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요 강귀찬 - 20년 차 만화가의 밥벌이 생존기
김한조 지음 / 파란의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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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가 들수록 자본주의사회에 환멸을 느낀다. 부익부빈익빈 현상은 날로 심각해지고 대한민국 1%의 금수저 반열에 오르는 '성공적인 환상'에 찌들어 사는 중장년층들로 넘쳐나기 때문이다. 더욱 큰 문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10대, 20대조차 돈 많이 벌어 넉넉한 노후를 살아가려는 '나약한 꿈'으로 가득하다는 점이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국가가 발벗고 나서서 '노후보장'을 책임져 준다면 좀 더 활기찬 삶을 살아가지 않을까 싶다.

 

  책을 읽고 있노라니 그런 생각이 더욱 간절해진다. 만화가로 성공적인 삶을 꿈꾸던 젊은이가 '생존'을 위해 밥벌이 걱정만 하고 사는 중년(40대 가장)이 되어 날마다 창문 너머로 뛰쳐나갈 '엔딩'만 그려대고 있으니 말이다. 최소한의 생계를 위해 온 국민에게 100만 원씩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지원해준다면, '아빠+엄마+자녀=300만 원'이라는 생활비가 보장이 되니, 아빠도 꿈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고, 엄마도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자녀도 미래를 설계하며 부푼 꿈에 나래를 펼칠 수 있지 않겠느냔 말이다. 책의 내용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기본소득'을 가지고 왈가왈부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대한민국에 만연한 '중년의 위기'로 고통받는 주인공을 보니 슬퍼져서 꺼낸 이야기니까 말이다.

 

  '만화가의 삶'은 고단하다. 몇몇 인기 만화가는 남부럽지 않은 풍요로운 삶을 살지만 대다수의 만화가들은 '성공의 반열'에 오르기 전까지 무일푼의 삶을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단 만화가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이 위로가 될까 싶지만, '창작의 고통'까지 짊어져야 하는 만화가의 삶은 시작부터 결코 쉽지 않다. 그런데도 지은이는 그런 고통을 20년 간 짊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대한민국 만화의 혹독한 생태계에서 생존하기까지 했다. 비록 '완벽 적응'으로 대단한 성공은 하지 못했고, 지금은 '절필선언'까지 해야 하는 처량한 처지에 놓여 있지만, 그렇게 홀로 쌓은 금자탑만큼은 누구도 뭐라 할 수 없을만큼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

 

  하긴, 돈벌이도 제대로 하지 못한 '금자탑'이 뭐 대단하다고 폄하할 수도 있을테다. 허나 그렇게 돈벌이도 제대로 못했는데 '20년 외길인생'을 살면서 버틴 것만으로도 대단하지 않느냔 말이다. 이것이 대단한 까닭은 또 있다. 우리네 삶이 대부분 이러하기 때문에 그렇다. 대한민국 90%에 달하는 '흙수저의 삶'이 이렇다. 아무리 힘들어도 버티고 또 버티는 '존버의 삶' 말이다. 언젠가는 대박을 터뜨릴 것이라는 믿음조차 산산히 부서진 '존버의 삶'은 어느새 우리가 쉽게 마주할 수 있는 일상이 되어 버린 지 오래 되었기에 하는 말이다. 이를 대단하다 추켜세우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혼란의 시대'를 겪게 될 것이다.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길고 긴 혼돈으로 빠져들어서 말이다.

 

  이젠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대신 '티끌은 모아도 티끌'이라는 말을 쓴다.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는 길이 열린 사회가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아빠찬스'가 없으면 성공은 꿈도 못 꾼다. 다시 말해, 돈이 없으면 '좋은 돈벌이'도 얻지 못한단 말이다. 그런 기회조차 '돈'이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에는 어떤 꿈과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그것만 귀띔해주어도 살만한 세상이 될터인데, 그런 귀띔조차 해주는 이가 없다. 왜? 모든 해결방안은 '돈'에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의 대한민국은 오직 '돈'만 꿈꾼다. 돈돈돈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헬게이트'가 열려버렸기 때문이다.

 

  그럼 그 '지옥문'으로 들어가지 않을 방법은 정녕 없단 말인가? 이 책의 주인공 '강귀찬'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의외의 해결방안이 보일 것이다. 돈 벌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자신의 모습'마저 에피소드 감으로 삼아 돈을 벌어보겠다는 '생존력'을 보란 말이다. 정말 처량하지 않은가 말이다. 오늘날의 중년의 모습이자, 대한민국 가장들의 웃픈 민낯이다. 돈 되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릴 것이 없다지만, 정녕 이처럼 '슬픈 자화상'을 그려가며 동정심을 자극할 일인가 말이다. 여기에 '구독'과 '좋아요', 그리고 '많관부' 따위를 준다고 해서 해결될 성 싶은가? 강귀찬의 모습이 바로 대한민국 90%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해결방법이 보인다.

 

  돈이 절실한 이들에겐 돈을 넉넉히 주면 해결된다. 많이 벌면 돈이 간절해지지 않게 된다. 아니 모자라지 않을 정도만 있어도 돈벌이에 영혼을 팔 생각도 하지 않게 된다. '기본소득'이 포퓰리즘이고 망국의 지름길이라 비난할 요량이면, 세금이라도 넉넉히 내란 말이다. 그럼 대한민국 '위기의 가정'이 험난한 삶을 벗어날 수 있는 기금이라도 마련해서 살기 위해 뭐라도 하려는 열심이들에게 '기회의 장'이라도 마련해줄테니 말이다. 이런 '복지정책'이 효율적으로 돌아갈 수 있게 금수저, 은수저 들에게 적극적인 과세정책을 밀어붙이란 말이다. 이런 정책을 추진하는 정당과 정치인에게 적극적인 투표를 해서 '대한민국 90%'가 기운을 낼 수 있게 만들란 말이다. 그런데 현실은 '대한민국 90%'가 금수저와 은수저 들이 내야할 세금을 깍아주는 일에 적극적이다. 저들이 부자가 아니면서 '부자감세'에 한 표를 던지고, 서민들의 등골만 빼먹는 정당과 정치인에게 열광을 한다. 미친 거 아니냔 말이다.

 

  물론, 이 책은 '정치이야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내용이다. 그런데 강귀찬의 인생을 보고 있으면, 가난은 게으른 자의 몫이라는 잘못된 인식만 심어주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정작 지은이 자신은 누구 못지 않게 열심히 살아왔으면서 말이다. 오히려 그런 자신을 '실패작'이라 자학을 하며, '실패한 삶'을 글감으로 삼아 '돈벌이'를 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렇게 살아간 20년이 정말 슬프고 비관적이었다면, 감히 이 책을 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역설적으로 자신의 삶이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은 20년간 별볼일 없이 살았지만, 지금도 이렇게 살아있노라고 외치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록 대단히 성공적인 삶을 살지는 못했지만, "나, 아직 안 죽었어요"라고 말이다.

 

  우리는 대부분 '강귀찬'처럼 살아간다. 나 역시 그렇다. 지난 18년간 '리뷰'를 써오면서 별다른 돈벌이도 못했지만, '코로나19'에도 살아남았다. 돈벌이가 궁해져 월 30만 원으로 근근히 버티기도 했지만, 결국 살아남았다. 물론 여전히 돈벌이 안 되는 '리뷰'는 계속 쓸 작정이다. 언젠간 나의 리뷰가 빛을 발해 성공하리라는 기대까지는 안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끊임없이 써갈 작정이다. 이젠 리뷰쓰기가 내 삶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니 말이다.

 

제이펍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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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 중립이 뭐예요? 미래를 여는 키워드 1
장성익 지음, 방상호 그림, 윤순진 감수 / 풀빛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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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한민국은 '기후 악당 국가'라고 한다. 전세계가 기후 변화로 몸살을 앓고 있는데 대한민국은 '온실가스 배출량 증가율 1위'를 달성했기 때문이란다. 이제 대한민국도 '기후 위기'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만 하는 결정적인 이유인 것이다. 갑자기 뭔소리냐고 되묻는다면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왜냐면 '인류 멸망 시나리오'가 착착 진행중인데도 아무런 경각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두서 없이 끔찍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얼떨떨한 분들도 많이 계실 것이다. 하지만 '대멸종'이라는 지구역사를 들어본 적이 있다면 반드시 관심을 가져야만 하기에 충격적인 소식부터 전달했던 것이다. 인류는 산업혁명 이후 석탄과 석유 등의 화석연료를 너무 많이 사용했고, 그로 인해 '이산화탄소(CO2)', '메탄(CH4)', '아산화질소(N2O)' 등 온실가스를 마구잡이로 배출한 결과 지구 평균 기온을 1.5도 이상 올려버리고 말았다. 그로 인해 21세기에 전세계는 '기후 변화'로 몸살을 앓았고, 2020년부터는 '기후 위기'라는 말을 쓸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닥치고 말았다.

 

  사실 지구는 더웠다 추웠다를 반복하며 오늘날에 이르렀기에 '기후 변화'는 자연적인 현상임에 틀림없다. 허나 그로 인해 '극심한 변화'가 찾아올 땐 어김없이 '대멸종'이 찾아왔고, 그때마다 생물종 가운데 '최상위계층'을 차지하고 있던 종이 절멸에 이르는 것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다섯 번의 대멸종이 있었고, 이제 '기후 변화'를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여섯 번째 대멸종이 찾아올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그 대멸종의 대상은 다름 아닌 '인류'가 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 시기는 점점 앞당겨져서 2050년 즈음이라던 것이 현재는 2035년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이를 두고 '기후 위기'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 다른 사실은 '극심한 기후 변화'로 인해 달라지는 것은 지구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크게 없다는 것이다. 예전에 추웠던 곳이 더워지고 비가 내리지 않아 건조했던 지역이 비가 많이 내린다는 것 뿐이다. 그리고 지구 전체적으로 뜨거워진 탓에 극지방의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몇 미터 상승하고, 그로 인해 태풍이나 허리케인이 좀 더 강력해지고 자주 발생하고...뭐 그 정도의 변화만 있을 뿐이다. 문제는 '적응할 시간'보다 더 빠르게 변한다는 것이다. 예년과 다른 기후에 적응해서 '도시' 전체를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옮기면 되고, 해수면이 상승하니 '도시' 전체를 조금 더 고지대로 옮겨 놓으면 되고, 식량생산을 하던 곡창지대도 '다른 곳'으로 옮겨서 재배를 하면 될 일이다. 허나 인간은 그렇게 빠르게 적응할 시간도, 돈도, 그밖의 다른 여력도 없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이를 테면, 한반도 남쪽의 곡창지대는 평균기온 상승과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더는 재배할 수 없는 환경이 될테니, 북쪽의 개마고원...그때쯤이면 고원도 아니고 따뜻해질테니 '개마평원'으로 곡창지대를 옮기면 될 일이다. 문제는 국경과 난민일텐데...그걸 해소하지 못하면 전지구적인 대혼란은 불가피하게 될 것이다.

 

  물론 아직까진 '가상 시나리오'일 뿐이다. 지구가 더 뜨거워진다고 해서 꼭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도 없다. 허나 여태까지 '지구의 역사'는 그래왔다. 앞으로 그러지 않을 것이란 '낙관'도 절대 보장 받기 힘들다는 각성이 필요하단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당장 해야 할 일은 더는 '온실가스'를 배출하면 안 된다. 지구가 뜨거워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까닭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에너지원'으로 화석연료 사용을 절대적으로 줄여야 한다. 그래서 '대체에너지'가 절실한데, 그건 이미 우리가 확보해놓고 있다. '태양열', '태양광', '바람', '물' 따위의 천연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전환해서 쓰는 것이다. 지금 전세계적으로 대체에너지를 2050년 이전에 완벽하게 대체해서 더는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겠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까닭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현재는 어떨까? '대체에너지' 활용을 늘리기는커녕 오히려 '화력발전소'를 추가건설하는 어처구니 없는 짓을 저지르고 있다. 줄여도 시원찮을 마당에 말이다. 그런 이유에서 우리나라를 '기후 악당 국가'라고 부른다고 한다. 온실가스 배출은 더 늘리면서 에너지 소비율은 줄이지 않고 오히려 더 펑펑 쓰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제 대한민국은 기후 위기에 큰 책임을 져야만 한다. 더는 '지속가능한 발전' 따위의 허울 좋은 변명이나 늘어놓을 수 없는 상황을 직면하게 되었다. 이제는 '탄소중립', 다시 말해, 탄소배출량 제로를 실현시켜야 한단 말이다. 어정쩡하게 실현 불확실한 기술 따위로 다른 나라를 현혹하거나, 대한민국의 숲은 경제발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파괴하면서 다른 나라에 숲을 조성하는데 열을 올리는 요상한 짓도 그만 두어야 한다. 현재의 대한민국의 기술력과 자본이라면 '탄소중립'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단지, 기업들의 '이윤감소'라는 짐을 떠안기 싫어서 차일피일 미루고, 정치인들도 기업의 눈치를 보며 '탄소중립정책'을 미적거리고 있는 것이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오히려 대한민국 국민들은 준비가 다 되어 있는데 말이다.

 

  잠깐의 편리함을 참고 지구를 지키는 일이라면 우리만큼 열심인 사람들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제 '기후 위기'를 넘어 '인류 멸종 위기'에 직면했다는 경고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이제 더 미루는 것은 더 끔찍한 현실을 맞이할 수밖에 없게 만들 것이다. 국민들은 줄일대로 다 줄였으니, 이제 '기업'과 '정부'가 줄여야 한다. 펑펑 쓰는 에너지부터 획기적으로 줄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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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늘도 떠나지 않습니다 - 코드블루 현장에 20대 청춘을 바친 중환자실 간호사의 진실한 고백
이라윤 지음 / 한빛비즈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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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호사는 어떤 직업일까? 정작 병원에서 근무를 하고 있는데도 잘 모르겠다. 물론 나는 '비정규직'에 '비의료진'인 탓에 커다란 병원의 부속품처럼 근무를 하고 있으니 그럴 법도 하지만, 의료진들조차 '간호사'에 대한 인식이 나와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모르고 있는 것 같기에 하는 말이다. 그저 '백의의 천사가 아니다'라는 사실만 확실히 알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 간호복이 '하얀색'에서 벗어난 것은 오래 되었다. 그리고 '치마'를 입은 간호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간호라는 업무가 매우 '고강도'인 까닭에 불편한 복장은 방해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간호사들은 대개 '딱딱한 말투'를 쓴다. 간호사 복장을 하고 있다고 해서 천상의 목소리로 응대해줄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하지 말길 바란다. 그들이 받는 업무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에 '웃는 얼굴'을 하고 있어도 말투는 신경질적인 경우가 많으니 묻지도 따지지도 말길 바란다. 그게 그들을 덜 피곤하게 만들테니 말이다. 그나마 코로나19 이후에는 마스크로 가리고 있어서 웃는 얼굴조차 볼 수 없게 되었다.

 

  이 책을 쓴 글쓴이는 '중환자실'에서 10년을 버텼다고 한다. 중환자실을 비유하자면 '전쟁영화 초반 5분'이 적절할 것이다. 생과 사의 갈릴길에 선 환자를 둘러싸고 수십 명의 의료진이 달려들어 말 한마디 없이 눈빛만으로 각자의 할 일을 하고, 들리는 것이라고는 귀에 거슬리는 의료기구들의 신호음과 의료진들의 거친 숨소리 뿐이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그 어느때보다 번뜩인다. 누가 뭣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필요한 것이 전달되고, 심지어 다음 상황이 어떻게 벌어질지 예상하고 움직이기도 한다. 간혹 고성이 오가는 경우는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얼떨떨하게 바라만 보고 있는 '신입들'의 몫이고, 뒤늦게 '응급상황'을 전달받은 보호자들이 찾아와 살려내라고 소리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코드블루(성인환자) 또는 레드(소아환자)[이런 색깔구분은 병원마다 다른 것 같다] 상황에서 심폐소생술이 필요한 경우에는 온 병원의 의료진들은 그 장소로 우르르 달려갈 뿐이다. 그 뒤에 벌어지는 상황은 아까와 똑같다. 환자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총동원하고, 필요한 경우 보호자의 동의서를 받기 위해 촌각을 다퉈 달려가는 일이 무한히 반복된다. 그런 중환자실에서 10년 넘게 근무를 선다는 것은 '전장터 한복판'에서 버티고 살아남았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무엇이 글쓴이를 그 극한환경에서 버티게 만들었던 걸까? 고액의 연봉일까? 물론 간호사 연봉도 꽤 높은 편이다. 하지만 큰 병원이 아니라면 그리 높은 축에도 끼지 못할 뿐더러, 큰 병원이라면 일의 강도는 가히 '살인'적인 경우가 많다. 그러니 돈을 많이 준다는 꾐(?)에 빠져 '중환자실'에서 10년 동안 버티는 이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간호업무의 소명감 때문일까? 아픈 환자를 돌보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소명의식'을 부여하는 일은 흔하지만, 소명의식은 각자 마음에서 스스로 우러나오는 것이지 남들이 왈가왈부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기에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시 말해, 너는 간호사 복장을 하고 간호업무라는 '숭고한 일(?)'을 하고 있으니 뛰어난 사명감을 발휘해서 죽은 사람도 살릴 각오로 봉사하라고 그 누구도 '강요'할 수 없단 말이다. 그러니 간호사 복장을 하고 있으니 당연히 '소명의식'도 있을 거라고 강요하지 말란 말이다. 그저 직장인일 뿐이다. 일한 만큼 돈을 벌러 온 사람이란 말이다. 그러니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는 간호사를 붙잡고 무조건 살려내라고 큰소리 칠 '권리'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소명의식' 따위를 함부로 떠들지는 말자.

 

  마침맞게 글쓴이도 말한다. 자신은 애초에 꿈이 '간호사'도 아니었고, 우연찮게 '간호업무'를 직업으로 삼게 되었으며, 10년이 넘은 지금도 '천직'이라는 생각따위는 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한마디로 하는 일이 힘들어서 지금 당장이라도 '그 자리'를 떠난다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말이다. 그런데도 이 책의 제목이 <저는 오늘도 떠나지 않습니다>란다. 천직도 아니고, 소명의식도 없는 간호사가 그 힘들다는 '중환자실'을 떠나지 않겠단다. 심지어 '코로나19'로 병상의 환자는 넘쳐나고 업무강도는 한계를 초월했을 때도 그저 버텨냈을 뿐이란다. 물론 힘듦에 지쳐 '후회' 한 적도 많다고 하지만, 만약 그랬으면 '지금의 나'로 존재할 수 없었을 거라고, 다른 일을 하고 있었더라면 '단단해진 나의 모습'에 만족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없었을 거라고 말한다. 인생을 잘 살아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만족감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토록 단단해진 간호사를 힘들게 하는 일은 이제 없을까? 아니다. 여전히 많다. 바로 인성이 글러 먹은 모자란 사람들, 전문용어로 '진상들'이 있기 때문이다. 비의료진인 나조차도 병원에서 일하다보면 이런 '진상들' 때문엔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래서 나는 요즘 말끝마다 "감사합니다"라고 한다. '괄호'를 붙여서 말이다. 이를 테면, 세 가지 유형으로 써먹곤 한다. 첫 번째는 "(진상 부릴만큼 부린 것 같은데 이제 좀 꺼져 주시면) 감사합니다", 두 번째는 "(진상을 요만큼만 부려주셨으니) 너무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어머! 진상을 많이 부릴 줄 알았는데 하나도 부리지 않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라는 용도로 써먹고 있단 말이다. 세상에서 박멸해야 할 것은 해충 뿐만 아니라 바로 이런 '진상들'이기 때문이다. 글쓴이도 오죽했으면 책의 첫머리를 바로 이런 '진상들의 사례'로 장식했을까?

 

  그렇다면 진상들을 애초부터 박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고객'이라는 말부터 없앴으면 한다. 바로 '손님은 왕이다'라는 사고방식이 문제인데, 언제까지 손님은 '무한권리'를 누리고, 직원은 '무한의무'만 져야 한단 말이냔 말이다. 병원을 찾아온 내원객들의 '민원업무'만 해도 정말 산처럼 많다. 해결해도 끝나지 않는 것이 '민원업무'의 특징이다. 하루종일 쏟아지는 내원객들의 불평불만은 어처구니 없는 것이 태반이기 때문이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보면 단박에 이해가 갈 것이다. 병원은 환자들의 안전을 위해 '보호자 1인'만 허용하곤 한다. 병실이 좁기도 하고 외래환자의 경우에도 너무 많은 내원객으로 인해 불미스런 일을 겪을 수도 있으니 불필요한 병원방문으로 병원업무를 마비시키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환자 1명에 보호자 2~3명이 찾아오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러면서 '자기 환자'는 특별하니(?) 허락해달라고 떼를 쓰곤 한다. 그래도 규정상 그럴 수 없으니 '보호자 1인'만 허용하겠다고 하면, 그때부터 어거지를 쓰기 시작한다. "너희가 뭔데 병원출입을 하라 마라야, 언제부터 병원이 이딴식으로 불친절했어? 아픈 환자를 상대로 장사를 하니 환자를 봉으로 아는 거야 뭐야? 니들이 늙은 환자들 상대로 '과잉진료' 청구해서 병원비 장난 아니게 비싼 게 하루이틀이냐구, 내가 니들 속셈 모를 줄 알아. 환자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기만 해봐, 당장 고소할테니. 감히 니까짓것들이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건데, 오호라~ 아주 잘 걸렸어. 니들 밥줄 내가 끊어지게 만들어줄테니 각오하고 있으라고, 알았으면 당장 내가 원하는대로 다 해달라고!!" 이 정도의 언행은 그나마 '보통수준'이다. 더 심한 경우도 많고, 다 들리는 혼잣말로 '육두문자'를 날리는(!) 경우는 너무 흔해서 말할 거리도 못된다.

 

  왜 지들만 '왕'일까? 한낱 백화점 상술에서 비롯되었다는 '손님은 왕'이다라는 것이 어찌하여 저들의 '신념'으로 승화되었냔 말이다. 입장 바꾸어 보란 말이다. 아픈 환자를 치료하고 싶은 의료진이 '환자'에게 집중하는 일은 당연한 것이다. 근데 보호자들이 감놔라 배놔라 '간섭'을 하면 집중을 할 수가 없다. 6인실 병동에 보호자가 열댓 명이 진을 치고, 병실로도 모자라 복도까지 점거하고 있으면 의료진이 어떻게 원활히 진료를 보겠느냔 말이다. 몰지각한 보호자들은 '환자이송'을 위해 마련한 엘리베이터까지 차지하고서 긴급한 상황에 오도가도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못들어오게 하는 것이고 제한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하나쯤이야'라는 식으로 다 알겠으니 나만 좀 '예외'로 해주세요라면서 생떼를 쓸 수 있느냔 말이다. 지킬 건 지켜야 '손님대접'도 제대로 받는 법이다. 그러니 '손님이고 지랄이고 누구도 왕이 아니다'라는 상식이 지켜졌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

 

  끝으로 자기 삶에 열심인 이들을 응원하려 한다. 이 책이 '간호사'에 관한 에피소드로 가득할지언정 간호사를 지망하는 이들만을 대상으로 쓴 책은 아닐 것이다. 힘들고 고된 간호업무를 통해서 인생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는 글쓴이를 응원함과 동시에 각자 자신의 일에서 쏠쏠한 돈맛과 일하는 보람을 얻고 있는 전세계의 모든 이들을 응원하고 싶기 때문이다. 하나뿐인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나 흔들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힘들고 지쳐서 마냥 쉬고만 싶을 때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다만 포기하지만 않으면 언젠가 '만족'이라는 결승선을 넘어서게 될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어차피 인생은 포기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다음 생을 기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힘들 땐 잠시 쉬어도 좋다. 하지만 당신을 응원하는 이가 분명히 있을 거라는 사실만은 기억해주길 바란다. 난 오늘도 이세상 모든 열심이들을 응원할테니 말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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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계획은 있다 - 미루는 습관 끊어내는 끝까지 해내기의 기술
피터 홀린스 지음, 솝희 옮김 / 한빛비즈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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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중요한 것은 '습관'이다. 거창한 계획을 짜고 화려한 시작을 알리지만 '용두사미'격으로 흐지부지 끝내고 마는 것도 습관이고, 이번에는 꾸준히 하고 부지런히 달리겠다고 다짐하지만 '작심삼일'형으로 중도포기하고 마는 것도 습관이다. 이 책의 제목처럼 <누구에게나 계획은 있다>지만 애초에 세운 계획을 끝까지 완수해내는 일은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습관'을 바꾸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끝내기 습관'을 갖기 위해선 3가지만 개선해도 충분할 것이다. 첫째는 생각은 그만하고 일단 실행하는 것이고, 둘째는 목표를 완수할 때까지 끝없이 동기부여해야 하는 것이고, 마지막은 완수의 걸림돌은 싹 제거하고 날마다 한발짝씩 나아가길 멈추지 않는 것이다. 이 책에는 그밖에도 여러 가지 귀띔을 제공하고 있지만, 위의 3가지가 가장 중요하고 나머지는 3가지에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는 '보조적인 수단'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수단은 '선언문 작성', '미루지 않기', '딴짓하지 않기', '과한 목표 세우지 않기' 등이다.

 

  그렇다면 한 번 세운 계획을 끝까지 완수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 다름 아니라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방법이고 성공하기까지 가장 빠른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한 번 시작했다하면 끝을 보고 마는 당차고 성실한 사람에게 '실패'란 어울리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인디언들이 기우제를 했다하면 100% 성공률을 자랑하는 것도 바로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멈추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공하는 DNA를 가졌다면 바로 '끝을 보는 습관'이 그 증거일 것이고, 끝을 보기 전에는 '결코 멈추지 않는 습관'을 가졌다면 당근 성공하기 마련일 것이다.

 

  이렇게나 '성공비결'이 쉽고도 간결하며 이해하기도 쉬운데 왜 성공하는 사람들이 적은 것일까? 그게 바로 '끝내기 습관'을 기르기까지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언제 성공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으니 '끝장'을 보는 것도 언제일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저 묵묵히 '성공'에 다달았다고 모두가 인정할 때까지 '전진'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 까닭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적인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누구나 달성하기 쉬운 '단기목표'를 세우고, '완수의 기쁨'을 연속적으로 꾸준하게 만끽하는 것이 비결이라고 이 책은 지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창한 목표보다는 소박하지만 소중한 목표를 세우고, 어렵고 복잡한 목표보다는 쉽고 간단한 목표로 세분하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다. 그리고 성공비결의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는 '멀티테스킹'보다 한 가지에 집중하는 '싱글테스킹'에 주력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성공할 확률이 40~70% 정도라면 과감하게 추진하고, 이에 미치지 못한 낮은 확률로 '도박'을 하지도 말 것이며, 너무 확률을 높이기 위해 철저히 준비하느라 '타이밍'을 놓치지도 말라고 조언하고 있다. 그리고 너무 허황된 희망에 부풀어 오르지도 말 것이며, 너무 과도한 생각이나 너무 심한 걱정 따위를 할 필요도 없다고 못 박았다. 모두 '완수하는 습관'을 기르는데 방해가 되는 걸림돌이기 때문이다.

 

  자, 정리하면 성공비결은 간단하다. 끝장을 볼 때까지 멈추지 마라. 완수하는 습관을 들이면 누구나 성공에 도달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일단 세운 목표는 매일 꾸준히 밀고 나가는 힘이다. 그 힘을 잃지 않는 한 당신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올해 계획한 일이 있다면 아직 늦지 않았다. 설령 올해 안에 달성하지 못해도 괜찮다. 멈추지 않고 끝까지 해낸다면 당신의 성공습관은 빛나는 결말을 달성할테니 말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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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1 : 구운몽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1
윤병언 글, 정찬호 그림, 손영운 기획, 김만중 원작 / 채우리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조선 후기 가장 핫한 '애정소설'을 꼽으라면 <춘향전>을 꼽는 이들이 많겠지만, 나는 단연 <구운몽>이라 말할 것이다. 왜냐면 <구운몽>은 로맨스소설 코드의 정석이랄 수 있는 '잘난 남주'와 '예쁜 여주'가 등장하며 잘난 남주는 '하는 일'마다 대성공을 이루어 출세가도를 달리고, 예쁜 여주는 예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재주와 지혜마저 빼어나니 읽는 내내 흐믓하게 읽어낼 수 있어 '최고의 읽는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볍게 읽을 수 있는데도 '유교, 불교, 도교의 사상'이 적절히 녹아 있어 읽고 난 뒤에는 '철학적 사유'까지 즐길 수 있으니 단연 최고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디 그뿐인가. 대부분 '작가미상'인 한국고전소설에 비해 '서포 김만중'이 임금(숙종)에게 바른말을 간언하다 유배형을 받은 뒤 절해고도에서 홀로 계신 어머님을 위로하기 위해 하룻밤에 지어낸 소설로도 유명하니, '표현론적 관점' 뿐만 아니라 '반영론적 관점'으로도 소설을 감상할 수 있기에 읽는이로 하여금 다채로운 즐거움을 맛보게 할 수도 있다. 거기에 김만중이 이 책 이외에도 <사씨남정기>, <서포만필>과 같은 책들을 펴낸 까닭에 '작가의 생각(의도)'를 비교분석하는 즐거움 또한 빼놓을 수 없으니, 여러 모로 <구운몽>은 읽는 가치와 함께 재미까지 얻을 수 있는 소중한 우리 문학인 것이다. 여기에 '순한글문학'으로 펴냈으니 그 가치는 두 말할 것도 없다.

 

  먼저, 장자의 '나비의 꿈'을 이야기 하련다. 바로 '꿈과 현실'에 관한 이야기다. 장자는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꽃들 사이를 즐겁게 날아다녔는데, 깨어보니 자신으로 돌아왔더라는 이야기다. 분명 장자와 나비는 '별개'이건만, 꿈이 진실인지 현실이 진실인지 '분별'하는 것이 어려운 까닭을 모르겠다는 말을 한다. <구운몽>에서도 성진은 불가의 몸으로 팔선녀를 희롱한 죄로 '양소유'라는 인간으로 환생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즐거움을 만끽하는 동시에 유한함을 깨닫는 순간, 다시 불가의 몸으로 되돌아와 큰 깨달음을 얻고 속세를 떨쳐내고 부처로 귀의하였다는 구성으로 이야기를 펼쳐냈다. 그런 까닭에 독자들도 완독을 한 뒤에 '성진의 삶'이 진실인지, '양소유의 삶'이 진실인지 속속들이 분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구운몽>은 분명 인간세상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유쾌한 이야기가 분명하지만, 그렇게 인간세상에서의 '해피엔딩'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된 것이로다는 '색즉시공'의 해탈의 경지에 다다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일반독자들은 혼란스럽기 그지 없다. 온갖 부귀영화가 다 부질없으니 '인생, 뭐 있어? 그냥 즐기는 거야!'라고 살라는 것인지, 만 가지 근심이 허황된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니 '무소유의 삶'으로 안분지족하며 살라는 것인지 헷갈리기 딱 좋다. 이를 김만중의 삶에 빗대어 분석한다면 나라에 충성하고 임금께 충신이 되길 마다하지 않은 결과가 '유배의 삶'이었고, 그 덕분에 홀로 계신 어머니를 제대로 모시지도 못하고 임종마저 지키지 못하는 '불효의 삶'을 살았으니, 김만중은 실로 '인생무상'을 제대로 느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 관점에서 김만중은 '유학자의 삶'을 살았으나 '불가의 도리'를 깨달아 덧없는 삶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줄이려 했을런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구운몽>은 유교, 불교, 그리고 도교의 사상이 적절히 배합되어 읽는 즐거움을 더해준다. 그중에서도 '입신양명'에 최선을 다하는 유가의 삶과 '색즉시공'의 깨우침을 목표로 삶은 불가의 삶의 '절충'을 모색한 점이 단연 으뜸이다. 도교의 색채는 신선과 선녀의 등장으로 몽환적인 느낌을 극적으로 살려내고, '몽유계 소설'이라는 장르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낸 것으로 최선을 다한 셈이다. 그러니 어떤 사상에 더욱 큰 가치를 두고 읽어도 무방하다. 하지만 난 '유교의 코드'로 <구운몽>을 읽어내는 것이 요즘 MZ세대들에게도 취향저격일 것이라 생각한다. 최근의 젊은이들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인고의 세월'을 이겨내는 것보다 '하나뿐인 인생'을 최선을 다해 즐기는 것을 미덕으로 삼고 있는 싶기 때문이다. 추호도 비난하려는 의도는 없으니 오해는 없길 바란다.

 

  나 역시 '성진의 삶'보다는 '양소유의 삶'에 더욱 열광하는 독자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일개 서생에 불과한 양소유가 천부적인 재능을 뽐내며 '하는 일'마다 천복을 누리다 승상의 지위까지 얻어 최고의 명예를 다 누리는 삶을 누가 마다할 것이냔 말이다. 더구나 어여쁘고 어진 미녀를 아내로 맞이하는데, 하나가 아니라 여덟이라하고, 절세가인의 부인들이 시기와 질투로 싸우기는커녕 사이좋은 자매처럼 화목하게 지낸다니 '가정의 평화'는 모든 사내가 꿈꾸는 최고의 이상향이며, 그 자녀들 또한 더할 나위 없이 출중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니 얼마나 즐거운 소설이냔 말이다.

 

  헌데 말이다. 과연 현실에서 '여덟 명의 아내'가 절세가인의 미모를 갖추고 재벌 못지 않은 부와 유명 아이돌 걸그룹의 멤버일 정도로 재능을 갖추고도 자매처럼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까? 이는 '일부일처제'였던 조선시대에도 불가능했다. 그리고 구중궁궐에 사는 임금도 '수많은 여인네'를 제것(?)처럼 여겼으나 그속에서 피어나는 암투는 늘 피비린내를 풍겼다는 사실만 보아도 비현실적인 요소다. 진정 소설의 허구가 아니고서는 절대로 불가한 현실을 꿈결처럼 창조해낸 김만중은 정말이지 최고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속에선 절대로 불가한데도 '현실'처럼 그려놓았으니 얼마나 대단하냔 말이다. 물론 <구운몽>에서 '양소유의 삶'은 꿈속에서 벌어진 일이니 그런 '비현실적인 요소'쯤이나 얼마든지 허락될 것이다. 여자들도 <꽃보다 남자>과 같은 드라마를 꿈꾸며 빵빵한 꽃미남들에 둘러싸여 행복한 비명을 지를 수 있지 않느냔 말이다.

 

  하지만 꿈같은 현실은 매정한 현실에선 결코 '재현'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양소유의 삶'을 꿈꾸며 '성진의 삶'에 깊은 고민을 더할 수밖에 없다. 과연 어디까지가 나에게 허용된 '욕심'인가? 따위의 고민 말이다. 어찌 보면 우리네 삶은 욕심이 과해서 '무욕의 삶'을 살아야 할 필요성을 깨닫기보다는 더이상 버릴 욕심조차 없는 '무소유의 삶'을 강제하기에 욕심을 버릴 수 없게 만드는 비극을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이를 테면, 지금 사는 현실은 10억의 일확천금을 꿈꾸며 매주 로또를 구매하는 '200만원짜리 인생'을 살지만, 가혹한 현실은 10억이 없으면 살맛조차 느낄 수 없게 만들어 '실현되지 않는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마는 비극의 연속인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진의 삶'을 돌이켜 보아야 한다. 한낯 꿈에 불과한 '10억짜리 인생' 따위는 잊고 내 수준에 딱 맞는 '타협의 삶'을 최선을 다해 즐길 수 있길 바라면서 말이다.

 

  그렇다고 '양소유의 삶'을 포기하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비록 이번 생은 '성진의 삶'을 살 운명일지라도, 운명처럼 찾아오는 '양소유의 삶'이 끝자락일지언정 놓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늘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면, 그뿐일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현실은 '팔선녀의 아내'를 맞이할 수 없어도 '팔선녀' 같은 하나 뿐인 아내와 함께 살아간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면 된다. 가끔 선녀처럼 보이지 않으면 어떤가. 가끔일망정 선녀처럼 보이는 마누라도 없이 쓸쓸이 늙어가는 나도 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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