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러드문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13
요 네스뵈 지음, 남명성 옮김 / 비채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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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채서포터즈3기 출판사지원도서입니다.


노르딕 누아르를 처음 읽었을 때 나를 강하게 끌어당긴 것은 차갑게 식은 공기, 눈이 내리는 거리의 고요, 그리고 그 속에 스며드는 사람들의 상처였다. 그 시작이 《스노우맨》이었다면, 《블러드문》은 그 세계를 다시 처음부터 새롭게 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삼 년 만에 돌아온 해리 홀레는 더 깊고 더 아픈 모습으로 오슬로의 밤을 다시 뒤흔든다. 예전보다 고뇌는 덜해 보이지만, 망가졌으면서도 이상하게 멋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번역이 달라서인지, 아니면 작가가 해리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고 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낯설면서도 확실히 매력적이다.


모든 것을 잃은 사람처럼 보이던 해리는 루실이라는 여성을 도와준 작은 계기로, 오래 숨겨두었던 ‘본능’을 다시 깨운다. 그 본능은 그를 다시 오슬로로 불러들이고, 또 한 번 어두운 사건의 중심으로 이끈다.

이번 사건은 요 네스뵈 특유의 기괴한 분위기가 가장 강하게 드러난다.


기생충, 성범죄, 근친상간 같은 보기 힘든 내용들이 이야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되며, 노르웨이의 차가운 공기와 ‘붉은 달’의 이미지가 겹쳐 읽는 내내 몸이 서늘해진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여자를 사랑하던 해리가 아니라 ‘아들을 사랑하는 해리’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라켈을 잃고 완전히 무너졌던 그에게, 다시 지켜야 할 사람이 생긴 것이다.


그동안 경찰 조직 안에서 활약하던 해리는 이번 책에서 경찰 밖에서 홀로 싸운다. 부패한 경찰, 죽음을 앞둔 심리학자, 택시 기사 같은 결점 많은 사람들이 해리와 함께 움직이는데, 이 팀은 어쩐지 해리 자신을 닮아 있다. 이들과 함께하면서 시리즈의 분위기도 자연스럽게 달라진다. 이 변화가 해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알 수 없기에 더 궁금해진다.


노르웨이의 거친 공기와 해리 홀레의 상처가 겹쳐지자, 다시 북유럽의 차가운 풍경 속으로 돌아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스노우맨》으로 처음 떠올렸던 노르웨이의 이미지가 《블러드문》에서 다시 또렷하게 살아난다. 언젠가 오슬로의 골목을 걸으며 해리가 지나갔을지도 모를 회색 풍경을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요 네스뵈는 이번에도 또 다른 연쇄살인범의 그림자를 남겨놓았다.

그것만으로도 이 길고 긴 시리즈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릴 이유는 충분하다.


#블러드문 #요네스뵈 #비채 #해리홀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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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올리비아 개트우드 지음, 한정아 옮김 / 비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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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채서포터즈3기 출판사지원도서입니다.


《네가 누구든》 — 서로를 비추는 두 개의 유리창, 그리고 그 너머의 여성들


바닷가의 한적한 교외, 오래된 집 하나와 유리의 성 같은 새집 하나. 이 소설은 그 두 공간 사이에서 흔들리는 여성들의 마음을 아주 조용하지만 날카롭게 비춘다.


미티와 레나.

하나는 스스로 몸을 숨긴 여자,

하나는 누군가에게 숨겨진 여자.


나는 이 둘이 서로를 발견해가는 과정을 따라가며, 어느새 그들의 두려움과 의심을 내 삶의 모서리에 겹쳐 놓고 있었다. 회사에서의 시선들, 엄마로서의 역할들, 여성이라는 이름 아래 요구되는 매끄러움들. 내가 매일 눌러 삼키던 감정들이 작품 속 유리창에 비치는 듯했다.


새로 지어 올린 집의 투명한 벽 너머로, 레나는 완벽한 존재처럼 보이지만 어딘가 잠겨 있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다. 어떤 자격이 있다고 믿는 확신이 아닌, ‘내가 이 삶의 주인인가?’를 의심하는 표정. 그런 그녀에게 오래된 집의 미티와 베델이 다가가고, 그 순간부터 소설은 여성들이 서로를 통해 자신을 재구성해가는 여정을 은은하게 보여준다.


미티는 레나를 동경도, 질투도 아닌 묘한 친밀함으로 바라본다. 그것은 여성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여성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갇혀 스스로의 역사를 의심해야 하는 삶을, 이미 어느 정도 지나온 사람만이 느끼는 감각. 그 감정의 실루엣은, 시인이 언어를 다루듯, 묵묵히 그러나 깊게 페이지에 스며든다.


레나가 말하는 순간들, “내 과거가 내 것이 아닐지도 몰라요.”

이 문장을 읽으며, 우리는 늘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살아가지만, 미티와의 연대는 레나에게 처음으로 ‘나’라는 감각을 준다. 서로의 상처가 조심스레 맞닿을 때, 아이를 키우며 종종 느꼈던 ‘나도 사라지고 누군가의 그릇으로만 사는 건 아닐까’ 하는 감정도 조용히 떠오른다.


그리고 베델.

세월이 남긴 그림자를 품고 있으면서도, 두 젊은 여자를 굳이 잡지도 밀어내지도 않는 존재. 그녀는 이 이야기에서 가장 단단한 리듬을 만들어낸다. 어쩌면 여성을 지키는 방식은 늘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크게 울지 않고, 크게 말하지 않고, 다만 곁에 있어주는 일.


소설은 스릴러의 문법을 따르지만, 나는 이것을 ‘여성의 자기 복원 서사’로 읽었다.

의심하고, 벗어나고, 서로를 통해 스스로를 다시 쌓아 올리는 일. 그런 각성의 순간들을 이렇게 조용한 문장으로, 그러나 이토록 날카롭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시인의 첫 장편은 놀랍도록 단단하다.

더욱이 영화화가 확정되었다니,,, 심장은 더 뛰었다.


유리창 사이에 선 레나의 실루엣, 밤마다 바닷가를 걷는 미티의 그림자, 그리고 그들을 낡은 집 안에서 바라보는 베델의 눈빛. 이미 여러 장면이 머릿속에서 영사되고 있다. 여성의 연대가 가진 떨림을 스크린에서도 다시 만나고 싶다. 시인의 문장이 움직이는 순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우리는 서로를 구경하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를 깨우는 존재라는 것.

그리고 여성의 삶은 타인의 시선이 아닌, 스스로 만든 빛 아래에서 비로소 살아난다는 것.

이 조용한 소설은 우리에게 그 진실을 우아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속삭인다.


#네가누구든 #올리비아개트우드 #비채 #비채서포터즈3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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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결말을 바꾼다 - 삶의 무의미를 견디는 연습 철학은 바꾼다
서동욱 지음 / 김영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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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지원도서


《철학은 결말을 바꾼다》는 일상 속에서 철학이 어떻게 현실의 방향을 움직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서동욱 교수는 전작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에서 사유가 감정의 기후를 바꾼다고 말했다면, 이번에는 사유가 삶의 결말을 바꾼다고 말한다. 나는 그 말을 믿는다. 철학은 거창한 학문이 아니라, 하루를 조금 다르게 살아보는 연습이기 때문이다.


책은 네 개의 장으로 나뉘어 있다. ‘먹기’와 ‘쾌락’ 같은 일상의 행위를 철학적으로 들여다보는 1부에서는 에피쿠로스가 왜 질병 속에서도 평정을 잃지 않았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단순히 참는 법이 아니라, 고통의 의미를 새로 해석하는 법이다. 나 또한 불안하거나 피로할 때, 이 책의 문장을 곱씹으면 일상의 무게가 조금 가벼워진다.


2부의 핵심은 ‘실망’이다. 우리는 좌절을 피하려 하지만, 서동욱은 실망이야말로 인간을 성장시키는 공부라고 말한다. 철학은 인생의 ‘답안지’가 아니라, 실패를 통과하며 얻는 사유의 훈련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사는 연습”이라는 표현이 오래 남았다. 철학은 죽음을 준비하는 학문이 아니라, 더 단단히 살아보기 위한 기술이다.


3부와 4부는 세계를 낯설게 보는 법을 가르친다. 구역질, 부분과 전체, 타자와 자유 같은 주제들이 등장하지만,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킨다. 결말을 바꾸는 것은 거대한 혁명이 아니라 “미세한 차이”라는 것이다. 내 안의 편견을 조금 비틀고, 타자를 향한 시선을 조금 열어두는 일. 그것이 곧 철학의 시작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철학은 결말을 바꾼다’는 말을 개인의 구호로 받아들였다. 일상의 결말, 관계의 결말, 생각의 결말을 조금씩 다르게 쓰는 힘. 철학은 거창하지 않다. 다만 멈춰 서서 한 문장을 더 깊이 생각할 용기를 주는 것. 그래서 나는 이 책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닿았으면 좋겠다. 바뀌는 건 결말뿐 아니라, 그 결말을 기다리는 우리의 시선이기 때문이다.


#철학은결말을바꾼다 #서동욱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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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비 이야기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비채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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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 유스케의 《여름비 이야기》는 장마철의 눅진한 공기 같은 공포의 이야기로, 읽다 보면 비 냄새 속에 숨어 있는 인간의 어둠이 느껴진다.

기시는 언제나 초자연보다 인간을 택한다. 이번 책에서도 공포의 근원은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다. <5월의 어둠>의 하이쿠에 숨은 죄의식과 후회, <보쿠토 기담>의 향락 속에 스며든 자기 파괴로 타락해가는 젊은이가 등장하고, <버섯>에서는 버섯이 자라며 고립된 집을 덮어버리고 그 속에서 주인공은 악의를 느낀다. 세 이야기 모두 마음속의 어둠이 얼마나 무서울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기시의 문장은 냉정하면서도 이상하게도 아름답다. 비가 내릴 때마다 기억이 사라지고, 버섯이 퍼지듯 죄책감이 확산된다. 현실적인 서스펜스와 환상의 경계가 흐려지는 그 순간, 나는 서늘함보다 슬픔을 느꼈다. 인간의 악의는 결국 외로움과 공허의 다른 이름이라는 걸 보여준다.

책을 덮은 뒤에도 장마 소리가 머릿속에 오래 남았다. 《가을비 이야기》가 죽음의 냄새를 품은 스산한 비였다면, 《여름비 이야기》의 비는 살아 있는 인간이 저지른 죄를 씻어내지 못한 채 흘러내리는 비다. 창밖의 빗줄기가 현실의 균열처럼 느껴지는 경험은 기시 유스케가 만들어내는 진짜 공포다.

악의를 통해 인간을 해부하는 냉혹한 실험 같은 책! 읽는 동안 나는 ‘공포’가 아니라 ‘자각’에 몸서리쳤다. 나도 일상 속에서 저런 어둠을 키우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오랫동안 잊히지 않았다.

#여름비이야기 #기시유스케 #비채 #호러소설 #가을비이야기 #악의 #5월의어둠 #보쿠토기담 #암흑기담집 #이호러가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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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과 군상
하인리히 뵐 지음, 사지원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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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와 문서로 레니를 ‘증거‘처럼 배열한다. 배열이 끝나면 레니의 윤리가 또렷해진다. 전후 독일의 기만, 재건의 탐욕, 신앙과 위선이 드러난다. 레니는 비영웅적 선함으로 생존과 연대의 문법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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