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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1 : 구운몽 ㅣ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1
윤병언 글, 정찬호 그림, 손영운 기획, 김만중 원작 / 채우리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조선 후기 가장 핫한 '애정소설'을 꼽으라면 <춘향전>을 꼽는 이들이 많겠지만, 나는 단연 <구운몽>이라 말할 것이다. 왜냐면 <구운몽>은 로맨스소설 코드의 정석이랄 수 있는 '잘난 남주'와 '예쁜 여주'가 등장하며 잘난 남주는 '하는 일'마다 대성공을 이루어 출세가도를 달리고, 예쁜 여주는 예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재주와 지혜마저 빼어나니 읽는 내내 흐믓하게 읽어낼 수 있어 '최고의 읽는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볍게 읽을 수 있는데도 '유교, 불교, 도교의 사상'이 적절히 녹아 있어 읽고 난 뒤에는 '철학적 사유'까지 즐길 수 있으니 단연 최고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디 그뿐인가. 대부분 '작가미상'인 한국고전소설에 비해 '서포 김만중'이 임금(숙종)에게 바른말을 간언하다 유배형을 받은 뒤 절해고도에서 홀로 계신 어머님을 위로하기 위해 하룻밤에 지어낸 소설로도 유명하니, '표현론적 관점' 뿐만 아니라 '반영론적 관점'으로도 소설을 감상할 수 있기에 읽는이로 하여금 다채로운 즐거움을 맛보게 할 수도 있다. 거기에 김만중이 이 책 이외에도 <사씨남정기>, <서포만필>과 같은 책들을 펴낸 까닭에 '작가의 생각(의도)'를 비교분석하는 즐거움 또한 빼놓을 수 없으니, 여러 모로 <구운몽>은 읽는 가치와 함께 재미까지 얻을 수 있는 소중한 우리 문학인 것이다. 여기에 '순한글문학'으로 펴냈으니 그 가치는 두 말할 것도 없다.
먼저, 장자의 '나비의 꿈'을 이야기 하련다. 바로 '꿈과 현실'에 관한 이야기다. 장자는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꽃들 사이를 즐겁게 날아다녔는데, 깨어보니 자신으로 돌아왔더라는 이야기다. 분명 장자와 나비는 '별개'이건만, 꿈이 진실인지 현실이 진실인지 '분별'하는 것이 어려운 까닭을 모르겠다는 말을 한다. <구운몽>에서도 성진은 불가의 몸으로 팔선녀를 희롱한 죄로 '양소유'라는 인간으로 환생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즐거움을 만끽하는 동시에 유한함을 깨닫는 순간, 다시 불가의 몸으로 되돌아와 큰 깨달음을 얻고 속세를 떨쳐내고 부처로 귀의하였다는 구성으로 이야기를 펼쳐냈다. 그런 까닭에 독자들도 완독을 한 뒤에 '성진의 삶'이 진실인지, '양소유의 삶'이 진실인지 속속들이 분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구운몽>은 분명 인간세상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유쾌한 이야기가 분명하지만, 그렇게 인간세상에서의 '해피엔딩'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된 것이로다는 '색즉시공'의 해탈의 경지에 다다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일반독자들은 혼란스럽기 그지 없다. 온갖 부귀영화가 다 부질없으니 '인생, 뭐 있어? 그냥 즐기는 거야!'라고 살라는 것인지, 만 가지 근심이 허황된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니 '무소유의 삶'으로 안분지족하며 살라는 것인지 헷갈리기 딱 좋다. 이를 김만중의 삶에 빗대어 분석한다면 나라에 충성하고 임금께 충신이 되길 마다하지 않은 결과가 '유배의 삶'이었고, 그 덕분에 홀로 계신 어머니를 제대로 모시지도 못하고 임종마저 지키지 못하는 '불효의 삶'을 살았으니, 김만중은 실로 '인생무상'을 제대로 느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 관점에서 김만중은 '유학자의 삶'을 살았으나 '불가의 도리'를 깨달아 덧없는 삶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줄이려 했을런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구운몽>은 유교, 불교, 그리고 도교의 사상이 적절히 배합되어 읽는 즐거움을 더해준다. 그중에서도 '입신양명'에 최선을 다하는 유가의 삶과 '색즉시공'의 깨우침을 목표로 삶은 불가의 삶의 '절충'을 모색한 점이 단연 으뜸이다. 도교의 색채는 신선과 선녀의 등장으로 몽환적인 느낌을 극적으로 살려내고, '몽유계 소설'이라는 장르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낸 것으로 최선을 다한 셈이다. 그러니 어떤 사상에 더욱 큰 가치를 두고 읽어도 무방하다. 하지만 난 '유교의 코드'로 <구운몽>을 읽어내는 것이 요즘 MZ세대들에게도 취향저격일 것이라 생각한다. 최근의 젊은이들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인고의 세월'을 이겨내는 것보다 '하나뿐인 인생'을 최선을 다해 즐기는 것을 미덕으로 삼고 있는 싶기 때문이다. 추호도 비난하려는 의도는 없으니 오해는 없길 바란다.
나 역시 '성진의 삶'보다는 '양소유의 삶'에 더욱 열광하는 독자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일개 서생에 불과한 양소유가 천부적인 재능을 뽐내며 '하는 일'마다 천복을 누리다 승상의 지위까지 얻어 최고의 명예를 다 누리는 삶을 누가 마다할 것이냔 말이다. 더구나 어여쁘고 어진 미녀를 아내로 맞이하는데, 하나가 아니라 여덟이라하고, 절세가인의 부인들이 시기와 질투로 싸우기는커녕 사이좋은 자매처럼 화목하게 지낸다니 '가정의 평화'는 모든 사내가 꿈꾸는 최고의 이상향이며, 그 자녀들 또한 더할 나위 없이 출중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니 얼마나 즐거운 소설이냔 말이다.
헌데 말이다. 과연 현실에서 '여덟 명의 아내'가 절세가인의 미모를 갖추고 재벌 못지 않은 부와 유명 아이돌 걸그룹의 멤버일 정도로 재능을 갖추고도 자매처럼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까? 이는 '일부일처제'였던 조선시대에도 불가능했다. 그리고 구중궁궐에 사는 임금도 '수많은 여인네'를 제것(?)처럼 여겼으나 그속에서 피어나는 암투는 늘 피비린내를 풍겼다는 사실만 보아도 비현실적인 요소다. 진정 소설의 허구가 아니고서는 절대로 불가한 현실을 꿈결처럼 창조해낸 김만중은 정말이지 최고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속에선 절대로 불가한데도 '현실'처럼 그려놓았으니 얼마나 대단하냔 말이다. 물론 <구운몽>에서 '양소유의 삶'은 꿈속에서 벌어진 일이니 그런 '비현실적인 요소'쯤이나 얼마든지 허락될 것이다. 여자들도 <꽃보다 남자>과 같은 드라마를 꿈꾸며 빵빵한 꽃미남들에 둘러싸여 행복한 비명을 지를 수 있지 않느냔 말이다.
하지만 꿈같은 현실은 매정한 현실에선 결코 '재현'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양소유의 삶'을 꿈꾸며 '성진의 삶'에 깊은 고민을 더할 수밖에 없다. 과연 어디까지가 나에게 허용된 '욕심'인가? 따위의 고민 말이다. 어찌 보면 우리네 삶은 욕심이 과해서 '무욕의 삶'을 살아야 할 필요성을 깨닫기보다는 더이상 버릴 욕심조차 없는 '무소유의 삶'을 강제하기에 욕심을 버릴 수 없게 만드는 비극을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이를 테면, 지금 사는 현실은 10억의 일확천금을 꿈꾸며 매주 로또를 구매하는 '200만원짜리 인생'을 살지만, 가혹한 현실은 10억이 없으면 살맛조차 느낄 수 없게 만들어 '실현되지 않는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마는 비극의 연속인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진의 삶'을 돌이켜 보아야 한다. 한낯 꿈에 불과한 '10억짜리 인생' 따위는 잊고 내 수준에 딱 맞는 '타협의 삶'을 최선을 다해 즐길 수 있길 바라면서 말이다.
그렇다고 '양소유의 삶'을 포기하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비록 이번 생은 '성진의 삶'을 살 운명일지라도, 운명처럼 찾아오는 '양소유의 삶'이 끝자락일지언정 놓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늘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면, 그뿐일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현실은 '팔선녀의 아내'를 맞이할 수 없어도 '팔선녀' 같은 하나 뿐인 아내와 함께 살아간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면 된다. 가끔 선녀처럼 보이지 않으면 어떤가. 가끔일망정 선녀처럼 보이는 마누라도 없이 쓸쓸이 늙어가는 나도 있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