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을 처음 듣는 당신에게
박종호 지음 / 풍월당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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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래식을 처음 듣는 당신에게

 : 박종호

 : 풍월당

읽은기간 : 2023/03/18 -2023/03/18


책을 산 지 꽤 됐는데 이제야 읽었다.

여행을 가며 기차안에서 읽었는데 읽다보니 하룻만에 다 읽었다.

내용이 재미있는 건지 기차시간이 길었던건지... ^^

읽다보니 좀 찌리는 게 많았다. 하지 말라고 하는 것 가운데 내가 하고 있는게 너무 많아서...

우선 난 클래식 음악을 진지하게 듣지 않는다. 책에서는 클래식은 공부하며 듣는 음악이라고 한다.

음악을 틀어놓고 BGM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책에서는 클래식은 멜로디를 듣는 것이 아니라 멜로디의 변화와 결론까지 가는 과정을 듣는 것이라 한다. 

음악회를 갈때 연주자가 누군지에 관심이 많다. 책에서는 그게 가장 하수라고 한다. 

아무래도 나는 클래식을 제대로 듣지는 못할 것 같다. 

그래도 클래식 음악이 좋다. 정확하게는 바로크시대부터 후기 낭만중의까지의 음악이 좋다.

곡을 해석하는 능력도 없고, 지휘자, 오케스트라, 연주자의 차이를 느끼지도 못하지만 음악이 들려주는 편안함과 진중함이 좋다. 

공부를 해서 들으면 좋겠지만 그정도의 열정은 없는 것 같다.

종종 음악회에 가서 속물처럼 허세를 부리며 음악을 듣고, 좋아하는 연주자의 음반을 사고,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유튜브를 찾아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 정도가 내 인생에서 클래식과 함께하는 수준인 것 같다.

하수면 뭐 어떤가.. 좋은 분들의 글을 읽으며 부러워하며 음악 찾아들으면 되지.. 


p11 이 책은 우리가 왜 클래식을 들어야 하는가?와, 그렇다면 어떻게 클래식을 들어야 하는가에 대한 글을 정리한 것입니다.

p19 서양에서 음악을 듣는 행위는 처음부터 ‘여럿이 모여서’ 하는 행사였고, ‘사회적으로’ 발전해왔습니다. 그러므로 음악회에는 예술적인 목적도 있지만, 예술을 매개로 해서 사람들이 모인다는 사회적 기능도 있는 것입니다.

p31 클래식 음악은 어렵다. 그러니 난 안 듣고 싶어라는 말을 듣고 싶지만, 차마 그 말을 못 하고 대신에 그 말이 “꼭 클래식을 들어야 합니까?”라는 질문이 아닌 질문으로 바뀌고, 나아가 “왜 클래식을 들어야 합니까?”로 전환된 것입니다.

p36 클래식을 듣는 것은 실로 쓸모가 없기 때문에 가치로운 일입니다.

p43 음악은 예술 중에서 가장 큰 신체적 반응을 이끌어내는 장르입니다. 직접적으로 신체에 작용합니다.

p61 클래식 음악은 편향성에도 불구하고, 지구상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고전이자 가장 높이 인정받는 예술이 된 것입니다.

p63 베토벤으로 대표되는 고전주의 시대, 연대로 말하자면 대략 1800년 이후의 100여 년이 클래식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때의 클래식은 즐거움이 아니라 사상을 표현한 음악이 되었습니다.

p68 보통 사람이 그런 위인들의 정신적 가치를 이해해야만 클래식 음악을 즐기는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p72 집단은 스스로 선택하거나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아니라 집단의 선택을 따릅니다. 그러고는 그것을 자신이 선택한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 대중의 더 큰 문제입니다.

p80 클래식은 다만 멜로디를 듣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 멜로디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를 듣는 것입니다. 처음 나온 멜로디가 어떻게 움직이고 변화하며, 한 악기에서 다른 악기로 옮아 다니다가 어떤 결론에 다다르는가 하는 그 과정을 듣는 것입니다.

p103 구미에서도 전자를 레코드 컬렉터라고 부르고, 후자는 콘서트 고어라고 부릅니다.

p125 음악회는 음반과는 달리 실제로 시간의 예술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해줍니다. 한 번 지나면 그 음악회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같은 곡목을 같은 연주가가 공연하더라도 이전의 연주와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모든 실제 공연은 단 한 번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음악회는 나름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p138 그들은 그렇게 유명하거나 세계적인 가수들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날 저녁 그들이 보여준 루치아 공연은 ‘됐다. 이만하면 미련 없다. 이런 공연은 다시 보기 어렵겠다’ 하는 확신을 저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은 실제로 음반을 많이 듣고 공연을 많이 보아야만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p145 살롱 음악회의 가장 중요한 정의이자 개념은 살롱이라는 방에서 열린다는 점이 아니라, 음악회의 모든 비용을 주최자, 즉 살롱의 주인이 부담한다는 점입니다.

p159 공공 음악회는 다릅니다. 가서 실망하면 욕을 날리면 됩니다. 과거에 공연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달걀이나 토마토를 던진 것도 공공 음악회의 경우입니다.

p181 지휘자나 연주자가 인사를 할 때 치십시오. 가장 안전하고 무난하며, 예의에 맞는 타이밍입니다.

p189 콩쿠르는 ‘젊은 음악가들의 등용문’일 뿐입니다. 그러니 세계적인 콩쿠르에서 우승했다는 것은 분명 대단한 일이지만, 우승자가 세계에서 가장 연주를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p197 외국의 오케스트라에서 이런 말이 돌고 있습니다. 유럽 사람들은 레퍼토리를 보고 음악회를 찾고, 일본 사람은 지휘자를 보고 찾으며, 한국 사람은 협연자를 보고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p205 베를린 필하모니 같은 음향이 좋은 홀은 소리가 잘 울려서 작은 기침 소리도 상상 이상으로 크게 납니다.

p218 클래식을 감상한다는 것은 위대한 사상을 배우는 인문 공부입니다. 음악을 듣다 보면 그 음악과 관련된 인문적인 흥미가 생기게 되며, 또한 음악을 통하여 다양한 인문 분야에 대한 더욱 깊고 넓은 공부가 가능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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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도킨스의 진화론 강의 - 생명의 역사, 그 모든 의문에 답하다, 개정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김정은 옮김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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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기간 : 2023/03/11 -2023/03/17


TV방송에서 대중을 향한 강연이면 재미있거나 쉬울줄 알았는데 재미가 없었다.

꾹 참고 읽었지만 흥미롭지가 않았다.

내가 진화론을 잘 몰라서 그런가? 흥미롭지가 않았다.

아직 이쪽분야는 초보라서 그런거 같다.

나에게 맞는 다른 책을 읽어야겠다. 



p35 나침반흰개미라는 이름은 항상 남북으로 길게 집을 지어 길 잃은 여행자에게 나침반이 되어준다는 뜻에서 불여졌다.

p76 거미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자신보다 작은 것이 움직이면 무조건 잡아먹는 습성이 있다.

p169 동물은 크기가 작을수록 허파나 아가미, 또는 혈관이 덜 필요하다. 체내의 세포가 상대적으로 적어서 다른 도움 없이 물질교환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몸의 표면이 충분히 넓기 때문이다.

p188 달리다가 뛰어올라 방향을 전환하면서 날갯짓이 시작됐다는 이륙설과 나무에서 뛰어내리면서 비행이 시작되었다는 활강설을 비교하면, 비행이 정반대 순서로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p191 새가 동일한 형태에서 점점 덩치가 커질 때, 몸무게는 길이의 세제곱에 비례해 증가하지만 날개 면적은 길이의 제곱에 비례해 증가한다. 따라서 덩치가 큰 새가 공중에 떠 있기 위해서는 비정상적으로 큰 날개가 필요하고,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날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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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처한 미술 이야기 7 - 르네상스의 완성과 종교개혁 : 미술의 시대가 열리다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7
양정무 지음 / 사회평론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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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처한 미술이야기7

 : 양정무

 : 사회평론

읽은기간 : 2023/03/05 -2023/03/12


믿고 보는 양정무 교수님의 난처한 미술이야기 시리즈

7권을 산지 오래됐지만 이제야 읽었다. 

그동안 읽어야 할 책이 많아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너무 늦게 읽었다.. 책에게 미안해진다. 

르네상스 후기가 이 책의 주제다.

르네상스가 얼마나 대단한 시기였는지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고, 매너리즘 시대가 어떻게 나왔는지도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

면벌부의 판매라니.. 종교가 이렇게까지 타락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그런 돈이 모여서 베드로 대성당이라는 걸작이 나왔다는 아이러니도 느끼게 된다. 

신을 모독하는 방법을 통해 신을 찬양하는 작품이 만들어지다니...

인류의 역사는 아이러니와 비틈의 연속이다.

이번에도 멋진 책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p6 미술의 황금기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서 시작해서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손에 의해 완성되지만, 1520년 라파엘로의 때 이른 죽음과 함께 일찍 마감됩니다. 길어야 30년 정도 지속된 미술의 시대는 짧은 시간 속에도 놀라운 대작들을 낳으며 동시에 강렬한 미술에 대한 신화까지 만들어냅니다.

p32 성 베드로 대성당의 신축은 단기간에 끝나는 공사가 아니었습니다. 본당만 해도 1506년에 시작해 1626년까지 120년이 걸렸고 대성당 앞쪽의 광장을 정비하는 데만 또다시 50년이 걸렸습니다.

p36 로마의 거대한 변화는 15세기 초반 교황 마르티노 5세가 아비뇽에서 로마로 다시 돌아오면서 시작됐습니다. 이때부터 교황들은 도시를 재건축하는 것이 로마의 권위를 세우고 교회의 권위를 세우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고, 로마를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습니다.

p61 카를 5세가 친가만이 아니라 외가 쪽으로부터 상속받은 영지만 대략 70개가 넘으니까요. 이렇게 그는 고대 로마를 능가하는 대제국을 지배하게 됩니다.

p89 이 시기 미술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책이 그림 속에 자주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책을 읽거나 책을 배경으로 한 그림이 넘쳐나죠

p100 결국 교황의 길의 정점에는 미켈란젤로가 있는 셈입니다. 카피톨리노 광장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까지, 이 길의 정점에 그의 작품이 자리하는 거지요. 그야말로 위대한 로마를 더 위대하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미켈란젤로죠

p129 재밌는 점은 작업 순서에 따라 인물의 모습도 변한다는 것입니다. 초반에 그려진 인물들은 정적인 반면 점차 제대화 쪽에 가까워질수록 미켈란젤로 특유의 큰 움직임이 나타납니다.

p147 브라만테는 재능있고 성격도 좋은 라파엘로를 교황 율리오 2세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했을 겁니다. 이렇게 해서 교황을 중심에 놓고 미켈란젤로와 브라만테, 그리고 라파엘로까지 3명의 작가가 경쟁구도를 형성하게 된거죠.

p150 템피에토는 산 피에트로 인 몬토리오 성당 안에 있는데, 이 성당은 성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처형된 곳에 지어졌습니다.

p159 노력하는 천재가 더 무섭다고 하지 않습니까? 라파엘로는 거장 앞에서 좌절하거나 성급히 도전해서 충돌하기보다는, 그들의 장점을 인정하고 그중 뛰어난 점을 적극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사람이었어요

p169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이 너무나 유명하다 보니 교황 집무실에 이 그림 하나만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방의 4면뿐만 아니라 천장에까지 벽화가 들어가 있어요. 결과적으로 라파엘로의 그림으로 가득 찬 방이 교황궁에 모두 4개나 있는 거죠

p194 하이 르네상스를 이야기할 때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이 원숙하게 자리 잡는 시기, 예를 들어 최후의 만찬이 만들어진 때부터 시작해서 라파엘로가 사망하는 1520년까지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이 르네상스는 대략 30년 정도입니다.

p211 미켈란젤로는 판테온을 연구한 후 지붕 선, 본체, 지붕, 앞면의 건축가가 전부 다르다고 지적합니다. 미켈란젤로는 판테온을 위대한 건물이라고 인정했지만, 동시에 이 건물이 지닌 여러 건축적 구조나 결함의 문제에 대해서는 냉정하게 비판했어요. 이러한 비판 정신이 바로 르네상스입니다.

p223 콜로세움의 아치 크기는 폭이 4.2미터고 높이가 7미터입니다. 한번 상상해 보세요. 높이가 7미터면 사람 신장의 세 배가 넘죠. 흥미롭게도 르네상스 이후 로마의 팔라초는 이 콜로세움과 비슷한 크기의 대형아치를 사용합니다.

p249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미술 작품에 등장하는 과일은 육체와 성의 쾌락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어요. 과일을 베어먹었을 때의 달콤함은 육체의 쾌락으로 비유하기 충분하죠

p267 시뇨렐리의 그림에서는 죄인들이 악마와 한 판 붙어도 밀리지 않을 것 같은 근육질이잖아요. 반면 보스의 그림 속 인물들은 악마의 장난감밖에 안될 정도로 나약해 보이죠

p278 이렇게 순수한 믿음을 이용한 일종의 돈벌이가 공공연하게 벌어졌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게 면벌부 판매입니다.

p298 성상 파괴 운동의 불길은 조금씩 잦아들었지만, 결과적으로 신교지역에서 종교미술은 굉장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어느정도 종교미술의 역할을 인정한 루터와 달리 칼맹 등 보다 엄격한 교리를 추종했던 지역에서 종교미술은 상당히 제한됐어요.

p315 원작자인 루카스 크라나흐 역시 이 그림의 의미를 중요시했던 것 같아요. 1529년부터 20년 이상 같은 주제의 그림을 그렸으니 말이죠. 신교 교리를 체계적으로 이미지화하는 데 크라나흐의 공이 크답니다.

p327 크라나흐의 그림 속 큐피드는 자기 손으로 안대를 벗고 있습니다. 이는 몽매함을 벗어나 자기 삶을 스스로 책임지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어요. 이제는 세계를 자신의 눈으로 보고 스스로 이끌어 나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거죠

p341 1527년 5월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군대가 로마를 점령하고 이듬해 2월까지 이 도시를 잔인하게 유린하지요

p354 미켈란젤로는 위로 갈수록 벽체를 두껍게 쌓아 그림 앞에 서면 상단에 자리한 인물들이 우리 쪽으로 쏟아지는 듯한 착시 효과를 줍니다. 어쩌면 지구 심판의 날에 벌어진 끔찍한 공포의 사건을 강렬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단일한 화면에 수많은 인물을 휘몰아치듯 구성하고, 비례까지 역으로 나타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p396 피렌체 시민들은 앞서 피렌체 정치를 좌지우지한 메디치 가문의 독재를 비판하기 위해 미켈란젤로에게 다비드 상 제작을 의뢰하지요 다비드가 거인 골리앗을 무찔렀듯 메디치 가의 독재를 끝내고 자유를 찾았다는 의미를 조각상에 담으려 합니다 .

p415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 대부분의 조각상은 신화나 성경, 혹은 역사 속에 등장한 인물들이 주인공이지만 사실은 피렌체 지배자의 얼굴이 들어가 있는 거죠

p418 메디치 가문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떠나서 이런 미술 컬렉션 덕분에 오늘날 피렌체의 예술적 명성이 자리 잡았다는 점은 존중할 만합니다. 한편 우피치 미술관은 소장하고 있는 작품도 귀중하지만 흥미롭게도 건축 자체 역시 시대의 변화를 담고 있어 살펴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p421 1510년을 전후로 이들이 이룩한 하이 르네상스 시대의 업적은 후대 미술가들이 맹목적으로 추종하면서 나오는 미술 경향을 매너리즘이라고 하죠. 이런 의미의 매너리즘은 1520년부터 1600년까지 최대 80년의 시기를 가리키는 미술 용어가 됩니다.

p442 여러 신화적 인물과 상징들이 중첩되어 있기에 수수께끼 같으면서도 이를 하나씩 해석하면서 즐거움을 얻는 거죠. 누구나 한눈에 다 이해할 수 있는 미술보다는 그리스, 로마 고전에 대한 지식이 있는 자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유희와 상징으로서의 미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447 바사리 회랑이라고 불리는 건물이지요.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아래쪽 피티 궁전에서 위쪽의 우피치 미술관을 거쳐 팔라초 베키오까지 연결하는 회랑입니다.

p452 이제 광장에는 지배자를 미화하는 노골적인 조각상을 세우고, 지배자의 정원 안에는 극소수에게만 허용된 귀족적인 취향을 반영한 미술품을 채웁니다.

p456 그리스,로마 신화를 모아 놓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보면 대홍수 이후 황폐해진 땅 위로 던진 돌들이 인간으로 재탄생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미켈란젤로의 노예상을 활용해 이런 신화속 이야기를 실제로 구현한 것으로 보여요

p478 다시 만들었다고 하면 과장이겠지만 적어도 베네치아 건축의 흐름을 바꾼 것은 사실입니다. 신소비노는 베네치아의 건축을 중세 고딕 양식에서 르네상스 양식으로 전환시킨 거죠

p484 티치아노는 1516년부터 이 제대화를 그려서 캉브레 전쟁이 끝난 1518년에 완성합니다. 하늘로 승천하는 성모 마리아를 그린 이 작품은 베네치아의 승리와 번영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볼 수 있지요

p490 풀밭 위의 콘서트는 인물이 누구를 상징하는지, 어떤 이야기에서 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고 평화롭고 신비한 자연의 분위기라는 정서만 남는 거죠. 이전까지는 특정 인물의 초상화나, 신화 혹은 성경 속 이야기의 한 장면을 그려서 전체 서사를 상상케 하는 그림이 많았기에 조르조네와 티치아노의 그림은 새로운 시도였죠

p493 비너스는 애칭으로 일종의 가림막 같은 표현입니다.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그 당시 성적으로 분방한 베네치아 상류층의 문화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여성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누드화의 전형이 된 작품이에요. 여기에 비너스라는 이름을 추가하면서 세속적인 느낌을 신비로움으로 상쇄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p496 티치아노는 이런 베네치아 회화 특유의 빛과 색채의 표현력을 새로운 경지로 끌어올렸다고 평가받으며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로 추앙받았습니다. 라파엘로처럼 생전에도 사후에도 영광을 누렸죠. 게다가 장수하기까지 했으니 화가로서는 가장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어요

p502 르네상스 시대 군주에게 요구되는 요건이 강력한 카리스마를 갖춘 군사 지도자이면서 동시에 지성과 교양을 겸비한 신사의 모습이라는 것을 잘 간파했고 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연출한 겁니다.

p513 그만큼 종교재판의 영향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종의 자유도시였던 베네치아조차도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엄격해진 종교미술의 기준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웠던 거죠

p520 당시 베네치아의 미감을 가장 잘 보여주는 화가가 베로네세라면 건축에서는 팔라디오를 빼놓을 수 없죠. 그는 방금 보았던 빌라 바르바로 뿐만 아니라 베네토 지역에 대략 22개의 빌라를 설계했습니다.

p526 팔라디오가 남긴 최고의 건축물 중 하나는 베네치아의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입니다.

p531 영국에서 권력을 잡은 휘그당은 바로크 양식이 지나치게 화려하다며 이를 배제하고, 대신 단순하고 합리적인 고전 양식의 팔라디오 건축을 채택합니다.

p534 새로운 건축 양식이 등장해 다른 건축 양식과 경쟁하고, 한 사회의 주류로 자리 잡는 데는 단순히 미적인 가치나 기능뿐만 아니라 사회적, 역사적 맥락이 작동하지요. 그렇기에 서양미술사에서 누가 누구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어떤 양식이 경쟁했고 채택됐는지를 살펴보다 보면 결국에는 우리가 서 있는 자리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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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 역사 역사가 흐르는 미술관 1
나카노 교코 지음, 이유라 옮김 / 한경arte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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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 역사

 : 나카노 교코

 : 한경arte

읽은기간 : 2023/02/24 -2023/03/04


일본책이 나에게 그리 잘 맞지 않는데 이 책은 좋았다

합스부르크 역사를 그림으로 간결하게 정리했다. 물론 너무 간결하다.

대신 그림이 그 빠진 부분을 채워준다. 

의외로 그림이 정말 많은 부분을 설명하고 있다. 

명화를 이해하고 그 배경을 알 수 있다면 역사를 더 잘 배울 수 있을 것 같다.

역사서는 종류가 참 많은데 이런 컨셉도 참 좋은 것 같다. 

브루봉왕가도 나온다고 하니 관심이 간다. 

올해의 책으로 꼽을 수 있는 책이다. 


p15 962년 오토 1세의 대관식으로 시작된 이 제국은 독일국 왕이 자동으로 로마 교회의 승인하에 황제가 되는 구조였으며, 언젠가 전 이탈리아를 영유해 고대 로마제국을 재현하려는 실현 불가능한 꿈 그 자체였다.

p21 루돌프 1세는 이 전투로 보헤미아를 손안에 넣고 곧이어 오스트리아 일대도 자신의 영지로 삼았으며, 스위스 산속에서 오스트리아로 본거지를 옮겼다.

p27 이 용맹무쌍하 ㄴ기사는 독일 최초의 르네상스인이었으며, 인문주의자와 에술가들을 비호하고 스스로도 시를 썼다고 알려져 있다. 현재 빈 소년합창단의 바탕이 된 궁정 예배당 소년 성가대를 창설한 사람도 막시밀리안 1세였다.

p37 전쟁은 다른 이들에게 맡겨라. 너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

p46 확실히 에스파냐 왕족 역사상 최고의 여주인공을 뽑는다면 콜롬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후원한 이사벨 여왕보다 아무런 정치적 업적 없이 그저 내부에서 무너져간 후아나 쪽일 것이다.

p53 실권을 쥔 아버지 페르난도는 29세의 후아나를 토르데시야스궁전에 유폐했다. 하기야 정무를 볼 능력이 없는 후아나에게는 그렇게 마음 불편한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후아나는 시녀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신만의 세계에 틀어박힌 채 75세의 장수를 누렸다.

p63 프랑수아는 서명하고 풀려나자마자 그런 조약 따위 지킬 리 있냐며 돌변했고, 교황이 프랑수아를 지지하자 분노한 카를은 로마에 병사를 보낸다. 이것이 악명 높은 로마 약탈이다. 급료를 받지못한 용병들이 사령관의 전사를 계기로 학살, 방화, 강간, 강탈 등 온갖 만행으 ㄹ저지르며 시가지를 파괴하는 바람에 로마 인구가 3분의 1로 줄어들 정도였다.

p95 엘 그레코는 그 전설을 250년 뒤 자신들이 살고 있는 동안 일어난 기적인 것처럼 그려냈다.

p101 펠리페는 회화를 보는 날카로운 안목으로 유명했고, 오늘날 프라도미술관에 장식된 티니아노와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수많은 걸작은 그가 정성껏 수집한 것들이다.

p106 펠리페 4세의 가장 큰 공은 아직 햇병아리였던 젊은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실력을 알아보고 궁정화가로 등용해 극진히 대우했던 것이라 할 수 있겠다

p128 성에 틀어박힌 루돌프는 과연 무엇을 했을까? 돈을 아낌없이 쏟아부으며 오로지 덕질에만 매진했다. 그래서 루돌프 2세는 오랫동안 무능하기만 한 괴짜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최근들어 루돌프에 대한 평가가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이제는 괴이하긴 하지만 그 시대 최고의 지성을 겸비한 교양인이자 학문과 예술의 비호자로 인정받고 있다.

p146 프리드리히 2세는 선전포고도 없이 어느날 갑자기 3만의 군대를 오스트리아령 슐레지엔으로 보냈다. 근대에서 가장 센세이셔널한 범죄라고 단언한 후세의 역사가도 있을 정도로 상대의 약점을 파고든 잔인무도한 짓이었다.

p151 숙적인 두 사람은 성격 면에서는 한쪽은 파격적, 한쪽은 모범적 그 자체라는 차이가 있었지만, 예리한 정치 능력과 냉철한 행동력은 매우 닮았다.

p154 만약 9녀가 젊어서 죽지 않고 순조롭게 나폴리의 왕비가 되었다면 프랑스 왕비는 재능이 가장 뛰어났던 카롤리나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앙투아네트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작은 나라의 왕비가 되어 의외로 행복하게 살았을지도 모른다. 프랑스 혁명도 어쩌면… 그야말로 덧없는 역사의 만약이다.

p160 그 안도감 때문에 비록 딸의 상대가 될 왕태자가 평범하고 외모도 흐릿하며 도저히 왕의 그릇은 아니라는 정보가 들어와도, 지금껏 책을 한 권도 끝까지 읽어본 적 없고 놀기 좋아하며 생각이 얕은 막내딸이 강대국의 왕비 자리를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들어도, 모두 사소한 일처럼 생각되었다.

p165 총희는 단순한 애첩이 아니라 왕의 여러 상대 중에서 선택받은 단 한명이며, 궁전에서 왕비보다 넓은 거실을 차지하고 특별 행사 때마다 궁정의 화려함을 독점하는 존재였다. 그 대신 정책이 실패하거나 적자가 쌓이면 “총희가 정치에 간섭했기 때문이다”, “총희가 사치를 부렸기 때문이다” 하는 모든 증오를 떠안아야 했다.

p185 가능한 한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도록 숨어 지내는 것이 최선이라고 합의해 작은 나폴레옹은 합스부르크의 고귀한 죄수로, 다시 말해 거의 감금당하다시피 했다.

p192 오스트리아가 낳은 히틀러라는 이름의 괴물이 독일로 이주해서 그 나라의 총통이 되어 신성로마제국의 제3제국 건설을 외치며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것이다. 그는 이미 프랑스를 지배하에 두었는데, 회유책을 위해 라이히슈타트 공작의 유해를 프랑스로 옮겼다.

p198 프란츠 요제프는 어머니 조피와 돌아온 메테르니히를 정치 고문으로 삼아 신중하고 근면하게 제국을 운영하며 재위 68년이라는 놀라운 장기 정권을 유지했다. 이는 프란츠 요제프였기에 가능했던 일로,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잘되지 않았을 것이다.

p202 황비가 된 이상 개인을 죽이고 제국의 안정을 가장 우선하지 않으면 혼돈의 유럽을 넘어설 수 없었다. 조피는 멋부리기와 놀이를 우선하는 며느리에게 자각심을 심어주려고 필사적이었다.

p212 프란츠 요제프는 어려운 정무를 처리할 때마다 어머니 조피에게 의지했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애인이자 여배우인 카타리나 슈라트에게 정신적으로 도움을 받아왔다. 이 불행한 부부는 부부가 되지 말았어야 했다는 사실을 45년에 걸쳐 끝끝내 확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p222 나폴레옹 3세의 비정함으로 인해 막시밀리안이 얼마나 대책없는 낙관주의자였는지 까발려졌다. 냉정한 어머니 조피의 의견을 듣지 않고 실현 불가능한 꿈에 빠져든 결과가 이것이었다. 결국 이름뿐인 황제 부부는 궁지에 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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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컷 세계사 - 사진으로 시대를 읽는다 온 세상이 교과서 시리즈 8
이성호 외 지음 / 해냄에듀(단행본)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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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컷 세계사

 : 이성호

 : 해냄에듀

읽은기간 : 2023/02/14 -2023/02/23


이런 특색있는 책이 좋다.

세계사를 사진으로 설명하다니... 

이미지가 주는 강렬함과 간결하게 그 시대를 설명하는 이야기라는 컨셉은 초보자나 청소년들에게 많이 도움이 될 것 같다.

한 컷 한국사보다 한 컷 세계사를 먼저 읽었는데 한 컷 한국사도 재미있을 것 같다. 

시간날 때 한 번 씩 넘겨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확실히 시대가 변해서인지 그림 또는 사진이 들어가야 책이 풍성해지는 것 같다. 


p15 현생 인류는 단 하나의 종 호모 사피엔스만 존재한다. 진화 과정에서 수많은 인류가 멸종하고 하나의 종만 살아남은 것이다. 이는 앞으로의 생존과 진화에서 매우 불리하다.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 그것이 진화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전략이기 때문이다. 별종들을 차별하지 않고 소중히 보듬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p23 길가메시는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달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돌판에 새기고 세상을 떠났다. 죽음은 두렵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니 살아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일하고 사랑하는 것이 행복을 누리는 비결임을 신화는 말하고 있다.

p25 문제는 범람기(8-11월)에는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점이다. 피라미드 공사는 바로 이 시기에 이루어졌고, 일거리가 없는 농민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주었다. 피라미드 공사는 가혹한 노동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괜찮은 돈벌이기도 하였다

p27 예전에는 아리아인의 침입으로 모헨조다로가 멸망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환경 파괴에 주목하고 있다. 인구가 늘면서 집을 짓고 도시를 유지하기 위해 계속 벽돌을 구워야 했는데, 땔감을 얻기 위해 인근 숲을 망가뜨리다 보니 홍수나 가뭄에 취약해졌다. 또한 계속되는 하천 제방 공사로 인더스강의 바닥이 올라와 결국 멸망하였다는 것이다. 무분별한 확장과 개발이 결국 모헨조다로를 죽은 자의 언덕으로 만든 셈이다.

p39 완적과 유령은 모두 위진 남북조 시대 죽립칠현에 속한 인물들이다. 대나무 숲에 숨어 상식에서 벗어난 기행을 일삼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예술에 귀의하는 삶을 살았던 7명의 현인, 이들을 죽립칠현이라고 부른다.

p41 대운하의 끝자락에 해당하는 베이징은 초원길로, 장안은 비단길로, 항저우는 바닷길로 다시 연결되어, 중국이 동아시아 교역 네트워크의 중심지가 되도록 도왔다. 대운하는 중국의 정치, 경제, 군사, 교역의 중심지를 연결하는 대동맥으로 기능하였던 것이다.

p45 돌궐 장수 톤유쿠크는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고,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기 살아남을 것이다”라는 말도 남겼다. 이처럼 유목 민족에게 이동 생활은 그들의 정체성과도 같았다.

p69 서양의 사정을 알아볼 정보원이 필요하였던 에도 바쿠후는 나가사키 항구에 인공섬을 건설한 후, 네델란드 상관을 지어 이곳에서만 제한적으로 교역하게 하였다. 이 인공섬이 바로 데지마이다.

p85 아바스 왕조는 탈라스 전투에서 이겨 당의 서진을 저지하고 동서 교역의 중계자 위치를 지켜냈지만, 우마이야 왕조처럼 이슬람 세계 전체를 하나로 다스리지는 못하였다. 우마이야 왕조의 후손이 이베리아반도에서 왕조를 재건하여 자신이 진짜 킬리프라고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p87 넓어진 이슬람 제국 곳곳의 무슬림들이 메카로 오기 위해서는 지도가 필요하였다. 뿐만 아니라 사막이나 초원 지대에서 방향과 시간을 알려면 하늘의 별을 봐야 했다. 이에 따라 지리학과 천문학이 자연스레 발달하였다.

p89 이들은 막강한 전투력으로 망치라는 별명을 얻었던 프랑크 왕국의 카룰로스 마르텔에게 크게 패하였다. 카롤루스 마르테른 이슬람 군대를 저지한 공으로 크리스트교 세계의 구원자가 되었고, 그 명성은 아들 피핀 3세, 손자 카롤루스 대제에게까지 이어졌다.

p105 힌두교에서는 수많은 신을 섬기지만, 그중 창조의 신 브라흐마, 유지의 신 비슈누, 파괴의 신 시바를 가장 중시한다. 특히 비슈누는 세상의 질서가 무너질 때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 세상을 유지하는데, 힌두교는 석가모니도 비슈누의 여러 모습 중 하나라고 주장하였다.

p109 무굴 제국의 포용성은 아버지 샤자한을 쫓아내고 황제가 된 아우랑제브 때 사라졌다. 그는 정복전쟁으로 무굴 제국의 영토를 최대로 넓혔지만, 인두세를 부활하고 개종을 강요하였다. 이런 억압 정책은 그의 사후 무굴 제국이 분열하는 계기가 되었다.

p123 로마인들은 길은 직선이어야 한다라는 생각으로 산에 터널을 뚫기도 하고, 골짜기에 높은 다리를 놓기도 하였다. 도로 양옆으로 배수로를 만들고, 일정한 간격으로 과실수를 심어 그늘과 비상식량까지 마련하였다. 로마인이 만든 도로의 길이는 3세기말까지 약 80,000km에 이르렀다.

p127 황후의 확고한 태도에 정신을 차린 유스티니아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진압하였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가 되찾았던 옛 로마 제국의 영광은 그의 죽음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탈리아는 다시 이민족의 손에 넘어갔고, 사산 왕조 페르시아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영토를 빼앗았다.

p129 800년 12월 25일,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에서 열린 성탄절 미사에서 교황 레오 3세는 카롤루스의 머리 위에 서로마 황제의 관을 씌워 주었다. 오래전 사라진 서로마 황제가 다시 탄생한 순간이었다.

p139 위기에서 벗어나자 샤를 7세는 생각을 바꾸었다. 잔 다르크가 수도 파리를 되찾기 위해 전투에 나섰을 때, 샤를 7세는 오히려 공격을 중단시키고 군대를 해산하였다. 아무런 도움 없이 전투에 나선 잔 다르크는 포로로 잡혀 영국에 넘겨졌지만, 샤를 7세는 잔 다르크를 구하지 않았다.

p149 위그노가 왕이 될 수는 없다며 카톨릭 측이 강하게 반발하였지만, 앙리가 카톨릭으로 개종하겠다고 발표하자 더 이상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결국 나바르의 앙리는 앙리 4세로 즉위하였다. 앙리 4세는 1598년 낭트 칙령을 발표해 위그노에게 예배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p155 이 선언의 배경에는 1791년 국민 의회가 새롭게 만든 헌법이 있었다. 새 헌법은 여성의 권리를 매우 제한하였다. 특히 가난한 여성의 정치적 권리는 남성 시민과 비교할 수 없이 낮았다. 이러한 불평등에 반발하여 올랭프 드 구주가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한 것이다.

p165 산업 혁명 이후 등장한 노동자 계급은 자신들의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고 나섰고, 1838년에 21세 이상의 모든 남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라는 차티스트 운동을 전개하였다.

p169 미국 국립 공원은 눈물의 길이라는 역사 탐방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9개 주에 걸쳐 뻗어 있는 이 길은 고향을 강제로 떠나야 했던 체로키 원주민을 기억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p183 이토록 정의롭지 못하며, 수치스러운 전쟁으 ㄴ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라는 말도 나왔지만, 이후 표결에서 아홉 표 차로 에산안이 통과되었고, 영국은 전쟁을 개시하였다.

p189 의화단은 외세 없는 세상을 꿈꿨지만, 도리어 열강의 중국 간섭을 더욱더 심화시켰다. 청 정부 역시 의화단을 통해 서양에 대항하려 하였지만, 열강에게 여러 이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의화단 사건은 10년 후에 일어날 신해혁명을 부채질한 건 아니었을까?

p197 일본에서 근대 일본의 사상적 선구자로 칭송받는 요시다 쇼인은 “일본이 열강에 잃은 것을 마회하려면 훗카이도와 오키나와를 차지하고 조선과 만주를 침략해야 한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지인에게 보냈다.

p203 인도 북부에 있는 잔시 지역의 영왕 락쉬미바이가 이끄는 저항군의 반영 항쟁은 인도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전국 전신망과 앞선 무기를 갖춘 영국군을 능가할 수는 없었다. 결국 세포이 항쟁은 2년 만에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인종과 종교의 차이를 넘어 여러 계층이 힘을 합해 외세의 지배에 맞선 경험은 이후 인도의 민족 운동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p229 애국심으로 가득한 남성들은 꽃장식을 한 열차에 올라타 줄줄이 전선으로 떠났고, 공장에는 여성들이 투입되어 밤낮으로 무기를 생산하였다. 전례 없이 거대해진 전쟁의 규모와 강도를 지탱하기 위해 국가의 모든 힘을 동원하는 총력전이 펼쳐진 것이다.

p239 평생을 바쳐 장애인, 여성, 노동자 등 소외된 사람을 위해 목소리를 내던 헬렌 켈러는 자국 내의 불평등과 착취 구조에 무관심해 온 미국 정부가 세계 평화와 민주주의 수호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며 전쟁에 가담하려는 진짜 이유를 꿰뚫고 있었다.

p247 1919년 2월 19일, 프랑스 파리의 외곽에 있는 베르샤유 궁전에서 제1차 세계 대전의 뒤처리를 위한 승전국들의 파리 강화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같은 시각 파리의 다른 한편에서는 15개국 57명의 대표가 참여한 가운데 듀 보이스를 의장으로 하는 제1회 범아프리카 의회가 열렸다.

p255 난센은 “난민을 감당할 수 없는 부담으로 간주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값진 자산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며 국제 사회를 끊임없이 설득하였다.

p263 나치당원이었던 란트페서는 이 당시 어떻게 전체주의의 최면으로부터 깨어날 수 있었을까? 그건 바로 그의 사랑스러운 아내가 독일 전체주의에서 극도로 혐오하고 탄압하던 유대인이기 때문이었다.

p265 더 큰 인정을 받고픈 욕망은 어린이들을 독재자의 눈과 귀로 만들었고, 유대인을 숨겨준 자신의 친부모까지 고발하게 하였다. 어른이 되어 내 마음대로 행동하고 싶었던 어린이들이 역설적이게도, 전체주의 체제의 꼭두각시로 전락하고만 것이다 .

p267 조선의용대와 타이완 의용대는 활동 지역이 달랐지만, 서로 긴밀하게 교류하는 돈독한 사이였다. 1939년 10월 10일 조선 의용대 창립 1주년 기념식장에 타이완 의용대가 보낸 축하 현수막이 걸렸고, 1940년 3월 1일 조선 의용대의 기념행사에는 리요우팡이 참석하였다. 조선 의용대는 타이완 의용대에게, 3.1 소년단은 타이완 소년단에게 각각 비단으로 만든 깃발 한 폭을 선물하기도 하였다.

p269 저자 프란시스 골튼은 바람직한 혈동이 덜 바람직한 혈통보다 더욱 신속하게 퍼져나갈 수 있도록 도모하는 과학이라는 용어로 우생학을 규정하였다. 골튼은 19세기 말 영국에서 탄생한 이 사이비 과학이 제2차 세계대전 시기 홀로코스트와 같은 대량 학살로 이어질 거라 생각하였을까?

p283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등이 실요주의 정책으로 인기를 얻자, 마오쩌둥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중국이 사회주의가 아닌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말을 듣고 격앙된 젊은이들은 거리로 뛰쳐나왔고, 이때부터 10년간 문화대혁명이라는 거대한 광풍의 정치 운동이 전개되었다.

p287 1964년 통킹만에서 미국 전함이 북베트남의 공격을 받았다는 구실로 미국의 군사 개입이 본격화되었다. 미국은 이 전쟁에 50여만 명을 파병하였고, 무기와 물자에서 북베트남을 압도하였다. 한국도 미국을 도와 32만 명을 파병하였다.

p289 68운동은 젊은이들이 기성 권위에 저항하며 공동체 정신을 강조한 운동이었다. 그동안 사회적 약자였던 여성, 흑인, 제3 세계 민중이 점차 전면에 드러났고, 이들에 대한 존중과 지지가 68 운동의 기본 정신이었다. 특히 미국에서는 베트남 전쟁과 인종 차별, 성차별에 반대하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라는 구호에서 드러나듯이 부모 세대가 하지 말라고 한 것들에 대한 저항도 활발하였다.

p291 1963년 8월 28일, 20만 명이 넘는 흑인들이 인종 차별 철폐를 외치며 워싱턴까지 행진하였다. 이날 마틴 루서 킹 목사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내 아이들 네 명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으로 평가받는 나라에서 살게 되리라는…”이라는 감동적인 연설을 하였다. 하지만 그는 1968년 3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암살당하였다.

p295 회의 마지막 날 참석자들은 지구는 하나라는 제목으로 인간 환경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이후 제1차 유엔 인간 환경회의가 열린 6월 5일은 세계 환경의 날로 지정되었다.

p299 사고가 일어날 지 3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원자력 발전소 30km 이내는 허가 없이 출입할 수 없고, 수십만 명의 사람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p299 2015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스베틀라나 악렉시예비치는 체르노빌의 목소리에서 “체르노빌에서는 모든 것 후의 삶이 더 기억에 남는다. 사람없는 물건, 사람 없는 풍경… 목적지 없는 길, 목적지 없는 전선… 또 생각해보면 이것은 과거일까, 미래일까?”라는 독백 인터뷰를 하였다.

p307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는 정부의 역할을 줄이고 여러 가지 규제를 없애는 것을 지향하였다. 또한 사회 복지 예산을 줄이고, 수도, 전기, 가스 등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공 기관들을 민영화하였다. 전 세계적으로 상품과 서비스, 자본, 노동 등이 국경을 넘어서 자유롭게 이동하였다.

p313 매주 금요일마다 전 세계 곳곳에서 남녀노소가 미래를 위한 금요일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이 운동은 스웨덴 소녀 그레타 툰베리가 2018년 8월 매주 금요일에 의회 앞에서 기후를 위한 등교 거부가 적힌 손팻말을 들고 1인 시위를 벌이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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