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핀 벚꽃 - 고바야시 잇사의 하이쿠선집, 문학의 창 10
고바야시 잇사 지음, 최충희 옮김, 한다운 그림 / 태학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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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겨울에 이어 봄, 여름을 마저 읽었다.
싱그럽고 따뜻하구나.
백석처럼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아갔다.
자주 읊조리겠구나.

신록

철벅거리며
하이얀 벽을 씻는
신록이로다 - P100

메꽃

메꽃이로다
활활 타는 돌멩이
틈새 사이로 - P104

밤에 핀 벚꽃

밤에 핀 벚꽃
오늘 또한 옛날이
되어버렸네 - P64

봄이 가다

살랑거리며
봄이 떠나가누나
들풀들이여 - P68

개구리

야윈 개구리
지지 마라 잇사가
여기에 있다 - P24

여름 나무숲

탑만 보이네
여름나무 무성한
명사찰 도지 - P72

푸르른 논

아버지 함께
새벽녘 보고 싶네
푸르른 논을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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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야 창비시선 30
이성부 지음 / 창비 / 198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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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랄까
섬세한데
굳세다.
감성적인 호연지기랄까.

스스로 목매 달아 죽은 혼백이
저승집 찾아 길 떠날 줄을 모르누나.
밤하늘 외진 데만 골라 어물거리다가
잡신들 틈에도 끼이지 못한 신세가 되어
우리나라 산간벽지 어디서 숨어 지내다가
오늘은 더 견디기가 어려워
서해 온 바다를 미친듯 출렁거리게 하누나.
스스로 갈기갈기 찢긴 얼굴이 되어
두리번거려도 어디 무슨 잡아먹을 것이 있느냐.
무너질 것은 무너뜨리지 못하고
휩쓸어갈것은 더 큰 바람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이 졸장부 거지발싸개 귀신아.
기껏해야 뭍으로 기어올라 와서는
가난한 집 수수깡 울타리나 자빠뜨려 놓고
조약돌 핥으며 올라와서는
천년 묵은 석탑이나 무너지게 하누나.
가거라 가거라 어서 길 찾아 떠나거라. - P16

아니오

저절로 흐르는 것을 따라
우리네 사랑 막혀 있음 어찌 틀 수 있으라.
저절로 넘치는 것들만을 따라
우리 키가 커버린 절망의 담벼락
어찌 넘을 수가 있으랴.
그냥 흐르는 물로 어찌 이길 수가 있으랴.

뒤돌아보면 어지러운 발자국
눈 들어 앞을 보면 철벽 산성
그래도 어찌 이대로 주저앉을 수가 있으랴.
우리를 그냥 우리 아닌 동네에
어찌 내맡겨 버릴 수가 있으랴.
서 있는 장승으로 어찌 못박힐 수 있으랴. - P39

빈속에 술


그리움에 가슴 여윈 이에게
허깨비를 보라고 내세우며
할 말이 막힌 입들에게
더 큰 벙어리를 짝지어 주도다.
뜨거움에 스스로 터지는 종로 네거리 아스팔트를
어디 火星에서 온 칼날 하나
깊은 속살까지 베어 버리누나.

이 한국의 돌이킬 수 없는 個性,
짐승으로도 가지 못하는 들판,
이미 헝클어진 것은 더 헝클어진 것이 되고 싶고
흩어진 사금파리 같은 마음들
더 으깨지고 싶은,
이 나라의 속 빈 술 퍼마시도다.
마실수록 목마른 술을 마시도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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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의 옆 얼굴 문학과지성 시인선 35
이하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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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이럴 수가 있나 싶게
냉철하다.
뜨겁지 않을 수 없는 시절.
불타는 분노와 좌절과 절망을
지독하게 차갑게 읊조린다.

“찬 바람 앞에
고개 수그린다, 불꽃 이글거리는
눈만 차갑게 치껴뜬 채.” 99

우리는 돌아선다. 거리는 차들이 매캐한 연기를 내며
달리고 사람들이 술집에 쏟아져 들어간다. 우리는
묵묵하게 그 속에 섞인다. 살아온 삶의 역정도
새로운 생계의 걱정도 달작지근한 꿈도 갑자기 막연해지고
우리는 어떤 힘에 막연히 떠밀리며 새로운 건물 안의
새 주인 앞에 세워질 것이다. 세찬 바람이 우리를 후려치고
우리는 울음이 터지려는 걸 억지로 참으며 막연히, 막연하게
막연히 떠돌고 태연한 척한다. 누구든 함부로
울 수는 없다. 거대한, 정체모를 그 힘이 우리의 가슴까지
빗장을 지를지도 모른다. - P74

우리는 갈라져 있지 않지. 얽혀 있지.
서로 증오하고 폭탄을 던지면서
욕설을 퍼부으면서 서로 간첩을 침투시키면서
그런 식으로 서로 그리워하면서
더럽게 사랑하면서.

아무도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지. - P98

흐름만이 우리를 가득하게 해
어디로 흐르지?
아무 곳으로나 그냥 흐를 뿐이지
장난꾸러기 같으니
누가? 내가? 이 물이?
우리들 모두가 말이야
그럼? - P106

누구지?우린왜이렇듯가볍고아득하기만해?언제나공허하고외롭고달작지근하며그냥아득하기만해?끊임없이가벼운것들스스로의속에서생겨나폴폴날고그것들속에결국은우리가묻힐뿐?누구지우린?우린도대체뭐지?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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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핀 벚꽃 - 고바야시 잇사의 하이쿠선집, 문학의 창 10
고바야시 잇사 지음, 최충희 옮김, 한다운 그림 / 태학사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왼쪽에 시, 오른쪽에 편저자의 설명.
배경 설명을 들어야 시의 상황이 이해되는 게 너무 많다.
시로 충분한 시가 좋다.

밝은 달

산골 마을은
된장국 속에까지
밝은 달 떴네 - P136

추위

옆방서 새는
불빛으로 밥 먹는
추위로구나 - P190

눈 1

후미진 벽에
착 달라붙어 있는
빈티 나는 눈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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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혼을 찾아서
오오무라 마스오 지음, 심원섭.정선태 옮김 / 소명출판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오오무라 마스오 같은 분이 있어
눈 못 감는 삶이 되살아나고
잊어서는 안 되는 일들을 기억하게 된다.
그래 인간이 온통 추악한 것은 아니다.

29 남북화해의 선편, 주명구의 인생

한국의 텔레비전 드라마 <올인>의 무대가 된 제주도는 피투성이의 역사도 함께 지닌 섬이다. 제주도에 살고 있는 작가 오성찬(吳成贊) 씨가 작년 『한라구절초(漢拏九節草)』라는 책을 펴냈다. 책의 제목은 제주도 한라산에 피는 국화의 일종에서 취한 것이다. 올해(2006년) 66세가 되는 오성찬 씨의, 4·3사건을 다룬 소설집이다.
4·3사건이란 1948년 한국과 북한이 건국되기 직전,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거부하고 남북통일 선거를 희구한 제주도 민중을 정부군과 미군이 반공이라는 이름 아래 학살한 사건이다. 1946년 4월 3일부터 약 2년간, 정부군 및 미군과 한라산에서 농성하고 있던 민중 사이에 전투가 계속되었고, 섬 인구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3만 명 이상이 희생되었으며 마을들이 모조리 불에 타버렸다.
한국 정부는 2003년 10월 31일 공식 사과했지만, 희생자는 오랜 기간 ‘빨갱이‘ 라는 누명을 뒤집어썼고 유해의 매장조차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라구절초』의 권두에 수록된 「어느 공산주의자에 관한 보고서」는 실존했던 조몽구가 모델인데 소설에서는 주명구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는 산에서 농성을 벌였던 민중 중에서 무력투쟁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보고 무 모한 봉기에 반대한 비둘기파의 지도자였다.
그 때문에 조직으로부터 제명되고, 은신 중 체포되어 형무소에서 7년의 세월을 보낸다. 출소 후에는 고향 마을로 돌아 오지만, 이 마을만 해도 40명의 희생자를 낸 곳이어서 평온한 생활은 기대할 수도 없다.
젊은 시절에 사회주의에 공명하면서도 과격한 반정부투쟁에는 반대한 그. 공산주의자임을 자인하면서도 현실의 북한 사회에는 환멸을 느끼는 주명구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온당치 못한 대접을 받았으니, 어디를 가도 자신을 환영해 줄 곳은 없다고 하며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결국 67세를 일기로 고향에서 병사, 공동묘지에 묻혔다.
근년 한국은 남부 간의 화해를 모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 위해서는 국내의 융화가 요구된다. 오성찬 씨가 그 린 주명구의 인생은 그 선편을 쥔 것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 P72

내가 본격적으로 윤동주와 관계를 맺은 것은 1985년 이후이다. 진작부터 그가 태어나 자란 중국 길림성 용정시(당시는 정촌) 일대에 가 자료를 수집할 생각이었는데 그 해 간신히 기회를 얻었다. 문자자료는 하나도 구할 수 없었지만 연변대학과 용정중학에 계신 여러분의 도움을 얻어 다행스럽게도 윤동주의 묘를 찾아낼 수 있었다.
가까운 친척은 한국으로 가고 40년간 방치되어 있던 윤동주의 모는 고국 한반도를 향하여 산의 정상 가까운 곳의 경사지에 자리하고 있었다. 오촌과 칠촌들은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지만, 한국으로 간 기독교 신자인 윤씨 집안의 사람들과 관계를 가지면 사회적 규탄을 받을지도 몰랐기 때문에 방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중국과 한국은 당시 국교가 없어서 중국에 있는 사람들은 윤동주가 한국에서 민족 시인으로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몰랐고, 친척들도 동주가 시를 썼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우리는 조선의 전통 형식에 따라 윤동주의 제사를 지냈다. 연변민속박물관의 유기 제기를 빌려서 제물을 진설하고 중국과 조선의 국경을 흐르는 두만강의 물고기를 묘 앞에 올렸다. - P88

김사량은 조선 본국의 문학자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재일조선인 문학자의 길을 연 시조(始祖)와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은 민족적 저항의식을 간직한 채 유려한 서정성으로 시정 사람들의 애환을 그리고 있다.
이번 여름 나는 김사량이 1941년 4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하숙하고 있던 가마쿠라시 오오기가야쓰 407번지 고메신테이여관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신축된 탓에 당시 건물은 남아 있지 않았지만, 입구의 돌계단, 정원의 너구리 장식품과 수령(樹齡) 100년쯤 된 백목련, 온천의 흔적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현재 살고 있는 사람의 할머니뻘 되는 분이 고메신테이의 살림을 꾸려나가면서 반은 하숙생, 반은 식객이었던 김사량을 돌봐주었다고 한다. 원래는 온천여관이었지만 식량배급제도하에서는 여관을 꾸려나가기가 힘이 들어 빈방을 이용해 하숙을 놓았던 것이다.
당시 여섯 살이었던 고메신테이의 손자는 김사량이 자신과 잘 놀아주었다며 그 시절을 그리워했다. 그는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다음날 사상범예방구금령에 의해 김사량이 헌병대로 끌려갔을 때의 일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할머니가 조반만이라도 해먹이고 싶다고 부탁하자, 헌병도 방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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