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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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V / 민음사 17번째 리뷰] 논란의 그 책,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 다 읽으니 왜 이 책이 '논란'이 되었는지 공감 되었다. 분명 '대한민국 20대 남성들'을 분노케 만든 까닭이 있긴 있었다. 남성들도 겪었을 법한 어려움은 철저히 '외면'하였고, 때로는 남성들이 겪어야만 할 '역차별'일 수도 있다는 점을 과격하게 '도외시'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이 책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하나같이 '무능, 그 잡채'였다. 그에 반해 '여성들의 목소리'는 정의요, 진리요, 대한민국 부조리를 향해 날카로운 칼날처럼 올곧음의 상징 같았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만으로 이 책이 '여성혐오'를 불러일으킬 만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남성들이 읽기에 '불편'할 수는 있어도 '혐오'하며 '공격'할 이유로 마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령 불편하다면 '남성들,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볼 거울'로 삼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대한민국 남성들이 부지불식 간에 여성들에게 저지르는 '실례'를 깨닫는 계기로 삼던가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성의 잘남'이 남성들의 '밥그릇을 빼앗는 위협'으로 분위기를 몰아가는 것은 좀 유치하지 않은가. 여성이 남성과 '공정한 경쟁'을 요구했을 뿐인데, 그것이 남성들에게 '역차별'을 가져올 수도 있다며 소스라칠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안타까울 지경이다. 왜냐면 여전히 여성들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경쟁을 해야 하고, '유리 천장'으로 억압을 받는 등 '여성에 대한 노골적인 차별'이 통용되고 있는 사회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 아직도 우리는 '진정한 양성평등' 사회에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고 말이다. 물론 이런 전제들이 현재 '20대 남성들'에겐 그다지 피부에 와닿지 않는 먼 나라 이야기라는 것에는 공감한다.

  현재 20대들은 MZ세대들이다. 95년생부터 2004년생이니 딱 그 세대다. 대한민국에서도 '양성평등 바람'이 강하게 불던 시기이고, 이들의 학창시절에는 '남자선생님'보다 '여자선생님'이 더 많은 시기라서 '여권신장'이 그야말로 정점을 찍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여성인권'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던 세대였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20대 남성들'은 여성들의 일방적인 희생에 크게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들의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들은 다 누리던 '남자의 특권'을 이들은 제대로(?) 맛보지도 못하고 '성평등'에 민감한 엄마와 여선생님들, 여학생들에게 둘러싸여서 숨죽이며(?) 지냈다는 고백도 간간히 들려올 정도다. 이들의 초등학교 시절에 가장 큰 불만은 학교담임선생님이 '여자'라서 '여학생편'만 들어준다는 억울함(!)이었다. 비록 사교육이지만 논술선생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였던지라 '학교에서 못다한 하소연'을 남자선생인 나에게 와서 '세상에 이런 억울한 일이 다 있어요?'라는 투로 불만을 표출했기 때문이다. 속사정까지 잘 모르던 나는, '그깟 일'조차 배려하지 못할 거면, '꼬추' 떼서 갔다 버리라고..힘 약한 여학생을 이겨먹어서 뭐가 좋겠냐고..꾸중 아닌 꾸중을 했더랬다. 그럴 때마다 입이 댓발만큼 내밀려 툴툴거리기만 했는데, 그애들이 지금의 '20대 남성'인 것이다.

  그렇다. 82년생 김지영은 그랬을 수 있겠지만, 92년생 서연아, 02년생 이지안은 '안' 그럴 수도 있다는 점이 '현재 20대 남성들'의 불만의 초점일 수 있다는 점이다. 왜냐면 저들은 '아버지'나 '할아버지' 세대만큼 '남성'으로서 누리며 살아본 인식이 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들에겐 달라진 것이 '아직도' 없다는 점이 문제다. 그녀들의 어머니, 할머니 세대들이 누릴 수 없었던 것만큼이나 '누릴 것'이 없는 현재를 살면서 무엇이 나아졌는지 '실감' 되지 않는다. 더구나 세상은 더욱 험악해져서 '대한민국 여성'으로 살아가기가 점점 더 힘들 뿐이다. MZ세대 여성들이 남성보다 잘났다고 느끼는 시기는 딱 '학창시절'까지다. 다시 말해, 남성들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오직 '학업성적' 뿐이란 말이다. 사회생활을 하면 할수록 여성들이 겪는 고초는 이전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어진 것이 전혀 없다. 여성은 결혼과 동시에 '축하'대신 '퇴직사유'를 들이밀고, 임신과 출산 소식에도 '축복'대신 '왕따'를 선물받는다. 똑같은 사유로 남성들은 '한 집안의 가장'으로 더욱 신임을 받으며, '자녀 양육에 대한 책임감'을 이유로 중용받아 더 많은 승진 기회와 더 많은 연봉을 거머쥐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20대 남성들'은 공정한 경쟁이 아닌 까닭으로 '군복무 의무'를 꼽는다. 인생에 있어 가장 소중한 시기이며, 취직준비에 매진해야 할 시기에 '군복무'를 해야 하는 까닭에 또래의 여성들보다 부당한 일을 받는다면서 말이다.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 '남성'보다 '여성'이 겪어야 할 불합리한 일들이 더 많다는 까닭을 들어도 '취업도 못한 마당에' 먼 미래에 '있을지도 모를 일'을 두고 불합리한 일을 당연히 감수하라는 것은 명백한 '역차별'이라고 따지고 든다. 또한, 남자들의 '군복무 의무'의 고달픔을 여자들의 '임신과 출산'의 고통으로 맞대응이라도 할라치면 그건 '진정한 양성평등'에 걸맞지 않는다는 핑계를 대며 여성에게도 똑같이 '군복무'를 할 것을 요구하는 치졸한 모습까지 보인다. 군복무에, 임신과 출산까지 다 하라는 이야기 아닌가. 이렇게 서로에 대한 몰이해로 인해 싸움은 점점 더 유치하게 진행되다가 급기야 '혐오감정'까지 불사르곤 한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으니 아예 이해하지 않겠다는 무식의 발로다.

  나는 74년생 남자다. 그리고 내 여동생은 81년생이다. 이 책의 '김지영 씨'가 겪었던 많은 일 가운데 상당 부분 내 여동생도 똑같이 당했더랬다. 학창시절에는 '하나 뿐인 오빠'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을 많이 포기해야 했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직장상사'에게 결혼요구를 빙자한 스토킹을 당해 '정규직'으로 들어간 직장을 도망가듯 때려치워야만 했다. 그 때문에 동종업계에는 행여라도 그 미친 놈을 만날까봐 지원조차 하지 못하고, 알바보다 못한 '비정규직'을 전전하며 개고생을 했더랬다. 그럼에도 제가 좋아하는 '취미'를 살려 일 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는 이야기만 하던 동생이었다. 지금은 결혼을 해서 '착한 며느리병'에 걸려 있는 것을 보면 안쓰럽기 그지 없다. 그나마 예전과 같은 혹독한 시집살이를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는 말 못한다. 동생 내외가 열심히 맞벌이해서 돈을 벌어도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해 노심초사하는 것을 보면 안쓰럽기 그지 없다.

  암튼, 이렇게나 많은 '공감'이 가는 소설인데도, 이 책 <82년생 김지영>에서 아쉬운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건 '여성의 불만'을 토로하는 것에만 모든 지면을 할애하고, '양성평등'으로 대한민국 남성들과 화합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점이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 남성들이 '이랬으면 좋겠다'는 제시가 없다. 물론 애둘러서 표현한 것이 있기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이러저러 해야 한다는 명시가 없으니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닌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분명 이 책을 읽은 '대한민국 남성들'이 모두 이 책을 싫어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맞아맞아'를 외치며 저들의 지난날, 무지했던 그시절을 회상하며 잘해주지 못한 미안함 마음이 앞서는 '남성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책은 '그런 남성들'까지 포용할 수 있는 아량이 전무한 듯 싶다.

  양성평등을 위한 '여성운동'은 반쪽짜리가 되어선 안 된다. 진정한 평등을 이루어야 할 남성들과 연대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남성들의 지지'도 확실하게 얻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여성만을 위한 운동'이란 방향성으론 실패할 수밖에 없다. 남성과 여성의 '신체적/정신적 차이'를 서로 인정하고 서로에 대한 배려와 양보, 그리고 대화와 타협을 이룰 수 있는 장을 열어놔야 한단 말이다. 그래야 서로가 느끼는 '불만과 불편', 그리고 '부조리한 사회'가 마련한 '불합리한 점'들을 바꾸고 고치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들 기초로 삼을 수 있지 않겠느냔 말이다. 그렇기에 '여성운동'은 인류공통의 문제점을 인류 모두를 위해 해결해나가는 방향으로 실천해나가야 한다. 누가 누구를 '혐오'하면서 이룰 수 없는 목표인 것이다. 그러니 '혐오'는 절대 금물이다. 그리고 '적대시'해서도 절대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그동안의 여성차별'을 적나라하게 고발한 내용으로 이해하면 좋을 듯 싶다. 여성들이 느꼈던 '사회문제점'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며 여성과 남성이 서로의 벽을 허물고 진정한 대화를 나누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여성들도 대한민국 남성들이 겪었고, 느꼈던 '불합리'한 점들에 관심을 갖고 함께 해결해나갈 수 있는 방향을 '함께' 제시해줬으면 좋겠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서로가 쌓아온 벽이 높은만큼 갈등은 피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역지사지'다. 그리고 '상대가 이해할 수 있는 표현법'으로 바꾸고, 수위를 낮춰 귀에 거슬리지 않게 문제를 제기하며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도록 서로 노력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미래는 이 노력에 달려 있다고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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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조영웅전 8 - 화산논검대회
김용 지음, 김용소설번역연구회 옮김, 이지청 그림 / 김영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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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IV / 김영사 30번째 리뷰] '김용의 3부작'의 첫 작품인 <사조영웅전>의 대단원이 열렸다. 이 소설의 주제는 '영웅이란 무엇인가?'라고 앞서 밝혔다. 그리고 그 영웅을 가리기 위해서 '화산논검대회'가 열렸던 것이다. 1차 대회는 왕중양, 황약사, 홍칠공, 구양봉, 단지흥, 구천인이 참석해 우열을 가리려 했다. 그러나 구천인은 철장방의 내부적인 문제와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대회에 불참하였고, 나머지 다섯 명이 몇 날 며칠을 싸운 뒤에 전진교의 왕중양이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우승자에게 '구음진경'이라는 무공비급을 차지할 권리를 주었다. <사조영웅전>의 이야기는 바로 '구음진경' 때문에 시작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웅의 첫 번째 조건은 '강한 힘'을 소유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강호의 영웅들은 호시탐탐 '구음진경'을 차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심지어 그로 인해 목숨까지 헤치고, 또는 잃어버리기도 했던 것이다. 그 비급에 담긴 무공이 너무나도 강한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이기에 그랬던 것이다.

  '구음진경'에 담긴 무공을 익힌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최초 작성자인 '황상'이 도가의 경전을 섭렵한 뒤에 불로장생의 비법으로 무술의 내공과 외공을 닦는 비결을 '구음진경' 한 권으로 요약해 놓았던 것인데, 황상이 속세를 떠난 뒤에 오래도록 주인을 찾지 못하다가, 다시 세상밖으로 그 존재가 드러나자 '구음진경'을 차지하려는 사람들의 욕심이 커지면서 '제1차 화산논검대회'가 개최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왕중양'이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졌기에 '구음진경'을 차지했으나, 왕중양은 '도가의 도사' 신분이었기에 '구음진경'을 자신이 차지한 뒤에 홀로 그 비급의 무공을 습득하고, 그의 제자와 그의 후학들에게만 '구음진경'의 무술이 전수되었을 때 벌어질 파란을 떠올리면서, 오히려 '구음진경'을 연마하지 않도록 하였다.

  이는 도교에서 '소유욕'이 세상 만물을 불행으로 이끄는 원인이라고 보는 사상에 비추어 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한 쪽이 '강한 힘'을 갖게 되면, 언젠가는 그 힘을 상대할 '더 강한 힘'이 등장하기 마련이고, 그렇게 서로 '강대강의 대치국면'이 연이어 발생하면, 끝내는 '모두가 파멸을 하고도 남을' 가공할 힘을 갖게 되어 이득보다 해악을 더 많이 끼칠 것을 걱정한 것이다. 오늘날의 '핵무기'를 떠올리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강대국이라 자처하는 나라들이 '핵무기 경쟁'을 벌여 지구를 파괴하고 인류를 절명시킬 만큼 핵무기의 파괴력을 높여놓았고, 그렇게 강력한 무기 제조법이 널리 알려지게 되면서 '힘 쎈 나라' 축에 끼려고 경쟁적으로 핵무기를 보유하기 시작하다, 급기야 핵무기를 절대로 가져서는 안 될 나라들도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면서 남몰래 핵무기를 보유하여 전세계를 위협하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왕중양의 '선견지명'은 이런 핵무기 경쟁과 위협으로 인한 파멸에 빗댈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왕중양은 절세의 무공을 갖추고도 '오래 살지 못할 운명'이었다. 그걸 눈치 챈 구양봉은 왕중양이 죽으면 '구음진경'을 차지할 목적으로 쳐들어갔으나 '죽은 제갈량이 산 사마중달을 물리친다'는 계략으로 구양봉은 실패하고 만다. 그럼에도 왕중양은 '죽음의 운명'을 거스르지 못했고, 자신의 의동생인 주백통에게 '구음진경'을 맡겼으나, 신혼여행 중이던 황약사 부부의 꾀에 속아넘어가 '구음진경'을 통째로 외워버린 황용의 어머니에 의해 '상권/하권'으로 나뉘어 도화도에 보관(?)하게 되었다. 그러다 황약사의 제자였던 진현풍과 매초풍에 의해 '구음진경 하권'이 세상밖으로 나가게 되었고, 그 하권에 수록된 '최심장'과 '구음백골조'라는 무공만으로도 강호의 영웅들을 간담이 서늘하게 만들 정도의 엄청난 힘을 과시할 수 있었다. 이로써 세상 사람들은 '구음진경'을 갖고 싶어하게 된 것이다.

  허나 '구음진경'을 제대로 익힌 사람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왜냐면 왕중양이 유언으로 '전진교의 사람은 절대로 구음진경의 무공을 익혀선 안 된다'고 남겼기 때문이고, 황약사 또한 '구음진경'을 얻은 이후에 급작스럽게 아내가 죽고, 어린 딸인 황용을 키우느라 정신이 없는 틈을 타서 두 명의 제자가 '구음진경 하권'을 가지고 도망갔기 때문이다. 황약사는 절대무공을 익히기도 전에 '구음진경'을 잃어버린 셈이다. 그러다 곽정이 도화도에 도착해서 주백통과 만나 의형제를 맺으면서 부지불식간에 '구음진경'을 배우고 말았다. 창졸지간이라 배움의 기간이 짧았고, 수련기간 또한 짧아 '구음진경'을 제대로 시전할 수 없었지만, 책의 내용을 통째로 암기해버리는 행운(?)을 얻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주백통은 곽정에게 '구음진경'을 가르치다 그만 '무공'을 익혀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 이후 홍칠공이 구양봉의 독수에 휘말려 무공을 모두 잃고 죽을 위기에 처하자 '구음진경' 중 내공치료법에 해당하는 '역근단골편'을 연마해 회복하게 되었고, 일등대사가 된 '단지흥'도 황용의 목숨을 구하다가 영고의 독수에 당해 죽을 위기에 처했다가 '구음진경' 가운데 내공연마 방법이 수록된 구결을 해석하면서 목숨을 구하게 된다. 이렇게 '구음진경'이 세상에 모습을 차차 드러내게 되면서 '무림의 서열'이 빠르게 변하게 되었다. 이제 곧 '제2차 화산논검대회'가 개최될 당위성이 갖춰지게 된 셈이다.

  그런 가운데 서독 구양봉도 '구음진경'을 곽정에게서 얻게 된다. 허나 곽정은 구양봉에게 온전한 '구음진경'을 전수해준 것이 아니라 '열에 아홉은 진짜'지만, '하나는 가짜'로 적은 괴상망측한 '구음진경'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구양봉이 익힌 '구음진경'은 독특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원래 '상승의 내공'을 연마할 때는 조금이라도 어긋남이 있으면 주화입마(정신착란과 반신불수를 일으키는 내공의 불협화음)를 일으키기 마련이지만, 구양봉은 비록 악한이긴 하지만 '무학의 일대종사'라고 할 수 있는 최고의 실력을 갖춰기에 죽지도 않고 '요상한 무공'을 완성해내는 기염을 토하게 된 셈이다. 그 결과 '제2차 화산논검대회'에서 최종승자를 차지한 것은 바로 '서독 구양봉'이었다. 허나 그는 대회기간이 다가오자 무리하게 '엉터리 구음진경'을 연마하다 그만 '정신착란'을 일으키며 미친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긴 했으나 제정신을 차리진 못한 셈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영웅이란 누구란 말인가?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자가 저렇게 미쳐버리고 말았으니, 그를 영웅이라 칭해야 옳단 말인가? 아무리 '강한 힘'을 소유했다하더라도 온전한 정신을 갖추지 않으면 '영웅'이라고 불릴 수 없는 것이다. 마치 나치의 히틀러가 강력한 독일군대를 앞세워 세계정복을 하는 기염을 토했으나, 그가 저지른 만행으로 인해 수많은 인명을 무참히 살상한 죄를 물어, 그에게 '영웅' 칭호를 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사조영웅전>에 등장하는 몽골의 최고 수장 '칭기즈칸'도 마찬가지다. 그의 군대는 마주치는 적을 압도하며 '패배'를 몰랐지만, 점령지의 주민들을 모조리 학살하는 등 그가 저지른 행위는 '잔혹'하고 '끔찍'한 만행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처럼 아무리 '강한 힘'을 갖고 영웅적인 행적을 남겼다 하더라도 '인류의 공영'을 해치는 짓을 한다면 진정한 영웅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럼 영웅의 두 번째 조건은 '선한 마음'인 걸까? 착한 마음씨를 가진 등장인물은 '곽정'이다. 그는 머리는 우둔한 편이지만 '한 번 마음 먹은 것'은 기필코 해내고야 마는 '끈기'를 지녔고,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는 '인내심'도 대단하며, '강한 힘'을 갖게 되었더도 '함부로' 쓰지 않고, 자기를 위하기보다는 남을 위해서 '큰 힘'을 쓰는 정정당당한 영웅호걸다운 풍모를 갖췄다. 그렇다면 '곽정'이 진정한 영웅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까? <사조영웅전>의 이야기속에서 그가 '사소한 약속'조차 하찮게 여기지 않고 '꼭 지키려' 애쓰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그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입는 것은 언제나 '그의 주변사람들'이었고 말이다. 물론 곽정은 '성장기 소년'에게서 엿볼 수 있는 질풍노도의 모습 보였고, 중요한 시기마다 '갈팡질팡'하는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래서 곽정은 '소년 영웅'이라기보다는 '착하고 우직한 시골소년'의 순수한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순수함' 때문에 그는 종종 '야만적'인 모습도 보이곤 한다. 그의 사부인 '강남오괴'가 황약사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단단히 오해를 하자, 곽정은 사랑하는 '황용'이라도 무섭도록 야멸차게 내밀어버리고 말았다. 정작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완안홍열'은 번번히 놓치면서도 '다음 기회를' 노리던 여유로운 모습이 돌변해 자신의 사부들이 죽은 사실을 눈앞에서 확인하지 '황약사와 황용'에게 불같이 화를 낸 것이다. 그리고 그 화난 모습은 평소에 지녔던 '선한 마음'에 비례해서 더욱더 크게 분노하고 만 것이다. 이런 곽정을 두고서 '소년 영웅'이라는 칭호가 어울리겠는가?

  사실 <사조영웅전>에서는 진정한 영웅을 찾을 수 없다. 황상, 왕중양, 칭기즈칸, 곽정 등이 '영웅의 후보'에 들 수 있겠으나 이들 모두에게는 '결격사유'가 나름대로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눈여겨 볼 대목이 있다. 바로 '구음진경' 말이다. 오늘날도 치면 '핵무기 제조법'에 빗댈 수 있는 이 막강한 무공비급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사조영웅전>에서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칭기즈칸이나 완안홍열 같은 이들은 '무림(강호)의 사람'이 아닌 탓에 '구음진경' 같은 무공비급을 탐하지 않았지만, 군대를 다루어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비급, '무목유서'를 탐했으니, 이 또한 '핵폭탄'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세상에 '구음진경', '무목유서', 그리고 '핵폭탄'과 같은 절대적인 강한 힘을 갖게 될 때 '어떻게' 다뤄야 가장 바람직한 일인가 말이다. 진정한 영웅이라면 '그 힘'을 제대로, 제 때에 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닌 '전인류의 공영과 평화'를 위해 그 큰힘을 써야만 진정한 영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동사서독 남제북개 중신통'은 모두 진정한 영웅과는 거리가 멀다. 무능한 황제와 신하들이 나라를 말아먹은 '송나라'도 영웅적인 면모를 찾아볼 수 없다. 무능한 송나라를 대신해서 '천하'를 다스리려던 금나라 또한 영웅 자격을 논할 수 없다. 그렇다면 12세기, 새로운 패권 국가로 떠오르는 '몽골'은 어떤가? 소수 부족국가로 송나라와 금나라에 치이며 살아가던 '몽골족'을 통합하여 전세계를 주름잡고서 '몽골제국'으로 거듭난 칭기즈칸은 영웅의 칭호를 받기에 걸맞은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가 세운 '몽골제국'은 강한 힘으로 반항하고 저항하는 세력들을 억누르는데 썼으므로 '자격박탈'을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향후 '몽골제국'은 몽골우선주의를 내세우며 '한족'을 비롯한 다른 민족을 억압하고 수탈하면서 불과 200여 년만에 단명하고 말았다. 영웅의 나라로 부르기에 부족함이 클 수밖에 없다.

  그럼 '진정한 영웅'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강한 힘으로 약자를 돌볼 수 있어야 한다. 강한 힘으로 부당한 무리들을 소탕하고, 그 무리들이 저지르는 불의를 박멸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정의롭지 못한 일에 참지 않고 '그 큰힘'을 발휘해 정의를 구현해야 한다. 이 모든 일을 하고도 '자기 욕심'을 채우지 않고 '모두의 이익'을 위해 헌신할 각오가 되어야 한다. 이런 사람이어야 비로소 '영웅'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실존인물 가운데 '진정한 영웅'이 존재할 수나 있는걸까? 그렇기에 우리는 '완성형 영웅'이 아닌 '성장형 영웅'을 눈여겨 보게 된다. <사조영웅전> 속에서는 '곽정'이 바로 그런 인물일 것이다. 그는 비록 아직 영웅이라 불리기에 많이 부족한 인물이지만, 그 부족한 인물이 '성장'하면서 진정한 영웅적인 면모를 갖춰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흐믓해 할 것이다. 김용 작가는 이런 영웅적인 '곽정'을 한족 출신의, 한족에 의한, 한족을 위한 영웅으로 그리고 있어 범세계적인 영웅이 아닌 '중화민족'에 한정한 영웅으로 그리고 있어서 많이 아쉽다. 암튼, 이 '성장형 영웅'인 곽정의 모습은 <신조협려>에서 더욱더 빛을 발할 것이다. 물론 '새로운 영웅'인 양과의 등장으로 이야기는 더욱 새로워지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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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머큐리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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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III / 열린책들 11번째 리뷰] 뭐랄까. 아멜리 노통의 소설들은 '그로테스크'하다. 우리말로는 '기괴하다'는 뜻이다. 이를 테면, 천사의 얼굴을 하고선 악마의 날개를 달고 있다고나 할까? 이것은 그녀의 처녀작인 <살인자의 건강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벌을 받아 마땅한 '살인자'에게 건강법 같은 걸 묻다니, 말이나 될 법 한가? 그런데도 묘하게도 '그녀의 소설'을 읽는 동안에는 말이 된다. 물론 책을 덮고 나면 찝찌입~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이 책 <머큐리>도 그랬다.

  소설속에서 풀어내는 이야기를 한마디로 평을 하자면 '쓰레기' 같다. 이 책 <머큐리>를 읽는 동안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은 생각은 바로 두 영화였다. 하나는 정지우 감독, 박범신 원작의 <은교>였고, 다른 하나는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였다. 두 영화 모두 '예술성'에서 탁월하다는 평을 받았지만, 영화의 소재는 하나같이 '젊고 아름다운 여성을 탐하는 남자의 추한 본성'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노통의 <머큐리>도 그런 '추한 본성'을 밑바탕에 깔아두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76세의 마도로스 출신의 늙은 선장이 22세의 젊은 여성을 양녀로 삼아 '외딴섬(모르트프롱티에르 섬: '죽음의 경계'라는 뜻)'에 살면서 밤마다 그녀의 침대로 들어가 젊은 여자의 몸을 탐하면서도, 그 행위를 '사랑'이라 표현하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영화 <나쁜 남자>에서도 깡패 새끼가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여대생을 성폭행하고, 사창가에 팔아 넘기고서도, 그 모든 일이 '너무 예뻐서' 그랬고, '사랑했기'에 그랬다는 식으로 풀어냈다. 또 영화 <은교>에서는 칠순이 넘은 늙은 작가가 여고생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며 '회춘'하는 듯한 행동을 일삼다가 '그녀'가 젊은 남자와 육체적 관계를 맺는 것을 몰래 엿보고서는 시기와 질투심에 살인 충동까지 갖게 된다는 스토리는 살짝 역겹기까지 했다. 심지어 원작 소설을 쓴 박범신 작가는 실제로 '젊은 여자'에게 추근대며 "너는 나의 '은교'야"라는 말을 던지며 엉덩이와 허벅지를 만지작거렸다는 '성폭력 피해자의 증언'이 밝혀지자, 그의 소설조차 추악하기 그지 없다는 느낌마저 받았다. 이처럼 '늙은 남자'와 '젊은 처녀(18~22세)'의 육체적 관계를 전면에 내세우며 말하고자 하는 '작가의 주제의식'이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물론, 사랑에 '나이'와 '국경'이 문제될 것은 없다. '서로' 사랑하는 감정이 무르익었다면 말이다. 그래서 76세의 남자와 22세의 여자가 서로 '54살 차이'를 극복하고서 찐사랑을 했더라면 오히려 응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두 남녀가 지내는 곳이 '외딴섬'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젊은 여자는 18살부터 무려 5년간이나 그 섬에서, 아니 늙은 남자가 설계하고 직접 만든 '집안'에서 한발짝도 나간 적이 없다고 한다. 심지어 '창문'을 그녀의 키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어서 '바깥'을 전혀 볼 수도 없다. 집안 어디에도 '거울'을 찾아볼 수가 없다. 거울 뿐 아니라 '유리'로 만들어진 물건조차 찾아볼 수 없으며, 욕실과 화장실에도 '물'을 받아놓을 수 없게 만들었으며, 사물을 비춰볼 수 있는 '매끈한 은붙이(쇠붙이)'조차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녀는 그런 곳에서 무려 5년 동안 지낸 것이다. 그리고 밤마다 늙은 선장은 그녀의 침대로 기어들어가 젊은 육체를 탐했다. 그런데도 늙은 선장은 그녀를 사랑했다고 주장한다. 절대 '감금'이나 '강간' 같은 일은 없었다고 말한다. 그 증거로 그녀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방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문을 잠그지도 않았고, 그녀가 '거부했다면' 침대로 들어갔다고해도 육체관계를 맺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녀도 자신을 사랑했다는 증거로 그녀가 '처녀'였음을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18살의 소녀와 '성관계'를 맺었는데, 그녀가 뜻밖에도 '처녀'였기에, 서로 사랑한 증거라니...심지어 늙은 선장은 이 소녀가 '첫사랑'도 아니었다. 그녀 이전에 또 한 명의 소녀를 바로 '이 섬'에서 감금하고, 강간했었더랬다. 그 소녀를 범했을 때도 그는 '사랑'이었다고 당당히 말한다. '강제'는 전혀 없었으며, '그녀들'이 원했기에 사랑을 나누었다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에는 의심할 만한 점이 있다. 첫번째 소녀가 늙은 남자와 '사랑'을 나눈 까닭도, 두번째 소녀가 '사랑'을 나눈 까닭도 모두 '외딴섬'에서 '거울'도 없는 곳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두 소녀의 공통점은 모든 남성들이 사랑할 수밖에 없을 정도의 '미모'를 가졌다는 것이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처녀가 어째서 늙고 못생긴, 뱃사람이라서 '제 나이'보다 훨씬 더 늙어보이는, 남자에게 '처녀성'을 선사하는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이 남자가 자랑할 만한 것이라곤 '섬'을 통째로 살 정도로 가진 재산이 많다는 것이고, 칠순이 넘어서도 발딱발딱 세울 수 있는 '정력' 뿐이었을텐데 말이다. 그 두 가지만으로 '처녀의 사랑'을 차지할 수 있었겠는가?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늙은 선장은 두 소녀 '아델'과 '하젤'의 아름다움에 첫눈에 반하고서 다른 남자가 채가기 전에 '납치'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물론 '우연한 사고' 덕분이긴 했지만 말이다. 아델의 경우에는 '화재'였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아델이 무도회장에서 춤을 추다가 우연히 불이 나자, 그녀와 춤을 췄던 젊은 미남자들은 그녀를 홀로 남겨두고 저들만 살겠다고 화재현장을 빠져나갔다. 그때 그녀를 몰래 훔쳐보고 있던 늙은 선장이 그 화마속에서 아델을 구해서 탈출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생명의 은인'이었다. 그런데 아델을 구해낸 늙은 선장은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서 사고 현장을 빠져나갔다. 불이 붙은 장소에서 벗어났는데도 아델의 얼굴을 가린 천은 벗겨주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뒤에 아델은 안정을 찾았고 화재에 의해 다친 곳이 없는지 '거울'을 보고 싶다고 했을 때, 늙은 선장은 보여주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몰래 '이상한 거울'을 마련했다. 얼굴이 일그러지게 보이는 거울을 말이다. 생명의 은인에게 감사를 품고 있던 아델은 '자신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간청을 하자 마지못해 거울을 건내주는 늙은 선장의 '배려심'에 살짝 감동까지 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거울속에 비친 '얼굴'을 확인한 아델은 비명을 지르고 기절해버리고 만다. 너무나도 끔찍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델은 늙은 선장과 '외딴섬'에서 살게 되었고, 이렇게나 추하게 변해버린 자신을 끔찍하게도 따뜻하게 보살펴주는 늙은 선장과 '첫경험'을 하게 된다.

  하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이 일어나 폭격으로 온가족이 죽은 상황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하젤은 '야전병원'에서 얼굴을 천으로 가린채 누워 있었다. 그러다 늙은 선장은 얼굴을 가리고 누워 있는 하젤을 두 팔에 안아 돛배에 싣고 '외딴섬'으로 데리고 온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하젤에게 '그 거울'을 보여준다. 거울속에 비친 흉측한 얼굴에 충격을 받은 하젤은 그 뒤로 다시는 거울을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부모를 잃은 고아소녀를 살뜰하게 보살핀 늙은 선장은 그녀와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어디 의지할 데 없는 고아소녀에게 욕정을 품은 것이다. 그런데 늙은 선장은 '하젤'의 얼굴에서 15년 전 자살을 한 '아델'의 얼굴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리고 하젤이 자신의 품으로 오게 된 것을 '신의 섭리' 또는 '아델의 환생'으로 굳게 믿고 있다.

  이런 끔찍하고 더러운 변태가학적 성행위가 이어지는데도 독자들은 이 책을 읽을 수밖에 없다. 그건 바로 '추악한 성범죄 현장'속으로 뛰어든 '간호사의 등장'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간호사도 늙은 선장이 살고 있는 '외딴섬'으로 겁없이 들어가 '하젤'을 만나고, '아델의 자살'에 석연치 않은 점을 밝혀내고, 늙은 선장의 추악한 욕정과 요상한 궤변에 맞서 '설전'을 벌이는 장면이 압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젊고 어여쁜 간호사가 '탐정' 못지 않게 성범죄를 밝혀내고, '탈옥수' 뺨치게 외딴섬을 탈출하는 장면은 웬만한 '추리소설'보다 흥미진진하다. 그리고 드디어 마주한 '충격적인 결말'은 아멜리 노통을 뛰어난 이야기꾼이라고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찝찌~입한 것은 왜일까? 그건 '간호사'가 외딴섬에 감춰진 비밀을 하나하나 밝혀내면서도 때때로 성범죄자의 궤변에 "그럴 수 있죠"라면서 맞장구를 쳐주는 대목 때문이었다. 물론 이야기를 전개시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설정'이었다는 것을 감안할 수밖에 없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또 다른 성범죄'를 '정당화' 시켜주는 도구로 전락될 수도 있겠다는 걱정과 함께 '추악한 변태성욕자들의 유쾌한 변명거리'로 악용될까 두렵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보다는 비교적 관대한(?) '프랑스의 성윤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충분히 참작하더라도 불편한 것은 사실이었다.

  이런 불편함은 '노통의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으로 연결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건 바로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모든 것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그녀의 소설은 하나같이 '기존의 관습'에 대해 딴죽을 걸고 있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깊은 생각(사고)을 유도한다. 과연 무엇이 '정상'이냐고 말이다. 과거로부터 '정상적'이라고 여겼던 것에 대해 노통은 딴죽을 건다. 그리고 '그것'을 극단적으로 몰고 가면서 '이래도' 정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비정상이라고 해야 하지 않은가? 그렇게 과거의 것이 '비정상'이 되었다면, 이제부터 '정상'은 과연 무엇이라 할 수 있겠는가? <머큐리>에서도 76세의 남자가 22세의 여자를 사랑이 '정상'이냐고 묻는 시점이 '20세기 초'다. 15년 전에, 61세의 남자가 18세 소녀와 사랑을 나누는 것은 어떠하냐고 묻는 때가 '19세기 말'이었다. 그리고 노통이 <머큐리>를 세상에 발표한 해가 1998년이었다. 무려 백 년 전에 벌어진 일을 '소재'로 삼아 글을 쓴 셈이다. 우리나라도 20세기 초까지 '조혼 풍습'이 있었고, 19세기 이전에는 할아버지가 손녀뻘의 어린 처자와 혼인이 불가능하지 않았었다. 그렇다면 <머큐리>에서 보여지는 일련의 일들은 결코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서구 유럽에서도 18~19세기에는 돈 많은 늙은 남자가 젊고 예쁜 여성과 결혼하는 것이 큰 흠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21세기 독자들은 과연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한단 말인가? 난 꽤나 불편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늙은 남자의 추태로 보일 뿐이고, 성숙한 판단을 하지 못하는 젊은 여성을 '가스라이팅' 해서 육체관계를 허락케 하는 추악한 성범죄로밖에 읽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추태와 추악을 '문학'으로 승화시켜 숭고하게 여기게끔 만든 작가의 궤변이 매우 불쾌했다. 아무리 훌륭하고 뛰어난 '고전문학'일지라도 시대와 세태가 바뀌면 '달리' 해석해야만 한다. 그리고 새 시대에 걸맞게 '올바른 가치관'을 반영시켜 더욱 뜻깊은 철학으로 바로 세워야 한다. 그런데도 '철학'이랍시고 꼴랑 허리하학('형이상학'의 반대말)적으로 겨우 꼬추를 세우는 일에 매몰되어 버린다면 안타깝기 그지 없다. 물론 '노통의 소설'이 모두 이럴 정도는 아니지만 말이다. 딴에는 이 소설을 <미녀와 야수>의 '다른 버전'이라고 소개하는 모양인데, 동화속 야수는 적어도 '젊은 미남자(신분은 왕자)'가 마녀의 저주를 받은 것이었다. 결코 '늙고 못생긴 변태성욕자'는 아니었기에 동의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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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피의 격 - 일류 카피라이터의 31가지 카피 수업
사카모토 와카 지음, 이미정 옮김 / 한빛비즈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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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II / 한빛비즈 145번째 리뷰] 광고의 꽃이라고 불리는 '카피라이터'에 대한 책이다. 딱히 '광고문안(카피)'을 잘쓰는 비결을 알려주는 책이라기보다는 '카피라이터'라는 직업과 카피가 '어떻게' 작성되는지, 그 '과정'을 직접 보여주는 안내서라는 소개가 더 적절하다. 그렇다면 좋은 카피는 '어떤' 것일까? 그건 바로 '진심'이 묻어 있어 쉽게 '공감'이 가고 긴 '여운'을 남겨 모두의 '기억'에 오래 남는, 또는 '한번' 보면 딱하고 떠오르는 것이다. 그런 예로 저자가 직접 작성한 카피를 소개하고 있는데, 바로 [가자, 동북으로]라는 JR 히가시니혼 신칸센철도를 홍보하는 문안이었다. 일본은 사상 유래가 없는 '지진해일 피해'로 동북지방이 큰 화재를 겪었는데, 일본정부는 이곳 동북지역의 신칸센 철도를 빠르게 복구하여 피해지역의 경제를 회생시키려 노력하였다. 허나 동북지역은 화마가 다 쓸고 지나간 탓에 '지역경제'가 더디게 회생하고 있었는데, 저자의 광고문안으로 '피해지역'에 도움의 손길을 줘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었고, 그 덕분에 동북지역의 경제회생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카피라이터는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단 6글자만으로 재난을 극복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허나 이 책을 '카피라이터 지망생'만 읽으라고 하기엔 아쉽다. 분명 책의 내용은 '카피라이터'가 갖춰야 할 사고법과 표현법, 그리고 전문직업인으로서의 자세 등등 유용한 팁이 가득 담겨 있지만, 학문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범학문적인 연구가 펼쳐지는, 이른바 '통섭의 시대'를 살고 있는 현재인데, 어찌 이 책을 '카피라이터가 되는 법'으로만 읽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런 까닭에 '전문직업인'이 갖춰야 할 사고법과 표현법, 그리고 자세 따위는 서로 통하는 법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두루두루 지식을 섭렵해두는 것은 공부하는 학생이나 학문을 연구하는 연구인을 비롯해서 서로 연관이 없을 듯한 '직업인'일지라도 유용한 일이 틀림없다. 나는 아이들에게 '독서토론논술'을 가르치는 선생이면서 동시에 '아마추어 리뷰어'로 활동하고 있다. 리뷰를 써서 짭짤한 수익을 내지 못하니 분명 '프로'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리뷰어로 활동하면서 '카피라이터'에 관한 지식을 읽어가다보니 일맥상통한 점이 참 많다는 것을 느꼈다. 리뷰어로 활동을 하다보면 이른바 '공짜책'을 받아 리뷰를 쓰는 경우가 참 많다. 그 '공짜책'을 받기 위해서 출판사 이벤트에 선정이 되어야 하는데, 보통 '인상적인 짤막한 댓글'로 신청을 받고, 그 '댓글의 참신함'만으로 이벤트 선정을 하는 곳이 상당히 많았었다. 물론 지금에는 그런 이벤트가 드물어졌고,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블로그의 '조회수(인기도)'를 살펴보고 홍보가 더 잘 될만한 유저를 선정하는 방식으로 변했지만 말이다. 암튼 내 경우에는 '댓글신청'으로 선정된 적이 참 많았다. 그리고 책을 좋아해서 많이 읽는 편인데, '책 살 돈'이 넉넉치 못했던 시절에는 도서관에서 대출을 하여 욕구해소를 했었는데, '최신간'을 보고 싶을 땐 어쩔 수 없이 부담이 되어도 사서 읽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마침맞게 내 빈약한 지갑을 걱정하듯 '리뷰 이벤트' 붐이 일어나는 바람에 발빠르게 이곳저곳 신청을 하곤 했었다. 다행히 [평범한 리뷰가 아닌 독특한 리뷰를 원한다면 나를 뽑아달라. 안 뽑아주면 두 번 다시 신청하지 않겠다]는 반협박(?)적인 신청댓글이 인상적이었던지 덥석 뽑아주더니 오래지 않아 이곳저곳에서 선정이 되면서 '연간 200여 권 이상'을 공짜책을 받아 리뷰를 하는 리뷰어로 활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신청경쟁은 점점 치열해졌고 '밋밋한 신청댓글'로는 선정되기 힘들어지게 되었다.

  이런 어려움을 타계하기 위해서 나는 '평범하지 않은 신청글'을 쓰기 시작했다. 바로 '신청글'을 짤막한 '이야기'로 바꾸어 썼고, 그 이야기속에 '신청책'에 대한 남다른 사전지식을 뽐내거나 겉표지나 책제목만 보고도 책내용을 미루어 짐작하는 등 좀더 치밀한 전략으로 신청하기에 이른 것이다. 물론 그 이야기속에는 '꼭 보고 싶다'는 나만의 열의를 뿜뿜했고 말이다. 그 가운데 '성냥팔이 소녀'를 차용해서 써낸 신청글도 있었는데, 그 신청글을 써서 '책선정'에 실패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내용을 살짝 소개하자면 이렇다.

  "책 좀 주세요. 책 좀 주세요. 책이 정말 보고 싶어요. 아이, 추워"
  "소녀야, 넌 이 추운 한겨울에 왜 맨발로 있느냐?"
  "책이 정말 보고 싶은데...책 살 돈이 없어서 그래요. 아이, 시려"
  "너에겐 책보다 추위를 막을 수 있는 신발과 장갑을 주는게 더 나을 것 같구나"
  "아니에요. 저는 그래도 책이 더 좋아요. 책 좀 주세요"
  "정말 책을 좋아하는 아이구나. 그래 무슨 책이 보고 싶으냐?"
  "네, 제가 보고 싶은 책은 <만화로 보는 웹툰 스토리 작법>이에요"
  "오, 한빛비즈에서 얼마전에 출간한 새책이구나. 그래, 그 책이 왜 보고 싶으냐?"
  "네, 그 책은 [재미란 무엇인지]부터 유용한 지식을 [더 쉽고 더 유쾌하게] 일러주는 웹툰형식의 책이기 때문이에요"
  "그래, 잘 알고 있구나. 하지만 유용한 지식을 재미나게 읽을 수 있는 책이 그 책만이 아닐텐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한빛비즈>에서 출간한 교양툰이 얼마나 재밌고 유익한지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세욧!"
  "알았다, 알았어. 그렇담 내 그 책을 선물로 주마"
  "정말 고맙습니다. 꼭 알찬 리뷰로 보답할게요"

  이 책 <카피의 격>에도 '성냥팔이 소녀'에 대한 예시가 적혀 있기에 오랜만에 다시 적어 보았다. '기본 포멧'은 이런 형식이었지만 꽤나 다양한 변주로 써먹었기에 '이벤트 선정'과는 무관하게, 늘 신선하게(?) 써내려가는 내 신청댓글에 관심이 폭발하기까지 했었다. 이밖에도 (") 요로케 생긴 '도둑고양이'를 등장시켜서 이벤트 책을 훔쳐오는 스토리를 전개시켜 이벤트 담당자를 혼란케 했었고, 적당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땐 '무작정' 달라고 떼를 쓰기도 했었다. 어쨌든 '책을 보고 싶다'는 내 진심을 담았기에 이벤트 담당자도 '초보'였지만 성실한 리뷰어였던 나에게 기회를 많이 줬던 것 같다.

  어쨌든 훌륭한 카피는 '진심'을 바탕으로 작성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럴 듯한 문구'를 쓰거나 '과장이 담긴 문구'로 쓴다면 결코 '탁월한 한마디'가 될 수 없다. 길게 쓸 필요도 없다. 군더더기 없이 '진짜 전하고 싶은 것'만 남겨 짧게 전달해야 더욱 강렬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훌륭한 카피에 걸맞는 '뛰어난 제품'이어야 소비자의 신뢰를 잃지 않을 것이다. '뛰어난 제품'이 틀림없다면 그에 걸맞는 '훌륭한 카피'로 제품의 가치를 더해주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카피를 작성하는 일이 결코 녹록치 않다. 10글자도 안 되는 짧은 문구를 쓰는 일이 그토록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직접 작성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창작의 고통'인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탁월한 한마디'를 만들기 위한 '사고법'과 '표현법'에 상당히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다. 그 가운데 몇 가지만 소개하자면, 저자는 '떠오르는 것'을 바로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자기 머릿속에도 남겨두지 못하는 '한마디'가 다른 사람의 기억에 오래 남을 리 없기 때문이란다. 이는 '메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접근법이지만 이유를 '듣자마자'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바로 '광고의 힘'이 짧지만 오래 기억되는 것이란 점을 단박에 이해시켜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카피라이터들이 저자의 방식대로 하지는 않는단다.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잊어버리지 않게 바로바로 적어 두었다가 마땅한 문안이 떠오르지 않을 때마다 들춰보는 방식을 쓰는 카피라이터들도 많기 때문이다. 어떤 방식대로 하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하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나도 저자의 방식으로 리뷰를 작성하고 있기에 정말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하나의 방법은 '일방적인 주장'만을 담은 카피를 작성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물건을 파는 쪽에서는 '자신의 제품'이 자식처러 느껴져서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다 좋다고 느껴지기 마련이지만, 물건을 사는 쪽에서는 '생각'이 다를 수 있다. 그리고 여러 제품을 놓고 늘 '비교'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카피를 할 때에는 역지사지하는 마음으로 '공감'을 끌어내야 한단다. 파는 쪽과 사는 쪽의 '공통점'을 살펴 서로가 '공감'할 수 있는 대목으로 카피를 작성해야 더 효율적이란 말이다. 그리고 공감은 더 나아가서 '공명'을 일으키게 된단다. '공명'이란 "여기, 여기 붙어라"라는 것처럼 팬을 만들어가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공명'은 되도록 긍정적 표현으로 나타내면 더 효과적이란다. 이를 테면, 애써 부정적인 상황에 처하더라도 이를 긍정적인 표현으로 바꾸게 되면 '공명효과'는 더욱 극대화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회사의 상사는 부하직원에게 업무를 지시한다. 그런데 이때 상사는 직원에게 '더 많은 일'을 시키려 하고, 부하직원은 '더 적은 일'을 하려 들 것이다. 이럴 때 상사가 좋아하는 부하직원은 "그러면 제 업무가 늘어나겠네요"라는 부정적인 표현이 아닌 "그럼 제 업무의 폭이 더 넓어지겠네요"라고 긍정적인 표현을 쓰는 쪽일 것이다. 비록 같은 맥락의 대답이지만, 둘의 차이는 하늘과 땅일 것이다. 이렇게 '긍정적 표현'을 쓰면 상사는 부하직원이 믿음직스러울 것이고 인사고과에도 높은 점수를 줄 것이다. 부하직원도 '어차피' 해야 할 일을 하면서 투덜대기보단 '긍정적 표현'을 씀으로써 유능한 직원이란 평가를 받을 테니, 마냥 손해보는 일은 아니게 될 것이란다. 물론 현실적인 상황에서 늘 이렇게 '낭만적인 귀결'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산포(三方)요시'라는 말이 있단다. 일본어로 '요시'는 '좋다'는 뜻이니,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세 방면으로 좋다'는 뜻이다. 일본에서는 에도시대 때 "파는 사람에게 좋고, 사는 사람에게 좋고, 세상에 좋아야 한다"는 뜻을 가진 이 말을 모토로 삼은 상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우리에게도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라"는 뜻으로 '홍익인간'이란 표현이 있으니 비슷한 뜻일 수도 있겠으나, 우리는 고조선부터 '국가정책'으로 쓰던 표현이고, 일본은 '상도덕' 관점에서 쓰던 표현이니 쓰임새가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허나 오늘날 기업문화의 윤리적 차원에서 꼭 잊지 않고 마음에 새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피라이터도 단순히 물건을 사고 파는 것에만 치중해서 카피를 만들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더 이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제품을 쓴다는 자부심까지 헤아려서 카피를 만들게 되면 더 좋을 것이다. 지구에서 가장 멋진 기업으로 널리 알려진 '파타고니아'의 제품을 쓰는 사람들이 바로 그렇다.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최대한 피해가 가지 않는 제품'을 만들고, 그럼에도 제품 자체가 환경을 파괴할 수밖에 없으니 아예 [우리 옷을 사지 마세요]라는 광고를 한 덕분에 오히려 더 큰 인기를 끈 브랜드가 되지 않았느냔 말이다(<파타고니아 이야기> 한빛비즈 참조)

  이밖에도 이 책에는 '카피라이터' 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유용한 지혜가 담겨 있다. 카피라이터가 꿈인 지망생이라면 '직접적인 지식'을, 그밖의 사람들이라면 '간접적인 지혜'를 얻어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이 틀림없다. 언제나 진심은 통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쓴 저자는 그런 진심을 담아 자신의 '카피'를 소개하였고, 그 카피를 만들게 된 '과정'을 낱낱이 밝혀내어 독자들에게 '유용한 팁'을 전수해주었다. 꼭 글을 쓰는 일이 아니더라도 세상 모든 직장인들이 알아두면 좋을 '마음가짐(자세)'도 함께 수록되어 있으니 한 번쯤 읽어보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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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마법사 오즈 - 완역본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 1
L. 프랭크 바움 지음, W.W. 덴슬로우 그림, 최인자 옮김 / 문학세계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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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I / 문학세계사 2번째 리뷰] 우리에게 익숙한 <오즈의 마법사>의 원래 제목은 <위대한 마법사 오즈>다. 프랭크 바움이 쓴 <위대한 마법사 오즈>가 출간하자마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독자들이 수천 통의 편지를 써서 '후속작'을 써달라고 요청을 했고, 이에 바움이 첫 책을 출간한 지 1년 뒤에 '후속작'을 쓴 것을 시작으로 무려 14편의 시리즈를 펴냈고, 그 모든 시리즈를 통틀어서 <오즈의 마법사>라는 제목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무려 100년도 더 된 1900년에 쓰여졌다. 이렇게나 오래된 동화책이 오늘날까지도 전세계 어린들을 매혹한 까닭은 무엇일까? 안델센이나 라퐁텐의 동화속에 자주 등장하는 아름다운 공주와 그런 공주를 찾아다니는 백마 탄 왕자가 <오즈의 마법사>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소년과 소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해서 온갖 동물과 사물들이 사람처럼 말을 하고 마녀가 등장하는 '환상의 나라' 오즈에서 뜻밖의 모험을 펼치기 때문에 현대의 어린이 독자들도 쉽게 빠져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오늘날에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왕자와 공주가 등장하는 것이 더 '환상적'일지도 모르겠으나 말이다.

  암튼, 14편이라는 대작의 첫 번째 이야기가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위대한 마법사 오즈>다. 캔자스에 살고 있던 도로시라는 소녀가 엄청난 소용돌이(토네이도)에 날려가다 우연히 도착한 '오즈'라는 나라에서 모험을 펼치는 이야기다. 그렇게 도착한 도로시는 도착하자마자 사고를 치게 된다. 바로 바람에 실려 날아간 집이 '동쪽나라의 마녀'의 위로 떨어지는 바람에 즉사시켜 버린 것이다. 이는 도로시가 원했던 것이 아니지만 '나쁜 마녀'에게 시달리던 뭉크킨(오즈의 동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엄청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뭉크킨 사람들은 도로시에게 감사를 표하고 '원하는 것'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고 말하지만, 도로시는 원래 살던 캔자스로 돌아가 자신이 사라진 것을 알고 슬퍼할 아저씨와 아줌마가 보고 싶다는 것이 소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즈에 살고 있는 뭉크킨들은 '캔자스'가 어디 있는 곳인지 알 수가 없어 도와줄 수가 없게 된다. 이때 마침 '나쁜 마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착한 북쪽 마녀'가 도로시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위대한 마법사 '오즈'를 찾아가보라고 말한다. 오즈는 '노란 벽돌길'을 따라가면 쉽게 찾아갈 수 있겠지만, 혹시라도 위험과 마주할 수 있으니 '북쪽 마녀의 입맞춤 자국(키스 마크)'을 도로시의 이마에 찍어준다. 그리고 동쪽 마녀가 죽고서 남겨둔 '은구두'도 챙겨 신고 말이다.

  그렇게 떠난 길에 도로시는 '허수아비', '양철 나무꾼', 그리고 '사자'를 동료로 만난다. 이들도 각각 오즈에게 말할 소원을 갖고 있는데 허수아비는 '생각할 수 있는 뇌'를 갖고 싶어 했고, 양철 나무꾼은 '마음 따뜻한 심장', 그리고 사자는 겁이 많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였다. 그렇게 도로시와 세 명의 동료는 오즈를 찾아 함께 떠난다. 물론 도로시와 함께 오즈의 나라에 도착한 강아지 토토도 함께 말이다. 그리고서 이들은 함께 떠난 여행에서 숱한 모험을 겪게 된다. 그때마다 허수아비는 '반짝이는 생각'으로, 양철 나무꾼은 '따뜻한 마음'으로, 겁쟁이 사자는 '물러서지 않는 용기'로 위기의 순간을 이겨내게 된다. 그렇게 어렵사리 도착한 '에매랄드 성'에서 오즈와 만나게 되지만, 오즈는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에 '서쪽 나라의 마녀'를 죽이고 와야 한다는 조건을 내건다. 그렇게 또다시 모험을 떠나게 된 '도로시 일행'은 나쁜 마녀의 강력한 힘에 허수아비와 양철 나무꾼이 꼼짝하지 못하게 당하고, 도로시와 사자는 마녀의 노예로 잡혀가게 된다. 서쪽 마녀는 도로시가 신고 있는 '은구두'를 뺏기 위해 도로시와 사자를 당장 죽여버리려 하지만, 북쪽 마녀의 입맞춤 자국이 새겨진 도로시를 어찌하지 못하고, 도로시는 사자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으면 죽더라도 마녀의 말을 듣지 않겠다고 버티면서 살아남게 된다. 그렇게 노예처럼 마녀의 시중을 들던 도로시는 서쪽 마녀가 '물'을 무서워한다는 것을 알고 서쪽 마녀에게 물을 끼얹어셔 죽여버리고, 마녀가 갖고 있던 '황금모자'를 이용해서 허수아비와 양철 나무꾼과 사자와 함께 오즈가 살고 있는 에매랄드 성으로 다시 돌아간다.

  이제 오즈가 도로시 일행의 소원을 들어줄 차례가 되었다. 하지만 사실 오즈는 '위대한 마법사'가 아니라 '위대한 사기꾼'이었다. 오즈라 불리는 아저씨도 도로시와 마찬가지로 미국에 살던 평범한 사람이었다. 서커스 공연을 홍보하기 위해 열기구에 올랐다가 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이곳, 오즈까지 날아오게 되었고, 하늘에서 날아온 아저씨를 '위대한 마법사'로 착각한 오즈의 사람들은 그를 왕처럼 모시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사기꾼의 기술을 이용해서 마녀가 살고 있는 '오즈'를 잘 다스려왔지만, 나쁜 마녀가 살고 있는 동쪽과 서쪽의 마녀를 처치할 능력은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나쁜 마녀들이 에매랄드 성까지 쳐들어오지 못하게 만든 까닭도 역시 '사기꾼의 기질' 덕분이었다. 그러다 동쪽 마녀를 단번에 죽여버린 도로시를 이용해서 서쪽 마녀까지 없앨 수 있었으니, 비록 사기꾼에 불과했지만 '위대하다'고 하지 않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내친 김에 허수아비와 양철 나무꾼, 사자의 소원을 일사천리로 들어주며 해결을 하지만, 도로시의 소원인 캔자스로 되돌아가기는 '속임수'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오즈는 거대한 열기구를 만들어서 자신과 함께 떠나자고 약속했지만, 약속시간에 토토가 달아나는 바람에 도로시를 태우지 못한 열기구가 훌쩍 날아가버리고 만다. 홀로 남겨진 도로시는 눈물을 흘리며 엉엉 울었다.

  이제 도로시 일행들은 착한 마녀가 살고 있다는 오즈의 남쪽나라로 향한다. 그 사이에 허수아비는 에매랄드 성의 왕이 되지만 남쪽으로 함께 떠난다. 자신들의 소원은 이루어졌지만 아직 도로시의 소원이 달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찌어찌 남쪽 마녀 글린다가 살고 있는 곳까지 찾아갔지만, 마녀에게는 도로시의 소원을 들어줄 능력이 없었다. 그렇지만 도로시의 소원은 이루어진다. 왜냐면 동쪽 마녀가 신고 있던 '은구두'에 원하는 곳으로 순식간으로 갈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서쪽 마녀가 탐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도로시는 기뻐서 얼른 '은구두'를 이용해 토토와 함께 아저씨와 아줌마가 살고 있는 캔자스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위대한 마법사 오즈>에 깔려있는 주제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격언과 일맥상통한다. 다시 말해, 애초에 소원을 들어주는 '대상'은 전지전능한 신도 아니고, 뛰어난 자산과 재능을 갖춘 능력자도 아닌, 바로 '자기자신'이란 말이다. 허수아비는 생각할 수 있는 '두뇌'를 갖고 싶어한다. 지푸라기로 만들어진 '자신'의 몸뚱이로는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없었기 때문에 '생각하는 뇌'를 가지게 되면 그런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슬기롭게 헤쳐나갈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대한 마법사 오즈를 만나러 모험을 떠났지만, 허수아비의 소원은 이미 모험을 떠나면서 이루어지게 된다. 허수아비가 일행이 위기에 겪을 때마다 '뛰어난 판단'으로 위기를 슬기롭게 대처했기 때문이다. 양철 나무꾼도 마찬가지다. 차디찬 양철로 자신의 몸을 바꾸어 버리자 자신에게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사라졌다고 믿었지만, 그건 사실 뭉크킨 처녀와 너무나도 오랫동안 떨어져 지냈기 때문에 사랑이 식어버린 것이었다. 이는 뜨거운 피가 흐르는 심장을 지닌 사람들도 늘 겪는 아픔이다. 그래도 차가운 마음이 아닌 뜨거운 심장을 갖고 싶었던 양철 나무꾼은 도로시 일행과 모험을 떠나면서 '따뜻한 마음'을 되찾게 된다. 일행이 위기에 빠졌을 때마다 단단하고 튼튼한 '몸'을 이용해서 도로시 일행을 위기에서 구해냈기 때문이다. 이는 '따뜻한 마음'이 없었다면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겁쟁이 사자는 어떠했는가? '동물의 왕'답지 않게 조그만 몸집의 강아지 토토와 들쥐를 보고도 깜짝 놀라는 겁쟁이처럼 보였지만, 이는 사자가 '착한 마음'을 지녔다는 증거일 뿐이었다. 왜냐면 사자보다 훨씬 덩치가 크고 무서운 괴물과도 맞서 싸웠기 때문이다. 애초에 용기가 없었다면 해낼 수 없었던 일이다. 더구나 도로시 일행이 위기에 빠졌을 때 '사자의 용맹함'이 없었더라면 그들이 떠난 모험은 진즉에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도로시도 자신의 소원을 들어줄 '힘'을 애초부터 갖고 있었다. 바로 오즈의 나라에 도착하자마자 '동쪽나라 나쁜 마녀'의 은구두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애초부터' 능력을 갖고 있던 허수아비, 양철 나무꾼, 사자와는 조금 다른 성격이긴 하지만, 이는 도로시가 '환상의 나라'에 도착하면서 갖추게 된 힘이라는 점에서 '자신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오즈의 나라'에서는 누구나 그런 힘을 갖추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렇게 애초부터 소원을 이룰 능력을 갖추고 있었는데도 이들은 '모험'을 떠난다. 왜? 그 모험은 바로 '자신도 몰랐던 능력'을 깨우치는 과정이자 동시에 계기였던 것이다. 만약 도로시 일행이 '모험'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능력을 써먹지도 못했을 것이고, 자신들이 이루고 싶었던 소원도 영원히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모험은 이들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위대한 마법사 오즈>를 읽은 독자들도 '모험'을 망설일 까닭이 없다. 아니 '모험'을 떠나지 않고서는 '자신의 능력'을 검증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물론 현실세계에서 '환상의 나라'로 떠나는 모험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여행'이라고 살짝 바꾸면 이해가 더 쉬울 것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떠나 '색다른 곳'을 경험하고, 견문을 넓히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도 달라지게 될 것이다. 물론 몸으로 직접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모험을 떠날 수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어린이 여러분들이 '독서'를 하고, '학업'을 하는 것도 모험을 떠나는 것과 똑같은 경험을 안겨줄 것이기 때문이다. 손으로 직접 찍어 먹어봐야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직접체험'말고 '간접체험'으로도 얼마든지 견문을 넓히고, 사고력과 안목을 높힐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을 행하는 실천력이다. 도로시 일행이 그랬던 것처럼 '목적'을 정하고 떠나보는 것이다. 오즈에서처럼 '노란 벽돌길'을 따라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미 '검증된 방법'이고, '능력자들'이 미리 걸어봤던 길이기에 아주 좋은 가이드(멘토)가 될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떠나는 모험도 좋다. 그렇지만 때로는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해보는 용기를 가져보는 것도 아주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더구나 그 길은 '당신이 처음 개척하는 길'이 될테니, 그 길을 통과해서 '성공'에 다다른다면 선구자가 될 수도 있고, 뛰어난 리더가 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이 '애초에' 당신이 가진 능력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들 가운데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 그만큼 <오즈의 마법사>는 우리에게 대단히 친숙한 동화이며, 익숙한 이야기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는 것은 '실천을 통해서' 자신의 능력을 끄집어낸 실력자들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알고는 있지만 '하지 않아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중요한 것은 '알면, 실천하라'는 단순한 진리다. 그 진리는 '애초부터' 자기 자신이 갖고 있던 무한한 잠재력을 일깨우는 것으로 찬란히 빛나게 된다. 이런 진리는 '어린이'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라도 '시작'만 한다면 가능케 할 것이다. 진리는 그래서 위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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