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과 선생님이 뽑은 채만식 탁류 북앤북 논술문학 읽기 2
채만식 지음 / 북앤북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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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CIV / 북앤북 1번째 리뷰] 학창시절 <레디메이드 인생>가 실린 국어교과서로 만난 채만식은 일제식민시대에 투철한 사회의식을 갖춘 사실주의 작가로 달달 외웠다. 그의 사진으로 실린 모습에서는 활짝 웃고 있는 모습에 선한 인상마저 받았다. 하지만 그는 '변절한 지식인'으로 친일명단에 올랐고, "조선의 젊은이들이여, 일제가 일으킨 전쟁이 나가라"라는 증거는 글로 명백히 남아 있다. 일제식민시대의 부조리와 모순을 고발하던 그가 이런 글을 남긴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런 민족을 배반한 변절자의 작품을 우리 학생들이 배우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지 의심이 들고, 이에 대한 변명이라도 듣고 싶지만, 채만식은 해방 이후 <민족의 죄인>이라는 작품으로 사죄를 대신하고서 더는 말이 없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그해에 폐결핵으로 숨을 거두었다. 이제 남은 숙제는 그의 작품을 읽고 직접 판단하는 일만 남은 셈이다. 그는 정녕 '변절자', 그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일까? 그나마 해방 이후 변절한 친일지식인들 가운데 유일하게 사죄를 밝힌 유일한 지식인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고들 하지만, 잘못에 대한 반성은 직접적인 사죄가 아니면 용서할 수 없는 범죄라는 점에서 생각해보면, 채만식만큼 솔직한 인사도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이제 다시 그의 작품을 읽어본다.

소설 <탁류>는 100년 남짓한 시간이 지금도 읽기에 부족한 점이 없는 탄탄한 플롯을 지녔다. 비록 시간적 배경이 100여 년 전이라서 매우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아리따운 미모의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것이 확인되는 2장부터는 술술 읽히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녹록치 않다. 첫째는 투전판에서 돈을 다 잃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람이 그녀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아버지의 강압에 못이겨 '돈 많은 남자'를 남편으로 맞이하지만, 그 남편이라는 작자는 타락한 호색한으로 유부녀와 바람이 났다가 현장에서 죽임을 당하고 만다. 그렇게 남편을 잃어버린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운 미모를 간직하고 있었고, 남편이 죽자 곱사등이에 병신 같은 놈팽이에게 그만 강간을 당하고 만다. 그렇게 의지할 곳 없어 방황하던 차에 오래전부터 그녀의 미모를 탐내던 아버지의 친구에게 넘어가 몸을 의탁하게 된다. 하지만 평온할 틈도 없이 그녀 앞에 강간범이 다시 나타나자 아버지의 친구는 그녀를 더럽다며 버려버리고 만다. 그렇게 그녀는 아름다운 미모로 강간범과 함께 살게 되지만, 몸이 병신이 아니라 정신마저 병신 같던 강간범과는 더는 하루도 같이 살 수 없는 절박한 처지에 빠지자, 그만 살인을 저지르고 만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그저 '딸아이 하나' 잘 키우는 환경일 뿐인데 말이다. 그런 딸을 위한 마음에 "죽자구 해도 죽을 수 없구...살자구 해도 살 수가 없다"고 외친다. 한 여인의 운명이 왜 이리도 기구한 것일까?

기구한 운명의 여인은 '초봉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그녀의 삶을 이처럼 기구하게 만든 원인은 '미모' 때문이었을까? 하긴 그녀가 예쁘지 않았다면 그녀의 주변에 이처럼 남자가 들끓지도 않았을 것이고, 조금 못나더라도 순박한 사내를 만나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가난' 때문이었을까? 그녀의 아버지가 투기꾼이 아니라 제대로 된 가장이었다면 그녀를 단지 '돈만 많은 남자'에게 시집을 가라고 강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초봉이가 남몰래 좋아했던 의사 조수였던 사내와 알콩달콩 살림을 차리고 넉넉하지는 않지만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갔을지도 모른다. 만약 불행의 원인이 '미모'라면 개인의 문제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가난'이라면 사회의 부조리가 한몫을 했을 것이다. 물론 '미모'가 원인이었더라도 예쁜 여자를 가만 냅두지 않는 '여성 인권'을 철저히 무시한 처사이니, 그 또한 사회적 문제로 지적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적 정황을 살펴보면 일제식민시대가 조성한 '사회문제'가 한 개인의 운명까지 기구하게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만약 일제가 조선을 식민통치함에 있어 매우 합당하고 합리적으로 지배했더라면 당시 사회분위기가 그리 엉망진창일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통치질서가 너무나도 무참했기에 사회조차 혼탁한 '탁류,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책의 제목이 '탁류'인 까닭도 바로 초봉이의 삶을 기구하게 만든 원인이 어지러운 사회속에서는 평범한 이들도 그 혼탁한 구렁텅이속에서 타락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에서 '초봉이' 같은 여인은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순박하고 청소한 외모의 스물한 살의 여자라면 필시 '대학생'일 것이다. 여대생이란 표현을 피한 까닭은 현재의 대한민국이 '여성의 인권'을 존중하는 상식적인 사회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리따운 외모에 더불어 재능까지 겸했다면 아이돌로 데뷔하여 인기정상의 엔터테인먼트로 활약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해서 우리 사회 역시 이 아리따운 여성을 가만 냅두지 않을 것이다. 그 시절보단 나은 편이긴 하지만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못난 남자들'이 정말 많기 때문이다. 착한 남자도 분명 많지만, 그에 못지 않게 나쁜 남자와 이상한(?) 남자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이런 지뢰밭을 미모의 여성 혼자 헤쳐나가기란 정말 힘들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현재의 대한민국도 여전히 '탁류'인 것은 매한가지다.

그럼 이처럼 '혼탁한 사회'를 졸졸졸 흘려보내고 맑고 깨끗한 '청류'가 흐르게 만들기 위해선 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 이런 질문을 민족배반자에게 묻는 것이 큰 실례가 되는 것은 아닐지도 의문이고 말이다. 하지만 이 작품도 그렇고, <태평천하>도 그렇고, 그가 쓴 대부분의 작품에서 비치는 '일제시대'는 하나같이 정상적인 것이 없다. 그런 비정상적인 세상에 가없는 비판을 쏟아낸 것이 바로 채만식이었다. 만약 그가 30년대, 40년대의 좌절을 겪지 않았다면 쉽사리 체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허나 그는 희망의 끈을 놓아버렸다. 아주 큰 희망을 품었음에도 끝내 그 희망을 달성하지도 못한채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그 때문에 <민족의 죄인>이란 마지막 작품을 반성하며 써내려갔는지 모른다. 다른 변절자들은 그조차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순박함'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순박함이 해방 직후에 벌어진 '또 다른 탁류' 앞에서 또 한 번 좌절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짧은 수명을 한탄하지는 않았을까?

암튼, 탁류를 청류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법치주의니, 합리주의니, 공리주의니, 어떤 것이든 좋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 최선이다. 죄가 있다면 그 죄를 달게 받는 사람을 존중하는 사회도 정의로운 사회의 모습일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각자의 몫으로 주어진 행복을 조금씩 나눌 줄 아는 사회일 것이고, 그렇게 희생한 소수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고 존중해주는 문화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청류'로 바뀌어진 사회의 모습일 것이다. 고용주는 노동자를 위해 아낌없는 투자를 하고, 노동자는 그런 고용주를 위해 부지런히 일하는 사회,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사회적 약자'의 고충을 빈틈없이 살펴보고, 우리가 걷어서 낸 세금이 필요한 곳에 적절히 쓰여지는 공공성과 투명성이 확보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도 그런 청류의 일부일 것이다. 어쩌면 청류란 바둑에서 말하는 '완생'의 개념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좁은 바둑판에서는 '미생'에서 '완생'으로 거듭나는 신의 한수가 존재하지만, 이 넓은 세상에서는 결코 '완생'을 확신할 수 없어 모두가 '미생'으로 남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결코 '청류'에서 살 수 없어 '탁류'에 머물고 있지만 끝없이 '청류'를 추구하는 시지프스의 운명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허나 어찌 시지프스가 불행하기만 할까? 건강을 위해서 헬스장 런닝머신에 올라 끝없는 제자리뜀을 하고 있지 않은 것이 현대의 시지프스 아니겠는가. 그 런닝머신 위의 모습이 현재는 똥배가 출렁거릴지라도 언젠간 '식스팩'이 될 것이란 희망을 품고 날마다 뛰고 있는 모습이 진정 멋진 모습은 아닐런지...

뭔가 장황한 마무리지만, 과거의 초봉이는 꿈꿀 수 없었던 현실을, 현재의 초봉이는 꿈꿀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넋두리를 읊어보았다. 더불어서 과거의 채만식은 좌절했지만, 현재의 대한민국을 살고 있었더라면 좌절을 넘어 '한류열풍'의 파도를 타고서 세계적인 작가로 거듭나지 않았을까 상상해보았다. 그러지 못한 그 당시의 비극적 운명이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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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81
제인 오스틴 지음, 박용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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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CIII / 문예출판사 8번째 리뷰] <오만과 편견>은 '가벼운 연애소설(칙릿, Chick Lit)'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앞서 마크 트웨인을 언급했지만, 그가 이 책을 비난한 까닭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작가는 '사회고발의 선구자'가 되어야 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만과 편견>을 쓴 제인 오스틴은 정말 '사회고발'과 같은 문제를 제시하지 않았을까? 이 소설의 주된 줄거리가 '베넷가의 딸들'이 각각 결혼할 남성을 사냥(?)하듯 무도회에 참석하는 장면이라는 점에서 가벼운 연애 소설이라고 확신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그 딸들의 어머니가 '돈 많은 남성들'을 자기 집에 초대하지 않는 남편을 향해 넋두리를 하는 장면을 보면 마크 트웨인이 왜 이 소설을 맹비난했는지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작가인 제인 오스틴도 책 첫머리에 [이 소설은 괜찮은 신랑감을 찾기 위한 여정임을 밝힌다]라고 썼다. 그래서 이 소설을 '가벼운 연애 소설'이라고 불러도 딱히 변명할 거리가 없을 것이다.

허나, 18세기 당시 영국사회에서 '한정상속법'이라는 것이 있었음을 간과한다면 이 책은 그저 그렇고 그런 '연애 소설'로밖에 볼 수 없지만, 당시 여성이 사회활동을 할 수 없고, 유일한 '수입원'은 부모의 상속이나 남편의 수입이 전부였다는 '경제적 예속 상태'에 묶여 있었던 것을 인식하는 순간, 이 소설은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사회고발성 문제작'으로 읽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 경제적 예속상태에 묶여 있는 여성이 '어떻게' 돈 많은 남성과의 결혼을 거절할 수 있었겠느냔 말이다. 그런데 이 소설의 주인공 '엘리자베스 베넷'은 당시 최고 갑부의 청혼을 당당히 거절하고 만다. 이는 엘리자베스가 넝쿨째 굴러온 복을 걷어찬 격이지만, '사랑'이 없는 '돈'만 보고 결혼한다면 자기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여기는 자유롭고 주체적인 영혼의 소유자 임을 포기하는 처사라고 당당히 밝힌다. 이런 여성을 두고서 마크 트웨인은 어찌 비난을 앞세웠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가 입버릇처럼 말했듯이, 그는 이 책을 끝까지 읽지도 않고서 책의 앞부분 몇 장만 읽고서 험한 말을 지껄임 셈이다.

18세기에는 영국을 비롯해서 전세계 여성들이 '경제적 독립'을 선언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수많은 여성들은 태어나서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결혼해서는 남편의 이름으로, 늙어서는 아들의 이름으로 '대신'하여 불릴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이름'조차 갖지 못하고, 혹여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 그리고 '누구의 엄마'로 불리는 것이 다반사였다. 이에 대해 여성들은 별다른 반박조차 할 수 없었다. 왜냐면 '남자의 경제적 위치'에 예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경제적 독립'을 선언하기 위해선 엄청난 비난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런데 당시 영국은 여성에 대한 또 하나의 굴레가 있었다. 바로 '한정 상속법'이라는 독소 조항이었다. 이 법은 아버지의 재산이 아무리 많더라도 그의 죽음으로 인한 상속 권한은 오직 '장자'에게만 있다는 것이다. 딸 자식에게는 한 푼도 주지 않는다. 심지어 아내마저도 상속 권한이 없다. 첫째 아들에게 넘겨진 재산상속으로 집안의 여성은 '빌붙어' 살아야만 하는 처지다. 만약 베넷 가문처럼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어찌 될까? 그렇다면 가장 가까운 친척 가운데 선별된 '남성'에게 상속 권한이 넘어가게 된다. 심지어 생판 모르는 남성일지라도 법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는 '콜린스'가 그렇게 등장하게 되었고, 베넷 가문의 다섯딸 가운데 한 명이 그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베넷씨가 사망했을 때, 그가 가진 재산은 몽땅 콜린스에게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생판 모르는 베넷 부인과 그녀의 다섯딸은 졸지에 살던 집에서조차 한 푼도 건질 것 없이 쫓겨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판국인데, 베넷 부인이 자신의 딸들에게 '돈 많은 남성'과 결혼을 서두르는 것이 볼썽사나운 모습이랄 수 비난할 수 있겠는가.

이런 설정속에서도 제인 오스틴은 엘리자베스 베넷을 빗어낸 것이다. 결혼으로 시작해서 결혼으로 끝나는 이야기속에서 말이다. 그럼 엘리자베스 베넷이 가장 원하는 신랑감은 어떤 조건을 갖춰야 했을까? 첫째로는 '오만'하지 않아야 했다. 엘리자베스는 다시와의 첫 만남에서 단단히 오해를 한다. 그의 첫 인상이 굉장히 '오만'했다고 평가를 내린 것이다. 그 까닭은 바로 무도회장에서 춤을 출 수 있는 남성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인데도, 다시가 고작 두 번의 춤밖에 추지 않고 많은 여성들이 누려야 할 기쁨을 단칼에 박살냈던 무뢰한이라고 단정한 것이다. 오늘날에서는 그러거나 말거나 '개인의 취향'이고, '존중받아 마땅한 자유'였겠지만, 당시 여성들에겐 유일하게 허락된 사회활동 중 하나인 '무도회'에 참석한 남성의 의무를 방기한 모습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춤추지 않을 바에는 참석하지 말았어야 하고, 참석했다면 넓은 아량을 베풀어서 여성들을 '기쁨'을 충족시켜주는 의무를 다했어야 했는데, 다시는 그런 남성이 아니었다고 비판한 셈이다. 하지만 이는 엘리자베스의 '편견'이었다. 다시에게는 나름의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사정이란 것이 남들에게는 '오만'하게 보여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 안타깝지만 말이다.

둘째로는 여성을 존중하는 예의 바른 남자여야 했다. 힘 없는 여성에게 물리적, 정신적 폭력을 저지르는 못난 남성들이 넘쳐나는 시대인 까닭이다. 소설 <인형의 집>에서도 잘 엿보이지만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여기고 장난감처럼 곱게 치장하고 예쁜 모습을 남들에게 과시하는 용도로밖에 쓸 줄 모르는 무례한 남성이라면 사양한다는 뜻이다. 더구나 '남자의 자존심'이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서 여성에게 무례할 정도로 내조를 강요한다면 정말 끔찍한 결혼생활일 거라고 엘리자베스는 생각한다. 그래서 그녀는 '콜린스'와의 결혼도 거절한다. 자기 아버지의 재산을 지키는 것은 물론, 남은 가족의 생계도 꾸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는데도 콜린스의 청혼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이를 두고서 엘리자베스를 매우 '이기적인 여자'로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콜린스와 결혼한 살롯 루카스만 보더라도 엘리자베스의 선택은 매우 현명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엘리자베스의 친구인 살롯도 가난한 집안이어서 어쩔 수 없이 콜린스의 청혼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살롯의 집안 식구들은 콜린스의 재산을 노나먹으며 잘 살게 되었을 것이다. 허나 정작 살롯은 어땠을까? 원치 않은 남성과 호의호식하며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위안 삼을 수 있었을까? 한마디로 살롯의 선택은 '자기 삶'을 걷어차고, 오로지 '남'을 위해서만 헌신하는 삶을 선택했다. 그것이 진정 살롯이 원하는 삶이었을까? 자꾸 되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마지막은 가장 중요한 조건인 '사랑'할 줄 아는 남자여야 했다. 사랑은 만능 열쇠다. 못할 일이 없고, 이루지 못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끊이지 않는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엘리자베스와 다시는 바로 그런 사랑을 서로 꿈꿨고, 둘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마지막 자존심 싸움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싸움 끝에 둘은 '파경'에 이를 수도 있었지만, 결국 서로를 향한 마음을 재확인하고서 결혼에 골인하고 만다. 여기에 '돈 많은 남성',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수식어가 덧붙여질 필요가 있을까? 서로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믿는 그 순간부터 그런 '외부조건'들은 아무런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 바로 위대한 사랑의 힘이다. 엘리자베스도 바로 그렇게 사랑받아 마땅한 남성을 찾아헤맨 것이고, 다시도 그런 사랑을 받아도 될만큼 멋진 여성을 찾아헤맨 끝에, 둘은 서로를 알아보고 사랑의 결실을 맺은 것이다. 이쯤 되면 '로맨스소설'로는 장엄한 수준을 넘어선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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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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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CII / 창비 8번째 리뷰] 지난해 대한민국 첫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한강'이 지목되었을 때 소름이 돋았다. 그동안 여러 한국소설가들이 노벨문학상이 거론되었을 때 '박경리'를 제외하고 그닥 탐탁스럽지 않았는데, 몇 년 전부터 '한강'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국사람은 노벨상 못 타잖아"라는 자조 섞인 말들이 나뒹둘던 시절이었던 터라 해마다 노벨상 수상이 다가오면 으레 다른 외국인을 점치곤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난 꿋꿋하게 한국소설가들을 클릭하곤 했다. 박경리, 고은, 이문열, 황석영, 그리고 지난해엔 '한강'을 클릭했다. 그리고 한강이 수상을 하자 나는 부리나케 미처 구입하지 못했던 한강의 책들을 사모으기 시작했다. 늦게나마 열열한 응원을 하기 위해서였고, '대한민국 최초의 노벨수상자'에 걸맞게 존경의 의미를 담아 내 책꽂이에 영광을 심어두기 위해서였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분들이 많았나보다. 주문한 책은 3주가 넘어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사모으기 시작한 한강의 책들을 리뷰하고자 한다.

한강 리뷰 첫 소설은 <소년이 온다>다. 다들 아시다시피 1980년 '서울의 봄' 이후 전두환 정권은 군부세력을 앞세워 무단통치를 시작했고, 전국의 시위대들을 무차별적으로 폭력 진압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광주'는 달랐다. 왜 하필 광주였는가? 라는 질문은 사절한다. 그 어떤 폭력도 용납할 순 없기 때문이다. 살인마 전두환의 광기가 남다른 것은 유독 광주에서만 일어난 것도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암튼 '그 날, 광주'는 달랐다. 살인마는 '본보기'가 필요하다 느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날, 광주에서는 '살인마의 교과서'라고 보여줄 정도로 잔혹하게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사람을 '처리'한다는 것부터 전두환이 사람이길 포기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제목에서 언급한 소년은 '동호'라는 열여섯 살 중학생을 가리킨다. 살인마는 그렇게 어린 소년에게도 무자비했다. 그 소년이 왜 그곳, 하필이면 그날에 '전남도청'에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한 집에 세들어 살던 친구 정대를 찾기 위해서란다. 시위 현장에서 계엄군이 쏜 총탄에 친구가 맞고 쓰러지는 것을 보고 시신을 한데 모아놓은 그곳으로 갔다가 찾지 못하고, 그날밤 시민군에 합류해서 최후를 함께 맞게 된다. 하지만 시민군이 한 발의 총알도 쏘지 않던 그날, 동호는 계엄군이 쏜 총에 형과 누나 들이 맞아 죽는 걸 목격한다. 그리고 계엄군에게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한다. 그리고 운(?) 좋게 풀려났지만...뒤엣말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이 소설에서는 특히 '고문 장면'이 노골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전두환 정권의 광기는 시간을 거슬러 '박정희 정권', '이승만 정권', 그리고 '일제식민통치' 아래 무참히 짓눌렸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유린했던 그 광기를 연상케 한다. 그럼으로써 '광주의 시민들'은 자연스레 저항의 상징이 되었고, 자유의 수호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이 특별해서 그런 것일까? 아니다. 그들은 지극히 '평범'했다. 지극히 '정상'이었다. 평화롭고 평온한 나날들이 이어지는 시절에 살았다면 아무런 특징도 의의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평범한 시민들이었을 뿐이다. 일제식민시절의 독립운동가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특별한 분들이 아니다. 그런데 '비정상'인 놈들이 판을 치는 어지러운 시대가 되자 '특별한' 사람이 되었다. 왜냐면 그들은 '불굴의 의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의를 지키고 자유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저항'을 몸소 실천한 것일 뿐이다. 그들은 절대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왜 이 미치광이들은 이토록 정상적인 사람들을 두려워해서 무참히 짓밟았을까? 전두환도 그랬고, 박정희도 그랬으며, 이승만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군국주의에 미쳐돌아간 제국주의자들도 '정상적인 사람'을 지극히 싫어했다. 왜? '정상'이 아닌 사람들의 특은 바로 '비정상'을 당연시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비상식'적인 사고방식으로 '자신이 소유한 힘'을 과시하면 과시할수록 모든 사람들이 벌벌 떨며 괴력의 소유자인 자신들 앞에 굴복할 것이라는 망상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폭력'을 사용하면서도 '죄책감'이란 것을 전혀 생각지 못한다. 마치 원시사회의 부족장스러운 낡은 사고방식에 빠진 것이다. 이런 미치광이들은 그래서 '전쟁광'이라 불릴 정도로 살육을 즐긴다. 우리가 '전쟁영웅'을 영웅시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이다. 그들이 저지른 살인행위에 '정당성'이 없다면, 하다못해 '필요성'조차 갖추지 못했다면, 단순한 미치광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 미치광이를 영웅으로 우러러보는 사회나 국가는 또다시 그런 '미친짓'을 반복하기 마련이다.

그런 우려가 대한민국에 다시 벌어지지 않았느냔 말이다. 2024년 대한민국에 '비상계엄선언'이 웬말이냐. 이는 단 한사람의 우발적인 명령이 아닌 '미치광이' 대통령과 군관계자, 그리고 행정각료와 집권여당이 오랜 기간 조직적으로 짜서고 벌인 '계획적인 내란범죄'였다는 것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그리고 내란수괴의 머릿속에는 자신의 생각에 동조하지 않는 모든 이들을 '반국가단체'로 싸잡아서 처단할 것이라 목소리를 높였고 말이다. 과거의 망령이 다시 살아돌아오기라도 했단 말인가? 실제로 계엄군을 이끌었던 군관계자들의 집무실에 '전두환 사진'이 걸려있었고, 그들에게는 '자랑스런 선배'이자 '지도자'였다는 것이 구설로 오른 지도 꽤 되었다. 하긴 윤석열 정권 초기에 육군사관학교에서 '홍범도 흉상'을 없애려는 시도가 있었던 기억이 새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일제식민시절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독립군 대장 홍범도가 '그들'에게 왜 눈엣가시가 되었는지 이제는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이 책이 쓰여진 때가 2014년 박근혜 정권 시절이다. 그리고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해가 2024년이다. 지난 10년간 우리는 달라진 것이 없게 된 셈이다. 이제 곧 윤석열 정권도 탄핵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뼈저린 반성을 하지 않으면 '제3의 탄핵정국'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소설가 한강이 지적한 우리 시대의 아픈 곳을 우리는 이제 더는 외면하면 안 된다. 통증은 피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마취제나 진정제로는 잠깐의 통증만 느끼지 못하게 할 뿐이다. 아픈 상처는 도려내고 깨끗하게 소독한 뒤에 깔끔하게 봉합을 해야 '새살'이 돋아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에 쓰여진 끔찍한 고문묘사는 우리 시대의 '아픈 상처'다. 그 아픔을 딛고 일어서야 진정한 극복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두 번 다시 '비상계엄'이라는 끔찍한 악몽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면,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직시하고 진심으로 해결하려 노력해야 한다. 유일한 해결방법은 '극복'이다. 무거운 죄책감에 짓눌려 살거나 마땅히 받아야 할 죄를 피하려고만 한다면, 또 우리 국민들이 그런 '죄인'을 눈감아주고 어설프게 관용으로 엮어 슬그머니 풀어준다면 우리는 또 어려움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또 '그날의 광주'를 다시 되풀이 해야겠는가? 우리가 또 '망국의 설움'을 당해봐야 속이 시원하겠는가? 모든 것을 다 잃고서 땅을 치고 후회해봐야 늦는다. 이제라도 우리가 짊어진 '과거의 망령'에서 속히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끔찍한 과거일망정 '마주 서기'를 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당시에 지은 죄가 있다면 이제라도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한다. 모든 죄에는 '공소시효'가 불성립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오직 처절한 반성만이 유일한 면죄부임을 우리 모두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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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류 베스트셀러 한국문학선
채만식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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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CI / 소담출판사 5번째 리뷰] 채만식의 소설 <탁류>는 <태평천하>와 더불어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졌다. 1937년 10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되었고, 39년에는 '박문서관'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고 한다. 이 소설은 1930년대 일제식민지의 피폐한 하층민의 삶을 깊숙이 조명하며 '한 여인의 비극적 수난사'를 줄거리로 삼았다. 그러면서 '한 여인의 비극'이 일어나게 된 배경이 개인의 문제인지, 아니면 사회의 문제인지를 따져 묻고 있다. 그래서 책 제목도 '탁류'다. 이 말의 사전적 의미는 두 가지다. 하나는 '어지럽게 흘러가는 흙탕물, 또는 그런 흐름'이고, 또 하나는 '무뢰한의 무리'라는 뜻이다. 덧붙여서 '무뢰한'의 뜻은 성품이 막되어 예의나 염치를 모르며, 일정한 소속이나 직업이 없이 불량한 짓을 하며 돌아다니는 사람을 일컫는다. 비슷한 말로 '건달', '쓰레기', '야만인'을 꼽고 있다. 그렇다면 1930년대 일제식민지 상황에서 한 여인이 살인을 저지른 사건이 일어났다면, 그것이 과연 어떤 문제 때문에 일어난 것이겠냐는 물음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 초봉이는 가난한 정주사의 딸이다. 성품이 착하고 예쁜 미모를 갖춘 스물한 살의 처녀다. 그런데 그녀를 둘러싼 남자들이 너무 많다. 먼저 남승재란 인물이다. 의사의 조수로 일을 하고 있는데 번듯한 생김새로 초봉이 은근히 맘에 두고 있는 남자다. 고태수란 남자도 있다. 은행원으로 일을 하고 있어 돈푼 깨나 지나고 있어 초봉이 아버지의 맘에 들어 초봉이를 태수에게 시집을 보낸다. 하지만 그는 타락한 인물이다. 초봉이라는 예쁜 아내가 있는데도 다른 유부녀와 바람을 피우다 타살을 당한다. 여기에 곱사등이 장형보가 등장한다. 초봉이 남편인 고태수가 타살을 당하던 날, 장형보는 초봉이를 강간한다. 이런 참변을 당한 초봉이는 결국 군산을 떠나고 만다. 한편, 아버지 정주사의 친구인 박제호도 있다. 그는 친구의 딸, 초봉이에게 일자리를 주는 등 호의(?)를 베풀기도 했지만, 슬하에 자식이 없던 차에 예쁜 초봉이를 유혹해서 몸을 탐하고 동거를 하기에 이른다. 그러던 어느 날, 장형보가 다시 나타나 협박을 받자 박제호는 초봉이를 가차없이 버리고 만다. 그렇게 장형보와 함께 살다, 그의 자식도 낳았지만 고통스런 삶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러다 증오의 대상밖에 아무 것도 아닌 장형보를 살해하고 초봉이는 자수를 한다.

어쩌면 일일연속극에서 많이 보던 '통속적인 신파극'으로 보이기도 한다. 한 많은 여인의 굴곡진 삶을 통해서 '비슷한 처지'에 있던 수많은 여인들의 치맛자락을 눈물로 흠뻑 젖게 만들던 전형적인 스토리로 볼 수도 있다. 그럼 비극적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 많은 여인의 삶을 지켜보면서 함께 울어주는 것밖에 할 수 없는 것일까? 21세기 독자들에게는 어림도 없는 소리일 것이다. 일단, 초봉이를 지켜줘야 마땅한 아버지는 왜 '남승제'가 아니라 '고태수'랑 혼인을 강요했는지 따지지 않을 수 없다. 가난한 아버지는 아내와 네 남매를 먹어 살릴 능력이 없는 가장이었다. 이를 스스로 통감하고 부지런히 일을 하고 돈을 많이 벌어올 생각을 해야 마땅하거늘, 정주사는 첫 딸을 돈 많은 사윗감에게 시집을 보내서 '한 밑천'을 두둑히 챙길 생각만 하고 있다. 그래서 가난한 승제가 아닌 부유한 태수를 사위로 점찍고 초봉이에게 혼인을 강제, 명령하고 만다. 천성이 착하고 효심 깊은 초봉이에게 '아버지의 명령'은 거역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결정이 자신의 딸의 운명을 지옥구덩이로 밀어넣는 '지옥문'이었다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초봉이의 남편인 고태수는 타락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정주사가 '돈'만 밝힌 것이 아니라 '성품'까지 고려해서 자기 딸의 혼인상대를 고르는 정상적인 인물이었다면 초봉이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다.

허나 이는 1930년대 일제식민지 상태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장 먹고 사는 일을 해결하지 못하는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정주사가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당시 사회분위기는 무슨 짓을 하던 돈푼 깨나 펑펑 쓰며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것이 제일로 치던 때였다. 이런 짓을 위해서라면 '나라도 팔아먹던 시절'인데 뭘 더 바라겠느냔 말이다. 이런 도덕적 해이가 판을 치던 시기에 정주사 홀로 '독야청청' 살아봐야 남산골 샌님 꼴을 면치 못할 것이 뻔하다. 그러니 정주사의 결정은 당시 혼탁한 사회분위기에서는 당연한 귀결이었고, 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문제'에서 비롯된 비극인 셈이다. 다시 말해서, 일제식민지가 아닌 다른 시대였다면 초봉이의 운명은 또 달라졌을 것이다.

채만식의 <탁류>는 이러한 두 가지 문제의 대립적 시각으로 비판적인 읽기가 가능하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채만식은 <탁류>를 통해서 1930년대 조선식민지 사회를 지극히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온통 타락한 사람들, 위선적인 사회분위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음모를 횡행하고 살인을 저지르는 악한 사회의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이를 통해서 채만식은 일제의 식민통치를 소설이라는 도구로 '간접적으로 비난'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해방이 된 뒤에 유일하게 과거 일제에 협력했던 지식인으로서 통절한 반성을 표했던 유일한 소설가라는 점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래서 <탁류>는 오늘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는 혼탁하게 불투명한 흐름을 보일지라도 그 물이 더럽고 어지러운 '부정적인' 모든 것들을 싹쓸어버리고 나면 '미래'에는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를 것을 확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탁류'가 흐른 뒤에는 '청류'가 뒤따르는 법이다. 부디 대한민국의 미래에는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는 '청류'가 따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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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원전 완역판 10 : 오장원
요시카와 에이지 엮음, 바른번역 옮김, 나관중 원작 / 코너스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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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C / 코너스톤 11번째 리뷰] <삼국지> '완역판'이 대미를 장식했다. 부제목이 '오장원'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제갈공명의 죽음'으로 나관중이 지은 '삼국지연의'의 이야기를 마무리한 것이다. 사실 공명의 죽음 이후에도 촉한은 30여 년간 역사를 이어갔다. 그리고 '삼국지연의'에도 그 지난한 촉한이 망해가는 과정을 다 보여주었고, 뒤이어 3년 뒤에 대위가 망하고 '사마씨 중의 사마염'이 진(晉)나라를 세우는 과정까지 세세히 이어나간다. 분량상으로 보면 10권 가운데 6권쯤에 공명이 사망하고 나머지 4권에서는 진나라 건국까지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러나 사실상 <삼국지>는 유관장 삼형제가 진짜 주인공이고, 이들을 뺀 나머지는 '조연'에 불과하다. 그래서 유비가 죽게 되는 '이릉전투의 패전'으로 사실상 <삼국지>를 읽는 재미는 끝장났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나마 '제갈량의 출사표'가 던져진 이후에 위촉 사이에서 공방전이 벌이는 것이 나름 흥미로울 뿐, 동오의 손권 진영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그야말로 흥미를 잃은 변방 취급 당하기 일쑤다.

그럼에도 <삼국지>를 필독으로 삼아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사실 이 책을 처음 읽고 리뷰할 때부터 던진 질문이었는데, 한(漢)나라의 패망이라는 관점에서 풀어내볼까 한다. 항우와 유방의 대결이었던 <초한지>에서 유방이 승리를 거두고 '한나라'를 세웠을 때만해도 대세는 한나라에 있었다. 진(秦)나라가 2대에 걸려 비교적 서두른 멸망에 이른 것도 대세가 한나라에 있었기 때문이다. 진시황과 달리 유방은 '유교'를 전반에 내세웠다. 법치사상이 진나라의 국력을 빠르고 탄탄하게 만들어준 것은 사실이지만, 너무나도 융통성이 없는 '법치'에 사람들은 숨 쉴 구멍조차 없는 갑갑함을 느꼈을 터이기 때문이다. 이에 한고조 유방은 유교에서 내세우는 '덕치'를 기본으로 나라의 기틀을 삼았다. 그리고 이는 백성들에게 살아갈 원천이자 태평성대의 탄탄한 기초가 되었다.

허나 '덕치'도 시일이 지나자 느슨해진 팬티 고무줄마냥 줄줄 흘러내리는 망조가 들기 시작했다. 한나라가 '전한'과 '후한'으로 나뉜 까닭도 바로 그런 망조가 들자 한 번 망했다가 다시 되살려낸 역사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번 죽었다 다시 살아났으면 더욱더 깊이 반성하고 나라를 잘 이끌어나갔어야 하는데, 한 번 망조가 든 원인을 싹 도려내는 개혁을 차일피일 미루자 끝내 '십상시의 반란'과 같은 국정 혼란을 야기한 것이다. 십상시가 누구인가? 국정을 농단하고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리고 나라가 망하든 말든 제 이익만 챙기면 그뿐이라는 파렴치한 놈들의 대명사가 아니던가 말이다. 국정이 문란해지자 백성들을 살길이 막막했고, 끝내 '황건적'이 되어 전국에 도적떼가 들끓게 되었다. 이런 혼란을 타개하고자 각지에서 영웅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삼국지> 이야기의 시작점이다.

이렇게 한나라는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오로지 '힘'을 가진 자가 '권력'을 쥐는 패왕의 시대가 열렸다. 그리고 그런 패왕들은 한결같이 '도덕이 밥 먹여주냐!'를 외치며 불의를 쉬이 저지르며 제 이익을 챙길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서슴지 않는 파렴치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영웅들 가운데 한나라의 후예를 자처하며 '덕치'를 주장하는 세력이 등장했다. 그가 바로 훗날 서촉의 황제 지위에 오르는 '현덕 유비'다. 비록 경제의 후손을 자처하지만 시골구석에서 돗자리나 누벼서 팔아 근근히 먹고 살던 촌부에 지나지 않던 이가 '관우와 장비, 그리고 미축과 간옹'이라는 소소한 무리를 이끌고 도덕으로 어지러운 세상을 밝게 비추겠다는 기치를 높이 세운 것이다.

반면에 대위(大魏)를 세운 조조는 어땠나?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이란 점괘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권력찬탈을 호시탐탐 노리는 야심가에 불과했다. 그에게 운빨이 닿자 그는 결국 '위왕'이라는 지위까지 거침없이 올라 난세를 평정한 권세가로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그에겐 '덕치'와 같은 국정철학 같은 것이 없었다. 오로지 '힘'을 과시하며 정적을 제거하고 역적을 숙청하며 무시무시한 권력욕을 유감없이 발휘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서촉과 동오를 제압하고 북위가 천하를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오래가지 못했다. 왜? 힘으로 권력을 잡은 자의 말로는 결국 힘을 잃으면 모든 것을 빼앗길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힘을 빼앗긴 장본인도 자신이 애지중지 키우던 개(사마염)였다. 그리고 그 능력 있는 개가 통치하던 진나라도 오래 가지 못하고 멸망하고 말았다. 동오의 손권은 말할 가치도 없다. 강동의 비옥한 땅에서 누릴만큼 누리다 그대로 주저앉은 꼴이기 때문이다.

다시 촉한으로 돌아가자. 초대 황제였던 유비가 죽자 공명이 그 유훈을 받들어 '한나라의 재건'을 위해 동분서주한다. 애초에 '위촉오 삼국시대'를 만든 것도 그의 아이디어라지 않은가. 이른바 '천하삼분지계'는 젊은 공명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있어왔던 학계(아마도 '사마휘의 제자들')의 중론이었다는 설도 있지만, 어쨌든 이를 실현시킨 것은 '공명의 공로'가 아닐 수 없다. 그가 '초려'에서 나와 유현덕과 손을 잡은 까닭도 바로 한고조가 내세웠던 '덕치'를 바탕으로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 잡겠다는 포부였을 것이다. 그렇게 '도덕이 밥 먹여주냐!'라던 혼란스럽고 파렴치한 세상을 밝게 비추던 빛이 바로 '촉한이 가진 진정한 힘'이었다.

그런데도 그런 촉한의 정당성이 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일까? 바로 구심점이 될 '리더의 부재'와 위업을 달성할 원동력인 '인재의 부족' 탓이었다. 실제로 유관장이 차례대로 죽자 촉땅으로 들어갈 당시만해도 위풍당당했던 유비의 장수와 책사들은 하나둘 사그라들고 만다. 이미 입촉도 하기 전에 '방통'이 죽었고, 촉한에 들어서자 형주를 지키던 관우가, 이에 복수를 가려던 장비가, 복수전을 펼치던 유비가, 황충이 죽었다. 그리고 마초도 허무하게 세상을 달리한다. 이에 공명은 '남만정벌'을 통해 촉한을 안정적으로 만든 뒤에 천하통일을 차근차근 준비하려 했지만, 그의 수명이 그 긴 시간을 허락치 않았다. 더구나 공명은 천하를 통일할 정도의 넉넉한 시간이 없다는 것을 직감하고 만다. 왜냐면 '인재의 부족난'에 허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첫 번째 출사에서부터 '읍참마속'을 하는 등 가뜩이나 부족한 인재난에서 공명은 헤어날 수가 없었다. 반면에 위나라에는 인재가 차고도 넘쳤다. 그나마 잘난 인재는 '사마의, 하나 뿐'이라 할지라도 중간 이상의 평가를 받는 장수와 책사들이 차고 넘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최종적인 승리는 위나라가 거머쥘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촉나라에 인재가 넉넉했더라면 상황은 완전 달라졌을 것이다.

자, 결국 촉한의 멸망으로 '도덕'은 패배하고 말았다. 오로지 자기 이익밖에 모르는 '권력찬탈자'들만이 횡행하는 혼란의 문이 열리고 말았고, 대륙은 또다시 '5대10국'이라는 대혼란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평화와 안정을 바라는 백성들의 열망은 철저히 외면 받으면서 말이다. 우리가 오늘날 <삼국지>를 다시 읽고, 읽어야 하는 까닭은 바로 '도덕'이 땅에 떨어진 세상에서 온 국민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다시금 '도덕'으로 세상을 바로 잡겠다는 정의로운 세력이 들고 일어서는 그 꿈이 실현되길 바라는 염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비록 유교사상은 수천 년전의 낡은 사상일지 몰라도 유교가 내세우는 '인의예지'라는 기본은 한국인의 마음속 깊이 아로 새겨져 있음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에게는 뛰어난 리더십과 더불어서 넓은 아량과 포근한 마음씨로 국가를 잘 다스려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그 밑에서 보좌하는 국무위원들은 뛰어난 행정실무로 대통령을 뒷받침하며, 입법부의 국회의원들은 제 몫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국민들의 복지와 안녕을 위해서 불철주야 해주길 바라며, 사법부의 판사와 검사 들은 그 누구보다 청렴결백하여 사법정의를 실현하는 정의의 사도가 되어주길 바랄 뿐이다. 이를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대한민국 국민들은 '민주주의 교과서'로 불릴 정도로 아름답고 질서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그런데 작금의 대한민국은 '십상시의 난'을 비롯해서 국정을 폭력적으로 쥐고 흔들려는 '동탁의 집권기'와 마찬가지다. 다행히 대한민국 국민들은 현명하고 선량하기 때문에 '황건적'이 될 생각조차 하지 않을 뿐이다. 더구나 '전한'과 '후한'의 예처럼 집권 여당이 되기만 하면 '탄핵정국'으로 국가를 혼란케 만드는 '망조'가 든 정당이 등장했다. 그런데도 염치도 없이 한 번 잡은 권력을 내놓으려하지 않는다. 진짜 나라를 망하게 만들려 작정했나보다. 나라가 망하면 '그들'은 절대 피해를 보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이든 어디든 '돈'을 잔뜩 짊어지고 도망갈 '플랜 B'가 있는 년놈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피해는 대한민국을 끝까지 지키는 '국민들의 몫'이다. 이런 난세에는 영웅이 등장하기 마련이라지만, 21세기 대한민국에는 이름 없는 국민들 하나하나가 모두 영웅들이다. 그 영웅들이 거리를 물들이는 '응원봉'으로 대한민국을 다시 밝힐 것이며, 이를 지켜본 전세계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대한민국 국민의 위대함을 칭송하게 될 것이다. 국격은 '한 사람의 무능'으로 떨어질 수 있지만, 오히려 '수많은 국민들'이 정의로운 세상을 다시 만들어내는 새로운 국격을 뽐내게 될 것이다. 그게 바로 21세기 대한민국이 지닌 진정한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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