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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통 만화 삼국지 2 - 간웅의 시대가 열리다
나관중 원작, 천웨이동.량샤오롱 글.그림 / WISDOM(위즈덤) / 2016년 8월
평점 :
[My Review MCMVII / 위즈덤 2번째 리뷰] 동탁이 낙양을 불지르고 헌제를 볼모로 삼아 장안으로 천도하자, 각지의 군웅들은 허겁지겁 자신의 영지로 되돌아가 저들만의 세력을 규합하기에 급급해진다. 바야흐로 '군웅할거의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분명 한나라 황제가 건재한 상태지만 '임금이 임금답지 못한 상황'이 벌어지니, 과거 '춘추전국시대'처럼 군웅들이 일어나 각축전을 벌이게 된 셈이다. 한편, 동탁은 중원땅에서 벗어나 서쪽에 치우친 장안땅에서 웅크리고 있으니 동쪽땅에선 여러 군웅들이 저들의 야심을 채우려 싸움을 벌인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원소 vs 공손찬'의 대결이다. 사실 이 대결의 승부는 원소가 싱겁게 승리하는 것으로 결말을 짓게 되지만, 주요 인물이 부각되는 장이기에 중요하게 다뤄지곤 한다. 바로 '상산 출신 조자룡의 등장'이다.
조운은 원소 휘하의 장수였지만 원소가 '출신성분'을 따지는 경향이 강한 터라 별다른 활약도 하지 못하고 떠나버린다. 그러다 원소와 대결을 벌이는 공손찬 진영에 합류해서 대활약을 벌이지만, 공손찬 역시 동탁이 내리는 조칙을 받고 흡족해하는 모습을 보고 유비 진영에 합류하길 원했다. 허나 유비는 쉽사리 결정할 수 없었다. 왜냐면 유비와 공손찬의 관계가 선후배 관계였기 때문에 '그의 사람'을 빼낸다는 오해를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유비는 아직 이렇다 할 세력도 마련하지 못한 처지인데, 원소와 공손찬 휘하에 있다가 온 사람을 덜컥 받아버리면 훗날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 있는 우려가 있기도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직 조운 자룡의 인품 또한 확연히 알 수 없는 처지에 '유관장 삼형제'의 무리로 받아들이는 것도 부담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더구나 아직 젊은 장수이기에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도 유비 처지에서는 '한 사람'이 아쉬울 때였으니 자신에게 달려온 젊은 장수를 내치기 싫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비는 오히려 그런 모습에서 믿음이 생겼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사람이라면 꼭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믿음 말이다. 이런 믿음이야말로 훗날 '촉한'을 건설할 때에 조자룡의 역할이 막중했음은 말 할 것도 없을 것이다.
한편, 원술도 세력확장을 위해 화려한 비상을 준비중이었다. 먼저 원소와 유표에게 말과 곡식을 지원요청했다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고 손견에게 밀서를 보낸다. 손견이 유표를 공격하면 자신이 원소를 쳐서 원수를 갚자는 내용이었다. 손견은 옥새를 뺏으려 했던 원소와 유표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에 응답을 하고서 형주로 원정을 떠난다. 그럼 원술은? 원소와 형아우 하던 사이 아니었던가? 사실 둘 사이는 '사촌지간'이었다. 그러니 한 가족과 같은 친밀함 따위는 없었다고 한다. 왜냐면 '원소의 그릇'이 작았기 때문이다. 이는 여자만 보면 사고를 치는 조조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은 '혈연과 부하 들'을 보는 것과 큰 차이를 보여준다. 그렇게 원술은 원소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언제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허나 손견에겐 이 원정이 '황천길'이었다. 그렇게 강동의 호랑이라 불리던 영웅 하나가 스러져 갔다.
자, 이제 동쪽의 분란은 잠시 소강상태가 되고, 다시 장안을 둘러볼 때다. 사도 왕윤의 '연환계'가 동탁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수양딸처럼 기르던 기생 '초선'을 희생시켜서 폭정을 일삼는 동탁을 일거에 처단하려고 벼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스토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으니 과감히 생략하겠다. 일단 초선을 여포에게 시집 보내겠다는 약조를 한 뒤에 동탁에게 바친 뒤에, '초선의 미모'를 이용하여 동탁과 여포 사이를 갈라서게 만드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포는 동탁의 목을 베고 왕윤은 잠시나마 헌제를 중심으로 하는 '정상적인 국정'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굳게 믿었다. 그럼 동탁의 죽음으로 '한 황실의 부흥'은 이루어졌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왕윤의 착각이었다. 문제는 동탁만이 아니었는데, 왕윤은 역적의 우두머리만 처단하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정상화될 것이라 순진하게 믿었던 모양이다.
사실 동탁의 폭정은 왕조시대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십상시의 난'도 그렇고 '하진의 집권'도 동탁의 폭정 못지 않게 한 황실의 혼란을 부추겼던 것이 사실이다. 그때에도 사도 왕윤은 건재했고,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런데 왜 동탁이 집권을 하니 문제라 여겼던 것일까? 사도 왕윤에게는 동탁이 '외부세력'으로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환관들이나 하진 등은 '내부세력'이었기에 자신들이 잘 알고 심지어 어느 정도 '컨트롤'이 되던 세력의 집권이었는데, 동탁은 왕윤, 자신들의 세력을 인정하지도 않고 도저히 컨트롤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자 척결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본 것은 아닐까? 하지만 왕윤은 '동탁'이라는 커다란 짐만 보고 동탁의 수하들이 장악하고 있던 '시스템'까지는 돌아볼 여력이 없었던 모양이다. 심지어 '낙양'이 아니라 '장안'이지 않았던가. 동탁이란 폭정의 수괴가 사라지자 '이각과 곽사'라는 이두(두 명의 수괴)정치가 불거지게 되었다. 다시 말해, 왕윤은 수괴는 처단했으나 '시스템'까지 제대로 되돌리진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헌제는 동탁을 대신해서 '이각과 곽사'의 볼모가 되는 처지로 전락하게 된다.
한편, 초선이 '정사'에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왕윤이 동탁과 여포 사이를 '이간질'을 잘 했다고만 나와 있고, 이 과정에서 여포가 동탁의 시중을 드는 여인과 정을 통했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여인을 <삼국지연의>에서는 '초선'으로 등장시킨 것이다. 그것도 중국 4대 미인 가운데 한 명으로 말이다. 서시, 왕소군, 초선, 그리고 양귀비가 그 미녀들이다. 하나같이 '경국지색'을 가지고 있다는데, 왜 여인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데 '나라가 망한다'는 부정적인 이미지와 결부시키는 것일까? 그나마 초선은 망할 나라(동탁의 폭정)를 망하게 한 긍정적인 면이 있기라도 하지만, 여인의 아름다움이 '남자'를 홀려서 큰 일을 못하게 만드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라 지적해야 할 것이다. 이런 시대착오적인 표현이 너무도 많은 '중국문학'을 읽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적도 있었지만, 고전작품에서 '시대적 한계'를 엿볼 수 있는 것이 어디 <삼국지>뿐이겠는가. 부족한 점이 있으면 '고쳐 읽는 능력'을 키우면 될 일이라고 생각을 고쳐 하기로 했다.
동탁이 죽고 한 황실은 '이각과 곽사의 체제' 아래 놓이게 되자, 반 동탁을 외치던 군웅들은 이제 호시탐탐 '헌제'를 노리게(?) 되었다. 헌제를 볼모로 잡으면 '천하'를 호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원소 진영'이었다. 원소 휘하에 곽가, 순욱 등 훗날 조조의 세력하에서 크게 활약을 했던 모사들이 발빠르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허나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원소의 그릇'은 너무 작았다. 그는 한복과 공손찬의 세력을 차지하고서 한껏 만족하고 있었기에 '헌제'를 잡아야 '천하'를 호령할 수 있다는 책략의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구나 조조가 '세력확립'을 하지 못하고 서주의 도겸을 공격하고, 여포에게 뒤통수를 맞아 연주땅을 빼앗기고, 그 틈을 노려 유비는 서주를 취하는 등 한바탕 난리법석을 떨기에 바빴던 터라 원소에게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어찌어찌 조조는 여포를 복양땅으로 밀어내고, 유비와 원술 등으로 여포를 견제하게 만든 뒤에 '이각과 곽사'의 품에서 벗어난 헌제를 '허도'로 모시는 쾌거를 거둔다. 이로써 '조조의 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한편, 유비는 겨우 서주땅에서 거점을 만들고, 여포와 원술의 틈바구니에서 '균형점'을 찾으려 안간힘을 쏟고 있었다. 문제는 '조조'였다. 유비의 세력은 아직 안정을 이루지 못했는데, 불안정한 여포와 불안한 '동거'를 하면서 조조의 세력을 견제하는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야심 많은 원술도 호시탐탐 서주의 풍족한 곡창지대를 노리고 있었기에 유비는 한시도 방심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런 판국에 조조가 헌제의 명령을 빌미삼아 원술을 공격하라하니 유비는 조조의 뻔한 수작이라는 걸 알면서도 '천자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한 황실의 충신 코스프레를 충실히 해낸다. 하지만 그로 인해 여포에게 서주성을 빼앗기고 유비는 소패로 이사(?)를 해야 하는 어처구니 없는 결과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왜냐면 조조도 완성에 도사리고 있는 '장수 세력' 때문에 뒤통수가 근질근질 했기에 유비를 직접 손보지 않고 여포와 원술을 통해서 자중지란에 빠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사실 이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조조는 사방으로 적들이 즐비한 처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슬기롭게 그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내고 있었다. 그 비결은 바로 '조조 휘하'에 맹장과 모사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춘추전국시대에 '백가쟁명'을 부르짖는 사상가들이 등장한 것처럼 후한말은 혼란의 시기였고, 이런 난세에 영웅의 등장은 필연이었는데, 그런 영웅들이 가장 선호한 '군웅'이 바로 조조였던 것이다. 그럼 왜 조조에게 몰려 들었을까?
사실 조조보다 더 인기가 있었던 세력은 '원소'였을 것이다. 허나 원소는 신분이 높고 확실한 인재만을 골라 받는 '엘리트주의자'였다. 그런데 난세에 엘리트들은 야심가는 있을지언정 실력자는 드물기 마련이다. 하지만 '조조'는 달랐다.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실력'이 있으면 누구라도 환영했다. 심지어 다른 군웅일지라도 자신에게 충성을 다할 사람으로 인정받으면 후하게 대접할 정도로 통이 컸다. 장수 세력의 책사였던 '가후'는 조조에게는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무서운 계략을 짰던 인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후의 실력을 인정했기에 자신에게 항복한 뒤로는 크게 중요하여 큰 업적을 남기는데 유용하게 써먹었다. 여포의 휘하 장수였던 '장료'는 어떤가? 비록 적장이었지만 '실력'대로 인정하고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최적의 업무환경(?)을 만들어주는 조조에게 귀의하여 죽는날까지 충성을 바치지 않았던가 말이다. 이처럼 어지러운 시대에는 '출세'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지도자가 인기가 많은 법이다.
그에 반해 유비는 어떤가? 그가 쌓은 명분은 '도덕'이었다. 한 황실의 종친이라는 '당위성'을 갖췄지만, 그의 세력은 빈약하기 그지 없었다. 관우와 장비 같은 걸출한 인재가 있고, '도덕적 명분'에 있어 타의추종의 불허할 정도로 명성과 인망을 두루 갖췄지만, 정작 '책사'는 변변치 못했다. 서서와 제갈량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비록 '간옹', '손건', 그리고 '미축' 같은 책사들이 곁에 있긴 했지만, 조조 곁에 있는 곽가, 순욱, 순유, 정욱 등과 비교할 수 있을까? 하다 못해 여포에게도 '진궁'이라는 책사가 있었을 정도인데, 왜 유비 세력에는 유독 책사가 꼬이지 않았던 것일까? 그건 유비가 내비친 캐치프레이즈가 별볼일 없는 것이라는 평가였다고 짐작된다. 유비는 겸손을 떠는 것인지 좀처럼 '자기 세력'을 굳건히 지키는데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 덕분에 관우와 장비, 간옹, 손건, 미축 등은 유비를 따라서 이곳저곳을 떠돌이처럼 유랑해야만 했다. 한때 서주성에 머물 때 뛰어난 모사꾼이었던 '진규, 진등 부자'가 유비를 도와주기도 했지만, 이들조차 유비가 서주를 떠나면서 빠빠이하고 조조의 품으로 가버렸다. 이런 떠돌이 유랑집단에 합류하고 싶은 책사는 없을 것이다. 전장을 누비는 장수들이야 '방랑 생활'이 별일 아닐 수 있지만, 모략을 짜내는 책사들에겐 '평안하게 안주할 수 있는 터전'이 없는 것은 그야말로 생고생길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기가 없을 수밖에 없다. 여포 곁에 있던 '진궁'이 바로 그런 경우 아니던가. 그나마 진궁은 역적 조조를 처단하기 위한 일념으로 그런 생고생을 마다하지 않았으니 그랬던 것으로 풀이할 수 있고 말이다.
한편, 손견의 죽음으로 인한 '강동의 세력'은 어떤 상황이었나? 손견이 불귀의 객이 되자 손견 진영은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몇몇 충신들이 손견의 아들 '손책'을 중심으로 똘똘 뭉쳤지만 과거의 세를 자랑할 수는 없을 정도로 세력이 쪼그라들었다. 이는 손책이 너무 어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책은 부득이하게도 아버지의 원수인 '원술의 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전국옥새'를 담보로 군사 3천과 말 5백을 빌어 정보, 황개, 한당 등과 함께 강동을 평정하러 떠난다. 그리고 의형제를 맺었던 주유와 합류하여 장소, 장굉 등의 인재도 함께 등용한다. 그리고 유요와 엄백호, 그리고 왕랑을 물리치고 '강동땅'을 평정하게 된다. 이로써 손책은 '소패왕'이라 불리며 아버지가 못다한 위업을 이루게 된다.
그러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도리어 원술쪽이었다. 이에 원술은 손책이 더 크기 전에 견제를 하려 했으나, 원술의 뒤를 노리고 있는 조조, 여포, 유비가 눈엣가시다. 이에 원술은 여포와 유비를 이간질 시키려 기령을 보내지만 도리어 여포 옆에 있는 진궁의 꾀에 놀아나 10만 군사를 되돌릴 수밖에 없게 되고, 여기에 굴하지 않고 원술은 여포의 딸과 혼담을 나누며 유비를 공략하니 유비는 여포의 공격에 패주하여 '조조의 품'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이에 조조는 유비와 손을 잡고 여포를 궁지로 내몰아 끝내 여포의 숨통을 끊어버리게 된다.
여기까지 정리를 하자면, 조조는 '헌제'를 붙잡아 천하를 호령하려 들었고, 이를 못마땅해하는 원소는 조조를 위협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저멀리 강동에선 손책이 대세를 잡고 '소패왕'으로 명성을 쌓게 된다. 불쌍한 유비는 아직도 마땅한 세력을 규합하지 못하고, 여포와 원술의 등쌀에 견디다 못해 자존심도 버리고 조조에게 몸을 의탁하는 처지가 된다. 그 와중에 조조는 '장수'를 처단하여 자신을 위협하는 세력 하나를 제거해버리고, 또 하나의 걸림돌이었던 여포까지 처단하게 된다. 이런 혼란한 상황에서도 강 건너 불구경을 하고 있는 세력은 '형주의 유표'였다. 유표는 젊은 시절을 그렇게 평온하게 보내다 나이가 들자 건강상의 문제로 자신에게 찾아오는 위기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나약한 처지로 내몰리게 된다. 그러나저러나 이제 여포와 유비, 그리고 원술까지 대충 정리한 조조는 '하북지역의 패권자, 원소'와 한판 대결을 준비한다. 그 유명한 '관도대전'이다. 3권에서 펼쳐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