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의 일생 - 오늘이 소중한 이야기 (양장본), 2024년 데즈카 오사무 문화상 단편상 수상작 오늘을 산다 1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새의노래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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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산다 2] <누구나의 일생>  마스다 미리 / 박정임 / 새의노래 (2024) [원제 : ツユクサナツコの一生]

[My Review MMLXIX / 새의노래 2번째 리뷰] 이 책은 2024년 '데즈카 오사무 문화상' 단편상 수상작이라고 한다. 마스다 미리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소개도 있긴 한데, 솔직히 말하면 '내 취향'은 아니었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느껴지는 감동의 여운...아니 '여백'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인 듯 싶다. <누구나의 일생>은 30대 독신 여성으로 일러스트레이터이지만 생계를 위해서 도넛가게에서 알바를 하고 있는 쓰유쿠사가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책 제목에 '일생'이란 표현이 있어서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주인공 쓰유쿠사는 32살로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가 곧바로 끝나지 않는다. 쓰유쿠사가 남긴 '만화'가 유작처럼 다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스다 미리가 쓴 '만화 속' 주인공이 그린 '만화 속'의 등장인물들이 '또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설정이다. 교과서에서 흔히 다루는 '액자식 구성'의 만화(?)일 것이다.

마스다 미리의 글은 '여성 독자'들에게 감정을 건드리는 묘한 매력이 있는 모양이다. 남성 독자인 나에게도 아주 옅지만 '전해지는 그 감정'이 있긴 한데, 그 감정이 남자인 내 마음을 건드려주지는 못하고 있다. 그런데 30대, 또는 40대 독신여성 독자에게는 그것이 그저 그렇고 그런 감정이 아니라 '바쁜 일상' 속에서도 잠시나마 짬을 내서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묘한 매력을 선사하는 것 같다. 의도치 않게 몇몇 '마스다 미리' 팬이라는 여성 독자들과 우연히 마주하고 몇 마디 나눠 봤는데, 모두 그런 뉘앙스의 감상평을 전해주었다. "깊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잠시 짬이 날 때마다 읽는 편이라서...그냥 좋은 느낌이다. 뭔가 꽉 채운 듯한 감동을 전해주는 책은 아니지만, 잔잔하고 조용한 느낌을 느낄 수 있는 '여백'같은 책, 그런 느낌이라서 좋았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마스다 미리' 작가가 조금 더 강하게 밀어붙였으면 싶었다. 30대 독신여성이 뭐 어떤데? 40대 독신여성이 연하남과 데이트를 하는 게 문제라도 되나? '임신, 출산, 육아'는 여성의 사회적 '의무'가 아니라 여성만이 가진 고유의 '특권'이라고! 그리고 자신이 가진 특권이라면 자신을 위해 쓸 수도 있고, 쓰지 않을 수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여자 나이 '마흔'이 뭐가 어때서? 그 나이가 넘었는데도 여전히 '여성의 매력'을 풍기며 연애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하니 박수라도 치고, 응원해야 하는 것이 더 '당연한 것' 아니겠어? 그런데 왜 뒤에서 수근수근 거리는 건데? 여성 인권이 어쩌고, 양성 평등이 저쩌고 떠들기에 앞서, 그렇게 비겁하게 뒤에서 속닥거리지 말고 당당하게 딴죽을 걸어보라고! 그런 얼토당토 않은 딴죽을 걸은 다리몽둥이를 똑 분질러 놓을 테니 말이다!! 라면서 말이다. 잔잔한 여백과 담백한 여운이 가득한 글이 아니라 톡톡 쏘는 사이다 같은 청량한 목소리가 좀 더 낫지 않겠는가 하고 바랐을 뿐이다. 물론, 그런 '사이다 맛'과 같은 글이었다면, 그건 '마스다 미리'의 글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걸 인정하는데 무려 26권의 책을 읽어야만 했다. 굳이 '내 취향'도 아닌 책이었는데 말이다. 아주 미약하게 전해지던 '그 감성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이 책이 더욱더 내 취향이 아니었던 점은 쓰유쿠사가 생을 마감한다는 사실이다. 2020년부터 2023년까지세계적으로 대유행을 했던 '코로나19 팬데믹' 시절을 배경으로 쓰인 작품이라 쓰유쿠사의 어머니도 죽은 것으로 나오고 쓰유쿠사도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사인은 명확하지 않다. 아마도 '코로나19'가 원인인 듯 싶지만..아마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닌 듯 싶다. 제목 <누구나의 일생>처럼 '평범한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의 족적을 뒤쫓다 보면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듯도 싶기 때문이다. 마스다 미리 책의 특색이지만, '아니어도' 상관 없고 말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누구든 아무런 상관 없이 '저마다의 일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만 가볍게 툭하고 '강조'할 뿐이니까 말이다. 그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거나, 심각하게 생각하거나, 아니면 가볍게 생각하거나, 아무런 생각조차 하지 않거나, 그건 마음 가는 대로다.

그건 우리가 '여백'을 감상하는 방법과도 일치한다. 여백에는 대개 아무런 그림도, 색깔도 그려지지 않은 '빈 공간'을 채울 뿐이다. 그렇지만 감상하는 사람에 따라 그 '빈 공간'은 절대로 '아무 것도 없는 텅빈 공간'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리고 저마다 취향대로 그 '여백'을 채워나갈 뿐이다. 이런 감상법에 재미를 붙인다면 마스다 미리의 책들에도 정말 재밌는 '재미'를 채워나갈 수 있게 된다. 나처럼 '여백의 감상법'을 별로 즐기지 못한다면 재미도 별로 느끼지 못할 것은 당연지사고 말이다.

그건 그렇고, 여백을 정말 잘 채우지 못하는 나도 이 책 <누구나의 일생>에서 눈에 띈 것이 있었다. 바로 '아버지와 딸'이 한 집에서 살아가고 있는 어색한(?) 풍경 말이다. 보통은 '남자'가 먼저 죽고 '엄마와 딸', 또는 '엄마와 아들'이 사는 풍경이 결혼을 하지 않는 요즘 흔한 풍경일텐데, 이 책에선 '아버지와 딸'이 엄마의 빈 자리를 채우고 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대화도 별로 없고, 서로의 인생을 존중(?)하듯 서로의 '공간'도 서로 겹치지 않으며 '한 집'에서 각자의 영역을 지키면서, 하룻동안의 안부를 묻고, 저녁을 함께 하며, 밤인사를 하며 헤어지는 장면을 연출한다. 그러면서도 딸은 아버지를 위한 '주전부리'를 챙겨주고, '코로나 백신 접종'을 맞고나서 후유증은 없는지 안부를 물으며, 아버지를 그런 착한(?) 딸을 위해서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딸의 일상에 불편을 주지 않기 위해 최대한 '자기 일상'에 심취하고 있다.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혼기도 놓치고 홀로 생계를 책임지는 바쁜 딸이 자신을 위해서 '수발'까지 들어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자신의 죽음이 아닌 '딸의 죽음'을 먼저 경험해야 했다. 얼마나 비통한 심정이었을까? 가슴을 쥐어뜯으며 오열하는 장면이라도 나오련만...일본에는 그런 문화가 없는 모양이다.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그 누구도 눈물을 보이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마스다 미리는 '그런 장면'조차 통 보여주지 않는다.

한 사람의 인생이란 무엇일까? 위대한 업적을 남기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인생이건만 왜들 그리 열심히들 살아가는 것인지...죽고 난 뒤에 가져가는 것도 하나 없는데 말이다. 그런데 쓰유쿠사는 '만화'를 남겼다. 마침 맞게 한 출판사에서 쓰유쿠사가 연재하던 만화에 관심을 가지고서 '출간'을 약속하기도 했는데, 그 바람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쓰유쿠사의 삶이 먼저 '마감'하고 말았다. 그래서 정식출간이 아닌 '자비출간'이란 방법을 모색했지만, 그마저 비용면에서 여의치 않아 결국 '소책자'로 쓰유쿠사의 유작을 남길 수 있었다. 그리고 딸이 살아 있을 때에는 질색하는 딸의 모습을 보면서도 꿋꿋하게 훔쳐보던 아버지는 느닷없는 딸의 죽음에 보지 않았던 딸의 만화를 '유작'으로 남겨진 소책자로 마주하게 된다. 그 속에서는 딸이 '할머니가 되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 것을 확인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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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움 견문록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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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움 견문록>  마스다 미리 / 권남희 / 알에이치코리아(RHK) (2021) [원제 : かわいい見聞録]

[My Review MMLXVIII / 알에이치코리아(RHK) 2번째 리뷰] 내 이상형을 꼽으라면 섹시한 여성도 아니고, 아름다운 여성도 아니고, 품위 있고 우아하고 단아한 여성은 좀 좋아하지만, '귀여운 여자'에게 엄청 홀리는 경향이 강하다. 혹시라도 귀여운 여자가 내게 다가와서 "옵빠~ 나 이거 사줘"라고 말한다면 그냥 다 사...쿨럭쿨럭. 암튼 이런 나이기에 이 책 <귀여움 견문록>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서 뽑아 들어 읽었다. 뭐, 걱정하실 것은 없다. 경제력이 매우 높은 편은 아니지만 워낙 씀씀이가 헤프지 않아서 경제적 여유(?)를 누리며 살고는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 여유를 누리는 이유도 간단하다. 아직까지 솔로이며, 내 맘을 홀릴 정도의 '귀여운 여자'는 만난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나름 '차도남'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내 앞에서 '까부는 여자(?)'는 아직까지 없었다. 그럴 정도로 시크했냐고? 음..그건 아닐 거다. 그냥 못 생겨서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할테니 말이다.

각설하고, 마스다 미리의 '귀여움'에 관한 에세이다. 이 책에 대한 총평을 한마디로 하자면 말이다. 그리고 그 귀여움에 대한 나름의 까닭을 마스다 미리의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해서 밝혀내는 내용이 이 책의 전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텐데, 어쨌든 그 '의견'에 깊이 공감을 하지는 못하겠다는 것이 '내 소감'이긴 하다. 물론, 성호르몬이 다르고, 국적이 다르며, 기본적으로 '생각의 흐름'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마스다 미리가 소회를 밝히는 '귀여움에 대한 나열'에 깊이 공감하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는 색다른 재미(?)에 빠질 지경이라는 것이 솔직한 느낌이다. 도토리나 체리처럼 작고 귀여운 것에 '귀여워(가와이~)'를 연발하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특정한 '일본어 발음의 귀여움'을 피력할 때에는 어떻게 공감하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도 궁금해서 '파파고'의 도움을 받아 '일본어 발음'을 듣는 수고(?)까지 했지만, 그것에 공감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오사카 사투리의 귀여움'을 말할 때에는 뭐랄까? 표준어로 '그 사람의 성씨가 가 씨가 맞니?'를 부산 사투리로 '가가 가가 가?'라고 할 때, 이를 '일본어'로 뒤치고 '오사카 사투리'로 뒤쳐 내서 펴낸다고해서 일본 독자들이 '부산 사투리'를 이해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더구나 '귀여움의 느낌'까지 공감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상상력까지 발휘해야 하는데, 이걸 상상한다고 해결할 일인지 자못 궁금해질 정도였다.

이런 '답답함'은 지난 번에 읽었던 <오사카 사람의 속마음>이란 제목의 책을 읽을 때에도 느꼈던 것인데, 아무리 인기 작가의 책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유의 책은 가급적 '원서'로만 즐길 수 있게 해주는 것이 훨씬 더 낫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애써 '뒤치는(번역하는) 수고'를 했는데, 애쓴 보람이 무색해지고 독자들도 읽는 보람도 없고말 그런 책들은 좀 지양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그런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전부'는 아니고 '일부'라는 점에서 책을 즐기는 것에 큰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긴 하다. 그런데 내 경우에는 '이런 꽉 막힌 느낌'이 드는 부분을 만나고 난 뒤에는 '어떤 내용'이라도 큰 실망감에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만다. 뭐랄까? 감흥이 떨어지고 빈정이 상한다고나 할까? 그래서 좀 실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제목에는 내가 환장(?)하는 '귀여움'이라고 적혀 있지 않느냔 말이다. 그래서 그 실망감은 더 크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공감하는 바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눈사람'의 경우에 우리 나라의 '2단 눈사람'이 훨씬 더 정감이 가고 '먹을거리'가 아닌 '일상의 것'들을 활용해서 눈코입팔 따위로 삼고, 모자와 목도리로 마무리하면, 서양의 '3단 눈사람'보다 훨씬 더 귀엽게 느껴진다는 점에는 크게 공감했다. 또한 '민들레꽃'도 귀엽지만, '민들레 홀씨'도 마주할 때면 너무 귀엽게 느껴진다. 그런데 마스다 미리는 '민들레'의 일본어 발음인 '탄포포(タンポポ)'가 귀엽단다. 포포라는 발음이 귀엽긴 하다. 그런데 나는 '파페'와 '포포'의 알콩달콩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던 <파페포포>가 떠올랐다.

암튼, 책의 내용에는 집중하지 못하고 읽는 내내 '딴 생각'만 가득했다. 나만의 '귀여움 견문록'으로 말이다. 그런데 막상 나이 든 아저씨가 되고 나니 '귀여운 것'을 보아도 '귀엽다' 말 못하고, '귀엽다' 하며 만지지 못하며, 심지어 '귀엽다'라고 할 정도의 대상을 바라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서러움을 느끼는 요즘이다. 더구나 나는 못 생긴 남자다. 절대 '차은우'처럼 생기지 않았고, '공유'나 '현빈' 같은 멋진 이름조차 가지지 못했다. 이렇게 못 생기고 잘난 것 없는 '아저씨'는 절대로 허락되지 않은 것을 해서는 안 된다. 왜냐면 '귀엽다'라고 말하면 못 생긴 주제에 '보는 눈'은 있네라며 흘겨보기 일쑤고, '귀엽다'라고 쓰다듬기라도 할라치면 소스라치게 놀라며 성범죄자 취급하며, '귀엽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쳐다보기라도 하면 변태 취급 당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귀여운 것'을 정말 좋아하지만 '좋아하는 티'는 내지 않는다. 수십 년을 그런 취급(?) 당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애초에 그런 '실례'를 저지르지도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저 속으로만 좋아할 뿐이고, 아주 잠깐 스치듯이 바라볼 뿐이다. 내가 좋아하는 '대상'에게 불편을 끼치기 싫기 때문이다. 뭐, 아는 사람은 다 알지 않은가. 내가 페미니스트라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못 생긴 주제에 감히 대놓고 '페미'라고 광고하지도 않는다. 그들과 함께 있는 것조차 불편해 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나에게 '귀여움'은 거리를 두어야 할 대상이다. 저 멀리서 바라만 보면서 흐믓해 할 대상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리고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대상이기도 하다. 이를 테면 '귀여운 것'과 '못 생긴 나'를 한 컷에 같이 담으면 전혀 귀엽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 좋아하는 연예인과 우연히 마주칠 경우에도 '함께' 찍은 사진 같은 것은 없다. 팬서비스 차원에서 '함께' 찍자고 말을 건내곤 하지만, 나는 잘 안다. 그 '프레임' 안에 내가 같이 있으면 '귀여움'이 귀여움으로 보이질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도 왜 나는 '귀여움'을 좋아하는 걸까? 그건 아마도 나와 '정반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이질감'과 '대비감'이 내 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무엇으로 가득 차게 만드는 모양이다.

그런 '이질감'은 내가 쓰는 글에서도 느껴지는 모양이다. 나를 전혀 모르는 이들이 내 글만을 읽고서 나를 '귀여운 성격의 여성'이라고 오해를 하시기도 하고, 또는 아주 '까칠하고 도도한 여성'으로 오해하시는 분들이 꽤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나중에서야 '내 글'에서 '남성'임을 커밍아웃(?)하는 대목을 읽고서야 뒤늦게 '남자분이셨군요. 몰랐어요'라고 댓글을 달고서 깜깜 무소식이 되는 일도 참 많았다. 또는 '비밀 댓글'로 내게 전화번호를 물으며 은근 슬쩍 추파를 던지는 남자들도 참 많았고 말이다. 하긴 '필명'으로 '이지아'라는 닉네임을 오랫동안 써온 탓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 처음 채팅을 시작할 때 '후리지아'라는 닉네임을 썼다가 고민 따위는 '후~'하고 날려버리자는 의미를 담아 '리지아'만 남겼고, 두음법칙을 적용해서 '이지아'가 되었고, 여기에 '한자'로 뜻을 담아 '異之我...또 다른 나'라는 닉네임으로 리뷰어 활동을 꽤나 오랫동안 지내왔기에, 더욱 오해를 불렀는지도 모른다.

뭐, 어쨌든 그런 이질감 덕분에 나는 '또 다른 나'의 정체성으로 '이런 나'와 '저런 나' 등등 솔직한 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덕분에 '나의 본질'에 대해서도 나름 깊이 통찰하는 기회로 삼기도 했고 말이다. 그리고 마스다 미리의 에세이를 통해서도 '또 한 번의 고찰'을 시도할 수 있었다. 그 이야기는 다른 책을 통해서 이야기를 이어 가도록 하겠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리뷰'에 쓰는 까닭은 무엇 때문이냐고 묻는다면, 애초에 '수필'에는 아무런 형식이 없는 '무형식'이란 형식의 글이라는 특성이 따라 붙는다. 그렇기에 '수필리뷰'도 형식에 구애 받지 않고, 내용조차 구애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런 리뷰를 쓰게 되었다. 뭐, 굳이 변명을 늘어놓자면 조이스의 <율리시스>처럼 '의식의 흐름'을 보여주는 리뷰라고나 할까. 아무려면 어떠랴. 내가 쓴 형편없는 리뷰를 몇 명이나 읽는다고 그런 걱정을 할 것인가. 그저 내가 쓰고 싶어서 쓸 뿐이다(--)뻔뻔 (이것도 오랜만이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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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로 매니악 2
이우혁 지음 / 미컴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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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로 매니악 2>  이우혁 / 미컴 (1998)

[My Review MMLXVII / 미컴 2번째 리뷰] 괴물과 맞서 싸우려면 '선한 의지'만으로는 역부족인 경우가 허다하다. 악에 물든 세력들은 규칙도, 제약도 없이 온갖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격을 해 대는데, 그에 맞서 싸우는 선한 세력은 온갖 제약과 규칙을 다 지키며 싸우다가는 제대로 대응도 하지 못하고 처 맞는 수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괴물 같은 놈들과 맞서 싸울 때에는 점잖은 방법만으로는 대항하기 힘든 법이다. 그래서 정의의 편에 섰더라도 종종 '괴물과 맞먹는 가공할 힘'을 발휘하여 괴물을 때려 잡는 강한 힘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그러다 괴물 때려 잡은 힘으로 인해서 '스스로 괴물'이 되고 마는 비극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괴물을 잡으려는 자는 스스로 괴물이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 법이다.

<파이로 매니악>에서 동훈과 영은 한국사회에서 '암적인 존재'를 타겟으로 삼아 정교하게 만든 폭약으로 '천벌'을 내리는 일을 한다. 2편에서는 '종교'라는 이름을 내걸고서 신도들을 노예처럼 부려 먹으면서 대외적으로는 '사회부적응자'들에게 갱생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 홍보하는 김석명을 처단하는 내용을 골자로 보여주었다. 공지영의 소설 <도가니>에서도 폭로 되었던 내용이기도 하고, '형제복지원 사건'도 그렇고, '사이비교주'들이 판을 짜고서 우리 사회에서 정말 파렴치한 행태를 많이 보여주었는데, 이 책에서도 바로 그런 '나쁜 놈'을 아주 잘 보여주었다. 정말이지 죽여야 속이 시원할 정도로 나쁜 놈이었기에 '잘 죽었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우혁 작가는 그런 나쁜 놈을 처단하는데에도 속시원하고 통쾌하게 죽이는 장면은 연출하지 않았다. 98년이면 IMF로 온 나라가 침울하던 시기였고, 많은 국민들이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하며 나라 살리기에 여념이 없을 때에도 '환차익' 같은 옳지 않은 방법으로 '제 잇속'만 챙기는 나쁜 놈들과 정부의 경제정책을 악용해서 공공의 이익을 해치고 '고급 정보(?)'를 빼돌려서 개인적인 이득으로 착복하거나, 뇌물과 다를 바 없는 금품과 향응을 제공 받고서도 '고위공직자'로 떵떵거리며 잘 살던 나쁜 놈들이 판을 치던 시기 아니었던가 말이다. 그러니 그런 놈들을 좀 '허구적인 상황속'에서나마 속시원하게 처벌을 받고 처단을 해버렸으면 얼마나 통쾌했겠느냔 말이다. 그런데도 이우혁 작가는 그런 '나쁜 놈'을 죽이고서도 개가를 올렸다며 기뻐하지 않고 끔찍한 방법으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갔다면서 부끄러워하는 주인공을 만들었다. 이게 정말이지 <파이로 매니악>의 수준을 높여주는 것임에는 분명하지만, 독자적 관점에서 봤을 때에는 '고구마'를 먹다가 목이 메이는 장면을 마주한 것 같은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그렇다면 정반대로 '(폭탄)방화 전문가'인 주인공이 죽어 마땅한 '사회의 악'을 통쾌하고 시원하게 천벌을 내리는 장면으로 묘사했다면 어땠을까? '종교의 이름'에 걸맞지 않은 복지가가 '보육시설'에 수용된(?) 사람들을 노예보다 못한 처우를 하며 노동착취를 하며, 어두운 밤이 되면 그렇게 수용된 사람들 가운데 예쁘장하고 반반한 어린 소녀들을 희롱하고 집단성폭행을 일삼던 놈들을 잡아내어서 팔다리를 절단 내고, 아가리에 폭탄을 물게 하고서 대가리가 곤죽이 되어 날려버리고, 시신조차 남지 않게 한데 묶어다가 꼼짝달싹도 하지 못하게 만들고서 산 채로 불을 질러 고통스럽게 죽여버린다고 쓴다면 말이다. 그렇게 나쁜 놈만 골라서 싹 다 죽여버리고 피해자들을 구출을 해서 유유히 법망을 피해서 사라지는 장면을 연출한다면 당장은 속시원하다고 느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스토리를 써나갔다면 이 책은 그야말로 '스포츠신문 연재소설'에 불과한 B급 취급을 받고 말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퇴마록>도 악령을 퇴치한다는 거창한 명분을 내세워서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이고 때려 죽이는 것에만 열중했더라면 그저 그런 'B급 퇴마소설' 취급을 받거나 '좀비 소설'로 치부하고 말았을 것이다. <퇴마록>이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았던 것처럼 <파이로 매니악>도 괴물을 잡기 위해서 스스로 괴물이 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 '대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동훈과 영은 정말로 나쁜 놈들을 죽이는 '영웅적인 일'을 했음에도 사람을 죽였다는 무거운 죄책감에 빠져들며 스스로를 '죄인'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죽어 마땅한 죄를 범한 '죄수'들을 처단했다는 옳은 일을 했음에도 사람이 사람을 죽인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므로 '죄인'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구토>에서 보여준 '구토감'과도 궤를 같이 한다. '구토'를 해야 비로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실존 문제를 다룬 것처럼 <파이로 매니악>에서도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폭탄방화'이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구토를 할 수밖에 없는 '역겨움' 일이 분명하며, 영웅 심리에 도취되어서 저지른 일이라고 자부하기에도 너무나 파괴적인 살인에 불과하기에 스스로를 '죄인'처럼 대하면서 너무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는 '죄책감'에 뱃속을 깨끗이(?) 비우는 구토를 하고 만 것이다. 물론, 비록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지른 '죄수들'이지만, 사람의 목숨을 앗아 죽게 만든 장본인이면서 '삶의 연장'하겠다는 먹는 행위를 할 수는 없다는 의미도 포함한다. 그런데도 너무 과한(?) 죄책감 표출에 '고구마' 같은 느낌을 지울 수는 없다. 어떻게 조금만 가벼울(?) 수는 없었던가?

한편, 'P.M.'을 쫓는 추격팀인 윤 검사, 박 실장, 닥터 정, 김 중위로 이루어진 '시저(가위)팀'은 점점 수사의 포위망을 좁혀 간다. 처음엔 범인이 누구인지 특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던 모습만 보여주더니, 드디어 'P.M.'이 세 남녀로 이루어졌으며, '실종자' 가운데 한 사람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까지 '확정'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제 3편에서 'P.M.'을 체포하는 결과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수사종결'이 되면서 이야기가 끝을 맺게 될 것인가? 아니면 '체포'까지는 성공하지만, 그 이후에 '공공의 적들'을 처단하기 위한 새로운 팀을 구성하는 것으로 열린 결말을 맞을 것인가? 그렇다 하더라도 'P.M.'의 뱃속에 든 시한폭탄이 있기 때문에 그 결말에 대해서 궁금증이 솟아난다.

이렇게 '소설의 결말'에 대한 궁금증은 생기는데 반해서 범인을 잡으려는 '수사팀'에 대한 애정은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정의의 세력인데도 크게 매력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윤 검사'라는 이름부터 '내란우두머리 윤석열'을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물론 이름도 전혀 다르고, 수사하는 스타일도 전혀 다르지만 '독사'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장면에서 '검사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우선적으로 떠올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박 실장이라 불리는 '공무원'도 일하는 스타일이 '안기부 직원'을 연상케 한다. 철두철미하고 용의주도한 일 잘하는 성실한 공무원 역할을 맡았을 뿐인데, 그게 '무고한 사람'을 강제구금하고 수사하던 스타일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거기다 '닥터 정'은 정신분석학을 연구한 의사인데 '여성도 얼마든지 일 잘하는 능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혼'도 불사할 정도의 당당한 커리어우먼을 연출하고 있는데, 이게 20세기말에는 멋진 여성을 보여주는 행동일지는 몰라도, 지금은 그리 멋져 보이지 않고 '독단적이고 고집불통'의 출세지향적인 워커홀릭 여성처럼 보여서 아쉬웠다. 더구나 '윤 검사'의 전 부인이기도 했다. 이혼 사유는 가부장적인 '윤 검사'의 여성에 대한 고지식한 인식이 원인이었지만, 정작 윤 검사는 그런 '닥터 정'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설정이 좀 구태의연했다. 그리고 김 중위도 '출세지향적인 인물'로 등장하는데, 어릴 적 보육시절에서 불우한 시절을 보낸 탓에 자격지심이 좀 강한 타입인데다, 우연한 사고(?)이긴 했지만 '화약공장 사장'을 죽여버린 과거를 숨기고 있으며, 머릿속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종종 등장하고 있어, 정신분석학적으로는 환청이 들리는 '조현병 증세'로 추정하지만, 소설 속에서는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캐릭터다. 뭐, 이런 수사팀인데...좀 뭐랄까? 캐릭터들에 애정이 생기지 않아서 그저 관망하고 있을 뿐이다. 과연 'P.M.'은 체포가 될 것인가? 다음 편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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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 과학자 프래니 3 - 투명 인간이 된 프래니 엽기 과학자 프래니 3
짐 벤튼 지음, 박수현 옮김 / 사파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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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 과학자 프레니 3 : 투명 인간이 된 프래니>  짐 벤튼 / 박수현 / 사파리 (2022) [원제 : Franny K. Stein, Mad Scientist #3: The Invisible Fran (2004)]

[My Review MMLXVI / 사파리 6번째 리뷰] 아이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굉장히 강렬한 것들이다. 크기에서 압도하거나, 힘이 굉장히 쎄거나 미모가 아름다운 것 등이 바로 그런 것이다. 이런 성향은 누가 가르쳐준다기보다는 '그냥 아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반드시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분히 '상대적'이며 아이들마다 나름의 '개인적인 취향'이 다른 만큼 제각각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아직 미성숙하다는 이유를 들어 '아이들의 취향'을 훗날 '돈벌이에 유리한 것'으로 만들어주려 애쓸 필요도 없고, 단지 '아이들이 좋아하는 성향'을 잘 캐치해서 아이들 스스로 마음껏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주는 것으로도 충분하다는 점이 굉장히 중요하다. 부모님들이나 선생님들 가운데 굳이 '경제적인 성공'이 아이들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이 든다면, 부모 자신들이 재벌이 되어서 아이들을 '재벌 2세'로 만들어주는 것이 더 확실한 방법일테고, 선생님이 '경제적 지식'을 풍부하게 쌓아서 아이들에게 '올바른 투자방법'으로 어른이 되었을 때 창업자본금을 마련할 수 있도록 지도하는 것이 훨씬 더 안정적이고 바람직할 것이다. 그런 훌륭한 어른들(!)이라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경제적인 성공'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자기만의 꿈'을 실현하는 것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제대로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음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책 <엽기 과학자 프래니> 시리즈를 읽다 보면 '괴짜 주인공'이 등장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악영향을 끼칠 우려를 먼저 걱정할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엽기 과학자 프래니'의 말과 행동이 엉뚱한 정도를 넘어서 '상식적'으로도 해서는 안 될 일을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모습을 엿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번 3편에서도 프래니는 학교 선생님의 수업시간에 '취미생활'에 대해서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다른 아이들은 '아일랜드 전통춤 추기', '예쁘디예쁜 쿠키 만들기', '희귀한 우표 모으기' 등의 취미생활을 발표했는데, 그런 아이들에게 프래니는 아주 엉뚱하다 못해 기괴하고, 심지어 때려부수기까지 하는 '엽기 과학'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딴죽(?)을 걸었기 때문이다. 프래니 딴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엽기 과학'에 대해서 다른 친구들이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것에 대단히 의아해하고, 그 때문에 매우 속상해하기까지 한다. 프래니 마음 속에서는 지난 1편과 2편에서 프래니 자신이 보여준 활약(!)에 대해서 친구들이 감명 깊었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그런 기대와는 다르게 아이들은 프래니가 좋아하는 취미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싫어하는 내색까지 비추는 모습에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다 묘수를 떠올렸는데, 프래니는 '카멜레온의 변신술(?)'에서 영감을 얻어 '투명인간'이 되는 약을 만들어서 직접 복용을 하였다. 프래니는 '엽기 과학자'였기 때문에 그런 일 정도는 아주 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안정적(?)으로 투명인간이 된 프래니는 등교를 해서 학교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게 된다. 그리고서 '엽기 과학'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친구들에게 다가가 '목소리'를 들려준다. 프래니가 투명인간이 되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친구 곁에서 말을 한 것에 불과했지만, 아이들은 몸은 볼 수 없고 '목소리'만 듣고서, 그 목소리가 '자기 내면의 소리'라고 착각을 하게 되었고, 그 소리의 내용이 '엽기 과학을 좋아해야 한다'는 내용이었기에 친구들도 비로소 '엽기 과학'에 점점 빠져들게 되고 만다. 프래니로서는 정말 기분 좋은 일이었다. '엽기 과학'에 관심이 많아진 친구가 생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내면의 소리'를 듣고서 엽기 과학에 관심(?)이 생긴 친구들은 자신들이 '엽기 과학자'가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겉모양만 '엽기 과학자'가 되었을 뿐, 실제로는 '그럴 만한' 실력을 갖추지 못했다. 그런데도 '엽기 과학자의 흉내'를 내기 시작했는데, 마침 맞게 프래니가 자신의 취미인 '엽기 과학의 솜씨'로 만든 '머리 둘 달린 로봇'이 있었는데, 가짜(?) 엽기 과학자들이 그 로봇을 멋대로 '개조'하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실력은커녕 '기초 지식'조차 없던 어설픈 엽기 과학자들이 손 본 로봇의 상태는 어땠을까?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었다. 로봇은 엉뚱하게 작동되기 시작했고, 엉뚱한 일만 저지르더니 끝내 학교 이곳저곳을 엉망진창으로 망가뜨리며 다니기 시작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프래니는 비로소 '자신의 실수'를 깨닫게 되었다. 저마다 잘하는 것이 같을 수는 없고, 각자 잘하는 것을 열심히 할 때 가장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서 자신의 로봇이 엉망진창으로 만든 학교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프래니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렇게 엉망진창 망가진 로봇이 학교를 더 많이 엉망진창으로 만들기 전에 막아낼 수 있을까? 혼자만의 힘으로 막을 수 없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이 있지만, 로봇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친구들이 과연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혹시 친구들이 '잘하는 것들'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과연 이번에도 프래니는 위기에 빠진 학교를 구해낼 수 있을까? 결말과 방법이 궁금하다면 직접 읽어보는 것이 좋다.

우리는 잘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을 아주 중요한 덕목으로 추켜세우곤 한다. 분명 맞는 말이다. '땀(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면서 어떤 분야든 잘 하는 사람(전문가)가 되기 위해서 '1만 시간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굳게 믿고 있다. 하지만 이런 '땀'을 배신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 바로 별로 노력하지 않는 것 같은데 뛰어난 실력을 뽐내는 '천재'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노력 대신에 '뛰어난 재주'를 가졌기에 그저 '즐기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리고 천재 정도면 '즐기는 것'이 맞긴 하다. 그렇다면 '노력'보다 중요한 것은 '즐기는 것'이랄 수 있다. 근데 즐기는 것은 '천재들의 특권'이 아닌가? 솔직히 이건 아니다. 굳이 천재가 아니어도 '즐기는 것'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열심히 하는 사람'보다 '좋아하는 사람'이 더 뛰어나고, '좋아하는 사람'보다 '즐기는 사람'이 훨씬 더 나은 성과를 거둔다는 이야기도 '즐기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하는 말이다. 그렇다. 자신이 잘 하는 것을 즐기면서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자세인 것이다. 그러면 굳이 천재가 아니어도 뛰어난 성과를 얻을 수 있다.

그렇기에 아이들에게 '노력'의 아름다움을 가르치되, 그 노력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즐기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물론 아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충분히 깨닫고 난 뒤에야 가능한 일이다. 자신의 소질이 무엇이고, 재능은 무엇이며,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잘 인지하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될 것이다. 그걸 깨닫기 위해서는 '친구들의 개성과 취향을 존중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내가 보기에 '시시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정말 좋아하고 잘 하는 것을 하고 있을 때 정말 즐거워하는 '친구의 표정'을 잘 캐치해야 자신이 잘 하는 것도 쉽게 찾을 수 있기 마련이다. 자신도 '그런 행복한 표정'을 짓게 만드는 일이 반드시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잘 모르겠어도 '친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친구들이 '어떤 일'을 할 때 행복한 표정,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 분명 힘들어 죽을 것처럼 지친 기색이 명백한대도 열정을 뿜뿜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감탄할테니, 이런저런 취미를 겪으면서 진정으로 자신에게 딱 맞는 일을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엽기 과학자 프래니>를 읽으면서 정말 이런 깊은 생각까지 할 수 있을까? 앞서도 말했지만 아이들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흠뻑 빠져드는 '무엇'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마음껏 즐기게 여건을 마련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아이들도 성장을 하면서 자연스레 '옥석'을 가리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왜냐면 각자 나름의 '견문'을 쌓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그런 '견문'과 '실력'을 갖추고 깊은 고민에 빠졌을 때,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다. 물론 아이들에게 도움을 줄 사람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부모님과 선생님 들이고 말이다. 그때 무슨 말을 하며 도움을 줄 것인가? 그저 '돈 많이 버는 방법'에만 골머리를 썩히고 있는 자신의 실패담(?)만 들려줄 것인가? 아니면 미약한 점이 없지 않지만 나름 '인생을 즐기면서 행복하고 보람 되게 살고 있는' 자신의 성공담(!)을 들려줄 것인가? 정답은 뻔하지만 '취향 존중'은 해드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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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사장의 지대넓얕 10 : 거인의 어깨 -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생각을 넓혀 주는 어린이 교양 도서
채사장.마케마케 지음, 정용환 그림 / 돌핀북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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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사장의 지대넓얕 10 : 거인의 어깨>  채사장, 마케마케 / 돌핀북 (2024)

[My Review MMLXV / 돌핀북 10번째 리뷰] 인간은 미약한 존재다. 광활한 우주 속에 있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우리 은하'의 날개 한 쪽 끄트머리에 있는 그리 밝지 않는 주황색 별 태양계의 세 번째 행성에 살고 있는 그리 강하지 않은 생명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딴에는 '만물의 영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높은 지능을 뽐내며 '지구의 주인' 행세를 하기도 했었지만, '아는 것'이 점점 더 많아진 오늘날에는 지구 상에 살고 있는 수많은 생명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고, 한껏 겸손을 떨고 있는 상황이다. 그도 그럴 것이 태풍이나 홍수, 화산과 지진, 그리고 가뭄과 기근, 하다 못해 병충해와 바이러스의 공격(?)에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절실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게나 인간은 허약하고 보잘 것이 없다.

그런데 말이다. 그렇게 미약한 존재에 불과한 인간이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는 순간에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인간은 직립보행을 하며 '두 손'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지능을 발달시켰고, 그렇게 발달된 지능으로 '지식'을 축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인류는 그렇게 하나둘 쌓은 '지식'을 허투루 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쌓아나갔다. 물론 하릴없이 쓸모 없는 지식 나부랭이에 불과한 것들도 상당했다. 하지만 인간은 옥석을 가려가며 끝없이 지식을 축적해나갔고, 그렇게 쌓인 지식은 어느새 '거인'이라 부를 만큼 거대해지게 되었다. 아니 애초에 인간이 쌓아올렸다고 생각한 지식도 원래부터 있던 지식에 불과하다. 인간은 오랜 세월동안 그 지식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을 뿐이고 '과학적인 관찰(경험론)'과 '논리적 유추(합리론)'를 거듭하면서 그 '거인(지식)의 존재' 알아챈 것이다. 천재 과학자 뉴턴은 말했다. 자신이 이룬 과학적 업적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 덕분이라고 말이다. 뭐, 뉴턴의 경우에는 겸손한 척하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니라 그런 '거인의 존재'를 알아보고 그 '거인의 어깨'에 올라선 것은 '나나 되니까 가능했던 거야'라는 뜻으로 말했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인간은 '거인 버프'를 받고 난 다음의 위상이 전혀 다른 존재가 되곤 한다. 그런 버프를 맘껏 누린 '과학적 인물들'을 만나 보자.

첫 번째 인물은 '천동설'을 주장한 프톨레마이오스다. 천동설은 우주의 중심이 '지구'이고, 지구 주위를 '다른 천체'들이 완벽한 원 운동으로 돌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천동설'은 프톨레마이오스가 처음 주장한 것은 아니고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때부터 이미 주장 되었던 학설이었다. 그걸 프톨레마이오스가 체계적으로 정립을 하였고, 제대로 된 관측 시설도 없었던 시절에 '천체의 움직임'을 이론적으로 설명했다는 것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사실 '천동설'은 오늘날에도 들으면 믿을 수 있을 만큼 체계적이다. 맨눈으로 관측한 결과만으로는 '천동설'로도 충분히 설명 가능하기 때문이다. 단지 그 시절에는 '지구가 돌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너무 부족했기 때문에 천동설이 더욱 빛이 날 수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천동설' 자체만 놓고 본다면 과학계에서 엄청난 성과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고, 2세기 때의 천문학 지식을 모아서 <알마게스트>라는 책을 써낸 것은 정말 위대한 업적이었다. 그런데 옥에 티라고나 할까? 천동설은 당시의 '종교의 가르침'에 너무 잘 맞아 떨어진 것이 문제였다. 신이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을 만들었다고 믿었던 종교관과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 붙박이로 고정해 놓은 '천동설'은 너무 찰떡 같이 들어맞았기에 무려 1400년 간이나 유럽인들에게 '당연한 진리'로 받아들여진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두 번째 인물은 '지동설'의 근간을 마련한 코페르니쿠스다. 그는 신학자로 평생을 살았지만 자신이 '직접 관찰한 천체의 움직임'과 <천동설>의 내용이 너무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고심하게 된다. 신앙심이 투철했던 코페르니쿠스는 '신 중심의 세계관(중세시대)'을 온전히 벗어날 수 없었는데, 자신이 직접 '경험'한 내용은 그 세계관과 너무 달라서 고심에 빠진 것이다. 여기서 영국의 신학자 '윌리엄 오컴'이 말한 '오컴의 면도날'을 적용해볼 수 있다. 오컴의 면도날이란 '단순한 것이 진리에 가깝다'이라는 뜻으로 '객관적인 이론'을 탐구하는 방법을 여는 계기를 마련했기에 자주 거론되곤 한다. 이를 테면, '천체의 움직임'을 설명할 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처럼 태양을 중심에 놓으면 나머지 천체의 움직임이 간결하게 설명되는데 반해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처럼 지구를 중심에 놓고 천체의 움직임을 설명하려면 더 많은 부연설명을 해야 겨우 맞아 떨어지게 되기 때문에 '오컴의 면도날'을 적용하면 천동설보다 지동설이 더 효율적으로 설명 가능하므로 '진실'에 가깝다는 사고 방식을 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기존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집는 경우에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부르곤 하지만, 사실 코페르니쿠스가 망설이다가 내놓은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는 그가 죽고 난 뒤에도 크게 논란이 되지는 않았다. 훗날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그의 책을 빌어서 '지동설'에 대한 확고한 증거를 내놓게 되자, 교황청은 부랴부랴 갈릴레이를 '종교재판'에 회부하고 코페르니쿠스의 책까지도 '금서 목록'에 올려놓게 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코페르니쿠스는 기본적으로 신학자였기 때문에 좀 더 간결하게 '천체의 움직임'을 설명할 수 있는 지동설을 주장하긴 했지만, 지동설을 뒷받침할 만한 '명백한 증거'를 함께 내놓지는 못했다. 그저 직접 관찰을 해보니 그렇더라는 정도로 저술한 덕분이다. 그렇지만 갈릴레이는 달랐다. 그는 명석했기 때문에 '완벽한 수학적 계산'을 해냈고, 그 근거를 바탕으로 천체의 움직임을 조목조목 설명하며, 천동설이 틀렸고 지동설이 맞다는 것을 널리 알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직접 쓴 <두 개 체계에 대한 대화>에서 천동설을 믿는 교황을 우스개로 조롱하고 지동설을 주장하는 자신이 이를 가르치는 대화 형식으로 적나라하게 써놓았기 때문에 '교황청'은 갈릴레이를 화형시킬 목적으로 종교재판에 회부했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당시 교회는 '마녀재판'을 일삼으며 교회의 지위를 악용해서 '근대의 계몽'을 막아보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마터면 갈릴레이도 그 희생양이 될 뻔 했고 말이다. 이렇게 '과학적 관찰(경험론)'과 '수학적 근거(합리론)'까지 모두 마련해서 체계적으로 과학의 발전을 앞당긴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세 번째 인물로 삼았다.

다음으로 네 번째 인물은 르네 데카르트다. 각설하고, 그가 위대한 과학자로 손꼽히는 까닭은 바로 '좌표평면'을 만들어서 '기하학'과 '대수학'을 하나로 묶은 '해석기하학'을 창시했기 때문이다. 이는 대단한 발견으로 데카르트 이전에는 원이나 삼각형과 같은 '기하학'은 기하학대로, 상수와 변수로 수식을 표현한 '대수학'은 대수학대로 따로 발전했지만, 데카르트 이후에는 '좌표평면'을 이용해서 원, 삼각형, 직선, 곡선 같은 기하학으로만 표현되던 것을 '숫자와 문자'로 표현하며 대수학처럼 계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로써 '수학의 언어'는 더 복잡한 세계까지도 다채롭게 표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기에 데카르트의 업적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에서 마지막으로 다루고 있는 인물은 아이작 뉴턴이다. 그가 위대하다고 평가받는 까닭은 아무리 어렵고 복잡한 자연현상이라도 그걸 '수학적 언어'로 표현하고, 심지어 정확한 계산까지 해내었기 때문이다. 그가 발견했다고 하는 '만유인력의 법칙'도 모든 물체가 서로 끌어당기는 힘(인력)을 가지고 있다. 그 가운데 엄청나게 큰 천체(중력)는 더 무거운 질량을 갖고 있기 때문에 더 큰 힘으로 끌어당긴다. 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으면 그 힘도 약해지기 때문에, 인력은 '질량'에 비례하고 '거리'에는 반비례한다는 유명한 공식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뉴턴이 천재라고 칭송 받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 어떤 자연현상이라도 간단한 수식(수학공식)으로 표현해내는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고대부터 근대까지의 '과학사'를 살펴볼 수 있는 이 책은 '단편적인 지식'을 아무런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그저 중요하니 무조건 암기하라는 식으로 쓰여 있지 않다. 우리가 초중고 12년 동안이나 공부에만 매진했는데도 성인이 되었을 때 '교과서'의 내용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까닭도 바로 이 때문이다. '교과서'가 엉터리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배운 '지식'을 거의 다 까먹은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이 '왜' 중요한지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무작정 외우기만 한 지식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은 왜 중요한가? 별다른 관측 장비를 갖추지 않고도 '이론적'으로 정립하고 맨눈으로 보이는 '천체의 움직임'을 척척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식을 배울 때 '진리 탐구'를 최종 목적으로 하지만, 그 진리에 다가서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바로 '이론 정립'이다. 그러고 난 뒤에 '그 이론'이 맞는지 틀리는지 검증을 하면서 연구를 더욱 깊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천동설'은 지금은 틀린 이론이지만 우리에게 아주 귀중한 영감을 준다. 만약, 학창시절에 이런 식으로 '천동설'에 대해서 배웠다면 성인이 되어서도 결코 잊지 않았을 것이다. 인류 최초로 '과학이론 정립'에 상당 부분 부합하는 설명을 했다는 점에서 위대한 업적임에 틀림없다. 그렇기에 우리가 '틀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꼭 알아두어야 할 '지식'이라고 가르쳤다면 오래오래 기억하는 학생들이 참 많았을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설명해주고 있기에 대단한 책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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