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승의 인간 탐구 보고서 6 : 성은 우리를 다르게 만든다 - 어린이를 위한 뇌과학 프로젝트 정재승의 인간 탐구 보고서
정재승 기획, 정재은.이고은 글, 김현민 그림 / 아울북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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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12월에 '5권 리뷰'를 쓰고서 이제사 6권 리뷰하다니 많이 소홀했다. 하지만 아직 쓸 리뷰가 많이 밀린 관계로 조금 더 미룰 수밖에 없을 듯 싶다. 암튼, 6권이다.

 

  이 책, <정재승의 인간탐구보고서>는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지 못한 '뇌과학'을 청소년도 쉽게 읽을 수 있게 펴낸 책이다. <과학 콘서트>로 일찍이 유명세를 떨친 '정재승'이기에 믿고 볼 책이기도 하지만, '뇌과학'이란 것이 그렇게 어렵거나 낯선 과학이 절대 아니라는 '잘못된 편견'을 단박에 없애줄 유익한 시리즈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재승'이란 이름 뒤에 '글쓴이'가 따로 있다는 사실에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요즘엔 교과서도 '스토리텔링'으로 쓰여진 탓에 웬만한 [어린이교양책]은 거의 대부분이 '이야기형식'으로 쓰여지고 있다. '과학학습만화'로 유명한 <Why?>시리즈도 그렇고, 학습만화계의 밀리언셀러인 <마법천자문>도 '스토리라인'을 따라가면 자연스레 '과학'도 배우고, '한자'도 익히게 되는, 그런 식이란 말이다.

 

  이 책의 '스토리라인'은 외계행성의 '아우레 종족'이 소행성 충돌로 파국을 당하기 전에 아우레인이 살만 한 행성을 물색하던 중, '지구'라는 행성을 발견했고, 지구에서 살고 있는 '지구인'이 아우레인과 함께 살 수 있을지, 없을지 탐사를 하며 '인간탐구'를 진행시켰는데, 이런 '아우레 사람의 시선'으로 바라본 '지구인의 생태(?)'를 '뇌과학적인 관점'에서 풀어낸 내용이다. 그렇게 이야기가 진행되어 지난 5권에서는 '바바의 비밀보고'로 인해 아우레 행성의 본부에서는 '지구인 섬멸'을 명령했는데, 그 비밀보고의 내용이 '지구인의 생태가 아우레인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다달았었다. 하지만 '이성적'인 아우레인과 '감성적'인 지구인은 결코 공존할 수 없는가? 라는 질문에는 아직 답을 내리지 못한 상황에서 성급한 결론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그래서 이번 6권에서는 '또 다른 아우레인'이 인간탐구를 위해 투입되게 되었다.

 

  이렇게 '스토리라인'을 잡고서 펼쳐낸 '뇌과학적 주제'는 인간의 '성', 그리고 '사춘기'다. 다시 말해, '사랑'에 빠진 인간을 탐구한 내용인데, 이를 '뇌과학'적으로 분석하면 '사랑=호르몬 파티'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인간이 느끼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뇌에서 분비되는 도파민, 세로토닌, 옥시토신, 테스토스테론, 에스토르겐 등등에 의해 대환장 파티가 벌어져서 발현되는 것이다. 이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눈에 뵈는 것'이 없게 되는 것인데, 그도 그럴 것이 각종 '호르몬'이 대방출이 되니 시야는 좁아져서 '한 남자(한 여자)'만 보이게 되고, 심장은 두근네근 가만히 있질 못하며, 온몸의 감각이 예민해질대로 예민해져서 손만 대도 톡하고 터져버리게 된다는 말이다. 여기에 '사춘기'라는 시기까지 접목시키게 되면 '사랑의 열병'을 앓게 되고 마는 것이다. 아직 미성숙하다못해 '2차 성징'이 이제 막 돋아나는 시기에 '호르몬 대방출'과 '감각기관의 대환장'을 겪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느냔 말이다. 뇌과학적으로 첫사랑의 짜릿한 기억에 왜 평생 남는지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 셈이다.

 

  이런 사춘기에 접어든 등장인물들 간의 '사랑의 열병'이 한창일 때, 아우레인들은 '지구인 섬멸'을 결정하기 위해 먼길을 달려온 셈이다. 과연 아우레인들은 지구인을 모두 죽이기로 결정하게 될까? 다음 7권이 나온 것을 보면 결과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그렇다면 '2차 성징'이 나타나게 된 청소년들에게 '성'과 '사랑'을 어떻게 가르치면 좋을까? 다시 말해, '성교육'은 어디까지 해야 좋단 말인가? 현명한 부모라면 자녀에게 '성교육'도 능숙하게(?) 잘 해야 마땅하겠지만, 그 순간의 민망함을 생각한다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성교육전문가에게 믿고 맡긴다는 것도 쫌 그렇다. 성교육전문가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무슨 얘기냐면, 남자선생님은 여학생을 가르치기 민망하고, 여자선생님은 남학생을 가르치기 껄끄럽단 말이다. 그렇다고 성교육한답시고 '남탕여탕' 갈라서 하는 것도 '반쪽짜리'인 것에 불과하고 말이다. 그렇다고 한데 섞어서 가르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럼 정녕 방법은 없는 것일까? '성 이야기'는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열린마음'이 전제된다면 방법이 없지도 않다. 사랑하고, 연애하고, 섹스하는 이야기가 감춰야만 할 것이 아니라는 사실만 인정하고나면 그 뒤는 순풍에 돛단 듯이 잘 풀릴 것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아이들도 알만한 건 다 알고 있다. 정작 궁금한 것은 '실전경험(?)'일 것이다. 그렇다고 청소년들에게 사랑과 연애, 섹스를 '권장(!)'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청소년들이 직접 궁금해하는 것을 민망하지 않는 표현으로 능숙(?)하게 잘 설명해주는 것이 가장 현명할 것이다. 단, 사랑과 연애, 그리고 섹스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또 강조해야만 할 것이다. 과연 10대에 '하고 싶은 것'을 다 경험했을 때, 나중에도 후회하지 않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수 있다면 괜찮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후회'할 것 같다면, 조금 시간이 흘러 20대에 사랑하고, 연애하고, 섹스해도 결코 늦지 않다는 '경험자의 조언'을 곁들여주면 더욱 좋을 듯 싶다. 지금 청소년들은 '무조건' 하지 말라고 해서 하지 않을 세대가 아니다. 차라리 속시원히 까놓고(?) 얘기하는 것이 더욱 절실히 와닿아 청소년 스스로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다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청소년이 있다면 '책임(?)'질 수 있겠냐고 묻는다면, 그렇게 자신 없는 어른(학부모, 교사)이라면 마땅히 책임을 지어야 할 '당사자'가 직접 성교육시키시길 바란다. '남'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우지 마시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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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60선 57 : 순자 NEW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60선 57
김세라 지음, 이인섭 그림, 손영운 기획 / 주니어김영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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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추전국시대는 수많은 사상가를 낳은 시대였다. 비록 지배자인 왕과 신하들은 무능했고 피지배자인 백성들은 잦은 전쟁과 큰 혼란으로 살기 힘든 시절이었지만, '제자백가'로 일컫는 수많은 사상가들이 등장해서 저마다 '살기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시기였기에 학문적으로 매우 소중한 시대였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 '동양사상'이라 불리는 수많은 사상들이 중국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그 가운데 '유가사상'은 중국을 비롯한 한중일 동양삼국의 '공통분모'로 작용할 정도로 밑바탕이 되어 '문화적 동질성'을 띄게 되어, 오늘날까지도 '유교'는 세 나라의 고유한 특성으로 발달하며 전통문화로 자리잡아 '공통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물론 정치, 경제 등의 서로 다른 견해로 인해 갈등이 심해지기도 하지만, 정작 세 나라의 국민들은 눈빛만 보아도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동질감'을 느끼게 해주는 근원이기도 하다.

 

  암튼, 유가사상의 대표는 '공자'와 '맹자'로 꼽는데 반해 '순자'는 흡사 이단자 취급을 받는 듯이 홀대받기 일쑤다. 가장 큰 이유는 '순자'의 학통을 이어받은 이가 '한비자'와 '이사'로 '법가사상가'이기 때문이란다. 거기다가 순자가 '성악설'을 주장했기 때문에 전통적인 유학자들에게 눈엣가시처럼 밉보일 수밖에 없었던 탓에 '순자'는 오래도록 핍박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 평가가 사뭇 달라졌다. 유가사상이 너무 '이상'만을 쫓는데 반해 법가사상이 오늘날의 현실에 직접적으로 적용할 수 있을만큼 실용적인 덕분이다. 그래서 대표적인 법가사상가인 '한비자'의 스승인 '순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실제로 <순자>는 <논어>, <맹자>를 비롯한 다른 유교경전보다 '현실적인 내용'이 반영되었기에 재평가 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순자>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순자'도 유학자였기에 기본적으로 '유교사상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순자'는 유독 맹자의 '성선설'을 조목조목 비판했는데, 그 까닭은 인간은 날 때부터 선한 본성을 타고 났다고 하기에는 춘추전국시대의 현실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먕자의 말마따나 '선한 본성'을 타고난 이들이 어찌하여 허구헌날 전쟁을 일삼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지도 않으며 저마다 제 이익만을 챙기기에 급급했느냔 말이다. 이런 현실을 직접 겪어본 '순자'는 인간의 본성이 결코 선하지 않으며 악하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이를 두고 '성악설'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렇지만 순자가 인간이 마냥 악하다고만 하지는 않았다. 왜냐면 분명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선한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순자도 그런 사실을 절대 부정하지 않았으며, 그런 '성인'은 올바른 교육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결론 내렸다.

 

  다시 말해, 순자는 인간은 태어날 때는 '악한 본성'을 타고 나지만 올바른 훈육과 교육, 그리고 개인적인 노력 여하에 따라서 얼마든지 훌륭한 인성을 갈고 닦을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악설의 핵심'이다. 또한, 순자는 사람은 누구나 '군자'가 될 수 있고, '성인'이 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왜냐면 애초에 타고난 본성이 '소인'이었던 탓에 바른 인성과 훌륭한 교육, 그리고 뛰어난 노력을 성실하게 갈고 닦으면 누구나 '성인군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성선설'을 주장한 여타의 유학자들처럼 '선한 본성'을 타고난 인간에게 적당히 교화만 시킬 수 있다면 나쁜 짓을 일삼지 않을 것이니 '덕치'가 중요하다고 본 것과는 다르게, 순자는 '예치'를 주장하며 끊임없이 '예의범절'을 가르치고 스스로 수양하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법치'를 주장하며 엄격한 법과 무거운 형벌 만이 세상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법가사상가'들과 일맥상통한 점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보면, '순자'는 유가와 법가를 이어주는 '중간적인 위치'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그도 그럴 것이 순자는 일반적인 유가의 '왕도정치'만 주장한 것이 아니라 힘의 논리를 인정하는 '패도정치'도 불가피한 것이라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순자의 유학은 꽤나 '현실적인 조언'을 해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논어>, <맹자>보다는 <순자>가 읽기에 수월하며 공감가는 부분이 더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순자의 '현실'을 고려한 유연한 사상이 꽤나 '합리성'과 '논리성'을 중요시하는 근대적인 사상과도 잘 맞아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자>에 조금 더 깊은 관심을 가져봄직 하다.

 

  하지만 오늘날의 관점에서 <순자>도 '비판적인 읽기'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순자'도 어쩔 수 없는 유학자인 까닭이다. 철저한 신분제도를 고집했으며, 오늘날에 적용하기에는 곤란하거나 고리타분한 '제도와 형식, 그리고 태도'를 강조하는 낡은 사상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사상인 '도가', '묵가', 그리고 가장 많이 비판한 '법가', 심지어 같은 유학자들의 '유가'도 비판의 대상에 올려, 얼핏 자기 주장만 고집하는 '모두까기의 일인자'로 오해하기 딱 좋은 면모도 엿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모든 것이 '단점'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특히, 마지막에 언급한 다른 사상가의 '실명'까지 언급하며 비판한 내용에 대해서는 '순자의 고뇌'가 얼마만큼 깊은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저 단순한 비난이 아니라 '순자, 자신의 사상'에 비추어 다른 사상가들의 근거가 얼마나 부족하거 허황된 것인지 조목조목 따졌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순자'가 얼마나 학문에 진심이었는지도 엿볼 수 있으면서, 동시에 누구와도 '토론'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는지 알 수 있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순자>의 내용에는 '헛똑똑이들'을 경계하는 내용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면서 '순자, 자신'이 얼마나 자기학문에 노력과 공을 들였는지, 그렇게 결실을 본 <순자>라는 책이 결코 허술한 책이 절대 아니라는 사실을 짐작케 하기 때문에 현대의 학생들의 귀감이 되는 대학자임에 틀림없다. 정말이지 공부를 한다면 '순자처럼' 해야 한다는 말이 딱 적절할 듯 싶다.

 

  근래에 '서이초'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소식이 전해져 수많은 선생님들이 슬픔에 빠져 있다. 비단 선생님들뿐 아니라 '교육'에 진심인 모든 분들이 애통해 마지않은 사건이 벌어지게 되었다. 과연 이런 비극이 '누구의 탓' 때문일까? 나는 <순자>를 읽으며 '예의범절'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승은 제자를 사랑으로 대하고, 학생은 선생님을 존경하는 '그 기본'이 왜 사라지고 만 것일까?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우리 시대의 비극'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비극을 두고 공자와 맹자는 인의를 따지며 '덕치'를 강조할 것이고, 한비자와 이사는 강력한 '법치'를 내세울 테지만, 순자는 우리 모두에게 '예치'가 사라진 비극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최소한의 예절'만 잊지 않았어도 선생님에게 무례하게 대드는 학생도 줄어들 것이고, 무한이기주의에 빠진 학부모들의 얼빠진 행태도 사라질 것이며, 스승도 제자에게 더욱 사랑하지 못한 죄를 부끄럽게 여겨 '우리 교육의 현실'이 이처럼 무참하게 무너지지 않았을텐데 말이다.

 

  더욱이 정치권에서는 이 비극을 두고서 "전교조의 망령이 부활했다"는 얼토당토 않은 시빗거리를 주절거리지도 말았어야 했다. 얼마나 몰상식하고 부끄럼도 모르는 망언이란 말이냐. 교사가 현실의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사랑하는 제자를 두고 떠나야 하는 심정을 조금이라도 사려 깊게 생각할 줄 아는 정권이라면,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이다. 위로가 먼저다. 죽은 사람에게 예의를 갖출 줄 모르는 야만인이 아니라면 말이다. <순자>에는 이런 말이 있다. '군주가 예의를 알면 백성이 저절로 군주를 믿고 따른다'고 말이다. 아무리 '악한 본성'을 타고났더라도 선한 마음을 갈고 닦으면 누구나 '성인군자'가 될 수 있다는 순자의 가르침을 '정치인'이라면 더욱더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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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온다, 미래 식량 와이즈만 미래과학 19
김성화.권수진 지음, 박정섭 그림 / 와이즈만BOOKs(와이즈만북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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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멜서스는 <인구론>(1826년)에서,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반해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미래 인류는 식량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 주장했다. 물론 19세기 '농업기술'은 소가 밭을 갈던 수준이었기 때문에 20세기에 발달된 '농업기술'과 '유전공학'에 힘입어 21세기까지도 풍요로운 먹거리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한마디로 멜서스의 '식량위기설'은 기우에 불과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2050년 100억 인구를 돌파할 것이라 예상한 과학자들은 멜서스의 식량위기설을 다시금 주목하기 시작했다. 과연 100억 인구가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양의 '곡물과 고기'를 공급할 수 있을까?

 

  결론만 놓고 보면, '불가능'에 가깝다고 한다. 왜냐면 현재 지구는 빠르게 '농경지'를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열대우림에서는 밀림을 밀어버리고 엄청난 지역을 '농경지'로 새로 개척하고 있지만,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전세계가 '도시화'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란다. 이렇게 '농경지'가 점점 줄어들고 있으니 향후 2050년 즈음에는 100억 인구가 충분히 먹을만한 '곡물생산'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기'를 먹으면 되지 않을까? 누가 최초로 말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된다는 유언비어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건 더 말이 안 된다. 왜냐면 '1킬로그램의 고기'를 얻기 위해 가축에게 '9킬로그램의 곡물'을 먹여야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가축을 길러서 맛있는 고기를 먹는 것이 이토록 '비효율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세계의 절반이 굶주리고 있는 까닭 가운데 가장 으뜸이 바로 '육식'을 즐기는 부자나라 사람들 때문이라고 한다. 앞서 말했듯이 '육식'은 매우 비효율적인 '음식낭비'였기 때문이다. 이를 비유적으로 표현하면 더 절실히 와 닿을 것이다. 소고기 스테이크 1~2개를 먹는 것은 잔치국수 900그릇을 만들어서 800그릇은 버리고 100그릇만 먹는 것과 같다고 말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전세계의 농경지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는 이유는 '기후온난화'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한마디로 지구가 너무 빨리 뜨거워지고 있기 때문에 식물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곡물생산량'도 현저히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육식'을 즐기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전세계 곡물생산량의 '절반'을 가축의 사료로 쓰고 있단다. 그래서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단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전공학자'들은 '유전자변형옥수수'를 재배해서 부족한 곡물사료를 대체하고 있단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옥수수'라는 단일영양소만 섭취하게 되어 심각한 '영양불균형'을 초래하고 있다고 한다. 분명 많은 사람들이 탄수화물과 단백질을 골고루 섞어서 먹고 있는데도, 결국엔 '옥수수', 단 한가지의 영양소만 섭취한 꼴이다. 왜 그럴까? 마트에서 팔고 있는 '가공식품'에 들어가는 첨가물의 거의 대부분이 '옥수수'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란다. 심지어 '고기'도 영양소로 분해하면 옥수수, '우유'도 옥수수, '콜라'도 옥수수라면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왜냐면 소에게 먹이는 사료를 '값싼 옥수수'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소는 원래 '풀'을 뜯고 살을 찌웠는데 그렇게 자연방목을 하게 되면 살을 찌우기까지 4~5년이나 걸리는데 반해, 좁은 우리에 가둬두고 옥수수사료만 먹이면 14개월이면 충분히 살을 찌울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렇게 급속도로 살을 찌운 소에서 '우유'를 짜고, 좁은 양계장에서 자란 닭도 옥수수를 사료로 먹고 '달걀'을 낳으며, 엄마돼지도 좁은 우리에 갇혀 새끼돼지를 낳고 옥수수만 먹고 살을 찌워 '햄, 소지지'가 된다고 한다. 이렇게 '옥수수'만 섭취한 인간이 쉬이 '영양불균형'에 빠지고 비만으로 인해 각종 성인병에 시달리게 된 까닭도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고기'를 대체할 수 음식이 있기는 한 걸까? 가장 좋은 방법은 '육식'을 포기하는 것이겠지만, 인간은 '고기맛'을 절대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내놓은 대안은 '소의 줄기세포'를 배양액에서 '길러내서' 고깃덩어리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일명 '실험실 고기'인데, 각종 영양제와 항생제를 먹이고, 불결하고 좁은 우리에 가둬서 기르며, 도축장에서 끔찍한 살육과정을 거친 뒤에 먹게 되는 '고기'보다는 훨씬 깨끗한 '클린 미트'라고 과학자들은 자부한단다. 멀지 않은 미래에는 마트에 올라올지도 모르겠다. 같은 가격의 '도축 고기'와 '클린 미트'. 당신은 어떤 고기를 선택하게 될까?

 

  도축한 고기든, 실험실에서 기른 고기든 둘다 싫어서 '채식주의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 몸에 꼭 필요한 '단백질'을 보충할 방법은 또 있으니까 말이다. 바로 미래식량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 인류의 오랜 먹거리, 바로 '곤충'이다. 지금도 우리는 누에나방의 번데기를 통조림으로 만들어 먹고 있고, 메뚜기를 튀기거나 구워 먹는다. 다른 나라에서도 각종 곤충을 맛있게 조리해서 즐겨 먹고 있으니 인류역사상 아주 오래된 '미래 식량'인 셈이다. 물론, 미래에는 '살아있는 모습, 그대로' 곤충을 먹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단백질파우더처럼 '가루 형태'로 만들어서 각종 요리에 첨가해서 먹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곤충에 대한 거부감이나 혐오감은 상당히 줄어들 것이다. 다만 '성분표'에는 나와 있겠지만, 지금도 각종 '가공식품'을 먹으면서 성분표 따위는 잘 보지 않으니 크게 우려할 것은 없을 거라고 예상한다.

 

  암튼, 인류의 미래는 걱정할 것 투성이다. 이 책 <미래가 온다> 시리즈는 바로 그런 불안한 미래를 긍정적으로 헤쳐나갈 수 있는 유용한 '과학지식'을 선물해준다. 물론 '어린이독자'를 대상으로 펴낸 책이라서 수록된 내용이 깊지 않은 것이 흠이라면 흠이지만, 어렵게만 느껴지는 '과학'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쉽고 재미나게 엮어낸 것이 특장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부모들'이 먼저 읽고 자녀에게 권해주기에도 딱 좋은 책이기도 하다. 또한 '과학'을 어렵게만 느끼는 중고등학교 '청소년독자'에게도 과학에 흥미를 느끼게 해주는 소중한 책으로 다가갈 것이다. 현재까지 20권이 출간되었는데, 더 출간할지는 의문이긴 하다. 하지만 우리에게 더할나위 없이 소중한 미래를 현명하게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꼭 출간이 지속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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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세계사 4 - 여러 문화권의 충돌과 변화 처음 세계사 시리즈 4
초등역사교사모임 글, 한동훈.이희은 그림, 서울대학교 뿌리깊은 역사나무 감수 / 주니어RHK(주니어랜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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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책은 '서로 다른 문화권의 충돌'에 대해 이야기했다. 크게는 세 가지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서술했다. 하나는 서양 중세시대의 '황제 vs 교황', 둘은 성지탈환을 둘러싼 '그리스도교 vs 이슬람교', 셋은 막강한 몽골제국의 '팽창 vs 몰락'을 다루었다. 특히, 몽골의 칭기즈 칸의 대외업적을 시작으로 원나라의 형성과 동아시아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한국사의 고려시대와, 일본사의 초기 막부시대를 다루며 함께 살펴보았다.

 

  이렇게 서로 다른 문화끼리 충돌이 일어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정답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사실이다. 전쟁의 승패와는 상관없이 두 문화는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과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받으며 커다란 변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원간섭기의 고려와 몽골, 두 나라는 '서로의 풍습'이 유행을 하며 '몽골풍'과 '고려풍'이라는 형태로 지금까지 서로의 전통문화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문화권의 충돌과 변화'라는 주제로 역사를 바라볼 때 주의할 점은 무엇일까? 단순히 전쟁의 승패로만 '역사관'을 쌓으면 안 될 것이다. 이를 테면, 몽골제국과 싸워서 승리를 거둔 나라는 '일본'뿐이라는 사실만 두고서, 일본의 위대함을 뽐내고, '신풍(신의 바람)' 덕분에 일본이 승리를 거뒀으니 '신이 보호하는 유일한 나라'라는 역사관을 갖고 자란 일본인은 커서 어떤 역사관을 갖겠느냔 말이다. 그릇된 종교관을 갖고 다른 종교에 대해 '배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면 자신의 신앙만 옳고 다른 신앙에 대해선 옳지 않다고 여겨 '이단'을 당연시 여기는 어리석음을 뽐내게 되고 말 것이다. 더 나아가 무한한 '자국이기주의'를 내세우고, 힘의 논리만 앞세운 '약육강식' 논리로 이웃국가를 요만큼도 배려하지 않는 못된 정책을 일삼게 되고 말 것이다.

 

  서로 다른 문화가 처음 마주치게 되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전쟁'이라는 아픈 과정을 겪기 마련이다. 이는 두 문화가 모두 '성숙'하지 못한 결과일 뿐, 어느 한 쪽이 위대하거나 잘나서가 결코 아니다. 이는 전쟁이 끝난 뒤에 벌어지는 '두 문화권의 성장통'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박에 알 수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서양의 중세기사들은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성지탈환이라는 최우선 목적을 내세웠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성지탈환은 핑계일 뿐이고, 본심은 '같은 종교'를 믿는 형제국끼리 더는 치고 받기 껄끄러운데 '이교도'를 공격해서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셈법이 작용한 결과였던 셈이다. 이런 본심이 드러나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1차 원정 때 '성지탈환'이라는 목적을 달성했는데도, 예정되었던 '기적'이나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복당한 이슬람쪽의 반격으로 인해 4차 원정에서는 '예루살렘'을 이슬람쪽에 빼앗겼고, 두 번 다시 되찾지 못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그밖의 원정은 말할 것도 없다. 이득이 생기는 곳이라면 '같은 편'일지라도 공격대상으로 삼았고, 신앙심 가득한 소년들을 '노예'로 팔아넘기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십자군 전쟁'으로 양쪽이 입은 피해는 끔찍할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이렇듯 '큰 충돌'이 있고난 뒤에 벌어지는 놀라운 풍경에 주목해야 한다. 중세기사들의 원정길은 '성지'로 향하는 통로가 되어 서유럽에서 예루살렘까지 왕래가 수월해졌다. '십자군 전쟁' 이전에는 마땅한 지도조차 없어서 애를 먹었던 것에 비해 '성지순례길'은 더욱 다져졌고, 가는 길목마다 '상권'이 형성되며 두 문화권의 상업과 무역이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에 대한 이해는 더욱 깊어졌고 서로가 가지고 있었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도 모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교류가 활성화되니 양쪽 문화는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비단 '십자군 전쟁'만 이런 것은 아니다. 몽골의 칭기즈 칸이 '팽창정책'을 펼치며 사방팔방으로 세력권을 확대시킬 시기에는 '몽골군'을 '천벌(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불릴 정도로 경계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칭기즈 칸이 죽고 그의 아들과 손자가 정복지를 다스릴 때에는 '몽골의 풍습'을 강요하였다. 승자의 당연한 권리처럼 행사되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런 강요는 수그러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로 '피지배지역의 전통문화'를 완전히 무시하고서 효율적으로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더구나 국가운영을 위해선 수많은 인재가 필요한 법인데, '소수의 몽골인'이 모든 것을 독차지할 수 있었겠느냔 말이다. 대표적으로 '원나라'가 그렇다. 금나라를 완전정복하고, 남송까지 복속시킨 뒤에 '원'이라고 나라이름을 고쳐 부르게 되었지만, 여전히 몽골지배층은 소수에 불과했다. 이에 쿠빌라이 칸은 뛰어난 인재를 얻기 위해 여러 민족의 우대하는 정책을 내세웠다. 그렇게 정복지를 효과적으로 다스려 나갔다. 하지만 곧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다. 왜냐면 중국 한족만큼은 철저히 핍박하는 '차별정책'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정복한 지역이 옛 한족들의 땅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로 인해 원나라는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끝내 멸망하고 만 셈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문화'는 초기에는 서로 미성숙한 탓에 전쟁과 같은 큰 충돌을 피할 수 없지만,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긍정적인 이해관계를 형성하게 되면 결국 양쪽 문화권이 서로 발전하는 '성숙한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물론, 미성숙한 단계에서 성장하지 못하면 갈등은 계속 반복할 수밖에 없으며 오늘날에도 끝없는 내전과 폭동, 그리고 테러와 전쟁을 전세계 곳곳에서 겪고 있는 까닭이다. 우리 나라도 마찬가지다. '한민족'이라는 동질성을 갖고 있음에도 낡은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고만 할뿐, '성숙한 단계'로 성장할 생각이 요만큼도 없는 것처럼 미성숙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를 '분단국가'로 만든 주변 강대국들조차 '미성숙한 단계'에 머물면서 자국의 이익이 되는 쪽으로 계속 우려먹고 있는 상황이다. 딴에는 '평화'를 약속하며 '분쟁의 소지'를 줄여나가기 위한 노력을 내놓고 있는 모양새를 취하긴 한다. 하지만 '무한자국이기주의'를 위해서 우리 나라의 평화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도 사실이다. 남과북의 '정치세력'도 이에 편을 들어 서로의 '정치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한민족의 평화'를 위태롭게 만들기는 마찬가지고 말이다.

 

  이젠, 우리 모두가 성숙해져야 할 때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전쟁'이 펼쳐지고, 그 패거리싸움에 '한쪽 편'을 들어야만 하는 상황을 연출되고 있는 형국이지만, 그로 인해 벌어질 결말은 '전쟁'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큰 충돌의 '전장터'는 언제나 '약소국의 몫'이고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결코 '약소국'처럼 행세하면 안 된다. 이 땅에 두 번 다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단 말이다. 이런 어리석은 짓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한민족'이라는 동질성을 다시금 되새기며 서로간에 갈등의 원인을 빠르게 해소해나가는 노력을 해야만 한다. 대한민국의 평화는 미국과 일본의 '노예'가 되어야 얻을 수 있는 달콤한 열매가 결코 아니다. 우리의 평화는 우리 손으로 직접 거둬들이기 위해 진한 땀을 흘려야 겨우 얻을 수 있는 '쓰디쓴 열매'인 것이다. 하지만 두 열매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달콤할지는 누구보다 우리 스스로 더 잘 알고 있다. 혀끝에만 맴도는 단맛에 빠지는 각종 성인병에 시달리게 되고, 입엔 쓰지만 우리 건강에는 더 좋은 영향을 끼친다는 명백한 사실을 말이다.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큰 충돌 뒤에는 어김없이 '역사적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는 미성숙함에서 성숙한 단계로 접어들게 하는 '성장통'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물론, 성장통을 앓았다고 모두 성숙해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도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역사를 올바로 배워 크고 넓은 안목을 배우고 깊이 헤아리는 숙고를 익히게 되면 우리 모두가 '성숙한 단계'로 접어들 수 있는 방법도 배울 수 있는 법이다. 서양 중세의 '황제 vs 교황'의 대결에서도 알 수 있다.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양쪽 모두 '승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양쪽 모두 '성숙한 단계'로 접어들 때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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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7 미키7
에드워드 애슈턴 지음, 배지혜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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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F소설이 다 그렇지만, 시작은 늘 뜬금없다. 기발한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쓸 수 없는 장르이기도 하지만, '과학'이라는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까닭에 읽다보면 대강의 얼개가 대충 감이 잡히기 마련이다. 물론 읽는 분들의 '과학지식'에 따라 느낌은 달라지기 마련이겠지만, 나름 공학도인 나에게는 식상한 범주임에 틀림없다. 그런 까닭에 나는 'SF소설'을 윤리도덕적인 관점에서 읽곤 한다. 첨단과학이 등장하게 되면 어김없이 '과학자의 윤리의식'과 '윤리도덕적으로 올바른 과학인가'에 대한 물음이 뒤따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인간을 복제해도 괜찮은가? 라는 물음에 답을 하기 힘든 까닭은 '의학기술'의 발달로 불치병을 고치고, 난치병을 줄이며, 불의의 사고로 안타까운 목숨을 잃게 되었을 때 다시 한 번 새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는 장점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러한 첨단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나타나게 될 새로운 문젯거리는 정말 한두가지가 아니라는 점에서 골치가 아파오기 때문이다. 또한, 그 문젯거리라는 것이 '생명윤리문제'와 '종교문제' 등 첨예한 갈등을 불러 일으키기 십상이고, 나와 똑같은 복제인간이 '동시간대'에 둘 이상 존재할 경우, '같은 사람'으로 보아야 할지, '다른 사람'으로 인식해야 할지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어려운 문제를 속속 끄집어내기에 결코 쉽게 다룰 문제는 아닌 셈이다. 그럼에도 'SF소설'에서는 이런 골치아픈 문제를 잠시 뒤로 미루고 재미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다. 언제일 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나중에 반드시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것들에 대해서 '고민할 시간'을 충분히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는 어떤 문젯거리를 언급하고 있을까? 바로 '불멸의 삶'을 사는 익스펜더블(소모용 작업자)을 등장시켰다. 가까운 미래에 핵전쟁, 그 이상의 파괴력을 갖춘 '반물질 폭탄(버블)'으로 버블전쟁을 일으킨 인류는 지구를 떠나 새로운 행성에서 거주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테라포밍(미개척 행성을 지구환경처럼 바꾸는 일)'을 통해서 외계행성에서도 인류가 거주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해 선발대를 모아 개척할 수 있을 정도로 과학이 발전한 시대를 배경으로 삼았다. 아시다시피 '거친 환경'에서 개척을 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고, 그런 위험한 작업인데도 '섬세한 작업'이 필요한 까닭에 먼 미래에서도 당연히 '인공지능 로봇'보다는 '우주복을 입은 사람'을 작업자로 삼아 일을 부려먹었다는 설정을 한 것이다.

 

  그런데 위험한 일이다보니 종종 '작업자의 목숨'을 잃는 일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그렇다고 외계행성을 테라포밍하기 위해 엄청난 수의 작업자를 탑승시킬 우주선이 존재할 리 만무하다. 왜냐면 우주선에 실어나를 '무게'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이를 '적정수준'에서 감당하기 위해선 '복제인간 기술'이 꼭 필요했던 것이다. 바로 '죽어도' 다시 살려내서 일을 시킬 수 있는 '소모용 작업자'를 우주선에 탑승시킨 것이다. 애초에 '소모용 작업자', 다시 말해 '익스펜더블'로 선발된 작업자의 '기억'을 백업시켜놓고,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을 경우, '다량의 단백질과 칼슘, 그밖의 필수적인 소량의 원소'를 배양액에 넣고, 복제인간을 탄생시킨 다음에 백업한 기억을 다시 주입하면, 죽었던 작업자는 마치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침대에서 일어나게 된다. 물론, 다시 깨어난 순간에는 지독한 숙취와 며칠은 굶은 것 같은 배고픔을 느끼는 부작용이 있긴 하지만, 예전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잠을 자다 깬 것 같은 몽롱한 느낌이 전부인 셈이다.

 

  하지만 분명 예전과 달라졌다. 처음으로 '익스펜더블'로 선발되었을 때는 '미키1'이라고 불렸지만, 죽음을 거듭하면 할수록 '숫자'는 점점 커지게 되고, 이 책의 이야기가 시작하는 첫머리에서는 '미키7'이 죽을 뻔한 사고를 당하는 장면이 연출된다. 벌써 여섯 번의 죽음을 경험했고, 이제 일곱 번째 죽을 차례인 것이다. 하지만 '미키7'을 구해줘야 마땅할 친구조차 미키를 그냥 죽도록 내비두고 만다. 구출작업을 하다가 목숨이 '하나' 뿐인 사람이 덩달아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미키를 죽게 내버려두고 귀환을 해버린 것이다. 왜냐면 미키는 다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미키8'으로 말이다.

 

  만약 그랬다면 이야기는 그대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미키7'은 용케 죽지 않고 살아서 기지로 귀환하게 된다. 그리고 되돌아온 기지에서 이제 갓 태어난(!) '미키8'과 '미키7'은 조우하게 된다. 둘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똑같지'는 않았다. 갓 깨어난 미키8은 처음 '복제'했던 그 모습 그대로 건강한 모습이지만, 구사일생으로 되돌아온 미키7은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였던 것이다. 거기다 미키7이 저장하지 않았던 '지난 6주간의 기억'이 둘 사이의 차이점을 부각시켜주었다. 과연, 둘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빠밤~ 이 정도만 소개하여도 이 책의 흥미로움은 보장되었을 것이다.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의 차기작으로 물망에 올렸다는 소문은 덤일 뿐이고 말이다.

 

  그보다는 이 책의 최고 흥밋거리는 다름 아닌 '철학의 문제'다. '테세우스의 배'라는 것이 먼 옛날에 있었는데, 이 배가 오랜 여정을 거치면서 여기저기 고장나기 시작했다는 것에서 문제는 시작된다. 이렇게 고장이 날 때마다 '부품'을 하나씩 하나씩 새것처럼 고쳐나가다가, 이 배의 부품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새것'으로 교체했다면, 이 배는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 말이다. 생각을 달리 해서, 테세우스의 배가 고장 났을 때, 하나씩 부품을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배를 만들었다면, 처음 배와 나중 배는 '같은 배'인가? 이렇게 물었다면 '두 배'는 서로 다른 배라고 대답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고장난 '부품 하나'만 교체했을 경우에는 '처음 배'와 '나중 배'를 '같은 배'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그렇게 하나씩하나씩 교체를 하더라도 '같은 배'라고 얘기할 것이 분명한데, 교체를 하나보니 '예전 부품'은 하나도 없고 몽땅 '교체된 부품'으로 바꿔졌다면 어떻겠느냔 말이다. 여전히 '같은 배'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쉽게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배'를 '사람'으로 바꾸어보자. 손가락이 부러져서 '새 손가락'으로 교체했다고 한들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당사자도 여전히 '본인'이라고 말할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 여러 번 사고를 당하다보니 몸의 70%를 '새 부품'으로 교체하게 되고, 80%, 90%, 99%를 '새 부품'으로 바꿨다고 가정해보자. 여전히 '본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본인의 자아의식은 아무리 새 부품으로 교체했다고 하더라도 '나'라고 여기지, '또 다른 나'라고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면 '과거의 기억'을 모두 갖고 있고, 하나씩 새롭게 교체된 몸이라는 것도 알지만, 여전히 '내몸'이라고 인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반대로 엄청난 사고를 당한 뒤에 단 한 번에 99% '새 부품'으로 완전 교체를 할 경우를 가정해보자. 이때에도 '본인'이라고 인식하게 될까? 사고 당사자는 굉장히 수용하기 힘들겠지만 '과거의 기억'을 모두 온전히 갖고 있다면 '자신'이라고 인정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억'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다른 무엇이 다 바뀌더라도 '예전의 기억'만 떠올릴 수 있다면, '자기자신'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럼 '불멸'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인간의 기억을 온전히 '저장'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된다면, '인간의 몸'이 무엇으로 대체된다고 한들 '죽음'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인류는 '불멸의 삶'을 살 수 있게 되고,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쌩뚱맞은 소리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과학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럼 묻겠다. 당신은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게 될 때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 자연적인 죽음으로 '소멸'될 수도 있겠지만, 생전의 기억을 '저장'하여 불멸의 삶을 살 수도 있다고 한다.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이 물음에는 쉽게 답할 수 있겠는가?

 

  '내 선택'을 말하자면, 조건이 필요한 불멸을 선택할 것이다. 현재의 '생체조직'과 똑같은 '감각'을 유지하면서, 살아생전의 '겉모습'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다면 '불멸'을 선택하겠다고 말이다. 나에게 이 두가지는 '필수조건'이다. '나의 감각과 겉모습'을 유지하지 않은 나는 이전과 다른 '또 다른 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달라진다면 나에겐 '똑같은 삶'이 아니니 자연적인 죽음을 선택하고 싶을 뿐이다. 물론, 지금보다 훨씬 젊고 잘생기게 태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건 '내'가 아니다. 그렇기에 그런 삶은 '예전의 기억'을 깡그리 잊어버린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것 또한 '내'가 아니기에 만족스럽지 않다.

 

  나에게 'SF소설'은 이런 식의 철학적 문제를 접근하게 해주고, 미래에 닥칠지도 모르는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 심층적으로 고민해볼 수 있는 기회를 던져주기에 늘 만족스럽다. 다음에는 어떤 소설을 만나고 어떤 고민을 하게 될까? 여러분은 즐겁지 않으신가요?

 

 

  참, 책의 내용과는 무관한 이야기라 고민고민했는데, 제발 '책표지'에서 반짝이 좀 묻어나지 않게 제작하면 안 될까요? 미래를 다룬 책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SF장르의 책'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재질로 제작하는 경향이 뚜렷합니다. 그런데 이런 책들을 손에 들고 읽을 때면 어김없이 손에 반짝이가 묻어나고, 책의 겉표지는 닳아서 번쩍임이 없게 변하고 맙니다. 이럴 거면 애초에 '무광'으로 만들면 되지 왜 빛바랜 책으로 만들어버리냔 말입니다. 더구나 손에 뭐를 묻히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에 이런 책은 굉장히 기피하게 됩니다. 소장용으로 책을 구매했는데 빛바래서 낡은 책이 되고마는 이런 '반짝이 겉표지', 제발 만들지 말아주세요. 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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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7-21 2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악! 리뷰만 읽었는데 왜 이리 재밌게 잘쓰신 거예욧! 전 문과라 이런 이과적 관점의 글은 절대 못쓰겠지만 철학과 맞닿은 문제라는것이 생길 수 있다는 것엔 공감합니다.
근데 전 저의 기억을 가진, 생체조직과 감각, 같은 겉모습이라해도... 홀로 불멸을 살고 싶지 않을 거 같아요.
잘 읽고 갑니다~~^^

異之我_또다른나 2023-07-21 23:40   좋아요 1 | URL
후훗~ 재밌게 읽으셨다니 참으로 고맙고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문과를 선택하셨군요. 저는 이과의 삶을 살다보니, 제 적성이 실은 ‘문과‘였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답니다. 나이 서른이 되어서야 ‘문헌정보학과‘를 선택해서 ‘책‘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어야 했는데, 하필 돌고 돌아 ‘이과와 문과‘를 두루 접하는 삶을 살게 되었답니다. 현재는 논술쌤이에요ㅋㅋ

저도 자연스런 죽음을 맞이하고 싶을 뿐입니다. 아직까지 불멸을 실현시킬 방법은 없답니다. 과학자들과 공학자들, 그리고 생명유전학자들이 연구하고 있긴 하지만 훗날에나 가능할 지도 모르는 방법일 뿐이죠. 현재까진 ‘냉동인간‘이 진행중이긴 하지만 되살아날 수나 있을런지 미지수랍니다. 불멸을 ‘과학적 실험‘으로 성공하기까지는 넘어야 할 난관이 너무 많아요ㅎㅎ

하지만 상상은 늘 즐겁죠. 그것이 ‘진리의 빛‘인 철학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면 더욱 뜻깊을테고요. 저는 이런 철학적 공상을 즐긴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