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말하기 수업 - 말과 글을 무기로 바꾸는 18가지 철학 도구들
김원 지음 / 나무의철학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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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우리는 '철학'을 이야기할 때 곧잘 서양철학을 머릿속에 떠올린다. 학교에서 배운 바에 따라서다. 이에 비해 동양철학은 '철학'보다 운명을 점치는 '미신'이라는 그릇된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이 역시 잘못된 교육의 일환이라고 독자는 생각한다. 우리나라 산업화 시대에는 기술과 기능이 우선시되고 국가 발전에 실질적 도움이 된다고 가르쳤다. 짧은 시간에 큰 효과를 내기에는 기술과 기능이 더 필요했던 것 같다. 또 철학이라는 과목은 삶에 대해 말할 뿐 실제 삶에는 도움이 안 되는, 머릿속 공론(空論)에 불과하다는 주입식 교육에 의해 규정되어졌다. 물론 순수 학문인 문학과 사학도 마찬가지다. 즉 인문학보다는 과학과 기술을 장려했다. 이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의 문턱에서도 증명되었다. 

산업화 시대 이야기지만 공대나 경영학은 우대했고, 인문학은 축소되었다.

그러나 산업화가 어느 정도 궤도에 들어서고 민주화가 정착될 무렵부터 산업화 정책은 효능을 다했고 이제 필요한 것은 삶의 질을 높이는 인문학이 더 중요시됐다. 서구 선진국들이 그랬듯이 당연한 절차인지도 모르겠다. 순서나 효과에 대해서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 토론으로 해결될 일은 아니다. 어떤 학문이든 인류가 필요해서 키워왔고, 장려했던 학문은 우리 삶에 필수불가결한 것들이다. 다만 시대 상황에 따라 중점을 두었던 부분이 다를 뿐이다. 

이 책 『철학자의 말하기 수업』은 단순한 말하기·글쓰기 기술서가 아니다. 즉 자기계발서가 아니라는 의미다. 우리가 잘 아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서양의 고대 철학자들의 사고법을 빌려 누구나 말과 글을 설득의 무기로 바꿀 수 있는 18가지 도구를 제시하고 있다. 이들 위대한 철학자가 남긴 논리와 설득의 원리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해, 독자들이 일상 속에서 곧바로 활용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저자 김원은 "철학자들의 말하기는 단순한 정보 전달이 목적이 아니라 함께 더 나은 답을 찾는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은 당연한 답을 다시 묻고, ‘무지의 지’를 인정함으로써 대화를 탐구의 장으로 이끈다. 탈레스는 주장을 명료한 한 문장으로 세우고 타당한 근거로 강화했으며, 밀레토스 학파는 올바른 비판을 통해 상대의 주장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탄탄하게 만들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갈등과 충돌을 피하지 않고 변증법으로 새로운 길을 찾았고, 플라톤은 스토리텔링과 사고실험을 통해 논리를 생생하고 설득력 있게 전달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귀납과 연역을 조화시켜 논리를 체계화하는 동시에, 말과 글은 반드시 윤리적 토대 위에 있어야 신뢰를 얻는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철학자의 도구는 상대를 꺾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함께 더 나은 결론을 향한 길을 걸으며 신뢰와 가치를 만들어내는 힘이다. 이 책은 단순한 말솜씨가 아니라, 당연한 답을 의심하고 새로운 관점으로 문제를 재정의하며, 설득을 통해 더 나은 답에 도달하는 사고 훈련을 담았다는 점에 독창성을 보여준다. 

즉, 이 책의 차별성은 ‘철학=어려운 이론’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철학자들의 생각법을 일상의 대화와 글쓰기 상황에 곧바로 적용할 수 있도록 풀어냈다는 점이다. 면접이나 논술 시험처럼 한 문장으로 핵심을 표현해야 하는 순간, 회의나 보고서에서 반대 의견을 설득해야 하는 순간,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순간마다 철학자의 도구는 유용하게 쓰인다. 이 책은 이로써 일상의 대화나 회사에서의 보고서와 발표 등 모든 말하기와 글쓰기에 적용 가능한 실천적 철학을 제시한다. 단순한 전달이 아니라 사람을 이해시키고 움직이는 설득력, 그것이 철학자의 말하기 기술의 핵심이다.



저자는 이와 함께 철학자들의 사고법이 단순히 논리 훈련에 그치지 않고, 타인을 존중하며 더 나은 결론을 찾는 대화 윤리를 담고 있음을 강조한다. 승부의 대화가 아닌 공동 탐구의 대화, 상대를 꺾기 위한 반박이 아닌 함께 세워가는 비판은, 오늘날 분열과 갈등이 첨예한 사회에서 더욱 절실한 가치다. AI가 글을 쓰고 논리를 흉내 내는 시대에도, 문제를 새롭게 정의하고 본질을 꿰뚫는 사고력은 인간만이 가진 무기가 될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이 책은 바로 그 무기를 단련할 수 있는 가장 실용적인 철학 입문서이자, 독자 각자가 자신의 말과 글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공고히 다져가는 데 도움을 주는 길잡이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 책 『철학자의 말하기 수업』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거나 지식을 나열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상대의 사고를 흔들고 기존의 확신을 뒤집어 문제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 진정한 설득이라고 본다. 말과 글의 궁극적인 목적이 ‘설득’임을 다시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책에 따르면 철학자들의 대화 방식은 언제나 상식에 균열을 내는 질문에서 시작됐다. 소크라테스는 모두가 당연하게 믿는 답을 의심하며, 그 과정에서 숨겨진 모순을 드러냈다. 파르메니데스는 일상의 논리가 절대적이지 않음을 보여주며, 다른 전제를 세우면 새로운 결론이 도출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플라톤은 사고실험을 통해 막연한 믿음을 검증 가능하게 바꾸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귀납과 연역을 교차시켜 사소해 보이는 문제에서도 보편적 원리를 끌어냈다.

이에 따라 철학자의 사고법은 문제를 다시 정의하고 핵심에 도달하는 훈련이다. 피상적인 답변에 그치지 않고 ‘왜 그럴까?’라는 물음을 반복해 들어가면, 기존의 상식이 흔들리고 새로운 시각이 열리게 된다. 그 과정에서 탄생하는 말과 글은 단순한 주장이나 설명이 아니라, 상대를 설득하고 행동으로 이끌어내는 힘을 갖는다. 결국 철학자의 사고법은 말과 글을 논리적으로 정련하는 방법일 뿐 아니라, 기존의 틀을 넘어서는 설득의 무기다.



이 책은 그 무기를 다루는 훈련을 통해, 독자가 일상과 일터에서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짚고 설득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도록 돕는다. 저자는 「철학자들의 말과 글은 무엇이 다를까」란 제목의 〈서문〉에서 "말과 글은 학교에서 충분히 배워서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고 전제한 뒤, "그러나 말과 글은 부품을 설계도대로 정확하게 끼워 넣는 프라모델 만들기가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자유롭게 조합하여 그때그때 새로운 작품을 창조하는 블록 만들기에 가깝다고 저자는 말한다. "설득의 구조와 방법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를 알고, 형식 간에 서로 이가 맞물리는 원리를 이해해야 제대로 응용하는 말하기, 글쓰기를 할 수 있다."(p.7, 존칭어는 상용어로 변환, 독자)

저자는 또 인간이 말과 글로 사람과 소통하는 이유는 더 나은 답을 찾기 위해서라고 단언한다. 올바름을 지향하지 않는 말과 글은 소통이 아니라 이기려고 하는 게임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말과 글에서 중요한 '무엇을, 어떻게, 왜'라는 질문에 대한 훌륭한 답은 철학에 있다는 게 저자의 확고한 신념이다. 저자가 말과 글을 철학자들이 잘 이용하는 것은 '그들의 생각'이라고 말한다. "철학자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고, 설득의 내용도 될 수 없엇.던 당연함이라는 돌멩이들을 손에 쥔다. 그리고 처음 보는 사람처럼 들여다보며 깊은 생각을 거듭한다. 어느 순간, 길가의 돌멩이가 보석처럼 반짝이기 시작한다. 여기서 '이 돌멩이의 참된 모습이 무엇이며, 돌이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라는 질문이 떠오른다. 철학적 존재론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이후 철학자는 이것이 진짜 돌인지 보석인지를 판단해본다. 이때 돌과 보석을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을 인간이 가지고 있는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다른 동물이라면 돌이든 보석이든 먹을 수 없는, 같은 물체로 여길 테니까.'인간은 보석과 돌멩이를 구분할 수 있을까? 돌이 아니라 보석이라는 주장이 참인지를 알아낼 수 있을까? 돌이 아니라 보석이라는 주장이 참인지를 알아낼 수 있을까? 인식론은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또한 돌과 보석은 서로 다른 '가치'를 지닌 존재로 평가된다. 여기서 미적·윤리적 판단을 다루는 가치론이 나온다. 철학은 당연한 것을 의심함으로써 존재론, 인식론, 가치론 같은 분과를 발전시켜왔다."(p.8)



저자는 철학을 배운다면 아이디어가 하늘에서 떨어지길 기다리는 대신, 구체적인 주제와 내용을 만들 수 있다고 강조한다. 철학의 생각법은 길가의 돌멩이를 주워 새롭게 탐구하듯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문제를 다시 끄집어내어 설득이 필요한 주장과 아이디어로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시험장에서 설득이 어려운 주제가 주어져도 철학자의 생각법을 알고 있다면 '좋은' 글감으로 바꿀 수 있다고 저자는 책을 통해 말하고 있다. 이 책의 첫머리에 가장 먼저 '소크라테스의 생각법'을 담은 이유다. 

저자는 책 출간 후 가진 인터뷰에서 "철학적 사고법을 익히면 자신감이나 표현력에 어떤 변화가 생기나요?"란 질문에 대해 "자신감은 주장과 비판의 원리를 이해할 때 생겨납니다. 주장과 비판을 캄캄한 동굴 속에서 손을 맞잡고 이쪽이 출구일까를 논의하는 길 찾기 과정으로 생각하는 것이죠. 철학적 사고법을 통해 논리적인 근거로 주장하고 정당한 비판은 수용하면 되니까요. 문제는 상대가 틀린 답을 고집하는 순간인데 그럴 때는 엘렝코스 같은 논박을 펼칠 수도 있고, 문제 해결형 스토리텔링과 비유 등으로 상대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책에서는 다양한 사례와 함께 그 방법을 다루고 있습니다."라고 응답했다.

이 책은 모두 3부 20장(章)으로 이뤄져 있다. 1부 〈이제 당연한 생각은 그만두자: 단단한 생각의 갑옷을 벗기는 철학자의 사고법〉, 2부 〈말과 글의 목표는 설득이다: 상식적인 주장을 뒤집는 말하기〉, 3부 〈쓰는 순간, 당신의 철학이 드러난다: 나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드는 글쓰기〉 등이다. 1부에서는 「소크라테스- ‘무지의 지’ 사고법」, 「탈레스- 강한 주장을 완성하는 근거 만들기」, 「밀레토스 학파- 주장을 강화하는 비판하기」, 「헤라클레이토스- 해결책을 찾기 위한 변증법」 등 모두 8장에 걸쳐 철학자의 사고법을 설명하고 있다. 2부에는 「파르메니데스- 상식적인 논리를 의심하는 사고방식」, 「플라톤- 문제 해결형 스토리텔링」, 「플라톤- 비판적 성찰을 위한 사고실험」 등 6장이 이어진다. 마지막 3부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좋은 논리는 귀납과 연역에서 나온다」, 「아리스토텔레스- 귀납법 활용 시 3가지 유의 사항」, 「아리스토텔레스- 윤리적으로 주장하기」 등 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심으로 6장의 말하기 기술이 소개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독자들이 꼭 알고 넘어가야 할 말은 앞서 언급한 인터뷰에서 독자들에게 당부한 내용이다. "이 책은 유려한 화법과, 화려한 문체, 상대를 이기는 대화법에 앞서 더 근본적인 원리를 철학에서 찾아내고자 했어요. 바로 생각입니다. ‘저 사람 말을 참 잘해, 글을 잘 써’라는 칭찬도 좋지만, ‘저 사람의 생각, 그리고 생각하는 방식이 참 좋아’라는 말을 들을 수 있게 쓰고자 노력했습니다. 기술적으로 무언가를 잘하면 인정받고 끝날 때가 많습니다. 기술적으로 잘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설득하고 움직이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좋은 말과 글입니다. 이 책을 통해 저와 함께 철학자들이 만든 좋은 생각의 길을 따라 함께 걸어가면 좋겠습니다."


올바른 비판은 문제점을 지적해서 기존 주장을 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아이디어를 살려 더 강하게 만드는 과정입니다. 요컨대 비판은 주장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에 의해 제기되어야 하며, 구체적인 상대가 있다는 점에서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또한 비판은 나 자신에게 가장 먼저 적용되어야 합니다. 상대의 주장을 들을 때 무조건 ‘아니다’라고 부정하지는 않았는지, 비판을 우월감의 기회로 삼지는 않았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주장과 비판은 결국 같은 목표를 향한 대화 과정입니다. 올바른 비판의 방법을 배우고 활용한다면 우리는 더 나은 사고와 결과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p.89)


설득은 단순히 논리적으로 말하는 것만으로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설득은 상대의 마음을 여는 것에서 시작되며, 그 다음에야 비로소 논리가 힘을 발휘합니다. 회사에서 기획안을 발표하거나 학교 과제를 발표할 때, 우리는 흔히 논리적인 구성과 근거 제시에만 집중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상대가 이야기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도록 만드는 것, 즉 마음을 여는 것이 설득의 첫 단계입니다. 이때 효과적인 도구가 바로 유머와 공감입니다.(p.145)


저자 : 김 원


문화콘텐츠학 박사, MBC에 입사해 문화공연과 콘텐츠 기획, 뉴미디어 전략, 편성 PD 등의 업무를 해왔고, 콘텐츠 프로모션 부장과 시청자커뮤니케이션 부장을 거쳤다. 한국외대와 중앙대에서 각각 외래 및 겸임교수를 역임하였고, 다양한 콘텐츠 이론과 미디어 스토리텔링을 가르치면서 대중문화 현장에서 얻은 실무적 통찰과 학문적 연구를 접목해왔다.

또한 여러 기관과 교육 현장에서 글쓰기, 문학, 영상 콘텐츠 평가를 맡아온 그는, 사고의 힘을 키우고 자신만의 목소리를 설득력 있게 전하는 방법에 꾸준히 천착해왔다. 단순한 말하기 기술이 아니라, 상대를 이해시키고 움직이게 하는 지적 도구로서의 언어를 탐구하며, 그 해답을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사유의 방식에서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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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내게 가르쳐 준 것들
홍석현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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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이 책 『인생이 내게 가르쳐 준 것들』의 표제어를 보면, 문득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란 책 제목이 생각난다. 지금은 활동을 쉬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한때 대한민국 불교계와 출판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혜민 스님이 썼던 책의 제목이다. '300만 독자의 선택'. '2012, 2013 종합베스트셀러 최장기간 1위', '네티즌의 뽑은 올해의 책 1위', '선물하기 좋은 책 1위', '도서관 대출순위 1위' 등 출판계의 수많은 기록을 세우며 독자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던 에세이다. 미국, 영국, 중국, 러시아, 스페인, 독일, 브라질 등 전 세계 26개국에 판권이 수출되었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떠들썩한 시간들과 바쁜 삶에서 한숨 돌리고 싶은 독자들에게 완벽한 책”(퍼블리셔스 위클리), “지혜의 보석으로 가득 차 있는 책”(타라 브랙),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영원한 행복을 찾는 방법을 안내해주는 책”(릭 핸슨), “사랑스럽고 실용적이며 친절한 책”(잭 콘필드) 등 미국 언론과 작가들의 호평을 받은 바도 있다. 

편안하고 따뜻한 소통법으로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동네 스님’ 혜민 스님은 이 책을 통해 관계에 대해, 사랑에 대해, 마음과 인생에 대해,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으론 잘 안 되는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해나갈 수 있도록 돕는다는 서평가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은 바 있다. 독자는 이 책을 두 번이나 읽었다. 그 내용이 좋아서라기보다 읽는 동안 몰입할 수 있었고, 또 그만큼 마음이 편안해서였다. 그러나 저자인 혜민 스님이 크게 성공하자마자 물욕에 휩싸여 그가 수행해 얻은 스님으로서의 명성은커녕 그의 인성에 대해서까지 온통 비난 일색이었다. 심지어 2008년 이후 '안거 수행'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인터넷 상의 악소문이 끊임없이 떠돌았다. 독자는 불교 신자도 아니어서 더 이상 마음 아파하지 않았지만, "마음이 힘들 때, 위로받고 싶을 때, 용기 내고 싶을 때 펼쳐보면 좋은 책"의 저자로서 기억에는 남아 있다.



이 책 『인생이 내게 가르쳐 준 것들』은 홍석현 중앙홀딩스 회장이 자신의 삶의 여정을 뒤돌아보며 얻은 삶의 지혜를 정리한 에세이집이다. 저자는 작가로보다는 기업 CEO로 훨씬 잘 알려진 인물이다. 특히 그는 해방 후 대한민국 국적으로 태어나 해외 유학에 오른 '1세대 글로벌 리더'로 더 유명하다. 더욱이 중앙일보, JTBC 등 중앙미디어그룹을 이끌며 국내 미디어 산업의 발전과 개혁을 이끌어온 사실로 훨씬 큰 명성을 쌓았다. 『인생이 내게 가르쳐 준 것들』(중앙북스)은 1세대 글로벌 리더, 혁신적 CEO 등 거대 담론 차원이 아닌, 삶의 체험에서 길어낸 진솔한 고백과 성찰을 통해 독자들에게 지혜, 리더십, 영성을 전하기 위해 펴냈다. 대한민국 사회의 격변기 속에서 1세대 글로벌리스트로서 쌓아온 경험과 세계적 지도자들과의 교류 등 독창적이며 흥미로운 서사를 가득 담았다.

저자 홍석현은 시작부터 화려했지만 1977년부터 7년간 세계은행(IBRD) 이코노미스트로 일하다 귀국해 1983~85년 재무부와 청와대에서 근무했고, 삼성을 거쳐 1994년 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했다. 이후 중앙일보·JTBC 회장, 세계신문협회(WAN) 회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 현대사의 흐름과 삶을 함께했다. 저자는 이 책에서 그동안의 삶의 긴 여정을 되돌아보며, “삶을 돌아보는 것은 곧 삶을 돌보는 일”이라 말한다. 자신의 개인적 성장과 사회의 발전, 그리고 영성의 회복이라는 세 가지 축으로 현재의 자신과 독자들에게 울림 있는 메시지를 전한다. 대한민국 대표 미디어 그룹을 이끌어온 성공한 미디어 리더의 다양하고 생생한 일화와 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업가로서의 고뇌와 통찰, 화려한 이력 뒤에 숨은 한 개인의 솔직한 내면과 고민, 또 이를 극복하기 위한 종교적인 성찰을 모두 담은 책으로 독자들의 궁금증을 자아낸다.



저자는 「돌이켜 볼 때 비로소 알 수 있는 것들」이란 제목의 〈서문〉에서 경영 일선에서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는 '인생 성찰'의 시간을 갖기로 하고, 집필을 결심했다고 밝힌다. 거대 담론을 펴고 오랫동안 언론사를 경영하면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나아갈 바를 제언하고 싶었다는 것. 그러나 주위 사람들의 많은 조언을 구하는 과정에서, 욕심을 버리고 젊은이들에겐 차라리 그간 크고 작은 일들을 겪으며 알게 된 삶의 구체적 지혜를 전하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털어놓는다. 저자는 "인생에는 긴 세월에 걸쳐서 경험이 쌓이고 생각을 거듭해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게 있다. 그러한 앎은 그 사람의 삶에서 우러나온 고유한 문양과도 같다. 현장에서 물러나서 산책하고 명상하면서 인생이 내 영혼에 남긴 문양은 도대체 무엇일까를 자주 생각하던 참이어서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고 고백한다.(존칭어를 평상어로 고쳐씀, 이하 동, 독자)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유학길에 오른 첫 세대에 속하는 저자는 미국 유학 시절 받았던 문화적 충격, 그중에서도 자유로운 분위기, 세계적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눈 등은 이후 삶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설명한다. 저자에 따르면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서는 세계은행에 취직해서 일하면서 글로벌 경험을 더 쌓았고, 그렇게 미국에서만 12년을 보냈다. 귀국해서는 정부, 국책 연구기관, 기업과 언론에서 일했다. 외교관 생활도 했다. 환경의 뒷받침 덕에 혹은 운명이 이끄는 대로 가다 보니 우리 세대에서 누구보다 일찍, 그리고 다양하게 세계를 경험한 편이다. 다야앟ㄴ 글로벌 네트워크를 쌓으며 '국제성'에도 눈떴다. 덕분에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남달랐다고 자부한다. 그리고 이것이 일과 삶에서 항상 최우선이었다. 나를 이끌어준 힘이 된 셈이다. 누구도 실패와 좌절은 피할 수 없으나, 넓게 생각하고 멀리 본다면 인생 여정에서 결국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음을 믿는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전에 많은 생각을 했지만, 연대기적 회고록이 되는 걸 피하고 삶이 가르쳐준 것들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기로 결심했다고 역설한다. 이런 결심으로 기억의 갈피에 숨어 있던 숱한 사람들을 떠올렸고, 인생 흐름을 바꾸었던 일들을 되새겼다. 덕분에 머릿속에서 절대 잊을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이 보여준 통찰과 지혜들을 모을 수 있었다. 인상 깊게 남았던 만남들, 깨달음을 가져다준 일들이 되살아났다. 가능한 한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이야기를, 진솔하고 담담하게 쓰려고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막상 자료들을 모으고 집필을 앞두고 생각을 정리할 때, 확실히 인생엔 돌이켜 볼 때만 비로소 알 수 있는 게 있는 듯하다고 말하게 됐다고 설명한다.

이 책은 〈성장〉, 〈품격〉, 〈영성〉 등 세 부분으로 나누어 1차 원고를 완성했지만, 막상 출간하려니 망설여졌다고 털어놓기도 한다. 공연히 종이만 낭비하고 마는 게 아닐까 걱정이 앞섰다는 것이다. 특히, 3장 〈영성〉 부분에 대한 고민이 컸다고 한다. 평생 영성이란 문제를 깊이 고민하며 살아왔지만, 자칫 미숙한 생각을 세상에 들키는 게 아닐까 부끄럽고 두렵기도 했다고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그러다 솔직하게 썼으니,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솔직함의 미덕으로 읽어주시리라 믿고 용기를 냈다고 귀띔한다.

'솔직함으로 승부한다'는 심정을 굳히자 원칙을 내세우는 게 한결 편해졌다. "책을 쓸 때 가장 경계한 것은 인생 회고에서 흔히 나타나는 자기 미화와 포장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솔직하고 꾸밈없이 인생에서 얻은 귀한 것들을, 특히 젊은 독자들과 나누고 싶다는 마음으로 썼다. 독자들이 삶을 설계할 때나 현실의 벽에 부딪혔을 때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찾을 수 있다면 더할 수 없이 기쁘고 보람될 것이다."(p.9)

저자는 이와 함께 이 책이 자신의 가족들이 가장 먼저 읽었으면 좋겠다고 속뜻을 내비친다. 아이들과 손주들이 내 아버지는, 할아버지는 이런 사람이었구나, 이런 생각을 하고 살았구나, 자세히 알게 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털어놓는다. 아마 그동안 아버지로서, 할아버지로서 속뜻을 내비치지 못하고 마음속에만 담았던 말들이 많았나 싶다.



이 책은 앞서 언급한 대로 〈성장〉, 〈품격〉, 〈영성〉 등 3장(章)으로 나뉘어 있다. 1장 〈성장〉에서는 13개의 소항목으로 나뉘어 에피소드와 삶의 역정을 담아냈다. 싱가포르 리콴유 총리와의 만남, 이건희 삼성 회장과 함께한 시간 등 세계 지도자와 기업가들에게서 배운 리더십의 본질과 도전 정신이 담겨 있다. 2장 〈품격〉에서는 인간관계와 습관, 대화의 태도와 같은 삶의 내면적 자질을 강조하고, 3장 〈영성〉에서는 “왜 사는가”라는 인생의 근본적 물음을 던지며 나눔, 행복, 중도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저자는 특히 “비평가가 되지 말고 주인으로 살라”, “조건 없는 행복만이 진짜 행복이다”와 같은 메시지를 전하며, 남의 기준이나 외적 성취가 아닌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이야말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지혜라고 강조한다. 책 속에는 개인적 경험과 함께 세계 무대에서 체득한 글로벌 감각이 어우러져 젊은 세대에게는 인생의 길잡이로, 기성 세대에게는 삶을 다시 돌아보는 거울로 다가선다.

또한 저자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영성”이라고 고백하며, 가족과 독자, 그리고 후대에 전하고 싶은 진심을 글로 남겼다. 이 책은 화려한 이력 뒤에 숨겨진 한 사람의 솔직한 기록이자, 더 나은 어른으로 살아가기 위한 성찰의 결과물이다. 인생에서 행복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물음을 거듭하거나, 스스로 주인이 되어 주체적으로 사는 삶을 꿈꾸는 이들, 그리고 품격 있는 리더십을 고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따듯한 나침반이 되어 줄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나는 보수 쪽 언론사를 운영해 왔고, 스스로를 진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보수는 극우 민족주의와는 결이 다르다. 내가 생각하는 보수는 전통을 존중하고, 언어와 생각에 품위가 있고, 타인을 억압하지 않는 범위에서 개인 자유를 최대한 존중하는 것이다. 따뜻하고 합리적이며 열린 보수다.(p.181)


부나 권력에 대한 갈망은 목이 마를 때 소금물을 들이켜는 것과 같다. 마실수록 목이 타고 갈증이 커져 더 많은 물이 필요하다. 처음엔 명품 가방이 탐나지만, 나중엔 온몸을 명품으로 꾸미고 싶어진다. 처음엔 하나면 만족할 것 같았으나 나중엔 열 개, 백 개를 가져도 더 가지고 싶다. 성공도 마찬가지다. 작은 성공은 점점 더 큰 성공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진다. 갈망은 두려움도 불러온다.(p.242)


저자 : 홍석현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기고와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산업공학 석사와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해방 후 대한민국 국적으로 태어나 해외 유학에 오른 첫 세대다. 1977년부터 7년간 세계은행(IBRD) 이코노미스트로 일하다 귀국했다. 1983~85년 재무부와 청와대에서 근무했고, 삼성을 거쳐 1994년 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했다. 중앙일보·JTBC 회장, 세계신문협회(WAN) 회장 등을 역임했고 2005년 주미대사를 지냈다. 현재 중앙홀딩스 회장, 재단법인 한반도평화만들기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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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 - 바스티유의 포성에서 나폴레옹까지 북캠퍼스 지식 포디움 시리즈 5
한스울리히 타머 지음, 나종석 옮김 / 북캠퍼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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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스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프랑스 혁명'은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요새를 무너뜨린 포성으로부터 시작됐다. 이 혁명으로 프랑스는 '절대 왕정'을 끝내고 근대 민주주의의 서막을 열었다. '바스티유'부터 약 5년에 걸쳐 발생한 시민에 의한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는 물론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건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이 책 『프랑스혁명』은 거대한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1799년 나폴레옹 집권까지 이어진 10년의 격동기를 정치, 사회, 문화 전 영역에 걸쳐 압축적이면서도 치밀하게 그려낸다. 혁명 전야의 위기에서 시작해 민중 봉기, 국가 재편, 문화 실험 그리고 쿠데타로의 종결에 이르기까지 숨 가쁜 역사의 흐름을 독자는 한 권의 책 안에서 따라가고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 한스울리히 타머는 바스티유부터 1799년 나폴레옹 집권까지, 10년 동안 프랑스를 뒤흔든 정치, 사회, 문화의 거대한 변화를 압축적이면서도 정밀하게 담아냈다. 특히 저자 타머는 독일어권에서 널리 읽히는 프랑스혁명 연구자로, 혁명이라는 정치적 사건을 명확하게 서술하면서 농민 봉기, 상퀼로트 운동, 혁명 의례와 상징, 언론과 출판 등 문화적 요소까지 폭넓게 조망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저자는 전통적 분석과 현대적 시각을 균형 있게 매치한 저자의 시선은 혁명을 단순한 연대기가 아닌, 구조와 맥락이 살아 있는 생생한 이야기로 만들고 있으며, 과거의 사건을 복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유와 평등, 인간 존엄이라는 가치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울림을 주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제헌의회의 개혁과 입헌군주제 실험, 전쟁과 민중 봉기, 산악파 집권과 테러 정치 그리고 테르미도르 이후의 정치적 혼란과 나폴레옹의 쿠데타까지, 혁명의 모든 국면이 이 한 권의 책에 담겼다. 이 책의 역자 나종석은 “전문용어들을 옮길 때에는 국내 학계의 관행을 존중하며 원어의 의미가 훼손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역사적 맥락을 살린 용어를 선택했고, 전공 학생뿐 아니라 일반 독자 모두 읽기 쉽도록 문장을 다듬었다."고 조심스럽게 밝힌다.



프랑스 혁명(la Révolution française)은 프랑스 내부뿐 아니라 유럽 전역과 멀리 미국까지 영향을 받았고, 미치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은 좁은 의미로 1789년 7월부터 1794년 7월까지 5년에 걸쳐 발생한 프랑스의 자발적 시민혁명이다. 루이 16세(재위 1774~1792)의 정부는 미국독립혁명을 지원한 군사비 등, 장기에 걸친 누적 적자로 고심해 온 절대군주정은 1788년에 문제해결을 위해 전국 3부회의 소집을 결정한다. 다음 해 5월에 개최된 회의에서는 처음부터 승려 및 귀족신분과 제3 신분*간의 대립이 나타났지만 결국 후자의 주도로 ‘국민의회’라는 명칭으로 바뀐다. 의회 밖에서는 겨울 한파의 영향으로 곡물가격의 폭등에 고심하는 민중의 소동에 대비한 국왕 군대의 결집과 재무총감 네케르의 파면 시 7월 14일에 자기방위용 무기를 구하기 위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다. 이것이 프랑스혁명의 발단이다.

농민의 반란이 전국으로 확대되는 것과 병행하여 의회에서는 봉건제도의 폐지,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의 채택, 교회 재산의 국유화 등 다양한 조치가 실시된다. 무엇보다 제3신분이 ‘무엇인가’가 되는 길을 열고 2년 후인 1791년 9월에는 프랑스를 입헌군주정으로 하는 헌법을 완성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외에서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1792년 4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에 대해서 선전포고가 이루어졌다. 전황이 진척되지 않아 위기감이 높아진 민중은 8월 10일 결국 왕궁을 점거하여 왕권을 정지시키기에 이른다. 9월에는 9월 학살과 바르미에서의 역전적인 승리를 거쳐 새롭게 구성된 의회인 국민공회는 공화정을 선언한다.

* 제3신분: 프랑스 혁명 전의 프랑스 사회는 제1신분, 제2신분, 제3신분 등 세 개의 신분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1신분은 성직자, 제2신분은 귀족으로 토지와 관직의 독점, 면세 혜택이 있었다. 이에 비하여 시민·농민·수공업자·소상인 등 귀족과 성직자를 제외한 프랑스 국민 전체를 지칭하는 제3신분은 국가의 재정 대부분을 부담하는 등 무거운 과세의 대상이면서 참정권이 없었고 지위 보장도 되지 않았다. 이러한 신분 제도의 모순은 프랑스 혁명의 발발 원인이 되었다.



당초 존재했던 의회 내에서의 당파 대립은 다음 해 초기에 국왕 루이 16세의 처형을 거쳐 더욱 강해졌다. 이어 6월에는 몽테뉴파가 지론드파에게 승리하여 1793년 헌법이 공포되었지만 전쟁의 계속과 혁명의 급진화 속에서 10월에는 헌법의 실시는 ‘평화의 도래까지’로 연기되어 로베스피에르를 정점으로 하는 공안위원회의 독재가 실시돼 다음 해 7월까지 이른바 '공포 정치'가 이어졌다. 뒤이어 로베스피에르 등을 타도한 것이 테르미도르의 쿠데타이며 그 후 1795년에는 새로운 헌법에 기초한 총재 정부가 성립한다. 이리하여 부르주아지 주도의 정체가 혁명을 종결시키고 사회에 안정을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반대였다. 1799년에 시에스 등의 도움을 얻은 보나파르트가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를 일으켜 결국 프랑스를 제정(帝政)에서 밀어냈다. 지금까지는 약 10년 간의 프랑스 혁명 후 정세를 짚어본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프랑스 혁명의 출발을 알린 바스티유 감옥은 왜 도화선이 됐을까? 흔히 정치범이나 정적을 가둬두는 '정치범 수용소' 역할을 했을 것으로 쉽게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습격 사건 당인엔 고작 일곱 명의 죄인에게 생각지도 못한 자유를 안겨 주었다. 그것도 경제사범에다가 정신이상자, 성범죄자뿐 국사범에 해당하는 인물은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바스티유(Bastille)는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던 1789년 7월 14일 무장 시위대에 의해 습격을 받고 그곳에 감금되어 있던 죄인들이 방면된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시위대의 기대와는 달리 고작 일곱 명의 죄인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렇다면 바스티유는 본래 감옥으로 축조된 것일까? 아니다. 감옥이 시위대에 의해 점령되기 약 450년 전인 1370년 〈백년전쟁〉의 와중에 프랑스 왕 샤를 5세는 영국의 공격으로부터 파리를 보호하기 위해 공고한 요새를 건립하기로 했다. 바스티유라는 명칭 또한 ‘작은 요새’를 뜻하는 ‘바스티드(bastide)’에서 비롯되었다.



백과사전 등에 따르면 요새로 지어진 바스티유를 감옥으로 사용한 것은 루이 13세 아래서 총리를 지낸 리슐리외(Richelieu, 1585~1642) 추기경이었다. 그래도 요즘 감옥과는 달리 썩 많은 사람을 구금하지는 않았다. 리슐리외는 말이 추기경이지 프랑스의 국무장관과 총리를 지냈고, 절대 왕권의 확립을 위해 온몸을 바쳤으며 복잡한 역학 관계에 놓여 있던 근대 유럽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주도권을 제압하는 동시에 프랑스를 유럽의 중심에 놓기 위해 노력한 외교관이기도 했다. 그는 가톨릭을 대표하는 추기경이었지만 자신이 목표한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톨릭 편과 프로테스탄트 편을 넘나들었다. 그런 까닭에 그는 배신자라는 명칭을 여러 곳에서 들어야 했다.

이러한 그의 성향을 감안한다면 관용을 베풀어야 할 성직자가 바스티유를 감옥으로 처음 전용하여 구체제의 대명사로 일컬어지게 만든 과정을 이해할 만하다. 그리고 바스티유는 그 명성에 걸맞게 볼테르, 디드로 같은 저명인사들을 구금한 경험이 있는데, 이는 국사범을 주로 투옥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감옥은 파리 시민들이 생각하는 감옥과는 꽤 거리가 멀었던 듯하다. 자신이 사용하던 가구를 들여놓는 것은 물론 요리사를 고용해 풀코스 요리를 즐기기도 했다니 감옥인지 별장인지 혼동할 만하다. 이러한 사정은 바스티유 감옥이 공격을 받던 날에도 예외는 아니었다는 점은 앞서 밝힌 바대로다. 

다만 금서들도 이곳에 보관하고 있었고, 이러한 역할만으로는 건축물을 유지하는 데 돈이 너무 많이 들었다. 따라서 1784년에는 건물을 폐쇄하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789년 바스티유는 군중의 공격을 받았고, 군중들은 감옥 소장 베르나르 조르당에게 무기와 탄약의 반출을 요구했다. 두려움에 질린 소장이 몸을 피하자, 격분한 군중들은 감옥을 점령했다. 이로써 프랑스를 지배하고 있던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 즉 구체제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고, 바스티유 또한 뒤를 이은 혁명정부에 의해 철거되기에 이른다.


1789년 7월 14일, 파리의 바스티유 요새가 무너진 순간, 세계사는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날 울린 포성은 왕정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였을 뿐 아니라, 자유와 평등, 시민권이라는 새로운 정치 질서의 서막이었다. 프랑스혁명은 프랑스 내부의 변혁에 머무르지 않았고, 전 유럽, 더 나아가 전 세계에 민주주의와 인권의 보편적 가치를 깊이 각인시킨 사건이었다. 

독일어권에서 오랫동안 프랑스 역사를 연구해온 저자 한스울리히 타머는, 이 책 『프랑스혁명』에서 사건 중심의 정치사를 기반으로 하되 문화사와 사회사를 가로지르며 최신 연구 성과를 반영하고 있다. 루이 16세의 재판과 처형, 지롱드파와 산악파의 권력 다툼 같은 정치 사건은 물론, 혁명 의례와 축제, 언론과 출판, 심지어 복식과 거리 풍경까지 폭넓게 다루면서 독일 역사학 특유의 깊이 있는 분석을 더한다. 이러한 접근은 혁명을 하나의 ‘살아 있는 역사’로 복원하는 효과를 내며, 이를 통해 독자들은 ‘혁명’이 단순한 권력 교체가 아니라 생활세계 전반을 재구성하는 거대한 흐름이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혁명의 전 과정을 추적하는 이 책은 모두 8장(章)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앙시앵레짐의 위기〉, 2장 〈세 가지 사건(1789년 여름)〉, 3장 〈프랑스의 재구성(1789~1791년)〉, 4장 〈두 번째 혁명(1792년)〉, 5장 〈부유하는 혁명(1793년)〉, 6장 〈테러: 혁명의 방어인가, 이데올로기의 지배인가?〉, 7장 〈혁명의 정치 문화〉, 8장 〈혁명이 끝나다(1785~1799년)〉 등이다. 1장과 2장은 18세기 말 위기의 프랑스, 전국신분회 소집과 제3신분의 각성, 바스티유 함락과 봉건제 폐지, 인권선언 채택까지의 ‘혁명의 서막’을 다룬다. 3장과 4장은 제헌의회의 개혁과 입헌군주제 실험, 왕의 바렌 도주 사건, 전쟁과 민중 봉기, 1792년 공화국 선포로 이어지는 과정을 그린다. 5장은 루이 16세의 재판과 처형, 지롱드파와 산악파의 대립, 상퀼로트와 결합한 혁명정부의 수립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6장은 공안위원회 주도의 테러 정치와 로베스피에르의 몰락을 다루고, 수많은 희생의 정치적, 군사적 맥락을 분석한다. 7장은 혁명이 만들어낸 새로운 문화적 실험을 보여주며, 8장은 테르미도르 이후 온건 공화정, 총재정부의 정치 불안, 왕당파와 좌파의 반격, 1799년 브뤼메르 쿠데타로 막을 내리는 혁명의 종결을 서술한다.



프랑스혁명사는 언제나 역사 서술과 정치의 착종(錯綜)을 보여주는 사례였고 각 세대는 혁명의 과거 속에서 현대 해석을 정립했으며, 이로써 혁명 자체가 각 각의 현대의 일부가 되었다.p.10


그날의 함성은 오늘날에도 파리의 거리에서, 우리가 서 있는 서울의 밤거리에서, 세계의 여러 도시에서 메아리치고 있는지 모른다. 자유를 향한 인간의 열망은 시대와 국경을 초월하여 같은 파장으로 진동한다. 모든 시대는 저마다의 바스티유를 가지고 있고 저마다의 포성을 필요로 한다.(p.181)


저자 : 한스울리히 타머(Hans-Ulrich Thamer)


독일 베스트팔렌빌헬름뮌스터대학 명예교수. 마르부르크대학과 베를린자유대학에서 역사, 고전 문헌학, 정치학을 공부했다. 1971년 마르부르크대학에서 에른스트 놀테의 지도하에 〈18세기 프랑스 사회 비판에 있어서 혁명과 반동 Revolution und Reaktion in der franzosischen Sozialkritik des 18. Jahrhunderts〉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3년부터 2011년 정년 퇴임까지 뮌스터대학에서 역사학 교수로 재직했다. 1986년 ‘역사가 논쟁’ 시기에 출간한 저서 《유혹과 폭력: 독일 1933~1945Verfuhrung und Gewalt. Deutschland 1933~1945》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프랑스혁명을 중심으로 권력과 의례, 상징적 지배, 정치적 소통 등 혁명의 문화사적 측면을 주로 연구해왔다. 주요 저서로는 《NSDAP: 창당에서 제3제국의 몰락까지Die NSDAP. Von der Grundung bis zum Ende des Dritten Reiches》(2020) 《국가사회주의Der Nationalsozialismus》(2002) 등이 있다.


역자 : 나종석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독일 베를린 훔볼트대학에서 역사 및 사회 이론을 연구했다. 옮긴 책으로는 《슬로비스의 모자》(공역) 《자본주의의 역사》(공역) 《일상사란 무엇인가》(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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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당신의 죽음을 허락합니다 - 이토록 멋진 작별의 방식, ‘간절한 죽음이라니!’
에리카 프라이지히 지음, 박민경 옮김, 최다혜 감수 / 스마트비즈니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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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단지 죽음을 다룬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의 책임을 다시금 성찰하게 하는 기록이다. 조력사망은 어떤 이들에게는 여전히 낯설고 불편한 개념일 수 있다.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환자들에게는 때로 마지막 남은 인간다운 선택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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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카 프라이지히 지음, 박민경 옮김, 최다혜 감수 / 스마트비즈니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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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스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BC 460~377)는 '의학의 아버지' 혹은 '의성(醫聖)'이라고 불리는 고대 그리스의 의사이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히포크라테스가 말한 의료의 윤리적 지침으로, BC 5세기에서 4세기 사이에 기록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오늘날에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수정한 〈제네바 선언〉이 일반적으로 낭독되고 있다. 〈제네바 선언〉이란 1948년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개최된 세계의학협회 총회에서 채택된 것으로, 1968년 최종적으로 완성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아래 전문)

"이제 의업에 종사하는 일원으로서 인정받는 이 순간, 나의 생애를 인류 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 

· 나의 은사에 대하여 존경과 감사를 드리겠노라. 

· 나의 양심과 위엄으로서 의술을 베풀겠노라. 

· 나의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 

· 나는 환자가 알려준 모든 내정의 비밀을 지키겠노라. 

· 나의 위업의 고귀한 전통과 명예를 유지하겠노라. 

· 나는 동업자를 형제처럼 생각하겠노라. 

· 나는 인종, 종교, 국적, 정당정파 또는 사회적 지위 여하를 초월하여 오직 환자에게 대한 나의 의무를 지키겠노라. 

· 나는 인간의 생명을 수태된 때로부터 지상의 것으로 존중히 여기겠노라. 

· 비록 위협을 당할지라도 나의 지식을 인도에 어긋나게 쓰지 않겠노라. 

이상의 서약을 나의 자유 의사로 나의 명예를 받들어 하노라."


이 책 『아빠, 당신의 죽음을 허락합니다』의 저자 에리카 프라이지히는 1958년 스위스 바젤 출신의 의사로서 스위스의 작은 마을에서 가정의학과 의사로 일하고 있다. 현재 그녀는 의사로 절반의 삶을, ‘자발적 조력사망’의 전 세계 합법화를 위한 활동에 절반의 삶을 바치고 있다고 한다. 이 책도 그 활동의 일환으로 저술한 것으로 보인다. 프라이지히 박사는 원치 않는 임신으로 인한 낙태가 더 이상 처벌 대상이 아닌 것처럼, 자발적 조력 사망도 그 기준이 완화되고 사회적으로 허용되기를 바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책이 그러한 변화에 작은 보탬이 되길 희망한다. 그녀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우리 모두에게 던진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인해 인간 배아를 죽이는 것은 허용되는 반면, 왜 가혹한 불치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죽음을 간절히 원해도 끔찍한 고통을 끝낼 권리를 갖지 못하는 걸까요? 유럽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죽음에 대한 태도는 반드시 바뀌어야 합니다. 비록 그 변화가 더디고 시간이 오랜 걸린다 해도 말입니다.”

'은퇴 목사' 폴 콜러 주(스위스 바젤 프라텔른, 아우크스트 교구)는 「좋은 죽음이 없으면, 삶이 어그러진다!」는 제목의 〈서문〉에서 당초 저자가 일반 의사로 일할 때 "불치병에 걸린 중증 환자에게 '자발적 조력사망'*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은 의사의 권한에 속할까?에 대한 질문을 수없이 반복했다고 한다. 

* 자발적 조력 사망: 생명 종결의 최종 행위를 의사가 직접 하지 않고, 환자 스스로 의사가 처방한 약물을 투여하여 생명을 종결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이는 환자의 자발적 의사를 전제로 하며, 환자가 최종 결정을 내리고 실행한다. 그 과정에서 의료인이 상담, 검진, 약의 처방 등 전문적 의료 지식을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에 의료인을 조력의 주체로 상정하는 의료조력사 또는 의사조력사로 불리기도 한다.('은퇴 목사' 폴 콜러 주)

이 힘든 질문을 수없이 스스로에게 던진 저자는 수년 간 이 문제와 씨름한 끝에, 마침내 확신을 담아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게 됐다고 밝힌다.



〈서문〉에 따르면 불치병으로 삶의 질이 현저히 떨어진 환자들이 에리카 박사를 찾아와, 사랑하는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유 의지에 따라 고통 없이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했다. 연민 깊은 에리카 박사는 스위스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찾아온 가혹한 운명에 처한 사람들을 보며 수많은 밤 잠 못 이루다, 마침내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더 이상 의사에게 강제력을 띠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원칙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중에는 "나는 누가 요청하더라도 치명적인 약물을 주지 않을 것이며, 그러한 권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는 원칙도 있다.

그러나 에리카 박사의 마음은 2,400년 된 이 금기보다 환자를 향한 연민으로 훨씬 더 기울었다. 의료인으로서 첫발을 뗐을 때만 해도 에리카 박사는 자신이 조력사망을 제안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뿐 아니라 절대 펜토바르비탈나트륨(SP: 진정, 최면, 마취, 경련 조절 등에 사용되는 약물로 높은 용량 투여 시 사망에 이를 수 있다)고 같은 치명적 약물을 처방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자발적 조력사망 과정을 동반하는 일은 일말의 고려 대상으로도 삼지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은 의사 초년생 때 에리카 박사가 가졌던 태도가, 의사로서의 개인적 경험을 통해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를 강렬하게 묘사한다. 너무 솔직해 불편한 부분도 있다. 하지만 저자 에리카는 독자들을 환자나 환자 가족과의 진솔한 대화로 안내하는 동시에, 나아가 자기 내면으로도 초대한다. 책을 읽으며 그의 내면에는 신에 대한 깊은 믿음, 모든 생명의 원천에 대한 신뢰가 깃들어 있음을 느낀다. 에리카 박사와 종교적 신념에 관해 직접 얘기를 나눠보진 않았지만, 개혁교회 목사로서 그가 신뢰할 수 있는 의사임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고 '은퇴 목사' 폴 콜러는 털어놓는다.



이 책은 8개의 에세이로 이루어져 있다. 모두 저자 에리카가 자신의 경험과 조력사망 상담 의사로서의 삶 등에 관한 가벼운 경험과 상담 내용을 글로 썼다. 「나와 아버지」, 「신앙의 문제」, 「삶의 질」, 「이례적 비상 당직」, 「조력사망 상담 의사로서의 두려움」, 「죽음, 그후」, 「나는 누구인가?」, 「라이프서클과 이터널스피릿」 등이다. 책의 번역판이 한국에서 출간되면서 최다혜 한국존엄사협회 회장의 〈감수의 글〉도 눈에 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마지막 권리를 말하다!」란 제목의 글에서 최 회장은 "이 책은 한 스위스 의사의 개인적인 고백에서 출발하지만, 곧 생애 말기 환자들이 겪고 있는 절박한 현실로 독자들을 이끈다"며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며 삶의 마지막을 선택할 권리,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자기 결정'이라는 이름으로 삶을 마무리할 수 있는 가능성,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의료인의 시선과 우리가 마주한 법적·윤리적 공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고 썼다. 이 책은 단지 죽음을 다룬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의 책임을 다시금 성찰하게 하는 기록이라고 최 회장은 단언한다.

첫 장 「나의 아버지」에서 저자는 아버지의 조력사망 도움을 준 경험을 되살린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소파에 편안히 누워, 긴 세월 수많은 시련으로 깊이 주름진 아버지의 얼굴은 이제 고요한 평화를 담고 있다. 죽음의 순간, 머리를 뉜 베개도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것으로 직접 고르셨다. 갈기를 휘날리며 힘차게 달리는 흰 종마가 그려져 있다. 아버지는 폭풍이 시작될 무렵 돌아가셨다. 스스로의 자유 의지에서 비롯된 자율적인 죽음이었다. 아버지의 가장 간절한 소망이, 마침내 이루어졌다."(p.21~22)

이때 저자는 황망한 모습을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아마도 병원에서 자연사일 경우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개인의 집에서 사망했을 경우 경찰에 신고하는 등의 절차가 있을 것이다. 아마 아버지의 딸이지만 의사인 저자가 아버지가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죽음은 외관상 자살 방조이거나 약물에 의한 고의 살인이라고 의심해볼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저자는 이 상황을 이렇게 썼다. "아버지의 딸이자 의사인 내가 아버지께서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죽음을 실현하실 수 있도록 도왔다. 생명을 지키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해야 하는 것이 의사의 본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처음으로 누군가 자기 생을 마감하는 과정을 도왔다."



두 번째 「신앙의 문제」에서는 저자는 아버지의 자기 결정에 따른 죽음에 동의한 이후로, 줄곧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웠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죄일까?" 적지 않은 마음고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밤이면 뒤숭숭한 악몽에 시달리고 아이에게 사고가 나는 꿈을 꾸고 화들짝 놀라 깨어나기도 한다. 매일 아침 자전거에 올라타 학교로 향하는 아이들을 보고 이들 중 누구 하나 사고가 나,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슬금슬금 파고든다고도 털어놓는다.

저자는 의사 생활을 계속하면서 마음의 고통을 한동안 계속 앓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다시 의사 생활에 쫓기듯 살면서 많은 환자들이 죽음 직전에서는 존엄성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망가지는 모습을 계속 보았던 것 같다. 그럴 때마다 저자의 가슴은 아버지에 대한 조력사망에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을 듯하다. 이내 서서히 조력사망 상담 의사의 의지가 굳어가는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의사조력사망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이는 행위가 아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죽고자 하는 의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그 의지가 반복적으로 발현될 때 비난하려 들지 않고 깊이 헤아리는 것이 목적이다. 환자가 죽고자 하는 의지를 논리적으로 이해시키지 못하면 의료조력사 시행은 불가하다."(의사와 전문 간호사가 조력 행위를 할 수 있는 국가, 예를 들어 캐나다의 경우 의료조력사로 명명하며 의사만이 조력할 수 있는 경우 의사조력사로 불린다.) 하지만 극심한 고통 속에 있는 환자에게 평화를 주고 존엄한 방식으로 세상과 작별할 기회를 줄 수 있을 때, 나는 깊은 만족을 느낀다. 그들이 내게 전하는 감사는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 가장 비극적인 경우는 자기 결정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말할 기회도 없이 남몰래 자살을 선택하는 환자들이다.



「죽음, 그후」라는 짧은 글도 눈에 띈다. "죽음의 두려움, 떨쳐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의사조력사망을 통한 세상과의 의식적 이별을 알기 전까지, 저자는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자주 목격했던가. 잠들듯 꿈꾸듯 고통 없이 영면에 드는 일은 매우 드물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저자는 자신의 환자를 통해 이 드문 순간을 경혐했고, 모든 사람이 이렇게 죽을 수 있기를 바라게 됐다고 기술한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거리낌없이 독자들에게 펼쳐놓고 의미를 부여한다. 산골 마을의 요양원 같은 곳에 처음 갔을 때 그곳에 '수용되어 있는' 나이든 환자들의 모습은 쾌활한 모습이나 안정감은 찾아볼 수 없고 병실에 들어서는 순간 섬뜩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럴 때면 겪어보지 못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강제 수용소에서 굶주림과 고통에 시달린 사람들의 모습이 이랬을까 싶다고도 적는다. 너무 말라 뼈만 앙상하게 남은 할머니는 이불을 바쯤 덮고 침대 위에 누워 있다. 쾡한 눈은 감겨 있다. 새하얀 이불이 검은 낯빛과 극명히 대비된다. 늘어지 낙죽 같은 팔의 피부와 뼈 사이에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 같다.(p.182) 

앞서 언급한 한국존엄사협회 최다혜 회장의 〈감수의 글〉 가운데 일부를 인용하며 서평을 마친다. "우리나라의 환자들은 스위스와 같은 먼 나라로 떠나야만 조력사망이라는 선택지를 마주할 수 있다. 하지만 열 시간 넘는 비행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중증 환자에게 그러한 선택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러한 구조는 환자의 선택권을 차단하고 있는 것이며, 이는 단지 법적·제도적 결여가 아닌 방치되고 있는 인권의 사각 지대라 할 수 있다. 더 이상 환자들이 삶의 마지막을 위해 국경을 넘어야만 하는 상황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도 생애 말기 환자들을 위한 더 많은 선택지를 제도화하고, 그 선택이 존중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 책은 단지 몇 개의 사례를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조력사망에 대한 논의를 단순한 찬반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인간 존엄의 실현과 자기 결정권의 확장이라는 관점에서 재조명하게 만든다. 한국 사회에서도 이제 ‘존엄한 죽음’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진지한 사회적 논의가 시작되어야 한다. 아직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멀지만, 이 책이 생애 말기 환자의 권리와 선택권을 보장하기 위한 담론의 이정표가 되기를 바란다. 감수자로서, 그리고 존엄한 죽음을 염원하는 시민으로서, 이 책의 뜻을 깊이 지지하며 그 길에 함께하겠다."



“저에게 인간다움이란 곧 자기 결정권을 갖는 거예요. 그게 내가 짐승과 다른 점이죠. 더 이상 내 일을 내가 결정할 수 없다면 타인이 나를 좌지우지하게 되고, 나는 더 이상 인간답다고 느끼지 못할 거예요. 그래서 지금 여기 스위스에서 스스로 죽기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요.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그럴 수 없어, 안타까워요. 그렇게 되려면 정말 많이 것이 바뀌어야 하겠죠.”(p.167)


저자 : 에리카 프라이지히(Erika Preisig)

1958년 스위스 바젤에서 태어나 8남매 대가족에서 자랐다. 의대 졸업 후 영국 맨체스터에서 학업을 이어 갔다. 이후 스위스의 작은 마을에서 가정의학과 의사로 일하고 있다. 현재 그녀는 의사로 절반의 삶을, ‘자발적 조력사망’의 전 세계 합법화를 위한 활동에 절반의 삶을 바치고 있다. 아버지의 ‘자발적 조력사망’을 겪으며, 인간의 ‘존엄한 죽음’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되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며 살아온 사람이라면, 삶의 마지막 순간 역시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 책이 그러한 변화에 작은 보탬이 되길 희망한다.


역자 : 박민경

이화여대에서 영문학과 사회학을 전공하고 홍보컨설턴트로 일했으며, 현재는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다. 결혼 13년 차 허진호의 아내이자 허윤, 허솔, 허별의 엄마다. 언어와 언어 사이를 잇는 징검다리 같은 번역가로, 마음과 생각을 담담히 풀어내는 에세이스트로, 단단히 서고 싶어 지금도 분투하고 있다.


감수 : 최다혜

한국존엄사협회 회장이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교에서 생물학을 전공하고, 성균관대학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박사 논문에서는 존엄사와 신체불훼손권을 확장한 ‘심신 온전성의 권리’를 다루며, 생애 말기 환자의 자기 결정권과 인간 존엄에 대한 법적 기반을 제시했다. 한국존엄사협회를 설립하고, 2023년 12월 조력사망 관련 헌법소원을 제기하는 등 존엄한 죽음을 위한 제도 개선과 사회적 합의를 이끌기 위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현재 경성대학교 외래 교수로 재직하며 인권과 헌법 교육에도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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