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60선 52 : 이이 성학집요 NEW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60선 52
곽은우 지음, 이진영 그림, 손영운 기획 / 주니어김영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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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고전' 가운데서도 유독 읽지 않는 '고전'이 있으니, 바로 '우리 고전'이다. 역사를 배우면서 '세계사'와 '한국사'를 따로 국밥처럼 다루는 실수를 많이 지적하지만, 철학을 비롯해서 '고전'이라 일컫는 것들은 죄다 서양과 중국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정작 우리네 위인들이 쓴 '고전'에 대해서는 까막눈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에는 심히 부끄러워해야 할만 하다. 심지어 외국의 고전은 곧잘 치켜세우면서 '한국의 고전'은 푸대접을 하기 일쑤다. 까닭인 즉슨, 대단히 '전근대적인 낡은 사상'인 탓에 오늘날에 비추어 온통 '한계점' 투성이며, 심각할 정도로 시대착오적인 내용만이 가득하기에 현대인들이 배우기에 딱 알맞은 '한국 고전'은 없다고 단언할 지경이다. 정말 그럴까?

 

  각설하고, 율곡 이이가 쓴 <성학집요>는 선조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것을 염두에 두어 부디 '바른 정치'를 이끄라는 마음을 담아 손수 적어내려간 책이다. 마치 마키아벨리가 메디치가문에 <군주론>을 지어다 바치며 조국 피렌체를 위해서 써내려간 것처럼 말이다. 하기는 <성학집요>와 <군주론>은 비슷한 점이 있다. 둘 다 '제왕학'이라 부를 정도로 '군주를 위한 가르침'을 담았기 때문이다. <성학집요>도 임금이 꼭 읽어야 할 <대학>을 중심으로 <사서오경>의 핵심적인 내용만 골라서 쉽게 해설까지 곁들여 썼고, <군주론>은 제목부터 '군주가 마땅히 해야할 것'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한 책이니, 책의 내용은 사뭇 다를지언정 책을 지은 글쓴이의 마음과 생각에는 일맥상통한 점이 있다.

 

  그렇다면 이이는 왜 선조에게 책을 지어다 바칠 생각을 했던 것일까? 그건 이이가 '실천하는 사상가'였기 때문이다. 단순히 책만 파고들어 온갖 지혜를 쌓는 것을 넘어 '배운 내용'을 그대로 '현실정치'에 반영해 '바른 세상'을 만들려고 애쓴 셈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공부하는 이들의 귀감이 되는 것이다. 단지 부와 명예만을 위해 공부를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이이는 단언했다. 자신을 끊임없이 갈고 닦은 뒤에 뜻(목적)을 이루었으면, 거기서 멈추지 말고 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부단히 애를 써야 한다고 설파하였다. 이런 이이의 주장은 '선조'에게 닥친 조선의 위기를 생각하면 실로 '예언가'적인 면모가 엿보일 정도다. 속설에는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0여년 전에 '10만 양병설'을 주장해 사뭇 달라진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조선에게 닥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비책까지 마련했다고 전해질 정도니, 율곡 이이의 선견지명은 단순한 지레짐작이 아니라 '높은 학문의 경지'에 다다르니 보이는 날카로운 안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율곡 이이는 9번 장원급제를 할 정도로 뛰어난 학자였다. 이런 대단한 사람이 <사서오경> 가운데 핵심적인 내용만을 간추려 '꼭 알아야 할 유학의 모든 것'을 집필해낸 책이 바로 <성학집요>였던 것이다. 앞서 퇴계 이황이 <성학십도>를 펴낸 것과도 서로 비교가 될 만하지만, '이이와 이황의 비교'는 다음에 기회가 있을 터이니 다음으로 미룬다. 암튼, 이토록 뛰어난 학자가 어린 선조임금을 위해서 써내려간 <성학집요>는 조선의 근간이었던 '성리학의 핵심 포인트'만 담아두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마치 중국의 여러 고서를 <십팔사략>이라는 역사서로 휘뚜루마뚜루 읽어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일 것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또 다른 숨은 뜻'을 심어두었다.

 

  <성학집요>의 내용을 읽어내려가다보면 '군자에 이르는 길'이 보이고, '선비가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대해서도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 오늘날로 비유를 하자면, '시험에 나오는 문제만 쏙쏙 공부하자'는 '시나공 요약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언컨대, 조선의 성리학에 정수를 공부하고 싶은데 그 내용이 너무 방대해서, 또는 <사서오경>을 두루 살펴볼 시간적 여유가 없을 때에도 율곡 이이의 <성학집요> 한 권만 읽어도 충분할 정도다. 그런데 이 책, <이이 성학집요>를 보면 그 속에 '또 다른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바로 '현실정치'에 참여를 적극 권하고 있다는 것 말이다.

 

  사실, 이이만큼 '현실정치'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숱한 '개혁정책'을 내놓은 신하가 없을 지경이다. 16세기 조선의 혼란은 단순히 '붕당정치'에서 그친 것이 아니다. 바다 건너 일본에선 오랜 전란을 종식시키고 '전국통일'을 이룬 기세로 조선을 넘보고 있었으며, 대륙에서는 바야흐로 '명청교체기'로 명의 기운이 점점 쇠락해지고 청(후금)의 기운은 날로 기세등등해지는 때에 조선의 임금인 '선조'는 붕당정치로 신하들이 편가르기를 한 틈을 타서 '왕권강화'를 할 요량으로 신하들과 힘겨루기에만 힘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붕당정치는 날로 심각해지고, 임금은 신하들의 다툼에서 '어부지리'로 이득만을 챙기며, 말려야 할 싸움을 말리기는커녕 더욱 부추기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으니, 율곡 이이가 보기에 한없이 안타깝기 그지 없는 현실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이이는 <성학집요>를 지었고, 선조에게 기꺼운 마음으로 바쳤다. 그리고 현실이 바뀌길 간절히 원했다. 최고권력자인 조선의 임금을 깨우치면 국제적 위기속에서도 절대 위태롭지 않고 위기를 극복해 나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졌던 것이다. 딴에는 어린 시절 영특했던 선조를 떠올리며 '기대'가 크게 작용했으리라. 허나 선조는 영리하긴 했지만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기 급급했던 졸장부에 불과했다. 끝내 선조는 이이의 기대에 부흥하지 못하고, 나라가 스러져가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오늘날의 정치는 어떤가? 최고 권력자 곁에 '율곡 이이' 같은 인물이 보이질 않는다. 오직 자기 이익만을 최고로 여기며, 나라를 팔아서라도 제 한 몸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아낌없이 퍼주는 모지리만 가득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율곡 이이 같은 '정치인'이 새로 등장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는가? 일촉즉발의 위기속에서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 있겠냔 말이다. 이럴 땐 방법이 딱 한 가지다. 온 국민이 '율곡 이이'와 같은 '선한 마음'으로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건져내야 할 것이다.

 

  그렇다치고 '낡은 지식'과 '낡은 방법'으로 오늘날 대한민국에 닥친 위기를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이겨내라는 말인가 의아하신 분들도 있을 것이다. 실상 <성학집요>는 16세기 성리학적 이념만을 읊어대고 있으니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허나 <성학집요>가 분명 '적절한 위기극복 방법'을 제시한 것은 맞다. 바로 <대학>에서도 밝힌,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뒤에 정성을 다해, 먼저 '자신'을 닦고, '가정'을 일으켜 세우며, 범주를 넓혀 '국가'를 다스리고 나아가 '세상과 인류의 번영'을 위해 자기 한 몸을 소중히 써야한다는 내용 말이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성학집요>에 쓰인 '제왕학의 핵심'을 깨우치고 실천하게 된다면 위기를 극복하고 우뚝 선 대한민국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현자는 달을 가리키는데 바보는 손가락만 바라본다'는 말이 있다. 현자는 모두를 위해 '함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도 바보는 '제 이익'만을 탐하며 당장의 이익을 챙기려 어리석기 그지 없는 짓을 저지르고 만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느냔 말이다. 바보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우칠 수 있도록 큰소리로 한데 외쳐야 할 것이다. 현자가 가리키는 달이 '하늘에서 환한 빛으로 온 세상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고 말이다. 아무리 바보 멍충이라고 해도 비로소 '환한 달빛'을 보고 난 뒤에는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그저 제 이익에만 취해서 밝은 달을 쳐다볼 생각조차 안 하는 바보에게 큰 소리로 외쳐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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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세계사 2 - 통일 제국의 형성과 세계 종교의 탄생 처음 세계사 시리즈 2
초등역사교사모임 글, 한동훈.이희은 그림, 서울대학교 뿌리깊은 역사나무 감수 / 주니어RHK(주니어랜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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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관점'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내가 '어떤' 시선으로 역사를 바라보느냐가 핵심이란 말이다. 그러기 위해선 역사를 이해하는 '안목'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우리 배우미(학생)들은 학창시절에 역사교과를 배우면서 '안목'을 착실히 키워나가는 것일까? 이런 물음에 흔쾌히 "네~"라고 대답할 이가 몇 명이나 될런지 의문이다. 왜냐면 나 역시 그랬기 때문이다. 학창시절에 분명히 배웠는데 어른이 되어서도 좀처럼 '역사적 사건'을 이해하는데 까막눈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럴 때 '가르치미(선생)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역사를 가르치다보면 '편향'에 대한 걱정을 하곤 한다. 주류 역사만 가르치느냐, 비주류 역사까지 아울러서 가르치느냐 하는 고민 말이다. 속된 말로 '진보 vs 보수', '좌파 vs 우파'처럼 좌우 양쪽의 균형잡힌(?) 중립적인 자세로 가르쳐야 한다고 입바른 소리를 하곤 하지만, 당최 '중립적인 자세'를 어떻게 취할 수 있다는 말인가? 산성과 염기성의 액체를 섞듯이 극좌와 극우의 관점을 대충 얼버무리듯 섞으면 그 사이의 중간적인 '역사적 관점'이 우리 배우미들에게 자연스레 스며든다는 것인가? 아니면, 배우미 스스로 '올바른 역사적 가치관'이 형성된다는 말인가? 오히려 이쪽 저쪽 편갈라서 싸우는 어른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그래선 안 된다. '역사적 편향'이란 분명 잘못된 것이지만, '편향적'일까 무서워서 이도 저도 아닌 중간을 가르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가르쳐야 바람직한 '역사관점'을 익힐 수 있을까? 역시나 스스로 성찰하는 가르치미의 자세를 갖춰야 한다. 그런 가르치미에게 배우는 배우미들이 올바른 '역사 가치관'을 형성할 수 있고, 역사를 바라보는 '안목'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가르치미는 '윤리 철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스스로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고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한마디로 배우미를 '돈 버는 소모품'으로 여기지 않고, 가르치는 직업을 '돈 버는 수단'쯤으로 여기는 사람은 절대로 남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먹고 살기도 바쁜 현대인들에게 '높은 수위'의 도덕을 강요하는 것 같아 미안한 생각도 들긴 하지만,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미쳐 돌아가는 것을 보니 '도덕'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어서 한 얘기다. 공감하지 않아도 좋다. 나 혼자서라도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겐 한없이 높은 도덕심으로 가르칠테니 말이다. 이 아이들이 얼마나 공감하고 인정해줄지는 모르겠으나 나 스스로 부끄러움 없는 가르침을 실천하려 한다.

 

  각설하고, <처음 세계사 2>의 주요 내용은 '로마'와 '인도', 그리고 한국과 일본의 '고대사'다. 그 가운데 각 나라의 성장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종교에 대한 내용이 인상적이었는데, 로마의 크리스트교와 인도의 불교, 그리고 불교가 한국과 일본의 고대사에 끼친 영향에 대한 내용이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관점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각각의 종교가 역사에 미친 영향을 함께 살펴보면 좋을 것 같은데, 책 속에서는 '그것'까지 상세한 설명이 없으니, 역시나 가르치미의 역할이 꼭 필요한 부분이 되겠다.

 

  아시다시피, 로마는 왕정으로 시작해 공화정을 거쳐 황제정으로 크게 성장했다가 오현제(다섯 명의 현명한 황제)의 등장으로 팍스 로마나(로마에 의한 평화)를 누렸으나, 그후 '군인황제의 등장'으로 혼란을 겪다 '동서 분열'로 이어지고, 서로마의 멸망으로 사실상 로마제국은 끝장이 난다. 하지만 동로마(비잔티움)제국은 명맥을 이어 나가 '천 년의 역사'를 채우고서 저물어갔으니 로마가 서양역사에 끼친 영향력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후 서유럽은 '중세시대'로 접어들어 봉건제가 자리 잡으며 '크리스트교'가 어마무시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니, 우리는 '크리스트교'라는 종교에 대해서 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알렉산드로스가 방문(?)한 뒤에 인도에는 '아리아인의 도래'가 시작되었다. 이 아리아인들은 인더스강에 자리잡고 있던 원주민들을 정복하면서 강력한 신분제도를 시행했으니, 흔히 말하는 '카스트제도'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도래한 아리아인들은 자신들이 상위계층으로 자리잡으면서 '브라만교'를 성립시켰는데, 오늘날 인도 '힌두교'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도에서는 '불교'라는 종교도 탄생하였다. 불교도 다분히 '브라만교'의 영향을 받긴 했지만, 철저히 신분제도를 타파하고 누구나 해탈해서 붓다(부처)가 될 수 있다는 싯다르타의 가르침이 분명한 차이점이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불교를 널리 퍼뜨린 주인공은 피비린내나는 정복활동을 마친 뒤의 '아소카 왕'이었다.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정복군주였던 아소카는 활발한 정복전쟁을 수행하며 왕조의 기틀을 완성하고 전성기를 맞이했으나 그로 인해 인도 백성들의 피폐한 모습을 보고서 크게 잘못을 깨닫고 뉘우침을 증명(?)하기 위해 '불교'를 퍼뜨렸다는 것이 정설이다. 허나 새로운 정복지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색다른 종교가 필요했다는 해석에도 주목할 만하다. 아리아인에 의한, 아리아인만을 위한 '브라만교'를 퍼뜨리기엔 원한이 너무나도 큰 까닭에 새로 얻은 정복지 주민들과의 통합이 힘들었는데, 때마침 일어난 '불교의 가르침'으로 대통합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는 논리가 더 그럴싸하기 때문이다.

 

  이는 고대로마가 '크리스트교'를 공인한 까닭과도 통한다. 로마는 '그리스신화'를 바탕으로 한 '다신교'를 숭배했고, 이후 영토가 넓어지면서 '이집트신화'와 '수메르신화' 등 여러 지역의 종교적 색채를 융합해가며 '다신교 대통합'을 근간으로 삼았다. 하지만 때마침 일어난 '예수의 등장'과 '복음 전파(사도 바울)'로 인해 크리스트교(유일신)는 유대인만을 위한 종교에서 범인류적인 종교로 탈바꿈에 성공해 교세를 펼쳐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널리 퍼진 '크리스트교'를 애써 부인하려 했지만, 기울어진 로마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선 '색다른 종교'로 대통합을 이끌어내는 힘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걸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실행을 했고, 곧이어 로마의 종교가 '크리스트교'로 공인되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종교를 바라보면 '국가의 대통합'을 위해서는 '종교(큰 믿음)'가 필요했고, 더 넓은 영토와 더 많은 백성을 '융합'시키는데 종교만한 것이 없었다는 것이 증명된다.

 

  이는 고대 한국과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기존의 집권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는데 '불교'를 요긴하게 써먹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에 전파된 불교는 삼국은 물론 일본에까지 '왕권강화'를 이루는데 걸림돌이었던 '집권세력(구세력)'을 내몰고 '왕'을 중심으로 한 국가 대통합을 이끌어내었기 때문이다.

 

  그럼 고대사에서 '종교의 역할'이 무엇인지 정리해볼 수 있다. 종교는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꼭 필요한 '응집력'을 갖고 있으며, 더 넓고 더 많은 것을 한데 아우르는 '포용력'을 발휘하기도 하면서, 기존의 집권세력을 견제하고 새로 등장한 집권자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는데 탁월한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의 혼란스런 대한민국을 하나로 통합하는데 '종교의 힘'을 빌어올 수 있을까? 우리는 서구열강의 침탈과 일제의 강제병탄을 겪으면서 '동학'이라는 새로운 종교로 민족대통합을 꾀한 적이 있다. 동학은 이후 '천도교'로 명칭이 바뀌며 3·1운동의 핵심 세력이었고,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도 크게 활약을 했었으나, 일제의 탄압과 훼방으로 인해 주요인물들이 대거 변절하기 시작하면서 교세가 흔들렸고, 오늘날에는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위기의 순간'엔 어김없이 종교의 힘이 발휘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다시 돌아와, 오늘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대통합을 이룰 대한민국의 새 종교는 나타날 수 있을까? 라는 물음을 해보자. 불교? 기독교? 천주교? 기존 종교에서는 답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새로운 종교를 창시할 것인가?

 

  아니, 나는 '홍익인간(널리 사람을 이롭게 한다)'에 주목하고 싶다. 굳이 '단군교'라는 숭배대상을 찾고 싶은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을 하나로 뭉치게 만들 수 있으면서, 세계 인류의 평화와 공영에 이바지 할 수 있는 사상 말이다. 마치 전세계 수많은 젊은이들이 'K-POP'에 열광하며 저마다의 끼와 흥을 맘껏 발휘하는 '그 힘'처럼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이념 하나에 전세계인이 대통합을 이룰 수 있는 '무엇'을 발휘하고 싶은 것이다. 그 무엇을 대한민국이 해낼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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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3분 철학 1 : 서양 고대 철학편 만화로 보는 3분 철학 1
김재훈.서정욱 지음 / 카시오페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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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철학책'을 즐겨 읽는다. 하지만 '독학'으로 읽는 것이기에 내가 읽은 철학의 사조가 옳게 읽는 것인지 바르게 이해한 것인지는 잘 모른다. 그저 읽고 '감동'할 따름이다. 그렇지만 철학에 '정답'이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철저히 '암기'를 무시하고 '느낀대로' 읽고 생각하고, 나름 사유하면서 즐길 따름이다. 그래서인지 난 철학이 어렵지 않다. 애써 어렵게 써내려간 '철학책'을 읽을 때에도 '쉽게' 써내려가지 못한 까닭을 안쓰럽게 바라볼 뿐이다. 그런 까닭에 난 '쉽게 쓴 철학책'을 선호한다. '단순도식'이라는 우려가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누가 읽더라도 쉽게 써내는 것이 '더 대단한 것'이며, 동시에 '명쾌한 설명'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줄 수 있다고 믿기에 가장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이 책, <만화로 보는 3분 철학>은 아주 훌륭한 철학책이다.

 

  그중 1권인 이 책은 '고대 철학자'들을 중심으로 철학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소개하면서 '흥미'를 돋우고, '대화형식'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며 '철학자의 사상'과 '철학의 계보'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으며, '만화형식'으로 보다 쉽게 '철학자들의 사상에 담긴 핵심'을 강렬하게 드러내 보여주어 누구라도 쉽게 철학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렇다면 '고대 철학자들'은 '무엇'에서부터 철학을 시작하였을까? 그건 '세상의 만물'이 무엇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는지를 밝혀내는 것이었다. 흔히 최초의 철학자로 알려진 '탈레스'는 "만물은 물이다"라고 세상의 근원을 주장했다. 그 뒤로도 세상 만물의 근원이 불이기도 했고, 수이기도 했고, 사물 그 잡채이기도 했다가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서는 '물, 불, 공기, 흙'이라는 '4원소설'을 주장하는 등 온갖 근거를 밝히며 만물의 근원이 무엇인지 밝혀내려 애썼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참 쓰잘데 없기 그지 없는 낭설에 불과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과학적인 근거' 때문이라는 것을 상기하면, 과학의 원류가 고대 철학자들이 만물의 근원을 밝히던 '자연철학'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면서 고개가 절로 숙연해지기 되고 만다.

 

  이를 테면, 연금술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화학도 없게 되는 셈이다. 그런데도 흔한 물질을 값비싼 금속으로 바꾸는 '연금술사'는 무시하는 경향이 있고, 오늘날 새로운 '화학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은 위대한 업적으로 치부하는 세태가 우습단 말이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관점에서 봤을 때, 우습기 짝이 없는 '고대 철학자들의 주장'을 낡고 터무니없는 사상으로 취급해선 곤란할 것이다. 애초에 보잘 것 없이(?) 시작되었던 철학적 사유가 현대철학의 복잡다단하고 심오한...때로는 냉철한 분석으로 당면한 사회문제를 풀어내는 소중한 열쇠로 여기는 풍조의 근원이었다는 생각에 다다르게 되면 '고대 철학'을 그저 그렇고 그런 것쯤으로 치부하지는 못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 시점'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바로,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철학'을 알아보자면서 말이다.

 

  앞서 밝혔듯이, '고대 철학'은 세상 만물의 근원을 밝히는 자연철학으로 시작해서 세상 만물의 '존재 이유'를 물으며 나름의 주장을 펼쳐내었다. 그렇게 인간이 가진 지성으로 세상에 관한 모든 학문을 꿰뚫으려 하였고, 세상이 혼란해질수록 삶을 대하는 생각을 바르게 하고 태도를 올바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윤리학'으로 발전하였다. 그런 대표적인 윤리철학이 바로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다. 이 두 학파는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존경해서 만들어지고 발전한 윤리학이었으며,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이전의 '자연철학'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게 된 것이고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수많은 저작물을 통해서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엿볼 수 있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각각 '어떻게' 그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켰는지도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고대를 대표하는 철학자가 바로 '소크라테스'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위대한 스승'을 독배를 마시고 자살에 이르게 한 '냉혹한 현실'에 대해서도 깊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흔히 알려진 대로 소크라테스는 그 당시 '위정자'들에게 믿보이고, 당시의 지식인들이었던 '소피스트(궤변론자)'에게 시기와 질투를 받아 죽음으로 내몰리고 말았다. 당시 소크라테스의 지인들은 그런 세태가 만들어낸 '위선' 때문에 헛된 죽음을 당하지 말고 탈옥을 권했으나, 우리의 위대한 스승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알고도 제 목숨을 챙기는 비겁한 행위를 한다면, '위선자들의 논리'를 따르게 되는 꼴이니, 억울하긴 하지만 '당당히' 죽음을 받아들이며 '참된 진리'로 승리하는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 말씀하였다. 실로,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에 이르면서도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저들이 저지른 잘못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말씀한 것과 같은 위대함일 것이다.

 

  오늘, 대한민국이 겪는 치욕은 한마디로 '철학의 부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조금만 더 똑똑했으면 '대한민국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끌어내면서, 사죄도 변변하게 못하는 모지리를 '국제적으로 개망신줄' 수 있는 방법도 있었는데, 어찌 멍청하게도 '뻔뻔한 가해자'에게 굴욕적으로 면죄부를 선사하면서도 아무 것도 얻어낸 것이 없는 굴욕적인 외교참사를 저지르고 말았느냔 말이다. 그래 놓고도 자화자찬을 늘어놓으며 '핑크빛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고 선전선동하고 있는 꼴을 보고 있으면, 욕지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진정, 참으로 선량하기 그지 없고 착한 내가 감히 심한 욕을 한마디 하겠으니 부끄러운 줄 알면, 제발 좀 눈앞에서 사라져줬으면 좋겠다. "못난 놈~"

 

  쨌든, 철학은 이토록 중요하다. 앞으로 또다시 이런 못난 놈을 대통령이라고 뽑는 머저리들은 없길 바라며, 제발 좀 철학공부 좀 했으면 좋겠다. 이 얼마나 쉽고 재밌는 철학책이냔 말이다. 2권에서 다시 '철학이야기'를 이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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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60선 51 : 미셸 푸코 지식의 고고학 NEW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60선 51
조희원 지음, 조명원 그림, 손영운 기획 / 주니어김영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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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에 대한 강의를 듣고 나면 '철학'이 그다지 어렵지 않고 '해볼만 하겠는데'라는 맘이 들어 그럴 듯한 <철학책>을 골라 읽어보곤 한다. 그럴 때마다 늘 느끼는 것은 '정말 어렵다'는 생각이다. 분명 강사가 들려준 '철학이야기'는 참 쉽고 재밌었는데, 왜 <철학책>은 쓸데없이 어렵기만 한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들곤 한다. 그렇게 '철학의 뜨거운 맛'에 홀랑 데이고 나서야 철학이야기를 쉽고 재미나게 풀어준 강사님의 위대함(?)이 새록새록 솟아나기 마련이다.

 

  그렇다. <철학책>은 어렵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읽어내기'조차 버거운, 솔직히 말하면, 몇 장 읽다가 냄비받침으로 쓰이고마는 '다른 쓰임새로써 매우 유용한 책'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그것도 아니면 걍 책꽂이에 장식품으로 전락하고 말거나 말이다. 그 대표적인 책이 바로 미셀 푸코가 쓴 <지식의 고고학>일 것이다. 푸코 철학의 정수를 맛볼 수 있다는 이 책은 솔직히 읽기 어려운 책이다. 정말 재미없다. 비전공자뿐 아니라 전공자들조차 '한자어투'로 뒤쳐진(번역된) 탓에 난해하기 이를 데 없다고 혀를 내두를 지경이라고 한다. 그 탓인지 '만화'로 쓰인 이 책조차 <지식의 고고학>을 설명하기 위해서 '원전의 내용'은 둘째치고, 푸코의 저서를 총동원하였을 뿐만 아니라 '푸코의 연구방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다른 책'들에 대한 소개와 부연설명을 더욱 세세하게 할 정도였다.

 

  암튼, 서론은 각설하고, 푸코 철학의 핵심은 무엇일까? 거창하게 '구조주의 철학'이니 어려운 말은 철학전공자들이 하도록 남겨두고, 내가 느낀 바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남들과 다르게 사유하기'였다. 비단 푸코만의 철학방법이 아니라 모든 철학자들의 기본소양일테지만, 푸코 철학이 남다른 까닭은 '철학'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연구하는 구조주의파 중에서도 가장 깔끔하게 '다른 시선'으로 철학적 사유를 시작하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사실 '고고학적 관점'이라는 것도 주류보다는 비주류에 가까운 접근방식이며, '목적'을 두고서 연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를 하다보니 목적에 다다르는 방식의 학문이라서 '연구의 방향성'이 대단히 자유롭기 그지 없을 수밖에 없다. 거기에 '상상의 나래'를 펼쳐서 '기존의 방식'이 아닌 색다른 접근을 선호하는 것도 푸코 철학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까닭이 되었다.

 

  물론, 그 때문에 시대적 흐름이나 앞뒤 맥락도 없이 '불연속적인 특이점'에 주목하고서 독특한 연구를 한 탓에 읽다가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아프기만 하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유발하기도 한다. 더구나 '비교대상'도 없이 독창적으로 펼쳐나가는 서술은 읽다 지쳐 돌아서면 까맣게 잊어버리는 '악순환의 반복'인 탓에 완독의 불가능성만 새삼 깨닫게 되기도 했다. 그런 탓에 '원서'는 진즉에 포기했고, 이 책 <서울대선정 인문고전60선>을 읽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지식의 고고학>뿐 아니라 푸코의 다른 저서들에 대한 내용까지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는 탓에 그 어떤 책보다 알찬 내용이 매력적이었다. 분명 이 책을 읽고 난 뒤에 '푸코 철학'에 대한 매력이 한층 더 높아질 것이고, 어려운 철학책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길라잡이가 될 것이다.

 

  사실, <지식의 고고학>에서 말하는 내용은 비전공자들에겐 '통곡의 벽'과 다를 바가 없다. 구조주의 철학의 서막을 열어준 '푸코 철학의 정수'라고 소개하곤 하지만, 정작 이 책을 읽고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독자는 몇 되지 않는다. 심지어 서울대 철학교수마저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어서 '정말 어려운 언표(언어)들의 나열'만 하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교수님이 제대로 이해한 다음에 <지식의 고고학>을 뒤쳐냈다면 정말 쉽고 재미나게 뒤쳐냈을 것이다. 하다못해 '주석'이라도 읽으면 바로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썼을 텐데, 그러지 못하셨으니 자신도 이해하지 못한 '난해한 뒤침'을 하고 말았을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만화' 형식으로 쓰인 <지식의 고고학>이 돋보이는 것이다. '원전의 난해함'을 푸코의 다른 책을 통해서 이해시키고, 다른 저자들의 책들을 친절히 소개하면서 <지식의 고고학>의 난해함을 쉽게 풀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의 매력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푸코 철학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복잡다단해서 접근하기 힘든 <현대철학>에 '접근성'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책 한 권이면 '구조주의 철학자들'에 대한 관심이 폭발할 것이다. 세계대전 이후 철학자들은 '인간의 이성의 위대함'을 과감히 내려놓기 시작했는데, 이는 인간이라는 '자존감'을 내려놓는 계기인 동시에, 그로 인해 불행에 빠진 인간을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첫 발'을 내딛은 철학자들이 바로 '구조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 과연 이들이 풀어놓은 '진실'은 무엇일까? 라는 궁금증이...나만 샘솟는 것일까(")a쩝

 

  암튼, 중요한 것은 '철학'은 암기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과거의 철학자들이 무슨 이야기를 했든 그건 절대 중요하지 않다. 오늘을 살아가는 '당신들의 철학'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감히 위대한 철학자들 앞에서 명함도 내놓기 부끄럽다고 철학을 포기할 까닭은 전혀 없다. 철학을 공부하다보면 자연스레 알게 되지만, 그 어떤 철학자도 '정답'을 얘기한 적이 단 한번도 없기 때문이다. 천재라 불리는 철학자들조차 '그럴 듯한 결론'을 내놓을 뿐이고, '그 결론'은 어김없이 '반박'되어 새로운 철학에 의해 '대체'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철학은 '암기'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저 '이해'하고 '공감'하면 된다. 그 이후부터가 가장 중요한 데, '나만의 철학'으로 재구축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에게 정치철학이 없다면서 구구절절 욕하는 분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의 철학은 무엇이냐?"고 말이다. 대통령이 정치를 잘해서가 아니다. 대통령이 정치를 더럽게 못한다고 느낀다면, 분명 당신이 '바라는' 정치철학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정치철학'이 무어라고 말하기도 쉽지 않고, '나만의 철학'이 무엇인지 당당히 밝히는 이들도 별로 없다. 그저 남이 못하는 것만 지적질할 뿐,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바람직한지 말하지 못한다. 심지어 아무런 생각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즐기면 그뿐이라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선 안 된다. 우리에게 철학이 절실한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다시 돌아와, <지식의 고고학>을 단 한 번 읽고 '푸코 철학'을 단박에 이해했다면 천재가 틀림없다. '언표'가 무엇이고, '변환'에 대해서 속속들이 파악하고 답을 내는 경지에 다다랐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그건 그저 <지식의 고고학>을 이해한 것에 그치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푸코에 대한 전문가'가 되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면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 어디 가서 자랑질을 할 것이냔 말이다. 아무도 '푸코 철학'에 대해 관심도 없는데 말이다. 그건 그저 '지식'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가 철학공부의 목적이 '지식암기'가 아님을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푸코의 연구방법'을 따라서 온갖 사물에 '과학적인 시선'을 투영하여 누구나 알 수 있는 객관적인 진실을 탐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할까? 그렇게 지식탐구의 지평을 열어서 더 많은 지식을 이해하고 해박한 전문가가 되길 바란다면 '거기서' 만족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진정한 목적으로는 어딘가 부족해 보인다. 그보다는 '철학의 이해'를 통해서 '자신만의 철학'을 구축하는 기회로 삼는 것은 어떨까? <철학책>을 읽고 영감을 받아 '나만의 철학'으로 삼고, '나만의 철학'을 발휘해서 '모두를 위한 삶'을 살아가는 디딤돌로 삼는 것이 좀더 그럴 듯 해보이지 않는가 말이다. 무릇 '책 속에 길이 있다'는 옛말은 바로 이런 뜻으로 풀이해야 옳을 것이다. 철학을 공부한 보람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철학은 사유에서 멈추지 말고 몸소 실천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철학이 나아가야 할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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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고려사 1 - 천하 통일과 고려의 개막 박시백의 고려사 1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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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자랑하는 '반만년의 역사'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지적을 많이 하곤 한다. 왜냐면 1차적으로 '사료'가 절대 부족한 탓이다. 고대사를 직접 다룬 사료들이 '고려시대'에 쓰여졌고, 그나마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제외하곤 거의 없다시피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조선부터 통일신라, 그리고 발해까지 '우리 역사'로 대외적인 인정을 받는 까닭은 '대외적인 사료', 다름 아니라 이웃나라들에 '우리 역사에 관한 기록'이 오롯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간접적이나마 우리 역사를 고증할 수 있었고, 우리가 '직접' 쓴 것이 아니기에 객관적인 사료로 인정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쓴 것이 아닌 까닭에 '역사왜곡'과 '날조' 등등 점차 저희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며 우리의 역사를 제것인 것마냥 치부하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역사'를 연구할 뿐만 아니라 '이웃나라의 역사'도 철저히 분석해야 하며, 더 나아가 '세계사의 범주'에서 우리 역사를 새로 조명하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역사공부는 그래서 중요한 일이다.

 

  그나마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사에서도 드물 정도로 꼼꼼하고 촘촘한 사료로 인정받고 있고, <승정원일기>와 더불어 지금도 계속 '연구'를 계속하고 있을 정도로 방대함을 자랑한다. 그런데 우리 역사에 '실록편찬'이 조선시대가 처음은 아니었다. 고려때 시작하여 조선이 이를 본받아 편찬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많은 전란으로 인해 오늘날까지 존속되지 못하고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단다. 만약 <고려실록>이 지금껏 남아 있었더라면 우리의 역사는 더욱 찬란하게 빛났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고려사'는 '조선사'보다 더욱 개방적이었고, 스스로 황제국이라 표방할 정도로 자주성을 띠었으며, 수많은 외적의 침략도 막아내고. 지금 우리나라를 일컫는 '코리아'라는 명칭도 바로 '고려'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고려사의 진면목'이 오롯이 담겨 있었을 <고려실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아쉽지만, 지금 우리가 '고려사'를 투영해 볼 수 있는 사료는 조선시대에 쓰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다. 박시백의 고려사는 바로 이 두 책을 바탕으로 삼아 저자 나름의 생각과 요즘 역사트랜드를 감안하여 시리즈를 펼쳤다. 비록 전편인 <조선왕조실록> 20권보다 현저히 적은 분량일테지만, 교과서에서만 접할 수 있었던 '고려사'를 당시의 주변국가들의 시대정황과 더불어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일 것이다. 빗대어 표현한다면, '드라마 몰아보기'로 집중력을 높여 살펴볼 수 있는 장점을 최대한 살려낼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 1권에서는 후삼국시대부터 시작해 고려 성종에 이르는 대장정이 펼쳐졌다. 역사적 흐름이 다소 빠른 듯 싶은 것도 '기록'이 현저히 부족한 탓이 매우 컸다. 그나마 사료 분량이 좀 많아지는 2권부터는 좀더 세세히 흐름을 살펴볼 수 있다니, 조금만 기다려보자.

 

  사료가 부족하면 '야사'의 도움을 받곤 한다. <삼국사기>가 놓친 내용을 <삼국유사>가 보충해서 우리 역사가 좀 더 풍요로워진 것처럼 말이다. 후삼국시대의 주요인물도 그렇다. 후고구려의 궁예와 후백제의 견훤(원래는 '진훤'이라 불려야 옳다고 했으나, 최근엔 '견훤'으로 통일한 듯 싶다), 그리고 고려로 삼국을 통일한 왕건, 이 세 명에 대한 '야사'가 '정사'보다 훨씬 더 널리 알려진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궁예가 애꾸눈이 된 사연, 견훤의 아버지가 지렁이(토룡)였다는 전설, 그리고 왕건의 조상이 용왕이었다는 내용 따위가 그렇다. 이는 명실공히 '영웅의 탄생'에 걸맞게 그러진 것이니 '정사'에서도 비슷한 뉘앙스가 풍긴다고 해도 그리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다.

 

  그러나 역사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시대적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안목이 중요하다. 통일신라가 왜 혼란스러워졌으며, 후삼국으로 어떻게 분열되었다가 고려로 재통일이 되었는가..하는 것들 말이다. 신라사회는 '골품제'로 인해 변화를 꾀하기 힘들어졌고, 성골에서 진골로 왕위가 넘어가면서 '왕위 정통성'은 점점 낮아졌고, 백성들의 불만은 점점 높아졌기 때문에 사회가 혼란스러워졌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진골간 왕위다툼'은 점점 빈번해졌으며, 중앙의 지배력에서 벗어난 지역부터 스스로 성주나 장군이라 칭하던 '호족세력'들이 점차 세력을 불려나갔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호족들 가운데 후고구려의 궁예와 후백제의 견훤, 그리고 궁예의 부하였다가 궁예가 몰락한 뒤에 '고려'를 세운 왕건이 '후삼국시대'를 이끌었던 것이다.

 

  후삼국시대라면 당연히 세 나라가 되어야 하는데, 통일신라는 이미 힘과 정통성 모두 잃어버린지 오래되어 후고구려(고려)와 후백제의 '먹잇감'으로 전락해버렸다. 하지만 '후삼국시대'를 살았던 백성들은 스스로를 '신라사람'으로 생각했으니 두 나라 모두 '신라'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허나 이런 신라를 함부로 대한 두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궁예'와 '견훤'이었다. 궁예는 속설에 '신라왕자' 출신이었다고 하니 왕위쟁탈전에 탈락하고 추방(?) 당한 원한으로 신라를 복수의 대상으로 삼았고, 견훤은 연이은 승리에 취해 자기 잘난 맛(?)에 서라벌을 점령한 뒤 '신라왕'까지 바꾸고 백성들을 죽이고 여인들을 겁탈하는 만행을 저질르며 업신여겼던 것이다. 이에 신라는 어차피 망할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평소에 신라에 유화적이며 존경하는 태도를 보여준 왕건에게 나라를 홀랑 바쳐버리고 만다. 이런 왕건의 기세와 백성들의 바람으로 인해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만다.

 

  어쩌면 통일을 이루는 비결은 '강력한 힘'을 과시하며 일거에 제압하는 방식보다는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인정받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보인다. 이는 다른 나라와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가까운 중국만 해도 통일의 위업을 보여준 제왕들이 대부분 '무력'을 바탕으로 적들을 제압하여서 패자의 자리에 오른 경우가 많은데 반해, 우리 역사에서는 '첨예한 갈등'을 잠시 내려놓고 '평화'를 사랑하고 '백성'의 안위를 먼저 보여준 인물이 '통일의 위업'을 보여준 예가 더 많아 보인다. 뭐, 압도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괴물(?) 같은 위인이 등장하지 못하고 상대를 확실히 제압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포용력(?)을 발휘하는 인물이 대권을 차지하는 경우가 흔한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암튼, 왕건은 우리 민족을 다시 하나로 뭉치게 만든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임에 틀림없다. 이제 왕건에게 통일보다 더 어려운 숙제가 남았으니, 바로 '호족세력'을 잠잠하게 만드는 일이다. 왕건도 호족출신이거니와 나머지 호족세력을 모조리 제압해버리는 힘이 모자란데도 '임금의 자리'에 올랐으니 걱정할 만도 하다. 그래서 왕건은 '혼인정책'을 내세웠다. 비등비등한 세력을 갖고 있는 '호족들의 딸'을 한집안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무려 29명의 부인이다. 자식들이 많은 것은 두말 할 것도 없다. 그런 탓인지 왕건의 자식들은 '근친혼'을 많이 했다. 즉, '엄마'만 다르면 혼인을 장려(?)했던 것이다. 이는 '외척세력'을 두지 않아 '왕권'을 유지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기도 했다. 조선 태종의 사례만 보아도 '외척'을 견제해야 '왕권'을 유지할 수 있는 임금의 자리는 무척 곤혹스럽기 짝이 없다. 그래서 고려는 성종 때까지 별다른 '외척세력'을 두지 않아 비교적 평온하게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평온(?)하게 2대 헤종, 3대 정종, 4대 광종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 모두 왕건의 아들들이다. 허나 광종대에 이르러서는 계속되는 호족들의 반란을 잠재울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왕권강화'를 도모한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비롯해서 '과거제'를 시행해 호족세력을 견제함과 동시에 반란의 조짐(!)이 보이면 가차없이 제거해버리는 '숙청의 시대'가 펼쳐지게 되었다. 하지만 뒤를 이은 5대 경종, 6대 성종에 이르러서는 포악한 정치(?)는 삼가고 '유교적인 정치'를 구축하고, 전시과를 손보는 등 경제적인 면에서도 진일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게 나라의 기틀을 완성해나갈 즈음에 고려의 북방과 바다 건너 대륙에서 변화의 조짐이 보이더니, 급기야 '고려'의 안보에 일대 위기가 몰아치려 한다. 바로 '거란의 침입'이다. 2권을 기대하시라.

 

  역사는 과거를 다루는 학문이다. 그런데 지나간 옛일을 공부해서 어따 써먹을 수 있겠냐는 원론적인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분들에게 대답해줄 적절한 비유가 있으니,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다. 흔히, 역사는 미래를 들여다보는 과거라는 '거울'에 빗대어 표현하며, 그 중요성을 설파하곤 한다. 실제로 '과거사실'을 들춰보며 '미래예측'을 하기 때문이다. 허나, 그런 '과거사실'을 제 입맛대로 '해석'하는 이들이 있으니, 바로 '현재의 권력자'다. 어떤 이는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다"라고 말하지 않느냔 말이다. 물론 모든 역사가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지만, 꽤나 설득력이 강한 메시지다.

 

  그렇다면 승자만이 '역사'를 기록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걸까? 거꾸로 말하면, 역사공부에 진지해지면 '승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현재의 지배자'가 되기 위해 역사공부에 진지해져야 할 것이다. 역사공부에 진지해지면 '독재자의 횡포'도 막아낼 수 있다. 독재자들은 늘 그렇듯이 아둔한 사람이 많은 곳에서 활개를 치고, 욕심에 눈이 어두워진 이들이 많은 곳에서 공포정치를 펼치곤 한다. 그러다 똑똑하고 공정하며 정의로운 민중들에게 무참히 박살이 나곤 한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인재가 '역사'에 밝은 명석하고 교양 넘치는 시민들이 아닐까 싶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과거를 퉁쳐버리고, 국민들의 이익과 쪽팔림은 헐값에 팔아버리고 '과거를 망각하게 만들어 현재를 지배하려는 무리'를 솎아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역사공부를 멈춰선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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