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01 : 주홍글씨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
배민기 그림, 김세라 글, 손영운 기획, 너대니얼 호손 원작 / 채우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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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서울대선정 인문고전 60권>을 일찌감치 눈여겨 보고 있던 참에 눈에 들어온 책이 있었으니 <서울대선정 문학고전 43권>이었다. 하지만 오래도록 눈독만 들여놓고 있다가 새해 들어서 드뎌 읽기 시작했다. 도합 100권이 훌쩍 넘지만 올해를 넘기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시작해보련다.

 

  일찍이 '7차 교육과정'이 개편되면서 교과과목 간 '통합'이 주요관심을 쏟을 때쯤, '논술'이라는 것이 한창 인기를 끌고 있었다. 비록 수능시험에는 출제되지 않지만, '정시'와 '수시' 모집에서 논술이 입시결과를 좌지우지했었기에 '독서'가 학생과 학부모 들 사이에서 크게 관심을 모았었다. 허나 막상 책을 읽으려니, '무슨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할 뿐이어서 모두가 오리무중이던 때에, 서울대에서 마침맞게 '서울대선정 필독서 목록'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발표한 뒤에 '논란'이 크게 일었다. 왜냐면 그 '목록'에 이름을 올린 도서들이 하나같이 대한민국 초중고 학생들이 읽기에 너무나 부담이 되는 '어려운 책'들이었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읽기에도 난감하고 막막하고, '두껍기' 그지 없는 책들을 학부모들은 너나할 것 없이 사모으기 붐이 벌어졌지만, 변변한 '주석서'나 '해설집'도 없이 그 어려운 책을 읽은 학생들은 물론이고, 한 가닥 한다는 '논술선생님'들조차 난색을 표하긴 매한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렇게도' 해석되고, '저렇게도' 해석되는 <고전>을 두고 학생들의 눈높이에 알맞은 수준으로 '낮추어'서 모범답안을 제시하는 일이 만만찮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사자인 학생들은 '모범답안'을 달달 외우는 것에 길들여져 있던 탓에 용감하게(?) '자유로운 해석'을 시도해볼 생각도 없을 정도로 막연하고 막막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울대에서는 부랴부랴 '필독서'도 아니고, '정시, 수시'에도 출제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내놓고, 도서목록은 그저 '입학하고 난 뒤'에 틈틈이 읽으라는 발표했을 뿐이고, 서울대학생이 '문제 푸는 기계'로 전락하지 않도록 권장한 도서목록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 당시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라는 책이 화재가 되면서 '서울대생'도 대학생으로서 상식적인 지식을 갖추지 못한 것은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자, 서둘러 발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암튼, 지적교양을 쌓기 위해서는 '이 정도' 책은 읽고 나름의 생각을 주장할 수 있을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투로 '도서목록'이 발표되었으니 알아서들 하라는 식의 무책임한 면도 없지 않았다.

 

  그러자 발빠른 '출판시장'에서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서울대선정...>이란 제목을 달고 나온 책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물론, 적절한 '주석'과 '해석'을 달고서 말이다. 자, 문제는 지금부터다. 과연 이 책들에 실린 '주석'과 '해석'이 모범답안이 될 수 있을까? 물론이다. 대한민국에서 내노라하는 '석학'들이 풀어놓은 해답이니 충분한 자격을 갖춘 믿을만한 정답이 아닐 턱이 없다. 그러나 과연 그런 '정답'만을 달달 외우라고 주석과 해석을 달아놓은 것일까? 아니, 좀더 심층적으로 물음을 바꾸어서 '<고전>에 정답이 있는걸까?'라고 물으면 어떨까? 자신있게 "네"라고 대답할 수 있겠는가?

 

  안타깝게도 <고전>에는 '정답'이 있을 수 없다. 그저 수많은 '해석'만 있을 뿐이다. 물론 수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내놓은 해석이 있기에 그것을 '정답'이라고 말할 순 있겠지만, 그 해석도 시대가 바뀌면 달라지기 마련이다. 이처럼 '새로운 해석'이 기존의 해석을 뒤엎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그 '새로운 해석'조차 '또 다른 해석'에게 자리를 내주게 되는 일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러니 끊임없이 고뇌하고 사색하는 일만이 유일한 정답인 셈이다.

 

  하지만 중고등학생들이 <고전>을 처음 접할 땐 '길라잡이'가 필요한 법이다. 아무리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위대한 존재라 하더라도 처음 시작은 '모방'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베끼고 따라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만의 가치관'을 갖춰나간 뒤에야 비로소 '독특한 해석'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청소년을 위한 '주석서'와 '해설집'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본다.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다. 더구나 '어려운 책'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만화형식'으로 출간되어 읽기에 부담은 줄이고, 이해는 머리에 쏙쏙 되는 훌륭한 '길라잡이'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단순암기'에서 그치고 만다면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렇기에 '독서토론'이란 과정이 필요한 법이다. 길라잡이로 대충 감을 잡았으니 '자기만의 안목'을 발휘해서 '나름의 해석'을 내놓는 경험을 많이 쌓아야 한다. 그렇게 경험을 쌓고 난 뒤에는 '원작'을 다시 읽어야만 제대로 된 독서가 될 것이다. 왜냐면 '가치관'이란 물길처럼 한 번 흘러간 자국을 따라 계속 흘러가는 경향을 띠기 때문이다. 이를 '수로화'라고 표현하는데, 만화책만 즐겨 읽다보면 이런 경향을 쉽게 띠게 된다. 만화책에는 '인물의 표정'이 획일화 되어 있고, '배경묘사'에도 이미 만화가의 경향이 반영되었기에 '독자의 상상력'을 크게 위축시켜버리기 때문이다. 이래서는 제대로 된 독서를 했다고 할 수 없다. 물론, 만화책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가치관 형성'이 완성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만화책>만 너무 즐겨 읽다보면 '수로화의 문제'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할 수 있으니 충분히 경계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정반대의 긍정적인 효과도 분명히 있다. 청소년들이 '원작'을 읽다보면 '시대배경'도 '공간배경'도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경험'이나 '이해'가 부족하기에 생기는 문제점이다. 이럴 때엔 '상상과 경험의 씨앗'이 필요한데, <만화책>이 그 씨앗이 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화책>을 고를 때에는 '만화가의 뛰어난 실력'을 고려해야만 한다. 뛰어난 만화가는 '확실하고 탁월한 고증'을 바탕으로 '원작의 맛'을 제대로 살려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 <서울대선정 문학고전>이 그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듯 싶어 권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첫 번째 책이 <주홍글자>다. 이 책을 벌써 몇 번에 걸쳐 리뷰를 올리고 있는데, 마침맞게 이 책이 첫 번째 책이라 개인적으론 반갑기 그지 없으면서 '또 다른 리뷰'를 써야 하는 부담감이 있었다. 하지만 고전의 장점은 읽을 때마나 '그 느낌'이 확연히 달라지기에 간략히 써내려가보려 한다. 먼저 책 제목은 <주홍글씨>인데, 근래에는 '글자'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는 견해가 많다. 왜냐면 '글씨'는 모양을 나타내고, '글자'는 문자, 그 자체를 가리키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글자'와 '글씨'는 서로 '비슷한 말'인 관계로 무엇으로 쓰든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다고 본다. 개인적으론 어릴 적부터 불러서 익숙한 '주홍글씨'가 편하긴 하다.

 

  암튼, 이 책의 주제는 '죄의식과 구원'이라는 그리스도교적인 해석이 중론이다. 특히, 그리스도교에서는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를 지었다는 '원죄'를 중하게 다루기 때문에, 청교도들이 이주해서 세운 초기 미국사회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이 책을 '죄의식과 구원'이라는 주제로 다루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책속 주인공들도 하나같이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인공인 헤스터 프린은 '간통'이라는 죄를 짓고, '죄값'을 치르기 위해 가슴에 A라는 글자를 화려하게 수놓고서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깊이 반성을 한다. 아서 딤스데일도 차마 '스스로' 죄인이라 밝히지는 못했지만 가슴에 A라는 글자를 '직접' 새겨놓고 저지른 죄에 대한 죄의식을 털어버리기 위해 깊은 고뇌에 빠져버린다. 한편, 칠링워스라는 헤스터의 남편은 자신이 저지른 '죄의식'도 없이 오로지 '복수심'만을 불태우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진정한 구원을 받은 이는 헤스터 뿐이다.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죄를 수치스러워하기보다 '당연히 받아야 할 죄값'으로 여겨, 그 죄값을 다할 때까지 반성과 선행을 꾸준히 행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죄값의 끝' 따위는 없다는 것을 헤스터 스스로 잘 알고 있기에 그녀의 반성과 선행이 더욱 빛이 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헤스터는 '죄 없이 벌만 받은 듯' 살아가는 당시의 여성들의 삶에 당당히 맞서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여성들이 죄인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는 까닭도 남성중심적인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경제적 독립'을 이루지 못한 탓이라며, 불우한 이웃을 도우면서도 스스로 '경제적 독립'을 이룬, 다시 말해, 남편 없이도 여자 혼자 아이를 키우는 일에 성공을 한 자신의 '존재감'을 널리 보여줌으로써 확고한 '여권신장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딤스데일은 '죄의식'의 구렁텅이에 빠져 자기 자신을 더욱 채찍질하는 것으로 스스로 벌을 받고 있지만, '구원'을 받지는 못한다. 심지어 자신이 저지른 죄악을 대중들 앞에서 '고백'하지만, 목사라는 '사회적 지위'에 가려져 죄의 고백이 오히려 '사회지도층의 겸양'으로 비춰져 더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딤스데일은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자 스스로 '위선자'라는 죄의식까지 더해져서 더욱더 고통스런 나날을 보낼 뿐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딤스데일은 헤스터가 부러울 따름이다. 일찌감치 '죄값'을 치룬 덕분에 치욕스런 삶을 살고 있지만 '죄의식'은 한층 가벼워져서 아낌없이 선행을 하며 '구원의 길'에 한발짝 더 나아간 듯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은 '죄악'을 밝힐 기회도 잃어버리고, 따라서 '구원'도 받지 못하는 괴로움에 영혼이 죽어감을 깨닫게 된다. 비록 육신은 멀쩡해서 의사도 치료할 것이 없을 지경이지만 말이다.

 

  '그 의사', 다름 아닌 칠링워스는 스스로 '죄의식'을 깨닫고 '구원의 길'을 가기는커녕 '복수심'만 불태우며 헤스터와 딤스데일의 '죄값'을 들춰내며 괴롭히는 '악마의 역할'을 충실히 할 뿐이다. 그로 인해 칠링워스의 외모는 나날이 추해질 뿐이다. 결국 복수의 대상이었던 딤스데일이 만천하에 자신이 저지른 죄를 밝히고 죽은 뒤에 시름시름 앓다 죽고 말았다. 딤스데일은 죽음의 문턱에서 '죄의 고백'을 함으로써 영혼의 구원을 받게 되었지만, 칠링워스는 자기 스스로 지은 죄가 무엇인지도 인식하지 못한 채, '죄의식'도 없고, '반성'도 하지 않아 '구원'도 받지 못하고 만다.

 

  한편, 헤스터의 딸, 펄은 '살아있는 주홍글자'의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펄은 헤스터의 가슴에 수놓인 A에 집착하는 말과 행동을 끊임없이 하면서 헤스터를 당혹스럽게 만들곤 하지만, 그로 인해 헤스터는 '죄값'을 잊어버리는 해이한 상황에 처하지 않을 수 있었고, '죄의식'에 대한 반성 또한 철저히 하는 '구원의 지름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헤스터가 자신의 딸을 '구차한 생의 혹'으로 여겼다면 절대로 갈 수 없었던 길이다. 사랑스런 딸이 내뱉는 '날카로운 비수' 같은 말과 행동으로 헤스터는 한시도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반성을 늦출 수 없었던 셈이다. 심지어 헤스터가 딤스데일과 '새 출발'을 약속하며 떼어낸 A 글자를 다시 주워와 엄마의 가슴에 다시 달게 만드는 장면은 '펄의 역할'이 주홍글자였음을 다시 확인하게 해준다.

 

  이처럼 그리스도교적인 관념이 물씬 드러난 <주홍글자>가 '종교적인 주제'를 뛰어넘어 인류 모두의 '문제의식'을 다루는 고전으로 분류될 수 있었던 것일까? 그건 '죄의식과 구원'이라는 주제가 우리 사회의 '윤리도덕의 문제'로 읽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이나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 그때마다 '죄의식'에 사로잡혀 침잠해버리고 만다면 살아남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잘못과 실수를 '바로 잡을 방법'을 제시하고, 오히려 그 방법을 통해 더 큰 꿈을 이루는 멋진 삶을 살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을 것이다. 아니, 인간은 잘못을 저지름으로써 더 큰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고, 시련을 극복한 사람만이 더욱 단단해질 수 있다는 '만고의 진리'를 설파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나 죄를 '인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그 죄값을 당당히 치루고 '죄의식의 극복'으로 더 큰 깨달음을 얻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바로 이런 깨달음을 일깨워주기 때문에 이 책, <주홍글자>가 고전이라 불리는 것일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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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원전 완역판 3 : 초망
요시카와 에이지 엮음, 바른번역 옮김, 나관중 원작 / 코너스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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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가 소설 <삼국지>에 등장하는 천자다. 동탁이 권력을 잡은 뒤에 '영제'를 폐위하고, 그 자리에 '헌제'를 황위에 등극시키는데, 말 그대로 '허수아비 황제'로 세우기 위해서다. 실제 정사에서도 변변한 권위를 누린 적도 없이 여러 군웅들에게 끌려다니다시피 할 정도로 '천도'를 많이 했고, 여러 군웅들에게 '옹립'되는 것으로 '권력의 상징'이 되어 그야말로 '바지 사장'마냥 처지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이는 헌제에게 충성을 다하는 신하가 없어서라기보다는 헌제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충신'이 곁에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수많은 신하들이 충신을 자처하고 저마다 헌제를 모시겠다고 서로 각축을 벌이곤 하지만, 자신의 수중에 떨어지자마자 헌제를 앞세워 '제 잇속'만 챙기기 급급하니 황제의 위신이 제대로 설리 만무한 까닭이다.

 

  이처럼 한 나라의 통치권자가 무능하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하가 왕처럼 군림하며 국정을 좌지우지하게 냅둬서는 안 될 일이며, 신하가 왕을 능멸하는 것을 냅두는 것도 나라가 망조에 들었다는 증거가 된다. 그런 까닭에 헌제는 조조의 아들 조비에게 '선위'라는 형식적인 절차를 거쳐 망국의 임금이 되어 버리고 만다. 하지만 혼란은 잠잠해지지 않고 '위진남북조 시대'로 계속 이어지며 훗날 '수'가 통일을 할 때까지 백성들은 끊임없는 전란과 굶주림에 허덕이게 된다.

 

  이렇게 '중앙정치'가 대혼란에 빠지니 '지방영주'에 해당하는 군웅들이 중앙의 간섭을 벗어나 저마다 자신의 영지를 통치하니, 백성들은 잠시라도 먹을 걱정, 죽을 걱정을 덜어줄 뛰어난 영웅의 등장에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유비의 덕정(德政)'이 유명세를 끌게 된 것이다. 잠시라도 유비가 다스리던 지역은 세금을 덜내고 전쟁터에 끌려갈 걱정을 덜 수 있으니 유비는 어디를 가나 '환대'를 받았던 셈이다. 그러나 그 덕분에 유비는 한창 나이가 되도록 제대로 된 영지도 얻지 못하고 '떠돌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 둘러싼 영주들은 가혹하리만치 세금을 걷어 군사를 양병하고, 그렇게 양병한 군사를 앞세워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려 혈안이 되어 있는데도 유비는 세월아 네월아~ 백성들의 안위를 위한 너그러운 정치를 하였으니,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이 용할 정도였던 셈이다. 하지만 그렇게 무능할 정도로 '명망'을 쌓은 덕분에 적들에게 쫓기는 처지가 되어서도 제 한 목숨은 건질 수 있는 묘한 재주(?)를 보이기도 한다. 이것을 '유비만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에 반해, 조조는 화끈하다. 아마 <삼국지> 속에서 가장 많은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그에 못지 않게 패배도 많아서 '죽을 고비'도 숱하게 넘기곤 한다. 그때마다 아끼던 측근들이 조조 대신 희생을 당하는데, 조조는 그런 희생 앞에 눈물을 아끼지 않고 펑펑 울어대는 '쇼맨쉽'이 정말 어마어마할 정도다. 심지어 자신의 가족이 죽었는데도 그 슬픔보다 '신하들(특히 호위무장들)'이 죽을 때마다 후하게 장례를 치뤄주며 재산도 아끼지 않고 공로도 아낌없이 베푸니 '조조측 장수들'은 조조를 위해서 신명(身命)을 다하겠다는 맹세를 끊임없이 한다. 이것이 '조조의 매력'이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손견과 손책, 그리고 손권의 매력은 무엇일까? 이들의 공통된 별칭이 바로 '강동의 호랑이'다. 손씨 집안은 대대로 양자강(장강)의 동남쪽에서 세력을 키워왔기에 '지역의 맹주'로 성장했다. 거기다 비옥한 땅과 풍부한 물자, 편리한 교통으로 일찍이 발달한 문물로 인해 '한 지역'에 오래 머물고 있어도 저절로 부를 쌓을 수 있는 풍요로움이 특색이었다. 비록 아버지인 손견과 형님인 손책은 '세력을 넓히는 과정'에서 비운의 죽음을 맞이했지만, 손권 대에 이르러서는 비로소 기반을 다지고 풍요를 누렸으니 다른 어떤 세력보다 안정적인 발전을 이룬 셈이다. 만약 조조 세력의 위협만 없었다면 손권은 강동의 패권을 바탕으로 오래도록 평화를 누리며 번영했을 것이다.

 

  이처럼 어지러운 세상에는 '독특한 매력'이 큰 세력을 이루는 비결이 되곤 한다. 황제의 권위가 땅바닥에 떨어진 상황에서 세상의 혼란을 멈출 영웅이 세력을 끌어모을 수 있는 비결은 바로 '매력'이란 말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어지러운 정치판에 뛰어들 요량이라면 우선 '자기만의 매력'부터 확실히 부각시켜야 한다. 또한 그 매력은 '능력'과 직결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능력은 '파워'와 '모럴', 두 가지로 집중되어야 한다. 현대에는 '폭력'이 금기시 되곤 하니 '경제력'과 '도덕심'으로 대체될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능력은 절대적으로 '자기만을 위한 것'이 아닌 '서민을 위한 경제력과 도덕심'이어야만 한다. 그 어떤 정책이라도 국가경제를 안정적으로 발전시켜 '부의 분배'를 공평하고 공정하게 해야 하며, 그 어떤 행보라도 양심에 꺼릴 것이 없고 '모두를 위한 정의로운 것'이어야만 한다. 그런 정권이어야 올바르다 할 것이며, 그런 인물이어야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속에서 그런 위대한 지도자는 드문 일이니 '경제'와 '도덕',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단연 '경제'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도덕군자라 하더라도 '배고픔' 앞에서 체면만 차리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다. 또한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처럼 풍요를 누리고 살아야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법이다. 그런데 말이다. 현실은 그렇더라도 말이다. 나는 왜 '도덕군자'가 더 끌리는 걸까? 실속을 다 챙기는 '조조'는 하는 짓마다 밉기만 하고, 실속은커녕 제 밥그릇마저 못 챙기는 '유비'가 하는 짓은 이쁘기만 하다. 한편, 잇속도 챙기고 적당히 도덕적인 '손권'은 하는 짓마다 쏘쏘~고 말이다. 유비의 매력이 이토록 징허게 오래 지속되는 까닭은 정녕 무슨 조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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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원전 완역판 2 : 군성
요시카와 에이지 엮음, 바른번역 옮김, 나관중 원작 / 코너스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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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탁이 진류왕(훗날 헌제)을 앞세워 권세를 휘어잡자마자 국정은 혼돈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만다. 충신들은 '십상시'를 몰아내면 국정농단을 바로 잡고 나라의 기틀을 바로 세워 황건적의 난도 절로 사그라들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삶도 나아질 거라 예상했지만, 그 십상시를 몰아내자 마자 '동탁'이라는 또 다른 승냥이를 불러오고 만 것이다. 급기야 여포까지 양아들로 삼게 되자 동탁의 횡포는 더욱 심해진다. 이를 저지 위해 여러 군웅들이 '반동탁연합군'을 조성해 낙양을 공격하지만, 동탁은 '장안천도'를 강행하며 낙양을 불바다로 만들고 유유히 도망가버리고 만다. 정녕 동탁을 처단할 영웅은 없단 말인가?

 

  아니 있다. 다름 아니라 '영웅, 초선'이라는 아리따운 여인이 동탁을 무너뜨리고 만 것이다. 동탁이 국정농단을 벌이면서도 굳건하게 권세를 지킬 수 있는 비결은 '이유의 꾀'와 '여포의 힘'이었다. 이 둘이 '반동탁 세력'을 뿌리부터 잘라놓았으니 천하의 영웅조차 변변한 힘을 쓰지 못하고 지리멸렬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철옹성 같은 동탁의 권세를 무너뜨린 계책이 바로 '미인계'였던 것이다.

 

  초선은 사도 왕윤의 기녀로, 기록에 의하면 '딸처럼' 아끼는 여인이었다고 한다. 하루는 왕윤이 동탁을 처치할 방도가 없어 고뇌에 빠져있는데, 평소 초선이 아버지처럼 모시던 왕윤을 위로해주려하자 왕윤에게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그것이 바로 '미인계'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초선의 미모로 여포를 홀린 뒤에, 정작 초선을 동탁에게 보내버려 둘 사이를 갈라놓는 '이간계'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애초에 '초선의 미모'가 출중하지 않았으면 가능하지도 않았던 터다. 그도 그럴 것이 '초선의 미인계'도 번번이 동탁의 모사 '이유' 때문에 어그러질뻔 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여자' 하나 때문에 큰일을 그르칠 수 없다고 끊임없이 동탁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동탁도 멍충이가 아닌 탓에 다잡은 황제의 자리를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망칠 수는 없다고 여러 번 다짐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여포가 멍충한 탓에 초선의 미인계는 성공할 수 있었고, 동탁도 색욕을 멈출 수 없었기에 초선의 미인계는 적중했던 것이다. 자, 이렇게해서 '영웅, 초선'은 황위를 찬탈하려는 반역자를 처단하는데 일등공신이었으며 동탁의 폭정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해낸 '영웅, 그 잡채'였다.

 

  그런데도 초선은 계책이 성공을 했는데도 '자결'을 하고 말았다. 훗날 여포가 '속았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에게 끔찍한 짓을 할까 두려워 그랬던 것일까? 아니면,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사로잡혀' 지내게 될 것이 몸서리쳐지게 싫어서 그랬던 것일까? 어떤 이유 때문이었더라도 '영웅'에게 걸맞지 않은 죽음인 것은 틀림없다. 만약, 초선이 '남자영웅'이었더라면 어땠을까? 전국의 영웅들이 초선의 행적을 위대하다고 평가하며 황제로 추대하지는 않았을지언정 '통치자'의 자리에 올려 혼란을 잠재울 중심으로 삼았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여인의 사회활동'을 인정하지 않던 '가부장제의 그늘'속에서 초선은 자결하고 말았다. 그리고서는 아무도 안타까워하지도 '초선의 시신'을 되찾아 정중하고 명예롭게 장례를 치뤄주지도 않는다. 아버지처럼 굴었던 사도 왕윤조차 말이다.

 

  왜 이렇게 '여성영웅'에 대한 대접이 소홀한 것일까? 초선은 지금으로부터 2000여 년 전 사람이긴 하지만, 요시카와 에이지가 <삼국지>를 쓰던 시기는 1940년대로 20세기란 말이다. 아무리 '원전'에 충실했더라하더라도 2000년 전이나 100년 전이나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지독하리만치 오래되고 한없이 낮추어보기 일쑤다. 그렇다면 21세기가 된 지금은 <삼국지> 속 여성영웅에 대한 시선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

 

  아쉽게도 '고전소설' 속의 줄거리를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내용을 바꾼다면 그건 '다른 소설'이지 '원작'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석'을 달리하는 방법이 최선일 것이다. 우리는 '여성에 대한 잘못된 시선'을 바로 잡아야 하는 진정한 양성평등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고전소설 속의 인물에 대한 평가를 '시대상'에 맞게 바로 잡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먼저, 초선이라는 인물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내리기 위해선 '미녀'라는 수식어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 요즘에도 여자에게 '예쁘다'는 말은 칭찬인 것은 마찬가지지만 '예쁨'이라는 '기준'으로만 여자를 평가하는 것은 무례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여성의 가치가 오직 미모 뿐이라는 오해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남자나 여자 모두 '인간의 가치'로써 똑같은 잣대로 평가를 내려야 한다. 그러므로 '초선의 미인계'가 아니라 '초선의 이간계'라고 바로 잡아야 한다. 물론, 동탁과 여포 사이를 금가게 만든 궁극적인 이유가 '예쁨'이긴 하지만, 어차피 계책의 핵심은 '둘 사이를 갈라놓는 것, 이간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웅의 죽음'에 걸맞는 재평가를 해주어야만 한다. 엄청난 능력을 가졌으면서도 그 능력을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 희생했다는 점에서 초선은 '영웅'임에 틀림없고, 한나라 황실을 바로잡기 위해 충성스런 희생을 했으니 '충신'에 버금가는 일을 해낸 것이 틀림없다. 비록 초선이 '관직'에 오른 인물이 아니었으므로 충신이라 칭할 수 없다고는 해도 위기에 빠진 황제를 위해, 도탄에 빠진 백성을 위해 아낌없이 '목숨'을 희생했으니 모든 영웅들의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 이렇게 제대로 존경해주어야 '여성'들도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제 몫'을 해내며 지킬 것이 아니냔 말이다. 위기에 빠져 급한 처지에 놓였을 때에는 아낌없이 '희생'을 요구해놓고, 위기를 극복한 뒤에는 '천한 목숨'이니 입에 올릴 까닭이 없다고 해버린다면, 비상식도 이런 비상식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은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이 낡았다는 이유로 곧잘 비판하곤 한다. 그런데 여인들에 한해서는 '푸대접'도 당연하다는 듯이 넘겨버리기 일쑤다. 심지어 '여자의 적은 여자'라듯이 여자들끼리도 서로를 공격하며 헐뜯는 일이 무한반복되고 있다. 그 와중에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여인들의 다툼'을 즐기는 것이 무정한 남정네들의 어리석음이고 말이다. 인류의 절반은 '여성'이다. 그런 여성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는 사회는 정상적인 발전을 할 수 없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저출산 고령화'라는 사회문제도 알고 보면 우리 사회가 '여성문제'를 제대로 들여다보고 공정한 방법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한 탓이 가장 크다. 그런데도 여성들의 희생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도 하지 않고서 '애를 셋이나 낳았으니 수고비를 아낌없이 퍼주겠다'는 안일한 정책으로 해결이 될 것 같은가.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여성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야만 한다. 더는 여자라는 이유로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여자인 까닭에 더 챙겨줄 것이 없는지 살펴야 할 때다. 그리고 제대로 된 해법을 바란다면 '여성의 목소리'에 귀기울어야 한다. 들어주고 싶지만 여자들의 속좁고 근시안적인 소견일 것 같아 걱정이 된다는 헛소리 좀 집어치워라. 그 '여성'의 다른 이름이 바로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사회나 인류 역사의 위대함은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의 고귀한 희생' 덕분이었다는 사실을 절대 잊어선 안 된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발돋움한 지금, 우리가 더 나은 '선도국가'가 되기 위해서 '여성의 힘'이 절실해졌다. 여성들이, 아니 우리 어머니들이 아낌없는 희생을 하고도 전혀 힘들지 않았다고 말할 때까지 '여성의 진정한 가치'를 바로 세워야 한다. 그것이 또 다른 인류의 절반인 '아들'이 해야할 가장 숭고한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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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원전 완역판 세트 - 전10권 코너스톤 착한 고전 시리즈 5
요시카와 에이지 엮음, 바른번역 옮김, 나관중 원작 / 코너스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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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만에 <삼국지>를 정독하다보니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져서 리뷰를 쓰기 곤란해졌다. 그래서 간략히 줄거리만 따라가려 했더니, 그 또한 방대하기 그지 없어졌고, 방대해졌는데도 밋밋해져만 가서, 결국은 줄거리는 싹 들어내고 온전히 '내 생각'만을 담은 리뷰를 쓰려 한다.

 

  흔히, <삼국지>를 '세 번' 읽지 않은 사람과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들 한다. 온갖 지혜가 담긴 역사적인 책이니만큼 그럴 듯한 소리로 들리긴 하지만, '중국의 지혜'라는 것이 '권모술수, 그 위아래'도 아닌 관계로 딱히 <삼국지>를 읽지 않았다고해서 뭐라 그럴 것은 딱히 없다는 것이 개인적인 의견이다. 그런데도 <초한지>도, <수호지>도 아닌 <삼국지>를 콕 집어서 이야기를 꺼낸 것일까? 어릴 적부터 들었던 의문이기도 했다.

 

  한때, 나는 <삼국지> 따위는 읽지 않아도 괜찮다고 학부모들에게 설파했던 적이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속고 속이는 '중국인들의 권모술수'가 그득한 책이자, 영웅들의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어차피 '전쟁광들의 허울 좋은 소리'라는 생각에 다다르자 아이들에게 그다지 교훈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리스로마 신화>가 바람을 피다 못해 불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서 '삼류 막장드라마'보다 못하니 우리 어린이들의 정신건강에 해로울 수 있으니 그닥 권장할 만한 책은 아니라고 얘기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하지만 '좋고 나쁨'이라는 기준을 세울 수 있는 것도 '알아야' 나눌 수 있는 것이고, '알아야' 좋은 것은 행하고 나쁜 것은 금할 수 있다는 진리에 다다르자 다시금 <삼국지>를 꼭 읽어야 할 필독서라고 설파하고 있다.

 

  그런 까닭으로, 아래에 <삼국지>를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방법을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 귀띔, <삼국지>에는 굉장히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조조, 유비, 손권 등을 비롯해서 '위촉오, 세 나라의 걸출한 인물'만 대충 추려도 어언 100여명이 훌쩍 넘어가버린다. 그래서 <삼국지>를 읽을 때 어느 '인물'을 딱 하나만 찍어서 집중적으로 읽어도 좋다. 이를 테면, '상산의 조자룡'이란 인물에 매력을 느꼈다면, 조자룡이 등장하는 부분에만 집중해서 읽고 나머지는 휘뚜루마뚜루 넘겨버리면서 읽어도 좋다는 말이다. 그런 식으로 '특정 인물'에 집중해서 읽다보면, 10권이나 되는 <삼국지>도 휘리릭 열 번도 넘게 읽을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유비 진영'을 중심으로도 읽어보고, '조조 진영'에 집중해서 읽어보고, 때론 '무장'을 중점적으로 읽어보다가, '책사'를 집중해서 읽어보면, 그 느낌이 확연히 달라지는 것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빼놓지 말아야 한 인물이 바로 '헌제'라는 황제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사건을 통해 '역사적 흐름'을 꿰고 '대의와 명분, 그리고 정의'에 대한 가치관을 깨우치는 것이다. 그리고 '전제왕권시대'와 '민주주의시대'에서 올바른 통치방식이 무엇인지도 생각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연이은 전쟁이 끊임없이 벌어지던 '군웅할거의 시대'에 최고의 통치자의 무능은 백성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며, 올바른 통치방식이란 무엇인지, 평화의 소중함과 어떻게 하면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지도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러면 혼란한 시대에 '유능한 통치자'와 평화로운 시대의 '바람직한 통치자'의 모습도 함께 그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쯤 되면, 왜 어른들이 <삼국지>를 읽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했는지 감이 잡힐 것이다.

 

  두 번째 귀띔, <삼국지>는 대단히 '가부장적인 사회'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굉장히 '남성위주의 관점'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여성독자에 대한 배려는 눈곱만큼도 없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삼국지>를 완독한 '여성독자'들도 꽤나 많고, 내가 가르치는 여학생들도 <삼국지>를 애정 가득한 표정으로 읽고 있으니 그다지 문제 삼을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허나, '시대적 한계'를 고려하더라도 '비판적 읽기'를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삼국지>에서 '여성영웅'은 없다. 있더라도 '미모'가 뛰어나다던가, '지혜'가 남다르다는 정도에 그친다. 당시의 여성이 '사회적 활동'에 제약을 가졌다는 점에서 여성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은 기정 사실이다. 그런데도 무능한 남자들이 풀지 못하는 일을 '여자의 몸'으로 해냈다느니, 잘난 남자들의 '위기'를 초래한 원인이 '여자의 미색'이라느니, 멀쩡한 남자의 인생을 송두리채 망가지게 만든 것이 '여자의 짧은 소견'이라느니, 여자에 대한 서술은 거의 대부분 '부정적인 것' 투성이라 여학생들에게 잘못된 선입견을 심어줄까 걱정스럽도 하다. 이런 '시대착오적인 내용'까지 고전이라는 이름으로 허락되어야 하는 걸까? 그건 절대 아닐 것이다. 다만, '남성들의 편파적인 시선'으로 풀어낸 여성인물에 대한 묘사를 걸러낼 필요가 있다는 점을 덧붙여주어야 바람직할 것이다.

 

  특히, 동양의 '음양사상'은 서로 조화를 이뤄내는 것으로 부정적인 것을 타파하고 긍정적인 것을 끌어올릴 수 있는 선조들의 지혜라는 것을 알려야 한다. 왜냐면 '음양'을 자칫 '선악의 개념'이나 '남존여비' 등과 같은 잘못된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음양사상의 핵심은 지나치거나 모자른 것에 대한 문제점을 '서로의 상충하는 기운'으로 더하거나 덜어내는 방식으로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고전에서는 '남성중심적인 이야기'를 펴내곤 한다. 안타깝지만 현명한 독자들이 거르고 걸러서 바르게 읽는 슬기로운 독서법을 펼쳐야 할 것이다.

 

  세 번째 귀띔, 중국의 '후한시대'는 백성들이 '누런 두건'을 쓰고 도적질을 일삼던 혼란이 극심하던 시절이다. 이런 혼란한 시절에는 '전쟁'이 일상이 되는 아픈 시대이기도 하다. 그런만큼 <삼국지>의 이야기 대부분이 '전쟁이야기'다. 이렇게 전쟁이 일상이 되면 '마초적인 사고방식'이 정당화 되기 십상이고, 폭력이 합리적이다 못해 합법적이 되고 만다.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짜릿함과 전율을 느낀다면 스스로 '마초'가 아닌지 의심해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흔히, '군대이야기'로 불리는 마초들의 사고방식의 문제점은 '허세'가 쩐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과장이 심하다는 이야기인데, 이해하기 쉽게 '~라떼는 말이야'로 퉁쳐서 이해해도 크게 상관이 없겠다. 한마디로 허세 가득한 묘사는 걸러서 읽어도 무방하다는 이야기다. 이를 테면, '조자룡 헌 창 쓰듯'이라는 관용적인 표현의 유래가 신야에서 유비가 조조에게 쫓기는 와중에 부인과 아들을 잃어버렸는데, 자룡이 위험을 무릅쓰고 유비의 아들을 구해냈다는 이야기는 수많은 독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명장면 중에 명장면이겠지만, 100만이 넘는 조조군 틈바구니에서 수많은 칼과 창, 그리고 화살을 온몸으로 막아내며 탈주를 하기 위해선 '말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진실로 수많은 군사들에 내지르는 무기들을 감당해냈다면 '갓난아이'는 품속에서 지켜냈다하더라도 어찌 말 한 마리가 버텨낼 수 있었겠냔 말이다. 그렇다면 말도 없이 '맨몸'으로 적진 한복판에서 돌파구를 찾아 사나운 짐승마냥 미친듯이 뛰어다녔다는 말이 되는데, 자기 몸에 꼭 맞게 입은 '갑옷' 속에 갓난아기보다는 컸을 유비의 아이를 넣었다는 것이 안 되고, 설령, 넣지 않고 안았든, 업었든 간에 '두 손'이 자유롭지 못했다면 적진을 돌파하지 못했을 것이니...이는 '사람'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란 얘기다.

 

  물론, 자룡이 유비의 아들, 아두를 구해내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진실'이겠지만 책속에서 묘사된 것처럼 '허세' 가득한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란 말이다. 그저 '위험천만한 일'을 해낸 위대한 장수의 업적을 존경스러울 정도로 드높인 '결과물'이란 말이다. 이밖에도 관우의 '오관육참', 유비의 말이 '절벽'을 단숨에 뛰어오른 일화, 제갈량의 신묘한 전략 등등 뻥에 가까운 '과장법'이라는 것을 감안하고 '역사적 진실'을 이해하고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런 '과장법'이 종종 '승자의 논리'로 이용되고 있다는 점을 간파해야만 한다. 자신들이 저지른 '부정행위'를 감추기 위해 신비하고 영험한 이야기로 교묘히 가리고서 '합리화'하고 '정당성'을 부여하는 수작으로 널리 쓰인다는 점을 있지 말아야 한다. 특히, '춘추필법'처럼 실제보다 축소시키는 경향으로 서술하며 중국에게 유리하게 해석되고, 이웃나라(그들이 말하는 오랑캐)에게는 불리하게 서술하는 위험성과 마찬가지로 하릴없이 '과장되게' 묘사하는 것도 위험천만하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 <삼국지>의 명장면이라면서 아무런 '거름장치' 없이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는 어리석음을 경계해야 옳을 것이다.

 

  더구나 이 책은 '일본의 대문호'가 쓴 '일본판'이라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작가 스스로 밝혔듯이 '원작'의 내용을 토대로 쓰되 '(일본독자의) 입맛에 맞게' 각색해서 펴냈다는 점을 떠올리면 좋겠다. 물론, '스토리'는 너무나도 익숙하고 '인상적인 구절'은 더욱 흥미진진해진 장점도 있다. 허나 '원작'과는 다르게 '왜색'적인 묘사와 전개도 다른 <삼국지>와 비교하면서 읽으면 눈에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취향의 차이'일 수 있으니 자신에게 맞는 책을 읽으면 크게 문제될 건 없다고 본다. 기회가 되면 이 책과 더불어 '다른 작가의 책'도 함께 읽어보길 권한다.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나에게 '요시카와의 <삼국지>'는 30여년 만에 다시 만난 셈이다. 어릴 적에 읽었던 추억을 더듬는 것도 재미난 요소였지만, 한중일의 <삼국지>를 모두 읽은 지금의 내가 읽은 <삼국지>는 좀더 완숙한 흥미를 느끼게 해주었다. 역시 '읽는 맛'으로는 요시카와가 최고다. 깊이를 느껴볼 새도 없이 '진격'하는 스토리가 손에서 책을 놓치 못하게 만드니 말이다. 아쉬운 점은 '유비'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탓에 '촉한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과 끝을 맺어버린다는 점이다. 그 뒤에 벌어질 '사마씨의 진나라' 이야기도 있지만, 이 책에서는 '오장원에 떨어진 별', 다시 말해, 제갈량의 죽음과 함께 서둘러 스토리를 끝맺고 말았다. 그런 까닭에 아직 <삼국지>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거나 '초보 독자'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좀더 '깊이'를 다룬 <삼국지>를 느끼고 싶다면 '한국 작가의 것'을 권하고, '역사적 사실'에 근접하고 싶다면 '진수의 <정사 삼국지>'를 권한다. 그밖에도 '삼국지' 관련책이나 해설집 등이 즐비하게 많으니 일독을 하면서 '분석적인 접근'을 해보는 것도 의미 있다고 하겠다.

 

  자, 이제 <삼국지>를 읽어볼 마음이 생기게 되었나? 아직도 왜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면 안 읽어도 무방하다. 아무리 좋은 약이라 할지라도 먹어야 약효를 볼 수 있는 법이다. 다만, 그 좋은 약을 권하는 어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조금의 관심만이라도 보였으면 좋겠다. 언제고 그 '좋은 약'이 필요할 때가 틀림없이 올테니 말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십대 후반'에 찾아왔더랬다. 기성세대들의 교묘한 꼼수가 <삼국지>의 범위에서 그닥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사실을 깨우치자 '내 나름의 처세술'을 <삼국지>를 통해서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도 어렵지 않게 깨우칠 수 있다. '대륙의 꼼수'라는 것이 알고 보면 별거 아니라는 사실과 함께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삼국지>를 필독해야 할 이유는 '중국의 허세'를 간파해 대륙을 대한민국의 발아래 두기 위함이라는 것을 추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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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인문학 수업 : 뉴노멀 - 대전환의 시대, 새로운 표준에 대한 인문학적 사고 퇴근길 인문학 수업
김경미 외 지음, 백상경제연구원 엮음 / 한빛비즈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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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덧, 코로나의 유행도 수그러들면서 '엔데믹(감염병 주기적 유행, 일명 '풍토병')'을 향해 가고 있다. 2019년 말에 시작하여 이듬해 전세계로 번져나갔고, 2023년이 된 지금도 여전히 '코로나19 감염병'은 여전히 우리의 '일상'을 위협하고 있다. 이젠 '마스크'를 쓰지 않고 외출을 하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가 되었으니, 우리의 일상이 그간 얼마나 달라졌는지 그리 어렵지 않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비단 마스크 뿐만 아니다. '첨단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감염병이 대유행을 하는 시기에도 별다른 경제적, 심리적 타격을 받지 않는 이들이 있는 반면에, 첨단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들은 어쩔 도리도 없이 죽음을 맞이해야만 하는 '극과 극의 상황'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현상을 우리 모두가 지켜보았다. 이를 일컬어 '뉴노멀(새로운 일상)'이라고 단순히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대변혁', '대격변'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국가적인 대처방안도 극명하게 차이가 났다. '펜데믹(감염병 세계적 유행)' 초기에는 선진국조차 변변한 대처를 하지 못해 허둥거리기 일쑤였지만, 거대제약회사가 발빠르게 '백신 처방'을 내놓자 확실히 선진국들이 우선적으로 일상을 회복하는 모양새를 보였다. 그에 반해 아프리카, 아시아 대륙의 저개발국가나 중국, 인도, 브라질 등 인구는 많은데 의료시스템이 뒷받침하지 못하는 일부국가에서는 변변한 의료혜택도 받지 못하고 병원 복도나 길거리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비현실적인 일상을 목도하게 되기도 했다.

 

  한편, 비현실적인 일상은 우리 생활 곳곳에서 벌어지게 되었다. 가장 먼저 '비대면수업'이나 '재택근무' 같이 사람과 사람이 '한 장소'에서 만나지 않고도 일상을 누리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런 편리한 일상도 차이는 극명했다. 선진국들은 발빠르게 '비대면' 시스템을 구축해 일상을 빠르게 회복해나간 반면에 그렇지 못한 나라들은 '펜데믹의 수렁' 속에서 변변한 대책도 마련하지 못한채 맨몸으로 부딪혀나갔던 것이다. 그로 인해 '코로나바이러스의 변이'는 무서운 속도로 변화해나갔고, 그때마다 전세계는 '새로운 변종바이러스'와 싸우는 공포를 계속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바뀌어가는 것일까?

 

  '뉴노멀'은 다시 예전의 일상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전제로 한다. 이미 첨단 과학기술의 맛(?)을 본 인류가 예전처럼 퇴보할 수 없다는 얘기도 되겠지만, '감염병 세계적 유행'이라는 공포를 함께 느낀 인류가 예전과는 확연히 다른 일상을 겪어 나가게 될 거라는 전망이었다. 하지만 이 책이 출간된 지 3년이 되어가는 지금을 보면 '다시 예전의 일상'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욕구가 더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무리 '첨단 과학기술의 맛'을 느꼈다고 해도 인류가 받아들이는 '체감속도'는 현저히 느릴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이를 테면, 마스크를 쓰고 다니면서 '감염병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져서 서로가 조심하고 서로를 배려하며 '느림과 불편'을 감수하던 사람들이, 마스크를 벗고 다녀도 된다는 '시그널(신호)'가 보이기 시작하자 조금쯤의 '느림과 불편'에도 짜증을 내기 시작했단 말이다. 이제 곧 '마스크 해제'라는 정부의 방침이 나올 전망이라 여기저기서 우려의 목소리도 높아지는 상황이 연출되곤 한다.

 

  그 사이 우리는 '이태원 참사'를 겪었다. 오랜만에 다시 '예전의 일상'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시그널이 나오자 너나할 것 없이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 모인 젊은이들에게 충격적인 사고 소식을 전한 것이다. 이는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인재(人災)'였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안전사고에 대한 의식이 높아졌기에 '참사발발' 이전부터 경찰서와 소방서에 안전조치를 취해달라는 요구전화가 빗발쳤지만, 끝내 '위기대응 메뉴얼'이 없었다는 어처구니 없는 당국의 변명과 정부의 무책임하고 안일한 대처로 결국 애꿎은 젊은 목숨만 안타까울 뿐이고, 남겨진 유족들의 가슴엔 대못을 박아버리고 말았다. 이게 과연 '뉴노멀'이란 말인가? 아무리 '첨단 과학기술'이 날로 발달한다지만 결국 그 혜택은 '일부계층의 점유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또한, 그 혜택 또한 전혀 '공평하지' 못한 방법으로 이루어져 극심한 사회적 갈등과 대립을 유발하게 될 것이다. 이런 것은 우리가 절대 바라지 않은 '뉴노멀'일 것이다.

 

  그렇다면 바람직한 '뉴노멀'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마침맞게 이 책의 제목이 '인문학 수업'이라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교양을 쌓고 철학적인 삶을 위해서는 '인문학 공부'가 해법이기 때문이다. <논어>에도 '온고지신'이라는 말이 있다. 옛 지식을 통해 새로움을 터득해 나간다는 말에 '뉴노멀의 해법'이 담겨 있다고 본다. 우리의 미래는 매우 빠르게 변모해나갈 것이다. 인공지능로봇, 감염병, 생명공학, 뇌과학 등등 기존의 패러다임을 한순간에 무너뜨리고 새롭게 세울 변수가 너무나도 많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2040년을 주목하고 있고, 세계의 석학들도 2050년을 정점으로 인류가 내리막길을 걸을 것이라는 '경고성 멘트(!)'를 아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는 세계경제위기 속 국지적인 전쟁과 분쟁, 그리고 갈등을 멈추지 않고 있다. 쇼펜하우어가 말했듯이, 우리 인간은 B에서 D로 향하는 기차를 타고 가는 형국이다. 탄생(Birth)에서 죽음(Death)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는 선택(Choice)가 있다. 결국,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지녔단 말이다. 그 기회는 말할 것도 없이 '인문학'에서 찾을 수 있고 말이다. 내 삶을 '어떻게' 만들어갈지 궁금하다면 '인문학'을 들춰보아야만 한다. 내 삶이 '위기'에 빠졌다면 더더군다나 '인문학'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리고 세상이 달라지는 것 같다면 그 원인도 '인문학'에서 찾아봐야 한다. 물론 인문학이 직접적인 해답을 내놓지는 않는다. 신탁의 예언이나 점쟁이의 점괘처럼 두루뭉술하고 아리송할 따름이다. 하지만 지나고보면 딱 들어맞는 예언이었고, 신통한 점괘였던 것처럼 느꼈던 적이 있을 것이다. 바로 그것이 당신이 놓친 '인문학이 제시한 기회'였다는 것만 알아도 좋다. 나 자신의 철학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할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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