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獨島)
 


<독도의 위치도>

 


 독도(獨島) 즉, 일본(日本)에서 부르는 이름 타케시마(竹島)는, 우리나라의 동해(東海), 일본(日本)으로서는 일본해(日本海)의 남서부(南西部-일본의 입장에서)에 있는 섬으로, 북위(北緯) 37도(度)15분(分), 동경(東經) 131도(度) 52분(分)에 위치해 있는 섬으로 그들은 보고 있다.(더욱 정확하게는 북위 37도 14분 30초, 동경 131도 52분 0초라고 함)

 참고: 일찍이 일본정부 외무성(外務省)에서는 북위(北緯) 37도(度) 9분(分), 동경(東經) 131도(度) 55분(分)으로 표시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2005년 7월에 마이니치(每日) 신문에 의해서 그 오류가 지적되었고, 그리하여 바르게 정정(訂正)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의 주소(住所)는 시마네(島根) 현(縣) 오키(隱岐) 군(郡) 오키(隱岐)의 시마쵸우(島町) 타케시마(竹島) 국유(國有=官有) 무번지(無番地)라고 하며, 1905년(明治38年) 1월 28일에 일본정부는 그 독도(獨島)를 자신들의 영토로 할 것을(隱岐 所管) 각의(閣議=內閣會議) 결정(決定)했다.

 그러자 1952년(昭和27年) 1월 18일, 대한민국의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이 그 독도(獨島)를 대한민국의 영토라고 선언(宣言)했으며(일본의 입장에서는 일방적), 그와 동시에 근해(近海)를 포함했던 <이승만 라인>을 설정했다.

 그리하여 그 후, 1965년(昭和40年) 6월 22일에 있었던 <한일기본조약(韓日基本條約)> 체결(締結) 시까지 한국은 일본인들이 그 <라인>을 넘었다는 이유로, 일본어선 328척(隻)을 나포했으며, 더불어서 일본인 44명이 살상(殺傷) 당했고, 3929명이 억류(抑留)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또 그 사이에 해상보안청순시선(海上保安廳巡視船)에 총격을 가했던 사건은 15건에 달했다고 하며, 그로인해서 또 16척(隻)의 배가 공격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지금도 한국(韓國)은 무력으로 그 섬을 점유(占有)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日本)과의 사이에서 영토문제가 발생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女島(左)와 男島(右)>

  

 동해(東海), 일본(日本)으로서는 일본해(日本海)의 남서부(南西部-일본의 입장에서)에 있는 섬으로, 북위(北緯) 37도(度)15분(分), 동경(東經) 131도(度) 52분(分)에 위치해 있는 섬으로 그들은 보고 있다.(더욱 정확하게는 북위 37도 14분 30초, 동경 131도 52분 0초라고 함)

 참고: 일찍이 일본정부 외무성(外務省)에서는 북위(北緯) 37도(度) 9분(分), 동경(東經) 131도(度) 55분(分)으로 표시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2005년 7월에 마이니치(每日) 신문에 의해서 그 오류가 지적되었고, 그리하여 바르게 정정(訂正)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의 주소(住所)는 시마네(島根) 현(縣) 오키(隱岐) 군(郡) 오키(隱岐)의 시마쵸우(島町) 타케시마(竹島) 국유(國有=官有) 무번지(無番地)라고 하며, 1905년(明治38年) 1월 28일에 일본정부는 그 독도(獨島)를 자신들의 영토로 할 것을(隱岐 所管) 각의(閣議=內閣會議) 결정(決定)했다.

 그러자 1952년(昭和27年) 1월 18일, 대한민국의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이 그 독도(獨島)를 대한민국의 영토라고 선언(宣言)했으며(일본의 입장에서는 일방적), 그와 동시에 근해(近海)를 포함했던 <이승만 라인>을 설정했다.

 그리하여 그 후, 1965년(昭和40年) 6월 22일에 있었던 <한일기본조약(韓日基本條約)> 체결(締結) 시까지 한국은 일본인들이 그 <라인>을 넘었다는 이유로, 일본어선 328척(隻)을 나포했으며, 더불어서 일본인 44명이 살상(殺傷) 당했고, 3929명이 억류(抑留)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또 그 사이에 해상보안청순시선(海上保安廳巡視船)에 총격을 가했던 사건은 15건에 달했다고 하며, 그로인해서 또 16척(隻)의 배가 공격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지금도 한국(韓國)은 무력으로 그 섬을 점유(占有)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日本)과의 사이에서 영토문제가 발생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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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위(經緯)>

  2. 독도(獨島)의 역사(歷史) 또는 내력(來歷)에 대한 개요

 1) 한국의 인터넷 참고 자료(사이버 독도와 그 外의 자료들 참조. 단, 그냥 연대순으로 기술함)


 ※ 단, 상기까지 한국의 자료이며, 이하는 일본의 자료와 비교 병기(倂記)함.
    그리고 한국의 자료(인터넷 등)은 "한"으로, 사이버 독도의 자료는 "사"로, 일본의 자료는 "일"로 표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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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1904년 8월. 한일협정서 성립.

 (사) 1904년(4237,甲辰) 대한제국 광무8년.『官報』號外 光武8年3月8日. 2월 10일, 일본이 러시아에 선전포고. 2월 23일 제1차 韓日議定書 강제조인. 이로써 일본은 러일전쟁을 위해 한국영토를 임의로 점령, 사용할 수 있게 됨. 6월 15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함대가 남하하여 조선해협 동수도(朝鮮海峽 東水道 현재의 對馬해협)에서 일본육군 수송선 2척을 격침. 8월 22일 제1차 한일협약 강제조인. 일본이 대한제국의 정부 내에 재정과 외교고문을 설치함. 9월 2일, 러시아함대의 감시를 위해 울릉도에 설치한 망루가 업무를 개시함. 9월 24일, 독도에 망루설치가 가능한지 조사하기 위해서 일본군함 니이타카(新高)가 울릉도를 출발. 新高 號는 독도에 대해 “리앙꼬루도岩은 韓人은 이를 獨島라고 書하고 本邦 漁夫들은 리앙꼬島라고 호칭”하며, 망루설치가 가능하다는 보고서를 작성함. 9월 29일, 일본 어민 나카이요우자부로우(中井養三郞) “독도를 일본영토에 편입하고, 자신에게 빌려 달라”는 문서를 외무성 내무성 농상무성에 제출함. 11월 20일 독도가 한일 간을 연결하는 해저전선의 중계지로 電信所 설치에 적합한지를 조사하기 위해서 일본군함 쓰시마(對馬)가 독도에 도착함. *참고문헌 『官報』 號外 光武 8年 3月 8日『極秘明治三十七八年海戰史』『軍艦新高戰時日誌』『島根縣誌』(1923)『隱岐島誌』(1933), 『軍艦對馬戰時日誌』

 (일)
1904년(明治37年) 2월 6일:러일전쟁 발발(勃發).

 (일) 1904년(明治37年) 8월 23일:제1차 한일협약 체결(締結).

 ※ 브리태니커 인용으로 대신함.

 <한일외국인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서-
韓日外國人顧問傭聘 ── 關 ── 協定書>

 1904년 8월 22일 외무대신서리 윤치호(尹致昊)와 일본 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사이에 조인된 협정서(고문정치).

 한일협정서 또는 제1차 한일협약이라고도 한다. 일제는 1904년 러일전쟁을 개전하는 동시에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강요하고, 그해 5월 일본각의에서는 한국식민지화의 기본방침인 '대한방침'과 '대한시설강령'을 결정했다. 이 방침은 식민지화를 위한 대한정책의 확립인 동시에 실천방안이었다. 이어서 러일전쟁이 일제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자, 8월 22일 한일의정서 제1조에 규정한 '내정개선'이라는 구실하에 '외국인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서'를 외부대신서리 윤치호와 일본공사 하야시 간에 체결하게 했다. 협정서의 내용은 ① 한국정부는 대일본정부가 추진하는 일본인 1명을 재정고문으로 삼아 재무에 관한 사항은 모두 그의 의견에 따를 것, ② 한국정부는 대일본정부가 추진하는 외국인 1명을 외교고문으로 하여 외부(外部)에 용빙하여 외교에 관한 주요업무를 일체 그 의견에 따를 것, ③ 한국정부는 외국과의 조약체결과 기타 중요한 외교안건, 즉 외국인에 관한 특권양여와 계약등사의 처리에 관해서는 미리 대일본정부와 협의할 것 등이다. 일본은 이 협정에 의해 그들 대장성 주세국장 메가다 수타로[目賀田種太郞]를 재정고문에, 또 20여 년 간 일본정부에 고용되어 충성을 바친 미국인 스티븐스를 외교고문에 임명하여 한국의 외교와 재정을 감독·정리한다는 명목으로 외교권과 재정권을 장악했다. 한편 일본은 2명의 고문용빙을 전후하여 하등 계약의 근거도 없이 자진 초청한다는 형식을 빌려서 각 부에도 모두 이와 대동소이한 고문을 차례로 두게 했다. 또한 주한 일본공사관부무관 육군중좌 노즈[野津鎭武]가 군부고문으로 임명되어 군대해산의 일을 담당했으며, 일본경시청 경시 마루야마[丸山重俊]가 경무고문으로 임명되어 경찰을 장악했고, 궁내부에는 한국에서 참령을 지낸 가토[加藤增雄]가 궁내부고문으로 취임하여 궁내부를 감독했다. 뿐만 아니라 학부에까지도 도쿄[東京] 고등사범학교 교수 시데하라[幣原垣]를 학부참여관이라는 명칭으로 취임시켜 식민지교육의 체계를 잡게 했다. 이들 고문 밑에는 이와 같은 일을 보조하기 위해 각 고문마다 보조관으로 10~100명의 일본인이 딸려왔다. 이로써 이른바 고문정치체제를 확립하여 대한시설강령 등 식민지화 방안을 공동으로 추진하게 했다.

 <고문정치(顧問政治)>

 1904년(광무 8) 8월 22일 체결된 제1차 한일협약에 입각하여 파견된 일본인 고문관에 의해 자행된 내정간섭 행위, 또는 그 간섭시기의 정치.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을 도발한 일본은 대한제국 정부의 중립선언을 무시하고 한일의정서에 강제 조인하도록 했다. 한일의정서는 일본이 한국의 제반 시설과 인원을 러일전쟁에 동원하고, 향후 한국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강요한 조약으로서 전체 6개 항목으로 되어 있었다. 한일의정서가 조인된 이후 일본은 그에 기반하여 세부적인 한국경영방안을 작성, 같은 해 5월 일본 각의의 결정을 거쳐 실행에 들어갔다. 이에 따라 러일전쟁 중 일본은 철도부지·군사기지 등 수많은 토지를 강탈하였으며, 곳곳의 주민들을 강제노역에 동원하였다. 또한 한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종래 한국과 러시아 사이에 체결된 모든 조약의 폐기를 선언하게 하였으며, 내정개혁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의 정치적 세력확대를 도모하였다. 이해 8월 10일 러일전쟁이 종식된 후 8월 22일에 외부대신 서리 윤치호와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 사이에 '한일 외국인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제1차 한일협약)가 체결되었는데, 여기에서 한국정부가 재정과 외교부문에 일본이 추천하는 외국인 고문을 채용해야 한다는 것이 규정되었다.
대한제국 정부는 이들 고문과 협의를 거친 후에야 관계사항을 처리할 수 있었으며, 이들 고문의 권한은 한국정부 임의로 변경할 수 없었다. 더욱이 일본은 협정서에 명시된 재정고문·외교고문 이외에도 한국정부의 자진 초청이라는 형식을 빌려서 군사·경찰·궁내부·학부 등의 제반 행정 분야에 자국인을 파견하여 감시·감독을 강화하였다. 재정고문으로 파견된 자는 일본 대장성 수세국장 메가다[目賀田種太郞]였는데, 그는 부임 직후 재정·화폐개혁을 단행하여 그것을 기반으로 한국경제를 식민지구조로 변화시켜나갔다. 외교고문으로는 미국인 D.W. 스티븐스가 파견되었고, 군사고문으로는 주한 일본공사관 부무관 노즈[野津鎭武], 경무고문에 일본 경시청 경시 마루야마[丸山重俊], 궁내부고문에 가토[加藤增雄], 학부 학정참여관에 동경고등사범학교 교수 시데하라[幣原坦]가 각각 파견되어 내정을 간섭하였다. 이들 고문과 함께 보조관이라는 명목으로 10~100여 명의 일본인이 파견되어 한국의 모든 내정을 속속들이 감시·통제하였다. 고문정치는 1905년 을사조약으로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이른바 통감정치로 이행하였으며, 이에 따라 대한제국의 주권은 완전히 허구화되었다.

 (일) 1904년 9월 29일:시마네(島根) 현의 나카이요우자부로우(中井養三郞)가 (일본의) 내무성(內務省)・외무성(0外務省)・농상무성(農商務省)에 <리앙쿠르 섬 영토편입 겸, 임차(賃借) 요구 원(願)>을 제출함.

 ※ 나카이(中井-1864년부터 1934년)는, 1864년 톳토리(鳥取) 현, 쿠라요시(倉吉) 시(市-鳥取県 東伯郡 小鴨村 大字中河原)에서 양조(釀造)업자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그 후에 스키(周吉) 군(郡), 사이고우쵸우<西郷町-現在의 오키시마쵸우(隠岐島町)>를 거점으로 했던 어업자였다. 그리고 또 그는 독도(獨島)에서 잠수기(潛水器)를 사용해서 해삼과 전복을 채취했으며, 1903년에는 그 독도(獨島)에 조그만 집도 지었다. 그리하여 1904년에는 상기(上記)의 원(願)을 제출했으며, 그런데 또 그것이 바로 현재 일본정부에 의한 독도영유권 주장의 중요한 한 근거가 되고 있다고 한다.

 

 



<明治39(1905)년 竹島視察団記念写真(島根県立図書館所蔵)
隠岐島庁前:最後列左로부터 3번째가 中井 그리고 그 앞 파란색 동그라미 안은 奥原碧雲라고 함>

 

 

 그리고 아래는 나카이가 그때 발원(發願)했던 원(願)의 내용이므로, 관심이 있으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りゃんこ島領土編入並に貸下願>

 隠岐列島の西八十五浬、朝鮮鬱陵島の東南五十五浬の絶海に、俗にりゃんこ島と称する無人島有、之候、周囲各約十五町を有する甲乙二ヶの岩島中央に対立して一の海峡をなし、大小数十の岩礁点々散布して之を囲繞せり。中央の二島は四面断岩絶壁にして高く屹立せり。其頂上には僅に土壌を冠り雑草之に生ずるのみ全島一の樹木なし。海辺彎曲の処は砂礫を以て往々浜をなせども、屋舎を構え得べき場所は甲嶼の海峡に面セル局部僅に一ヶ所あるのみ。甲嶼半腹凹所に潴水あり。茶褐色を帯ぶ。乙嶼には微々たる塩分を含みたる清冽の水断岸渭滴仕候。船舶は海峡を中心として、風位により左右に避けて碇泊せば安全を保たれ候本島は本邦より隠岐列島及び鬱陵島を経て朝鮮江原、咸鏡地方に往復する船舶の航路に当たれり。若し本島を経営するものありて人之に常住するに至らば、夫等船舶が寄泊して薪水食糧等万一の欠乏を補ひ得る等、種々の便宜を生ずへければ、今日暇駸々乎として盛運に向ひつ々ある処の本邦の江原、咸鏡地方に対する漁業貿易を補益する所少なからずして本島経営の前途最も必要に被存候。本島は如斯絶海に屹立する最爾たる岩島に過ぎざれば、従来人の顧るもなく全く放委し有之候。然る処、私儀鬱陵島往復の途次会本島に寄泊し、海驢の生息すること夥しきを見て空しく放委し置の如何にも遺憾に堪へざるより爾来種々苦慮計画し兪、明治三十六年に至り断然意を決して資本を投じ、漁舎を構へ、人夫を移し漁具を備へて先づ海驢猟に着手致候。当時世人は無謀なりとして大に嘲笑せしが、元より絶海不便の無人島に新規の事業を企て候事なれば計画齟齬し設備当を失する所あるを免れず。剰へ猟法製法明かならず。用途販路亦確ならず。空しく許多の資本を失ひて徒に種々の辛酸を嘗め候、結果本年に猟法製法其に発明する所あり。販路も亦之を開き得たり。而して皮を塩漬にせば、牛皮代用として用途頗る多く、新鮮なる脂肪より採取せる油は品質価格共に鯨油に劣らず。其粕は十分に搾れば、以て膠の原料となし得らるべく肉は粉製せば骨と共に貴重の肥料たること等をも確め得候。即ち本島海驢猟の見込略相立ち候。而して海驢猟の外本島に於て、起すべき事業陸産は到底望なく海産に至りては、未だ調査を経ざるを以て今日確信し難きも日本海の要衝に当れば、本島附近に種々の水族来集棲息せざる筈なければ、本島の海驢漁業にして永続する事を得ば因て、以て試験探査の便宜と機会とを得て将来に有利有望の事業を発見し得るならんと相期し候。要するに本島の経営は資本を充実にし設備を完全にして海驢を捕獲する上に於て前途頗る有望に御座候。然れども本島は、領土所属定まらずして他日外国の故障に遭遇する等不測の事あるも、確乎たる保護を受くるに由なきを以て本島経営に資力を傾注するは尤も危険の事に御座候。又本島の海驢は常に棲息するにはあらず。毎年生殖の為其季節即ち四五月(年により遅速あり)、来襲し生殖を終りて七八月頃離散するものに候。随て其漁業は其季間に於てのみ行ひ得られ候。故に、特に猟獲を適度に制限し、繁殖は適当に保護するに非んば忽ち駆逐殄滅し去るを免れず。而して制限保護等の事は競争の間には到底実行し得られざるものにて、人の利に趨くは蟻の甘きに附くが如く世人苟くも、本島海驢猟の有利なるを窺い知せば当初私儀を嘲笑したるものも並び起つて大に競争して濫獲を逞うし、直ちに利源を絶滅し尽して結局共に倒る々に至るは必然に御座候私儀は前陳の如く従来種々苦心の結果本島の海驢猟業略々見込相立ちたれば、今や進んで更に資本を増して一面には捕獲すべき大さ数等を制限すること、雌及び乳児をば特に保護を厚くすること島内適当の箇処に禁猟場を設くること害敵たる鯱(しゃち)、鱶(ふか)の類を捕獲駆逐すること等、種々適切の保護を加へ一面には猟獲製造に備ふる種々精巧の器械を備へ装置を設くる等設備を完全にし、傍には漁具を備へて他の水族漁労をも試む等大に経営する所あらんと欲するも、前陳の如き危険あるが為頓挫罷在候。如斯は啻(ただ)に私儀一己の災厄のみならず、又国家の不利益とも被存候。就きては事業の安全利源の永久を確保し、以て本島の経営をして終を完うせしめられんが為に、何卒速に本島をば本邦の領土に編入相成、之と同時に、向ふ十ヶ年私儀へ御貸下相成度、別紙図面相添此段奉願候也。明治三十七年九月二十九日島根県周吉郡西郷町大字西町字指向中井養三郎内務大臣子爵芳川顕正殿外務大臣男爵小村寿太郎殿農商務大臣男爵清浦圭吾殿

 <해석> 오키 열도에서 서쪽으로 85리, 조선의 울릉도에서 동남쪽으로 56리 쯤의 절해에, 소위 리앙쿠르 섬이라고 하는 무인도가 있습니다. 그 섬은 주위 약 15정(町은 앞에서 설명되었음) 정도 되는 갑을(甲乙) 2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중간에는 해협이 있으며, 크고 작은 수십 개의 암초들이 그 섬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도(主島)라고 할 수 있는 두 섬은 사면이 단암 절벽으로 높이 솟아있습니다. 그 정상에는 아주 좁은 곳에 흙이 있어, 마치 관처럼 잡초가 조금 자라고 있지만, 그러나 전체적으로 수목이라고는 단 한그루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참고> LEE Kyu Tae, Chosun Daily (June 27, 2003). "(pseud.)The Trees of Liancourt Rocks" 독도의 나무는 본래 무쇠처럼 단단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오랫동안 나무 하나 자라기 힘든 돌섬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독도에도 나무가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일보〉 이규태 씨에 따르면 남해의 거문도에는 독도에서 꺾어온 나무로 만들었다는 가지 방망이며 가지홍두깨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배를 만들 때 이 독도에서 꺾어온 나무로 나무못을 만들어 박았다 한다. 이규태 씨는 그의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30여 년 전 거문도에서 80대의 노 어부 박운학 옹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에 의하면 구한말 당시 거문도 어부들은 울릉도에 가서 아름드리 거목을 베어 배를 만들고, 또 그 재목을 뗏목으로 만들어 끌고 온다고 했다. 해변에 움막을 치고 배를 만드는데 쇠못을 구할 수가 없어 독도까지 가서 나무를 베어와 그 나무못으로 조립을 했다한다. 왜냐하면 이 바위섬에서 자란 나무는 왜소하지만 몇 백 년 몇 천 년 풍운에 시달려 목질이 쇠만큼 단단해져 있기 때문이라 했다. 독도나무를 베어오면서 물개(강치) 한 마리를 잡아와 기름을 짜고 그 기름으로 밤을 밝혔다." 그렇다면 독도에서 이 나무가 없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이규태 씨는 "문경새재 박달나무가 방망이 홍두깨로 다 나갔듯이 독도 나무도 나무못이나 방망이 홍두깨로 모조리 베어져 나갔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런데 울릉도 주민들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그들은 독도의 나무가 없어진 주범으로 미 공군의 독도폭격을 들고 있다. "엄청난 폭탄을 퍼부었는데 독도에 풀 한포기 살아있겠어요? 폭격당시 울릉도에서도 보일 정도로 독도 쪽에서 불꽃과 연기가 피어올랐으니까요. 나무는 그 때 모조리 타버렸죠."

 
그리고 또, 해변의 만곡(彎曲)에는 모래와 자갈로 된 해변이 가끔씩 형성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역시, 집 같은 것을 지을 만한 장소는 갑(甲)의 섬 해면에 면한 아주 조그마한 장소 한곳뿐입니다. 그리고 그 갑의 섬 중간쯤에는 오목하게 들어간 곳이 있어, 물이 조금 고여 있으며, 그 물은 다갈색을 띠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을(乙) 섬에도 아주 미미하지만, 염분을 함유한 맑고 찬 물이 단애에 조금씩 고여 있습니다. 선박은 해협의 중심에서 그 풍향에 따라 좌우로 피하면서 정박을 하면 비교적 안전합니다. 그 섬은 본방(本房-일본)에서 오키 열도 및 울릉도를 경유해서 조선의 강원도와 함경도지방을 왕복하는 선박들의 항로에 위치합니다... (그러나 나머지는 개인의 사업사정과 강치의 포획과 보호 등으로 일본의 국가이익에 기여할 것으로 생각됨으로, 그 영토편입의 중요성과 자신들에 그 섬을 관리할 수 있을 권리를 내려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이므로, 하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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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1905년 1월 28일. 일본 내각회의, 독도가 무주지 이므로 일본영토로 편입한다는 결정.
      2월 22일. 일본이 시마네 현 고시 제40호로 영토로 편입.
      4월 14일. 시마네 현, 현령 제18호로 독도에서의 강치포획에 대한 허가제 채택.
      6월 4일. 독도에서의 강치잡이 어업이권을 中井養三郞에게 허가.
      8월 19일. 러일전쟁 중, 러시아 함대를 감시할 목적으로 '독도망루'를 설치하여 일본해군 6명 상주.

 (사) 1905년(4238,乙巳) 대한제국 광무 9년.『秋鹿村役場本 시마네 현(島根縣)고시 40호(回覽用)』1월 28일 일본 閣議에서 中井養三郞의 청원을 받아들이는 형식을 빌려 "독도는 주인없는 무인도(無主地)로서, 다케시마(竹島)라 칭하고 일본 島根縣 隱岐島司의 관할하에 둔다"고 일방적으로 결정함. 2월 22일 일본 소위 시마네현(島根縣)고시 40호를 날조하여 국제법상 無主地先占에 있어 '영토취득의 국가 의사'라는 요건을 모두 충족시켰다는 합법성를 가장하려 함. 이 고시는 실제 고시되었다는 증거가 없음. 5월 17일 일본 독도를 官有地로서 시마네현 토지대장에 등재함. 8월 29일 일본 독도 망루 준공. 9월 5일 러ㆍ일강화조약(포츠머드조약) 체결. 한국에서의 일본의 특수권익이 열강에 의해 인정됨. 11월 17일 일본 제 2차 한일협약(을사보호조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완전 박탈함.
  ※브리태니커 인용

 <을사조약-제2차 한일협약, 한일보호조약>

 공식 명칭은 한일협상조약(韓日協商條約)이며, 제2차 한일협약, 을사보호조약, 을사5조약이라고도 한다.

 1.배경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7월 가쓰라[桂太郞]-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일본의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받았으며, 8월에는 제2차 영일동맹조약(英日同盟條約)을 통해 영국으로부터도 한국에 대한 지도 감리 및 보호의 권리를 인정받았다. 같은 해 9월 5일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한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러시아로부터도 마침내 한국에 대한 지도·감리 및 보호의 권리를 승인받았다. 열강들로부터 한국의 보호국화(保護國化)에 대한 승인을 얻어낸 일제는 이어서 한국에 보호조약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일제가 한국의 보호국화에 관한 기본방침을 확정한 것은 1904년 5월 31일의 내각회의에서였다. 내각회의에서 한국의 국방 및 재정의 실권장악, 그리고 외교의 감독과 조약 체결권의 제약 등을 통한 한국에 대한 보호권 확립을 결정했다. 이같은 결정에 앞서 이미 1904년 2월 10일 러시아에 대해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고 뒤이어 2월 23일 일본군 1개 사단이 서울에 진주하며 위협을 가하는 가운데 '한국정부는 시정개선(施政改善)에 대해 일제의 충고를 허용한다'는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압적으로 체결하고, 내정간섭의 길을 열었다. 그후 한일의정서 시행세칙을 내세워 군사행동과 토지의 점령·수용을 자의적으로 단행했으며, 8월 22일 '한일 외국인 고문초빙에 관한 협정서'(제1차 한일협약)를 체결하게 하고, 군사·재정·외교 고문을 파견했다. 1905년 2월에는 협정에도 없는 경무고문과 학부참여관을 파견하여 한국의 내정을 장악해나갔다. 이같은 정지작업을 거쳐 일제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한국을 보호국화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2. 체결과 내용

 일제의 한국에 대한 보호조약 체결은 1905년 11월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한국에 파견되면서 본격화되었다. 11월 9일 서울에 도착한 이토는 고종을 알현하고, 보호조약의 강제체결을 위해 회유와 협박을 거듭했다. 고종이 순순히 응하지 않자, 이토는 11월 17일 한국정부의 각료들을 일본 공사관으로 불러 보호조약을 승인하게 했다. 일본 군인들이 무력시위를 벌이는 공포분위기 속에 열린 이 회의에서도 결론을 내지 못하자, 다시 궁중으로 회의장소를 옮겼다. 고종이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열린 궁중의 어전회의(御前會議)에서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자 하야시[林權助] 공사는 이토를 불렀다. 헌병사령관까지 대동하고 들어온 이토는 다시 회의를 열고 대신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찬성여부를 물었다. 이에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 등은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으나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은 약간의 수정을 조건으로 찬성했다. 이토는 조약체결에 찬동한 5대신(五大臣:乙巳五賊)만으로 회의를 다시 열고, 외부대신 박제순과 특명전권공사 하야시의 이름으로 이른바 '한일협상조약'(韓日協商條約)을 강제 체결했다.

 <참고> 을사오적(乙巳五賊)

 1905년(광무 9) 일제가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을사조약에 찬성하여 승인한 5명의 대한제국 대신으로,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을 가리킨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면서 한국을 보호국화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같은 해 10월 일본의 총리대신 가쓰라[桂太郞], 주한공사 하야시[林權助], 외무대신 고무라[小村壽太郞]는 을사조약 체결을 모의하고, 11월 9일 추밀원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특파대사로 한국에 파견하여 고종에게 '한일협약안'을 제출하게 했다. 또 하야시는 조선주둔군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와 협력하여 궁궐을 포위하고 고종을 감시하는 한편, 11월초 친일단체 일진회(一進會)로 하여금 보호국화 찬성의 선언을 발표하게 했다. 11월 14일 이토는 고종을 다시 알현하고 조약원문을 제시, 체결을 강요했고 다음날에는 대한제국의 각 대신들과 원로대신들을 숙소에 납치하여 조약체결을 강권했다. 11월 17일 이토와 하세가와는 일본군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가운데 군신회의를 개최하게 하여, 회의는 오후 3~8시까지 열렸으나 조약거부로 결정이 났다. 이에 이토는 귀가하는 대신들을 위협하여 다시 강제로 회의를 열게 하여 대신 한 사람마다 조약체결 찬성 여부를 물었다. 주무대신으로 처음 지명된 박제순이 "만약 명령이 있다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라고 하자, 이토는 "당신은 절대적으로 이 협약에 반대한다고는 볼 수 없다. 폐하의 명령만 내린다면 조인할 것으로 본다고 믿는다"고 못박았다. 이후 회의는 이완용과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이 대세를 장악하여 "조약의 체결을 거부하면 일본이 무력으로 한국을 침략할 것이므로 차라리 체면을 살리면서 들어주자"는 명분과 왕실의 안녕과 존엄은 유지할 수 있다는 조건을 들면서 조약 체결을 주장했다. 대신들 중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만이 적극적으로 반대했으며, 나머지는 체결이 불가피함을 시인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리하여 박제순과 일본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을사조약 반대의 함성이 전국적으로 드높은 가운데, 이들 오적에 대한 응징 기도도 빈번했다. 기산도(奇山度)·구완희(具完喜) 등이 이근택을 암살하려 했고, 1907년 3월 오기호(吳基鎬)·나인영(羅寅永) 등 '을사오적 암살단'이 이들을 제거하려 했으나, 삼엄한 경비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또 1909년 서울 종현성당에서 이재명(李在明)이 이완용을 암살하려 했으나, 부상만 입히고 말았다. 이들은 한일합병 후에 모두 친일의 대가로 '조선귀족령'에 따라 일제의 작위를 수여받았다.

 그 내용은 제1조 일본 정부는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지휘하고, 일본 영사는 외국에서의 한국의 이익을 보호할 것, 제2조 일본 정부는 한국과 타국 간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할 임무가 있으며,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는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을 하지 않을 것, 제3조 통감(統監)을 두어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경성에 주재하고 한국 황제 폐하를 내알(內謁)하는 권리를 가지고, 한국의 각 개항장 및 그밖에 일본 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역에 이사관(理事官)을 설치해 본협약의 조관을 완전히 실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일체의 사무를 관장한다는 것 등이다.

 3. 조약체결의 여파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국내의 반일열기는 고조되었다. 11월 20일 장지연(張志淵)이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통해 일제의 침략성과 조약에 조인한 매국 대신들을 통렬히 비판한데 이어 <제국신문>·<대한매일신보> 등도 조약의 무효와 각 지방의 조약반대운동을 알리는 글들을 싣고 반일여론을 확산시켜나갔다. 그리고 유생들과 전직·현직 관료들의 을사5적의 처단과 조약파기를 주청하는 상소가 연이어지는 가운데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 민영환(閔泳煥)을 비롯하여 전 의정부대신 조병세(趙秉世), 전 참정 홍만식(洪萬植), 학부주사 이상철(李相哲), 김봉학(金奉學), 송병선(宋秉璿) 등은 자결로써 국권침탈의 울분을 토했다. 서울 시내의 모든 상가는 철시를 단행하여 조약체결에 대한 분노를 표시했으며, 각급 학교의 뜻있는 교사와 학생들도 동맹휴학을 결행하고 조약반대운동에 동참했고,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의병항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밖에 수원 정거장에서 이토에게 돌을 던진 농민 김태근(金台根)과 을사5적의 암살을 기도하다 체포된 기산도(奇山度)·이종대(李鍾大)·김석항(金錫恒) 등 개별적인 의열투쟁의 사례도 있었다. 교육과 실업 등에 걸친 실력의 양성을 통해 국권의 회복을 꾀하려는 자강운동(自强運動) 역시 을사조약을 계기로 한층 활발해져 대한자강회를 비롯한 각종 단체들과 학교의 설립이 잇따르게 되었다.

 아무튼, 그 을사조약을 통해서 한국정부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제는 12월 21일 통감부 및 이사청관제를 공포하고, 초대 통감에 이토를 임명한데 이어, 1906년 1월 31일 주한일본공사관을 비롯한 각국의 영사관을 철수하고, 전국 13개소에 이사청을 설치하는 등 식민지 지배를 위한 기초공사에 착수했다. 또한 조약에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만을 관리하기 위해 경성에 주재한다고 규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토는 1906년 3월 2일 통감으로 부임하자마자 한국의 유신을 위한 시정개선의 자문에 관한 고종의 의례적 부탁을 들어 자신이 한국의 시정개선에 관한 주요급무들에 관해 각 대신들과 협의 결정하여 국왕의 재가를 거쳐 시행하도록 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1906년 3월 13일부터 통감관사에서 한국정부의 참정대신 이하 각부 대신이 참여하는 '한국 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를 수시로 열어 이를 주재하면서 사실상 한국의 내정을 총지휘하기 시작했다.


 


 


 





<1905년 일본의 내용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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