 명의 개척자들 앞에 놓인 운명은 어떻게 펼쳐지게 될까? 온통 궁금한 것 투성이지만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릴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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