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60선 56 : 슈뢰딩거 생명이란 무엇인가 NEW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60선 56
신현정 지음, 박종호 그림, 손영운 기획 / 주니어김영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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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학문의 경계'를 부수는 과학책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가 과학발전사의 '패러다임(틀)'을 깨는 결정적 열쇠가 되었다면 슈뢰딩거의 책은 물리학자가 생물학책을 쓰는 것이 당연하다는 '통섭의 열쇠'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마치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문구처럼 '새는 알껍질을 깨고 나온다'는 평범한 진리가 '틀안에 박힌 지식'에 머물지 않고 '지식의 경계'를 허물고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지름길을 선사한 셈이다. 실제로 슈뢰딩거 이후로 수많은 과학자들이 '자신의 전공분야'를 뛰어넘어 다양한 학문연구를 한 덕분에 현대과학은 진일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생명이란 무엇인가>는 지금까지도 '과학자들의 필독서'로 자리매김을 하며 꾸준히 읽히는 책이라 한다.

 

  물론, 과학책은 시간이 흐르면 '낡은 지식'이 되어 쓸데없게 되어 버리곤 한다. 스마트폰 출시 이후에 더는 고물과 다를 바 없는 '플립폰'을 쓰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 '영리한 폰'이 등장하고나니 더는 전화기가 '전화와 문자'만 보내는 통신수단으로 그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안테나 뽑아 다이얼을 띠띠 누르던 그 시절의 낡은 폰을 오늘날에는 거들떠 보지 않는 것이 상식일테다. 그런데 여느 폰과 달리 '새로운 폰'을 발명하는데 유용한 팁을 선사하는 폰이 있다면 어떻겠는가? '영리한 폰'을 넘어 '초월하는 폰'을 연구하는데 기반이 될 영감을 선사하는 폰이 있다면 꾸준히 쓰지 않겠느냔 말이다. 일반 사용자는 쓰지 않을지라도 '핸드폰 발명가'라면 기꺼이 읽고 또 읽으면서 발명의 초석을 다질 것이 틀림없다.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가 바로 그런 책이다. 과학자들에게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샘솟게 만드는 영감책 말이다.

 

   사실,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원전은 오늘날의 관점으로 읽었을 때 '오류'가 많은 옛날책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데도 70년도 훌쩍 넘은 이 책이 현재의 과학도들에게 필독서가 된 까닭은 바로 '과학의 경계'를 허물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슈뢰딩거는 물리학자(양자역학)였다. 그런데도 물리학자의 눈(관점)으로 '생명의 비밀'을 파헤치겠다고 뛰어들었고, 그의 시도가 수많은 과학자들에게 '아이디어'를 선사한 것도 사실이다. 유전자의 비밀을 파헤친 왓슨과 크릭도 사실은 '생물학자 출신'은 아니었단다. 원래는 평범한 화학자였는데 슈뢰딩거 이후에 '새로운 영감'을 얻어 DNA의 나선구조를 기가 막히게 풀어낸 공로로 노벨상을 거머쥐게 되었단다. 이처럼 책 자체는 별볼일 없는 내용이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널리 읽히는 까닭은 바로 '통섭의 힘'을 깨우칠 수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통섭이란 그저 해박한 지식을 뽐내며 이것저것 모두 통달한 지식을 쌓는 단순한 작업이 아니다. 과학의 눈으로 예술을 파악하고, 시인의 눈으로 날카롭게 사회비판을 할 수 있는 힘이 바로 '통섭'인 것이다. 교육계에서도 이런 힘을 아이들에게 깨우치기 위해 '통합교과'를 기반으로 스토리텔링을 하고, 스팀수학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배우는 처지에 놓인 이들이 '학습부담'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한 가지 전공에 빠삭해지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언제 두세 가지 전공지식을 쌓고 실력을 뽐낼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런 까닭에 '통섭의 힘'은 결코 학습자의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어서는 효과를 볼 수 없다.

 

  마치 '뉴턴의 사과'처럼 우연히 뉴턴의 어깨 위에 떨어진 사과에서 영감을 얻어 '만유인력의 법칙'을 떠올린 것처럼,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처럼 피곤한 몸을 욕조에 담그는 우연한 일상에서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얻는 것처럼 '통섭의 힘'을 길러야만 한다. 결코 이학문 저학문 '학문의 언저리'에서 어슬렁거리며 방황하는 수준에서는 도저히 발휘할 수 없는 성격인 것이다.

 

  또한, 고수는 고수끼리 통하는 법이다. 요리에 통달한 요리사는 접시 위에 요리를 뛰어넘는 예술을 담아내는 경지에 오르기 마련이다. 어디 예술뿐인가. 뛰어난 요리사는 '영양학'을 연구한 박사보다 더 뛰어난 과학적 지능을 뽐낼 수도 있다. 이런 '학문의 경계'를 뛰어넘는 인재들은 의외로 많다. 명문대 출신 가수가 많고, 특히 수학에 능숙한 공대출신 가수가 뛰어난 가창력과 독특한 음색, 기발한 연주법으로 대중음악의 지평을 넓히는 경우도 대단히 많다.

 

  요즘에 '투잡'은 기본이다. 한가지 재능으로 평생을 먹고 살기가 참 힘든 세상이란 말이다. 이런 시절에는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다 해봐야 한다. 요즘 아이돌 가수도 노래만 잘해서는 부족하니 작곡도 할 줄 알고, 연기도 할 줄 알고, 예능도 잘 해야 한다. 요컨대 만능엔터테인먼트쯤 되야 성공하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슈뢰딩거는 참으로 대단한 업적을 남긴 셈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열심이어야 하는 건 '기본'이다.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려는 욕심만 키우다보면 이도저도 아닌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과학도가 아닌 '일반독자'라면 <생명이란 무엇인가>보다는 이 책을 추천한다. 과학적인 지식과 영감보다 더 한 것을 얻게 될 수 있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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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 1987년 제11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이문열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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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문열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쓸 당시만 해도 박정희와 전두환의 '군사독재정권'이 한창이었다. 김재규의 총부리가 박정희를 향하고 '서울의 봄'이 잠시 잠깐 찾아왔었지만, 민주주의는 곧바로 찾아오지 못하고 다시금 '군사정권'이 들어서 '유신독재의 그늘'은 더욱더 짙어질 뿐이었다. 그런데 이 책이 쓰여지고 난 뒤에 서울을 비롯해 전국에 '6월항쟁'의 목소리가 높아졌으니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어딘지 의심쩍은 구석이 없지 않다. 과연 이문열은 '민주화 투쟁'을 위해 이 책을 썼던 것일까?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이승만 독재 아래에 놓인 '자유당정권 시절'이다. 오직 힘과 권력을 가진자들만이 떵떵거리며 잘 살 수 있었던 시절이었으며, 권력에서 밀려나면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던 암담한 시절이었는데, 그런 권력조차 정당하지 못한 부정한 방법으로 차지한 무리들이 떠세를 부리던 시절이었으니 얼마나 참담한 시절이었을까. 그런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시골의 초등학교'를 주된 배경으로 '급장 엄석대와 전학생 한병태'의 대결이 중요 줄거리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이런 이야기구조로 보았을 때, 한병태의 외로운 싸움을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민주투사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병태는 승리하지 못하고 끝내 석대에게 굴복하고 달콤한 굴종의 열매를 맛보는 것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어른이 되어서도 '경제적 풍요'를 누리지 못하고 잔인한 패배감을 맛보는 결말을 보면서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잘 드러낸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니,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놓은 이들이 이 작품을 볼 때 '미완의 민주주의 혁명'의 아쉬움이 진하게 묻어난다고 느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탓에 이문열은 오래도록 '민주화 투쟁'에 긍정적인 시선을 지닌 작가로 오해도 했었는데, 2008년 촛불혁명 당시 "나는 보수주의자다"라는 양심고백으로 수많은 독자들을 뜨악하게 만들기도 했었다.

 

  그 뒤에 다시 읽어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과연 '민주화 투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저 그런 작품이라는 사실을 깨우칠 수 있었다. 왜냐면 이 작품의 결말에서 한병태가 현실의 비참함을 겪으면서 뼈저리게 '석대가 만든 세상'을 철저히 그리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재자와 다를 바 없었던 엄석대가 만든 세상이 그토록 그리운 까닭은 비록 더러운 세상일지라도 석대에게 굴종을 바치기만 하면 '달콤한 열매'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단정지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유로운 영혼이니, 민주적 방식의 정의로움이니 다 부질없고 그저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는 것만이 부러울 따름인 너덜너덜한 존재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하긴 누가 '경제적 풍요'를 마다할 것인가. 조금쯤 더러움과 타협을 하고 부당한 권력일지라도 넙죽 엎드리는 굴욕을 살짝 견디기만 하면 넓디 넓은 고층아파트에서 살 수 있는 여유를 누릴 수 있으며, 고급외제차를 몰고 다니는 호화로운 생활을 즐길 수 있고, 어딜 가서든 갑질을 하며 융숭한 대접을 만끽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깟 양심이 뭐가 대수라고, 그깟 자존심이 뭣이 중하다고 애지중지 끼고 살아야만 한단 말인가. 조금만 비굴해도 넉넉하게 살 수 있고, 사알짝 굴욕을 당해도 '경제적 풍요'를 보장받을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용기가 샘솟게 될테니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한병태가 석대에게 굴종한 뒤, 그가 누린 '달콤한 열매'는 다름 아닌 다른 학생들이 석대의 횡포가 무서워 갖다 바친 '상납과 뇌물'이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토록 원하던 '달콤한 열매'의 진실도 과연 무엇이겠느냔 말이다. 부정한 방법으로 권력을 찬탈한 '독재정권'에게 무참히 빼앗긴 서민들의 피와 땀이었을 것이다. 독재자와 그 추종자들이 누리는 경제적 풍요라는 것이 사실은 열심히 살아가는 착하고 평범한 서민들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몫을 가로채서 제 호주머니를 그득 채운 '사악한 욕심'이 아니겠느냔 말이다. 한병태는 바로 그런 부당한 방식으로 빼앗은 '경제적 풍요'를 그리워하고 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픈 현대사속에서 '일그러진 영웅'을 그리워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건 아닌지 돌아봐야 할 때다. 남들은 어찌 살든 '나만 잘 살면 돼'라는 심보가 바람직한 것이라 여기고 있는 건 아닌가?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도 '경제적 풍요'만큼은 절대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것이 아무리 부정한 짓을 통하더라도 '경제적 풍요'만 보장해준다면 적당히 타협하고 누리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풍요가 '착하고 선량한 이들의 몫'을 빼앗은 결과였대도 그랬겠냐고 되물으니, 그건 아니란다. 제 이익을 위해서라면 나라를 팔아먹어도 좋고, 자존심도 버리고 강자에게 굴종하며, 힘 없는 이들의 몫을 강탈하는 파티에 '초대장'을 받는다면 아무런 거리낌없이 참석하겠냐고 물으니, 그건 아니라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결코 '경제적 풍요'를 누릴 수 없다고 일깨워주니, 일순간 의아해 한다. 너희들은 '석대가 마련한 잔칫상의 진실'을 알고 참석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이것이 바로 한병태가 괴로워하는 까닭이다. 석대를 비롯한 '악인들의 세상'에 몸 담을 생각은 추호도 없으면서 그들이 만들어준 '경제적 풍요'를 탐하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병태는 석대가 만든 세상을 그리워한다. 석대는 일그러져 있을지언정 '영웅'이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 일그러진 영웅을 알게 모르게 우리 모두 그리워하고 있을 거라며 말이다. '경제적 풍요'를 가져다준 그 영웅이 다시 돌아온다면 기꺼이 맨발로 환영할 거라면서, 지금의 비참하고 빈곤한 생활을 벗어나게만 해준다면 영혼이라도 팔겠다고 선언한 것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나는 싫다. 내가 누리는 풍요는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열심히 살아온 결과라고 믿고 싶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뿐인 목숨을 아끼지 않고 어려움을 함께한 이들이 많았기에 지금의 풍요를 누리고 있는 거라고 믿고 싶다.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굴곡진만큼 21세기 대한민국이 선진국을 넘어 선도국가로 우뚝 설 수 있는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다. 이런 대한민국일진데, 나라를 망치게 만드는 것으로도 모자라 나라조차 망신살이 뻗치게 만드는 세력이 아직도 떠세를 부리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리고 그런 죄 많은 장본인들을 그리워하고, 그들이 남긴 찌끄래기도 못 먹어서 안달이 난 못난이들이 많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영웅은 결코 '일그러진 모습'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못난 영웅을 쫓아낸 경험이 많다.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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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수상한 비타민C의 역사 - 아주 작은 영양소가 촉발한 미스터리하고 아슬아슬한 500년
스티븐 M. 사가 지음, 김주희 옮김 / 한빛비즈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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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비타민C'를 채내에서 스스로 합성할 수 없다. 그래서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통해 반드시 섭취해야만 한다. 그런데 인류는 오랜 세월동안 '비타민C 부족'으로 인해 질병에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꼭 필요한 필수영양소인데도 아주 적은 양만 필요했기 때문이다. 섭취 방식도 아주 간단했다.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식사할 때 조금씩 곁들여서 먹어주기만 하면 충분한 양을 섭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항해시대'에 접어들면서 이 필수영양소가 부족해지면 어떤 끔찍한 일을 겪게 되는지 알게 되었다.

 

  아니, 사실은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그 '원인'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과거에는 질병에 걸리는 이유가 '신이 내린 형벌(천벌)'이라거나 '더러운 공기(미아즈마)' 때문이라고 맹신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비타민C 부족'으로 생기는 질병이 유독 '낮은 신분'에게서만 발병한 탓에 먼 바다를 항해하면서 더럽고 불결한 환경에 놓인 '하급 선원'들에게 으레 생기는 질병이려니 하면서 그저 방치했기 때문이란다. 그 질병이 바로 '괴혈병'이다. 이 병에 걸리면 무기력해지고 쉽게 피곤해하며, 피부에 반점이 생기며 가려움증을 유발하다가 잇몸이 붓고 피가 나며 끝내 이가 빠져버려 음식조차 씹어먹을 수 없을 정도의 통증에 시달리다 죽음에 이르는 괴상한 병이었단다. 이 병으로 인해 선원을 몽땅 잃어버리고 선장을 비롯한 소수의 인원만 항구에 돌아오는 일을 겪으면서도 정작 '발병의 원인'을 몰라 의학계에서도 대처방안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했더란다.

 

  그런데 '괴혈병 증세'를 보이는 선원들에게 '오렌지'를 보급해주면 증세는 급격히 완화되었고, 선원들에게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보급'한 배에서는 괴혈병을 앓지 않고 먼 바다를 항해하고 되돌아오는 '경험담'이 널리 퍼지게 되었단다. 실제로 세계일주에 성공한 '제임스 쿡 선장'의 선원들은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선원들에게 부족하지 않게 보충해주어 '높은 생존률'을 보여주기도 했더란다. 그런데도 정치인들과 의사들은 뱃사람들의 이런 경험에 주목하지 않았고, 바스쿠 다 가마의 신항로 개척 이후로 400여 년간 '괴혈병'은 원인도 모른 채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는 무서운 질병으로 악명을 끼쳤단다.

 

  괴혈병과 비슷한 질병으로 '각기병'이 있는데, 이 질병 역시 '비타민 부족'으로 인한 질병이었다. 이 질병을 연구한 학자는 각기병을 일으키는 '병원균'이 따로 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워 연구를 시도 했지만 각기병에 걸린 닭들을 아무리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아도 병을 일으키는 세균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실험용 닭들에게 '우연한 실수'로 백미가 아닌 현미를 주었더니 '각기병'에서 회복이 된 것을 발견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발견을 한 이후에도 한동안 '각기병의 원인'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다 나중에서야 '비타민 부족'이 원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까닭인 즉슨, 백미에는 없는 '씨눈'이 현미에는 있었고, 바로 이 '씨눈'에 많은 무기영양소(비타민B1)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한 덕분이었다. 이것도 우연히 말이다.

 

  이처럼 '비타민 부족'이 괴혈병과 각기병 등과 같은 질병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밝혀내기까지 오랜 시일이 걸렸단다. 그 까닭은 매우 적은 양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었고, 그 때문에 꼭 필요하다는 '상식'으로 전환하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만 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간에 우리 몸에 꼭 필요한 '비타민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런데...'꼭' 필요하다는 중요성을 깨닫게 되고 난 뒤에 인간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결핍으로 생긴 질병을 극복해주는 '영양소'가 어느새 '만병통치약'이라는 새로운 신화를 써내려갔기 때문이다. 이런 그릇된 믿음에는 한 사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로 '라이너스 폴링'이다. 비타민C 연구로 두 번이나 노벨상을 수상한 화학자이기도 하다. 이런 명석한 과학자가 '고용량 비타민 복용법(메가도스)'을 고안해 전세계 선진국에 또 다른 질병을 선사하고 만 것이다.

 

  먼저, 비타민C의 효능부터 정리해보자. 대표적인 효능은 면역력 증진, 항산화 기능으로 인한 염증 완화다. 이런 효능 덕분에 비타민C를 꾸준히 복용하면 면역력을 높여 '감기 예방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인데, 여기서 더 나아가 '항산화 효과'는 부풀려질대로 부풀려져서 외부 오염물질의 노출로부터 세포를 보호하고, 콜라겐 합성을 도와 신체조직을 튼튼하게 하며, 심혈관과 폐기능을 높여줘 심장과 폐를 보호하는 영양소로 소개하고 있다. 거기에 자외선으로 망가진 피부세포를 되살리는 효능도 있어 피부노화방지, 주름개선, 나아가 화상으로 인한 피부손상까지 놀랍도록 원상복구시켜주는 역할을 한다고 광고하고 있다. 이렇게나 좋은 영양소이니 많이 복용하면 할수록 좋다는 논리인데, 아무리 그래도 많이 복용하면 부담스러울 것이라는 우려섞인 목소리에는 '우리 몸이 필요한 만큼 쓰이고 난 나머지는 소변으로 말끔히 배설된다'고 명쾌하게 설명한다. 한마디로 부작용은 전혀 없다는 소리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우리 몸에 꼭 필요한 비타민C의 용량은 125밀리그램 정도이다. 이것도 개인마다 차이가 있으며 성인기준 100밀리그램 정도면 최고용량에 다다르고, 하루 평균 50밀리그램씩만 섭취하면 차고도 남는 용량이란다. 그 이상으로 섭취한 용량은 거의 대부분 소변으로 배출되어 버려진다. 여기서 버려진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배설해야만 하는 이유 말이다. 몸속에 과다하게 간직하고 있으면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결석'이 생기기 마련인데, 비타민도 과도복용시 요로결석이 생기는 주요 원인이 되곤 한다. 그밖에도 '신장기능'이 저하된 환자에겐 콩팥을 혹사시키는 결과를 낳아서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도 있다. 또한 약산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위장관기능이 약한 사람이 장기복용을 할 시에는 '소화기 질환'을 유발시킬 수도 있단다. 이런데도 비타민C를 아무런 부작용이 없는 '만병통치약'으로 광고할 수 있을까?

 

  심지어 폴링박사는 치명적인 암환자에게도 '메가도스'를 권장해서 무리를 일으키곤 했다는데, 50밀리그램으로도 충분한 비타민C를 3000밀리그램부터 시작해 12000밀리그램까지 늘려나가는 방식으로 암세포만 골라서 말려죽일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암환자를 상대로 '임상실험'을 해야 살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여 빈축을 샀다고 전한다. 실제로 비타민C가 정상세포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고 암세포만 골라서 죽이는 기능이 있다는 실험보고서가 있기는 하단다. 하지만 아주 극미한 조건 하에서 그런 결과를 보여주었으며, 실제 임상실험에서도 그 효과는 거의 기대하기 힘들다는 결론이 난 상황이란다. 그런데도 폴링 박사는 '메가도스 치료법'을 맹신에 가깝도록 주장하며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켜 무리를 일으킨다고 한다.

 

  결론만 이야기해서 '비타민 과다 복용'은 긍정적인 효과보다 부작용이 더 크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환기시킬 필요가 있다. 심지어 우리는 일상적인 식단에서 충분한 양의 비타민을 섭취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영양제'로 따로 복용할 필요는 더욱더 없다고 한다. 하루 100밀리그램이면 충분한 양이고, 주먹만한 크기의 오렌지 하나에 90밀리그램 이상을 함유하고 있고, 살짝 익힌 브로콜리 한 컵 정도에도 70밀리그램 이상 함유하고 있단다. 특히 감자의 경우엔 불에 익힌 조리법으로도 감자속에 함유된 '비타민C'가 손상되지 않으니 감자를 곁들인 식단을 먹으면 비타민 부족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괴혈병이나 각기병은 '이름'만 전해지는 질병으로 의료계에 종사하는 사람일지라도 그런 질병을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없는 실정이라고 한다. 현재 내전이 일어나고 있는 최극빈국에서나 들어볼 법한 질병이며, 웬만해선 경험하지 못할 질병을 예방하기 위해 '비타민C'를 따로 복용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 팩트다. 또한 감기예방이나 암치료에 효과가 높을 거라는 이야기도 '과학적인 근거'가 전혀 없다는 사실도 팩트다. 실제로 실험도 해보지 않고서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섣부른 결론이라는 지적에도 '비타민을 제한하는 실험'이 매우 복잡할 뿐만 아니라 '죽을 수도 있는 임상실험'을 굳이 강행해야 한다는 '폴링의 후예들'이 더 무례하다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점은 이미 거대해질대로 거대해진 '비타민 영양제 시장'이다. 100밀리그램이면 차고 넘칠 용량인데 500밀리그램을 넘어 1000밀리그램, 심지어 알약형태로 2000밀리그램 이상을 복용하는 영양제를 꾸준히 복용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에게 누가 '부작용'을 제대로 설명이나 했는지도 의문이고 말이다.

 

  그 때문에 우리가 이 책 <조금 수상한 비타민C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새콤달콤한 영양제 드링크를 한입에 털어넣으면서 '만병통치약'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없겠지만, 평범한 식단으로도 충분히 보충할 수 있는 영양소를 '따로' 챙겨 먹는 일만큼은 다시 한 번 생각해봄직 할 것이다. 나도 그간 내 돈으로 사먹은 적은 드물지만 접대나 선물 용도로 '영양제 한 상자'를 아무 거리낌없이 소비하는 것은 그만 둘 작정이다. 저자도 수차례가 강조한다. 평범한 식단, 엄마가 차려주는 한상만으로도 우리몸에 꼭 필요한 영양소를 이미 충분히 섭취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러니 '따로' 영양제를 복용해야 할 필요성은 전혀 없으니 아무런 걱정을 할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감기예방과 피부보호, 주름개선을 위해 꾸준히 먹고 싶고, 꾸준히 먹어서 효능을 봤다는 맹신도들의 경험사례에 혹하고 싶다면, 화장실에 버려지는 '노란 액체'에 주목하길 바란다. 당신의 몸이 '필요한 양'을 넘어 버려진 돈이다. 또 그렇게 버려진 '비타민C'가 돌고 돌아 채내에서 스스로 비타민C를 합성하는 생물의 몸에 '과다복용'을 강제로 시키는 일이 되며, 그런 일이 계속되면 생태환경을 파괴하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하길 바란다. 그리고 선진국에서만 '결석환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도 좀 상기할 필요가 있다. 너무 많이 먹은 탓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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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킬박사와 하이드 마카롱 에디션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박찬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5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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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 만에 다시 손에 잡은 문학책이 또 <지킬 박사와 하이드>였다. 명작을 읽는 재미도 재미지만 고민거리가 많아진 요즘엔 '새로운 것'에 대한 가슴 콩닥거리는 도전보다 '익숙한 것'이 주는 편안함과 안락함이 더 그리워진 탓이다. 편안함과 안락함을 찾는다면서 '공포소설'을 손에 쥔 것이 웃기기도 하지만, 19세기말의 공포는 21세기를 살아가는 나에게 전혀 공포스럽지 않고, 도리어 '생각할 꺼리'를 던져주는 탓에 다시금 푹 빠져들 수 있었다.

 

  한편, 이처럼 고전소설을 즐겨 읽는 까닭은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세월이 깊어지고 연륜이 묻어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원작'이 가진 깊이와 심오함이 없었다면 느낌이 달라질 것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거듭 리뷰를 쓰면서도 '다른 내용'을 담을 수 있는 것일테다. 물론, 다양한 출판사의 '같은책'을 접하면서 조금씩 다른 뒤침(번역)과, 그로 인해 달라진 '뉘앙스'를 찾아내는 것도 쏠쏠한 재밋거리이기도 하다. 이번 책은 [펭귄클래식코리아]의 지킬 박사였는데, 저렴한 문고판 판본이라 '책의 내구성'이 조금 떨어지는 것 이외에는 '가격 대 성능비'가 꽤 좋은 책이었다. 물가가 고공행진을 하는 가운데 책 값도 점점 비싸지는 와중에 '문학책'만큼은 저렴한 값(?)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일 것이다. 거기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이외에도 '세 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어 더욱 알찬 책이다. 더구나 수록된 단편이 은연중에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집필과정에 영향을 끼쳤고, 쓰여질 당시 대유행을 했던 디킨스의 <크리스마스의 악몽>과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과도 밀접한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라하니 '전작주의자'들에겐 필수템이 될 것이다. 자, 이제 각설하고, 다시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 집중하련다.

 

  앞서도 말했다시피, 이 책은 '공포소설'로 분류된다. 스토커의 <드라큘라>, 셸리의 <프랑켄슈타인>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전혀 공포스럽지 않은 책들이지만, 그건 '외형적인 요소', 다시 말해 '시각적 공포'로 다가오지 않기에 그럴 뿐이지, 소설을 직접 읽으며 '내면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공포의 맛'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현대적 감각의 공포를 맛보기 위해서라도 '상상력'을 발휘해보길 바란다. 자, 이제부터 공포가 시작된다.

 

  이 책을 설익게 읽은 독자들은 '선과 악의 대립'이라고 흔한 착각에 빠진다. 선한 지킬 박사와 악한 하이드 사이에서 고뇌에 빠진 주인공이 끝내 자살이라는 비극적 결말을 맞은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래선 전혀 공포스럽지 않다. 그러니 선과 악이 모두 '지킬 박사'의 내면에 공존하고 있었고, 두 가지 대립적인 요소가 서로 갈등을 벌이다 끝내 비극을 맞이했다고 이해를 해야 비로소 공포를 맛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종종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기준으로 선악을 구분하곤 한다. 또한 맹목적으로 이기적인 것은 악으로, 이타적인 것은 선으로 선을 긋기도 하는데, 이게 과연 딱 맞는 '구분법'일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과연 이타적이기만 하고 이기적은 모습은 없었더냔 말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모든 인간은 이기적이라는 객관적인 결론을 내리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현대인은 결코 '선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말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인간의 이기심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생존과 안전을 위해서라면 누구라도 '이기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흔히 '모성애'를 들먹이며 '이타심의 전형'으로 내세우곤 하는데, 이 얼마나 끔찍한 말인가? 자신의 아기를 위해서라면 스스로의 생명조차 내놓을 각오(?)로 사랑해야 한다는 '강요'는 아닌가 말이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모성애로 인해 엄마는 무조건적으로 자식들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고 강요가 불러오는 공포감이 조금은 느껴지지 않는가?

 

  이것이 바로 '공포의 정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암암리에 강요하고 있는 도덕과 윤리 따위가 전부는 아닐지라도 '소수의 희생'을 강요하고, 때로는 그런 희생이 하나 뿐인 목숨마저 내놓으라며 압박을 가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풀어놓고 나면, '지킬 박사'가 명예나 체면 따위를 내려놓고 마음껏 '해방감'을 느끼고 싶은 욕구도 절로 이해가 될 것이다. 뮤지컬을 볼 때, '지금 이순간~'이라는 배우의 열창이 더욱 그런 욕구를 잘 느낄 수 있게 한다. 알게 모르게 자신을 묶고 있던 사슬을 벗어던지는 '마법의 약'을 과학적인 힘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함께 복용할 때, 그 얼마나 신나고 짜릿하고 통쾌한 느낌일지 가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사라지게 되면서 불현듯 '공포감'이 그 빈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바로 '공포감의 시작'이다. 내 안에서 '해방감'을 만끽하게 해주었던 '또 다른 자아'가 나의 통제에서 벗어나 마음껏 활개를 치고 다니며 '나 자신'이 힘겹게 쌓아올린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공포감'이 극대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이를 테면, 운전중에 '나의 왼손'이 내 의지와는 아무 관계없이 운전대를 옆으로 돌려 중앙선을 침범하고 마주오는 차량과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가게 만든다면 어떨 것 같은가. 깜짝 놀라는 것을 넘어 죽을 것 같은 '기시감'이 온몸에 퍼지며 식은땀이 온몸을 적시는 경험을 하게 되지 않겠느냔 말이다. 더욱 무서운 것은 '내 안의 또 다른 자아'가 그런 짓을 하면서도 짜릿한 스릴을 맛보는 것을 즐기며 더욱더 '자주' 그러한 짓을 서슴지 않게 된다면 어떨 것 같은가? 아주 잠깐만 그런 스릴을 즐긴다고 해도 '죽을맛'일텐데, 하루 24시간 중에 23시간 50분을 '그놈'에게 주도권을 넘겨준 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10분만 남게 된다면 어쩔 것 같으냔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그 마지막 10분에 지킬은 '하이드의 악행'을 멈출 수 있었다. 개인에겐 비극적 결말이었겠으나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킬 것이 분명한 '또 다른 자아'를 멈출 수 있었기에 다행이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읽으면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분명 공포소설이다. 자, 이제 한 개인의 비극을 '확대'시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국가, 그리고 세계로 인식을 확장시켜보자. 그러면 이 책이 주는 공포감이 더욱 현실적이고 사실적으로 다가오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는 '악한 본성'은 지극히 이기적인 기준으로 자신만의 기쁨을 위해 무슨 일이든 서슴지 않게 된다. 그런데 '또 다른 자아'가 자아내는 공포감을 맛본 이가 '사회지도층'이라면 어찌 될까? 심지어 국민이 허락한 '권력자'라면 어찌 될까? 더 나아가 초강대국으로 세계 패권을 다투는 국가지도자가 '또 다른 자아'를 만나 저만의 즐거움을 위해 독단적인 결심을 서슴지 않게 된다면 말이다. 통제가 안 되는 '나의 왼손'이 나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것으로 모자라 마주오는 상대 차량의 무고한 희생을 일삼고 만다면 말이다. 마주오는 차량이 기름을 한가득 싣고 오는 트럭이라면, 단 한모금이라도 숨을 들이키면 사망에 이르게 하는 유독가스를 싣고 있다면, 도시 하나를 한순간에 사라지게 만드는 가공할 핵무기를 싣고 있다면, 아니, 전세계 주요 도시를 향해 핵무기를 발사시킬 수 있는 '버튼'을 아무 거리낌없이 눌러재끼는 '또 다른 자아'라면 어쩔 것이냔 말이다.

 

  상상이 너무 과했다면 사과부터 드린다. 그저 소설책 한 권 읽었을 뿐인데 인류멸망 시나리오를 풀가동시키는 것이 너무 과한 '설정'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그런 공포를 인식하고 고뇌하는 '자아'를 간직한 사람이라면 다행이라는 점에서 이 책이 주는 메시지는 '안전핀'을 장착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만약 그런 '안전핀'마저 상실한 국가지도자가 등장한다면 어떻겠는가? 그런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시스템을 우리는 갖추고 있는지 다시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드라큘라>에서는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해치려는 악마를 물리침으로써 공포를 씻어낸다. <프랑켄슈타인>에서는 미지의 생명을 신이 아닌 인간의 손으로 창조하려는 욕구가 자아내는 공포를 인간보다 선량한 생명체의 등장으로 안식시켰다. 하지만 <지킬 박사와 하이드>가 만들어낸 '또 다른 자아'의 공포는 좀처럼 씻어낼 수가 없었다. 내 안에 악함을 통제하는 것만으로도 힘든 일인데, 우리 사회의 '누군가의 악함'을 통제할 마땅한 장치가 변변치 못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나마 우리 사회에 '선량한 시민'이 더 많이 있을 거라는 기대만을 품을 따름이다. 우리가 '선량한 시민'을 더 많이 만들어낼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 나아가는 '중요성'을 깨닫기를 바라 마지 않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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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8권의 리뷰를 썼다.

지난 19년 이래로 '매달 두 자리수 리뷰'를 빼먹지 않고 썼었는데 말이다.

그러나저러나 좀처럼 리뷰가 써지지 않는다.

책은 날마다 읽고 있는데도

리뷰는 차일피일 미루다 '몰아서' 쓰기 일쑤다.

뭔가 '원동력'을 잃어버린 듯 싶다.


확실히 내게 책을 지원해주는 출판사가 줄어든 탓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내게 책이 없는 것도 아닌데

좀처럼 써지지 않는 까닭을 모르겠다.

뭐, 책 읽는 속도도 현저히 떨어진 탓도 있으니

단순히 컨디션 문제일 수도 있겠으나

뭔가 '기분전환'이 필요한 시기가 찾아온 듯 싶다.

무엇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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