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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움 견문록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9월
평점 :
<귀여움 견문록> 마스다 미리 / 권남희 / 알에이치코리아(RHK) (2021) [원제 : かわいい見聞録]
[My Review MMLXVIII / 알에이치코리아(RHK) 2번째 리뷰] 내 이상형을 꼽으라면 섹시한 여성도 아니고, 아름다운 여성도 아니고, 품위 있고 우아하고 단아한 여성은 좀 좋아하지만, '귀여운 여자'에게 엄청 홀리는 경향이 강하다. 혹시라도 귀여운 여자가 내게 다가와서 "옵빠~ 나 이거 사줘"라고 말한다면 그냥 다 사...쿨럭쿨럭. 암튼 이런 나이기에 이 책 <귀여움 견문록>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서 뽑아 들어 읽었다. 뭐, 걱정하실 것은 없다. 경제력이 매우 높은 편은 아니지만 워낙 씀씀이가 헤프지 않아서 경제적 여유(?)를 누리며 살고는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 여유를 누리는 이유도 간단하다. 아직까지 솔로이며, 내 맘을 홀릴 정도의 '귀여운 여자'는 만난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나름 '차도남'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내 앞에서 '까부는 여자(?)'는 아직까지 없었다. 그럴 정도로 시크했냐고? 음..그건 아닐 거다. 그냥 못 생겨서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할테니 말이다.
각설하고, 마스다 미리의 '귀여움'에 관한 에세이다. 이 책에 대한 총평을 한마디로 하자면 말이다. 그리고 그 귀여움에 대한 나름의 까닭을 마스다 미리의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해서 밝혀내는 내용이 이 책의 전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텐데, 어쨌든 그 '의견'에 깊이 공감을 하지는 못하겠다는 것이 '내 소감'이긴 하다. 물론, 성호르몬이 다르고, 국적이 다르며, 기본적으로 '생각의 흐름'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마스다 미리가 소회를 밝히는 '귀여움에 대한 나열'에 깊이 공감하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는 색다른 재미(?)에 빠질 지경이라는 것이 솔직한 느낌이다. 도토리나 체리처럼 작고 귀여운 것에 '귀여워(가와이~)'를 연발하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특정한 '일본어 발음의 귀여움'을 피력할 때에는 어떻게 공감하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도 궁금해서 '파파고'의 도움을 받아 '일본어 발음'을 듣는 수고(?)까지 했지만, 그것에 공감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오사카 사투리의 귀여움'을 말할 때에는 뭐랄까? 표준어로 '그 사람의 성씨가 가 씨가 맞니?'를 부산 사투리로 '가가 가가 가?'라고 할 때, 이를 '일본어'로 뒤치고 '오사카 사투리'로 뒤쳐 내서 펴낸다고해서 일본 독자들이 '부산 사투리'를 이해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더구나 '귀여움의 느낌'까지 공감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상상력까지 발휘해야 하는데, 이걸 상상한다고 해결할 일인지 자못 궁금해질 정도였다.
이런 '답답함'은 지난 번에 읽었던 <오사카 사람의 속마음>이란 제목의 책을 읽을 때에도 느꼈던 것인데, 아무리 인기 작가의 책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유의 책은 가급적 '원서'로만 즐길 수 있게 해주는 것이 훨씬 더 낫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애써 '뒤치는(번역하는) 수고'를 했는데, 애쓴 보람이 무색해지고 독자들도 읽는 보람도 없고말 그런 책들은 좀 지양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그런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전부'는 아니고 '일부'라는 점에서 책을 즐기는 것에 큰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긴 하다. 그런데 내 경우에는 '이런 꽉 막힌 느낌'이 드는 부분을 만나고 난 뒤에는 '어떤 내용'이라도 큰 실망감에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만다. 뭐랄까? 감흥이 떨어지고 빈정이 상한다고나 할까? 그래서 좀 실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제목에는 내가 환장(?)하는 '귀여움'이라고 적혀 있지 않느냔 말이다. 그래서 그 실망감은 더 크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공감하는 바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눈사람'의 경우에 우리 나라의 '2단 눈사람'이 훨씬 더 정감이 가고 '먹을거리'가 아닌 '일상의 것'들을 활용해서 눈코입팔 따위로 삼고, 모자와 목도리로 마무리하면, 서양의 '3단 눈사람'보다 훨씬 더 귀엽게 느껴진다는 점에는 크게 공감했다. 또한 '민들레꽃'도 귀엽지만, '민들레 홀씨'도 마주할 때면 너무 귀엽게 느껴진다. 그런데 마스다 미리는 '민들레'의 일본어 발음인 '탄포포(タンポポ)'가 귀엽단다. 포포라는 발음이 귀엽긴 하다. 그런데 나는 '파페'와 '포포'의 알콩달콩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던 <파페포포>가 떠올랐다.
암튼, 책의 내용에는 집중하지 못하고 읽는 내내 '딴 생각'만 가득했다. 나만의 '귀여움 견문록'으로 말이다. 그런데 막상 나이 든 아저씨가 되고 나니 '귀여운 것'을 보아도 '귀엽다' 말 못하고, '귀엽다' 하며 만지지 못하며, 심지어 '귀엽다'라고 할 정도의 대상을 바라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서러움을 느끼는 요즘이다. 더구나 나는 못 생긴 남자다. 절대 '차은우'처럼 생기지 않았고, '공유'나 '현빈' 같은 멋진 이름조차 가지지 못했다. 이렇게 못 생기고 잘난 것 없는 '아저씨'는 절대로 허락되지 않은 것을 해서는 안 된다. 왜냐면 '귀엽다'라고 말하면 못 생긴 주제에 '보는 눈'은 있네라며 흘겨보기 일쑤고, '귀엽다'라고 쓰다듬기라도 할라치면 소스라치게 놀라며 성범죄자 취급하며, '귀엽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쳐다보기라도 하면 변태 취급 당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귀여운 것'을 정말 좋아하지만 '좋아하는 티'는 내지 않는다. 수십 년을 그런 취급(?) 당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애초에 그런 '실례'를 저지르지도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저 속으로만 좋아할 뿐이고, 아주 잠깐 스치듯이 바라볼 뿐이다. 내가 좋아하는 '대상'에게 불편을 끼치기 싫기 때문이다. 뭐, 아는 사람은 다 알지 않은가. 내가 페미니스트라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못 생긴 주제에 감히 대놓고 '페미'라고 광고하지도 않는다. 그들과 함께 있는 것조차 불편해 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나에게 '귀여움'은 거리를 두어야 할 대상이다. 저 멀리서 바라만 보면서 흐믓해 할 대상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리고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대상이기도 하다. 이를 테면 '귀여운 것'과 '못 생긴 나'를 한 컷에 같이 담으면 전혀 귀엽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 좋아하는 연예인과 우연히 마주칠 경우에도 '함께' 찍은 사진 같은 것은 없다. 팬서비스 차원에서 '함께' 찍자고 말을 건내곤 하지만, 나는 잘 안다. 그 '프레임' 안에 내가 같이 있으면 '귀여움'이 귀여움으로 보이질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도 왜 나는 '귀여움'을 좋아하는 걸까? 그건 아마도 나와 '정반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이질감'과 '대비감'이 내 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무엇으로 가득 차게 만드는 모양이다.
그런 '이질감'은 내가 쓰는 글에서도 느껴지는 모양이다. 나를 전혀 모르는 이들이 내 글만을 읽고서 나를 '귀여운 성격의 여성'이라고 오해를 하시기도 하고, 또는 아주 '까칠하고 도도한 여성'으로 오해하시는 분들이 꽤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나중에서야 '내 글'에서 '남성'임을 커밍아웃(?)하는 대목을 읽고서야 뒤늦게 '남자분이셨군요. 몰랐어요'라고 댓글을 달고서 깜깜 무소식이 되는 일도 참 많았다. 또는 '비밀 댓글'로 내게 전화번호를 물으며 은근 슬쩍 추파를 던지는 남자들도 참 많았고 말이다. 하긴 '필명'으로 '이지아'라는 닉네임을 오랫동안 써온 탓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 처음 채팅을 시작할 때 '후리지아'라는 닉네임을 썼다가 고민 따위는 '후~'하고 날려버리자는 의미를 담아 '리지아'만 남겼고, 두음법칙을 적용해서 '이지아'가 되었고, 여기에 '한자'로 뜻을 담아 '異之我...또 다른 나'라는 닉네임으로 리뷰어 활동을 꽤나 오랫동안 지내왔기에, 더욱 오해를 불렀는지도 모른다.
뭐, 어쨌든 그런 이질감 덕분에 나는 '또 다른 나'의 정체성으로 '이런 나'와 '저런 나' 등등 솔직한 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덕분에 '나의 본질'에 대해서도 나름 깊이 통찰하는 기회로 삼기도 했고 말이다. 그리고 마스다 미리의 에세이를 통해서도 '또 한 번의 고찰'을 시도할 수 있었다. 그 이야기는 다른 책을 통해서 이야기를 이어 가도록 하겠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리뷰'에 쓰는 까닭은 무엇 때문이냐고 묻는다면, 애초에 '수필'에는 아무런 형식이 없는 '무형식'이란 형식의 글이라는 특성이 따라 붙는다. 그렇기에 '수필리뷰'도 형식에 구애 받지 않고, 내용조차 구애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런 리뷰를 쓰게 되었다. 뭐, 굳이 변명을 늘어놓자면 조이스의 <율리시스>처럼 '의식의 흐름'을 보여주는 리뷰라고나 할까. 아무려면 어떠랴. 내가 쓴 형편없는 리뷰를 몇 명이나 읽는다고 그런 걱정을 할 것인가. 그저 내가 쓰고 싶어서 쓸 뿐이다(--)뻔뻔 (이것도 오랜만이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