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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 (고대 그리스어 완역본) - 명화와 함께 읽는 ㅣ 현대지성 클래식 64
호메로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5년 4월
평점 :

☆출판사지원도서
신들과 인간 사이, 분노와 연민 사이에서
젊은 날, 『일리아스』는 나에게 전쟁과 영웅의 이야기였다. 금빛 투구가 부딪히는 소리, 전차 바퀴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질주하는 전장의 한복판, 그리고 불사의 존재처럼 묘사되는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저 장엄하고 낯선 이야기 속을 헤매었었다. 하지만 중년에 다시 꺼내든 『일리아스』는 완전히 다른 책이었다. 아니, 달라진 것은 책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일지도.
이번에 읽은 현대지성의 고대 그리스어 완역본은, 단순히 재독을 넘어 새로운 모험이었다. 원문의 운율을 살린 리듬감 있는 번역은 한 줄 한 줄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고, 103장의 명화들은 오랜 시간 속에 매몰되었던 장면들을 눈앞에 되살려 주었다. 특히 헥토르와 안드로마케의 이별 장면을 그린 루벤스의 명화를 보는 순간, 눈가가 시큰해졌다. 전쟁터로 향하는 남편의 등을 바라보며 아이를 품에 안은 안드로마케의 슬픔은, 이제 더 이상 먼 신화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제 나는 안다. 『일리아스』는 단순한 전쟁 서사가 아니라 인간 감정의 해부도이며, 고통과 선택, 분노와 용서, 가족과 명예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 드라마다.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단순히 모욕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존재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한 인간의 흔들림이다. 아가멤논의 오만은, 권력자가 감정 앞에서 얼마나 무책임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그리고 헥토르의 죽음 이후 아킬레우스가 프리아모스에게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주는 장면은, 증오 너머로 건네는 인간적인 손길, 화해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중년의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신들이 인간사를 좌우하는 이야기’에서 ‘인간이 결국 자기 운명을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는 메시지에 더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이제는 나 역시 수많은 선택의 순간들을 지나왔고, 그 선택들이 내 삶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조금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젊은 날에는 감탄만 했던 서사가, 이제는 나의 경험과 만나면서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435개의 각주와 75쪽에 달하는 해설은, 단순한 참고 자료를 넘어 고대 세계를 향한 다리처럼 느껴졌다. 신들의 계보, 지명과 전투의 의미, 인물들의 심리적 맥락을 하나하나 짚어주는 해설 덕분에, 나는 더 이상 이 복잡한 이야기 속에서 길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해설을 읽는 시간 자체가, 고전을 대하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되었다.
『일리아스』를 다시 읽으면서, 나는 왜 이 고전이 수천 년을 지나 지금까지도 읽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인간은 변하지 않았다. 분노하고, 사랑하고, 오만하고, 후회하고, 용서하고, 다시 살아간다. 호메로스는 그 보편적인 인간의 조건을 놀라운 예술성과 서사로 풀어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단순히 과거를 묘사하는 문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삶과 감정을 꿰뚫는 살아 있는 텍스트다.
이제야 나는 진짜 『일리아스』를 만난 것 같다. 나이 들었다는 말이 달갑지 않을 때도 많지만, 이런 독서의 깊이를 느낄 수 있게 된 지금의 나는, 분명 예전보다 더 풍요롭고 성숙한 독자다. 고전은 바뀌지 않지만, 독자는 변한다. 그래서 다시 읽는 고전은 항상 새롭다. 그리고 그 새로운 만남은, 매번 나를 조금 더 성숙한 인간으로 만든다.
다시, 『일리아스』를 추천하며, 그리고 언젠가, 또 한 번 이 책을 펼칠 나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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