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미널 (일반판) 문학동네 시인선 6
이홍섭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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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정한 사내’
뚜벅뚜벅 걸어간다
온갖 것들 보듬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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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조가 놓인 방 작가정신 소설향 23
이승우 지음 / 작가정신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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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지적이고 논리적인 문장, 사유, 전개
언제 꺼내 보아도 날카로운

당신은 그런 사람이다. 자기 합리화가 없이는 여간해서는 움직이지 않는다. 스스로 명분을 만들어서 자신을 설득시키고 난 후에야 행동한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설득의 과정이 아니라 속이기의 과정인 경우가 더 많다. 당신은 스스로 만든 합리화의 술책에 넘어가지 않을 만큼 현명하지만, 그러나 현명함을 뒤로 감추고 기꺼이 그 술책에 넘어가줄 만큼 교활하기도 하다. 명분을 확보한 당신은 더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몇 번 더 통화를 시도한 다음 마음을 정한 당신은 서랍 안쪽에서 열쇠를 꺼내 들고 그녀의 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 P16

사랑은 요구하는 것이고, 또 복종하는 것이다. 우리는 연인에게만 자기에게 속할 것을 요구한다. 그 요구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은 연인이 아니다. 복종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 사람 또한 연인이 아니다. 연인들은 요구하면서 기쁨을 느끼고, 복종하면서 행복에 빠진다.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나 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말라’는 계명을 내리고, 또한 사랑하기 때문에 ‘나 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말라’는 계명을 기꺼이 지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계명의 내용이나 어떤 내용의 계명을 준수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계명을 내린 이의 말에 대한 복종이다. 계명이 옳고 지킬 만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계명을 내린 이가 연인이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다. - P24

그런데 사랑을 소재로 한 서사들, 예컨대 소설이나 영화들은 대체로 돈오, 즉 구원파적 엄격성에 의지해서 줄거리를 전개한다. 서사의 매듭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장르적 특성상 불가피한 일이라고 사람들은 이해한다. 계기와 각성, 혹은 인과관계가 일화들 사이를 연쇄로 잇는다. 그래야 이야기가 만들어진다.물이 가죽 속으로 스며드는 것처럼 매듭 없이 전개되는 플롯이란 곤란하지 않겠는가. 계기와 각성의 연쇄로서의 서사 장르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자기와 자기의 연인의 사랑에 대해서 매듭을 찾으려는 시도를 한다. 그것이 자기, 또는 자기의 연인의 사랑의 순수함, 또는 완전무결함을 증명하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 매듭이 특별할수록 사랑의 순수와 완전무결에 대한 신념은 견고해진다. 물론 미신이다. 미신일수록 맹목적이다. 그래서 연인들은 어떻게 든 사랑이 시작된 순간을 기억하려 하고, 때때로 너무 희미하거나 복잡해서 기억이 불가능할 때는 사랑의 시점을 인위적으로 정하는(기억해내는 것이 아니라) 일도 생겨난다. - P32

기억해야 하는가, 그 순간을? - P38

대개의 사랑이 오해(고전적인 장르의 예술에서 흔히 환상이라 돌려서 말해진)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당신은 알지 못한다. 아니, 당신의 무지는 오해에 근거하고 있다. 사랑에 빠져 있다는 오해, 즉 환상이 사랑을 시작하게 하는 근원적인 힘인 오해의 정체를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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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 정철 시선 한국의 한시 25
정철 지음, 허경진 옮김 / 평민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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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의 큰누나는 인종에게, 둘째 누나는 계림군에게 시집갔다. 그래서, 정철은 일찍부터 한글에 능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운 누이들과 편지로 이야기해야 했으니까. 그 끝에 고전문학사상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작품들인 두 미인곡과 관동별곡 등을 남겼다. 제2문자도 아닌 언문 구사에 뛰어난 그가 당대 주로 쓰던 문자인 한자로 쓴 한시가 뛰어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감탄하며 읽는다.

청원에서 귀양살이를 하며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을 알지 못하고
하늘을 업고도 하늘 보기가 어려워라.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은 오직 흰머리라서
나를 따라 또 한 해를 지난다네.


清源棘裏 清源,江界別號。

居世不知世,戴天難見天•
知心惟白髮,隨我又經年。 - P32

산양 객사에서

내 몸이 늙은 말과 같아 길 가기에 지치다보니
이 땅에다 대장간이나 차려 숨어 살고 싶어라.
삼만 육천 일 가운데 몇 날이나 남았나
동쪽집 막걸리나 시켜다 마셔야겠네.

山陽客舍
身如老馬倦征途,此地還思隱鍛爐,
三萬六千餘幾日,東家濁酒可長呼. - P45

산 속 절에서 밤에 읊다

우수수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에
갑자기 비라도 오는가
잘못 알았었네.
스님을 불러 문 밖을
내어다 보라고 했더니,
시냇물 남쪽 나무 위에
달만 걸려 있다네.

山寺夜吟

蕭蕭落木聲,錯認爲疎雨.
呼僧出門看,月掛溪南樹, - P85

한가롭게 살면서 입으로 부르다

뜬 구름이 긴 하늘을 지나가니
한 점 두 점이 하얗구나.
흐르는 물이 북해로 돌아가니
천리 만리가 파랗구나.
흰 것은 왜 희게 되고
파란 것은 왜 파랗게 되었는지,
그 이치를 물어보고 싶건만
구름도 바쁘고 물도 또한 급하더라.

閒居口占

浮雲過長空, 一點二點白.
流水歸北海, 千里萬里碧.
白者何為白, 碧者何爲碧.
此理欲問之, 雲忙水亦急.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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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류학과 현대민속학 민속원학술문고 44
스즈키 신이치로 외 지음, 김광식 옮김 / 민속원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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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류학은 제국의 식민지 연구에서
민속학은 계몽주의 등 보편에 맞서 고유의 것 연구에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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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의 내간체 시작시인선 484
이정모 지음 / 천년의시작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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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연체의 뻑뻑한 시만 있는 게 아니다.

”어떤 단어는 홀로 있어도 산정처럼 당당하다

폭우에도 겨우 이거냐 우뚝 선 산봉우리에게
바람과 구름은 시간이 잠시 주는 수사일 뿐

때때로 문장이 아픈 것은
수사라는 고질병 때문이다“ 102-103. 수사

를 아는 시인이다.

“허무의 등을 밟고 날아올라 가맣게 털 몇 낱 날리는,” 97. 낙점

시들을 기다린다.

이럴 수가 있나. 10월 29일에 별세하셨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외로움은 그리움이 만든 장치일까

봄볕 아래 늘어진 고양이 허리처럼
봄날이 같이 늘어지고 있었고
나무는 바람의 자국을 가지고 있었으나 - P115

평소엔 잃어버린 우산인 듯 찾지도 않다가
때가 되면 고향을 찾는 이들을 무엇이라 할 것인지
그런데 왜 내가 미안한지,

저기, 명절이 바위 하나 내려놓고 고향으로 오고 있다

오! 생활은 햇볕 쪽으로만 기우는 한 그루 나무
고향 쪽으로만 기우는 걸 보다 못해
그리움으로 날이 선 도끼를 들고 벌목하러 오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의 기호가 비대면 시대를 호명하고
고향도 부모의 제사도 영상으로 대체되면
고향은 명절의 유언장도 보지 못할 것이다 - P121

동네 샘물


일렁이는 모습이 누가 꼭 부르는 것 같다
샘가에서 흔들던 동네 사람들 손짓 같다

그 많던 이야기들 이제 심장에 없고,

그래그래 맞아
맞장구치는 햇살이 정겹게
등에서 노래로 부서진다

그 많던 소리는 다 어디로 갔을까
세월의 강물은 적멸을 향해 빗나가는 법이 없다

고사리, 미나리 씻고 떠난
샘물은 손목도 발목도 없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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