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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1년
이인화 지음 / 스토리프렌즈 / 2021년 2월
평점 :
주요 포인트는?
지구온난화와 생태계 파괴, 게다가고위험 전염병 바이러스가 극적으로 진화하면서 인간이 점점 더 살기 힘들다는 디스토피아적 환경에 비해 인공지능이 발달하고 심지어 정치를 ‘잘’ 한다는 건 굉장히 큰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가장 먼저 든 의문은 ‘왜 인공지능은 이렇게까지 인간들을 살리려 하는가?’였는데 사실 이런 물음은 영화 <매트릭스>를 통해 한번 겪은 터라 꼭 알아야하는 의미같은 건 아니다.
사실 인공지능이 찾으려는 건, 문자와 관련된 어느 역사 속의 인간과 인공지능의 공존을 반전시킬 지점 어디쯤이라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그보다는 지금 COVID-19 상황같은 어마어마한 치사율을 보이는 바이러스의 출현을 막기 위해, 그 바이러스 원형 – 정확히는 너무 빨리 사람을 사망하게 해 현재는 남아있지도 않은 - 을 찾기 위해 과거로 간다는 건 시기적으로 잘 짜여진 배경인 듯 하다. 다만, 이야기의 시작이 교도소이며 그 안에 있는 죄수, 그리고 죄수는 크로노토프(시공간) 보호법 위반으로 12년형을 받았다는 소문, 게다가 그 죄수의 전직이 민간인이 아닌데다 몇 안되는 시간여행의 적격자라는 설정은 좀 익숙하긴 하다.
분자생물학적 관점에서 인간의 자아는 기억의 집합이며 기억은 뇌에 있는 뉴런의 전기 신호가 분자 단위로 변한 것이라는 이론적인 부분을 증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되며, 어떤 형태로 과거로 가는지에 대한 것들은 굳이 과학적으로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어떤 전기신호를 이용하여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갈 수 있으며, 과거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24시간에서 36시간 정도가 한계라는 것 정도만 기억해도 충분하겠다. 이런 인공지능이 유지하는 균형, 그 중심에 다른 어떤 언어가 아닌 ‘한글’이 있다는 건 가슴 떨리는 일이지만, 조금은 부담스러운 설정이긴 하다. 영어와 함께 공용어로 사용된다는 정도였다면 어땠을까 싶기도 한데, 이런 와중에 진짜 그만큼의 언어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대단한 일이 될지도 상상해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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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 문자는 항상 우리 옆에 있었는데, 우리는 대체 뭘 했던 것일까’
2048년 한국어의 데이터 저작권료가 최초로 분배되었다. 한국어 언어자료를 400조 어절 규모로 모은 데이터 말뭉치의 저작권료였다. 이것은 국가 공유재산으로 발생한 기본소득이라고 결정되어 전 국민에게 균등 분배되었다.
(중략)
그해 모든 한국인은 1인당 매달 162만원씩의 현금을 월급처럼 받았다. 사람들은 그제야 알았다. 인공지능 시대에 서민이 의지할 것은 오직 데이터 저작권뿐이라는 것을.
그러나 딱 1년이었다.
2049년 한국은 멸망했고 저작권료는 인공지능에게 귀속되었다.
P.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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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의 우수성은 이미 여러차례 다른 나라에서도 연구하여 우리에게도 전해지고 있다. 그만큼 자부심도 들고 이야기의 전개에 빠른 이해를 돕지만, 그에 비해 이 한글을 향한 적대적 행위라든지 반反 한민족의 음모같은 건 그 위세가 작다. 그래서인지 광범위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후반부로 가면서 처음의 박진감을 잃어버리는 느낌은 어쩔 수 없다.
타임슬립이라는 흔하지만 매력적인 소재임에도 너무나 명확한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 거기에 숙주 - 라고 표현되는 과거의 어떤 인물 - 의 심리가 현재의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건 기술에 비해 어색한 설정이자 과거 인물에게 동화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낸 것 같아 과하긴 했다. 하지만 이런 부분에서 더 확장한다면, 심재익이 조선의 어느 시점에 도착해 살인이라고 믿어지는 상황을 보며 느끼는 공포감과 범인을 찾아야 하는 압박까지 직접 묘사할 수 있으므로 스릴러적인 스토리를 이어가기에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인상깊은 부분은?
추적의 대상이 다름은 있지만 큰 줄기는 ‘타임루프’가 중심이므로, 그에 대해서는 어떻게 차별성을 주는지가 중요할 것이다. 본 소설 속에서는 아주 특별한 예외조항으로 그걸 어렵게 만들지는 않는데, 다만, 작은 것은 미래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해도, 사건이 일어나는 큰 틀이 바뀌면 역사가 바뀔 수 있다고 전제하긴 한다. 소설속에서는 ‘사건장의 사슬, 세계선의 두 번째 루프’라고 표현하는데 이것 때문에 대체 역사로서도 가능한 지점을 만들어내고, 인과관계릐 모순을 만들어내진 않으니 흥미롭다.
몇몇 인물의 죽음이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름들이 살짝 비틀려지는 걸 보는 건 꽤나 재미있을 수 있으니 그걸 찾아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이름을 떠올리는 것 조차 내키지 않지만 ‘이완용’에 관한 것이라든지, ‘김옥균’의 죽음과 그 이후를 적절한 상상으로 그려낸 게 그것이다. 작가가 말하려고 하는 게 역사의 큰 줄기를 바꾸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인물과 스토리의 변주는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엔 충분하기도 하다.
이야기의 처음 시작은 SF, 중간은 스릴러와 추적극, 후반은 역사와 문자에 대한 고찰이어서 후반부는 매우 진중하기까지 하다. 다양하게 만들어지는 ‘인공지능’에 대한 이미지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해서 누구나 생각해본 ‘인공지능다움’과 ‘인간다움’의 경계에 대해 작가 역시 고민을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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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이 처음 자의식을 갖게 되었을 때 그들이 정말 의식이 있느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정말 감정을 느끼고 자신을 성찰하고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는가, 그런 척 가장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 인공지능들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최대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다말이 하원의원에 입후보 했을 때 사람들이 놀란 것도 이것이었다.
다말 옆에 서면 인간이 더 기계같았다. 정부 예산과 유전자의 표를 교환해주는 정치 기계 같았다. 그에 반해 다말은 지성과 열정에 너쳤으며 매력을 발산했다. 아버지의 대의를 이어가겠다고 호소하는 그녀는 진짜 인간, 내면에 개성을 간직한 인간으로 보였다.
p.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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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의 감정이 진짜 감정이 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인간답게 보이는 지점에까지 이르면 누구나 판단을 내리기는 어려울 텐데, 이런 자기다움의 어색한 경계에 대해 다른 이야기가 생겨나더라도 잘 이어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중반부의 스릴러와 추적은 한번에 피아구분이 쉽지는 않다. 당연히 오고가는 대화와 상대방의 시선을 통해 서서히 드러나는데, 지금 눈 앞에 있는 사람이 본인이 알고 있는 그사람이 아니라는 걸 한 순간 알아차리는 장면은 꽤나 놀랍기도 하면서 최첨단 기술이 어느 시점엔 귀신이 씌인 것으로 보일 수 밖에 없는 걸 대칭시켜 그 장면을 꽤 긴장감있게 끌어가기도 했다. 그리고 후반부는 진중하게 대화와 서술로 풀어나가는데 앞서 빠른 진행에 비해서는 느리기도 하면서 이해를 구하는 부분이 있어 속도감은 떨어진다. 하지만 인물들이 왜 그렇게 싸우는지, 왜 그렇게 작은 의미까지 찾아야 하는지를 따라간다면 뒷 부분의 설명이 왜 그렇게 무게감을 갖는지 필연적이기는 하다.
‘인공지능’, ‘시간 여행’이라고 해서 너무 엉뚱하거나 내용이 어려울 거라는 선입견을 필요없겠다. 이야기 자체가 과거-현재-미래로 흐르지는 않으므로 벌어지는 사건만을 따라가도 충분히 읽기에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강마사의 이야기가 좀 더 있었다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들고, 문제 해결이 이야기 마무리를 하기 위해 급하게 정리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작가의 이전작인 <영원한 제국>에서 보여줬던 하루동안의 이야기가 가진 제한 시간 속 스토리를 다시 접하게 되어 좋기도 했다. 한동안 사회적인 사건에 연루되어 볼 수 없던 작가였는데, 알려진바와는 다르게 실제로 연관이 있던 건 아니라고 하니 이전에 가졌던 선입견은 지워도 될 듯 하다. 사실인지 여부를 개인적인 의견만으로 판단하긴 어렵겠으나 다른 건 다 빼고라도 절필했던 작가의 여전한 필력이 좋았고, 다음 작품이 나오면 기꺼이 시간을 내 읽어보고 싶다.
덧붙인다면?
1. ‘인공지능’에 대해서는 워낙 유사한 캐릭터들이 많아 새롭지는 않았지만, 한글을 주요 매개로 하는 설정인만큼 다른 작품에서도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2. 대체 역사물로써 과거의 작은 변화로 미래의 어느 지점에는 영향을 미치는 장면이 있었으면 조금 더 재미가 있었을 것 같다.
3. 대체 역사소설이나 장치로서의 타임루프물, 한글이 가진 또 다른 강력함을 소설로 접하고 싶다면 추천, 타임루프를 기반으로 한 정통 스릴러나 느와르 추리물을 원한다면 비추.
* 이 서평은 작성자 본인의 개인블로그에 올린 서평 내용 일부를 편집한 것입니다.
* 이 서평은 출판사 ‘스토리프렌즈'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