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세계사 - 생명의 탄생부터 세계대전까지, 인류가 걸어온 모든 역사
허버트 조지 웰스 지음, 육혜원 옮김 / 이화북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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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인류의 세계사』는 『타임머신』, 『투명인간』, 『우주전쟁』 등 세계적인 명작을 남긴 허버트 조지 웰스가 저술한 역사서다. 이 책은 웰스가 자신만의 통찰력으로 저술한 역사서이지만 인류의 기원부터 현대까지 인류가 지구상에서 해온 일을 일목요연하게 풀어쓴 명저로 손꼽히고 있다. 웰스는 이 책이 출간된 해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등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독자도 어렸을 때 완역판은 아니지만 발췌본으로 나온 『타임머신』, 『투명인간』 등을 읽은 기억이 있다. 오웰의 과학적 상상력은 독자들을 과학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데 월등한 기여를 함으로써 'SF 문학(과학 소설)의 창시자'로 불리운다. 이 책은 역사, 철학, 종교를 아우르는 인류사의 치열한 고민들을 담아냄으로써 아인슈타인에 의해 인류 문명의 발전을 이해하기 위한 역사책으로 추천되기도 했다. 특히 이번 개정판에는 200여 개의 이미지 자료와 지도를 수록하며 세계사의 결정적 순간들을 모두 담아냈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독자도 이 책을 받아든 순간 사진과 그림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금세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생동감 있는 이미지를 보고서다. 높은 해상도의 사진과 그림들은 살아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주고, 독자들에게는 역사적 사실을 다시 한 번 사실로 각인시키는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다. 아마 발전된 편집 능력과 인쇄술의 혜택도 작용했을 것이다. 

『인류의 세계사』의 이번 개정판은 200여 개의 시각 자료와 지도를 수록하며 세계사의 결정적 순간들을 모두 담았다. 인류의 위대한 모험을 함께하는 우리 모두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는 이 책은 역사적 사건들이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고, 세계사의 흐름이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 소설처럼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조지 오웰, 버트런드 러셀 등 수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준 책으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역사를 바라보는 웰스의 객관적인 통찰력으로, 초판 출간 당시 나치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다는 사실은 역사서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에피소드이자 증거로 역할을 해내고 있다.



「허버트 조지 웰스, 아인슈타인을 설득하다」란 제목의 개정판 책의 〈서문〉에서 앞서 언급한 세 명의 저명 인사에 미친 영향을 그들의 입을 통해 들어보는 기회가 제공된다. 〈서문〉에 따르면 『동물 농장』의 저자 조지 오웰은 그에게 큰 영향을 받았는데 웰스를 "너무 제정신이어서 현대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도 허버트 조지 웰스의 작품을 사숙하며 소설과 과학을 익혔다고 말했다. 로켓 공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로버트 고다드는 웰스의 『우주전쟁』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우주개발에 뛰어들었다. 그는 인류 발전에 끝없는 비전을 제시했으며 '어두운 진실'을 예언했다.

〈서문〉을 쓴 사람은 웰스는 아니지만 이번 개정판의 편집자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는 '어두운 진실'의 이야기도 여기에 실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한 달 전인 1939년 헝가리 태생의 미국 물리학자 실라르드 레오(1898~1964, 헝가리는 우리처럼 성이 앞에 오고 이름이 뒤에 온다)는 헝가리 태생의 미국 물리학자다. 1933년에 핵 연쇄 반응을 발견하여 핵 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는 길을 열었고, 1939년에는 아인슈타인과 함께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아인슈타인-실라르드 편지를 보내 핵무기 개발을 비밀리에 건의하여 맨해튼 계획을 추진한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그 역시 아인슈타인처럼 유대인이다. 베를린-카를로텐부르크 공과대학교에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막스 플랑크, 막스 폰 라우에 등의 물리학 강의를 들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부터 아인슈타인과의 인연이 있었다고 한다. 실라르드는 1933년 나치의 유대인 사냥에서 벗어나 런던으로 건너왔다. 바로 그 무렵 그는 핵에너지의 실용화 가능성을 부정하는 어니스트 러더퍼드의 글을 타임스에서 읽고 그의 속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바로 1년 전에 실라르드는 H. G. 웰스의 1914년 과학 소설 『해방된 세계』에서 인위적 핵붕괴를 이용하는 "원자탄"에 대한 공상과학적 묘사를 읽고 웰스의 상상력에 공감하였다. 그해 1933년에 실라르드는 핵 연쇄 반응 제어를 설계하고 이듬해에 이에 관한 특허를 출원하였다. 이렇게 해서 핵 연쇄 반응의 평화적 이용과 전략적 이용의 길이 열렸으나, 이러한 실라르드의 공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고 한다.



책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실라르드는 독일에서 망명한 유대인 과학자로서 히틀러의 위험성을 잘 알았다고 한다. 그는 아인슈타인에게 원자폭탄이 생겨나는 것은 시간문제이니, 최소한 히틀러보다는 빨리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원자폭탄의 개발이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실라르드의 설득에 아인슈타인도 결국 원자폭탄의 가능성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낸다. 역사적인 맨해튼 계획의 시작이었다. 오웰은 당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예언가'로 불릴 정도로 통찰력과 영향력을 지닌 사상가였다. 하지만 세상은 그의 상상력을 뛰어넘었다. 자신이 예측한 년도에 우려했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원자폭탄이 실제로 사용되는 것을 목격하자 말년에는 비관주의자가 되고 만다. 

"우리가 전쟁을 끝내지 않는다면 전쟁이 우리를 끝낼 것이다. 모두들 그렇게 말하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동감하지만 아무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미래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자의 운명은 그 미래에 압도당할 운명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그는 자신의 책 개정판에 〈서문〉을 추가한다. "더는 할 말이 있는가? 이제는 내 묘비명밖에 없다. 내가 말했잖아, 이 바보들아.(I told you so. You dammed fools.) 

아인슈타인은 인류 문명의 발전을 이해하기 위한 역사책으로 이 책을 추천했다.(Education and World Peace, A Message to the Progressive Education Association, 23 November 1934) 아인슈타인은 〈추천사〉에서 저자 "웰스는 역사를 살아가는, 살아가야만 했던 '사람'에 집중했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이 생각햇던 사상, 철학, 종교와 치열한 고민들을 담았다. 웰스가 과학 소설로 유명했듯 세계사 역시 소설을 읽듯 단숨에 읽을 수 있게 썼다. 세계사의 단편이 아닌 전체적인 흐름 자체를 담았다"고 평가했다. 이후 웰스는 3권 분량의 『세계사 대계(The Outline Of History)』를 집필하여 당시 200만 부가 팔리며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른다. 역사에 더욱 몰두한 그는 내용을 다듬고 간추려 이 책 『인류의 세계사』를 출간했는데 대중을 상대로 한 최초의 한 권짜리 역사 책이었다고 이 책의 〈서문〉은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모두 10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생명의 탄생」 2장 「인류의 기원」 3장 「문명의 발생, 고대 국가의 출현」 4장 「고대 철학과 사상」 5장 「천년 제국, 로마인 이야기」 6장 「중세 유럽과 아시아」 7장 「종교개혁과 패권 다툼」 8장 「시민혁명과 산업혁명」 9장 「제국주의와 세계대전」 10장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 등이다. 한국어 번역판이어인지 「한국사 세계사 비교 연표」가 눈에 띈다. 400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으로 고등학교 때 배운 세계사 교과서가 생각나기도 한다. 역사에 통찰력을 갖고 있는 웰스지만 이 세계사 책은 서양 중심에 치우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세계의 중심이 된 가장 발전된 문명은 유럽 중심의 세계관이었으니 그랬을 것이란 추정은 가능하다. 아예 동양사를 뺀 것은 아니지만 다루는 페이지도 적을 뿐 아니라 저자 웰스가 연구하고 탐구한 느낌은 별로 없는 것은 독자가 동양인이고, 역사 지식이 부족해서일까? 기술 내용으로 독자가 판단하기엔 깊은 연구는 없었던 듯한 느낌이다. 연대순으로 본 「한국사 세계사 비교 연표」는 원래 초판에 실린 것인지 후에 번역 개정판에 우리 출판사 측에서 붙여 넣은 것인지는 독자로서는 알 수 없다. 세계 속의 한국을 들여다보는 일은 꼭 필요한 일인 것 같아 편집진에게 감사해야 할 일일지도 모르겠다. 

유럽 중심의 역사서지만 세계 인류의 역사 속 활동은 감탄을 자아낸다. 그것은 웰스에 대한 역사 통찰력이 작용한 탓으로 이해된다. 웰스는 아인슈타인의 〈추천사〉에서 말한 역사를 살아갔던 ‘사람’에게 집중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역사의 흐름에서 기점이 되었던 사건들은 물론 당시 시대를 살아갔던, 살아가야만 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삶 자체에 집중한다는 것이 역사를 보고 이해하는 올바른 관점이 아닐까 하는 자각심도 생긴다. 한다. 웰스의 역사 관점은 역사란 무엇이고, 인류의 역사는 어떤 것이었는지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 것이 분명한 이상 역사서 기술의 한 모델로서 충분한 자격을 갖고 있다는 평가에 독자는 공감한다.



세계사 책 가운데 생명의 기원이나 인류의 기원을 함께 다룬 것은 독자로서는 이 책 『인류의 세계사』이 처음이다. 세계사는 유사 이후의 인류의 발전 과정을 통해 문명 발전에 초점을 두고 기술하기 때문에 확실한 기록이나 남아 있는 유적을 통해 과거사를 파악하고 있다. 문자나 그림 등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은 시대의 상황을 고고학이나 인류학 등을 통해 가설을 인정하고는 있지만 과학적 사실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실정이다. 이런 가운데 이 책은 생명의 탄생과 인류의 기원에 대해서 언급한다. 이 점은 세계사를 기술하는 책에서는 흔히 있던 일이 아닌데 웰스는 과감하게 이를 세계사 시작 단계에 끼워넣음으로써 인류의 발전을 조망하고 있다. 현재 인류의 기원은 현생 인류가 어디에서부터 왔는가? 하는 것은 단일 지역 즉, 아프리카에서 기원했다는 설과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기원했다는 설로 나뉘는 상황이다. 또 생명의 기원설도 아직은 확실히 밝혀내지 못한 상태라고 한다. '생물학의 뉴턴'으로 불리는 찰스 다윈은 1831년에 비글호를 타고 5년 간 세계 일주를 할 때 라이엘의 지질학 원론을 탐독함으로써 광범위한 지질학적, 식물학적, 동물학적 자료를 수집했다고 알려져 있다. 다윈은 아메리카 대륙을 남하함에 따라 극히 가까운 종들이 조금씩 바뀌어 가는 것을 보았다. 또한 다윈은 육지에서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동태평양의 갈라파고스(Galapagos) 제도의 섬들에서 참새와 비슷한 되새류가 30여 종이나 있음을 보았다. 이들은 육지에서 보았던 되새류와 비슷하기는 하나, 부리 모양이 달랐으며 섬끼리도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다윈은 어떻게 30여 종의 비슷한 새들이 격리된 섬에서 살게 되었는가에 대한 의심을 갖게 되었으며, 이것이 우연이기보다는 아마도 아주 오래전에 한 종류의 새가 이 섬으로 날아온 후 세월이 지나면서 서로 다른 형태로 변했으리라고 추측했다. 다윈의 진화론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비록 짧지만 매우 조리 있고 설득력을 가진 생명과 인류의 기원을 생명체-바닷속-어류-육지 등의 진화론에 맞춰 생명이 인류로까지 진화하는 단계를 독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비록 과학계 정설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추정하는 바에 웰스는 공감했던 듯하다. 웰스는 이 책을 통해 과학의 세계에 통찰력과 상상력을 불어넣어 현실화되는 과정을 추적하는 세계사 기술을 시도함으로써 설득력 있는 역사 기술의 한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이 책은 그가 상상력으로 그려낸 과학의 세계가 굵직한 인류 문명사와 잘 맞아 떨어지는 점을 보고 '예언자'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통찰력을 가진 인물임을 확인하게 해준다.



고의로 전쟁을 일으키며 사람의 생명을 놓고 도박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생명을 걸지 않는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끔찍한 전쟁이 끝났지만, 그 어떤 것도 종결되지 않았고 시작되지도 않았으며 해결된 것도 없었다. 모든 전쟁을 끝내고자 전쟁을 시작했지만 전쟁을 끝내기 위한 또 다른 전쟁이 생겨났을 뿐이다.(p.365)


저자 : 허버트 조지 웰스(Herbert George Wells)


과학 소설(SF)로 유명한 영국의 소설가이자 문명 비평가이다. ‘타임머신’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작가로, 과학 소설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손꼽히고 있다. 또한 역사, 정치, 사회에 대한 여러 장르에도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1866년 영국 켄트주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이혼과 아버지의 파산으로 학업을 그만두고 포목점과 약국의 수습 점원으로 일하며 생계를 꾸렸다. 미드허스트 문법학교의 보조 교사로 채용된 데 이어 사우스켄싱턴 과학사범학교에 국비 장학생으로 입학하며 뒤늦게 학업에 정진하지만 생물학과 동물학 외의 다른 과목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해 과정 도중 학교를 떠난다. 이후 다시 공부를 시작해 런던대학을 졸업한 후 유니버시티 코레스폰던스 칼리지에서 생물학 강사로 재직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한다.

학창 시절 『사이언스 스쿨 저널』에 연재한 단편소설 「크로닉 아르고 호」를 퇴고하여 『타임머신』으로 출간하였다. 『타임머신』의 큰 성공 이후 『모로 박사의 섬』, 『투명 인간』, 『우주 전쟁』, 『세계사 대계』 등을 연이어 발표하며 ‘SF의 창시자’로 자리매김하였다. 이와 동시에 정치학과 사회문제 분야까지 두루 아우르는 글을 저술했으며 당대 최고의 지식인 중 한 사람으로 꼽혔다. 다양한 주제와 장르를 다룬 200여 권에 달하는 저서를 남겼다.


역자 : 육혜원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독일 베를린자유대학교에서 정치학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화여자대학교, 고려대학교, 경희대학교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왜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셨을까?』, 『보편주의』, 『좋은 삶의 정치사상』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니체』, 『미래전쟁』, 『영웅본색』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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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 워크 - 가정과 자유 시간을 위한 투쟁의 역사
헬렌 헤스터.닉 서르닉 지음, 박다솜 옮김 / 소소의책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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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애프터 워크』는 「가정과 자유 시간을 위한 투쟁의 역사」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다. 표제어에 쓰인 워크(work)에 대한 풀이다. 즉 이 책은 집안일(가사)로 여념이 없는 여성의 노동 시간과 관련한 투쟁의 역사를 살펴본다는 의미다. '가정'이라 하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식구들이 함께하며 쉬고, 먹고, 놀고, 자는 곳이라는 이미지로 뇌리에 박혀 있다. 어디든 인간이 머무는 곳은 청소라는 '일'이 따르게 마련이다. 일을 하기 위해 모인 회사도 마찬가지다. 일하는 동안 생긴 잡동사니나 휴지, 쓰레기를 치워야 다음날 깨끗한 곳에서 또 일을 할 수 있다. 일터에서 발생되는 '청소일'은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청소일 하는 사람에게 별도의 경비를 지급하며 처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정에서의 일은 다르다. 육아, 가정 교육, 놀고 먹는 데도 당연히 청소라는 뒷처리가 필요하다. 조상들이 해왔던 것처럼 으레 여성(주로 어머니)의 몫이다. 사실 청소나 빨래는 그렇다쳐도 육아나 가정 교육은 아이의 장래로 봐서나, 집안의 미래로 봐서나 굉장히 중요한 몫이다. 아이가 젖을 떼고 걸을 때쯤 되면 더 많은 시간이 육아에 필요해진다. 늘 움직이려는 아이를 에기치 않은 사고나 문제로부터 보호하려면 뒤를 따라다녀야 할 지경이다. 어느 집안이나 겪는 일이다. 이것도 여성의 몫이다.

이 책은 인간에게 일은 무엇이고, 어떤 의미인지를 탐구한다. 일의 성격과 규정을 명확히 파악해둬야 일에서 파생되는 각종 문제의 해결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 임금노동에 스스로 복종하는 사회구조를 만들어왔다. 그 안에서,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삶의 질을 높이고자 하는 탈노동의 요구는 역사적으로 볼 때 근대 이후의 일이다. 노동에 관련된 문제가 발생될 때는 늘 하던 대로 남성 위주의 산업과 일자리에만 집중해왔다. 그도 그럴 것이 생계를 위한 임금 문제나 일자리 문제 등은 가정의 문제일 뿐 아니라 사회적 문제이고, 국가적 문제와 직결되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는 흔히 가사노동으로 대표되는 ‘사회 재생산 노동’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육아나 교육 등은 관련 기관에 돈을 주고 전문적인 보호를 받으면 된다. 물론 국가가 챙겨줘야 할 일이다. 그러나 나라가 가난할 때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라 가정의 문제는 임금 노동이란 개념에서 아예 빼버린 것이다.


이 책 『애프터 워크』는 탈노동 프로젝트에 관한 것을 다룬다. 가정에서의 일, 즉 가사는 모두 이에 포함된다. 당연히 노동 문제를 다루며 정책을 만들 때 포함되어야 하는데도 이는 사회에서 문제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탈노동 프로젝트'의 중심 개념은 가사도 우리가 말하는 노동 문제에 포함해 함께 다뤄야 한다는 주장이다. 공동 저자 헬렌 헤스터와 닉 서르닉(이하 저자)은 가정이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의 변화를 살펴보고 우리의 미래를 내다보는, 더없이 소중하고도 긴급한 이야기를 이 책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요리, 청소, 육아, 돌봄 등과 같은 무보수 가사노동이 어떻게 이전의 전통 사회보다 현대 생활에서 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는지를 역사적으로 살펴보고, 그와 관련된 장벽과 난관, 불평등 문제를 꺼낸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재생산 노동 담론'에서 가장 필요한 네 가지 요소, 즉 기술의 발전, 사회적 기준 강화, 가족 형태의 변화, 주거 공간의 실험에서 제기된 다양한 주장과 시도를 사례로 들면서 지금보다 더 자유롭고 자기 주도적인 삶을 위한 실천적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인간에게 일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일은 어떤 형태로 우리를 속박할까? 이를 살펴보는 것은 일을 임금으로 환산해 가족의 생계를 위한 돈으로 지급하는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분석이기도 하다. 현대 사회에서 일은 직장에서 필요한 일을 혼자, 또는 공동으로 함으로써 사전 계약된 임금을 받는다. 구석기나 신석기 시대인 유사 이전의 역사로 되돌아가보면 공동으로 사냥한 후 각자에게 배분된 몫을 받아 각 가정으로 돌아가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원리로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인 현대의 사회 시스템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생존하기 위해, 즉 임금을 받기 위해 스스로 노동(일)에 복종한다. 그것은 또한 다른 사람이나 조직에 시간을 팔아넘기고 통제권까지 넘겨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는 길바닥에 나앉아 배를 곯고 빈곤하게 살게 될까봐 두려워서 일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처럼 굉장히 체계적으로 짜여진 대한민국 사회에서 일에 대한 불안감이 그 어느 때보다도 팽배해지고 있다. 일자리 부족 현상이다. 훨씬 많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일자리가 없다는 것은 크게 보자면 사회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는 심각한 문제이다. 더욱이 많은 이들이 인공지능과 자동화 같은 혁신적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인간의 일자리가 급격히 줄어들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고 있다. 또 실제 적용되는 많은 예를 우리는 듣고 보고 있다. 



이런 까닭에 더 적게 일하고 시장에 대한 의존을 줄이려는 새로운 탈노동 사회로의 길을 모색해야 할 때라는 게 공동 저자(이하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에 따르면 급격한 사회 변화 속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임금노동이 아니라 미래의 노동자를 키워내고, 현재의 노동인구를 재생시키고, 일하지 못하는 사람을 부양함으로써 사회 자체를 재생산하고 유지시키는 ‘사회 재생산’이라는 일이다. 하지만 재생산 노동, 즉 육아, 돌봄 등 잡다하고 단순해 보이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집안일 등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활동은 탈노동 담론에서 ‘진짜’ 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묵살되어 왔다. 오랫동안 가사노동에는 금전적 이득과 구별되는 프레임이 씌워져 있었다. 돌봄 노동은 가족에 대한 사랑의 노동으로, 가정은 외부 세계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는 휴식의 공간으로 간주되고 여성이 주도적 역할을 맡아왔다.

그럼에도 고착화되고 그릇된 편견이 지배하는, ‘기계가 아니라 살갗을 만지는 일’은 그 규모와 중요성이 나날이 커져가고 있다. 실제로 가정 내에서 이루어지는 무보수 재생산 노동의 양은 어마어마하다. 2014년 한 해 동안 영국에서는 장기 무보수 돌봄 노동에 81억 시간이 소요되었고, 미국인들은 알츠하이머를 앓는 가족을 무보수로 돌보는 데에만 180억 시간을 썼으며, 국제노동기구(ILO)에서는 데이터를 보유한 64개국에서 하루 동안 이루어지는 무보수 노동시간이 164억 시간에 달한다고 추산한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국민 전체 노동시간의 45~55퍼센트가 무보수 재생산 노동에 사용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주로 서방세계에 속한 고소득 국가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저자는 이번에 출판한 한국어판 〈서문〉을 통해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해 더욱 우려를 표하고 있다. 과로에 반대하고 자유 시간의 젠더 불평등을 강조하는 측면에서는 이 책이 한국에 유독 적합하다고 지적한다. "한국은 긴 근로시간으로 악명이 높다. 2022냔 힌 헤 동안 한국의 노동자는 평균 1,901시간을 일했는데, 이는 독일 노동자가 일한 시간보다 560시간이나 길었다. 한국 노동자의 주당 근로시간은 세계에서 가장 긴 수준이다. 기업 측에서는 법적으로 허용되는 주당 근로시간을 주 52시간에서 주 69시간으로 늘리라는 압박을 가했으나, 노동조합과 청년들의 저항으로 겨우 저지되었다.



이 책은 ‘사회 재생산 노동’으로 일컬어지는 가사노동을 둘러싼 여러 담론과 논쟁, 그리고 열정적인 투쟁과 획기적인 실험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불평등하고 억압적인 현실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유로운 활동을 극대화하는 실천적 대안을 내놓는다. 물론 그 핵심은 가사노동을 어떻게 줄일 것인가이다. 자본주의 체제하의 노동 문제를 다방면으로 연구해온 저자는 이 책에서 모든 사람이 일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성차별적인 가사노동을 공평하게 분담할 수 있는 효율적인 대안을 제시하기를 꾀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지난 몇 세기에 걸친 변화를 추적, 많은 사례를 바탕으로 재생산 노동의 핵심 사안을 흥미롭게 풀어놓는다.

탈노동 관점에서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기술의 발전’이다. 냉장고, 식기세척기, 진공청소기, 오븐 등 각종 가전제품이 집 안에 가득 들어차 있는데도 가사노동의 총량이 줄어들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의 스마트 홈 기술은 가정을 해방적으로 변혁시킬 수 있을까? 이러한 가정 기술을 둘러싼 여러 논의와 주장에 뒤이어 저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청결, 안락함, 육아, 그리고 전반적인 분주함에 대한 사회적 기준이 어떻게 강화되고 표준화되었느냐이다. 이에 대해서는 가정 내 청결, 말쑥한 몸단장, 육아 등의 규범이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하면서 보편화된 결과 노동시간이 그 기준을 만족시키고 더 많은 결과물을 내는 데 투입되었다고 말한다.

이와 함께 가족 형태가 변화하면서 어떻게 생계 부양자/가정주부 모델이 남녀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강압적인 제약을 가하고 있는지, 관습적 단위인 ‘가족’이 언제까지 가사노동과 돌봄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지, 그 해법이 무엇인지도 깊이 생각해볼 대목이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주거 공간에 대한 흥미로운 건축적 제안과 소규모의 실험 사례를 소개하면서 주거 환경에 대한 인식 변화가 새로운 상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앞서 논의된 내용을 바탕으로 세 가지의 핵심 원칙, 즉 공동 돌봄, 공공 호사, 시간 주권의 개념을 설명하고 실천적 방법을 제시한다. 탈노동 사회로 가는 길은 결코 순탄할 수 없다. 끊임없는 환경 변화와 서로의 이익이 상충하는 장애물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말하듯, 그것은 한없이 프로메테우스적인 과정의 일부이고 궁극적으로는 시간을 해방시키고, 인류의 발전을 이끌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악명 높은 근로시간, 최하위권의 워라밸 지수, 만성적 과로와 젠더 불평등, 가사노동의 불균형으로 인한 여성의 상대적 박탈감 등이 심각한 지경에 이른 대한민국 사회에서 이 책은 무척이나 도발적이고 유용하게 읽히면서 많은 물음표를 던진다.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는 결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일이 끝난 뒤(애프터 워크)’, 또 일해야 하는 세상에서 살 것인가, 아니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주도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살 것인가. 지금 우리는 이 두 갈래의 길 앞에 서 있다.

이에 따라 이 책은 우리의 자유 시간을 잡아먹는 재생산 노동을 어떻게 개선해나가야 하는지를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다루기 위해 네 가지 요소를 끄집어낸다. 그것은 바로 ‘기술의 발전’, ‘사회적 기준 강화’, ‘가족 형태의 변화’, ‘주거 공간의 실험’이다.

다음으로는 기술의 발전에 따른 사회적 규범과 기준, 기대가 어떻게 강화되었는지를 살펴본다. 혁신적 기술은 또 다른 일을 만들어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더 많은 결과물을 기대케 했다. 이로써 노동의 양이 줄어들 희망은 사라졌고, 개인의 자유 시간은 지속적으로 침해받고 있다. 이에 대해 저자들은 우리 모두가 따르고자 하는 규범을 함께 결정하고 스스로 법을 제정하는 수단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책은 가정 내의 사회적 관계, 특히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회 재생산의 주체인 핵가족에도 주목한다. 사회 재생산 노동의 관점에서 핵가족은 비효율적인데다 각종 젠더 불평등의 온상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핵가족 형태는 여전히 우리 시대의 문화적 상상을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다. 그렇다면 핵가족은 어떻게 탄생해 오늘날 가장 보편적인 가족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을까? 또한 관습적 가족의 일원이 아닌 사람들은 언제까지 사회적으로 외면당할 것인가? 이렇듯 핵가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의 불합리한 문제와 제약, 그리고 변화하는 양상을 면밀히 짚어본다.

가정 공간을 어떤 형태로 조직하면 가정 내 무보수 노동과 돌봄 노동이 겪는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지도 면밀히 들여다본다. 20세기의 흥미로운 건축적 제안과 소규모 실험, 즉 러시아 혁명 직후의 열린 공간인 ‘주택 코민’, 프랑크푸르트 주방, 붉은 빈, 드롭 시티, 랜다이크 운동 등은 생활공간과 대항적인 사회적 상상에 중요한 사례가 될 수 있다. 이 책은 재생산 노동을 둘러싼 네 가지 요소의 분석을 기초로 탈노동 미래를 위한 실천적 방법을 제시한다. 공동 돌봄, 공공 호사, 시간 주권이다. 이 개념들이 어떻게 결합되는지를 설명하면서 우리 모두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무엇이 더 필요한지를 유연하게 생각하고 끊임없이 자유의 영역을 넓혀나가야 한다고 덧붙인다.


저자 : 헬렌 헤스터(Helen Hester)

영국 웨스트런던 대학교에서 젠더, 기술, 문화정치를 가르치고 있다. 테크노페미니즘, 사회 재생산, 노동 이론 등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며 국제 작업 그룹 ‘라보리아 큐보닉스(Laboria Cuboniks)’의 일원이다. 지은 책으로 『노골적인 것을 넘어 : 포르노그래피와 성의 이동(Beyond Explicit: Pornography and the Displacement of Sex)』, 『제노페미니즘(Xenofeminism)』, 『포스트 워크(Post-Work)』 등이 있다.


저자 : 닉 스르닉(Nick Srnicek)

영국에서 활동하는 캐나다 출신의 연구자이다. 현재 런던대학 킹스칼리지에서 디지털 및 플랫폼 경제, 인공지능의 정치경제, 노동거부의 정치, 마르크스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다. 좌파 가속주의자의 대표 주자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기술적 발전을 전유해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사회적 변화와 급진적 해방을 추구하는 데 관심이 있다. 수평적이고 직접적인 자율성에 무조건 호소하지 않고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조정을 강조하면서도 전 지구적으로 실현 가능한 현실적 대안을 추구한다. 주요 작업으로는 『플랫폼 자본주의』가 있으며, 알렉스 윌리엄스와 함께 『가속주의자 선언』을 발표하고 『미래의 발명: 탈자본주의와 노동 없는 세계』를 펴냈다.


역자 : 박다솜

서울대학교 언어학과를 졸업했다. 책 『멍든 아동기, 평생건강을 결정한다』, 『만만찮은 여자들』, 『불안에 대하여』, 『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 『관찰의 인문학』, 『죽은 숙녀들의 사회』, 『여자다운 게 어딨어』, 『스피닝』 등을 번역했다. 배우자와 아이, 고양이와 함께 행복해지는 길을 부지런히 찾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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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가 - 인생의 절반쯤 왔을 때 깨닫게 되는 것들
리처드 J. 라이더.데이비드 A. 샤피로 지음, 김정홍 옮김 / 북플레저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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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가』은 자기계발 도서로 읽히는 책이다. 리처드 J. 라이더와 데이비드 A. 샤피로가 공동 집필했다. 출판사 측은 '인문학' 도서로 소개하지만, 책은 등장 인물을 내세워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다. 문체나 문장, 이야기의 흐름이 소설 작품 같다는 독자의 판단이다. 공동 저자(이하 저자)가 딕을 이야기 속 중심인물로서 이 책의 이야기들을 끌어가게 한다. 소설처럼 구성된 스토리와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 중심인물이 딕이다. 책에는 12명의 중년으로 구성된 탐험가들이 등장한다. 아프리카 오지 탐험을 하는 중이다. 딕은 탐험대의 리더이다. 저자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가」란 제목의 〈프롤로그〉에서부터 특별하게 전개된다. 


어느 늦은 오후, 세렝게티의 고원지대를 여행하던 중 딕은 인생의 새로운 돌파구를 열게 될 하나의 질문과 마주쳤다. 그해 동부 아프리카는 유례없는 가뭄에 시달리고 있었다. 거대한 평원은 바싹 말라 온통 먼지뿐이었고, 강바닥은 쩍쩍 갈라져 있었다. 풀이 자라던 벌판에는 마른 지푸라기들만 바람에 흩어지고, 평원을 물들이던 색색의 꽃들도 제 빛깔을 잃은 지 오래였다. 푸석푸석한 평원 위로는 황토색 먼지만이 제멋대로 휘날리고 있었다.(p.4) 


탐험이라고는 하지만 무엇을 발견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다. 12명의 탐험가들의 목적은 '내적 탐험(Inventurr Expedition),'이라는 진지한 주제를 가슴에 품고 아프리카와 '나 자신'에 맞서 정면으로 부딪힌다는 각오로 떠나왔다. 그러나 환경은 어느새 그들을 한계에 도달하게 만들고 있다. 특히 리더 역할을 맡은 딕은 안전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과 끝없이 터지는 성가신 일들로 인해 거의 쓰러지기 일보직전이다. 일행은 고원에 위치한 작은 마사이족 마을인 마가두로로 차를 몰아 간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질문한다.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하게 웃어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는가?" 이 질문에 어느 순간부터 행복과 활기를 잊고 정체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현실을 독자들은 자각하게 된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행복한 삶이란 무엇인지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면서 시작한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가?”라고 묻는 질문에 독자들은 지금 내 삶을 이루고 있는 것들을 되돌아보고, 이 모든 것이 나를 과연 행복하게 해주는지 생각하게끔 한다. 이로써 성공보다 성취를, 목적지가 아닌 과정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또 내면의 통찰력을 통해 더 건강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바람직한 삶을 위해서 어깨를 짓누르는 인생의 짐을 덜어내고, 과감하게 버리고, 지혜롭게 나만의 인생을 소유하자는 것이 저자의 집필 취지다. 저자는 "당신은 더 나은 삶을 살 자격이 있다. 마지막까지 나의 삶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길 바란다"고 말한다.

차를 몰아 마사이족을 찾아간 후 마을 족장 코이에에게 딕은 자신의 최신 가방과 안에 들어 있는 온갖 세상 만물을 자랑한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족장은 묻는다. “이 모든 것이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줍니까?” 이 상황에서 딕의 깨달음은 갑자기 온다. 다시 떠나기 위해선 무거운 짐을 덜어내야 한다. 이미 녹초가 된 몸에 가방에 들어 있는 온갖 준비물은 장애가 될 뿐 거의 사용하지 못할 것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씩 필요없는 물건들을 옆으로 치워놓는다. 마사이족에게 선물로 주고 갈 요량으로 짐을 덜어내기 시작한다. 각종 식기, 가위, 칼, 삽, 방향 탐지기, 천제 망원경, 지도, 수첩과 필기도구, 각양각색의 옷가지들, 비상약, 응급치료 도구, 무엇이든 보관할 수 있는 방수 봉투···.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물건들이 한없이 쏟아져 나온다. 마침내 배낭이 텅 비고 모든 물건이 바닥에 펼쳐지자 딕은 마치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탐험가가 된 기분이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오지를 탐험할 때 필요한 것들'이란 제목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장면 아닌가? 이 과정을 통해 딕은 그동안 지니고 있던 생각을 버리고 전혀 다른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게 된다. 이처럼 내면으로 눈을 돌리면 나의 삶에 대해 이해하고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다.



저자에 따르면 나를 제대로 들여다보면 인생을 가로막았던 모든 두려움이 하나씩 걷히게 된다. 삶은 결코 일반적인 논의로 규정되는 것도 아니고, 거룩한 몇 마디의 명언들로 요약되는 것도 아니다. 삶은 오로지 자기만의 질문을 품은 채 끊임없이 내적 탐험을 떠남으로써 서서히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나는 내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 ‘나는 과연 내 인생의 주인 노릇을 제대로 하는 걸까?’ 이 질문이 가슴에 와닿는다면, 당장 인생의 가방을 다시 꾸릴 것은 저자는 주문한다. 책임감과 집착에 억눌려 모든 것을 버리고 이제 그만 포기하고 싶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두 가지뿐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계속 짊어지거나, 내려놓거나. 

우리는 흔히 짐을 ‘하나’로 여기는 바람에 전부 다 지든가, 전부 다 버리든가 양자택일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선택의 범위는 훨씬 넓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두려움과 불안은 무엇에서 오는지 원인을 파악한다. 그런 다음 내가 가진 것들을 재고조사 하는 방법, 내면의 소리를 듣는 방법, 여행(삶) 가방 꾸리기 등 직접 나의 삶에 대입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야기들을 하나씩 펼쳐 나간다. 내가 가진 것들을 되돌아보고 삶의 우선순위를 정리해 바람직한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 훨씬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이라고 저자는 역설하고 있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꼭 지금과 다른 삶을 살 필요는 없다. 현재의 중요한 것을 찾아 인생을 재정립하면 된다. 저자 리처드 J. 라이더는 이 책을 쓰면서 인생의 가방을 다시 꾸리는 삶을 실천해 나갔다고 한다. 행복의 우선순위를 재정립하는 이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책에서 말하는 ‘내적 탐험’을 통해 자신에게 주는 행복이 진정한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실천하며 이 책의 진정성을 이끌어낸다. 라이더는 순탄하게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재능에 맞는, 진정으로 원하는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도 했다. 이처럼 삶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려야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저자는 이 책에서 강조한다. 저자는 삶에 대한 탁월한 통찰을 독자들에게 전해준다. 우리가 짊어진 인생 가방 속에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 더 많다고 저자의 경험과 사유를 통해 확인하게 해준다. 진정한 내면의 소리를 듣기 위해 불필요한 짐을 걷어내고 자신만의 삶을 제대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자 지향점이다.


이 책은 모두 14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가」, 2장 「바람직한 삶은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에 있다」, 3장 「인생에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 더 많다」, 4장 「도대체 왜 이 짐을 모두 짊어져야 하는가」, 5장 「성공했는가, 성취했는가」, 6장 「삶은 애초에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다」, 7장 「인생의 여정을 함께할 친구를 가졌는가」, 8장 「이미 답은 내 안에 있다」, 9장 「하나의 문을 닫으면 또 다른 문을 열 준비가 필요하다」, 10장 「스스로 질문을 던지다」, 11장 「지금과 꼭 다른 삶을 살 필요는 없다」, 12장 「'타임아웃'이 충만한 하루를 만든다」, 13장 「길을 잃어야 새로운 길을 발견할 수 있다」, 14장 「내가 찾아야 할 것은 마지막 목적지가 아니다」 등이다. 〈에필로그〉 「내일의 목적을 갖고 오늘을 살아가라」도 놓치지 않아야 할 부분이다.

이 책에는 수많은 질문이 나온다. 대부분의 질문이 자신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이는 곧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이 걸어온 삶을 되돌아보는 일이다. 그리고, 하나의 상징적 물건이 저자에 의해 설정되어 있다. 즉 '삶의 가방(배낭)'이다. 지금까지 자신이 메고 온 것들이 담겨 있다. 삶의 절반쯤 왔을 때 이 가방을 열어보면 온갖 잡동사니가 다 들어갔으리란 짐작을 하기에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것들은 사실 지금까지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던 것들이다. 일, 가족, 사랑, 인간관계···. 이 모든 것은 한때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채워주었지만 이제 더 이상 감당하기 힘들 만큼 버거워졌다. 닥치는 대로 꾸역꾸역 채워 넣다 보니 정작 인생을 제대로 즐기기 위한 공간이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챈 것이다. 

뒤늦게 알아챘기에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절은 이미 끝난 것이 아닐까? 하고 싶었던 일들은 이제 영영 멀어져 버린 것이 아닐까? 불안과 공포가 엄습해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구도 결코 불안한 점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 책을 읽는 당신도 마찬가지라고 저자는 슬그머니 희망의 메시지를 보낸다. 삶의 중간쯤 와서 당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오후에 삶을 위해서 어떤 것을 남길 것인지, 버릴 것인지에 대해 결정도 끝났다. 그렇다면 "당신의 가방 안에 무엇을 담아야 할까?"란 질문엔 쉽게 답할 수 있다. 인생의 오후에 필요할 것들만 추려 가지고 떠나면 된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확실한 답을 얻어야 한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가?" 이 질문은 이 책의 전반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나를 자극하며 고찰할 수 있도록 생각의 장을 넓혀주는 성찰이다. 길을 가다 짐이 너무 무겁다고 생각되면 즉시 가방을 열고 필요없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버리고 다시 길을 재촉하면 된다. 



저자는 이 책을 쓰는 동안 '인생의 오후'를 위한 프로그램이 바로 자신들의 안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짐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 바로 새로운 성장과 또 다른 여정을 위한 '클릭 타임'인 것이다. 그 프로그램을 클릭하기 위해서는 지금 짊어진 인생의 가방을 풀고 다시 꾸려야 한다. 저자는 상징과 은유를 사용하며 매우 문학적 문장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지만 '가방을 푼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들고 다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며, 그것을 왜 들고 다니는지 찬찬히 되돌아본다는 뜻이다. 지금 소유하고 책임지고 있으며 관계 맺고 있는 것들이 과연 앞으로도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 오히려 발목을 붙들어 매게 되지 않을까? 끊임없는 자아성찰을 하고 길을 계속 간다는 것은 말 그대로 행복한 인생의 방향을 제대로 잡기 위해서다. 이에 따라 가방을 다시 꾸린다는 것은 끝없는 재평가와 재창조를 의미한다. 우선순위를 정한 뒤 바람직한 삶의 조건들을 바꾸고, 살아 있다는 강렬한 느낌을 되살리는 것이다. 우리가 믿어왔던 삶의 방식들이 앞길을 인도하기는커녕 걸림돌이나 족쇄가 되지 않게 하려면 가방을 다시 꾸리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저자가 이 책을 쓴 목적과 취지에 점점 가까이 다가가는 느낌이다. 이젠 희망적인 생각을 해보자.

가방을 다시 꾸리고 집을 나서는 중년의 발걸음은 짐을 잔뜩 짊어지고 있는 젊은이보다 가볍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길은 가장 멋진 인생의 여정이 될 수 있다. 가방을 다시 꾸려본 사람들은 인생의 황혼기가 사실은 진정한 '황금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저자는 독자들을 격려한다.

저자는 다시 마사이 족장 코이에를 만난 시점으로 되돌아간다. 첫 만남 이후 이 책을 쓰기로 결심한 저자는 코이에를 다시 만나 수많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밝힌다. 깊은 밤 모닥불 가에 둘러앉아 별을 바라보거나 바람이 휩쓸고 간 평원을 함께 횡단하면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깊이 통찰하는 기회를 만났다. 코이에는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란 우리가 가진, 그래서 언제든 잃어버릴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을 이루는 그 무엇'이라는 사실을 조용히 일깨워주었다고 털어놓는다. 저자는 코이에와 만난 이후 우리가 만나야 할 진정한 상대는 내면 깊숙한 곳에 가려진 채 빨리 발견되기만을 기다리는 우리 '인간의 본질'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제 우리는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엉켜 있는 삶의 실타래를 풀어내고, 오랫동안 짓눌려온 존재의 무게를 덜어낼 수 있다. 언제든 가방을 풀고 짐을 덜어낸 뒤 다시 꾸릴 수 있다.



본문의 내용들은 모두 저자가 일, 가족, 사랑, 인간관계에 대해서 하나 하나 짚어낸다. 저자 역시 그동안 탐구하고 꾸준히 연구하며, 깊은 사색 끝에 일궈낸 사유를 차분하게 풀어낸고 있다. 문학적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문체나 문장은 독자들이 술술 읽을 수 있도록 소설이나 에세이처럼 기술했다. 또 좀 더 독자들의 객관적인 시선을 위해 3인칭 소설처럼 경험의 내용도 객관화해 표현한다. 자아성찰이나 행복의 조건 등은 모두 하루아침에 어디서 툭 떨어지는 자연의 산물이 아니라 자신이 사는 동안 끊임없이 추구해야 할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수많은 경험 사례와 훌륭한 인격을 갖춘 유명 인물들의 말과 글에서 인용되는 많은 문장들은 그야말로 금과옥조로 보아도 될 정도다. 저자의 사색의 깊이를 헤아리기가 쉽지 않지만 결코 미치지 못할 거리에 있는 것은 아니란 느낌은 이 책이 잘 쓰여졌다는 반증이라고 독자는 생각한다. 어떤 독자가 이 책의 매력에 끌리지 않겠는가. 먼저 읽은 독자로서 더 많은 독자들에게 이 책을 권하는 이유이다. 


살아 있다는 느낌을 찾아 방황하는 것. 그것이 곧 인생의 절반에서 만나는 위기다. 살아 있다는 느낌이 어디에서 오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런 느낌은 마음, 몸, 감정, 영혼 그 어느 영역에서든 우리가 지닌 재능을 시험하고 발휘할 때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이 나이보다 더 빨리 늙고 삶의 생기를 잃어가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짊어진 짐이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p.236)


저자 : 리처드 J. 라이더(Richard J. Leider)

미국의 저명한 강연가이자 저술가이며 자기개발 분야의 트레이너이다. 21세기를 위한 직업 및 라이프스타일 전략 전문가로서 신문 잡지에 여러 차레 글이 실린 바 있으며,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도 그의 글이 자주 인용된다. 미네소타 미네아폴리스에 있는 트레이닝 컨설팅 회사 디 인벤처 그룹의 설립자이자 공동 경영자이기도 하다. 저서로는 『내적 탐험가들 : 당신의 삶과 일을 새롭게 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 『목적의 힘』 『삶의 기술 : 성숙한 인간과 성공한 인간』 등이 있다.


저자 : 데이비드 A. 샤피로(David A. Shapiro)

스탠드업 코미디 작가로 출발하여, 지금은 조직이나 기업을 위해, 사람이 기계의 부속품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고 있다. ‘첨단 기술’과 ‘멋진 삶’을 하나로 융합시킬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는 프로젝트를 주관하기도 했다. 현재 노스웨스트 센터에서 아이들을 위한 교육 디렉터를 맡고 있다. 그는 미국에서 새로운 시작을 위한 ‘가방 다시 꾸리기Repacking Your Bags 운동’을 펼쳤다.


역자 : 김정홍

현재 출판 기획과 집필을 주로 하고 있으며, 방송 다큐멘터리 작가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인생의 절반쯤 왔을 때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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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강의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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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지성' 고 이어령 선생이 타계한 지 2년이 넘었다. 그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순 없지만 그가 남긴 책이나 육성 강연을 통해 여전히 우리는 그를 만나기를 원한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것 외에도 그가 평생 책을 쓰고 강연을 해온 덕분이다. 이번에 독자가 선택한 책은 『이어령의 강의』다. 독자는 선생이 남긴 책은 여러 권 읽었지만 강의나 강연에 참석한 일은 한 번도 없기에 이 책은 더 애틋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선생의 힘찬 강연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올라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선생은 평생 인문학을 공부하고 인문학을 가르치며 인문학으로 우리나라의 많은 것을 발굴해 가르치고 더 나은 삶을 위해 우리가 나아갈 길을 밝혔다. 선생의 생전 모습을 그리며 우리는 여전히 그의 지혜를 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평생 “호기심이 가득 찬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자유로운 지적 유영을 멈추지 않았던 그는 마지막까지 세상에 남을 이들에게 자신의 지혜를 나누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생명 자본주의, 디지로그 등을 제시하며 빠르게 변하는 시대 속에서 우리와 이 사회가 살아남을 방법을 가르쳤다. 독자로서는 다소 낯선 단어들이지만 이 책을 통해 확실하게 알고자 한다. 이 책은 이어령의 가르침을 담은 책이다. 선생의 수많은 강연 중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 10편을 가려 모았다고 출판사 측은 밝히고 있다. “떴다 떴다 비행기”로 지금까지 회자되는 서울대학교 입학식 축사(2008)부터 ‘생명 자본주의’를 이야기한 한국선진화포럼 월례 토론회(2010), 그리고 “검은 카메라 렌즈” 앞에서 비대면으로 치러진 서울대학교 후기 학위수여식 축사(2021)까지, “전 세기의 모순과 문제를 떠안은” 채 “새 패러다임을 시작”한 젊은이들에게 이어령 선생이 전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역시 독자에게는 처음 들어본 강의 내용이다. 선생의 생전 모습을 떠올리며 그의 강연의 주제와 가르침의 본뜻을 헤아려본다.



이 책은 모두 10개의 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장은 다른 시점, 다른 장소에서 다른 청중들에게 지혜를 전달한다. 1장 〈마스크 한 장〉, 2장 〈‘뜨다’에서 ‘날다’로〉, 3장 〈여기, 즐거운 대학이 탄생한다〉, 4장 〈학문의 수원지가 마르고 있다〉, 5장 〈대학생의 창발력, 그리고 새로운 길〉, 6장 〈젊은이들의 생명 의식〉, 7장 〈가슴 뛰는 창조의 힘, 세종〉, 8장 〈새로운 시대를 여는 창조의 공간〉, 9장 〈삶을 이끄는 컴퓨팅과 신체성의 법칙〉, 10장 〈닫고 열고 넘어서는 디지로그 세상〉 등이다. 이 가운데 첫 장 〈마스크 한 장〉이라는 제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21년 서울대학교 후기 학위 수여식 축사」이다. 때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모든 집회나 대중이 모이는 것은 금지되어 있는 상황이다. 우리나라에 국한된 일이 아니라 전 세계가 공포에 떨며 나날을 숨 죽이며 보내던 때이다. 졸업식 축사라면 당연히 현장에 가서 해야겠지만 엄혹한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온라인으로 대신했다. 

이날 축사를 통해 선생은 "좋든 궂든 여러분은 비대면 강의를 듣고 학위를 취득한 최초의 그룹에 속한 졸업생입니다. 역설적으로 디지털 세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앞당겨 학습하게 되었고, 동시에 살결 냄새 나는 오프라인의 아날로그 세상이 얼마나 소중한지도 깨달았을 겁니다"라고 말머리를 꺼낸다.

그는 이어 "여러분은 디지털 공간의 '접속'과 아날로그 현실의 '접촉'이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라 그것들이 하나로 '융합'하는 '디지로그(Digitak+Analog) 시대'를 살아갈 주역이 된 것"이라고 강조한다. 즉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세상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점을 청중들에게 주문하고 있다. 더욱이 대학 졸업식 청중들은 누가 뭐래도 자신은 물론 이 나라의 미래를 이끌어갈 청년들이기에 '위기가 기회다'라는 말을 실현시킬 도전 정신과 위기 극복 의지력을 갖추기를 강조한 것으로 독자는 이해한다. 여기에 선생은 "코로나 팬데믹을 통해 나와 무관하다고 생각한 사람의 기침 하나가 내 일상을 뒤집어놓는 상황도 겪었다"고 전제하고 그 영향으로 어떤 물질적 가치보다 생명의 내재적 가치가 우선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고, 그 순간 물질 자본으로 전환하는 현장을 목격한 주인공들이라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다.



저자 이어령은 늘 '창조'의 세상을 동경했다. 또 창조의 세상에서 살았다. 누구나 창조를 할 수 있다고 격려하고 실제 자세한 설명을 곁들여 청년들을 가르쳤다. 지(知)의 최전선에서도 언제나 배움을 멈추지 않았던 선생은 단순히 지식을 쌓기 위해서가 아닌 “자기의 삶을 창조”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공부할 것을 당부했다. “배운 것을 취합해서 묻는 것”이라는 학문의 본질로 돌아가 어린아이처럼 “호기심이 가득 찬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끝없이 질문”하며 학문을 갈고 닦았고, 제자들과 이 시대 청년들에게 꾸준히 강조했다. 저자는 “이 물음이 창조의 하나의 씨앗이라고 볼 수” 있다며, 이를 통해 “종래의 패러다임을 바꿔” 뜨는 것에 그쳤던 우리의 삶을 더 높이 날아오를 수 있게 해야 한다면서도, “지혜는 지식 속에서, 지식은 정보 속에서” 죽어가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새로운 시대를 여는 창조의 공간〉이란 제목의 「2009 동아방송예술대학 석좌교수 특별강연」에서 저자는 '창조'의 정의부터 차분하게 말을 꺼낸다. "창조란 뭐냐. 그것은 넘버원이 되는 게 아닙니다. 창조에는 넘버원이 없어요. 창조는 지금까지 없었던 것 중에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니까 하나밖에 없는 거예요. 항상 창조는 하나예요. 즉, 온리원(only one). 넘버원이 아니라 온리원이 돼야 한다는 거죠."라며 창조의 세상에 발을 들여놓은 젊은이들을 격려한다. 

"여러분은 사실상 어렸을 때 전부 천재들이었어요. 왜? 끝없이 물었어요. 어머니한테 묻고, 아버지한테 묻고, 사람들한테 물었는데 그 물음을 누가 죽였나요? 어른들이 다 죽여버린 거예요. 내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교수 생활을 했습니다. 이제 그 학생들이 주부가 되어서 아이를 낳았지요. 그 학생들이 가끔 저를 찾아와서 서로 아이 키우는 얘기를 하는 걸 들어보면 공통적으로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얘, 너희 애도 그렇게 묻냐?'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물어. 귀찮아 죽겠다.'"(p.276) 저자는 자신의 제자들도 결혼하고 아이 낳아 키우면서, 아이의 호기심과 관심을 모두 외면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창조 행위, 즉 예술을 하기 위해 예술학교에 들어온 학생들에게 저자의 귀중한 한마디는 결코 지나쳐버려서는 안 될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여러분이 나이가 들고 학교에 간다는 것은 질문하는 방법을 잊어버린다는 거예요. 어른들은 새가 왜 우냐고 어린애들이 물으면 답변을 못 하면서도 부질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인간의 모든 창조는 질문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저자는 이와 함께 '문화의 힘', '언어의 힘', '예술의 힘'이 세계를 지배하는 새로운 시대에서 우리 젊은이들이 앞서 나갈 수 있는 창조의 비밀을 밝히기도 한다. 창조는 바로 ‘눈물’과 ‘외로움’을 딛고 일어선 결과라는 것이다. 저자는 〈가슴 뛰는 창조의 힘, 세종〉이라는 제목의 이 강연(「2009 세종대학교 특별강연」)에서 세종대왕도, 아인슈타인도, 퀴리 부인도 울부짖음과 상처가 있었기에 위대한 발명이 가능했다고 말한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고통과 외로움을 마주하고 그것을 극복하여 창조의 원동력으로 삼는다면 우리도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을 것임을 강조한다.

"세종대왕을 보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아인슈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 퀴리 부인, 이러한 천재들을 죽여왔느냐를 생각해봅니다. 우리에게 창조적인 사람이 없었던 게 아닙니다. 창조적인 사람을 따돌리고 못난 사람,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면서 결국에 비슷비슷한 사람들만 남았기 때문에 창조적인 발상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p.236) 


배움과 창조를 통해 젊음의 본질과 가치에 대해 전하지만, 결국에는 ‘생명’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 선생의 '생명 의식'이다.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창조해도 그 안에 '생명의 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두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세대의 젊은이들을 ‘생태 교류’를 통해 교감하는 종족이라고 표현한다. 신체감각을 활용해 개발된 아이폰(iPhone), 위(Wii) 등을 사용하고, 영화 〈아바타〉를 보며 지구인보다는 '나비족'의 편을 드는 세대. 선생은 이 세대가 기계와 산업이 '당연시된 현 문명의 프로세스를 어떻게' 생명 중심으로 변화시킬 것인지에 대해 물을 날이 머지않았다고 주장한다. 선생은 현대 사회를 생명 중심의 사회가 아닌 생명 경시의 사회로 보고 있는 듯하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은 생명에 굶주려 있습니다. 살고는 있는데 사는 게 아닙니다. (…) 자기가 살아 있다는 걸 체감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고 사람을 죽입니다. 피가 분출되는 그 상황에서 자신의 생명 존재를 느낍니다. 그들의 일상에서는 자아가 전혀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게 아날로그 결핍증이 낳은 병폐입니다." - 「젊은이들의 생명 의식」 중에서



마지막 장 〈닫고 열고 넘어서는 디지로그 세상〉은 「2009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 융합포럼」에서의 발제이다. 선생은 생명으로 가득한 세상을 꿈꿨다. “리빙(living)을 라이프(life)로” 바꾸고 “산업 기술이나 기계 기술의 패러다임, 금융자본주의의 패러다임을 생명 시스템으로 바꾸”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선생은 “평범한 생명의 생동력을 사랑하고, 울고 환호하는 생생함을 중심으로 하는 기술을 만들라”는 이야기를 덧붙인다. 모든 것은 계산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던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컴퓨터나 과학이라는 이름 밑에” 의존하지 말고 “38억 년의 기나긴 세월 속에 축적된” 자연의 지혜를 배우며, 이를 인간의 기술과 융합해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가야 함을 역설한다.


과학을 맹신하는 사람이 인간의 지혜로 생명체를 만들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만들고 나서 보니 그 결과는 괴물입니다.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자연이 만든 생명체는 아름다움과 조화가 있는데 인간이 만든 생명체는 괴물에 불과했던 것이죠. 1백 년, 2백 년밖에 안 되는 인간의 과학기술로 만든 생명이 신이 만든, 적어도 38억 년 동안의 긴 세월을 통해 만들어진 생명과 비교가 됩니까. - 「닫고 열고 넘어서는 디지로그 세상」 중에서


마지막까지 우리의 젊은이들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남을 따라가는 삶”이 아닌 나만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삶을 살기 바랐던, 이 시대의 지성 이어령 선생. 이 책 『이어령의 강의』를 읽으면서 그의 지식의 방대함에 놀랐고, 세부적이고 꼼꼼하게 거의 전 학문을 엮어내는 솜씨에 경외감을 느꼈다. 그리고 단편적인 단어에 숨어 있는 뜻과 그 말을 어떻게 살려내는지에 대한 영감도 받았다. 이 책은 언제나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나아갈 방향을 잘 잡아 열정적 노력으로 잘 살아가기를 소원했던 그의 진심이 전해져 독서의 보람도 느꼈다.

이어령 선생이 강연 중에 했던 "아마도 10년 후, 20년 후 나는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때 여러분은 필록테테스처럼 마지막 영광의 승리를 가지는, 상처와 함께 당당하게 트로이전을 승리로 이끄는 그런 숨은 활의 재능들을 꽃 피우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날을 기대하면서, 그것이 실현되리라 생각하면서 여기에서 오늘 이 이야기를 마칩니다."가 오늘 독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된다.



앞으로는 생명 자본주의가 온다는 겁니다. 금융자본주의는 돈 넣고 돈 버는 것이고, 산업자본주의는 기술 넣고 기술 버는 것이죠. 이제는 감동을 넣고 감동 상품을 만들어내는 생명 자본주의가 온다는 겁니다. 이 생명 자본주의는 선택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오는 것입니다. 컴퓨팅이 바로 생명 자본주의에 이바지할 때에 컴퓨터와 인간은 행복해질 수 있다. 그게 신체성입니다. (중략) 이런 지구에서 가장 어리석은 생물이 자연과 함께 지내려면 원폭이 떨어져도 살아남는, 공룡보다도 더 오래 산, 지구의 살아 있는 화석으로 불리는 바퀴벌레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가 배워야 할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 이런 것들이 바로 앞으로 산업이나 모든 것을 이끌어가는 하나의 중요한 데이터가 된다는 것이 컴퓨터와 신체성을 관심, 관계, 관찰의 마지막 항목으로 삼아달라는 이유입니다.(p.334) - 「삶을 이끄는 컴퓨팅과 신체성의 법칙」 중에서


저자 : 이어령(李御寧)


1933년 충남 아산에서 출생.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서울대 재학 시절 [문리대학보]의 창간을 주도 ‘이상론’으로 문단의 주목을 끌었으며, [한국일보]에 당시 문단의 거장들을 비판하는 「우상의 파괴」를 발표, 새로운 ‘개성의 탄생’을 알렸다. 20대부터 [서울신문], [한국일보], [중앙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 등의 논설위원을 두루 맡으면서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논객으로 활약했다. [새벽] 주간으로 최인훈의 『광장』 전작을 게재했고, 월간 [문학사상]의 주간을 맡아 ‘문학의 상상력’과 ‘문화의 신바람’을 역설했다. 1966년 이화여자대학교 강단에 선 후 30여 년간 교수로 재직하여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폐회식 총괄 기획자로 ‘벽을 넘어서’라는 슬로건과 ‘굴렁쇠 소년’ ‘천지인’ 등의 행사로 전 세계에 한국인의 문화적 역량을 각인시켰다. 1990년 초대 문화부장관으로 취임하여 한국예술종합학교 설립과 국립국어원 발족의 굳건한 터를 닦았다. 2021년 금관문화 훈장을 받았다. 

에세이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지성의 오솔길』 『젊음의 탄생』 『한국인 이야기』, 문학평론 『저항의 문학』 『전후문학의 새물결』 『통금시대의 문학』, 문명론 『축소지향의 일본인』 『디지로그』 『가위바위보 문명론』 『생명이 자본이다』 등 160권이 넘는 방대한 저작물을 남겼다. 마르지 않는 지적 호기심과 창조적 상상력, 쉼 없는 말과 글의 노동으로 분열과 이분법의 낡은 벽을 넘어 통합의 문화와 소통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끝없이 열어 보인 ‘시대의 지성’ 이어령은 2022년 2월 향년 89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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