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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우선 이 책의 유명세 때문에 읽기 시작한 분들, 끝까지 읽기를 바란다. 당신이 투자한 시간의 가치의 100배를 되돌려줄 수 있는 책이다.

처음 몇 페이지는 웬 어린 놈이 투덜대기도 잘하는 구나...라고 생각하며 읽었다

중간 즈음에 들어섰을 때는, 부정적인 홀든 녀석의 시각에 짜증이 났다. 그러다 녀석의 독설적인 말투, 냉소에 나도 모르게 동조하게 된다.

심지어는 책 앞 장에 이런 말까지 쓰게 됐다.

"세상에 대해 온갖 짜증이 다 났을 때, 누군가와 함께 세상을 욕하고 싶을 때, 가식의 탈을 벗어던지고 도덕, 선함의 무지막지한 억지를 밟아버리고 싶을 때 읽어야할 책!"이라고 썼다.

이정도면 녀석에게 전염된거였다.

홀든 콜필드에게 전염된 나는 책의 결말 부분도 다 보지 못한 채, 온갖 불만에 쌓여 사무실에 앉아있었다.

그러다 될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사무실에서 당당히 책을 꺼내들고 결말을 읽어내려갔다.

그래, 일 안한다고 뭐라 하라지, 쳇~, 이런 식이었다.

그러나 왠걸,,,, 다 읽고 나니, 이제껏 더럽고 타락했으며 순수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던 상사들이 이해가 되는 게 아닌가.... 불합리한 것에 함구하고 있는 저들을 나는 더럽다, 추악하다, 나약하다 생각했었다.

그러나 가장 나약한 것은 나였다.. 나는 순수한 게 아니었고 나약한 것이었다.

최근 탤런트 최진실의 자살로 세상이 시끄러웠다.

누구나 다 울화통이 터질 때는 그런 생각을 다 해봤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 속에 그런 힘든 상황을 이길 수 있게 해주는 구절이 있었다.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이 어떤 이유를 위해 고귀하게 죽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동일한 상황에서 묵묵히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p.248

"먼저 인간들의 행위에 대해 놀라고, 당황하고, 좌절한 인간이 네가 첫번째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거야. 그런 점에서 보면 넌 혼자가 아닌 거지. 그걸 깨닫게 되면 넌 흥분하게 될 거고, 자극받게 될 거야. 현재 네가 겪고 있는 것처럼, 윤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민했던 사람은 수없이 많아." -p.249~250

그래, 세상이 불합리해도 거기서 나가면 나는 아웃이다. 나는 패배자다.

세상은 한순간에 누군가 혼자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언젠가는 더 나아지겠지, 나같은 사람들이 더 많아지겠지 라고 바라며 노력하고 "기다리는" 수 밖에.

현재에 내가 위치한 사회, 조직, 집단(홀든에겐 학교였다)이 불합리할 수 있다. 화가 치밀도록 날 못살게 굴 수도 있다. 그렇다고해서 뛰쳐나가면 미래(홀든의 여동생 피비)는 더욱 막막해진다.

나 자신이 모든 불합리한 제도, 제도권에 영향력을 가할 수 있을 때까지 힘을 키워야한다.

그 동안엔 인내를 갖고 기다리는 것!

그것이 나가 찾은 해답이었다.

그래, 나도 홀든처럼 횡설수설했다. 우리 주위엔 겉으로 표현은 하지 않아도 '홀든 콜필드'가 많을 것이다. 그래, 친구들! 우리 기다려보죠!

그리고 나만의 생각에서 더 크게 바라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거다. 가장 중요한 것은 피하지 않고, 그 속에서 버텨내는 것!

힘내라, 홀든!

이 세상이라는 호밀밭에서 자지 않고 깨어 밭을 지키는 캣쳐는 너 혼자가 아니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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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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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워낙 베스트셀러다보니 무작정 집어들고 읽었다. 초반 이야기는 별 흥미를 끌지 못한다. 그러나 작가의 담백하고 알찬 문체를 음미하며 책장을 넘기게 된다.

"파이 이야기"는 또 하나의 "로빈슨 크루소"처럼 어느 작은 인간의 표류 사건을 그 틀로 삼고있다.

인간 생존에 있어 최악의 상황에 빠진 주인공이 어떻게 역경을 이겨내며 서바이벌하는가는 흔해 빠진 슈젯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진면목은 그런 고리타분 흔해빠진 이야기 틀을 풀어내고 편집하고 짜맞추는 구성력에 있었다.

어느 소년이 힘들게 표류하다 살아남은 이야기(뭐, 그 속에서 동물들이 싸우고, 생고기를 뜯어먹는 장면들에 쩝쩝거리다 책을 접게 만들 수도 있었다)는 마지막 장에서 '다른 옷'을 입게 된다. 일본인들이 파이의 이야기를 믿지 못하자, 파이는 동물들 대신 인간들의 이야기로 자신의 경험을 꾸며낸다. 그제야 일본인들은 고개를 끄덕이지만, 실은 믿을만한 현실적 이야기(인간들의 이야기)가 믿기힘든 상상의 이야기(동물들 이야기)보다 잔인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작가는 파이의 목소리로 넌지시 말한다. "세상은 있는 모습 그대로가 아니에요.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죠."(p.375)  실제로 '동물 이야기'가 진실이든, '다른 이야기(인간 이야기)'가 진실이든, 그것은 보고 듣고 받아들이는 주체에 달려있다.

우리가 말하는 사실, 현실은 어쩌면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착각, 상상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 어떤 절망도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180도 달라질 수 있다. 모든 위대한 작가들이 말하듯, 얀 마텔 또한 나름의 방식으로 '절대성'을 부정하고 있다.

파이 이야기에서 동물에 관한 이야기가 인간의 모습을 반추하도록 도입된 장치라면, 종교 이야기, 다시 말해 신에 관한 이야기는 '희망에 관한 담론'을 담기 위해 쓰였다고 본다. 파이에게 인도 힌두교의 신들이건, 카톨릭, 기독교의 신이건, 이슬람의 신이건, 그들은 모두 파이의 마음 속에 불을 밝혀준다. 그에게는 어느 종교의 신이건 중요치 않다. 무언가에 매달려 '구원을 갈구'하는 행위 모두는 삶의 끈, 희망을 놓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에게 '신'이란 일상적으로 말하는 종교적 신이 아닌, '희망' 그 자체인 것이다. 끊임없이 기도하는 그의 모습을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않는 모습이다.

최근 우울증 비슷하게 삶에 대한 허무와 무력감을 느꼈다. 그러던 차에 읽은 '파이 이야기'는 영원히 잊지 않고 기억하고 싶은 단물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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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의 법칙 - 법칙을 알면 해법이 보인다
신병철 지음 / 살림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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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을 바꿔볼까하는 마음에 이 책을 입문서로 구입했다.

책도 가볍고 얇고, 일단 첫눈에 쉽게 읽혀졌다.

한동안 사놓고 고이 모셔두기만 하다, 어제 오늘 느긋한 마음으로 가볍게 독파.

논술고사를 준비하는 학생들보다는 오히려 글쓰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작가, 칼럼니스트, 번역가, 교수, 기자, 기타등등)이 읽어봐야 할 책이라고 느껴졌다. 음, 논문을 쓰는 대학원생들도 꼭 읽어봐야겠다. 아니, 보고서나 리포트를 쓰는 직장인, 대학생... 에브리바디 읽어봐야한다.

우선, 쉽게 쓰여졌다는 데 별 다섯개를 주고싶다.

내용도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당연시 되는 글쓰는 법칙을 재밌고 논리정연하게 풀어나갔다는 점에서 맘에 들었다.

유명학자나 교수들의 고리타분 어려운 글보다는 훨씬 설득력있고 이해가 잘 되는, 그래서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은 책이다. 전문서적들보다 가끔은 이런 초중고 학습서가 더 좋은 이유도 그러하다.

아, 논술의 법칙에서 좋은 글 쓰는 방법들을 많이 읽었는데, 정작 실제 쓰기는 어렵군... 문제는 끊임없는 훈련과 자기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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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러시아 문학 20세기의 책 20권

재작년 가을에 모스크바통신에 올린 것을 이미지-버전으로 다시 띄운다. 겸사겸사 오류도 수정하고 군말도 더 보태면서.

막간을 이용해서(이래저래 무거운 머리도 비울 겸) 러시아문학 ‘20세기의 책 20권’을 꼽아본다. 선정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페테르부르크대학의 이고르 수히흐 교수가 한 것인다. 그는 체홉 전공자로서, <체홉 시학의 제문제>(1987, 박사학위논문)와 <세르게이 도블라토프: 시간, 장소, 운명>(1995, 사진) 등의 저서를 갖고 있는 중견학자이다(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미국에 망명했던 작가 도블라토프는 이미 ‘클래식 작가’의 리스트에 올라 있고, 4권짜리 전집과 함께 대부분의 작품이 문고본으로 나와있다. 그 자신은 작가 체홉을 가장 닮고 싶어했다고). 아래 사진은 차례대로, 도블라토프(1941-1990)의 마지막 책과 전집, 그리고 생전의 모습.



러시아의 체홉 연구에 있어서는 차세대 선두주자로 꼽히는 수히흐 교수는 페테르부르크에 소재한 출판사 ‘아즈부카’에서 나오는 문고본 클래식의 편찬에도 적극 관여하고 있기도 하다(이 문고본의 체홉 등은 그가 편집하고 해설을 붙였다). 그는 올 초에 <20세기의 책 20권: 러시아의 정전>(544쪽/ 5,000부 발행)이란 책을 출간했는데, 말 그대로 20세기 러시아문학의 ‘고전’ 20권을 선정하고 각 작품에 대한 자신의 품평을 곁들인 에세이이다. 물론 그의 취향이 어느 정도 반영돼 있는 선정일 테지만, 내가 보기에 어느 정도의 객관성은 유지되고 있는 듯하며, 따라서 우리가 ‘외국문학’으로서의 20세기 러시아문학을 이해하고자 할 때 유익한 참고가 될 만하다(이와 다르게 참고할 만한 것은 이곳의 문학 교과서들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로선 그의 목록을 보고서야 처음 알게 된 작가와 작품이 없지 않으며, 절반 정도의 작품은 아직 읽지 않았다. 다소간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자극이 되는 일이기도 하다(목록에 없는 작품들을 읽었다고 변명하는 수밖에). 20권의 목록을 차례로 나열하면서,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국내 소개현황도 함께 언급하도록 하겠다.

 

 

 

 


(1)안톤 체홉의 <벚꽃동산>(1903). 체홉 전공자답게 체홉의 마지막 작품 <벚꽃동산>을 제일 처음으로 꼽았다. 그리고 <벚꽃동산>은 20권 가운데 유일하게 드라마 작품이기도 하다. 나머지 19권의 작품들은 전부 장편소설이거나 단편소설집들이다(그러니까 이 ‘20권’에 시는 빠져 있다). 사실, <벚꽃동산>은 20세기를 시작하는 작품이라기보다는 19세기를 마감하는 작품이다(정확하게는 그 경계를 표시하는 작품이다). 물론 <벚꽃동산>은 우리말로도 여러 종의 번역본이 나와 있으며 자주 공연되고 있기도 하다.



이 작품을 간혹 <벚나무동산>으로 번역/공연하는 경우도 있는데, 원작의 제목이 ‘벚꽃’이나 ‘벚나무’ 둘 다 의미하기 때문에 오역은 아니지만, 이 작품은 <벚꽃동산>이라고 옮겨야 한다. <벚나무동산>이라고 옮기는 건 미적 가치보다는 경제적/실용적 가치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서 이 작품의 주인공을 ‘로파힌’으로 볼 경우에나 유력한 번역이다(그건 ‘독창적인’ 해석이지만, 상식적이지는 않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 작품은 라예프스카야(=귀족계급)의 아름다운 벚꽃동산이 그걸 고작 벚나무동산으로 간주하는 로파힌(=상인계급)에게 넘어가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는 이 동산을 별장지로 개발하고자 하며, 4막의 배음(背音)으로 이 벚나무들을 찍어내는 소리가 들린다. 참고로, 작가 체홉은 객관적인 관찰자였지만 인간 체홉은 ‘아름다움’의 예찬자였다.



곁다리로 말하자면, 체홉의 (성공한) 첫 장막극인 <갈매기>는 전세계에서 셰익스피어의 <햄릿> 다음으로 무대에 자주 올려지는 작품이라고 한다. 어제 날짜 <문학신문>의 한 인터뷰 기사를 읽다가 알게 된 건데, 이 <갈매기>에는 세 가지 버전이 있다. 물론 체홉 원작의 <갈매기>가 있고, 이걸 비틀어서 트레플료프가 (체홉 <갈매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자살에 실패하지만, 나중에 누군가에게 타살 당한 걸로 이야기를 다시 쓴 보리스 아쿠닌(1956-, 아래 사진 )의 희곡 <갈매기>(2001, 아래 사진)가 있다. 주로 탐정소설을 쓰는 아쿠닌은 드물게도 대중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확보하고 있는 가장 인기 있는 동시대 작가이다(그의 작품들은 연극으로 공연될 뿐만 아니라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또 하나 오페레타 버전의 <갈매기>가 있으며, 이건 알렌산드르 주르빈(아래 사진)의 작품이다. 그는 1990년부터 12년간 미국 뉴욕에서 살다가 왔으며(그러니까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는다), 미국에서 먼저 공연된 그의 <갈매기>는 이번 시즌에 러시아에서 초연된다. 이 세 <갈매기>를 나란히 무대에 올리는 곳은 극단 <슈꼴라 사브레멘노이 삐에스이>(‘동시대 희곡학교’란 뜻)이며, 연출자는 이오시프 라이헬가우스이다. 언제 시간을 내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언제가 될는지는 모르겠다(하여간에 이번 시즌 안에). 안톤 팔르이치(안톤 파블로비치 체홉을 그렇게도 줄여 부른다)가 당신의 작품을 본다면, 이란 질문에 주르빈은 이렇게 말한다. “아주 만족할 겁니다!”



(2)막심 고리키의 <어머니>(1906-1907). 물론 더 이상의 설명이 불필요한 작품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대학신입생들의 필독서 목록에서는 빠져나간 듯하지만, 그리고 러시아에서의 평가 또한 예전에 못 미치지만, ‘고전’으로서의 가치는 유효하다. 하지만, 이때 ‘고전’이란 말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시대를 초월한 작품’이란 의미가 아니라, ‘시대를 환기시키는 작품’이란 뜻이어야 한다(때문에 <어머니>는 1980년대 우리의 대학가에서 필독서였다. 대학가 축제 때면 <파업전야> 같은 영화를 보는 게 당시의 ‘문화’였고).



 

 

 

한 시대와 운명을 같이하는 작품이 ‘고전’이란 이름에 값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개인적으론, 어떤 작품에 들어맞는 시대/시점이 있는 것이지 시대를 넘어선 작품이 있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작품이 우리의 DNA에 새겨진 것이 아닌 이상. 그건 우리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베스트로 꼽는 작품들이 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그러한 당대성을 감안하지 않고 지금의 시점에서 이 작품을 읽는다면 너무 ‘도식적’이란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그러니까 <어머니>는 ‘도식적’이었던 시대에 어울리는 작품이며, 우리의 80년대는 ‘도식적인’ 시대였다). 아래는 푸도프킨의 영화 <어머니>(1929)의 한 장면.



한 가지, ‘사회주의 리얼리즘’(정식으로 공포되는 것은 1934년이다)의 효시로도 평가되는 작품이지만, <어머니>에는 종교성도 중요한 테마로 등장한다(수히흐 교수가 <어머니>에 대한 장의 제목을 ‘마르크스와 성모 사이’라고 붙인 건 그런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는 ‘새로운 시대의 복음서’였다). 그와 관련된 것이지만, 사실 고리키의 이념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휴머니즘이었다(그에게 인간은 언제나 대문자 인간이었는바, 그는 인간을 숭배했다). 그리고 그 휴머니즘의 최대치는 그가 쓴 드라마 작품들 중에서 최고작으로 평가되는 <밑바닥에서>(1902)에서 선언된다. 체홉의 섬세한 드라마들과 비교한다면 투박하기 이를 데 없지만, 고리키의 이 드라마에는(특히 4막) (유머 대신에) 박력과 (페이소스 대신에) 에너지가 넘친다. 해서, 나는 러시아문학의 20세기가 ‘벚꽃동산’이 아닌 ‘밑바닥’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고리키는 국내에 꽤 소개돼 있는 편이다. <어머니>만 해도 최소 2종의 번역서가 있다. <밑바닥에서>는 일제 강점기 때부터인가 <밤주막>이란 제목으로 번역/공연돼 온 걸로 안다(작품의 배경은 빈민굴이다). 고리키의 자전 3부작(<어린시절> <세상속으로> <나의 대학>)부터 미완의 장편 <포마 고르제예프>까지 어지간한 고리키의 작품들은 우리말로 번역돼 있다. 물론 30여권에 이르는 그의 러시아어 전집에 비한다면 약소한 것이겠지만. 참고로,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고리키의 본명은 페슈코프이며 ‘고리키’는 러시아어로 ‘쓴/쓰라린’이란 뜻의 형용사이다. ‘막심’은 ‘맥시멈’이란 뜻이고. 해서 ‘막심 고리키’는 ‘그토록 쓰라린’이란 뜻이 된다. 젊은 시절 ‘룸펜 프롤레타리아’였던 페슈코프의 삶이 바로 ‘그토록 쓰라린 삶’이었으며, 그는 권총자살까지 시도한바 있다(폐에 구멍이 뚫렸지만, 다행히 살아난다).



고리키의 문학적 삶은 레닌과 운명을 같이 한다(고리키는 문학에서의 레닌주의를 대표한다). 레닌 사망(1924) 이후 스탈린 시대의 고리키는 사회주의 작가로서라기보다는 문학적 전통의 보호자 역할에 더 충실했다. 그가 주로 했던 일은 소련문학의 ‘얼굴 마담’ 역과 작가들의 후견인 역이었다. 스탈린 시대 숙청 리스트에 올랐던 작가들 가운데 여럿이 그의 구명(救命) 운동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자신의 생명은 연장할 수가 없었는데, 한편으로 그의 죽음(1936년)에는 스탈린에 의한 암살설이 떠돌기도 했었다. 



참고로, 니즈니 노브고로드는 볼가강변의 항구 도시인데(고리키 초기 단편들의 주된 배경이다), 고리키 사후에 ‘고리키시’로 개명되었던 곳이다. 한데, 사회주의 몰락 이후 레닌그라드가 페테르부르크라는 원래의 이름을 되찾았듯이, 니즈니 노브고로드도 고리키란 이름을 벗겨냈다(그래도 고리키 학술대회는 거기서 열린다). 레닌과 고리키는 그런 사후의 운명까지도 나눠 갖고 있다.

(3)안드레이 벨르이의 <페테르부르크>(1911-1913). 나보코프가 조이스의 <율리시즈>,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함께 세계 3대 소설에 꼽기도 했던 작품이다(이어서 나보코프가 꼽는 작품은 카프카의 <변신>이다). 산문작가로서 벨르이는 시인인 알렉산드르 블록과 함께 러시아 상징주의의 최대 작가이며, <페테르부르크>는 그의 대표작이다(더불어 그는 고골에 대한 고전적인 연구서를 갖고 있다).

 

 

 

 

푸슈킨의 서사시 <청동기마상>에서 시작된 페테르부르크에 대한 문학적/문화적 신화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거쳐서 완결되는 작품이 또한 이 벨르이의 <페테르부르크>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언급은 삼가도록 하겠다.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았지만(물론 영역은 돼 있다), 조만간 번역서가 나올 거라는 얘기도 들린다(아마도 1-2년내로 출간될 것이다. *이번 7월에 출간됐다!). 시적이고 장식적인 그의 문체가 얼마만큼 우리말로 옮겨질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벨르이의 소설 가운데 우리말로 번역된 건 <은빛 비둘기>(제3문학사)이다. 이미 절판된 지 오래된 책이지만, 도서관 등에서 구해볼 수 있을 듯하다. 더불어, 러시아문학에서의 ‘페테르부르크 텍스트’에 대해서는(이전에 나도 짤막한 기고문을 쓴 적이 있다) 블라지미르 토포로프 교수의 연구가 독보적이다(그의 ‘소개’ 논문은 우리말로 번역돼 있다). 작년에 이 주제에 관한 논문들을 모은 <러시아문학의 페테르부르크 텍스트>(616쪽)란 책이 페테르부르크 300주년에 즈음하여 출간된바 있다(물론 벨르이의 <페테르부르크>도 다루어진다).

더불어 페테르부르크에 대한 필독서는 솔로몬 볼코프가 쓴 <상트 페테르부르크 문화사>이다. 원래 영어로 먼저 씌어진 이 책의 러시아어본이 지난 여름에 출간됐다. 볼코프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저술가로 시인 브로드스키와의 대담집과 함께 역시 지난 여름에 나온 <쇼스타코비치와 스탈린> 등의 저서를 갖고 있다(그는 본래 음악 전공자였다). 위의 사진은 페테르부르크의 바실리예프스키 섬.

(4)예브게니 자먀친(1884-1937, 아래 사진)의 <우리들>(1920). ‘자먀찐’(혹은 ‘자먀틴’)으로도 읽히는 이 작가의 대표작으로, 흔히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조지 오웰의 <1984>의 원조(元祖)가 되는 ‘안티-유토피아’ 소설로 알려져 있다(이 작품을 <멋진 신세계>와 나란히 묶은 러시아어본도 있다). 내전의 와중이던 1920년에 이미 혁명의 불행한 종국을 예견하고 있는 이 작품은 29세기 단일제국이란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여 유토피아, 즉 모든 것이 합리적으로 관리되는 세계의 극단을 예시해 보인다.

같은 러시아문학으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와 상호텍스트적으로 읽히는 작품(‘수정궁’ 비판과 ‘2*2=4’란 테마). 자먀친은 다른 단편들과 함께 에세이들도 남기고 있지만(단편 두어 편이 우리말로 더 번역돼 있다), 역시나 기억되는 건 <우리들>의 작가로서이다. 우리말로는 두 차례(중앙일보사, 열린책들) 출간된바 있지만, 지금은 모두 품절된 걸로 보인다(*얼마전 재출간됐다). 몇 년 전에 개최되었던, 자먀친에 관한 국제학술회의 논문집을 보니까 “한국에서의 자먀친”이란 발표문도 실려 있었는데, 석사학위 논문까지 총동원됐지만 (당연하게도) 몇 건 되지 않았다.

 

 

 

 

(5)이삭 바벨(1894-1940)의 <기병대>(1923-1925). 바벨은 러시아 남부의 항구도시 오뎃사(영화 <전함 포템킨>에 나오는 도시) 출신의 유태계 작가로서 <기병대>는 내전(1918-1920) 시기를 다룬 연작이면서 그의 대표작이다(이 연작의 화자가 내전에 참전한 유태계 지식인이다). 우리말로는 중앙일보사에서 나온 <소련동구문학전집>에 수록돼 있으며, 조만간 그의 선집이 다시 나오는 걸로 안다. 참고로, 마샬 버먼의 <맑스주의의 향연>에는 버먼의 이삭 바벨론(서평)이 포함돼 있다. 동향의 작가 유리 올레샤(1899-1960)의 <질투>는 <마호가니>(열린책들, 2005)에 실려 있다. 아래 사진은 바벨과 올레샤.

에이젠슈테인과 같이 작업하기도 했으며(<베진초원>의 시나리오를 썼던가?), 실제로 그의 작품들은 영화화하기에 적당한 테마와 문체를 갖고 있다. 다른 연작 <오데사 이야기>의 경우(‘오데사 마피아 이야기’쯤 된다), 내 기억에 그는 시나리오도 따로 썼던 것 같다. 그의 문학세계는 2권짜리 전집에 다 수록될 만큼 간명하다(이에 견줄 만한 작가는 좀 두꺼운 한 권에 다 정리되는 자먀친, 그리고 같은 오데사 출신의 유리 올레샤가 있다). 우리말 선집이 출간된다면, 좀더 자세하게 조명될 수 있을 것이다.

(6) 알렉산드르 파제예프(1901-1956)의 <궤멸>(1925-1926). 역시 내전 시기를 다룬 작품이지만, 바벨의 <기병대>처럼 좀 삐딱한 시각의 작품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정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다. 선정자인 수히흐 교수가 아마도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궤멸>을 꼽은 듯하다. 지금은 줄거리도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궤멸>(예문출판사, 1988)은 아주 오래 전에 우리말로 번역 소개된 바 있다. 지금은 당연히 품절된 책이다. 작가 파제예프는 역시나 스탈린 시대에 숙청당한 바벨과는 달리 소위 ‘메인 스트림’에 속해 있던 작가이며, 작가동맹의 의장인가 부의장을 역임한 문학권력자였다.

(7)안드레이 플라토노프(1899-1951)의 <체벤구르>(1926-1929). 요즘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유명한 연극 연출가 레프 도진의 레퍼토리에도 들어가 있는 <체벤구르>는 러시아에서도 재발견된 작가 플라토노프의 대표작이다(그러니까 러시아에서도 소개/해금된 건 내가 알기에 80년대 중반 이후이다). 그렇게 재발견된 작가로 미하일 불가코프와 비교되기도 하는 플라토노프이지만, <체벤구르>가 <거장과 마르가리타>만큼 폭넓게 읽히는 것 같지는 않다(출판되는 걸 보아도 그렇고, 공연되는 걸 보아도 그렇다). 아래는 연극의 한 장면.

내가 아직 읽지 않은 작품이어서 자세하게 언급할 수 없지만(역시 우리말로 번역중이라는 ‘풍문’은 있다), 이 작가의 몇몇 단편들은 우리말로도 번역 소개돼 있는바 참조해 볼 수 있다(책세상에서 단편집 <귀향>이 나와 있다). 내가 인상적으로 읽은 작품은 <포투단강>이란 단편. 철도노동자 출신의 플라토노프는 사회주의 이념의 철저한 신봉자로서 오히려 소비에트 권력층에 부담을 주었던 작가였으며(스탈린이 싫어했다던가), 한편으론 작품의 매우 형이상학적인/유토피아적인 주제들 때문에 ‘20세기의 도스토예프스키’로도 불린다.



(8)미하일 조셴코(1894-1958)의 <감상적인 이야기들>(1923-1930). ‘조셴코’ 혹은 ‘조시첸코’로 표기될 수 있는데, <감상적인 이야기들>은 단편모음집 이름이고, 장편소설(roman)을 쓰지 않은 작가이기 때문에, 굳이 어떤 한 작품을 거명하기는 어렵다. 플라토노프가 ‘20세기의 도스토예프스키’라면 조셴코는 ‘20세기의 고골’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작가이다. 예상할 수 있는 바이지만, 정말로 코믹하고 유머러스하며 풍자적이고 그로테스크하다. 정식화하자면, <조셴코=고골+체홉>이다(이 세 작가를 ‘사소한 것들의 시학’으로 묶어서 다룬 연구서도 있다). 나는 단편 몇 편을 읽었을 뿐이지만, 보다 본격적으로 소개되어도 좋은 작가이다. 거꾸로 말하면, 조셴코의 단편들이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은 건 미스터리라 할 만하다.

(9)블라지미르 나보코프(1899-1977)의 <재능>(1937-1938). <재능> 혹은 <선물>은 나보코프의 러시아 시절은 마감하는 장편소설이다(러시아어 ‘다르Dar’는 ‘재능’이란 뜻과 ‘선물’이란 뜻 모두를 갖고 있다. Gift란 영어 단어가 그렇듯이). 주인공이 시인으로서 성장해가는 자기발견적 이야기이면서 나보코프가 러시아문학의 전통과 ‘마지막으로’ 대화하는 이야기라고 정리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을 끝으로 나보코프는 ‘러시아어 시절’을 마감하고 영어로 언어를 바꿔서 작품을 쓴다. 그렇게 처음 쓴 소설이 우리말로도 번역된 <어느 망명작가의 참인생>이다(원제는 ‘세바스챤 나잇의 참인생’). 나보코프에 대해서는 작품을 읽지 않고도 할 얘기가 너무 많지만, 여기선 간단히 줄이도록 한다. 위의 사진은 청년 나보코프와 노년의 나보코프.


 

 

 

우리에겐 <롤리타>의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이 작품은 스탠리 큐브릭과 에드리안 라인에 의해 두 번 영화화됐다. 영어로는 영어본과 러시아어본 <롤리타>를 비교하는 사전까지 나와있고), 그리고 간혹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로 ‘오해’ 받기도 하지만, 그는 제임스 조이스의 계보에 속하는 전형적인 모더니즘 작가이다(그는 언어를 다루는 작가적 재능에 있어서 조이스 정도를 질투했을 것 같다. 하지만, 조이스는 러시아어로는 작품을 쓰지 않았다). 적어도 문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작가의 죽음’을 전제로 한 텍스트의 유희/게임을 주요한 특징으로 갖는다면 말이다.

나보코프의 문학세계는 진정으로 ‘신적인’ 작가 나보코프에 의해서 자신을 작가로 착각하는 주인공들이 징벌받는 세계이다. 그 세계는 대단히 유희적이지만, 포스트모던적 유희와는 거리가 있다. 현재까지 나온 나보코프의 전기로 가장 방대하며 탁월한 것은 브라이언 보이드의 영어본이다. 그는 나보코프의 삶과 문학을 ‘러시아 시절’과 ‘미국 시절’로 구분하여 두 권의 책으로 상술했는데, 얼마 전에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나왔다(여기서의 평가도 ‘최고의 전기’라는 것이다). 두툼한 양장본 2권의 가격이 4만원 안팎(나는 영어책을 복사했었다). 나보코프 애호가나 전공자에게는 필독서이다. 나보코프의 러시아소설 가운데는 <마셴카>(<첫사랑>으로 번역됨), <루진의 방어>(단행본으론 나오지 않고 한 문예지에 소개됐었다) 등이 우리말로는 번역돼 있는데, <재능> 이외에도 <절망>, <단두대로의 초대> 등이 모두 번역될 만하다. 하지만, 저작권이 까다로운 작가이기 때문에(물론 번역도 까다롭다) 정말로 번역될지는 미심쩍다.

영어소설 가운데는 <롤리타> 외에도 <어둠 속의 웃음소리>(언젠가 오래 전에 TV미니시리즈로도 만들어진바 있다. <창밖엔 태양이 빛났다>란 제목이었던가. 기억에, 황인뢰 PD의 작품이었다), <투명한 물체들>, <킹, 퀸, 잭>, <창백한 불꽃>, <아다> 등이 번역돼 있다. 전문가 수준이었던 그의 나비수집에 대한 얇은 책도 한 권 번역돼 나온바 있고. 물론 나보코프에 대한 학위논문들은 상당수에 이르며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도 있다.



러시아에는 물론 각종의 너무 많은 나보코프가 있다. 2개의 언어로 작품활동을 했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의 거의 모든 작품이 영어와 러시아어로 ‘거의 완벽하게’ 번역돼 있다. 그 중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왼쪽 사진) 번역/주석(이 작품에 대한 주석으로는 러시아의 기호학자/문학연구자 유리 로트만의 것과 쌍벽을 이룬다)과 함께, 러시아어로는 3권으로 나온 문학강의가 기록해 둘 만하다(그는 <롤리타>의 인세 덕분에 팔자가 피기 전까지는 코넬대학 등지에서 문학선생 노릇을 했다. 미국 작가 토마스 핀천이 그의 강의를 들은바 있다). 그 3권은 각각 <러시아문학강의>, <서구문학강의>, <돈키호테에 대한 강의>(오른쪽 사진)이다. 나는 이 강의들도 우리말로 번역되길 바라지만, 가능할는지…



 

 

 

(10)미하일 숄로호프(1905-1984)의 <고요한 돈강>(1925-1940). 요즘은 대학에서의 러시아문학사 전공강의에서도 빠지는 수가 많지만(부담스런 분량 때문에),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비교되기도 하는 대하장편소설이다(당연히 영화화됐고, 얼마 전에도 이곳 TV에서 시리즈로 나왔다). 나는 학부에서 20세기 문학사 강의를 들을 때 읽었는데, 우리말로는 7권으로 번역돼 나와 있었다(러시아어로는 보통 2권). 지금은 품절이지만. 한 권짜리 만화로도 나와 있었고(기말고사 시험문제가 이 작품의 줄거리를 쓰는 것이었는데, 그때 만화를 본 게 도움이 되었다). 수히흐 교수는 <고요한 돈강>을 다룬 장의 제목을 ‘카자크 햄릿의 오딧세이’라고 붙였는데, 그럴 듯하게 여겨진다. 그 햄릿의 이름은 물론 주인공 그레고리이다.

숄로호프의 다른 작품으론 <인간의 운명>, <돈강 이야기> 등도 우리말로 번역돼 있는데, 나는 읽지 않았다. 사실 그다지 좋아하는 작가는 아니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가 문학권력자였다는 점 때문이었다. <고요한 돈강>을 정말로 그가 썼는지에 대한 의혹들도 그래서 나왔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반 부닌과 파스테르나크에 이은 노벨문학상(1965) 수상자이다('파스테르나크 노벨상 파동' 때 러시아내에서는 파스테르나크가 '국민작가' 숄로호프보다 먼저 노벨상 수상자로 지명됐다는 사실에 분개한 이들도 많았다). 아래 사진은 영화 <고요한 돈강>(1992)의 한 장면. 러시아판 대작 <전쟁과 평화>를 찍은 세르게이 본다르추크(1920-1994)의 마지막 작품이다.



(11)미하일 불가코프(1891-1940)의 <거장과 마르가리타>(1928-1940). 드디어 불가코프! 그의 작품집은 어디서나 눈에 띄고, 또 희곡들은 거의 끊이지 않고 공연되기 때문에 과연 이 작가가 스탈린 시절 이후 오랫동안 탄압 받고 금지됐던 작가였던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거장과 마르가리타>는 그의 생전에 발표될 수 없었던 작품이다).

 

 

 

 

어쨌든 <불가코프 백과사전>까지 고골, 도스토예프스키 사전과 같이 나올 정도의 지명도를 그는 갖고 있고, 또 누리고 있다. 그는 프랑스의 극작가 몰리에르를 (권력과의 관계에서) 자기 삶의 모델로 삼았었지만(그는 <몰리에르의 생애>란 전기도 썼고, 몰리에르가 등장하는 드라마 작품 <위선자들의 밀교>도 썼다), 그가 뒤늦게 누리는 영광은 몰리에르에 뒤지지 않는 듯하다.

 

 

 

 

우리말로 번역된 불가코프도 제법 적지 않다. 혁명을 풍자한 <개의 심장>, <운명의 알> 등의 중편들에서 <백위군> 같은 소설, 그리고 <극장>, <위선자들의 밀교>, <조야의 아파트> 같은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여전히 <투르빈가의 나날들> 같은 대표 희곡들이 아직 번역되지 않았고(출간예정이라는 소문은 있다), 여러 러시아 교수들이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거장과 마르가리타> 또한 현재로선 품절이다(아마도 내년까지는 새 번역본이 나올 듯하다. *박형규 교수의 번역본이 재출간됐다). 우리에게서 불가코프가 그 정도의 대접을 받지는 못하는 걸로 봐서 우리의 불가코프 수용에는 어떤 ‘장벽’이 있는 듯하다. 아래는 마리나 코렌펠드의 <거장과 마르가리타> 삽화.



(12)이반 부닌(1870-1953)의 <어두운 가로수길>(1937-1945). 러시아에서는 얼마전에 이반 부닌의 새 전기가 출간됐는데, 러시아 최초의 노벨문학상(1933) 수상자 부닌은 20세기 전반기의 유능한 시인/작가의 한 사람이다.

부닌은 그가 러시아 사람이 아니라 인도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동양적인’ 외모를 갖고 있는데, 외모뿐만 아니라 정신세계에 있어서도 부닌은 지극히 ‘동양적’이다(특히 불교적이다). 러시아나 서구인들에게는 다소 낯설게 여겨질 수도 있는 그의 문학이 우리에겐 오히려 친숙하게 여겨질 정도이다. 나의 도식적인 이해에 의하면, 부닌은 체홉, 고리키와 함께 ‘거대한 작가’ 톨스토이의 문학적 계승자의 한 사람인데, 체홉이 톨스토이의 문학성을, 그리고 고리키가 민중성을 이어받았다면 부닌은 그의 종교성을 계승하고 있다.

 

 

 

 

내 기억에 <어두운 가로수길>은 우리말로 번역돼 있으며(<비밀의 나무>란 제목으로 나왔던가), 기타 그의 단편들(<사랑의 문법>으로 번역돼 있다)과 <마을> 같은 중편들도 번역돼 있다(그의 단편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이며, <일사병>이란 단편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체홉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과 견주어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아직 <아르세니예프의 삶> 같은 자전적 대표작은 번역되지 않았다(*최근에 번역되었다). 더불어 지적하자면, 나보코프도 그랬지만 부닌도 문학적 출발은 시인이었다. 그의 시들도 번역된다면 더 바랄 나위 없겠지만, 가능할는지…

(13)알렉산드르 트바르도프스키(1910-1971)의 <바실리 테르킨>(1942-1945). 드디어 내가 처음 듣는 작품이 나왔다. 사실 트바르도프스키란 이름을 내가 기억하는 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1962년에 잡지 <노브이 미르>에 실을 수 있도록 한 편집장 트바르도프스키로서이다(또 다른 트바르도프스키가 있는 게 아니라면). 그가 솔제니친에 맞먹을 만한 작가였다는 건 모르던 사실이다.

제목으로 봐선 바실리 테르킨의 일대기를 다룬 듯싶은 장편소설인 듯한데(*소설이 아니라 서사시이다. 부네는 '어느 병사에 관한 책'이고, 조국전쟁, 즉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었다고), 아마도 그가 혁명과 내전기를 관통하는 듯하다. 수히흐 교수는 “죽음과 전쟁, 운명, 조국에 대하여”란 장제목을 달았다.



(14)보리스 파스테르나크(1890-1960)의 <닥터 지바고>(1945-1955). 별다른 설명이 필요없는 작품이다. 1956년에 이 작품을 해외에서 먼저 출간하고, 이어서 1958년에 (다소간 정치적인 선정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작가 파스테르나크는 다소간 은둔적인 성격에 걸맞지 않은 문학적 스캔들의 주인공이 된다(그는 스톡홀름에 가는 걸 포기한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 때문에 그는 1960년에 사망하고 만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의 이름을 전세계에 알린 이 작품 때문에 그는 조국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자신의 목숨마저 재촉한 것이다. 지바고 때문에!(‘지바고’는 러시아어 ‘삶’의 고어(古語) 형용사형이다)

 

 

 

 

시인 파스테르나크의 유일한 장편소설인 이 작품은 사실 ‘소설로 씌어진 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그런 의미에서 푸슈킨의 ‘시로 씌어진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과 마주보고 있다), 지바고의 죽음 이후에 남겨진 유고시 25편은 작품 전체를 이해하는 데 참조물이 아니라 핵심이다(이걸 빼놓은 번역서들도 있었는데, 좀 어이없는 경우이다). 이 말은 소설미학적인 기준에서 이 작품을 판단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는 뜻이다(이 작품에는 어이없는 우연들이 남발되고 있다). 푸슈킨이 ‘특이한 소설’을 썼다는 의미에서 파스테르나크는 ‘특이한 시’를 쓴 것이며, 러시아 소설의 전통은 그렇게 열리고 닫힌다. (정치권력으로부터의) 두 ‘망명작가’에 의해서.



<닥터 지바고>는 1988년쯤에야 해금되며(그 이전에는 그의 초기 시들만이 출판될 수 있었다) 그맘때쯤 저명한 러시아 문학자 드미트리 리하초프의 편집하에 간행된 최초의 파스테르나크 전집에는 빠져 있다(나는 이 전집과 <닥터 지바고>를 따로따로 샀다). 굳이 찾으러 돌아다니진 않았지만, 이 작품이 포함된 전집은 아직 보지 못했다. 한편, 1930년대 이후 생계를 위해서 옮긴 번역작품들(그는 셰익스피어와 괴테 등을 주로 번역했다)은 요즘 따로 출간돼 있다. 우리말 파스테르나크? <닥터 지바고> 외에, <나의 누이, 나의 삶>이란 번역시집(그의 시들은 상당히 난해하지만, 좀 이해하면 재미있다), 그리고 <어느 시인의 죽음>이라고 옮겨진 그의 자전적 기록 정도(마야코프스키와의 교우와 그의 죽음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다). 그리고, 라라의 모델이었던 올가 이빈스카야의 회고록 정도.

(15)알렉산드르 솔제니친(1918- )의 <수용소 군도>(1958-1968). <수용소군도>가 출간된 건 1972년 겨울 파리에서였고, 이 때문에 이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소비에트로부터 망명을 강요받게 된다(그에겐 강제출국 당하거나 망명하거나의 선택이 있었다). 흐루시초프 시대의 해빙 분위기를 타고 자신의 수용소 체험을 바탕으로 했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출간될 수 있었지만, 1970년대는 이미 (해빙은 물 건너 간) 브레즈네프의 시대였고, 이 새로운 시대는 자신의 조국을 ‘거대한 수용소’라고 고발하는 작가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았다. 아래 사진은 수용소 죄수 시절의 솔제니친.

<수용소군도>는 소비에트뿐만 아니라 책이 출간된 프랑스에서도 파문을 일으켰는데, 과거 소련을 지지했던 좌파 지식인들에게 결정타를 안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지를 계속 유지할 것인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회의해야 했다(상당수는 스탈린주의의 ‘수용소’ 대신에 마오쩌뚱의 ‘문화혁명’을 선택하며, 한편에서는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을 비판하는 신철학자들이 등장한다. 이런 분위기에 대해서는 프랑수아 도스의 <구조주의의 역사>에서도 기술되어 있었던 듯하다). 물론 솔제니친이 망명지로 안착했던 곳은 프랑스가 아니라 미국의 시골마을이었으며, 거기서도 그는 (공산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연설들을 늘어놓는 바람에 곧 여론의 관심밖에 놓이게 된다(흔한 오해와는 다르게 솔제니친은 공산주의자이다. 다만 그의 공산주의는 ‘종교적 공산주의’일 따름. “현대인은 신을 잊었다!”는 게 그의 단골 레퍼토리이다).



한때의 신화였던 작가였지만(한 문학작품이 한 시대의 표정이 되고, 한 시대의 좌표를 바꾼다는 건 얼마나 굉장한 일인가!), 그는 너무 뒤늦게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으며 (좀 무례한 말이지만) 너무 오래 살고 있다. 몇 번 추진되던 한국방문이 무산될 정도로 건강이 썩 좋은 건 아니면서도 나름대로 장수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엔 <신화와의 작별>이란 제목으로 방대한 분량의 평전까지 출간됐는데, 그는 생전에 자신의 신화가 탄생하고 소멸하는 과정을 직접 목격하고 있는 드문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망명문학으로서의) 러시아문학이 푸슈킨에서 시작해서 파스테르나크에서 끝난다고 했지만,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서의) 소비에트 문학은 고리키에서 시작해서 솔제니친에서 끝난다. 즉, ‘밑바닥’에서 시작해서 ‘수용소’에서 끝난다. 솔제니친 이후의 소비에트 문학은 잠시 농촌문학(발렌친 라스푸친)과 일상문학(유리 트리포토프)에 의해 채워지면서 소비에트 러시아의 종말을 맞는다.

 

 

 



우리말로 번역된 솔제니친은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와 <수용소군도>(5권이던가?)를 비롯하여 아주 많다. <암병동>과 <제1권>, <붉은 수레바퀴>(이 대작도 나오다 만 것 같다)까지가 그의 주요 장편들이라고 한다면, <마트료나의 집> 등과 같은 초기 단편들도 여럿 번역돼 있고, <사슴과 라게리의 여인>(‘라게리’는 ‘수용소’란 뜻이다) 같은 희곡작품도 번역돼 있다(오늘 헌책코너에서 산 그의 희곡집에는 안 들어 있는 걸로 봐서, 그는 희곡작품도 꽤 여럿 쓴 모양이다). 그리고 그의 에세이집까지.



(16)바를람 샬라모프의 <콜리마 이야기>(1954-1973). 샬라모프는 이름만 들어본 작가인데, 이 정도로 지명도가 있는지는 몰랐다. ‘콜리마’는 소비에트 시절 가장 '악명 높았던' 수용소가 있었던 지명이고(그러니까 아마도 시베리아 어디일 것이다), ‘콜리마 이야기’는 콜리마을 배경으로 한 연작이다. 웬만한 작품집에 들어가 있는 <콜리마 이야기>가 다 ‘발췌’인 걸로 봐서 이 연작으로 작가가 얼마나 많은 걸 썼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아래 사진은 콜리마 수용소.

사실, 샬라모프 자신이 15년간(1937-1951) 거기에서 유형생활을 했다고 하는데, 그 이후에 그는 그 기간보다도 더 긴 시간 동안(꼬박 20년이다!) 자신의 유형생활을 되새김질하는 이야기들을 쓴 것이다. 그런 사실만으로도 예의상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샬라모프에 대한 논문들이 국내에서도 나오고 있으므로 번역본들도 곧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17)안드레이 비토프(1937- )의 <푸슈킨의 집>(1964-1971, 1978…) 최근에 비토프의 2권짜리 작품선집이 새로 나왔는데, 물론 장편 <푸슈킨의 집>은 제외한 것이다(원제인 ‘푸슈킨스키 돔’은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문학연구소로 보통 ‘푸슈킨연구소’라고 부른다. 거기엔 푸슈킨의 데드마스크가 많은 육필 원고와 함께 보존돼 있다고 한다). <푸슈킨의 집>은 작가가 계속 버전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확정된 연도를 아직 표시할 수 없다. 내가 갖고 있는 건 그나마 작년인가 새로운 장정으로 출간된 것인데, 현재까지는 최종본이라고 할 수 있다.



비토프의 이 소설 역시 아직 읽지 않았지만, 이 작품은 전형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이다(좀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러시아 포스트모더니즘의 ‘고전’이다). 그건 각종의 텍스트들이 교직되어 새로운 텍스트를 축조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그러니까 나보코프의 소설에서와는 달리, 진정한 문학적 유희, ‘텍스트의 즐거움’(바르트의 용어)이 실현되고 있는 것. 물론 제목이 암시하는 바대로, 그것을 통칭할 수 있는 것은 ‘푸슈킨의 집’이다. 푸슈킨의 문학적 유산으로서의 러시아문학 전체가 이 소설텍스트를 구성하고 있는 인자이거나 잠재적 인자들이다. 실제로 비토프는 나름대로의 푸슈킨 ‘연구자’이기도 하며, 푸슈킨에 관한 두 권의 책, ‘1825년의 푸슈킨’, ‘1836년의 푸슈킨’을 편집하기도 했다(1825년은 제카브리스트 봉기가 일어난 해이며, 1836년은 푸슈킨의 생애 마지막해이다. 그는 1837년 1월에 사망했기 때문에). 아래 사진은 페테르부르크의 '푸슈킨 연구소'(=푸슈킨의 집).



물론 내가 아는 한, 비토프의 작품은 아직 우리말로 번역된바 없다(어디 잡지에 소개된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만, 수년 전에 한국 펜클럽 초청으로 방한할 뻔했으나 역시 무산됐다(그러니까 그는 아직 한국과는 아무런 인연을 갖고 있지 않다). <푸슈킨의 집>에 대한 연구서들은 이미 러시아와 미국 등지에서 나오고 있으며, 국내에도 연구논문들이 있다. 작품도 번역돼 나올지는 두고 봐야겠다.

(18)바실리 슉쉰(1929-1974)의 <성격들>(1973). 짐작에 <성격들>은 특정한 작품이 아니라 슉쉰의 문학을 총괄하는 작품집인 듯하다. 또 그래야 말이 된다. 그의 문학은 그의 삶 전체로 웅변하는 문학이기 때문이다.

검게 탄 얼굴에 고지식하고 무뚝뚝한 농부 같은 (한 성격 할 것 같은) 인상의 슉쉰은 70년대 초반 소비에트 문화계의 ‘간판’이었다(우리 작가로는 딱 황석영 같은 타입이다. 황석영이 영화감독도 겸했다면). 그는 영화계에서도 유명인사였는데(감독으로도 유명하다), 1973년에 자신이 직접 각본을 쓰고 주연과 연출까지 맡은 영화 <칼리나 크라스나야>(사전적 의미로는 ‘빨간 까마귀밥나무’란 뜻이다)는 각종 영화상을 휩쓸며 수천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기도 했다(대학원 시절에 이 영화를 봤을 때는 그렇게 유명한 영화인 줄 몰랐다. 오른쪽은 영화의 한 장면). 그건 그만큼 슉쉰이 러시아 나로드(민중)의 정서에 가장 잘 호소하고 있다는 얘기도 된다. 수히흐 교수의 장제목은 “한 영혼이 아프다”. ‘작가-예언자’란 평까지 듣는 슉쉰은 러시아의 영혼이면서 한 시대의 영혼이었던 것. 아래 사진은 미하일 숄로호프와 바실리 슉쉰.



하지만, 내가 그에 대해서 아는 내용은 별로 많지 않다. 얼마 전 그의 사망 30주년을 맞는 특집기사들을 보고 새삼 작품집과 영화CD 등을 사두었고, 엊그제 헌책코너에서 우연히 그의 전기를 구입했을 뿐이다. 그러니 알 준비가 되어 있을 뿐인 것. 한국에서의 사정도 크게 다르진 않은데, 몇 편의 단편이 소개돼 있는 게 전부이다. 스첸카 라진의 농민반란을 소설화한 <나는 너희에게 자유를 주러 왔노라> 같은 대표적 장편소설은 한국 독자들의 구미에도 맞을 듯하므로, 한번 기다려봄 직하다(이 작품의 번역은 오래 전에 한번 추진되었다가 무산됐던 걸로 안다. 분량 때문에). 참고로, 슉쉰을 추모하는 기고문에서 한 작가는 러시아문학에서 다섯 명의 위대한 작가를 꼽았는데, “푸슈킨, 고골,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그리고 슉쉰”이 그 다섯 명이다.



(19)발렌친 라스푸친(1937- )의 <마쪼라의 이별>(1976)과 (20)유리 트리포노프(1925-1981)의 <노인>(1978)은 한꺼번에 언급하기로 한다(막간이 너무 긴 것 같으므로). 브레즈네프 시대인 1970년대 러시아문학의 대표적인 경향은 ‘농촌문학’과 (도시의) ‘일상문학’이었는데, 라스푸친과 트리포노프는 각각 이 두 경향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지명도에 있어서는 라스푸친이 한 수 위인데(제정 말기의 괴승 라스푸친과 성이 같지만 무관하다고 한다), 러시아의 중학교(1학년부터 11학년까지 같은 학교에 다닌다) 교과서에는 그의 작품들이 다수 수록돼 있어서 <학교에서 배우는 라스푸친>이란 책도 나올 정도이다. <마쪼라의 이별>은 우리말로 번역돼 있는데(<소련동구문학전집>), 댐건설로 수몰 예정인 한 농촌마을 사람들의 얘기이다.


 

 

 


라스푸친은 농촌문학에 심리적, 철학적 깊이를 부여한 걸로 평가되는데, 우리의 전통적인 ‘무속신앙’과 유사한 ‘지킴 신앙’ 등이 다뤄지기 때문에, 비교적 친숙하게 읽힌다. 라스푸친의 작품으로는 <마쪼라의 이별> 외에도, <마리아를 위하여>(원제는 ‘마리아를 위한 돈’), <마지막 기한>, <살아라 그리고 기억하라> 등이 우리말로 번역돼 있고, 트리포노프의 작품으론 <긴 이별>, <또 다른 삶> 등이 번역돼 있다(<소련동구문학전집>에 실려 있다). <교환>(경희대출판부, 2005)가 가장 최근에 나온 책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 것이지만, 페테스트로이카 이후의 러시아문학, 혹은 포스트-소비에트의 문학은 선정에서 빠져 있다. 그건 걸작이 없어서가 아니라 다음 세기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론, 이 20명의 작가와 작품 목록에 (국내에서 다소 과대평가된) 친기스 아이트마토프(<하얀배>, <백년보다 긴 하루>, <처형대> 등이 번역돼 있다)가 빠진 것이 반갑고, 블라지미르 보이노비치(<병사 이반 촌킨의 모험>, <2040> 등이 대표작이다)가 빠진 것이 아쉽다. 또 하지만, 서두에서 얘기했듯이, 이러한 선정이 편파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일을 벌이면서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으므로…

06. 03. 21 -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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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 낱말편 1 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
김경원.김철호 지음, 최진혁 그림 / 유토피아 / 2006년 8월
평점 :
품절


음, 잘 팔리는 책이라 리뷰 쓰기가 살짝 부담된다.

센스 넘치는 책 제목만큼 엄지손가락 쭈악 올려주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가장 재밌고 유익한 부분은 have동사 번역에 관한 부분이었다.

대체적인 설명들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들어갔을 땐, 저자가 약간 어거지, 또는 상상력을 너무 발휘한 거 아닌가 싶은 구절들이 있다. 그럴 땐 약간 짜증이 나긴 하지만, 뭐, 그래도 아직까지 우리나라에 우리글의 뉘앙스를 이렇게 흥미롭게 풀어낸 책은 없었으니, 시도 좋도, 느낌 좋고,.. 계속해서 시리즈가 완성되가길 바란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 국밥이 출판된다면, 저자께선 100% 법칙을 만들려하지 말고, 약간의 예외적인 경우라고 놔두는 것도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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