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바퀴 아래서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2
헤르만 헤세 지음, 한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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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이 소설은 '해설'이 없으면 이해하기 힘들다. 특히, 우리 나라처럼 '교육열'이 유난한 환경에서 이 소설은 자칫 '의지박약한 청소년'을 경계하라는 잘못된 메시지를 전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신동이라 불리던 한 소년이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 '명문학교'에 입학했음에도 친구를 잘못 만나서 '문제아'로 찍히게 되고, 학교생활에도 적응하지 못해 불명예스런 '휴학'을 했다가 끝내 사회에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는 줄거리로 읽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는, 제목에서 주는 '위압감' 때문에 '수레바퀴 아래' 깔리지 않으려면 '닥공(닥치고! 열심히 공부!!)'하는 학창시절을 참고 견디어야 한다는 강박감을 잘못된 선입견처럼 강제주입 받을 수도 있다. 그래서 <수레바퀴 아래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배경지식을 갖추어야만 한다.

 

  먼저, 주인공의 이름에 주목해야 한다. 이 소설은 '성장소설'에 해당하기 때문에 어린 소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 소년 주인공이 바르게 성장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것이 '주제파악'을 하기 위한 핵심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두 소년의 이름이 지니고 있는 뜻을 헤아려야 한다. 바로 '한스 기벤라트'와 '헤르만 하일너'다. 각각의 이름에 담긴 뜻은 '기벤라트(충고 좀 해줘)', '하일너(치유하다)'다. 이렇게 이름이 지니고 있는 뜻을 알고 나면 주인공 '한스'가 겪는 방황을 십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기숙사의 문제아로 낙인 찍힌 '헤르만'이 사실은 우리 사회가 지닌 병폐현상을 말끔히 '치유'할 수 있는 인재였음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사실 주인공 한스는 자기 스스로 원해서 '공부'를 한 것이 아니었다. 주위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저 어른들이 하라는대로 공부만 했을 뿐이다. 그런데 한스에게도 이렇게 공부하는 것이 마냥 싫은 것은 아니었다. 공부성적이 우수한 편이었기 때문에 공부를 하면 선생님을 비롯해서 동네어른들 뿐만 아니라 특히 아버지가 유독 기뻐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공부를 잘 하는 한스를 보며 기뻐한 것은 '한미한 가문'을 한스를 통해서 부와 명성을 높일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버지는 한스의 뛰어난 성적이 너무나도 자랑스러웠고, 대견해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한스는 공부가 즐겁지 않았다. 뛰어난 실력과는 별개로 점점 늘어나는 '공부분량' 때문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스는 점점 또래 친구와 어울리는 시간도 줄어들게 되었고, 스트레스를 받거나 두통에 시달릴 때마다 즐겼던 낚시와 산책도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한스는 학창시절을 '공부벌레'로만 살게 된 셈이다. 그럼에도 한스는 꾹 참고 공부에 매진한다. 아직 한스에게는 '공부'가 인생의 전부로만 보였기 때문이다. 주변의 어른들이 모두 한스에게 공부만을 권하는 분위기여서 한스는 더욱더 '다른 데' 한눈을 팔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게 바로 한스가 '신학교 합격'을 하고도 방학동안에 다른 여유를 갖지 못하고 교장과 선생과 목사에게 일주일 내내 '선행학습'을 한 까닭이다. 마치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마냥 앞만 보고 달리고 또 달리기만 했다. 합격자들 가운데 2위로 합격한 실력자가 입학과 동시에 성적이 뒤쳐지지 않도록 또 공부만 한 셈이다. 이런 한스에게 제대로 된 '충고(조언)'를 해주는 어른은 없었던 것일까? 사실 있긴 있었다. 동네에서 신발을 만드는 '가죽쟁이 아저씨'가 계셨는데, 오직 이 분만이 한스에게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절대 아니다'라고 유일하게 조언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스는 자신에게 유일하게 제대로 된 조언을 해주는 이 아저씨를 자주 찾아뵙지 않는다. 의도적이었던 것일까? 그보다는 주위에 온통 '공부하라'는 잘못된 충고를 하는 어른들 뿐이라서 제대로 된 인생조언을 듣고도 죄책감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한스의 잘못된 판단은 '문제아' 하일너를 만난 뒤에도 계속 이어진다.

 

  반면에 헤르만은 자유분방한 아이였다. 분명 36명밖에 합격하지 못하는 수재 중의 수재임에 틀림없었지만, 하일너는 '신학교'에서 고분고분하게 공부만 하다가 국가가 배출하는 '목사'가 되어 모두가 선망하는 대상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하일너는 그저 '안정된 돈벌이'나 '유망한 직장인'에 만족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 자신의 내면이 하고자 하는대로 나아가고 싶은 진취적이며 자유로운 영혼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하일너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자유롭게 지껄일 수 있는, 그렇지만 한껏 절제되고 엄선된 '언어'로 더욱더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일깨워줄 수 있는 '위대한 시인'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때로는 날카로운 사회비판을 담기도 하고, 때로는 아름다움, 그 잡채를 예찬하기도 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고 싶은 간절한 이유도 역시 '이름'과 마찬가지로 '하일너(치유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반된 두 소년이 어둡고 음침한 신학교 기숙사 '같은 동아리방'에서 만나게 된다. '모범생'과 '문제아'가 만나서 벌어질 일이 무엇이었을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책제목'에서 언급하고 있는 '수레바퀴'에 대해서 조망해야만 한다. 작가 헤세는 이 소설을 '자전적인 소설'이라 말했다. 자신의 어릴 적 경험에서 비롯한 소설이 창작된 셈이다. 과연 두 소년 가운데 누가 '작가의 어린 시절 모습'이었던 걸까? 헤세도 어릴 적에 자살시도를 했던 점에 비추어보면 아마도 '한스'였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은 '헤르만'이 작가가 되고 싶었던 이상형이었을 것이다. 실제로도 헤세는 목사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운 형편속에서 '목사'가 되길 강요받았지만 병약하고 자살시도 끝에 '시인'이 되길 꿈꿨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의 두 주인공 모두가 바로 '헤세의 어린시절'을 본뜬 자화상이랄 수 있을 것이다.

 

  소설속에서 한스는 결국 죽음에 이른다. 거대한 '수레바퀴 아래서' 깔려 죽고 만 셈이다. 여기서 '수레바퀴'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괴물과 다를 바가 없다. 아직 어린아이일 뿐인데 어른들이 시키는대로 하지 않으면 가차없이 밟아버리고 말겠다는 무시무시한 괴물처럼 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거대한 괴물에 깔려죽은 아이들은 '무엇'이고, 용케 살아남은 아이들은 '누구'란 말인가? 수레바퀴 아래 깔릴 운명은 다름 아닌 '사회부적응자'들이다. 기성세대가 만든 '수레바퀴'는 잘 굴러가기 위해서 그 밑에 깔릴 수밖에 없는 사람은 가차없이 밟고 지나가버린다. 그렇다면 수레바퀴에 깔리지 않고 용케 살아남은 사람들은 '제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인가? 그건 아니다. 수레바퀴가 '왜' 굴러가는지도 모른채 그저 굴러가는대로 아무 생각도 없이 '굴려지는 도구'로 길들여졌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 수레바퀴가 멈추면 모두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만 눈치껏 알고 있을 뿐, 그 수레바퀴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엇'을 위해 굴러가는지도 모른채 그저 '굴러가는대로' 돌고 또 돌아갈 뿐이다. 그러다 그 수레바퀴에서 '낙오'라도 되면 다시 깔릴 위험도 있고, 아니면 사회에서 버림을 받을새라 허둥지둥 '그 수레바퀴'에 다시 탑승하려 애쓰는 안쓰러운 상황만 펼쳐질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네 인생은 '수레바퀴 위'에 있는 것일까? 아래에 깔리면 사회부적응자이고, 위에 탑승하면 사회적응자라고 할 때, 수레바퀴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듯이 자유롭게 제 갈길을 가는 사람은 없는 것일까? 오직 그런 사람만이 '그 수레바퀴'를 굴리기 위해 '앞만 보는 말'에게 잔인한 채찍질을 가하는 마부(기득권층)와 맞설 '위대한 주인'인 것이다. 이 소설을 읽는 어린 독자들이라면 바로 이 '위대한 주인의 실체'를 마주해야만 하는 것이다. 비록 소설속의 주인공은 비극적인 죽음을 피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우리는 현명해지기 위해 공부를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지 현명해지기는커녕 '공부벌레'가 되어버리거나 '공부하는 기계'처럼 공부하는 학생들이 되고 만다. 점점 '아는 것'이 더욱 많아질터인데 도대체 왜 그런걸까? 바로 '왜' 공부해야 하는지 '목표'를 상실한 탓이다. 공부에 '성공보장 코스'라도 있는 것처럼 '명문고-명문대-대기업'이라는 코스를 밟아야만 성공한 인생이라는, 아니 적어도 '넉넉한 삶'과 '안락한 노후'를 보장받기라도 하는 양, '닥공'하는 청소년들이 너무 많다. 그것보다는 '나는 어른이 되어서 무엇을 할 것이다'라는 구체적인 꿈을 꾸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나는 학창시절에 지겹도록 공부만 해야 했지만, 어른이 되어서 꼭 '교육부장관'이 되어서 대한민국 청소년들이 즐겁고 재미나게 공부할 수 있는 교육환경을 만들 것이며, 그렇게 공부한 대한민국 학생들이 세계최고의 인재로 발돋움해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이는 멋진 사람이 될 것이..라는 멋진 꿈을 꾸는 학생들이라면 정말 좋겠다. 그저 돈 많이 버는 부자가 되고 싶다는 '목적달성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정한 꿈'을 꾸고 실현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멋진 삶'을 살아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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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에 17편의 리뷰를 작성했다.

통산 1600리뷰를 넘어섰고 '서평단 리뷰'는 1% 포인트가 줄어들었다.

카테고리별 리뷰는 '어린이책'에 집중한 달이었지만,

'인문학'과 '역사', '소설', '청소년', '과학' 카테고리의 책도 골고루 리뷰했다.

하지만 점점 '서평리뷰'는 줄어들고 '도서관 대여책'과 '내돈내산책'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거기에 '전자책'도 한 몫하고 있는데,

초창기엔 읽기 힘들던 '전자책'이 시력이 떨어지면서 점점 읽기 편해지고 있다.

'글자확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리뷰쓰기에 탄력이 붙었다.

8월에 더욱 뜨겁게 써보려 한다.


참, 독서어플은 '북플립'과 '북모리'를 함께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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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고려사 3 - 무신정권과 반란의 시대 박시백의 고려사 3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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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에서 집중조명해야 할 시대는 어디일까? 개인적으로는 '무신정변'으로 본다. 학창시절에는 '무신의 난'으로 배웠는데, 어느샌가 '정변'이란 명칭으로 불리면서 한층 격을 높여 바라보게 된 것도 한몫 했다. 과연 '무신정변'은 고려시대에 무엇이었을까?

 

  고려의 지배층은 '호족'으로 시작해서 '문벌귀족'으로 성장한 뒤에 '무신정변 이후' 문벌귀족이 몰락하고 '무신'들이 권력을 차지하더니 '몽골항쟁 이후' 원간섭기에 접어들면서 원나라의 뒷배로 성장한 '권문세족'이 집권을 했다가 고려말에는 '신진사대부'가 등장해서 조선개국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를 좀더 들여다보면 집권층을 '문신과 무신'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호족(무신)-문벌귀족(문신)-무인정권(무신)-권문세족(문신)-신진사대부(문신)으로 도식화 해보면 무신보다 문신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신이 집권을 하던 시대는 '호족'과 '무인정권' 때 뿐인데, 호족들도 초기에만 무신이었을 뿐, 광종의 과거제 실시 이후에는 호족들도 과거급제를 해야 대접을 받을 수 있었기에 빠르게 '문신'으로 변신하였고, 이후 문신으로 완전탈바꿈한 '가문'끼리 서로 혼인을 하며 '문벌귀족화'에 성공하였기에 호족들도 마냥 '무신집안'은 아닌 셈이다. 이렇게 고려는 '문신'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고, 문신이 집권하는 것이 태반이었다.

 

  그런데 '무신정변'이 일어나면서 문신들은 태반이 제거되고 말았다. 고려의 의종이 조선의 연산군처럼 사치와 향락으로 일관하며 허구헌날 잔치와 사냥을 벌이는 통에 '무신'들은 임금을 비롯해서 환관과 내시, 문신, 그리고 기생들까지 호위하기 바빴던 것이다. 말그대로 날이 좋아도 '호위', 날이 좋지 않아도 '호위', 날이 적당해도 '호위'만 하느라 잔치는커녕 놀이에도 끼지 못해 임금의 '관심'은커녕 날마다 퍼주는 '하사품'조차 챙기지 못하니 불만이 커져갈 뿐이었다. 그러다 하급 문신이 대장군의 뺨을 때리는 사건이 벌어지자 무신들은 일제히 칼을 들어 문신들을 도륙하는 일을 벌이게 된 것이다.

 

  이렇게 집권층이던 문신들을 깡그리 제거한 뒤에 무신들이 국정을 운영하려하니 제대로 될 턱이 없다. 일찍이 '문신'들이 도맡아서 하던 일을 어깨너머로 배웠다한들 '정치의 생리'조차 이해했을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문신들이 나서면 무신들은 어김없이 단칼에 베어 없애버리고 말았다. 무신들이 단단히 화가 났고 불만이 오래도록 쌓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신집권층'은 이의방을 필두로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으로 이어지다가 최충헌 대에 이르러 '최씨무인정권(60년)'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후 몽골항쟁을 하며 고려의 자존심(?)을 한껏 살리기는 하지만 끝내 '개경환도'와 함께 무인정권은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의 이야기는 4권에서 다룰 예정이니 잠시 뒤로 미루고, 3권에서는 '무인정권'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니 다시 집중하도록 한다.

 

  암튼, 고려시대에 무인정권은 '신분의 벽'을 허무는 시대였다. 무신정변의 주역들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반란의 주역들'도 노비, 천민, 농민 등 신분이 낮은 계층에서 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른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지 않다"는 외침이 여기저기에서 호응을 얻어 '신분상승의 기회'를 잡기 위해 수많은 민중들이 꿈틀꿈틀 대던 활기찬 시절이었던 것이다. 물론 왕조국가에서 '신분상승의 기회'라는 것은 대혼란을 뜻하기에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에겐 너무나도 고통스런 시절이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가난한 백성들은 태평성대에도 아프기는 마찬가지다. 가진 것이 많은 이들은 떵떵거리며 잘 사는 시절일수록 가난한데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타고난 이들에겐 '비극'일 뿐이니 말이다. 차라리 그럴 바에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단 한 방에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부와 권력을 거머쥘 수 있는 '혼란기'가 반가울(?)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찌보면 '무인정권시대'에는 신분에 관계없이 '능력'이 인정받는 시대임에 분명했다. 물론 과거에도 '신분상승의 기회'가 되었던 혼란기가 있기는 했다. 삼국시대에 숱한 '전쟁'이 그랬고, 후삼국시대에도 '능력'이 있는 사람이 대우를 받기도 했다. 허나 그시절에는 '골품제'라는 한계가 유능한 실력을 갖췄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인정받기 힘들었다. '장보고'가 그랬고, '최치원'이 그랬다. 후삼국시절에 '견훤'과 '궁예', 그리고 '왕건' 등이 호족이란 신분으로 임금의 자리까지 올라간 적이 있긴 했지만, 그들도 어느 정도 신분상의 우위를 차지하지 않았더라면 그 자리까지 결코 올라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무인정권시대'에는 그야말로 천한 신분의 사람이라도 '능력'을 인정받으면 제 실력껏 올라갈 수 있었다. 그 방법이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었다고 한들 그건 중요하지 않은 시대였다. 왜냐면 '대혼란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우리 민족이 맞이한 '최초'의 계층사다리가 무한정 제공되었던 셈이다.

 

  허나 마냥 긍정적으로 바라볼 것은 못된다. 왜냐면 그렇게 애써 '신분의 벽'을 허물었지만, 그로 인해 고려사회에 바람직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닥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계층사다리'도 옥석을 가려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날에는 빈부격차가 너무나도 심각해서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극에 달해 흙수저는 결코 금수저가 될 수 없는 비극이 펼쳐진 암울한 현실을 살고 있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는 사회는 끝내 비극적인 혼란을 맞이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고려시대 불만과 울분을 터뜨릴 수 없었던 무신들이 한순간에 폭발해서 모든 것을 때려부수던 것처럼 말이다. 그나마 이런 비극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선 천지가 뒤바뀌는 개혁과 피를 부르는 혁명 뒤에 찾아온 '신분의 벽'이 허물어지고 어렵게 되찾은 '계층사다리'를 보다 효율적으로 써먹어야만 할 것이다.

 

  그럴 때 소위 '흙수저들'이 대비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 썩어 문드러진 '고위층'을 제거한 뒤에도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해나갈 수 있는 역량을 키워나가는 것이다. 부정부패를 일삼고 '저들만의 잔치'를 벌이던 고위층을 싹다 제거한 뒤에도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지 않게 그들의 빈자리를 채우고도 남아야 한다. 아니 애초에 비었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완벽하게 채우고, 공정하고 안정하게 이끌 수 있는 역량을 갖춰야만 한다. 부패한 대기업들이 하루아침에 부도처리되어 무너진다한들 나라경제가 휘청거릴 걱정이 없게 경제적 건전성도 확보해두어야만 한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싶겠지만, 어느 시대에나 '유능한 인재'는 차고도 넘치게 많기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관건은 그런 인재를 잘 활용할 시스템이 없을까봐 걱정할 뿐이다.

 

  하지만 그런 걱정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무능한 정권'은 많았어도 '유능한 인재'가 부족했던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이 절로 통할 정도로 우리는 역사속에서 수많은 영웅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런 인재와 영웅들의 '인성'이 중요할 뿐이다. 뛰어난 능력을 갖췄는데도 '쓰레기 인성'을 갖고 있다면 가차없이 폐기처분하면 그뿐이다. 두 번 다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정도로 매장해버리는 건전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으면 된다. 우리가 만들어 나가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언제까지 입만 열면 시궁창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족속들을 그냥 바라보기만 할 것인가. 우리가 '무신정변'을 다시금 살펴볼 적절한 시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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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고려사 2 - 전쟁과 외교, 작지만 강한 고려 박시백의 고려사 2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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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게 고려는 어떤 나라인가? 고구려 때만큼 대륙을 호령하지도 못하고 숱한 외적의 침략을 받거나 '원간섭기'에는 식민지로 전락한 적도 있었으며 홍건적과 왜구 등의 노략질에 변변한 대응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다 500여년간 내우외환에만 시달리다 '조선'에게 나라를 내어준 별볼일 없는 나라로 연상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박시백의 고려사>를 읽다보면 '뜻밖의 고려'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고려가 그저 문약하기만 한 나라로 으레 짐작했다가 전혀 그렇지 않고 대단히 강건하며 대외적으로 결코 무시 당하는 나라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주변국들이 고려를 '상국'으로 대접하며 '자기편'으로 끌어들이지 못하면 '남의편'이라도 되지 못하도록 지극정성으로 고려를 대우하는 등 실로 '막강한 파워'를 자랑하는 나라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중국쪽의 침략을 받았더랬다. 거란(훗날 요)의 세 차례의 침략이 그랬고, 고려의 동북면에선 여진족(훗날 금)의 침략이 날로 거세졌고, 끝내 부족을 통일한 칭기즈 칸이 이끄는 몽골족(훗날 원)이 고려의 국경을 넘보더니 개경까지 집어삼키고 지독한 '원간섭기'를 겪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고려말엔 혼란한 정세를 틈타 '홍건적와 왜구'라는 도적떼들이 전쟁을 방불케하는 엄청난 규모로 고려를 괴롭혔지만, 고려는 이 모든 '외세의 침략'에도 멸망하지 않고 꿋꿋이 버텨내며 때로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유리한 상황으로 반전시키는 저력을 뽐내며 500여 년간을 이어온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하나의 왕조가 200여 년을 넘기기 힘든데도 '고려 500년 역사'를 달성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고려'를 다시금 되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 두 번째 책으로 이 책, <박시백의 고려사 2>은 '거란과의 전쟁'에서부터 '묘청의 난'까지 다루었다. 역사책 한 권 분량치고는 꽤나 빠른 진행인데, 이 책을 '전 5권'으로 마무리하겠다고 저자가 밝혔으니 한 권당 '100년의 역사'가 담겨 있는 셈이다. 비록 세세하게 개별적 사건을 깊이 다루지는 못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박시백만의 안목'이 담겨 있기에 믿음직한 구석이 있다. 바로 '날카로운 비평과 균형잡힌 관점'말이다. 이 책에서 주목해서 봄직한 대목은 세 가지다. 하나는 '거란의 침략'에 대처하는 고려의 자세이고, 둘은 '여진의 성장'과 이에 대한 고려의 대응, 그리고 마지막은 '이자겸'과 '묘청'이 일으킨 두 차례의 난을 평정하는 과정이다.

 

  익히 알다시피 고려는 태조 때부터 '북진정책'을 펼쳐 영토확장을 끊임없이 추구했다. 하지만 고려의 북방에 '거대한 세력'이 연속적으로 등장하는 바람에 고려는 '북진정책'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 세력 가운데 첫 번째는 바로 '거란'이었다. 고려가 아직 후삼국 통일을 달성하지 못했던 때에 북쪽에서는 발해가 든든히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하며 버티고 있었더랬다. 그런데 거란이 빠르게 성장을 하면서 송을 위협할 지경에 이르자 발해를 대대적으로 공격했더랬는데, 발해가 터무니없게도 멸망을 하고 말았다. 그렇게 거란이 세력을 확장하며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더니 송나라와도 본격적인 땅따먹기(?)를 시동하였다. 이제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로서는 거대해진 거란과 맞붙어 상대하기에 곤란한 지경에 이른 셈이다.

 

  이런 형국에 거란은 대대적인 송나라와의 전쟁을 치루기 이전에 '고려'에 본때를 보여주려 '1차 침입'을 했더랬다. 송나라 깊숙이(?) 공격을 했다가 송과 고려가 연합을 해서 거란을 협공이라도 하게된다면 곤란한 처지에 빠질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이에 고려에서는 '서희'를 앞세워 강화회담을 열었는데, 그 결과 거란군의 퇴각과 함께 '강동 6주땅'을 고려에 넘겨주게 되었다. 고려의 염원이었던 '북진정책'이 서희의 말 한마디로 달성하는 순간이었다. 이는 '고려의 역량'이 강력하지 않았더라면 성사될 수 없는 성과였다. 그도 그럴 것이 거란의 첫 침입에서 '고려의 반격'이 만만치 않았으며 고려를 정복하기 위해선 거란도 만반의 준비를 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거란은 '강동 6주'를 고려에 내어준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된다. 그래서 '2차 침입'을 해서 개경까지 함락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고서 쳐들어갔지만, 고려의 반격은 곳곳에서 완강했고, 끈질기게 이어졌다. 완벽한 승리를 거두지도 못하고 고려의 영토 깊숙이 쳐들어간 거란은 뒤늦게 '안전한 퇴각'을 약속받고 개경을 내어주고 되돌아섰지만, 돌아가는 길은 황천길이었고, 퇴각 중에도 전투는 끊임없이 이어져 거란으로 살아 돌아간 병사는 고작 '수천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60만 대군을 이끌고 온 것에 비하면 참패를 면치 못한 셈이다. 뒤이어 벌어진 '3차 침입'에서는 강감찬의 귀주대첩을 필두로 거란군은 고려의 영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거의 전멸하고마는 수모를 당한 뒤에야 고려를 더는 침략하지 못하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고려의 저력'을 느낄 수 있다. 주변 강대국들이 결코 함부로 깔보지 못하게 만들고, 실로 깔보기라도 하면 호되게 당하고 만다는 처절한 기억을 뇌리에 박아놓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을지문덕과 연개소문에게 각각 수나라와 당나라가 호되게 당했던 것처럼, 고려도 첫 번째 외세의 침략을 고구려 못지 않게 본때를 보여주게 된 것이다. 이런 성과는 훗날 여진과 몽골을 상대로도 여실히 보여주었다.

 

  먼저, 여진은 아에 고려를 침략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물론, 여진족이 완전히 통일하지 못한 채 부족별로 각자도생을 하던 시절에는 고려의 동북쪽 경계를 지속적으로 약탈하는 일이 끊이지 않았더랬다. 그때마다 고려는 달래기도 하고 토벌하기도 하는 등 양면정책을 펼쳤는데, 윤관이 '별무반'을 조직해 고려의 동북면을 정복해 '동북9성'을 쌓게 되면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애써 고려 백성들의 피와 땀을 바쳐서 '북진정책'을 완수해내었건만 계속되는 여진족의 침략에 고려가 '영토포기선언'을 해버린 것이다. 물론 꽁으로 내어준 건 아니다. 여진족에서 '영원토록 어버이로 섬기며 조공을 바치겠다'는 맹세를 받고, 더는 침략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이행한다는 약조를 받고 '동북9성'을 내어주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진은 그후 침략을 거의 하지 않았다.

 

  대신에 여진은 '완안부족'을 중심으로 여러 부족을 통합한 뒤에 요나라(거란)를 대대적으로 공략하며 영토를 넓혀나갔다. 여진의 거센 공격에 거란은 고려에게 구원요청을 했지만 고려는 거절하였다. 조선 광해군이 이런 고려의 '실리적 정책'을 본따 명청교체기에 톡톡히 써먹게 된 것이다. 고려는 힘만 센 것이 아니라 지략적으로 실리적 이득을 챙기는 나라였다. 아쉽게도 여진이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금'이라 칭하면서 부모로 섬기겠다던 고려에게 '형제의 예'를 요구하고, 더하여 '군신의 예'를 요구하였고, 고려는 이에 '사대의 예'로 화답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런 금나라의 무례한(?) 요구에 '큰 나라를 섬기는 이치'를 설법한 이자겸과 김부식이 내심 괘씸하기도 하다. 허나 거란의 잇따른 침략으로 백성들의 삶이 팍팍해진 뒤였고, 동북9성을 쌓을 당시 여진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상당기간 '소모전'을 경험하기도 했던 고려로서는 빠르게 성장하며 대륙을 호령하게 된 신흥강국 '금나라'와 대립을 한다는 것은 실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런 판단은 금나라도 마찬가지였다. 고려가 굳이 '군신의 예'를 다하고 '사대의 예'까지 올리며 체면(?)을 챙겨준다는데 굳이 상대하기 껄끄러운 고려와 전쟁을 벌이는 것이 현명치 못하다는 결단을 내린 셈이다. 이렇게 고려와 여진(금)은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처럼 고려는 힘을 보여줄 땐 확실히 보여주고 실리를 챙길 때에도 확실히 챙기는 확실한 나라였다. 이렇게 오랫동안 외세의 침략이 없는 '태평성대'를 이루면 좋으련만 나라밖이 조용해지니 나라안이 시끄럽게 되었다. 바로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이 그것이다. '이자겸의 난'은 왕실의 외척이 권세를 갖게 되면서 나라를 어지럽힌 사건이었고, '묘청의 난'은 도참사상과 풍수지리를 앞세운 '서경파'와 안정적이고 과학적(?)인 정책을 밀고 나간 '개경파' 사이의 갈등으로 왕권을 뒤흔든 사건이었다. 두 사건은 17대 임금인 '인종' 때 벌어진 사건이었는데 어린 나이에 등극하였는데도 슬기롭게 위기를 극복하고 왕권을 안정시킨 훌륭한 임금이라 할 수 있다. 기존에는 어린 임금이라 외척이 득세하여 정치를 말아먹고, 혹세무민하는 땡중이 요설로 현혹하여 나라를 위기에 빠뜨린 '무능한 임금'으로 생각하였는데, 다시금 살펴보니 국란의 위기에도 기죽지 않고 끝내 '왕권'을 지켜낸 '뛰어난 임금'으로 재평가받아 마땅하였다.

 

  한편,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은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 싶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일찍이 '묘청'과 '김부식'을 평가하면서 묘청을 '독립운동가'에 비유하고, 김부식을 '매국노'에 빗대며 '서경천도운동'이 실패한 것을 매우 안타깝게 주장했더랬다. 근데 묘청의 서경천도를 '윤석열의 용산이전'과 비교해보니 좀더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게 되었다. 두 사건은 모두 '풍수지리'를 앞세워 나라의 흥망성쇠가 마치 '서경천도(용산이전)'에 있다는 것을 설파했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천도(이전)'를 하면 흥하고 안 하면 망한다는 논리를 믿어야 한다는 것부터 억지였다. 인종 때에는 '이자겸의 난' 때문에 개경의 궁궐이 거의 불타 없어진 핑곗거리라도 있었지만, 멀쩡한 청와대를 두고 이전을 강행하는 것은 말도 안 될 일이었다.

 

  이렇듯 '서경천도'는 애초에 무리한 억지주장이었다. 그러나 인종이 스스로 '서경천도'를 없던 일로 하고 명석한 판단을 내렸는데도, 묘청은 '서경파'를 앞세워 군사를 일으키고 임금을 볼모로 잡아 서경천도를 강행하려 하였다. 이는 명백한 '반란'이었고, '역모'였다. 이런 사건을 두고 '독립당'과 '사대당'의 대결이라 비유한 신채호 선생은 시대적 아픔이 반영된 역사해석으로 보는 것이 맞는 듯 싶다. 실제로 김부식은 고려의 안녕과 실리적 이득을 위해 '사대의 예'를 끝까지 관철시켰기 때문이다. 때론 실력행사를 할 때는 할 수도 있을 법한데도 '국가의 존심'보다 '개인의 영욕(실리)'에 더 치중하는 모양새를 계속 관철했던 것이 욕을 먹기에 딱 좋았기 때문이다. 암튼, 묘청의 난을 다시금 재평가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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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로 간 뇌과학 - 테스토스테론 조직, 세로토닌 리더, 도파민 팀원
프레데리케 파브리티우스 지음, 박단비 옮김 / 한빛비즈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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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직문화는 어느 회사에서 다 있다. 1인 회사가 아닌 이상 여러 사람이 모이고, '여려 성향'이 어울려서 성장을 해나가야 살아남을 수 있는 까닭에 어느 회사나 훌륭한 '조직문화'를 갖추려 꽤나 노력하고 있다. 그렇다면 소위 '잘나가는 회사'에는 저마다 훌륭한(?) 조직문화를 갖추고 있는 것일까? 회사의 성과와는 별개로 '조직문화'는 정말 다양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잘 갖춰진 조직문화로 뛰어난 '시너지 효과'를 내어 별 볼일 없던 회사가 대학회사로 거듭나는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잘 갖춰진 조직문화는 무엇일까?

 

  이 책에서는 잘 갖춰진 조직문화를 이루기 위해서 '뇌과학'적인 접근을 선보이고 있다. 바로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고유한 성향'을 크게 4가지로 구분하고, 그 성향이 뇌에서 분비되는 '대표적인 호르몬'에 크게 영향을 받는 '신경 지문'을 사람마다 고유하게 가지고 있다고 분석하고서, 이런 성향이 골고루 갖춰져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 아주 잘 짜여진 '조직문화'일 수밖에 없고, 그런 훌륭한 조직문화를 갖춘 회사가 승승장구할 것이 틀림없다는 '과학적인 근거(?)'를 조목조목 나열하며 설득력을 높이고 있다.

 

  그 4가지 호르몬은 바로 '도파민', '테스토스테론', '세로토닌', '에스트로겐'이다. 도파민이 높은 사람은 호기심이 많고 활기차며 미래지향적이며, 테스토스테론이 높은 사람은 강인하고 단도직입적이며 권력 휘두르기를 좋아한다. 반면에 세로토닌이 높은 사람은 믿음직스럽고 꼼꼼하며 신중하고 성실하며, 에스트로겐이 높은 사람은 공감을 잘하며 개인 관계와 공동체 구축에 능하다고 한다. 이런 4가지 신경전달물질(호르몬)뿐 아니라 더 많은 호르몬에 영향을 받을 수도 있고, 개인적인 환경이나 경험, 그리고 성격에 따라서 호르몬에 강렬하게 반응할 수도 있고, 시원치 않은 반응을 보일 수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호르몬의 노예'라고 할 정도로 잘 적용된다는 점에서 꽤나 '과학적인 근거'로 신뢰할 수 있는 분석일 수 있다.

 

  허나 분석은 어디까지 분석일 뿐이다. 조직문화는 '호르몬'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호르몬의 영향을 받는 '인간'이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한마디로 아무리 호르몬이 분비된다고 해도 인간은 그런 호르몬의 영향조차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저마다 갖추고, 상황에 따라 시의적절하게 행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를 테면 과거에 유행했던 '혈액형별 성격테스트'라든지 요즘도 유행하고 있는 'MBTI 성향검사'나 아직도 굳게 믿어 의심치 않고 있는 '사주팔자(명리학)' 따위가 아무리 신뢰도가 높아도 이런 성향분석들은 거의 대부분 '통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말하는 '호르몬에 따른 성향분석'도 결국엔 '통계'에 근거한 분석일 뿐이라는 말이다. 물론, 훌륭한 조직문화를 만들 수 있다는데 이런 분석결과를 '믿고 안 믿고의 문제'로 따질 필요는 전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명심해야 할 것은 '맹신'은 금물이라는 사실이다. 이 책에서도 수많은 성공사례를 소개하고 있지만, 이것과는 별개로 '성공'에 이른 회사와 더욱 뛰어난 조직문화도 있다는 사실을 함께 알고 있으면 좋겠다.

 

  어쨌든, 이 책의 핵심내용을 정리하면, 훌륭한 조직문화를 만들기 위해선 '남성성(도파민, 테스토스테론형 인간)'과 '여성성(세로토닌, 에스트로겐형 인간)'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어져야 성공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사실이다. 이를 테면, 남성성(성별이 남자냐 여자냐는 중요하지 않다. 남성성이 강한 여자도 분명 존재하고, 그 반대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으로 충만한 회사에서 '여성성'을 지닌 조직원은 조직문화에 섞여들거나 성과를 내기 힘들 것이다. 다시 말해, 도파민과 테스토스테론이 강한 리더들 틈바구니에서는 활동적이고 강도 높은 일을 장시간 죽어라하는 사람만을 '최고'로 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런 마초회사에서 여유를 즐기거나 자기주장보다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는 조직원이 있다면 일만 하다 지쳐 녹초가 되기 십상이거나 일찌감치 사직서를 던지고 퇴사할 가능성이 더욱 높을 것이다. 반대로 여성성이 강렬한 회사라면 개인의 성과보다는 공동체 유지에 더욱 힘쓸 것이고, 일과 관련이 없는 것까지 꼼꼼히 챙겨야 하기 때문에 '성과중심적인 목표달성지향형 조직원'은 이런 회사에서 크게 활약을 하기는커녕 일에 적응도 하지 못하고 나가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어느 회사나 나름이 조직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그런 조직문화에 잘 스며들기 위해 '자신의 신경 지문'이 어떤 유형인지 스스로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이를 테면, 자신이 꼼곰한 성향의 테스토스테론과 공동체를 위해 언제든지 희생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춘 에스트로겐의 융합적인 성향(신경 지문)을 지녔다면, 자신이 조직에서 가장 활약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살펴서 회사조직에 긍정적인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지 점검해보라는 것이다. 만약,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나의 신경 지문'이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고 생각되면 '나에게 딱 맞는 조직'을 찾아 떠나는 것도 자신의 삶을 성공에 이르게 하는 효율적인 방법이란 말이다.

 

  이렇게 개인적인 면에서 '조직문화'에 스며들 때 활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이 책에서 특히 강조한 내용은 '좋은 회사'를 만들기 위해 사람을 바꾸려하지 말고 '상황'을 바꾸라고 조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까닭은 앞서 열거한 '신경 지문'이 워낙 고유한 것이고, 좀처럼 바꾸기 힘든 성향이기 때문에 '사람'을 바꾸는 것으로 훌륭한 조직을 만드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꾸기 쉬운 것은 무엇일까? 바로 '상황'이다. 일이 잘 되게 만들기 위해서 매번 '사람'을 자르고 다시 채용하는 일을 반복한다면 일의 성과목표에 다다르기도 전에 조직이 먼저 엎어지기 일쑤다. 반면에 '주변환경'을 바꾼다든지 '회사 분위기'를 바꾼다면 소위 '일할 맛'이 샘솟기 마련이다. 이렇게 바뀐 '상황'이 더욱 시너지 효과를 내기 위해서 꼭 신경써야 할 것은 바로 '신경 지문의 다양성'을 조화롭게 관리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한가지 성향만으로 조직인원을 채우기보다 4가지 성향의 조직인원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면 '상황'을 바꿨을 때 보다 큰 시너지 효과를 얻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단연 '관리자의 몫'이다.

 

  이 책은 이렇듯 기존의 자기계발서가 중요시 여기는 '사람 바꾸기'가 아닌 '상황 바꾸기'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특별한 책이기도 하다. 기존의 자기계발서에서는 끊임없이 '자기자신'을 바꾸길 권장하고 있는데, 이 책에서는 그보다는 우선적으로 '상황 바꾸기'를 통해 저마다 고유한 '신경 지문에 따른 성향'의 장점이 '시너지 효과'를 크게 내기 위해 '성향별'로 골고루 조직을 가꾸어나가는 것을 추천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유별나지만 독특한 책임에 틀림없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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