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릅나무에게
김규동 지음 / 창비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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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관념으로서의 통일도 언급조차 하지 않는 세상이다.
김규동 시인의 고향은 함경북도 종성. 북한에서도 북쪽 끝.
1925년생으로

“규천아, 나다 형이다”
*규천은 1948년 1월 평양에서 헤어진 아우 이름.
- 천, 33쪽.

시집이 나온 2005년 당시 여든이 된 시인이 57년 전에 고향을 떠났으니,
시인에게 통일은 간절한 소망이다.

문단의 유명한 문인들과 얽힌 얘기가 많다.
북에서 부수상 하면서 임화 등의 숙청을 막지 못한 홍명희를 꾸짖는 기개가
7-80년대에 반독재 운동을 한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창비 쪽의 추모가 시전집, 추모 수필집의 간행으로 이어졌다.

남이고 북이고
“희망이 행동에서 왔다면
죽음을 초극하는
한 시대의 행동은 다 어디로 빠져나갔나.“
- 운명 앞에서, 124쪽
통렬한 비판이다.

아래 시에서 자본의 노예로 살면서 저승에서 부자가 되겠다고 외치는 춘삼이가 낯설지 않다.
아니 21세기 지구촌의 시민들 모습이 아닌가.

“춘삼이는
소주 한잔 마실 때가
한나절 중
가장 기쁘다

일 시키는 아주머니는
상냥하게 대했으나
속으로는 기르는 두 마리 개보다도
낮추보던 것이다
하지만
품삯을 탈 때는
머리를 숙여 고마움을 표시했다
공손하게 구는 게 득이지
괜히 우쭐대다간 다시 불러주지도 않을 게다
품팔이 생활 수십년에
배운 것이란
노임 앞에서 마냥
겸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저승에 가서는
나도 무시무시한 부자가 되고 말 것이다
두 주먹 불끈 쥐며
밤하늘에 대고
춘삼이가 외는 독백이
번개같이
우면산 능선 위를 달린다.“
- 노임을 받을 때, 106-1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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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유교수의 생활 29
야마시타 카즈미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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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이 된 아버지의 삶이 멋지다. 금방 잊는 것을 어린애로 돌아간다며 설레어 한다. 유택은 인간에 감동하는 것을 배웠다 하고.

곱게 입은 아내를 보고 판다 같다고 했다가, 아내가 유택의 만년필을 숨겼다가 벌어지는 일 끝에 그 만년필을 되찾고 교수 승진을 간절히 바라는 부교수의 논문에 환하게 웃으면서 불가라고 쓴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친척들은 물론이거니와 유택을 포함해 아버지까지 아무도 울지 않는다. 유택의 슬픔은 보이는데. 일본의 문화인가?

아주 따뜻하게 냉정한 사람이다.
여하튼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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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조선 - 시대의 틈에서 ‘나’로 존재했던 52명의 여자들
이숙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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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주장이 있어 보이는 열두세 살의 향복이 어느 날 예순의 상전에게 ‘강간‘을 당한다. 상전의 부인은 친정 괴산에 머물고 있을 때인데 여비들이 일체가 되어 이 ‘변괴’를 보고한다. 이후 부인은 거의 매일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남편을 망신 주는데 식사하러 내려갔다가 이문건은 아내의 구박에 되돌아오는 날이 많았다. 스스로 민망했는지 자기변명을 늘어놓기도 한다. “단지 근심과 걱정을 잠시라도 잊고자 무릎 위에 앉히고 놀다가 희롱이 지나쳐 무람없는 지경까지 간 것이지 정말로 간奸하려고 그랬겠는가? 아내의 투기가 너무 심하다.” 여색이냐 투기냐, 사족 부부의 리그전에 피해자 향복의 자리는 없다. 마님에게 머리채 잡히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인가?”

이문건의 삶은 자기가 남긴 일기에 이토록 고스란하다. 양반이라는 족속들.

여러 남자들과 간통했다고 매장당한 유감동 얘기의 결말.

“도덕이 없으면 지구가 멸망할 것처럼 굴던 권력자들의 실천 도덕을 유감없이 보여준 이 사건은 조선의 지배 이념인 도덕을 누가 가장 우습게 알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사라져버린 감동과 달리,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 요직으로 복귀하여 나라를 이끌었다는 그들의 발자취에서 익숙한 현실감이 느껴지는 것은 너무 지나친 감상인가.”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는 법이고, 마주쳤으니 소리가 나는 것인데, 여자만 벌 받고 사라진다. 아무 일 없듯이 다른 성의 양반놈들은 멀쩡히 고개 들고 산다.
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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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유교수의 생활 32
야마시타 카즈미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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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택의 외손녀 하나코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귀엽기 그지없다.
유택의 동생 지로, 초등학교 시절 벗, 제자들의 언어를 배우는 작고한 동료 얘기 등이 나온다.
잔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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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의 밤을 듣는 밤 K-포엣 시리즈 39
김명기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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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중 한 시의 저녁을 얘기한다.

“신열을 앓으며 기침하는 어린
나를 누이고 쌀을 씻던 엄마처럼
탈색된 기관지에서 이염같이
묻어 나오는 늙은 엄마 기침 소리를
등지고 쌀을 씻는다

짧은 겨울 볕을 다 써버린 채
부엌 쪽창에 희미하게 기댄
박명을 얹어 제법 따뜻한 소리로
사람 흉내를 내는 밥솥에
쌀을 안친다

한 번도 낡은 적 없는 어둠을
끌어당기듯 오래전 낡은
밥상다리를 펼치고 이웃에게서
얻은 김치를 수없이 새겨진
밥상 위 상처처럼 길게 길게
찢어 밥을 먹는다

허릿병이 심해진 엄마는
앉은뱅이 의자에 겨우 앉아
서툰 밥상에도 군말 없이 수저를 든다
암전 같이 내린 이 어둠을 갈라보면
내 이마에 손을 얹고 생선 살을 발라
숟가락에 올려주던 허리 꼿꼿한
그 여자가 있을 법도 한 저녁” <신열을 앓던 저녁>

화자가 아이였을 때 화자를 보살피던 엄마가
이제 노인이 되어 화자의 돌봄을 받는다.

생선 살을 발라 올려주던 보살핌이 이웃에게서 얻어 찢은 김치로 전락한

그 쓸쓸한 모자의 사랑.

‘사는 일의 절반은 한숨이고 나머지는
신음’

‘하나같이 살기 위해 버리고 옮겨가는
헐렁해서 채워지지 않는 일생들‘

’지겹고 쓸쓸했을
가난한 생’

에 사무친다.
아프고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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