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중록 1 아르테 오리지널 1
처처칭한 지음, 서미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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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장르를 무어라 정하면 좋을까? 우선, '로맨스장르'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남녀 주인공이 도드라지게 등장하고, 스토리라인이 온통 둘 사이를 중심으로 자전과 공전을 하는 듯이 이어지니 마땅하다 할 것이다. 또한, '추리소설'이라 해야 할 것이다.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명탐정이 등장해서 사건에 감춰낸 내막을 들춰내고 범죄사실을 낱낱이 밝혀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로맨스추리장르>라니 시뻘건 살해현장에서 콩닥콩닥 러브스토리가 진행된다는 것이 사뭇 낯설기 그지 없다.

 

  아닌게 아니라, 첫 시작부터 요상한 '장르의 혼종'이 펼쳐지며 독자로 하여금 낯선 흥미로움을 선사하고 있다. 어디론가 급히 달아나는 여주인공이 등장하는 첫 씬부터 이미 '살해사건의 누명'을 쓰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원치 않은 혼인을 앞둔 처녀가 파혼을 하지 못하자 일가족 모두를 독극물로 살해하고 도망을 하였단다. 그토록 혼인을 하기 싫었던 것일까? 아님 몰래 숨겨둔 정혼자가 따로 있어 '사랑의 도피'를 한 것인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가족을 몰살시킬 정도로 끔찍한 짓을 저지르다니 뭔가 수상쩍은 냄새가 풍긴다. 그도 그럴 것이 살해를 저질렀다는 소녀가 어려운 사건도 척척 해결할 정도로 천재적인 사건해결능력을 갖춘 명탐정으로 소문이 자자했기에 더욱 그렇다. 그렇게 도망을 치던 그녀가 도망을 치다 '그'를 만났다.

 

  로맨스 장르라면 너무나도 뻔한 스토리인 '남자주인공의 등장'인 셈이다. 보통 <로맨스소설>에서 남주는 능력이 뛰어나기 마련인데, 이 소설에선 아예 '왕자'로 등장한다. 시대배경이 중국 당제국 의종 때이니 '황자'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당연히 잘 생긴 것은 기본이고, 부유함은 말할 것도 없는데, 한 번 '본 것'은 절대 잊지 않는 천부적 기억의 소유자로 인간이 갖춰야 할 모든 것을 갖춘 듯한 남주로 등장한다. 역시나 '로맨스의 정석'을 잘 따랐다. 물론 거기에 '차갑다 못해 냉혈한 싸가지'까지 소유하였으니 시크한 남주의 등장으로 로맨스소설의 기대치를 확 끌어올리는데 아주 성공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렇게나 완벽한 남녀 주인공의 인상적인 등장에도 불구하고, 내심 스토리 전개가 껄쩍스런 점이 없지 않아 있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면 '로맨스장르'가 '추리장르'로 갑자기 유턴을 하기 때문이다. 첫 등장이 너무나도 인상적이어서 그랬던 것일까? 너무나도 뻔한 로맨스의 정석을 밟은 탓일까? 너무나도 갑작스레 스토리라인이 '추리장르'로 급선회해버리고 만다. 그러면서 제 3의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시체 검안과 심지어 해부까지 좋아라하는 '검시관'이라는 로맨스장르에 걸맞지 않은 요상한 직업이 등장하고 만다.

 

  이렇게 이 소설 <잠중록>은 로맨스를 위한 예쁘고 멋진 남녀주인공의 썸타는 이야기를 곁가지로 두고, 살인사건의 단서수집 및 추리를 위해 '시체검시관'을 등장시켜 '본격추리'를 주된 이야기로 이끌어가는 한편, '시대극'이라는 형식을 따와 '대하장편소설'의 형식을 가미시키니, 이름하야 <대하장편추리로맨스>라는 묘한 소설이 등장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독자들의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다. 나 역시 이 책을 처음 접할 적에는 심각한 '장르혼종'으로 인해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는 소감의 리뷰를 썼을 정도였다. 허나 시간이 지나니 좋고 싫고의 문제를 떠나 '이야기' 본연에 빠져들어 감상을 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금 리뷰를 써내려가게 된 것이다.

 

  허나, 이 책이 보여주는 '추리기법'은 독자들에게 '추리'를 참여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훌륭한 점수를 줄 수 없겠다. 스토리 상에서 '주어진 단서'로는 절대 범인을 짐작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추리의 범주를 넘어선 방대한 시간흐름과 난삽한 전개로 인해, 설령 '단서'가 명백히 주어졌다하더라도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배경지식'이 없는 한 추리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황궁에서 벌어진 사건은 '황궁배치도'가 머릿속에 그려져야 하는데, 이런 '사전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왕비가 될 여인이 밀실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사건을 어찌 '해석'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더구나 새장속의 새를 사라지게 만드는 마술기법을 이야기 앞쪽에 잔뜩 '암시'로 깔아두고선 수백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람을 바꿔치기'한 방법을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저 사건의 진실규명과 진상이 밝히는 '명탐정의 나래이션'이 나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런 관계로, 이 책의 '추리장르'는 그저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 읽어가면, 그뿐이다. 절대 추리에 참여할 생각은 잠시 내려두길 바란다.

 

  이 책을 즐기기 위해선 '로맨스'에 집중을 해야 한다. 추리가 면면히 이어지는 와중에 두 남녀 사이에서 피어나는 사랑의 징후에 예의 촉각을 곤두세울 필요가 있단 말이다. 다시 말해, 명탐정 황재하(환관 양숭고)와 기왕 이서백(황자) 사이에서 스물스물 올라오는 애정행각과 썸을 타는 손발놀림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는 것이 500여 쪽에 육박하는 '대하사극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는 얘기다. 방대한 스케일이 '중국로맨스'의 특징인 것일까? 앞서 읽었던 <보보경심>도 꽤나 긴 스토리였는데...암튼, 아직 '중국의 것'은 많이 접해보지 않은 탓에 뭐라 단정지을 순 없겠다. 단지 <영웅문>이란 제목으로 소개되었던 '김용의 소설들'을 참고한다면, <사조영웅전>이나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소오강호>, <녹정기> 등등 대체로 '대하장편소설'의 면모를 갖추고 있는 점에서 '중국로맨스'로 그와 비슷한 분량일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물론, '무협지'와 '로맨스'라는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잠중록>만의 매력은 심심할 틈이 없게 만드는 '흡인력'이라 할 수 있다. 도도하게 이어지는 추리스토리라인을 따라가다보면 시대적인 비극이 만들어낸 인물들 간의 갈등이 쫀쫀하게 연결되어 있음에 감복하게 되고, 어지럽게 흩어진 단서들을 하나하나 모을 땐 '줌인'을 시켜 사건의 심각성을 한껏 부각시켜놓은 다음에 다 모은 단서들을 '줌아웃'시키며 전체적인 조망을 할 적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딱딱 들어맞는 완벽함에 감탄하게 만든다. 이런 감복과 감탄 사이에 황재하, 이서백, 그리고 주자진이라는 세 명의 등장인물들이 있다. 이들이 '감춰진 비밀'을 파헤치면 전체적인 이야기의 얼개가 선명해지게 되고, 비밀을 품고 있었던 '최강의 빌런(악당)'이 누구인지 밝혀지면서 '대하드라마의 여운'이 찐~하게 전해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땐 '이런 것'까진 느낄 여력이 없었는데, <청춘월담>이라는 드라마를 접하게 되면서 비슷한 듯 다른 '이야기 전개방식'을 서로 비교분석하는 재미를 느껴 다시금 읽게 되었다. 그 시간의 간극에 <외전>까지 출간되었으니 할 이야기가 더 많을 것 같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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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60선 55 : 존 롤스 정의론 NEW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60선 55
김면수 지음, 남기영 그림, 손영운 기획 / 주니어김영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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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이 열광하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돈'이다. 그렇다고 '부자'를 존경하는 것도 아니면서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들곤 한다. 그래서 엄청난 액수를 자랑하는 로또에 매주 빠져들고, 코인이 떡상하길 마냥 바란다. 물론 '확실한 미래'를 보장하는(?) 부동산과 주식에도 아낌없이 투자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돈을 벌어서 어따 쓰려고 그러는 것인지도 모를 정도로 몰려드는 모습에 안 쓰럽기까지하다.

 

  이토록 일확천금에 눈이 돌아가버릴 정도로 천한 민낯을 드러내긴 하지만 한국인의 가슴속엔 '공정'과 '평등'에 대한 열망도 함께 품고 있다. 그래서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는 이들에 대한 '반감'이 날로 심해지고 있으며, 그런 부정한 이들이 '사회지도층'을 장악하고 쥐고 흔드는 사회시스템에 깊은 '불만'을 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누가 뭐라해도 '평등'의 가치를 중요시 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물론 '빈부의 차이'를 부정하거나 '재능과 실력의 차이'로 인한 부의 분배가 불균형을 이루는 것, 자체를 부정하며 '평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누구라도 '노력'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는 공정한 시스템을 갖출 수 있는 '기회의 평등'을 바라는 것이다. 이처럼 공정과 평등의 가치가 합리적으로 이루어진 사회를 꿈꾸는 한국인들이 '정의'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나타내는 것은 어쩜 자연스런 일일지도 모르겠다.

 

  10여년 전,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민국이 들썩였던 것도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은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였는데, 용두사미처럼 흐지부지 끝맺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우리가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다시금 돌아볼 수 있는 '전환점'으로 삼기에 부족한 점이 없을 것이다. 물론, 흐지부지 끝낼 수밖에 없었던 원인도 밝혀내고 말이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샌델 교수가 말한 '정의'는 공리주의에 입각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을 첨가하여 존 롤스의 <정의론>으로 끝맺음을 한 것으로 풀이된다. 다시 말해, 기본적인 개론으로 시작한 학구적인 분석에 깊은 관심을 끌어내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샌델이 말한 '정의'가 곧바로 '부가 가져다주는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판면나자 우리 세대의 젊은이들이 깔끔하게 손절하고 말아버린 헤프닝이었다는 얘기다. 정리하면, '정의=부의 공평'이라는 공식과 거리감을 느끼자 공정과 평등을 갈망하던 우리 세대가 <정의론>조차 외면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특히나, '부유함'이 곧 '행복'이라는 공식조차 성립하지 않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된 요즘 대한민국을 보면서, 소위 '부자'라는 것들이 저지르는 불공정과 불평등, 더 나아가 굴욕과 굴종만이 유일한 살 길이라며 대한민국의 시곗바늘을 되돌리려하는 만행을 지켜보면서 우리가 왜 다시금 '정의'에 대해 신랄하고 뼈저린 반성과 지대한 관심을 두어야 하는지 깨닫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저 '먹고 살 걱정'을 내려놓고 소소한 여유와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것이 전부였는데, 애써 뽑아놓은 정부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들고 국민들을 불안에 떨게 만드는 작태를 보면서 분노를 금치 못했을 것이다. 더욱 뻔뻔한 것은 '저들'이 저지른 짓이 '무슨 잘못'인지를 인지하지 못하고 자화자찬으로 일관하며, '저들만의 천국'을 만들고서 또다시 국민 대다수의 '행복'을 담보로 삼아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다시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롤스의 <정의론>의 핵심은 '무지의 베일'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두 사람이 떡을 공평하게 나눠먹기 위해선 한 사람에겐 '칼'을 쥐어주고, 다른 한 사람에겐 '선택권'을 우선적으로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칼을 든 사람은 어느 쪽이든 '먼저' 선택할 권리가 없기 때문에 되도록 '똑같이' 나누려 노력할 것이다. 왜냐면 '선택권'이 상대방에게 있기 때문에 제 욕심을 부려 크기가 '다르게' 잘라버리면, 우선권을 가진 상대가 큰 것을 날름 가져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롤스는 바로 이러한 방법으로 '공평한 분배'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확신했다. 마찬가지로 '무지의 베일'이라는 것도 베일속에 가려진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위한 법을 제정할 때, 어느 한 쪽이 유불리를 따질 수 없을 정도로 '공평한 법'을 제정해야 자신에게 손해가 오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무지의 베일'이 작용하면 우리 사회는 '객관적'으로 보아도 공평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처럼 롤스는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 하나하나가 '선한 존재'라는 가정 아래 <정의론>을 집필하였다. 왜냐면 몇몇 나쁜 마음을 품은 사람이 있다하더라도 대다수의 선한 마음이 스스로 정화시킬 수 있는 시스템이 작동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꽤나 낙관적인 결론이긴 하지만 크게 틀린 말도 아니다. 다만 '현실성'이 좀 떨어질 뿐이다. 이렇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까닭이 실제로 작동되고 확연히 눈에 보이는 것으로 자신의 이론을 증명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도 않고 실체도 없는 '윤리적 가치'를 앞세웠기 때문이다. 냉혹한 현실에서는 잘 통용되지도 않고 '구속력'조차 없는 윤리도덕을 앞세워 <정의론>을 펼쳐냈으니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들릴 법도 하다.

 

  허나, 우리 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또한, '윤리도덕'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 안전한 치안을 자랑하고,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든 근간에는 '경제적 성장'도 한몫 했지만, 누가 뭐라해도 '선한 마음'을 바탕으로 한 '윤리도덕'을 우리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부끄러움'을 알고 잘못을 저질러도 '반성'할 줄 알며, 스스로 뉘우쳐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정의'를 말할 때 바로 이러한 '윤리도덕'이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기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양심에 찔리는 것이 있다면 감히 '정의'를 입에 올릴 수조차 없다. 설령 다른 이를 속일 수는 있어도 자기 자신까지 속일 수는 없는 법이다. 하긴, '염치'를 옆동네를 지나가던 똥강아지로 알고 허투루 여기는 못난놈들도 많긴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못난놈들도 '정의'를 운운하고 있지만, 진정한 정의로움을 위해서 반드시 솎아내야할 종자들이다.

 

  진정한 정의로움을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우선적인 방법은 '선한 마음'을 지닌 이들이 '힘'을 갖는 것이다. 스스로 윤리도덕을 통달해서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싶다면 저들밖에 모르는 '악당'들에게 밀리지 말아야 한다. 법 없이도 살 생각을 하지 말고, 그 '법'을 만들 힘과 집행할 힘, 그리고 제대로 운영되는지 감시할 수 있는 힘까지 장악해야 한다. 그리고 착한이들이 부유해져야 한다. '돈의 속성'이 점점 악해지고 있는 까닭도 악당같은 놈들이 돈의 힘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한 마음을 지닌 이들이 부유해져야 한다. 그리고 선한 힘을 발휘해야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

 

  물론, 이 또한 비현실적일 것이다. 이미 '부의 독점'이 명백해진 시점에 부가 가져다준 '모든 혜택'을 골고루 나눠갖는 '선한 영향력'이 순순히 실행될 것이라 낙관하고 있으니 말이다. 한마디로 떡줄놈은 생각지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 셈이다. 그렇다면 존 롤스의 <정의론>은 한낱 '그림속의 떡'이란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려는 롤스의 '방법론'이 현실적으로 실현가능성이 없어보일지라도 '정의, 그 잡채'를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누구라도 '정의로운 사회구현'을 말하지 않으면 권력을 가질 수도 없고, 부를 이룰 수도 없다. 정치인, 경제인, 그 누가 되었든 간에 '정의'를 참마음이 아닐지언정 입밖으로 내뱉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가 한목소리로 말해야 한다. "당장 정의를 실현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내놓고 실행하라"고 말이다. 그 말과 함께 우리는 <정의론>을 실행할 수 있게 된다. 비록 악당과 못난놈들이 실행하는 정의일지라도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선한 마음'을 그들 스스로 일구어나아가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우리 모두가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고 믿어의심치 않아야 가능한 일이다. 난 그리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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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사용법
캐럴 해이 지음, 강수영 옮김 / 인간사랑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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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남성이고, 페미니즘을 지지한다. 하지만 일부 페미니스트이 말하길, 여성이 아닌 '남성'은 결코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물론 남성으로서 듣기에 좋은 말은 아니다. 그러나 듣기 안 좋은 말을 들었다고 해서 빈정 상하거나,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번복하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면 여전한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들에게 주어진 '저항할 권리'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당연한 권리인데도 그런 권리가 있는 줄도 모르고 상처 입은 여성들이 아직도 많다는 것을 잘 알기에 '남성'인 나는 듣기에 기분 좋지 않은 말을 들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실제로도 그런 사회분위기여야만 한다고 인정한다.

 

  인류의 역사는 '여성'에게 불리하기만 했다. '여자'라는 이름만으로도 주눅 들도록 '강요' 당했고, 최근까지도 여성이기 때문에 '희생'은 당연시 되었다. 페미니스트들의 당찬 활동으로 '여성인권'이 성장한 것은 환영할 만 하지만, 아직도 '농담'이안 '장난'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을 비하하고 성적수치심을 일으키는 혐오스런 범죄(!)가 아직까지도 만연하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끔찍할 지경이다.

 

  우리는 여성 상위적이고, 여성만을 위한 '강도 높은' 페미니즘을 마주할 때 당혹스러워한다. 남성들은 이를 두고 '역차별'이라 반발하고, '양성평등'에 위배된다면서 노골적인 불만을 터트리지만 그간 당하기만 했던 '여성의 관점'에서 봤을 땐, '새발의 피'에 불과할 정도의 과격함일 뿐이다. 한편으론 '같은 여성'인데도 페미니스트들에 반감을 나타내고, 페미니즘을 '못생긴 여자들의 히스테리'로 취급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들의 주장은 '예쁜 여자'를 시기하고 질투해서 남성들의 관심을 받지 못한 분풀이를 하기 위해 '예쁜 여자'를 멍청이 취급하는 것이라며 페미니즘을 혐오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는 서로를 잘못 이해한 탓에 벌어진 헤프닝에 불과하다. 서로의 진심을 이해한다면 페미니즘은 결코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어떤 형태를 띠고, 어떤 활동과 주장을 하든 원칙적으로 '휴머니즘'을 표방한다. 진정한 양성평등을 이루길 바라고 '유리천장'이나 '기울어진 운동장' 따위가 완전히 사라지길 바란다. 그리고 그렇게 완벽한 세상이 되는 순간 '페미니즘'은 자연스럽게 소멸할 것이다. 남녀차별에 반대로 시작한 여성들의 운동이었기 때문에 애초의 원인이었던 '차별'이 사라지면 운동을 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날'이 찾아오기는 하는 걸까? 회의심이 들 정도로 '차별'은 심각하고, 차별로 인한 '문제'는 끝없이 벌어지고 있다.

 

  지금 이순간에도 전세계 어디선가 '원치 않은' 강간, '원치 않은' 결혼, '원치 않은' 임신과 출산, 그리고 이어지는 '강요에 의한' 육아와 가사로부터 해방되길 간절히 바라는 여성들이 울부짖고 있다. 거기에 사회적 활동의 제약은 더욱 끔찍하다. 비교적 사회활동이 자유로운 사회에서도 '고위직'은 온통 남자들이 차지하고 있고, 내놓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공정한 선발기준에 의해 '합격통보'를 받았음에도 2차, 3차 선발 등으로 교묘히 탈락의 고배를 마시게 만드는 음모가 버젓이 자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연애와 결혼, 임신과 출산을 하는 여성은 직장에서도 제대로 대접 받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이고, 여성을 '죄인 취급'하는 원인으로 작동한다. 같은 이유로 남자는 직장에서 더욱 열심히 일할 '찬스'로 작용하고, 승진 기회로 작동하는 것을 보면 '차별'은 좀더 분명해진다. 상황이 이럴 진데, 페미니즘을 욕할 수 있겠는가? 이젠 인류를 위해서 모두가 '페미니스트'가 되어야만 한다.

 

  딴에는 페미니즘 대신 '휴머니즘'이나 '여성운동'으로 부르는 것이 운동의 진정성을 위하고 남성의 참여도 높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많다. 아닌 게 아니라 나역시 '여성운동가'라고 부르는 것이 더 편했다. 공격적인 성향이 강한 페미니스트를 만나는 일보다 고역스런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든 남성을 예비성범죄자로 간주하고, 남성 혐오를 노골적으로 표방하기' 일쑤다. 누군가 그들에게 진정하라고 얘기하면, 자신들이 '정상'이고 당신들이 '비정상'이니 진정해야 할 대상은 우리가 아니라 '너희'라는 대답이 돌아올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니 그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여성에게 일방적인 희생과 강요를 요구하면서, 그런 것이 '여성스럽다'거나 '여성이 지녀야 할 올바른 몸가짐', 심지어 그 부당한 것을 '여성이 지닌 아름다움의 원천'이라고 '가스라이팅' 해온 것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당신의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아내와 자매, 딸에게 희생과 강요를 '아름다워지는 비결'이라며 권할 것이냔 말이다. 그리고 그런 부당함을 당연한 듯이 요구하는 '사회' 속에 당신의 딸과 자매, 아내와 어머니, 할머니를 욱여넣고 안심할 수 있겠냔 말이다.

 

  이제 '여성혐오'를 멈추어야 할 때다. 여성이기에 '차별'이 당연하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오직 '인간'이기에 누구나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에만 주목해야 한다. '양성평등'한 세상이 펼쳐지는 그날까지 페미니스트들을 응원해야 마땅하다. 그들 중 일부가 '남성혐오'를 이야기한다면 오히려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여성들의 불만에 '인류의 미래'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너무 비약적이라고 여긴다면, 인류 역사에서 '혁명'이 일어났던 때를 집중적으로 파헤쳐보길 바란다. 불만은 '힘 없는 자들'의 무기였고, 그 불만이 일시에 터져나왔을 때 세상은 늘 바뀌었다. 그리고 '혁명은 피를 부른다'고 말하곤 하는데, 여성들은 원래 피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인류의 절반인 여성이 '또 다른 피'를 부르게 된다면, 그 피는 여자의 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 것이다. 물론 페미니스트들이 혁명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너무도 당연한 '양성평등'을 바랄 뿐이다. 정말 다행이지 않은가.

 

인간사랑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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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3분 철학 3 : 서양 현대 철학편 만화로 보는 3분 철학 3
김재훈.서정욱 지음 / 카시오페아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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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철학을 왜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하려 한다. 왜냐면 우리는 지금 '철학도 없고, 뭣도 없는 정권'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검찰독재정권은 과거 군사독재정권보다 못한 점이 수두룩빽빽이다. 그 가운데 몇 개만 언급한다면, 첫째, 적어도 군사독재정권에서 '친일'은 자랑거리가 못되었다. 비록 친일을 한 놈들이 부족한 것 없이 누리며 살아갔을지언정 '대놓고' 자랑을 할 수는 없었다. 둘째, 과거 군사독재정권은 민주화에 역행하는 행보를 걸으면서도 '경제'만큼은 살려냈다고 자랑 섞인 으름장을 하곤 했다. 그리고 그런 경제성장이 수많은 국민들의 피와 땀의 결실이라는 사실만큼은 부정하지 못했다. 셋째, 후안무치의 뜻도 모르는 건지 연일 부끄러운 짓을 저지르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얼굴 낯짝을 들이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젠 일일이 열거하기도 귀찮다. 생각이라는 것을 할 줄 모르는 '무뇌충'마냥 무당의 혓바닥에 놀아나고, 그저 일본이라면 추켜세우고, 마냥 미국이라면 쩔쩔 매면서 노예근성의 끝판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답은 딱 하나다. '철학공부' 제대로 할 생각이 없다면 지구를 떠나야만 할 것이다. 이젠 국민들도 결단을 내렸다. "너님, 꺼져!"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어떤 철학을 공부해야만 할까? 서양철학? 동양철학? 한국철학? 그딴 카테고리는 아무 짝에 쓸모없다. 가장 현실적인 철학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을 넘어 선도국가로 쭉 나아가기 위해서 꼭 해야만 할 철학이기도 하고 말이다. 철학의 계보를 줄줄 읊는 것만으로 철학공부가 완성될 순 없다. '현실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철학이다.

 

  그 대안 가운데 '정치철학'은 세련되고 멋져야 한다. 왜냐면 언제나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정치는 매우 낡았다. 파벌싸움은 여전하고 극한대립만 내세울 뿐, '무엇'이 진정으로 국가와 국민을 위한 정치인지 실종된 상태기 때문이다. 명실상부 대한민국은 선진국으로 발돋움했는데도 '정치철학'도 없는 정치꾼들은 우파와 좌파로 갈라치기를 하고, 진보와 보수로 편가르기를 서슴지 않는다. 정말 멍청하기 이를 데가 없다. 세련된 정치인이라면 갈등을 벌이더라도 '그것'이 오직 대한민국의 국익과 국민들의 안전과 행복, 더 나아가 인류공영을 위한 평화와 번영을 위한 싸움이어야 한다. 그것에서 벗어난 부정과 부패, 비리로 얼룩진 '헐뜯기' 싸움은 둘째 문제다. 누가 더 더러운지는 '국익'도 챙기고 '행복'과 '평화'를 정착시킨 뒤에 다툴 사안이다. 지금 당장 사활이 걸린 '대한민국의 국익과 주권침해, 국민들의 생계와 행복'에 관한 문제를 도외시한 갈등 양상이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또한, 대한민국이 당면한 숙제는 북한과 '평화통일'을 이루고, 일본에게 '사죄와 반성, 배상'을 받아야 하며, 미국과 중국에게는 '속국'이 아닌 '동등한 파트너십'으로 관계를 정립하는 시급한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북한과 적대행위를 이어나가는 것은 절대적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북한에게 퍼주는 돈은 아까워하면서 전쟁발발시 대한민국 경제가 송두리채 폭망하는 것은 두렵지 않느냔 말이다. 시쳇말로 북한에게 '적대와 전쟁'을 포기하는 대가로 치르는 비용이 천문학적이라 하더라도 결코 아깝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통일을 한다면 북쪽에 있는 한민족과 할 것인가? 아니면 바다 건너 일본이란 이민족과 할 것인가? 도대체 '친일'을 한다는 분들의 논리는 북한과 평화통일에는 반대하고 일본에게 굴종하고 식민지가 되는 것에는 찬성하는 이상한 논리를 편다. 그것이 대한민국과 국민에게 어떤 이익이 있다는 말인가? 정말이지 미치지 않고서야 입밖에 낼 수 없는 망언이다. 거기다 미국과 중국 앞에서는 한없이 낮은 자세로 '굴욕외교'를 펴고 있다. 왜 당당히 '대한민국의 국익'을 얘기하지 못한단 말인가? 한국은 '수출'로 빌어먹는(?) 나라이기 때문에 미국과 중국 앞에 납작 엎드리지 않고서는 살아갈 길이 없는 것인가? 웃기는 소리 하지 말아라. 고객은 왕이 아니다. 그저 내 물건을 사간 '호구'에 불과할 뿐이다. 미국과 중국이 대한민국의 호구 노릇을 하지 않겠다면 다른 나라를 물색하고 더 좋은 조건으로 팔면 된다. 그걸 고민하라고 우리 국민은 '정치권력'을 빌려준 것이 아니냔 말이다. 그런데도 미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에게 가서 쩔쩔 매고만 있느냔 말이다. 우리 국민이 대한민국을 멋진 나라로 만들었지 않느냔 말이다. 제발 못난 짓은 그만하고, 제대로 된 일 좀 하란 말이다.

 

  물론, 이 책에는 대한민국이 당면한 '정치철학'에 관한 내용은 전혀 없다. 서양철학사 중에서 '현대철학의 핵심'에 대한 설명만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이해가 쏙쏙 될 수 있도록 만화형식으로 쉽고 재밌게 말이다. 서양 현대철학의 핵심은 '난해함'이다. 고대의 자연철학, 중세의 종교철학, 근대의 계몽철학까지 이어온 철학의 핵심은 '인간의 이성'이었다. 다시 말해, 절대적인 진리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이성이란 무엇인가'에 천착해왔었는데, 현대철학에서는 이런 '고정관념'을 와장창 깨버린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관점'만을 남기면서 다양한 '해석'을 시도한 것이기 때문에 한층 복잡해지고 난해해져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철학이 난해해졌다는 것의 이면에는 '정답은 없다'는 새로운 해석을 낳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법답안'이 없다는 얘기다. 이것도 정답일 수 있고, 저것도 정답일 수 있으니 무엇으로 '정답'을 삼을지 난감해졌지만, '모두'를 정답으로 하면 속시원히 해결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철학은 말이 많다. '모두'가 정답인 난감한 상황에서 '무엇'을 믿고 따라야 할지 갈팡질팡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현대인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처우를 받더라도 '믿고 따를 존재'가 있어 덜 불안했는데, 이제는 '그럴 존재'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결국 자기 자신만을 믿고 따를 수밖에 없는 '의지'가 굳세어야만 한다. 남에게 기대어서 편하게 사는 '노예'가 아닌 스스로 우뚝 서서 모든 이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자유인'으로 말이다. 그런 자유인들이 모인 사회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까닭도 어쩌면 당연하다. 내가 존중받고 싶으면 남도 존중해주어야 하는데,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잘못된 기준'을 내세우기 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철학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객관적인 기준'을 세우는데 골머리를 썩히게 되었다.

 

  이 책에 소개된 '공리주의', '실존주의', '공산주의', '현상학', '구조주의' 등등 모두 그런 '객관적인 기준'을 마련하기 위한 철학자 나름의 고민의 결과다. 그들의 고민을 읽어보면 '나름' 이해가 되면서 동시에 '절대공감'할 수 없는 부분들이 등장하곤 한다. 그렇게 공감할 수 없는 지점을 파고들어 '또 다른 철학'을 내세우고 또 이야기하는 것이 철학자들의 일과처럼 보일 정도다. 하지만 철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철학자들의 고민'이 아닌 '자기 철학'을 어떻게 내세울 것이냐가 될 것이다. 앞서 '정치철학'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도 마찬가지 원리다. 대한민국에 어울릴 만한 철학을 해야 한다는 것도 '정답'은 없지만, 우리 국민 모두의 이익을 위한 최선을 고민하는 모습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 고민의 결과가 '그들만의 잔치'로 끝나선 절대로 안 된다. 적어도 '그들'에 속하지도 못한 이들이 '그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어리석은 짓을 멈춰야 한다. 철학공부가 필요하다는 것도 바로 이런 '호구들의 깨우침'을 위해서 필요한 셈이고 말이다.

 

  철학도 없는 부정한 권력을 무도하게 휘두르는 족속들은 '깨어있는 시민들'에 의해 쫓겨나야 마땅하다. 홉스와 로크, 루소가 주장했던 <사회계약설>의 핵심도 바로 그것이다. 민중을 위한, 민중에 의한 정치를 하지 않는다면 저항할 권리가 '국민'에게 있다는 것 말이다. 문제는 쫓아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쫓아낸 이후'에 발생한다. 철학이 없는 시민들이라면 또다시 '무능한 정권'을 뽑을 것이기 때문이다.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당장 코앞의 이익을 위해서 아무에게나 '정치권력'을 나눠주는 호구천사가 되고 말 것이다. 또 그러고 싶은가? 그러지 않으려면 당장 '철학공부'부터 시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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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에이터 이코노미 - 유튜브부터 챗GPT까지 나만의 방식으로 경제적 자유를 획득하는 웹3.0시대 새로운 수익의 기술
안정기.박인영 지음 / 한빛비즈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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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빌론의 부자들은 돈을 벌고 싶으면 '쓰는 돈'보다 '버는 돈'이 많게 하라고 했다. 단 1000원이라도 내 손안에 돈이 남아돌게 하면 부는 자연스럽게 쌓인다고 말이다. 하지만 존 리는 이렇게 말했다. 돈을 벌기 위해 '사람'이 열심히 일해야만 했던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돈'이 돈을 벌게 만들어야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 주식투자의 필요성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내용이지만, 쉽게 공감이 가는 명언이어서 기억에 오래 남았다. 그렇다. 이제는 '돈'이 돈을 벌어들이는 자본주의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투자'도 곧 한계를 드러냈다. 영혼까지 끌어모아서 부동산, 주식, 심지어 코인에까지 투자를 했지만, '본전'이라도 건졌으면 싶은 심정인 분들이 많은 요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즘처럼 힘든 시기에 돈을 벌 수 있는 뾰족한 수는 없는 것인가?

 

  이 책은 '재능'과 '재미'에 정성을 쏟으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경제책이면서, '웹3.0 시대'를 맞아 새롭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하는 책이기도 하다. 쉽게 말해, 너튜브나 인별그램, 또는 블록체인, 생성형 AI까지 '크리에이터 이코노미(새로운 방식의 수익 창조자)'에 관한 책이다. 확실히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내용은 기존의 수익창출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이를 테면, 1000명의 찐팬을 가진 너튜버가 한 달에 1만 원 상당의 구독료나 상품 구매를 달성할 수 있다면 월매출 1000만 원의 수익을 보장받게 된다는 솔깃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초기)투자비용이나 각종 재료비 등등 '순수익'은 그보다 적을 수 있겠지만, '1인 기업'의 성격이 강한 요즘 트랜드로 볼 때, '마이너스 요인'은 별로 없을 것이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웬만한 대기업 부장급 이상의 수익을 벌 수 있는 새로운 시장에 펼쳐진 것이다.

 

  물론,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일단 '찐팬'을 유치하고, 1000명 이상 고정고객으로 모으기까지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하며, 성공적인 수익창출에 도달한 이는 '소수'에 불과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대부분은 월 3~40만 원 정도의 '부수입' 정도에 그쳐 '투잡'을 뛸 수밖에 없는 것이 냉혹한 현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점에서 무한한 가능성이 존재하고, 단박에 성공하는 경우는 드물긴 하지만, 언제든 '떡상'할 수 있는 잠재력은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매력적인 사업 아이템이라 하지 않은 수 없다. 더구나 '생성형 AI'가 점점 발전하면서 '특별한 재능'이 없어도 '번뜩이는 아이디어'만으로 누구나 쉽게 매력적인 창작물을 쏟아낼 수 있기 때문에 성공 가능성은 늘 활짝 열려 있는 셈이다.

 

  실제로 AI가 쓴 소설이나 만들어낸 음악이 '상'을 수상하거나 대중들의 '관심'이 폭발하는 경우가 점점 흔해지고 있다. 심지어 애초에 AI가 창작한 것인줄 모르고 수상을 했다가 나중에 취소를 하거나 참가조건을 '제한'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만하다. 단지 '인간의 아이디어'만 입력했을 뿐인데 척척 '그럴 듯한 창작물'을 쏟아내는 AI를 보면, 디스토피아적인 무서운 생각들이 연상되기도 하지만, 딴에는 누구나 쉽게 '크리에이터 이코노미'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셈이 된다.

 

  웹3.0 시대에는 누구나 '창작자'가 되면서 동시에 '소비자'가 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누구라도 쉽게 '창작물'을 만들어 팔아 수익을 창출할 수 있고, 그렇게 벌어들인 수익으로 '다른 창작자의 것'을 소비하는 세상이 펼쳐지게 되는 셈이다. 물론, 아직까지 안정된 시장을 형성하지 못하고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지만 말이다. 예를 들어, 블록체인 형태의 '코인'이 실제로 통용되는 화폐로 환산할 때, 롤러코스터 마냥 떡을 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이 우려스러운 점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꽤나 안정화된 형태로 원활하게 거래되는 것들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에 크게 불안해할 요인은 점점 줄어들 것으로 전망할 수 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생소한 경제'인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MZ세대'들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공간'이라는 점이다. 오프라인보다는 '온라인'에 더 익숙한 계층에겐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는 사실이다. 한편, 이미 '크리에이터 이코노미'의 선발주자들이 시장을 점유하고 독식하고 있는 상황에서 '레드오션'일 거라는 우려도 있다. 그렇지만 그 '레드오션'이라는 곳에서 날마다 '새로운 스타들'이 발굴되고, '저마다 재능'을 뽐내는 '재밌는 친구들'이 넘쳐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벼락을 맞고 기적처럼 살아난 사람이 또 다시 벼락을 맞았는데도 살아나는 미라클한 '확률'이라고 소개하는 로또 당첨자가 매주 등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이미 '레드오션'이라는 분석은 옳지만, 웹3.0 시대에 펼쳐질 새로운 경제는 언제나 '블루오션'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늘 새로운 것을 찾고 기발한 것에 열광을 하니 말이다.

 

  이미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에 접어든 나로서는 이 책의 내용을 십 분 이해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도티가 누군지도 잘 모르고, 마인 크래프트를 해본 적도 없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도티에게 열광하고 기꺼이 '수익'을 올리게 해주는 열성팬들이 존재한단다. 그런 찐팬들에 의해 도티의 월수입은 상상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액수라고 한다. 올드한 독자인 나로선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며, 너튜브조차 즐겨보지 않기에 '구독'과 '좋아요'가 어떤 효과를 일으키는지도 실감을 할 수가 없었다. 단지 엄청난 수익을 낼 수 있다는 얘기만이 솔깃할 뿐이다.

 

  그렇다고 '본업'을 팽개치고 너나할 것 없이 '크리에이터 이코노미'에 탑승해서는 안 될 것이다. 분명 '재능'을 넘어선 '노력'이 필요한 작업일 것이고, '성공'이라고 할 수 있을 때까지 지난한 과정을 거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망둥어처럼 남을 '따라하기'만 한다고 수익이 보장될 턱도 없고 말이다. 그럼에도 매력적인 시장인 것만은 분명했다. 나만의 재능을 살려 재미를 솔솔 뿌려서 '찐팬'을 확보하기만 한다면, '고정수입'이 생긴다니 말이다. 혹시 '나의 리뷰'도 열심히 쓴다면, 열성 구독자가 생기고, 그래서 점점 늘어난다면 '광고주'들의 관심을 얻어 수익을 창출할 수 있거나, 아니면 '출판사'의 기대심리를 자극해서 홍보용 도서를 던져주지 않을런...쿨럭쿨럭

 

  암튼, 우리가 살아가는 동시대에 '웹3.0 시대'가 펼쳐졌다고 한다. 단순히 '정보제공'만 하던 '웹1.0 시대'를 넘어 '쌍방향 소통'이 가능해지고 '거래'까지 성사시킬 수 있는 시대가 펼쳐졌다고 한다. 이 시대를 슬기롭게 헤쳐나가려면 '번뜩이고 참신한 아이디어'만 있으면 된단다. 기존에 없던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원작자'가 아니더라도, '원작물'을 새롭게 가공해서 '또 다른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재주만 있어도 얼마든지 수익창출을 해낼 수 있단다. 이전에는 무분별한 '카피'로 저작권을 방해하고 '원작자'에게 돌아가야 마땅한 수익을 가로채는 얌체들이 많아서 불공정한 일이 많았다지만, 웹3.0 시대에는 애초에 '원작자'에게 소스를 내려 받아 '2차 제작'에 들어가기 때문에 '수익배분'에 있어서도 불공정을 줄일 수 있다고 하니 오히려 더 많은 '창작자'들에게 관심을 끄는 것이 더욱 유리하게 될 것이다.

 

  새롭게 펼쳐질 미래를 상상하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적극적 참여'할 여력이 줄어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진입장벽'이 너무 높아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만의 장점이 있듯 늙은 세대들에겐 '경험'이라는 녹록치 않은 무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걸 수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게 만들 수만 있다면 '성공'도 꿈은 아닐 것이다. 이미 '박막례 할머니'라는 성공케이스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렇다면 미래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셈이다. 새롭게 펼쳐질 세상에 즐겁게 뛰어들 준비만 되어 있다면 말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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